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189/254)

“또한 먹으로 가득한 종이에 먹을 부으면 별 차이가 없으나 백지일 경우에는 차이가 큰 것과 같다.”

사도나 마도일 경우엔 이처럼 논란을 빛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건을 들어도 가벼이 여기며 넘기리라.

“마음을 다스리는 무인조차 증오와 혐오를 버릴 수 없는 법이다. 설사 무의에 의한 깨달음을 얻은 화경의 고수라 해도 마찬가지인데, 그 외의 사람들의 반응이야 볼 것도 없지 않은가?”

“……”

“무림맹 측의 공작 정도만 적절하게 훼방을 놓는다면 그 후로는 굳이 손댈 필요도 없다.

대중이란 논란에 열광하며, 쓸데없는 것에 멱살을 잡거나 심하면 그 인생을 파멸시킬 정도로 어리석다.

후에는 그들에게 사실보다는 자기 주장이 옳다는 것이 중요하지. 참으로 우습지 않나.”

한 번에 보내기 위해서 숨죽인 채 준비했다.

그리고 터뜨린 순간, 대중을 과열시켰다.

바람을 잡았다.

증오와 혐오의 폭풍우를 불러 증폭시켰다.

“정파란 올바른 것과 노자가 중시한 도덕심을 중시하며 명예는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오늘날 사태는 정파 무림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며, 이 일은 설사 주서천이라 해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주서천이 해남도로 떠난다는 걸 듣고 이 계획을 실행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일차적으로 왜구로 이용해 주서천의 임무를 방해하고 이차적으로는 투석기를 준비해 귀향을 막았다.

물론 시간만 끌려는 목적만은 아니었다.

왜구나 투석기로 모사미봉이나 상왕, 신의의 죽음을 노렸다.

“그대는 정말로 무섭구나, 천기.”

당명인이 몸서리쳤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건 이 모든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천기가 계획하고 조정했다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중원 전역의 일을 총괄한다는 점이 믿을 수 없었다.

하늘이 내린 군사, 제갈상도 이 정도는아니다.

괜히 암천회의 두뇌가 아니었다.

비록 암천회의 천적이자 숙적, 원수인 주서천에게 당해 잦은 실패를 겪었으나 결코 보통이 아니었다.

팔을 잘리고 몇몇 대계가 망가졌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완벽한 수를 찾는 모습은 압도적 이었다.

“천기님, 보고드립니다.”

“말해라.”

“광동의 습격이 실패, 주서천이 돌아왔습니다.

상왕, 신의, 모사미봉, 파검봉, 기관괴협 전원 생존했습니다.”

천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실패할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목표 중에서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하니 열이 받았다.

칠성사병은 천기의 눈치를 보고 바로 다음 건을 보고했다.

“권동제가 무림맹에 나타났습니다.”

“호오……”

천기가 곧장 반응했다.

“예상보다 빠르구나.”

“예상보다?”

당명인이 의문이 깃든 눈초리로 천기를 쳐다봤다.

“설마, 천기 그대가 권동제를 움직이게 만들었나?”

정혈대전이나 정마대전에도 요지부동이던 권동제다.

무슨 요술을 부린 것인지 궁금했다.

“아니.”

천기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정파의 위선이 권동제를 부른 거다.”

* * *

‘권동제, 정백(淨白).’

무림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정백은 살아 있는 역사였다.

그의 연령은 일찍이 백 세를 넘었다.

두 세대, 아니 세 세대를 걸치며 무림의 온갖 사건을 겪었다.

‘반로환동(返老還童)의 절대고수!’

언제쯤인지는 모른다.

무공의 극의를 이루고, 그 다음 새로운 경지에 들었을 때 어린아이가 됐다.

노고수가 무공의 극의를 이루어 회춘하는 걸 흔히들 반로환동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반로환동이란 건 사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며 전설상에서나 존재하는 신선의 영역이었다.

두세 차례 환골탈태를 거쳐서 젊어질 수는 있지만, 회춘해 봤자 삼사십 대의 중년이 한계였다.

하나 어째서인지 정백은 소년기 시절로 돌아가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했다.

“강호의 후배가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예의바른 몸짓으로 소년에게 인사하는 모습은 기이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아니, 그 전에 검성이자 무림맹주에게 선배라 불리며 인사를 받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십수 년 전에 은거에 들어가신 선배께서 다시 강호에 출두하시다니, 무슨 일이십니까?”

