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六章 (175/254)

인면지주의 탐색 및 조사 임무가 끝났다.

이출은 그 후 넋을 잃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벽곡단과 물을 건네면 조용히 삼킬 뿐이었다.

탐색대는 인면지주에게 도움을 받아 사망자의 시신을 거두었다.

백 명이었던 탐색대는 칠십으로 줄었다.

주서천은 거미의 다리에 의해 몸이 찢긴 동료를 보고 순간 화를 참지 못했으나, 혈독노인을 떠올리며 참았다.

인면지주를 비롯한 서룽협의 영물은 혈어술법에 의해서 조종당했을 뿐, 어떠한 잘못도 없다.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을 치료한 다음 출항을 준비했다.

“정리도 끝났으니 슬슬 가보겠다.”

“다시, 한 번, 감사, 한다.”

인면지주가 여섯 개의 눈을 빛내며 인사했다.

어째 감사의 인사가 아니라 위협같이 느껴진다.

“이쪽도 신세 졌으니 그리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주서천이 살짝 웃으면서 답했다.

인면지주가 고마움의 표시로 건넨 내단은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됐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다.”

“이 또한 연이며, 운명이니, 겸허히, 받아, 들이겠, 다.”

인면지주가 물러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박 또한 서식지를 떠났다.

“전원, 무림맹으로 갑니다.”

인면지주의 서식지 자체가 암천회의 함정이었다.

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흩어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출의 호송이나, 사상자의 이송에도 인력이 필요한 점이 컸다.

장강의 삼협, 서릉협의 물살 위에 올랐다.

그래도 물살이 빠른 만큼 속도는 붙었다.

“주서천.”

선상 위에서 바람을 씌던 중, 당혜가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독이 통하지 않으니 날 강 밑으로 밀어버리려고?’

주서천이 몸을 돌려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 고마워.”

“뭘?”

방심하게 하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전부. 목숨을 빚지기도 했고……”

만약, 주서천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독의 대가인 당혜라 할지라도 목숨을 보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무림인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값진 영물의 내단을 일부긴 하지만 나누어 받았다.

낙소월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축적한 내공의 양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독공도 일취월장했다.

그녀가 아무리 자존심이 높다지만, 기연을 선사해준 은인을 모를 정도로 배은망덕하진 않았다.

“이것도.”

당혜가 품 안에서 호리병을 꺼냈다.

그 내부에는 인면지주를 비롯한 독물의 독이 담겨 있었다.

독인에게 귀하디귀한 극독이다.

하나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정기적인 제공이었다.

주서천은 인면지주에게 암천회를 비롯한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약조 하에 상급의 독과 거미줄을 제공받기로 했고, 그 대상을 당가로 지정했다.

독인에게 있어서 상급의 독은 무기요, 곧 영약이다.

그걸 무료로 제공받는 건 크나큰 축복이었다.

“당신이 인면지주에게 내 얼굴을 기억하게 만들어준 덕분에, 아버님께서도 이 일에는 앞으로 섣부르게 개입할 수 없을 거야. 여차하면 인면지주를 찾아가서 세가에 제공하지 않도록 만들면 되니까.”

“그래.”

향후 세가 내에서의 당혜의 위상이나 영향력이 얼마나 높아질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 주다니…… 정말로 고마워”

이번만큼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인사였다.

평소의 비꼬는 어조도 아니었고, 빈말도 아니었다.

너무나도 큰 빛을 졌다.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해도 모자랐다.

당혜는 손을 공손히 모아, 허리를 숙이려 했다.

“그야……”

당혜는 누군가가 허리를 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이내 주서천의 허공섭물이란 걸 깨달았다.

“도와달라고 했으니까.”

머리를 들자, 주서천이 부드럽게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산들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니까……”

두근 두근.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저, 심장이 뛰었다.

당혜는 손을 가슴으로 모으고, 숨을 멈췄다.

화산파 청년도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까 전에 놀린 거, 사과할 테니까 앙심은 그만 내려놓고 밥 먹을때나, 잠잘 때 독을 풀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지 않겠어?”

“당신을 죽일 거야.”

