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으윽……”
적오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최후까지 발버둥 치려 했으나, 힘이 나지 않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옅은 숨을 내쉬며 바닥에 쓰러졌다.
주서천은 가슴과 어깨에 꽂힌 비수를 소맷자락 아래로 회수하곤, 쓰러진 적오의 몸 위에 발을 올렸다.
“이럴 수가!”
“저, 용조를 저리 쉽게……?”
“도대체 누구지?”
해남검파 측에서 경악 어린 소란이 흘러나왔다.
남해용문의 용조, 적오.
천하백대고수는 아니나, 충분히 등좌(登座)할 수 있는 무공 실력을 지닌 화경의 고수였다.
해남도의 제이검인 전수국조차 적오에게 밀리지 않았는가.
그 존재는 해남검파에게 있어 공포였다.
그러한 이가 약관의 젊은이에게 한순간에 당해버렸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용조께서 당하시다니……”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수가……”
남해용문 측에선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나같이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반응을 보아하니 용조, 적오는 남해용문 내부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었던 모양이었다.
‘좋아.’
주서천은 남해용문의 반응에 내심 웃었다.
혹시나 광분해서 날뛰면 어쩌나 했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최적의 반응을 보여 다행이었다.
“다음은 누구냐.”
한 걸음 내디디며 위압 어린 기세를 내뿜었다.
흠칫!
“으으……”
남해용문이 몸을 움찔 떨며 뒷걸음질 쳤다.
하나같이 머리색이 물빛이다 보니,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후퇴한다!”
남해용문 중, 적오 다음가는 고수가 지시를 내렸다.
“제기랄!”
“돌아간다!”
지시와 동시에 남해용문이 동을 돌리고 후퇴를 시작했다.
“어딜!”
해남검파가 옳다구나 하면서 뛰쳐나가려 했다.
방금 전까지의 절망어린 모습은 어디로 갔나 싶은 기세였다.
“기다리세요!”
제갈수란이 해남검파의 등 뒤로 소리쳤다.
내공을 실어서 그런 것인지, 전장에 크게 울렸다.
그녀의 위엄 있는 어조에 해남검파가 잠시 멈추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신기하게도 따르게 됐다.
“쫓지 않는다!”
전수국도 무언가 눈치재고 지시를내렸다.
“하지만, 대사형……”
“다들 승기에 눈이 멀어 지쳐 있음을 못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들을 추격하기엔 여력이 부족하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해남검파는 이백여 명의 정예 중 반절을 잃었다.
그 충격 속에서도 남해용문의 포위에서 어찌어찌 버텨내느라 몸도 마음도 상당히 지쳐 있었다.
“또한, 저 지옥을 아무 생각 없이 뚫고 갈 생각이느냐?”
“아……!”
사해갱진.
사형제의 반을 데려간 지옥이다.
설사 주서천과 제갈수란이 돕는다고 해도, 자기 집처럼 돌아다니는 남해용문을 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사해갱진을 건넌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의 부담감이 상당했다.
또한, 도와주었다곤 하지만 아직 정체도 잘 모르는 사람들을 무작정 믿고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쉬워도 여기선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전수국은 사형제를 진정시키고 주서천과 제갈수란에게 다가갔다.
은혜를 입은 만큼 태도는 공손했다.
“도움을 받은 처지에서 염치 불구하오나, 이 기문진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해남검파는 제갈수란의 안내를 따라서 사해갱진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당한 게 있는 만큼 그들의 발걸음에는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밖이다!”
“그 지옥을 빠져나오다니……”
“당분간 해변은 마음 놓고 걷지 못하겠군.”
“휴우!”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몇몇은 사형제를 잃은 아픔에 충격이 큰지, 넋이 나가 있거나 혹은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이고, 천하제일 대협객 주서천 대협!”
사해갱진 밖에서 대기 중이었던 이의채가 언제나처럼 손바닥을 비벼대면서 아부를 보이며 다가왔다.
그 뒤로는 정찰대였던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상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대협께 혹시라도 큰일이라도 일어난 건 아닐지, 아주 애가 타서 미칠 노릇이었다니까요!”
