사실 빈 말이다.
언제 봐도 예쁘다.
낙소월은 부끄러운 듯 뺨을 붉혔지만, 싫지는 않은지 비단과 같은 새카만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 맹주님과의 이야기는 다 끝났나요?”
“……뭐, 대강 끝났다.
그나저나 네가 여기에 무슨 일이야?”
“장문인께서 무림맹의 동향을 알아볼 겸, 사형께 별일 없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보내셨어요.”
“그래? 아, 사부님께선 잘 계시고?”
“저희 사부님은 잘 계셔요.”
낙소월이 등을 휙 돌리며 모른 척했다.
“나, 낙 사매……”
“후후, 농담이에요. 사형의 사부님께선 잘 계셔요.
최근에 연락 없이 바쁘게 지내는 사형이 걱정되시는 모양이지만요.”
“이, 이런! 얼른 서신을 보내야겠다!”
주서천의 낯빛이 흙빛이 됐다.
“농담이에요.
여전히 사부님 관련된 이야기면 안절부절 못하시네요.”
낙소월이 쿡쿡 웃으며 짓궂게 미소를 지었다.
“안 본 사이에 무서워졌구나……”
“뭐라고요?”
낙소월이 볼에 바람을 불어 넣으며 눈을 치켜떴다.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했……”
“어머나, 설마하니 천하의 검신께서 사매에게 꼼짝도 못 할 줄은 몰랐네요.”
위험한 순간 구원자가 나타났다.
“아, 파검봉 소저! 도착하셨습니까?”
“도착한 건 어제랍니다. 검신께서 맹주님의 집무실에서 도통 나오지 않아 인사드리지 못했지만요.
아, 혹시 집무실에서 은밀한……”
“시간 따위 보내지 않습니다. 전혀요.
예, 절대 아닙니다. 제 성적 취향은 여성입니다.”
단리화가 이상한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그리고 재빠르게 저지하는 주서천이었다.
그 답변에 단리화는 뺨에 손바닥을 올린 채, 곤란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저라도 남들 앞에서 그리 정열적으로 구애하시면 부끄럽지만요……
게다가, 바로 얼마 전에 배에서 함께 지내며 흔들리는 시간을 보냈잖아요?”
“사형……?”
낙소월이 거의 울기 직전, 아니 터지기 직전인 표정으로 주서천을 쏘아봤다.
사매의 악귀나찰처럼 험악해진 표정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배가 흔들리는 시간이니까!”
“정말, 그리 거칠게 움직여선……”
“입 닥쳐!”
진심으로 입을 다물어 주기를 원했다.
주서천은 다시 일행과 합류했다.
“아이고, 주 대협. 무림맹 회의로 고생 많으십니다.
어디 피곤하시진 않은지요?
제가 그럴 줄 알고 해남도에서 가져온 과일로 음료를 만들었습니다요!”
이의채가 헤헤 웃으며 음료를 건냈다.
주서천은 마침 잘됐다면서 남해의 음료로 아직 툴툴거리는 낙소월을 달래주었다.
“형님이 걱정돼서 무림맹으로 오긴했는데, 혹시 별일 없다면 산동으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제갈승계가 뭐가 그리 초조한지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그동안 간야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기관을 완성하고 싶어서 그런지, 못 참겠다는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그러라고 말하려 했다만…… 네 형은 안 보고 가도 괜찮겠냐?”
“아!”
제갈승계가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질렀다.
“너도 참……”
잘 만나지도 못하는 친형제가 코앞에 있는데도 볼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하기야, 목숨보다 기관지술을 중요시하며 사회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괴인이 아닌가.
괜히 무림에서 기관괴협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마,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제갈승계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런지 헐레벌떡 뛰어갔다가, 몸을 돌려 되돌아왔다.
“그런데 형님께선 어디 계시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랑 가자꾸나.”
제갈수란이 미세한 웃음을 지으며 소매를 잡아당겼다.
천재인지 바보인지 모를 막내가 머리를 긁직였다.
“상단주, 앞으로의 일과 관련해 할말이 있습니다.”
“이 소상 이의채, 주 대협의 말씀은 귀는 물론이고 머리와 가슴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승계나 간야자 어르신이나 집중하면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상단주께서 절 대신해 조정해 주셨으면합니다.”
“물론입니다.
여태껏 해 오던 일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야 할 일이 있어 따라가진 못할 것 같습니다.
대신해서 전쟁의 준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서천은 이의채에게 여러 사정을 설명했다.
