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를 올라가기 전, 조양선이 불길한 듯 물었다.
정파인으로서 한낱 해적 따위에게 겁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상식선이라는 게 있다.
남해 인근을 주름잡는 왜구, 방준은 해남검파는 물론이고 수군까지 골치 아프게 하는 대해적이었다.
최초에는 중원에서 동행한 무사들이 돕는다고 했었는데, 해변에 오더니 말이 갑자기 바뀌었다.
주서천이 정찰만 하고 오자고 해서 배를 타고 안내했는데, 해적선을 보더니 그냥 습격하자고 했다.
단연 조양선은 기겁하면서 거절하려 했으나.
“어머나, 정말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죠? 저, 침실에서만 목소리 크고 강한 남자는 질색인데……”
‘에라이, 이 빙신 같은 놈!’
단리화가 두툼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애톳한 눈길을 보내자마자 움직인 자신이 있었다.
결국 한 척도 아니고, 무려 여섯 척이나 있는 해적선 중 한 곳에 오르게 됐다.
“아이고, 이제 좀 살겠네.”
주서천은 조양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상 위에 올라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환하게 웃었다.
“살아?”
“하하하!”
선상 위의 해적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중에는 왜인이 많아 외국어도 섞여 있었다.
“꿀꺽!”
“히야, 예쁘다.”
그러나 그 웃음도 단리화가 선상에 오르자마자 바뀌었다.
하나같이 넋나간 얼굴로 침을 흘렸다.
욕망 어린 그 눈은 추악한 색욕으로 번들거렸다.
‘끄, 끝이다!’
조양선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무리 자신이 절정의 무인이라고 할지라도, 육지도 아닌 해상 위의 선상에서 이 정도나 되는 인원과 싸우는 건 무리였다.
대충 봐도 한 배에 백여 명인 데다가, 근처의 해적선에도 그만큼의 숫자가 보였다.
“바다를 오가면서 별 일을 다 겪었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는 또 처음이구나.”
쿵 쿵.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울렸다.
거친 파도에 배가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발걸음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남해왜구, 방준……!”
남해를 대표하는 왜구이자 해적, 방준.
몸은 허연데 얼굴만 검은 걸 보면 틀림없다.
남해의 해적으로 악명 높은 방준이 틀림없었다.
겉에서부터 느껴지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절정 고수인 조양선조차 압도될 정도였다.
“크흐흣!”
방준은 음욕 어린 눈으로 단리화를 훑어봤다.
그 눈길이 닿은 것만으로도 소름이다 끼칠 정도였으나, 단리화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으로 화답했다.
“오호, 고년 봐라.”
방준의 눈빛에서 감탄과 호기심이 떠올랐다.
보통이라면 해적에게 둘러싸여 겁먹거나, 혹은 음욕 어린 시선에 소름 끼쳐 하며 치욕스러워하기 마련이다.
헌데 두려워하기는커녕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웃음을 지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미모가 용궁에서 산다는 선녀조차 질투할 정도로 아름다운데, 배포 또한 보통이 아니로구나. 좋다, 내 특별히 너를 이 방준의 배필로 삼도록 하겠다.”
“말이 길구나, 방준.”
스릉!
주서천이 검을 빼들자, 단리화와 조양선도 뽑았다.
“……해남검파?”
방준은 조양선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좌수검에 기울인 검날이라면 해남도는 물론이고 중원을 통틀어도 해남검파 밖에 없다.
실력이야 둘째치고, 소속이 신경쓰였다.
“근처에 정말로 아무도 없는지 확인해 봐!”
방준은 그저 힘만 무식한 해적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아비의 곁에서 가업(?)을 이어받아, 여러 가지를 배워오며 살아왔다.
그 덕에 아는 것이 많고 눈칫밥도 상당해 여태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걱정 마라. 우리 밖에 없다.”
주서천은 검을 빙글 돌려 바로 잡았다.
“파검봉.”
“단 누나도 괜찮은데, 어때요?”
단리화가 죽립을 바로 쓰며 대답했다.
“……누나?”
주서천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단리화는 스물아홉이다.
연령상으로는 누나가 맞다.
물론, 정신적인 연령만 보자면 주서천이 더 위였다.
하지만 ‘난 사실 백 살이 넘어.’ 라는 말을 해봤자 미친놈 취급 받을게 뻔했다.
“별로인 모양이네요. 아쉬워라.”
“아무래도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주서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사이면 어떤 사이죠? 혹시 육체적인 관계를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검신께선 정말 밝히……”
“놈들에게나 집중합시다.”
주서천이 한숨 쉬면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왜 그 당혜가 단리화에게 꼼짝 못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 이 새끼들이 지금 뭐라는 거냐?”
방준이 분노를 넘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물음에 해적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다른 곳도 아닌 배 위에서 백여 명에게 포위당했다.
결코 한가하게 농 따위를 교환할 상황이 아니었다.
“역시 미친놈들인 모양이구나. 됐다.