“형님께서 돌아가신 뒤 상단의 지분은 어떻게 나눠야 할지 물으시지 않았어요?”
제갈승계가 묻자, 이의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천하제일두뇌 기관천재 제갈 승계 대공자님! 이 소상이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요? 아이고, 억울합니다!”
“생각해 보니 안 했던 것 같아요.”
기관과 천재라는 말에 껌뻑 죽는 제갈승계였다.
“기문진 안에 뭐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대기하고 있으라는 명만 아니었더라면 이 이의채,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곧바로 대협을 따라 들어갔을 겁니다요!”
“시끄럽소, 상단주.”
주서천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의채가 방긋 웃으며 입을 잠그는 시늉을 했다.
“구은을 입었소.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하오.”
전수국은 주서천과 제갈수란에게 포권으로 인사했다.
자세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해남검파의 전수국이라 하오. 강호에선 해남제이검이라 불리고 있소. 실례만 되지 않는다면 은인의 존함을 알고 싶소만, 괜찮소이까?”
“화산파의 사대제자 주서천이라고합니다.”
“아!”
전수국이 화산파라는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어쩐지 낯익은 이름인가 했더니만, 정도의 영웅이신 검룡이었구려!”
‘응?’
주서천을 비롯한 일행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검룡이 틀린 별호는 아니지만, 무림에서 주서천을 보고 검룡이라 부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천칠좌인 검신에게 검룡이라 부르는 건, 그 무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니 큰 결례이며, 심하면 모욕이 될 수도 있는 경우에 해당했다.
하나 전수국의 표정이나 태도를 보아하니 그러한 의도처럼 보이진 않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인사드리고 싶으나, 나중으로 미뤄도 괜찮겠소?
사해갱진에선 나왔으나 이 근처가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으며, 남해용문이 또 언제 전력을 이끌고 올지 모르는지라……”
“아, 물론입니다.”
* * *
해남도, 여모봉(擬母峰).
해남검파.
“뭣이? 함정?”
흰머리가 희끗하며 얼굴은 주름살만큼이나 흉터가 가득한 노인의 목소리에 걱정이 담겼다.
팔다리는 길쭉하며, 노인임에도 군더더기 없는 근육을 지닌 이 노인이 해남검파의 파주(派主)다.
“예, 그렇습니다. 전 사형이 보내온 소식에 의하면 저희 쪽 정예 중 반절이 당했다고 합니다.”
“반절이나? 끄응!”
파주, 위일해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히 설명해보거라.”
위일해는 사정을 전해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멸당할 뻔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간담이 서늘했으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만약 그 장소에서 누구도 살아돌아오지 못했더라면, 수백 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해남검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보다, 도움을 받았다고 하던데, 대체 누구에게 도움을 받은 겐가?”
“예. 화산파의 주서천과 제갈세가의 제갈수란이라는 자입니다.”
“으음?”
위일해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갈수란이라 하면 무림맹 군사의 손녀가 아닌가.
세가에서 애지중지하는 아이를 중원과 거리가 떨어진 해남도에 보내다니……? 이해가 안가는구나.”
“전 사형의 전보가 긴급인지라, 자세한 내막까진 적혀 있지 않아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이래저래 의문이 드는구나.
그보다, 화산파의 주서천이라 하면…… 내 기억이 맞다면 그 검룡 말이더냐?”
“맞습니다. 정혈대전에서 검선의 도움을 받아 혈마의 목숨은 끊은 장본인입니다.”
“정파의 후기지수 중 둘이나 이곳에 오다니.
심상치 않구나. 중원에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설마, 정마대전이나 정사대전이라도 일어난 건가?”
해구, 선착장.
해남검파는 부상자의 치료를 위해 일행이 타고 온 선박 근처에 숙박을 잡았다.
신의가 있어 위급한 중상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오룡삼봉 중 세 사람이나 오다니……
도대체 중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소?
혹시나, 정마대전이나 정사대전이라도 일어난 거요?”
전수국이 단리화의 얼굴을 힐끗 보고 물었다.