“물자가 필요하겠군요.”
전쟁에는 돈이 든다. 그것도 많은돈이 필요하다.
“군량미나 병장기는 금의상단의 주품목이지요.
걱정 붙들어 매고 이소상만 믿어 주십시오.”
금의상단의 시작이 쌀이었다.
그뒤로 군량미, 병장기 순으로 넘어가면서 사업을 불려나갔다.
다른 분야도 우수하나 그중에서도 군량미나 병장기는 압도적이다.
옛적에 시장을 독점했다.
“이 일이 끝나면 제 지분 일부를 넘겨도 괜찮으니, 돈을 아끼지 말아주십시오.”
“저, 저, 저, 정말입니까! 천하제일문파 대화산 유정목의 제자 정도미남 영웅 검신 주서천 대협!”
이의채가 눈을 부릅떴다.
너무 크게 떠서 튀어나올 정도라서 부담스러웠다.
“그리 기분 좋은 말만 골라도 지분 더 안 줍니다.”
“아, 아, 아, 아니! 저, 절 뭘로 보고!”
이의채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을 심히 더듬었다.
“평소대로군요. 다행입니다.”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만약 돈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말했다면, 본인이 맞는지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 * *
날이 지나갈수록 무림맹의 분위기는 침체됐다.
“도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같은 주제로 몇 날을 지새웠는지……”
“정파인들의 시선이 나날이 차가워집니다.”
“하필이면 권동제께서……”
장로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책상 앞에서 회의를 논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위선과 부패를 인정하는 꼴이며, 권동제의 손에 의해 죽는 건 물론이고 사문에 불명예를 끼얹게 된다.
과거야 상층부 전원이 아니라 일부가 문제이기도 했고, 또 신세대가 내부에서 해결한지라 그렇게까지 큰 타격은 아니었다.
교체된 정권의 행보에 사람들이 열광했고, 찬사를 보내어 지지해 주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
창룡, 남궁선유는 한적한 장소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날이 갈수록 얼굴에 새겨진 침통함이 심해져 간다.
“잠시 옆에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남궁선유는 상체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검신……!”
정도의 영웅이자 무림의 절대자.
상천칠좌, 검신 주서천이었다.
남궁선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극진하게 인사하려 했으나, 주서천이 손을 들어 제지하곤 그 옆에 앉았다.
“몸은 이제 좀 어떻습니까?”
“아…… 멀쩡합니다. 신의께서 봐주신 덕분이지요.”
작년, 정마대전 때 남궁선유는 천마에게 당하여 큰 부상을 입었다.
관절이란 관절은 죄다 꺾이거나 부러져 버 렸고, 내상도 상당했다.
다행히 그 후 주서천이 극적으로 등장해 살아남고, 신의의 의술을 거쳐 기사회생했다.
“검신께서 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전 일찍이 죽었겠지요. 저 역시 검신께 큰 빚을 졌습니다.”
남궁선유가 일어나진 않고 상체만 살짝 돌려, 기어코 포권으로 예우를 담아 인사했다.
주서천은 조금 낯간지러운지, 머리를 긁적이곤 옅게 웃었다.
“아닙니다.
반대로 좀 더 빨리 도착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지요.
그리고 같은 오룡삼봉인데 그렇게 극진하게 대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란의 시대의 영웅, 창룡. 아니, 창검웅(蒼劍雄) 남궁선유.’
남궁선유와 이렇게 사적으로 만난 건 처음이다.
그러나 주서천은 남궁선유를 나름 알고 있었다.
남궁선유는 당대 최고의 후기지수답게 전생에서도 다양한 활약을 했다.
비록 전란의 시대의 끝을 보진 못했지만,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또한 고수로서 이름을 널 리 알렸다.
생전엔 상천의 후보로 꼽힌 유력한 천하백대고수였으나 최종결전에서 희생되어 끝내 사망한다.
“아닙니다.
어찌 검신과 절 같은 선상에 둘 수 있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남궁선유는 놀란 듯 손사래 쳤다.
질투로 비꼬거나 괜히 아부하려고 말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순수한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검신 주서천이라 하면 그야말로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의 위업을 달성했다.
약관이란 연령에 화경에 오른 것도 모자라서 정도의 영웅으로 활약했으며, 상천의 좌를 차지했다.
대단하다는 표현만으론 부족했다.
“그에 비해 전……”
남궁선유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꿨다.
무가의 자제, 그것도 오대세가의 소가주 출신에 무림맹주이자 절대고수 남궁위무의 손자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온갖 기대와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했다.