당혜가 서릿발내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호리병 뚜껑을 당장이라도 열 기세를 보였다.

“호호호.”

배의 한구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주서천이 난간에서 물러나 진정하라는 듯이 손사래를 치다가, 웃음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파검봉?”

“검신이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단리화가 요염하게 웃는 얼굴로 걸어 나왔다.

먹빛을 띠는 죽립을 쓰고 있는 게 특징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단 언니.”

당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단리화에게 인사했다.

대놓고 썩 반기지 않는다는 분위기를풍겼다.

“그러게. 용봉회(龍鳳會) 이후니 꽤나 오랜만이네.”

정파의 후기지수, 오룡삼봉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데, 그게 바로 용봉회다.

그러나 무림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변한 후로는 폐회(閉會)됐다.

‘언니……’

당혜가 누군가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모습이 흔치 않다 보니, 나름대로 신선하게 느껴졌다.

다만 어조는 전혀 친근하지 않아 기이하기도 했다.

“안 본 사이에 단 언니께 몰래 엿드는 취미가 생겼는지는 몰랐어요. 아니면, 원래부터 있었던가요?”

“어머나, 그럴 리가 있겠니.

동생이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그저 동생처럼 검신께 감사 인사를 전하러 온 것뿐이란다.”

단리화가 입술을 적시면서 옅게 웃었다.

당혜의 독설을 아무렇지 않게 흘리는 게 인상적이었다.

“……”

당혜는 마음에 안 드는 듯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응?’

평소 한 마디라도 지지 않으려는 당혜였다.

그런데 별말 하지 않고 물러나니 조금 이상했다.

마치 단리화를 껄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단리화는 죽립을 벗고, 주서천에게 인사했다.

“숲에선 신세를 졌어요.

검신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을 거랍니다.

목숨을 구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겸손하시기까지 하다니, 그야말로 정도의 영웅이시군요.”

주서천은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단리화는 주서천을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생명을 빛졌으니, 그 빛을 부디 검신께 갚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아닙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무림인으로서 어찌 은원을 가볍게 여길 수 있겠어요?”

단리화는 무언가 떠오른 듯, 짓궂은 웃음을 지어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 그 보답으로 음양화합이라도할까요?”

“……”

주서천이 할 말을 잃었다.

“제발 입 좀 다물어!”

당혜가 끔찍한 것이라도 들은 듯, 소리를 빽 질렀다.

“어머나, 입 좀 다물라니, 말이 심한 거 아니니?”

단리화가 말과는 다르게 쿡쿡 웃었다.

“그리고, 남녀가 검을 부딪치면서 화목하게 좀 어울리자는데 그게 그렇게 문제 삼을 일인가?”

단리화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혹시,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한 건아니겠지?”

“……”

당혜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부끄러워서 그런지 아니면 화가 나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에 열이 오른 듯, 빨갛게 물들었다.

“물론, 거짓말이야. 성(性)적인 의미였단다.”

“죽……”

“안 돼요!”

당혜가 독설을 퍼붓기 전, 제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낙 사매?”

낙소월이었다.

눈썹을 사납게 치켜뜬 사매는 세 사람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와 단리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두 사람을 놀리는 건 그만둬 주세요.”

낙소월이 경계의 눈초리로 단리화와 마주 봤다.

“무엇이 말인가요?”

“짓궂으시네요.”

낙소월은 물음에 답하지 않고 자연스레 흘렸다.

“후후.”

단리화는 옅게 웃으며 흥미 어린 눈빛을 빛냈다.

“화산의 정예인 매화검수에 섬서제일미가 있다고 들었는데, 소저께서 그 유명하신 낙소월 소저시군요.”

“청성파의 파검봉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현 후기지수 중 맏언니인 파검봉은 강호의 여고수로서 무림의 여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남녀 할 것 없이 넋을 잃게 하는 미모도 미모지만, 일찍이 후기지수에 오르고 화경의 성취를 이룬 그녀의 업적은 주서천 등장 이전에 최고라 할 수 있었다.

훗날 미래에선 그다지 활약하지 못하고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현생에선 나름대로 유명했다.