주서천 일행은 대답하지 않고, 그 대신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구려. 생명을 빛진 은인께는 미안하오나, 애석하게도 거절해야 할 것 같소.
해남검파가 처한 현재 상황이 썩 좋지 않소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갈수란이 손을 들어 전수국의 말을 제지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네요.”
“오해……?”
“혹시, 오늘이 몇 년 몇 월인지 알 수 있을까요?”
“……?”
전수국이 이해가 안 가는 듯한 표정을 짓자, 제갈수란이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중원의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인가요?”
“음, 아마 일 년에서 이 년 정도는 됐소.”
“휴우!”
주서천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또 회귀한 줄 알았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죽어서 과거로 돌아온 경우도 있는데 단체로 몇 년 전으로 회귀한다고 해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오늘 날짜를 들으니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에 모든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전수국, 아니 해남검파는 모종의 이유로 중원과의 연락을 최소 일 년 이상 받지 못한 게 분명했다.
제갈수란은 전수국과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정혈대전 이후에 중원에서의 일을 요약만 짚어 설명했다.
이야기가 전부 끝나자, 전수국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믿기지 않는 어조로 물었다.
“아니, 그게 정말이오?”
정혈대전 종전 후 곧바로 이어진 정마대전.
천마의 사망 이후 암천회의 등장.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소식인지라 믿을 수 없었다.
전수국이 당황하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 모든 일이 삼 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니.
전쟁의 기간은 시대마다 다르기는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일찍 끝난 감이 있다.
정혈대전이나 정마대전처럼 대규모 전쟁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전수국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만약, 말해 준 사람이 오룡삼봉이 아니었더라면 광인 취급하면서 전부 다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룡삼봉 중 삼인, 심지어 그 유명한 금의상단주까지 있다 보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남해에선 중원의 소식이 늦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너무 늦네요.”
제갈수란이 고운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조차도 아름다웠다.
“해남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해남도의 출입이 어렵다지만, 어디까지나 어려울 뿐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중원의 소식은 신경도 쓰지 못할 만큼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소.”
전수국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본 파는 원래 녹회문이라는 해남도의 문파와 오랫동안 세력 다툼, 아니 전쟁 중이었소.”
해남도의 세력 분포도는 제각각이다.
사실, 해남검파를 제외하곤 정사의 개념이 희박했다.
중원과 떨어져 있다 보니 거의 새외무림이었다.
이렇다 보니 해남도는 정사의 이념대립이라기보다는 지역 이익에 관련된 세력권 다툼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해남검파와 녹회문은 전력이 엇비슷하여 쉽사리 전쟁의 결말이 나지 않고 지속됐다.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중원의 사정이 더 안 좋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녹회문과의 전쟁 도중. 어느 날, 그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났소.”
“그들?”
“용궁에서 왔다는 인어(人魚)들.”
전수국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남해용문이오.”
해남검파와 녹회문은 앙숙이었던만큼 정말로 오랫동안 싸워 왔다.
전쟁으로 번진 것도 어언 십 년째다.
종전과 휴전, 개전을 반복한 세월만 생각하면 십 년을 넘는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어져 온 다툼도 한 문파의 등장으로 인해 종식됐다. 바로 남해용문이다.
“욕심 탓에 섬의 평화를 피로 물들이고, 바다를 노하게 한 죄. 그 죄를 물으러 왔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물빛 머리카락.
용조를 선두로 한 남해용문은 갑작스레 나타났다.
“해남도의 문파에 대해선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남해용문은 어떠한 문파입니까?”
주서천이 물었다.
“토속신앙을 토대로 한 문파외다.
수백 년, 아니 어쩌면 천 년은 더 된 전설상의 문파요.
여러분께선 사해용왕(四海龍王)에 대해서 알고 있소?”
“알다마다요.
사해를 지배하는 용왕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고대의 중원은 동서남북으로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고 믿었다.
그 바다를 사해(四海)라 부른다.
사해에는 비바람을 다스리고, 수정궁이라 불리는 용궁에서 권속들과 기거하는 용왕이 있다고 한다.