한때나마 협객으로 이름을 알리긴 했지만 최근엔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하고 꼴사나운 꼴만 보여 줬다.
심지어, 검신이 행방불명 됐을 때 불안해하는 제갈수란에게 주서천이 죽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리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자괴감에 몸부림치던 남궁선유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자신은 위로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솟구치 려 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남궁선유의 뒤편으로 여러 사람의 등이 보였다.
‘그래, 지금의 날 있게 해준 건 영웅들이다.’
남궁선유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무림맹주의 손자이며 오대세가를 등에 업었음에도 겸손하며, 올바른 성품에 협의를 중시한 영웅이었다.
전란의 시대에서 피를 흘려가며 때로는 흙바닥까지 굴러 사람들을 도와주고 지켰다.
혼란으로 가득한 전장, 남궁선유는 검성의 뒤를 착실하게 이어 사람들의 우상과 희망으로서 빛났다.
“당신도, 당신의 조부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 검신 주서천이 보증하지요.
세간의 어떠한 평가가 어떻든 개의치 마십시오.”
“검신……”
“흔들리지 마십시오. 신념을 굽히지 마십시오.
세간이 당신을 인정하지 않아도, 제가 인정하겠습니다.”
과거, 암천회에 대해서 말했을 때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다.
낙소월조차도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제갈승계만큼은 달랐다.
설사 누가 믿어 주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믿으니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무림이, 중원이, 그리고 천하가 믿지 않아도 자신이 믿어준다고 말했다.
그게 그렇게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궁선유는 감격에 겨운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신, 아니 창룡 대협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소협이면 충분합니다.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 남궁선유, 검신의 뜻에 동참하겠습니다.”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그다지 좋은이야기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까와 같이 약한 모습은 없었다.
남궁선유의 눈빛은 강직하고, 또 올곧게 빛났다.
주서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삼일 뒤, 평소처럼 산을 올라 약초를 캐내던 약초꾼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시체의 산.
시체, 시체, 또 시체였다.
온갖 곳에 복면을 쓴 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족히 백여 명을 넘는 인원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또한 그 사이에 정갈한 복장의 소년이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이 기묘한 풍경을 자아냈다.
소년, 정백은 약초꾼을 보고 민망한 기색을 보였다.
“이런…… 내 탓에 그만 일터가 엉망이 됐구나.
미안하다, 젊은이여.”
“히, 히익!”
“미안하지만 지금 내가 가진 게 없어서 그런데, 이름을 가르쳐 준다면 피해 보상을……”
“으아악! 귀신이다!”
약초꾼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쳤다.
정백은 약초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곤란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딜 가도 성가신 것들이 붙으니 문제로군.
맹주가 이러한 짓을 저지를 성격은 아니고, 무림맹의 상층부 중에서 날 고깝게 여기는 이들은 한두 명이 아니니…… 어째, 무림은 세월이 흘러도 변한 것이 없구나.”
“전멸한 것도 모자라, 조금도 상처입히지 못했다고?”
당유기가 목소리를 높였다.
“예……”
“끄응!”
당유기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권동제가 남궁위무를 습격하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자객에게 암살을 의뢰했다.
최초에 은퇴한 늙은이 따윈 어려운 일이 아니라며 자신만만하던 자객방도 지금은 난색을 표했다.
하기야,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지만 절대고수, 상천칠좌가 아니던가.
“유령곡은 아직 못 찾았나?”
전설의 암살집단, 유령곡.
그들이라면 상천칠좌의 암살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상하게도 연락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전설이라 하지만 유령곡은 잊혀지지 않았다.
삼백여 년 전보단 덜하지만 여전히 활동했다.
의뢰비가 터무니없이 값비싸나, 확실한 실력과 비밀 보장을 자랑하여 가끔씩 의뢰를 맡기곤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약 몇 년전부터 소식이 뜸해지더니만 최근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마음 같아선 합비에서 상층부를 설득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처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니……’
상층부는 흑영부가 더 이상 수면 위로 밝혀지는 걸 원하지 않고 있다.
혹시라도 당유기가 세가 밖으로 나왔다가 누군가에게 납치당해 여러 기밀이 유출될 것을 꺼려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당유기의 외출금지령이다.
사천은 물론이고 세가 바깥까지 외출을 제재했다.
무림맹 사천지부의 경비 무사 중 삼 할 정도가 현재 당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해 그 아이에게선 특별한 연락이 없느냐?”