정혈대전, 정마대전.

정파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에도 권동제가 나타나지 않은 건, 일찍이 속세의 연을 끊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정백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멀었을 땐 그리 깨끗하더니만 어째 넌 나이를 먹을수록 흙탕물이 되는 것 같구나.”

“남궁세가의 가주, 그리고 무림맹주라는 직책이 무공만으로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선배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남궁위무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이상(理想)이란 이상이기에 이상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현실에 타협하게 되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정백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새어 나왔다.

“그래서, 그래서 위선 따위를 저질렀나?”

“……”

“내가 하면 연애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더니, 그야말로 이중 잣대구나.”

정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갈하게 닿은 머리가 꼬리처럼 흔들렸다가 멈췄다.

“만약, 소문이 거짓이었다면 다시 산으로 돌아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마쳤을 것이다. 자식도 제자도 없는 이 늙은이가 무슨 미련이 있겠느냐.”

권동제는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불로불사인 건 아니었다.

젊어도 주어진 수명은 얼마 안 남았다.

“먼 옛날의 일은 아직 기억하고 있느냐?”

“어찌 잊겠습니까.”

“그러면 됐다.”

정백이 몸을 일으켜 몸을 돌렸다.

노인네처럼 뒷짐을 쥐고 천천히 걷는 모습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은 네 차례다.”

어떠한 살의도 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위무는 식은땀을 흘렸다.

“선배, 혹시 암천……”

“그따위 것들이랑 엮지 말거라.”

주먹으로 절대고수가 된 그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뒤에 찾아오마.”

정백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남궁위무는 툇마루에 앉아 정백이 떠나간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월이 흘러도 선배께선 언제나 순수하신 것 같습니다…… 마치, 마치 아이처럼……”

권동제가 나타났다.

이 소식은 곧장 무림 전역을 휩쓸었다.

“권동제라고? 강호 무림의 어르신 말인가?”

“그 은거노인이 무슨 일로?”

권동제의 은거는 상당히 오래됐다.

속세에 연을 끊었다고 알려진 건 십수 년 전이지만, 이미 그 전부터 강호의 활동을 전면 중지했다.

사실상 은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행색이 워낙 특이하다 보니 생존 소식이 알려져 있어 아직까지 상천칠좌로 남아 있었다.

“무슨 일로? 이봐, 자네들 그거 농담이겠지?”

“이보시오, 그게 무슨 뜻이오?”

“허, 참. 자네들 강호에 그다지 관심이 없군그래.

권동제의 강호출두가 어떤 의미인지 말일세.”

“그게 무슨 소리요?”

“권동제가 어떠한 사람인지 이야기해 줘야겠군.”

권동제, 정백.

그는 올곧은 정의이자, 고결한 무인이었다.

“권동제는 명문지파도 신비문파도 아니었네.

태생부터가 천한 삼류 무인이자 낭인에 불과했지.”

“낭인 출신? 허, 대단하군.”

절대고수 중 낭인 출신이 없는 건 아니다.

하나 그 경지에 다다르기에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불세출의 천재에 절세신공을 수련한다 하도 오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현경이다.

헌데 낭인, 그것도 삼류 무인이었던 무인이 절대고수가 됐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릇 낭인이라 하면 돈에 눈이 멀고, 흙탕물을 구르며 더러워지기 마련이네만 권동제는 달랐네.

태생 고아임에도 불운을 탓하지 않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정의롭게 살아왔네.

그 성격 탓에 젊었을 적에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네만, 무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과 끊이지 않은 노력 덕에 살아남아 정진하여 고수가 되었지.”

그저 단순히 고수만 된 게 아니다.

권동제는 약자를 도와 협객으로서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허어, 그것 참 대단하구려.

그야말로 위인이자 영웅이 아니오?”

“나처럼 나이 든 늙은이들 중에선 모르는 자가 없을 것이네.”

“그 다음은 어떻게 됐소?”

“어흐흠!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목이 좀 마르구먼……”

“점소이! 여기 제일 빨리 되는 요리랑 술!”

“젊은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구먼그래.”

“칭찬은 됐으니까 이야기나 계속하시오.”