“괜찮다면, 이것도 인연인데 안에서 차 한 잔이라도 할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단칼에 거절하시다니, 조금 상처네요.”

말과는 다르게 살며시 미소 짓는 단리화였다.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낙소월 소저와 화합하고 싶네요.”

“비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게요.”

“물론, 성적인 의미에요.”

“……”

낙소월도 이번에는 무리였는지, 얼굴을 붉혔다.

대신 괜히 자극해서 더 놀림 받는 일이 없도록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리화는 낙소월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그녀의 너머 주서천 쪽으로 돌렸다.

“갑작스럽게 농을 던져서 실례했어요.

그러나 검신께 깊이 감사드리고 있는 건 사실이랍니다.”

“아, 아닙니다.”

설마하니 여인, 그것도 정파의 후기지수인 봉황이 음담패설을 할 줄은 몰라 주서천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파검봉의 입담이 범상치않다는 소문 같은 것도 없어서, 혹시 장난을 치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 분위기도 흐린 것 같으니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할게요. 어차피 친해질 시간은 남았으니까요.”

입가에 맺힌 미소가 좀 더 진해진다.

가늘게 뜬 눈에서 조금 위험해보이는 빛이 묻어났다.

“괜찮다면 언젠가 검을 맞대보고 싶네요.”

단리화는 그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떠났다.

“대단한 사람이네.”

주서천이 단리화의 등을 보고 중얼거렸다.

“동감이에요.”

낙소월과 당혜가 동시에 말했다.

선박은 장강삼협을 빠져나오고 합비 근처까지 갔다.

임시 선착장 앞에는 무림맹의 마중이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무림맹 무사가 패를 보여주며 인사했다.

멀미로 지쳐 있는 이들을 위해서 사상자를 인계받고, 대신 운반하기로 했다.

말과 식량도 내어주었다.

적어도 밤에 지친 몸으로 불침번을 서는 건 피할 수 있었다.

무림맹의 호위를 받고 합비로 향했다.

마중 나온 무사들은 포박된 이출을 신경 쓰는 표정이었으나, 좋지 않은 분위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얼마 뒤 무림맹에 도착하자마자 탐색대 전원은 여장을 풀러 갔으나, .주서천은 보고를 위해 맹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출이 간자였다고?”

남궁위무가 믿기지 않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주서천은 대답 대신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허, 참……”

남궁위무에게도 이출이 천추성이었다는 건 충격적이었다는 듯, 말을 잇지 못하고 탄식했다.

주서천은 남궁위무와 제갈상에게 인면지주의 서식지에서 있었던 일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다.

“웅권협……”

남궁위무도 제갈상도 낯빛이 좋지 못했다.

웅권협은 무림맹 수뇌에게도 신뢰받던 무인이었던 만큼, 그 배신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배신의 이유조차 너무나도 올바르면서도 일그러져 있기에 씁쓸한 감정이 더했다.

주서천이 이출의 마음을 한편으로는 이해했던 만큼, 남궁위무나 제갈상 역시 이해는 했다.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구나.”

“무림맹의 앞날처럼 말입니까.”

주서천의 말에 남궁위무는 쓴웃음을 지었다.

“훌륭한 촌철살인입니다.”

제갈상이 호, 하고 감탄했다.

“이 보잘것없는 늙은이를 쌍룡(雙龍)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괴롭히다니, 참으로 너무하구먼.”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웅권협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는 것,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죄인이 악행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럴듯하게 꾸민 것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비록 수단이 대단히 잘못됐으나 그의 지적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바꿀 수 있었다면 진작 바꿨을 거야.”

그러나 사람은 부처도 선인도 신도 아니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고, 오욕칠정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도가건 불가건 간에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만약, 그 구파일방 출신의 제자를 떨어뜨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남궁위무는 실력이나 인격이 아닌 출신을 보고 대주를 결정한 걸 부정하지 않고, 깨끗하게 인정했다.

“구파일방, 아니, 명문지파에 있어 체면을 구기는 것이 때로는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하다는 건 알고 있을거다.”