남자 놈들은 죽이진 말고 감옥에 넣어두고, 여자는 상처 없이 잘 제압해라. 내가 저년이랑 선실에서 보낼 동안, 남자 놈들을 족쳐서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봐라.
특히 저 해남검파 제자놈을 조심해라.”
“예!”
스릉! 스릉!
여기저기서 병장기를 빼 드는 소리가 들린다.
햇빛에 반사되는 도신(刀身)은 외날의 칼이었다.
왜구답게 그들의 병장기는 삼 척 가량 정도의 왜도(倭刀)였다.
종종 창을 쥔 자도 있었으나 적은 편이었고, 건너편 해적선에선 활을 들고 있는 자도 몇몇 보였다.
“육지와 다르게 선상에서 움직이는 건 좀 성가실 겁니다.”
과거, 수림구채이자 천하백대고수였던 도수창병에게 습격받았을 때의 경험이 떠올라 조언을 했다.
“우두머리를 제압할 테니, 그동안은 적당하게 버티시면 됩니다. 그럼 가겠습니다.”
주서천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뭔……?”
방준이 순간 흠칫 놀랐다.
사람이 귀신도 아닌데 갑자기 사라졌으니, 놀라지 않는다면야 그게 더 이상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방준은 순간 오싹함을 느끼곤 호신강기를 펼쳤다.
째앵!
“어?”
방준의 눈앞에 나타난 주서천이 눈을 껌뻑였다.
“허, 참.”
헛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경의 고수나 되는 자가 해적이라니.”
무공의 극의는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정도의 무인이 해적이 되어 노략질을 일삼고 있으니, 어이없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꼭 그렇게 얼토당토 않은 것도 아니었다.
왜구는 약소한 해적 집단이 아니다.
원나라와 명나라의 멸망과 건국 기간에 동해와 남해를 해집으며 대대적으로 약탈할 정도로 거대했다.
건국 초에도 왜구에 대한 토벌전이 종종 있었고, 최근에도 약탈로 문제가 되어 관군에서 대대적인 토벌전을 검토 중에 있을 정도였다.
왜구는 중원만이 아니라 옆 나라인 조선이나 왜에서도 노략질을 행하는 무력집단이다.
그 집단에서 남해를 담당하는 우두머리가 약하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적림십팔채-수림구채가 괜히 왜구 탓에 바다로 진출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방준은 대해적인 방국진의 늦둥이로 태어나면서 어릴 적부터 온갖 지원을 받아오면서 자랐고, 개인으로도 재능이 뛰어났으며 노략질을 통해 수많은 싸움을 해 오기까지 했다.
“화경……?”
방준도 주서천을 보고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눈앞의 미친 애송이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제 다시 보니 경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놀라운 감정은 빈틈을 만들어 낸다.
방준은 해적을 우습게 보는 점을 이용해 방심을 이끌어 내거나, 혹은 놀란 감정을 이용해서 적의 목숨을 끊어왔기에 더더욱 잘 알고 있었다.
“애송이, 제법이구나.”
방준은 급히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쪽을 칠 수는 없지.’
자존심만이 문제가 아니다.
해적 나아가 도적의 세계는 얕보이면 끝이다.
언젠가는 배신을 당한다.
방준도 한때 얕보였다가 믿었던 부하에게 어깨를 찔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놀라운 감정을 추스르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누굴 거치지 않고 나에게 대뜸 달려오다니, 버릇을 고쳐줘야겠군.”
‘혹여나 화경 중에서도 최상승이라면, 조금이라도 지치게 만들어야 할필요가 있다.’
방금 전에 호신강기를 급격하게 펼쳐서 그런지 기맥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추스를 시간도 필요했다.
방준은 주서천을 무엄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면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자를 족쳐서 내 앞으로 데려와라!”
방준의 외침을 시작으로 해적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단리화의 주변으로 해적들이 몰려들었다.
“크으, 고년 참 예쁘네.”
“선장이 맛보고 나도 맛보게 해주지 않을까?”
“아서라, 저년 미모는 질리지도 않잖아.”
해적이라 그런지 말이 거칠었다.
눈앞에 여인이 있다 보니 온갖 성적인 모욕 등 음담패설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요.”
그러나 정작 장본인인 단리화는 알아듣지 못했다.
“모르셔도 괜찮은 것들입니다.”
해남도는 옛적부터 타국과의 교류가 제법 잦다.
그러다 보니 타국의 언어를 익힌 자도 몇몇 있었다.
조양선이 그랬다. 그는 왜어를 그럭저럭 쓸 줄 알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뜻은 몰라도, 대충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 같지만요.”
단리화가 입가에 미소를 그려내며 진기를 끌어 올렸다.
“좋아요. 원하는 대로 극상의 기분을 느끼게 해드리죠.”
“얘들아, 이 계집 상처 나지 않도록 조심……”
퓨붓!
“끄, 끅!”
해적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목을 붙잡았다.
목에 새겨진 검상에선 피가 꿀럭꿀럭 넘쳤다.
음욕으로 가득 찼던 그 눈은 경악으로 부릅 떠졌다.