이야기꾼은 술로 목을 축이면서 말을 이었다.

“당시 협객 혹은 오룡삼봉으로 추앙받던 권동제였으나, 그 후의 삶도 그리 녹록지는 않았네.

정파건 사파건 간에 명문정파란 것들이 가만두지 않았지.”

아무런 연고지 하나 없던 낭인이 고수가 됐다.

강호란 힘이 곧 법칙인 곳.

이 힘이란 세력 또한 포함됐다.

혼자 있으면 우습게 여기기 마련이다.

정백은 무림맹에 초청받아 방문했으나, 출신이 천하다는 연유만으로 차별 및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누구보다 올곧았던 그에게 정파의 위선 어린 행동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어. 구파일방이건 오대세가건 간에 잘못된 걸 고치겠다며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닌 탓에 정파 무림에서 거의 퇴출당할 분위기였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소?”

“소위 말하는 윗분들은 황소처럼 날뛰어대는 미친놈을 내쫓으려 했으나, 당시 협객으로 이름난 권동제를 대놓고 건드릴 수 없어 그 대신 불가능한 임무를 맡겼지.”

사람들은 이야기꾼에게 모여들었다.

마치 자기 전 할아버지에게 동화를 듣는 아이와도 같았다.

“하나 권동제는 예상과 다르게 불가능한 임무를 하나도 빠짐없이 완수시켜 정파 무림에 인정받았네.

그후 무림맹의 철퇴가 되어 약자를 돕고, 악한 이를 찾아 주먹으로 처벌하고 다녔지. 하지만……”

“하지만?”

“어느 날, 권동제는 임무 도중 자신이 이용당한 것을 깨닫게 되네. 평화와 안녕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던 임무 중 반이 무림맹의 썩어버린 고인물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었단 걸 말일세.”

임무 중에선 실제로 정파 무림, 아니 정도를 위한 것도 존재했다.

하나 그중엔 사적인 일도 존재했다.

너무나도 올곧고, 더러움 하나 없는 순수한 무인은 몇몇의 권위자들에게 이용당하기 좋은 수단이었다.

“환멸을 느낀 권동제는 분노했고, 위선 속에 숨은 부패한 이들을 찾아 주먹 하나로 철퇴를 내렸네.

그 행동에 몇몇 이들이 찬동하여 합류하게 되는데 그중 유명인을 꼽으라면 바로 태극검 운광, 그리고 현 무림맹주 남궁위무일세.”

권동제가 아무리 대단해도 한낱 개인일 뿐이다.

전체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지자 및 세력이 필요했다.

비록 젊어 권위자는 아니었어도, 무당파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지지해 준 덕분에 힘이 될 수 있었다.

“오오오……”

“이후 권위에 맛 들려 사리사욕을 채우던 부패한 위선자들은 권동제를 비롯한 신세력에 의해 무너지게 되고, 무림맹은 개편을 맞이하네.”

“권동제는 어떻게 되었소?”

“당시 정도의 내전을 겪으면서 상천칠좌가 된 권동제는 일시적으로 무림맹주로 추앙받았으나, 높은 자리엔 맞지 않다면서 거절하고 조용히 생활하네.

그리고 십수 년 전쯤에 이러한 말을 남기고 은거하지.”

나 같은 늙은이가 있어 봤자 젊은이들에게 방해만 될 뿐이다.

또 무얼 누리기에는 너무 지쳤으며, 뒷일은 젊은이들이 이어서 잘 할 테니 속세와 연을 끊고 남은 생을 맞이하겠다.

단, 또 다시 정도가 어긋난다면 강호에 나타나 그 죄를 묻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한때 낭인이었으며, 정도의 위인이던 과거의 영웅, 권동제는 그렇게 역사의 뒷길로 종적을 감췄다.

“즉, 권동제가 다시 강호에 나타났다는 건……”

“무림맹의 위선, 흑영부가 진실이란 게지.”

* * *

때때로, 무림이 한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경우도 존재한다.

상천칠좌, 권동제가 그리하였다.

권동제라는 이름의 폭풍이 무림을 휘몰아쳤다.

“권동제가 나타나?”

“그 말은, 현 무림맹이 썩었다는 뜻이 아닌가!”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궁위무는 한때 권동제를 도와서 부패함을 바로잡지 않았나?”