아무것도 아닌 삼류문파 출신에게 진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 후보가 같은 명문지파라거나, 혹은 일인전승의 신비문파라면 수긍이라도 했을 것이다.

“만약, 그곳에서 구파일방을 무시하는 것이냐는 이야기가 나와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면, 후에 앙금이 쌓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반목하게 될지도 모른다.”

너무 과한 생각 아니냐고 하겠지만, 실제로 과거에 체면 탓에 반목한 사례가 있었다.

정파에게 체면이나 명예는 경제는 물론이고 이념에 중요한 요소다.

다툼의 명분은 충분히 된다.

“과한 망상으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지속된 반목으로 무림맹의 해산의 계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 그 외에도 복합적인 사정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뻔하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럴 수도 있다.

무림맹은 사도나 마도처럼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 않다.

아무리 상천칠좌인 검성이고, 남궁세가의 수장이라 해도 그 구성원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울만 좋은 힘없는 늙은이구먼그래.”

남궁위무의 얼굴에 자조의 빛이 떠올랐다.

주서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했다.

‘나도, 영웅이라 불리기엔 부족한 사람이야.’

남궁위무도 주서천도 이상을 꿈꾸기에는 나이가 많다.

필요악인 흑영부조차 어찌 처리하지 못한다.

지하뇌옥에 수감된 이출이 기다리는 건 정도에서 벗어난 고문일 것이다.

이래선, 위선자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웅권협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할 뿐이었다.

“분위기도 전환할 겸, 다음 보고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갈상의 경우엔 천재지만 아직 혈기 넘친다.

이상을 꿈꾸기에는 적절한 나이였다.

그러나 그보다 책임이 무거운 자리에 있었다.

군사가 되면 때로는 사사로운 감정을 배계하고 냉혹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다.

지금이 그랬다.

이출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 그리고 간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어찌 차출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외에도 대전쟁을 대비해 어찌 싸워야 할지 전력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 * *

쨍그랑!

술이 담긴 병이 산산조각 났다.

애주가의 마음을 녹일 만한 주향이 공중에 떠다니며 주변에 퍼졌다.

“이 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림원의 종칠품 학사였던 녹존, 천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주서천! 주서천! 주서천 이 개새끼야!”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얼굴색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천기는 술상을 발로 걷어차려다가, 멈칫하곤 가까스로 진정하려고 애썼다.

후우우…… 숨을 크게 들이쉬다가

“육시랄!”

술상을 걷어찼다.

“으아아악!”

과거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이도 이렇게 예민하지 않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주화입마에 들 정도다.

“왜!”

모든 게 완벽했다. 전부 계산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요광까지 투입시켰다.

주서천이 죽거나 부상을 입는 건 기대도 안 했다.

낙소월만을 처리하기 위해서 몇 중으로 함정을 준비하고, 인력과 돈을 쏟아붓고, 계획을 검토했다.

혈독노인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 건 예상한 일이라서 상관없었다.

인면지주를 잃은 것도 괜찮았다.

무형지독의 필수 재료인 거미줄이야 확보해 두었다.

문제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 왜!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삼 일에 한 번 꿈을 꾼다.

그런데 그 꿈에서 꼬박꼬박 주서천이 나왔다.

심지어 하나같이 개새끼였다.

공든 탑을 쌓았더니, 주서천이 와서 무너뜨렸다.

바다에서 모래성을 쌓았더니 주서천이 짓밟았다.

조각 난 무공비급을 모았더니 주서천이 찢었다.

진시황의 법보와 보물을 주서천이 훔쳐갔다.

불로초를 발견했더니 주서천이 훔쳐 먹었다.

주서천이.

주서천이.

주서천이.

주서천이.

“지긋지긋한 놈!”

부들부들.

덕분에 한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두 발 뻗고 잔 기억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

눈을 감으면 주서천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마터면 있지도 않은 신을 찾을 뻔했다.

남만이나 혈교의 주술이라도 배워서 저주를 해볼까 고민했다.

“으드득!”

그저 이를 악문 채, 다음 일을 준비할 뿐이었다.

* * *

한 해가 끝나간다.

새하얀 눈이 수북하게 쌓여 갔다.