“설마, 남해용문이란 것이……”
“그렇소. 남방적룡(南方赤龍) 광리왕(廣利王) 오윤(敷閩)의 용궁이 바로 그 남해용문이오.”
“그래서 그들을 인어라 표현하셨군요.”
남해용문이라는 이름을 듣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해남검파도 녹회문도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바닷사람 대부분이 아직까지 미신을 믿는다 할지라도, 사해용왕이 보내서 왔다고 하면 믿겠는가.
중원으로 치자면 옥황상제의 사자로서 신을 자처하는 것과 비슷했다.
물론 고대에 남해용문이 실존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워낙 오래되어서 실존여부조차 불확실했다.
“처음에는 장난이거나, 혹은 한낱 사교에 불과한 줄 알았소. 그러나……”
“그러나?”
“그들의 창이 우리의 목을 겨누었을 때, 어쩌면 정말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게 됐소.”
남해용문의 저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다에서 온 악마라 불릴 정도로 막강했다.
해남검파도 녹회문도 비웃음을 지우고 경계했다.
아무리 기나긴 전쟁으로 인하여 전력이 줄어들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해남검파이지 않은가.
구파일방 오대세가 다음가는 문파로 꼽히는 명문지파가 밀리는 상황이니 웃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해남검파와 오랫동안 싸워온 녹회문까지 남해용문의 손길을 피해 가지 못했다.
해남도를 양분하는 세력을 동시에 상대한 것도 모자라 대대적인 피해까지 입힌 것이었다.
“더 황당한 건, 남해용문이 정말로 바다에서 오고, 바다로 돌아간다는거요.”
“예?”
“농담 같겠지만 전혀 농담이 아니오.”
바다는 남해용문의 영역이었다.
들어오는 건 몰라도 나가는 건 자유롭지 못했다.
설사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여도, 어쩌면 남해용문이 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발이 나가지 못했다.
“그들은…… 정말로, 인어 일지도 모르오.”
전설의 재현.
그 소문은 해남도 전역에 순식간에 퍼졌다.
뱃사람은 바다가 노했다는 말을 두려워하며 나가지 않았으며, 해남검파와 녹회문을 비난했다.
“해남도에는 여러 신앙이 존재하오.
그중에서도 단연 영향력이 큰 건 바다와 관련된 해신과 남해의 수호룡이라고도 불리는 남해용왕이지.
신의 사자라 자처하는 이들이 나타나서 우리를 비난하니, 신뢰를 잃을 수밖에.”
전수국은 애환이 깃든 눈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던 중 해남도에 남해용문의 은거지가 있다는 걸 듣고 습격을 준비했건만, 이 꼴이 난 거요.
급한 마음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판단을 내리다니……”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고맙소.”
전수국은 쓴웃음을 짓곤 주서천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정마대전이나 정사대전에 힘을 보태달라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일로 이 해남도까지 온 거요? 아, 혹시 그 암천회인가 뭐시기와 싸울 힘이 필요한 것이오?”
사실, 암천회라는 세력이 확 와닿지는 않았다.
오룡삼봉 중 세 사람이 와서 이야기해 줬음에도 반신반의했다.
중원무림이 보였던 반응과 비슷했다.
“비슷하긴 합니다.”
“비슷하다?”
“저희가 볼일이 있는 건 해남검파가 아니라, 한 야장입니다.”
주서천이 이의채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흐흠!”
이의채가 헛기침으로 시선을 모았다.
“혹시, 이 해남도에 간(干)이라는 성의 야장이 있지 않소?”
“간……?”
으음,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오.
하지만 사부님, 아니 파주님이라면 알고 계실지 모르오.”
“해남검파주이신 위일해 어르신을 말씀하시는군요.”
제갈수란이 보조 설명을 대신했다.
“혹시, 파주님에게로 안내해 주실수 있을까요?”
“물론이오.”
한편 주서천은 남해용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남해용문……’
전생은 물론이고 현생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심지어 해남도에서조차 전설 취급이었다.
어찌하여 이러한 문파가 갑작스레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왜 전란의 시대엔 알려지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암천회과 관련된 곳인가?’