“참 나!”

“이 위선자 새끼들!”

권동제는 위선을 벌하는 정의의 철퇴요, 영웅이었다.

오래됐지만 무림인들은 아직 그 말을 기억했다.

정백은 등장만으로 무림을 격동시켰다.

현 무림맹에 대한 신뢰도는 낮아지고, 비난과 추궁이 끊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전 지방이 들끓었다.

무림맹에 소속된 정파 연합이 어떻게 된 일이냐면서 캐물었다.

협력 관계인 사도천조차도 일부에선 ‘저 위선자 새끼들이랑 동맹 맺어도 괜찮나?’ 라는 말이 나왔다.

“……하?”

주서천 역시 권동제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당황스러웠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소식이었다.

‘권동제, 정백……’

툭 까놓고 말해서 생각지도 못했다.

솔직히, 너무 오래된 탓이었다.

정백의 추정 연령은 백십에서 백이십 세.

약 백 년 전에 강호에 출두하였고, 여러 일을 겪으면서 칠팔십 년 전쯤부터 무림맹에게 이용당했다.

그 후 알려진 대로 남궁위무 등과 의기투합하여 부패한 무림인을 처벌하여 정권을 교체한다.

그리고 오십년 전 쯤, 몇몇 지인의 방문만 받으며 살다가 완전히 은거하게 된다.

‘설마하니 권동제가 아직도 살아있을 줄이야!’

전생의 경우, 권동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육 년 후, 스물여덟 살의 해에 암천회가 등장하여 중원무림 세력을 위협했다.

당시 칠검전쟁을 시작으로 기나긴 전쟁으로 세력이 감퇴한 정파 무림은 권동제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어떠한 답도 받지 못했다.

정도가 어긋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천명을 다하고 생을 마감한 것이라고 추측해서다.

상천의 좌에서도 이후 권동제가 제외된다.

현생에서도 잊혀져 가던 사람이지먄 두 번째 삶까지 감안하면 정말 옛날 사람처럼 느껴졌다.

‘최악이다.’

시기조차 좋지 않았다.

만약, 평소의 때라면 이 정도까지 난리나진 않았을 것이다.

하나 흑영부 논란으로 영향이 커져 버렸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

천기가 비웃는 게 보였다.

“당장 합비로 간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일행을 내버려두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동행하고 싶어도 속도의 차이가 난다.

주요 일행과 떨어지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인근의 무림맹 유령곡에 연락해 호위를 요청했다.

주서천은 경공을 극성으로 펼치며 사흘 밤낮을 수면도 식사도 거른 채 합비의 무림맹으로 향했다.

합비, 무림맹.

무림맹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무림맹은 진실을 밝혀라!”

“흑영부에 납치 고문된 명부를 공개해라!”

정문과 담에서부터 삼 장 밖으로 무림 단체가 팻말을 들고 와선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를 벌였다.

평소 무림맹 소속이란 걸 자랑스럽게 여기던 무사들도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제갈상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인사했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자서 그런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쾡하고 눈 밑에는 검은 기미가 꼈다.

“어서 와라.”

남궁위무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제갈상이 쓰게 웃으며 물었다.

“소문만 들었습니다.”

하오문이나 유령곡, 금의상단의 정보조차 이용하지 않고 곧장 달려왔다.

본인에게 듣는 게 확실하다.

제갈상이 사정을 설명하려 입을 열었으나, 남궁위무가 손으로 제지하곤 직접 이야기해 줬다.

“……후우!”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권동제가 나타난 것이 최악이었다.

“설득은 해 보셨습니까?”

흑영부는 필요악이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잘못되긴 잘못됐다.

그러나 그 잘못된 것으로 수많은 이들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하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득?”

남궁위무가 바람 소리를 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이러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게야.”

“정말로…… 첩첩산중이로군요.”

암천회와의 결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필이면 상천칠좌가 적으로 돌아섰다.

단순한 절대고수도 아니다.

권동제는 개인이지만 그 영향력은 결코 개인 따위가 아니었다.

무림맹주나 사도천주 이상으로 무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검신과 견줄 정도로 오래된 영웅이었다.

‘암천회가 아니란 걸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겨야겠구나.’

하기야, 권동제가 암천회라면 권동제가 아니다.