“슬슬 가보겠습니다.”

주서천은 무림맹 뒷문 앞에 서서 인사했다.

“언제나 바쁘시군요.”

제갈상이 살짝 웃어주었다.

한때 미옥공자라 불렸던 만큼 기가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군사님에 비해선 덜 바쁘지요.”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제갈상은 군사에 오른 후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낸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암호문을 바꾸는 수준이었다.

무림맹 수뇌에게 신뢰받던 웅권협이 간자라는 걸 들은 순간, 제갈상은 가슴이 철렁였다.

신뢰가 배신으로 돌아온 것도 마음이 아프지만, 오늘부터 다시 잠자기 글렀다는 생각에 한숨이 푹푹 나왔다.

“산동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 연락하는 데 얼마 걸리진 않을 겁니다.”

“승계에게 안부 인사 좀 잘 전해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그 녀석이라면 상단에서 정말로 잘 지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말로 다행이군요.”

재갈수란이 제갈승계를 걱정하는 것처럼, 제갈상 역시 마찬가지다.

눈코 뜰 틈 없이 바빠서 제대로 된 연락을 하진 못하고 있지만, 항상 신경 쓰고 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예, 그럼.”

주서천은 몇몇 사람들과 함께 금의상단으로 향했다.

화산동, 금의상단.

깡깡깡. 투두두.

가끔씩, 금의상단의 산동지부에서부터 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고 한다.

대장간에서 모루를 두드리는 소리같기도 하고, 가끔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이 땅이 흔들렸다.

“심야에 들려오는 그거 말하는 게지?”

“그래.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금충, 아니. 상왕이 밤마다 금전이 진짜인지 이로 깨물어보는 소리 아닐까?”

“그게 뭔……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

다행히도 그 소리가 사람들의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몇몇 예민한 이가 관아에 호소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의채의 뇌물 덕분이었다.

깡깡깡. 드드드.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소리나 흔들림에 익숙해졌고, 귀신의 소행이라는 괴소문 정도만 남았다.

“오, 주 대장.”

산동지부의 정문을 넘어서자마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초련.”

질풍십객의 홍일점이자 왕일 다음가는 고수, 초련이 씩 웃으면서 다가왔다.

“잘 지냈나?”

“하하하, 나야 별일 있겠소? 돈이야 꼬맹이와 상단주 곁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버는 중이지.”

“자식들은?”

“너무 건강해서 탈이오. 화인의원의 명의분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해주니, 조금도 아플 일이 없더군.”

자식 이야기를 하니 환하게 웃는 초련이었다.

“자,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시구려.”

주서천은 초련의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그녀를 뒤따라 도착한 장소는 넓은 공간을 자랑하는 제갈승계의 공방이었다.

“허, 안 본 사이에 여러 가지도 만들었구나.”

공방 내부는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을 비롯하여, 여러 기관 장치의 조각으로 가득했다.

신기해서 만져볼까 했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하곤 그만두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초련은 공방 한구석에 나열한 책장 앞에 갔다.

그리곤 몇 권의 책을 비스듬하게 빼놓았다.

덜컥! 쿠구구.

책장 앞의 바닥이 열리면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두 사람은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벽에 드문드문 걸린 횃불이 앞을 비춘다.

“어디보자……”

초련은 내려가던 도중, 벽의 일부분을 매만졌다.

달칵!

“아, 됐군.”

벽돌 하나하나가 쑥 들어가더니 벽이 둘로 갈라지며 공간이 나왔다.

한 사람 정도 통과할 수 있는 크기다.

초련이 따라오라는 듯 턱짓했고, 주서천은 감탄의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들어갔다.

약 일각 정도를 걸어 도착한 곳은 몇십여 명을 충분히 수용할 크기의 석실이었다.

석실 내부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아니, 유령으로 가득했다.

“그건 그쪽이 아니야!”

그 가운데에선 제갈승계가 손짓하며 외쳤다.

그 말에 수십에 이르는 유령들이 자재를 들고 움직였다.

명색이 무림제일의 자객이란 이들이 광부처럼 일하고 있으니 삼안신투가 저승에서 개탄할 노릇이었다.