주서천도 암천회에 대해서 전부 아는 건 아니다.
당연히 모르는 것도 있다.
다만, 해남도의 경우 워낙 오지에 있다 보니 단순히 새외무림처럼 거리가 멀어서 모를 가능성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서장이나 북해, 남만에 대해선 주서천도 대략적인 것만 알고 자세한 사정을 몰랐다.
‘일단은 지켜보자.’
* * *
해남검파가 위치한 여모봉은 해남도 정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배를 선착장에 두고 가야만 했다.
혹시라도 해적에게 약탈당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해남검파가 숨길 곳을 안내해 줬다.
무림인으로만 결성된 일행은 여모봉으로 향했다.
체력이나 지구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이의채나 제갈승계야 남에게 업히면 그만이니 문제는 없었다.
물론 이의채의 경우 살집이 많다보니 가마에 타서 옮기게 됐다.
가마는 단연 금의검문의 무사가 맡았다.
여모봉까진 그리 멀진 않았으나 해남검문의 부상자까지 포함되어 있는지라 이동에 시간이 좀 걸렸다.
원래라면 경공을 이용하면 한나절도 충분한 거리이거늘 거의 이틀이 걸려서 도착했다.
“어서 오게. 남해검파주인 위일해라고 하네.
강호에선 남해제일검이라 불린다네.”
위일해 역시 천하백대고수, 최상승에 속했다.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검처럼 날카로운 기도를 풍겼다.
“이야기는 내 제자에게 전부 전해 들었네.
도와줘서 정말로 고맙네.”
위일해는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이 주서천을 하나하나 뜯어가며 살펴봤다.
‘허, 정말로 경지가 보이지 않는군.’
정혈대전의 영웅에 대한 소문은 위일해도 들어봤다.
해남도에 들려올 정도라면 실력은 확실하리라.
하나 상천칠좌, 검신이라는 별호를 들었을 때는 두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약관에 화경이라는 경지를 이룩했다곤 하지만, 그래도 상식선이란 게 있다.
믿을 수 없었다.
현경이라 하면 무인의 정점이자 지고의 경지가 아닌가.
한 시대에도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수준이었다.
소싯적부터 천재로 불리던 위일해조차 수십 년 동안 넘지 못한 벽이 바로 이 현경이라는 경지였다.
헌데 그걸 아들, 아니, 손자뻘인 청년이 이루었다고 하니 믿지 않는게 당연했다.
두 번째 서신을 받았을 때도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혹시 무슨 암호를 보낸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아니 라면 전수국이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미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하수는 고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 법칙대로 위일해는 주서천의 경지를 보지 못했다.
마치 무공을 수련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화산파의 제자이자 정파의 영웅이 무공을 모를 리 없거니와, 그의 활약을 본 목격자도 많았다.
아직도 반신반의한 심정이긴 하지만, 최소 동수 이상의 경지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잘 믿지 않는 게 사람이다.
위일해 정도 되는 고수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허 참, 영웅은 영웅이로다.’
약관에 남과 다른 경지를 이룩하면 주변의 환대에 오만해지기 마련이거늘, 그런 모습이 전혀 없었다.
과연 정도의 영웅다운 겸손함이었다.
“남해검문은 화산파의 검룡과 제갈세가의 모사미봉에게 빚을 졌네. 사정이 좋지 않아 한정되긴 하네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게나. 얼마든지 도와주겠네.”
주서천은 위일해에게 사정을 말했다.
혹시나 위일해가 모론다면 어쩌니하는 걱정도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지가 문제다.
“그대가 찾는 사람은 아마 간야자(干治子)일 걸세.
예로부터 해남검파를 비롯한 해남도의 문파는 물론이고 주산군도 보타문의 기관 보수 및 무기의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실력자이지.”
다행히도 괜한 걱정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주서천은 새로운 국면에 부닥친다.
“간야자는 지금, 해남도에 없네.
아니, 있다고 해야 하나……”
위일해가 곤란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간야자가 마지막으로 발견된 곳은 남해일세.”
“남해라면……?”