애초에 이 정도의 영향을 끼칠 수도 없다.

“이출이 생각나는군요.”

천재 군사의 입에서도 한숨이 흘러나왔다.

웅권협, 이출.

중소문파 출신인 그는 정파 무림의 차별 및 위선에 질려 무림맹을 배신하고 암천회의 천추성이 됐다.

“암천회의 끄나풀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이출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다.

의도는 그럴 듯해도 결국 대학살을 저지르고, 무림을 지옥으로 만든 암천회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권동제는 다르다.

그야말로 영웅.

어떠한 사사로운 이익도 바라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추대를 거절하고 은거했다.

“무림인들은 무림맹에 실망할 것이고, 정도(正道)로 이어진 결속력은 약해질 것입니다.

깊숙하게 침투한 암천회의 끄나풀은 이 사태를 정사에서 철저히 이용하겠지요.

또한 암천회 외의 기회주의자들이 날뛰어 더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주서천이 침음을 흘렸다.

“무림맹은…… 분열할지도 모릅니다.”

무림맹, 아니 정파의 위선이 권동제를 불렀다.

“총체적 난관이로군요.”

제갈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서천이 지적한 대로였다.

“애초에, 흑영부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권동제는 왜 이제와서 그 존재를 거론한 것이지요?”

“정파의 어둠은 먼 옛날부터 존재했다.

다만 세대에 걸쳐 이름을 바꿔가며 사라지거나 나타나고, 혹은 숨어 있었을 뿐이지.”

약 오십년 전, 정백은 위선과 부패로 물든 몇몇의 상층부를 박살내면서 조직을 개편했다.

이 과정에서 흑영부의 역할을 맡던 전 조직 역시 사라졌다.

“그 잔재를 모아 이름을 바꾸고 되살린 것이 흑영부로군요.”

남궁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개편 당시 정백은 떠나기로 결정한 뒤였다.

“선배께선 조직의 개편 등에는 나를 비롯한 몇몇의 사람들에게 더 제격이라면서 자리를 양보했다.”

무책임하게 책임만 넘긴 것만은 아니었다.

권동제 나름대로의 생각도 있었다.

“왜 떠나시려는 겁니까?”

“지치기도 지쳤지만, 무공 외에는 많이 서툴다는 것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나 같은 사람이 앉아 봤자 허수아비일 뿐이다.

자격이 되지 않으면 괜한 폐 끼치지 말고 떠나야지.”

“하지만……”

“위무야, 아니 맹주여. 현재가 과거가 됐구나.

앞으로 미래는 과거가 아닌 현재가 이끌어나갈 것이다.

그러니 넌 과거의 대표자로서 미래와 현재의 젊은이들을 위해 경험과 지식을 가르쳐 주었으면 하는구나.

그러면 아무래도 부족한 내가 방해가 되지 않겠느냐.”

권동제는 일찍이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뒷일을 맡겼다.

또한 이대로 강호 무림에 남게 된다면 큰 명성 탓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은거를 결정했다.

애초에 큰 욕심도 없을뿐더러 많은 세월을 보냈기에 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현인이로다.’

권동제, 정백의 현명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정파의 썩은 뿌리를 뽑아낸 영웅이거늘,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도리어 미래를 위해 물러났다.

결과적으로 정백의 선택은 옳았다.

만약 아직까지 강호 무림에 남아 있었다면 추종 세력을 포함한 무림인들이 남궁위무의 자격을 계속 운운했을 것이다.

‘정작 그 믿고 맡긴 사람이 전보단 심하지 않지만, 고생해서 무너뜨린 걸 부활시켰으니……’

마음으로는 그 심경을 이해할 순 있었다.

‘하지만……’

그러나 머리론 이해하지 못했다.

무림맹주로서의 일임을 받은 남궁위무가 할 일은 한 번 부서진 무림맹을 개편하고 정리하는 것이었다.

다만 정공법으로서는 이 과정이 너무나도 오래 걸렸다.

사파나 마도이세가 엉망이 된 무림맹을 호심탐탐 노리던 탓에 하루라도 빨리 자리를 잡아야 했다.

무엇보다 혼란을 틈타 침투시킨 첩자를 찾아야 했고, 연루된 관계자를 찾으려면 고문이라는 방법도 써야했다.