“그걸 저곳으로…… 응?”

제갈승계가 새로운 인기척에 눈을 크게 떴다.

“형님!”

주서천은 웃으며 손을 드는 걸로 인사에 답했다.

“그래.”

금의상단 산동지부의 지하.

이 석실의 정체는 바로 하나의 기관이었다.

아니, 이 석실을 포함하여 입구에서부터 시작해 그 밖의 지하 공간 전부가 거대한 기관이자 함정이었다.

주서천은 암천회와의 정면승부에 대비하여 몇 가지를 준비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기관이었다.

암천회와 대대적으로 싸우려면 공격만이 아니라 수비에서도 신경 써야 한다.

주서천 장본인이나 혹은 화산파야 괜찮으나, 그 주변 사람은 문제였다.

금의상단이 대표적이었다.

아무리 현경의 고수인 검마가 버티고 있다곤 해도, 혼자서 전부를 지켜내는 건 불가능하다.

금의검문도 있으나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금의상단의 재산을 보호할 겸, 산동지부에 대대적인 기관을 설치해 요새화하기로 했다.

또한, 이곳만이 아니다.

산동지부처럼 요새화할 필요는 없으나, 나중을 위해 무림 전역에 몇가지의 함정을 설치하는 중이다.

건축 자재야 상왕의 금력이 있으니 문제없었다.

그러나 인력이 부족했다.

기밀 유지가 필요해 아무나 쓸 수도 없었다.

마침 기밀 유지도 완벽하며 힘이 조금 센 것보다 훨씬 나은 최고의 인력이 있었다.

바로 유령이다.

“무림 고수를 인부처럼 부리다니……”

최소 무위만 해도 일류이며 초절정까지 있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었다.

일반무인이라면 치욕이라며 욕하겠지만, 유령이니 그럴 걱정은 없다.

육체에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 한해서 적절한 휴식을 취하며 인력을 대체하기로 했다.

산동의 괴음의 정체는 바로 기관장치의 설치였다.

“일의 진행에는 별 문제 없고?”

“있습니다.”

“그래, 네가 하는 일이니……응? 뭐라고?”

주서천이 두 귀를 의심했다.

“문제? 네가?”

다른 것도 아니고 기관이다.

그리고 그 기관의 설치자가 만각이천 제갈승계다.

삼안신투의 보고도, 흉마의 무덤도 그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그 어떠한 문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훗날 무림에서 금기시될 병장기조차 그의 손에서 탄생하지 않았는가.

기관에 대해선 그 누구도 따라올수 없는 정점이자 대천재에게서 나온 말이라곤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그야 야금술은 제 영역 밖이니까요.”

“야금술? 문제가 뭔데?”

“한철로 된 문을 만들어야 하는데, 제 솜씨로는 무리입니다.”

제갈승계는 기관의 천재다.

그리고 이 기관이란 건 생각 이상으로 복합적인 기술이다.

기본적인 설계부터 시작해 석공이나 야금술이 요구됐다.

기관장치를 제조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갈승계 역시 기초가 되는 기술은 알고 있었으나, 설계나 구조 파악, 배치, 해체 등 근본적인 걸 계외하곤 그 분야의 천재적인 장인을 따라가진 못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설 속의 금속인 만년한철을 제외하고 사실상 최고의 금속인 한철의 제련이었다.

과거에 주서천이 뱃속에 넣어준 영약이 체력이나 근력을 대신해 줬으나,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면 한철 말고 백련정강이나 현철을 쓰면 되잖아?”

백련정강이나 현철도 나쁘진 않다.

한철이 너무 뛰어나서 그런 것뿐이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갈승계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눈을 부릅떴다.

그 눈에서 살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모처럼 만드는 것인데 완벽하게 해야지요!

미완성을 만드느니 차라리 안 만드는 게 좋습니다!”

‘하여간……’

주서천이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다른 걸로 대체하라면 전 못 합니다!”

제갈승계가 배 째라는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로?”

주서천이 주먹을 꽈악 쥐었다.

‘……’

제갈승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싶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무, 무, 물로로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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