“정확히 말하면 해남도를 중심으로 남해 앞바다. 즉, 남해용문일세.”
주서천이 눈을 크게 떴다.
“오해할 것 같아 미리 말하네만, 속이거나 하는 건 아닐세.”
위일해는 전황이 불리하여 도움을 받으려 거짓말 한 것이라고 괜한 의심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제 스스로 간 것인지, 아니면 납치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얼마전 남해용문도로 추정되는 이들과 남해 앞바다로 사라지는 걸 목격했다는 정보가 있었네.
처음엔 그저 닮은 사람인 줄 알았네만, 정말로 그 본인이 행방불명 중인지라 확실한 정보일 걸세.”
“……”
제갈수란이 눈썹을 구부렸다.
표정에서 ‘골치 아파졌네요.’ 라는 속마음이 묻어 났다.
“그 전에, 용궁이란 곳이 정말로 있는 겁니까?”
이제 와선 저 용궁이 그저 남해용문의 근거지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용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은 바다에서 살 수 없다.
살수 있다면 그건 인어지 사람이 아니다.
헌데 그 모습이 정말로 발견되고 있으니 문제였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그럴 수 없네.
본 파나 녹회문이 몇 차례 다가갔지만 바다에선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기문진이 있어 도중에 배가 전복되기도 하였네.”
위일해에게서 그동안의 고생이 느껴졌다.
“수공을 연공한 제자들을 보내긴 했지만, 하나같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네.”
그야말로 설상가상, 속수무책이었다.
‘수공……! 아! 인어의 정체는 수공이었구나!’
수공(水功)은 이름 그대로 물에서 싸우기 위한 무공이다.
중원에는 주로 수림구채가 수련한다.
어쨌거나, 이 수공은 수중에서도 반 시진은 물론이고 한 시진 이상도 공기 없이 버틸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수중에도 땅 위에서 움직이는 것과 비슷하게 움직일 수 있고, 싸우는 것도 가능하다.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서는……”
“저, 혹시 해남검파에 남는 수공…… 아니다.
이 근처에 혹시 해적 있습니까? 그것도 무공을 수련한.”
산에는 산적, 강에는 수적이 있다.
그리고 바다에는 당연히 해적이 있다.
“해적? 없는 건 아니네만……해적은 왜?”
“그 친구들에게 조금 빌려올 게 있어서요.”
명의 골칫덩이는 북방의 오랑캐만이 아니다.
백 년 전부터 동남해를 중심으로 고려-조선과 명과 왜(倭)를 중심으로 노략질을 행하던 이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왜구(倭冠)였다.
이 왜구의 규모가 생각 이상으로 커, 수림구채조차 장강 밖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걸 꺼려할 정도였다.
또한, 이 왜구란 게 왜의 사람으로만 구성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구할 이상이 왜인이었으나, 조선이나 혹은 명에 불만을 품은 이들도 존재했다.
왜에서조차 통계할 수 없는 골칫덩이이며, 훗날 동남해의 해적이 모인 집단이 바로 이 왜구다.
“핫핫핫!”
과거, 해적이자 원나라 말기의 군옹이었던 방국진(方國珍)의 늦둥이 아들이었던 방준이 그리하였다.
아비인 방국진은 명과 태조인 주원장에게 저항과 귀순을 되풀이하다가 벼슬을 얻을 정도로 한때는 해상에서 큰 세력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결국 명에게 패배하여 항복하였고, 벼슬을 얻었으나 대숙청에 휘말리게 되어 목숨을 잃게 된다.
방준은 이 당시 해상으로 세력의 일부를 데리고 도망쳐 왜구에 귀순하여 해남을 담당하는 해적이 됐다.
“이 해남 인근에서만큼은 내가 왕이노라!”
방준은 기존의 세력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무력도 몹시 뛰어났다.
아비를 닮아 옛적부터 힘이 장사였고, 키는 크며 근육 또한 대단했다.
또한 노략질을 통해서 얻은 무공을 익혀 바다 위에선 방준을 이길 자가 몇 없었다.
“큰 형님, 아니 선장님!”