“과연, 검신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네요.”
단리화가 검을 회수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원래는 목을 베려고 했으나, 예상과는 다르게 빗나갔다.
실수가 아니었다. 배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이 계집년이!”
일곱 명의 해적이 단리화에게 달려들었다.
“소저!”
조양선이 다급하게 외치며 도우려했다.
그러나 그게 곧 쓸데없는 걱정이란 걸 깨닫게 됐다.
둥실.
단리화가 물 흐르듯이 움직이며 보법을 펼친다.
언뜻 보면 느려 보였으나 신속(迅速)했다.
언뜻 보면 살짝 떠오른 것처럼 보여 나는 듯했다.
‘청성파의 비류보(飛流步)!’
조양선이 단리화의 움직임에 눈을 떼지 못했다.
수준 높은 보법도 보법이지만, 더 대단한 건 그 다음에 펼쳐지는 검초다.
쐐―액!
단리화가 검을 수평으로 스윽 그었다.
검신에서 흘러나온 시퍼런 검기가 얇고 넓게 퍼져 파도처럼 주변을 훑는다.
퓨뷰붓!
“크허억!”
“아악!”
푸르스름한 물결은 부드러웠으나, 잔혹했다.
검기로 이루어진 물결에 휩쓸린 이들은 온몸에 난도질당한 것처럼 검상이 남으며 피를 흩뿌렸다.
‘칠십이파검(七十二波劍)!’
청성파의 절기로 꼽히는 상승의 검법이다.
단리화에게 파검봉이라는 별호가 붙게 된 원인이었다.
일곱 명의 해적 전부 몸에서 피를 흩뿌리며 제자리에서 쓰러졌다.
“……”
해적들의 입가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방금 전까지 실실 웃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딱딱하게 굳었다.
비류보도 비류보지만, 일검에 일곱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검공은 전율이 흐를 정도로 막강했다.
남해의 왜구는 중원의 영향을 받아 반 정도는 무공을 익혔다.
그러나 중원에 비해선 수준이 낮았다.
방준같이 일부 수장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그 수준이 고만고만하다 보니 얼어붙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확실히 조금 성가시긴 한데, 칠십이파검 덕에 저에겐 문제 될 정도는아니네요.”
단리화가 검으로 지면을 두드리며 피를 털어냈다.
칠십이파검의 원리는 음공과 엇비슷한 면이 있다.
음신, 소류금의 무공과 비교하면 간단하다.
소류금이 공기의 진동, 소리로 물리적인 파괴력을 지닌다면 단리화의 매개체는 검기로 인한 물결이다.
이 보이지 않는 기의 물결을 다루려면 누구보다 기의 흐름이나, 검의 진동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일종의 동공인 칠십이파검은 수련하다 보면 기의 파장이나 진동에 민감해지고, 조절할 수 있게 해준다.
배가 움직이는 것도 물의 흐름 탓이니 그 원리만 아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해봐!”
“팔다리에 화살이라도 쏘라고!”
해적이 주춤하며 다급하게 외쳐댔다.
풍!
옆의 해적선에서 구경 중이던 왜구가 시위를 당기며 화살을 쏘았다.
그 솜씨가 그럭저럭 쓸 만했다.
서걱!
“어머나, 고마워요.”
단리화는 화살을 막아준 조양선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허흐흠, 아닙니다.”
불과 얼마 전에 따라온 것을 미치도록 후회했던 조양선은 어쩔 수 없는 사내라서 그런지, 단리화가 감사인사를 전해 주자 헤벌쭉하며 좋아했다.
“그러면 저쪽이 끝날 때까지 적당히 상대해 볼까요.”
단리화가 괜히 천재가 아니다.
무공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 데다가, 싸우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
선상의 움직임에 천천히 익숙해지면서 미세한 조종을 끝내고, 내공의 분할까지 철저하게 해내며 싸웠다.
그녀가 검초를 펼칠 때마다 해적들의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저, 저것들은 뭐야?’
한편, 방준은 눈을 찢어질 듯이 크게 떴다.
‘아니, 저만한 고수가 어디 흔한 줄 알아?’
강호에서 미녀는 조심해야 한다는말이 있다곤 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척 봐도 움직임, 아니 무공이 보통이 아니었다.
혹시나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뺨을 꼬집어 봤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그저 어이가 없었다.
“으악!”
“케헥!”
“서, 선장!”
단리화도 단리화지만 주서천도 압도적이다.
왜구가 열이건 백이건 간에 상천칠좌라는 절대고수 앞에선 무의미한 숫자였다.
무림이 아닌 타국의 무공인지라 낯설긴 했어도 대응 못할 것까지는 아니었다.
주서천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왜구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코를 찌르는 혈 향이 바다 냄새를 지운다.
풍덩!
몇몇은 선박 밖으로 나가떨어져 수면 아래로 가라앉곤 했다.
한둘도 아닌 수십 명이었다.
“더 이상 못 버팁니다!”
“저 새끼들, 도대체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