그 외에도 기성세대의 위선과 부패의 잔재들 역시 찾아내서 처벌해야 했다.

문제는 이들이 눈치 빠르게 증거를 없앤 탓에 다른 수단으로 처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동원된 게 정파의 어둠, 흑영부였다.

필요악인 그들의 소멸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십 년 전의 사태가 다시 벌어질 겁니다.

그 대상은 맹주님을 포함한 장로진이 되겠지요.”

막을 수 없다.

설득도 불가능하다.

그러면 대비할 뿐이다.

“다만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엔 그 누구도 그분을 막아서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제갈상이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과거의 정백은 상천칠좌가 아니었다.

신세대에 어떠한 연고지도 없는 삼류 무인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무림의 절대자이며 전 세대의 영웅인 동시에, 정의로운 집행자였다.

무위도 무위지만, 세간에 질서이자 정의로 알려진 이를 막아서다가는 위선자로 몰릴 수가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목숨보다 명예나 평가를 중요시하는 정파가 막아설지가 의문이었다.

“암천회는 이 기회를 노릴 겁니다.”

주서천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주 대협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무림맹이 분열하는 것만큼 좋은 기회도 없겠지요.

권동제 어르신의 방문 시기에 맞춰서 무림 침공을 진행할 겁니다.”

주서천과 제갈상이 남궁위무를 쳐다봤다.

남궁위무의 얼굴 가득 주름이 깊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사천, 당가.

“……”

당유기는 개탄을 금치 못했다.

흑영부, 아니 정파의 어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 당가다.

단연 이번 사태에 큰 반응을 보였다.

“왜 갑자기 과거의 망령 따위가 나타났느냔 말이다!”

오십 년 전, 무림맹의 개편 전의 일은 당가도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으나 어디까지나 선대의 일이었다.

당유기는 겉모습은 노년처럼 보이나 중년이다.

오십 년 전이면 아직 진실을 알기도 전의 일이었다.

당시 가주는 조부였으며, 소가주인 부친이 무림맹에서 지내며 정파의 어둠으로 지냈던 시기였다.

또한, 당가 역시 무림맹의 정권교체의 중심에 있어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직집적인 원인제공이 된 조부의 경우 권동제가 시작한 정권교체에 휘말려서 끝내 목숨을 잃었다.

친부의 경우엔 조부에게 세뇌당한 것이라면서, 억울한 피해자들을 돕는 걸로 정상참작을 받았다.

얼마 뒤 신세대의 무림맹의 부름을 받고 다시 정파의 어둠이 되어 힘쓰게 됐지만 말이다.

사실, 흑영부의 소관 대부분이 당가에게 돌아간 것에는 오십 년 전의 일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알다시피 당가가 쇠락하기 전에는 무림맹의 다양한 세력이 분담해 가면서 흑영부를 도맡아 왔다.

사문의 범죄자나 혹은 당가처럼 개인이 대가에 걸맞은 보상을 원하여 자의로 맡곤했다.

물론 그 전에도 진작 쇠락한 당가 출신이 많아 실권을 잡기는 했으나, 지금처럼 압도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십 년 전의 신세대, 그러니까 현재의 기성세대가 위선과 부패를 청산하겠다며 뒤엎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더러운’ 일을 할 만한 사람들이 죄다 죽어버렸고, 권동제가 떠난 뒤 흑영부를 부활시켰으나 사람이 부족했다.

신세대는 과거 기성세대의 위선과 부패에 질리거나 피해를 입게 된 사람들뿐이라, 권하기도 묘했다.

마침 정파의 어둠을 유구한 역사속에서 이어온 일족들이 건재했고, 그들이 바로 지금의 당가다.

“쯧……”

당유기에게 있어서 권동제는 가문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어준 사람인지라 딱히 원수로 느껴지지 않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만, 병신 같은 아들 하나 낳아선 궁지에 물리는구나.”

원수는 권동제가 아니라 아들, 당명인이었다.

당명인이 암천회에 몸을 담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흑영부 논란 따위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에 대한 원망이 짙어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 데려와 몇날 며칠을 고문하고 싶었다.

“당해 그 아이를 소가주로 임명했어야 한다.

나의 판단 실수로다.”

당유기에게 누가 장남이냐, 아니면 남자냐 여자냐 같은 건 시시콜콜한 사안이었다.