“그래, 무슨 일이냐.”
“배, 배가 한 척 보입니다!”
“수군(水軍)은 아니겠지?”
최근, 잇따른 피해로 수군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다.
그렇지 않아도 현 황제는 무공(武功)으로도 이름이 높아, 혹시 대대적으로 토벌하려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그건 아닌데요……”
“그럼 뭐하고 있어? 약탈해!”
“그, 그게…… 꼴랑 편주(片舟) 한 척입니다요.”
“으잉?”
방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미친놈이 작은 배를 가지고 바다를 건너려 하는가.
근방이 해남도라 해도,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예로부터 바다는 파도가 몹시 거칠며, 날씨 또한 지랄 맞아 대형선박조차 어찌될 줄 모르는 곳이다.
“별별 미친놈을 다 보겠구나. 아마 해류에 휘말려서 멀리까지 떠밀려온 거겠지, 무시해!”
“선장! 미녀입니다! 미녀가 타고 있습니다!”
“뭣이, 미녀? 비켜!”
방준은 거추장스럽다는 듯 수하들을 옆으로 치우곤,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허억!”
미녀였다.
그것도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녀다.
멀리서 봐도 아랫도리가 불끈해지는 미모에 입가에 침이 절로 맺혔다.
죽립을 위로 올리면서 언뜻 보이는 눈매를 보니 가슴이 벌렁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그 옆에 웬 사내 두 놈이 곁에 있기는 했으나, 그딴 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었다.
“빨리빨리 사다리 내려!”
사실, 척 봐도 수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해의 제일미녀라 할 정도의 절세미녀가 이렇다 할 호위 하나 없이 작은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에 왔다.
수상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러나 지나치기에는 그 미색이 너무 아까웠으며,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 보니 안심하고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선택은 후회를 불러오게 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다리를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고.
주서천은 간야자를 구할 겸, 남해용문의 근거지를 방문하기 위해선 수공이 필요하다는 결 느꼈다.
아무리 현경이라 할지라도 수중 속에서 제 힘을 발휘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호흡으로 숨은 물론이고 무공을 펼치는 데도 큰 제약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마침 심상구현인 답습이 있으니, 수공만 있다면 빠르게 수련하여 이 문제는 해결되니 상관없었다.
문제는 수공 자체였다.
정파인, 그것도 화산파의 제자가 타 문파의 무공을 배우는 건 여러모로 문제가 되니 몰래 배워야 했다.
해남검파는 물론이고 해남도의 문파는 여러모로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고민하다가 해적을 떠올렸다.
“빌려올 것?”
“물자입니다. 지금의 해남검파는이래저래 피해가 극심하지 않습니까? 그것부터 채워야겠지요.”
이의채가 상단에서 가져온 재산으로 지금 당장 도와줄 수는 있지만, 한계가 있었다.
사람이나 의약품, 물자 등을 선박에 싣고 오느라 돈을 그리 많이 가져오진 못했다.
“아아, 이해했네.”
“또한, 잃어버린 신뢰를 해적 토벌을 통해서 복구할 생각입니다. 약탈품을 나눠준다면, 민심도 얻겠지요.”
“그거 좋은 생각이군.”
괜한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변명삼아 말하긴 했지만, 결코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필요한 작업이었다.
해남검파는 정파답게 중원 무림 방파가 적림구채를 토벌하는 것처럼, 수군을 대신해 해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녹회문과 다투게 되면서 해적을 토벌할 여력이 없어졌고, 자연스레 해적이 활개 치게 됐다.
민심이 줄어든 연유 중에서도 해적으로 인한 약탈이 늘어난 게 포함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이러한 연유를 핑계 삼아 잠시 해적 토벌을 나오게 됐다.
단, 그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해상도 중요하지만 지상에서의 일도 중요하기에 금의검문, 화인의원, 청성파 등의 전력을 남겼다.
해적을 토벌하러 온 것은 고작 세 명에 불과했다.
주서천과 단리화, 그리고 길잡이가 된 해남검파의 조양선이라는 제자였다.
“저, 저, 정말로 저희 셋으로 괜찮은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