불행 중 다행으로 당혜가 무림맹에 있다.
해남도에서 귀환할 검신의 마중을 위해서 대기시켰다.
“없습니다.”
“못난 것, 얼른 검신의 아이나 배지 않고……”
당가의 직통으로서, 흑영부로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현 사태를 맡길 정도는 되지 않는다.
무림맹의 분위기나 혹은 연락용, 그리고 주서천의 아이를 임신하는데 집중하라는 임무 정도만 맡겼다.
“과거의 망령 탓에 이게 무슨 고생이더냐.”
합비, 무림맹.
“권동제께서 보내신 서신을 읽겠습니다.”
제갈상이 서신을 탁자 위에 올리곤 말을 이었다.
“한 달 뒤, 무림맹주 남궁위무 및 상층부는 권세에 취한 위선자로서 처벌을 받으리라.”
“끄응!”
곳곳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추신. 누구인진 모르나 괜히 힘빼지 말 것. 주변인들에게 민폐다.”
“나무아미타불. 무슨 말인지요.”
소림사의 혜노가 염불을 외며 의아해했다.
“무슨 말이긴, 안 봐도 뻔한 일이지. 권동제를 성가시게 여긴 누군가가 자객이라도 보낸 모양이오.”
“이런 시국에 자객이라니!”
콰앙!
팽군평이 거칠게 일어나며 씩씩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일로 무림의 포화를 받고 있건만, 자객을 보내다니 제정신인가!”
“고정하시지요. 팽 장로님.”
아미파의 경인사태가 팽군평을 진정시켰다.
“아직 심증만이지만, 아무래도 당가의 가주이신 독왕께서 보내신 듯 싶습니다.”
“보낸 게 확실하네! 암살은 당가의 특기가 아닌가!”
“그 특기에 기대어 흑영부 소관을 당가에게 일임한 것이 문제요. 그동안 너무 안일했소.”
무당파의 공추 장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독룡. 아니, 배신자 당명인은 너무 많이 알고 있었소.
만약 조금이라도 흑영부의 일을 분담했다면, 그렇게까지 많이 알고 있지는 않았을거요.”
“공 장로님의 말씀대로요.
흑도의 하오문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지 않나.
점조직이다 보니 상층부를 털어도 나오는 건 그리 많지가 않지.”
깨끗하면 깨끗한 대로 문제였다.
누구도 더러운 일을 맡으려 하지 않다 보니 이러한 문제가 생겼다.
한 번 배신했다고 이런 꼴이다.
“무림의 흑막이라는 암천회라는 단체의 등장이나 당가의 소가주가 배신할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소?”
점창일공자, 우백이 지적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양측 다 전무후무한 경우였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현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인사태가 염주를 엄지로 굴리면서 말했다.
“생각, 생각, 생각! 그 생각을 언제까지 할 생각이오?”
팽군평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결론이 나지 않는 회의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콜록, 콜록! 그것도 오늘까지요.”
“그게 무슨…… 아니, 전(前) 군사가 아니요?”
붉으락푸르락해진 팽군평이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문을 열고 새로이 나타난 사람은 현 군사 제갈상의 조부이자 전 군사 제갈중호였다.
“전 군사가 어인 일로……?”
“무림맹의 중대사인데 빠질 수 있나.
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무림맹이 이리도 엉망이니, 조금이라도 손을 빌려줄 수밖에.”
전 군사, 제갈중호의 활약은 사실상 정혈대전이 마지막이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건강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손주에게 인수인계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증거로 낯빛은 새하얗게 질렸고, 눈도 반쯤 감긴 게 당장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원래라면 집 안에서 남은 생을 맞이해야 했지만, 권동제 소식을 듣자마자 이렇게 한 걸음에 달려왔다.
“과거의 망령이 깨어났으니, 이 늙은이 역시 나타나야 하지 않겠나.”
제갈중호 역시 오십 년 전에 전 무림맹의 위선과 부패를 무너뜨리고 개편에 힘 쓴 장본인 중 한 사람.
남궁위무만큼이나 권동제와의 연이 깊었다.
“무슨 계책이라도 있는 거요?”
“있소.”
장로진이 제갈중호의 차분한 눈빛에 집중했다.
“다만 이번엔 이 늙은이의 계책이 아니라…… 맹주께서 생각해낸 거요. 그걸 좀 다듬었을 뿐이지.”
“전 군사께서 건강이 좋지 못해, 대신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갈상이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 더미를 올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