장남이 생각 이상으로 천재였으며, 또한 정신력이나 무공 자질이 대단하여 소가주로 임명했을 뿐이다.

설마하니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검신의 아이만 임신하면 좋으련만……”

설마하니 전설상의 영물, 인면지주를 만나고 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더욱 놀라운 건 인면지주와 협상에 성공하여 정기적으로 독의 재료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또한, 그것도 모자라 딸아이가 인면지주의 내단의 일부를 흡수하게 되어 높은 성취를 이룬 것이다.

비록 무공의 극의를 이루진 못했지먄 주변인들이 너무 괴물일 뿐이다.

결코 낮은 경지가 아니었다.

연령을 생각해 보면 마흔도 되기 전에 화경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할 수 있었다.

“당가가 이제 막 날아오르려 하는데, 과거의 망령 따위에게 방해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권동제는 죽어야한다.”

당유기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암천회? 길어봤자 삼십 년, 사십년 밖에 되지 않은 것들이 암천이다 뭐다 하다니 가당치도 않도다.”

흑영부는 당가의 소관.

비록 당유기가 현역에서 은퇴하긴 했으나 아직 그 실력이 어디간 건 아니었다.

현역이었던 당명인이 뛰어난 천재였다곤 해도, 후기지수인 이상 전 담당의 조언이 필요했는지라 비록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어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어쨌거나, 문제의 흑영부는 현재 전 담당자였던 당유기가 당명인을 대신하여 운영 중이다.

자연스레 암천회에 관련된 기밀 정보도 알게 됐다.

당유기는 권세를 위해서라면 딸자식도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냉혈한이다.

정도인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 실력만큼은 확실하며, 누구보다 무림맹의 현 정권을 지지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암천회와 권동제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배인지라 주서천과도 협력 관계로 지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암천회.

“크흐흐흐!”

천기의 입가에서 음산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드디어 예상한 대로 움직이는구나!’

자잘한 일을 제외하고 대계가 성공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항상 중요한 일에는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숙적, 주서천이 간섭하여 훼방을 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마침 운좋게 주서천이 해남도로 떠났고, 이를 노리고 준비한 걸 실행했다.

“잘했다, 천기여.”

암천회주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칭찬했다.

주서천과 관련된 이후 듣지 못했던 칭찬.

정말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환희의 감정에 몸이 무심코 떨릴 지경이었지만, 천기는 기쁨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답했다.

“아닙니다, 회주님.

맡은 바 임무를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지요.”

“무림 침공의 준비는 문제없느냐?”

“물론입니다.

현재 칠성사 전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고 있습니다.

재력, 권력 무력으로 포섭한 배신자들이 각지에서 명령 하달을 기다리는 중이며, 요광과 천추도 제 일을 돕는 중입니다.”

“좋다. 드디어, 이 기나긴 준비를 끝내고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구나.”

암천회주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압도적이고 위엄 어린 눈빛에 천기가 몸을 떨었다.

개양, 그 천마조차 회주님께 굴복했다.

‘주서천,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회주님 앞에선 한낱 개미새끼일 뿐이다. 무림 또한 마찬가지리라.’

암천이 무림을 지배할 때가 왔다.

“권동제로 인하여 무림맹, 아니 정파가 분열하는 날이 곧 암천이 도래할 날이 될 것입니다.”

며칠 뒤, 무림맹.

무림맹주 집무실이 위치한 건물을나온다.

해는 지났지만 아직 겨울이라 눈이 내렸다.

새하얀 눈이 바닥에 쌓이는 걸 구경하다가, 옆에서 사박사박 하고 눈밟는 소리가 났다.

“사형!”

“어이쿠!”

푹신한 감각에 무심코 입 꼬리가 올라갔다.

“낙 사매.”

“오랜만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사매, 낙소월이 미소 지었다.

“잘 지내셨어요? 다친 곳은 없어요?”

인사도 잠시, 낙소월은 주서천의 몸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걱정스러운 눈치를 보였다.

“당연하지. 날 뭘로 보고?”

“툭 하면 행방불명되고, 사라지는 사형이죠.”

낙소월이 쌍심지를 켜면서 엄한 표정을 지었다.

“낙 사매는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진 것 같네.”

“그,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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