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五章 (174/254)

이 호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기를 제어했다.

외부에서 주입된 영기와 녹아들 듯 하나가 됐다.

여태껏 발버둥 치면서 지쳐버린 힘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전보다 몇 배 늘어났다.

그녀들이 처한 상황은 주서천이 추측한 대로였다.

최초에는 독기를 내공으로 태워 없애려 했다.

그러나 힘이 부족해 분해한 다음 땀샘으로 분출했다.

문제는 그 과정조차도 그녀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해독이 중독을 따라가지 못했고,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내기의 제어도 힘들어졌다.

결국 중간부터는 해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위험하던 찰나, 주서천이 알맞은 순간에 영기를 주입했다.

그 덕에 부족한 힘을 채우는 게 가능했다.

애뇌산의 독물에게서 모아온 독혈이 사나운 독니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독물조차 대자연에는 이기지 못했다.

영기의 급류에 휩쓸려 사라졌다.

어찌어찌 운 좋게 빠져나가도 소용없었다.

그 앞에는 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거미가 있었다.

마치 소용돌이로 빨려드는 것처럼 흡수되어 양분으로 전환했다.

‘아!’

‘낯빛이……’

노심초사하는 심정으로 지켜보며 가슴이 타들어 가던 화산파나 당가 모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샛노랗거나 푸르게 반복적으로 바뀌던 얼굴빛이 원래의 색을 찾았다.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원래부터 기의 조절, 운기능력은 천재답게 탁월했던 두 사람이다.

영기가 보충해 주자 해독이 빨라졌다.

또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텨준 덕분에 최악의 사태를 면하고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좋아. 이대로 임독맥을 뚫고 완전한 해독과 상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돕는다.’

직접적으로 움직이진 않는 대신, 경로를 정해 줬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눈치챌 수 있도록 영기에서 잔가지를 만들어내 툭툭 건드렸다.

펑!

마침 벽에 미세하게 남아 있던 노폐물도 깔끔하게 사라졌다.

통로가 뻥 뚫리자 순환이 보다 빨라졌다.

‘눈치챘다. 역시 두 사람이야.’

재능만 보자면 결코 이 둘을 따라갈 수는 없다.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또 무슨 의도로 잔가지를 쳤는지 금세 눈치채고 신속한 반응을 보였다.

최초 결분혈에서 시작된 흐름은 몸 곳곳을 돌아 독기와 노폐물을 씻어내고 단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단전에서 나온 영기는 척추를 따라 올라가 회음(會陰)을 시점으로 개통을 시작했다.

꼬리뼈인 미려(尾間)를 지나 척추의 중간 지점인 협척과 더불어 대추를 찍고, 머리 뒷부분의 옥침(玉沈)을 지난 뒤 백회(百會)와 머리 정수리와 양미간의 인당(印堂穴)을 타고 내려갔다.

목 앞의 정중선의 천돌(天突)에서 미끄러져 가슴의 정중앙인 단중(膳中)을 돌파해 위가 자리한 중완(中脘)을 거쳐 다시 단전으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가 흡 하고 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만약, 눈앞의 광경이 예의 그것이라면 목소리를 낸 것만으로 불구대천지수 취급 받아도 할 말이 없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놀란 목소리를 낼 때쯤 두 사람이 이미 눈을 떴다는 점이었다.

“사형!”

낙소월은 바로 옆 사형의 손을 빼앗아, 양손으로 잡으며 후광이 비칠 정도로 환한 미소를 보였다.

“전부 사형 덕이에요!”

낙소월은 답지 않게 흥분한 듯, 주서천의 손을 꼬옥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

“으, 응?”

주서천이 낙소월의 기세에 목을 움츠렸다.

“사형의 도움이 없었다면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무엇보다, 사형이 인도해 준 덕분에 깨달음을 얻고 화경에 오를 수 있었는 걸요.”

“……”

“독기만이 아니라 탁기를 배출하게 되면서 머릿속이 깨끗해져 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어요.

직접적으로 도와주시지 않고 길만 안내해 주신 것도, 제가 스스로 깨우치길 바란 거죠?”

“…………응.”

이참에 내단 좀 먹었으니 잘 흡수하라고 알려줬다.

절세의 미녀가 코앞에서 손을 붙잡고 미소 지어 주니 끝내주게 기분이 좋아야 정상인데, 그럴 수 없었다.

경지의 벽을 부수고 상승에 올랐다는 사실로 환희에 차 있는 사매의 기분을 깨뜨리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왜 화경에 올라?’

인면지주의 내단의 힘이 대단하긴 하지만, 쪼개서 나누어 준 만큼 약해져 양맥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전에 해독을 비롯해 노폐물 제거 및 탁기 배출에 힘썼으니 거의가 아니라 완전히 불가능했다.

노력이 보태 주면 하나 정도는 가능할 것이라 생각해서 유도해 줬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결과를 냈다.

‘도중에 깨달음을 얻어 자의로 뚫었다.

영약의 기운은 약간의 보조만 했을 뿐, 화경에 오르면서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뚫은 거야.’

촉각을 다루던 만혈독과의 싸움이 끝난 후,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자신, 육신을 돌아본 모양이었다.

그 후 영약의 기운이 치솟으면서 기력을 채우고, 임독양맥을 연 다음 소주천해 화경에 들었다.

‘스물에 화경?’

스물아홉 살인 파검봉보다 낮은 나이다.

보통 업적이 아니었다.

‘뭔……’

너무 어이없어서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전생의 매화검봉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사형에 비해선 부족하지만요.”

물론, 스물하나에 심상구현을 성공시켜 현경이라는 지고의 경지에 오른 주서천에 비할 건 아니다.

‘아닌데.’

하나 그걸 감안해서라도 보통 업적이 아니었다.

아니, 더 대단했다.

‘나야 회귀해서 이 정도까지 온 거고.’

인생을 이(二)회차 보내지 않았는가.

게다가 과거의 기억을 이용해서 각종 기연을 쓸어 담았었다.

“대단하네.”

경악하고 있는 와중,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당혜가 부러운 듯,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낙소월이 아차 하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저, 저기……”

“나한테 미안해할 이유 하나도 없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내가 부족했던 것뿐이니까.”

당혜 역시 재능만으로는 결코 낮지 않다.

그러나 낙소월의 역량이 한 수 위였다.

화경이란 게 내공이 따라준다고 누구나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에 맞는 깨달음과 천운이 필요했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대부분 죽을 때까지 모른다.

천운이 닿아 봤자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을 때다.

주서천이 이 경우에 해당했다.

낙소월과 달리 당혜는 재능도 천운도 부족했다.

“나도 소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만혈독 덕에 독을 좀 더 다룰 수 있게 됐으니까.”

내단의 기운으로 상당량의 내공도 얻었으나, 독인에게 있어선 부수적인 것에 해당했다.

당혜는 낙소월과 달리 만혈독을 전부 해독하지는 않았다.

독인에게 있어서 독기는 내공이자 곧 힘. 그래서 완전히 해소하진 않고 도리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원래라면 아버지인 당가의 가주조차 부담스러워 할 수준이었지만, 영기의 도움 덕에 가능했다.

“그보다, 당신이 왜 그런 눈깔로 쳐다보는지 궁금하네.

소름 끼치니까 그만해줬으면 해.”

당혜는 자신을 뻔히 쳐다보는 주서천을 기분 나쁜 듯이 흘겨 봤다.

“아니, 뭐…… 의외라서.”

“의외? 뭐가?”

“지금쯤 자존심이 잔뜩 상해서 ‘저만 화경에 올라서 미안해요, 라니. 같잖은 동정하는 거야? 그런 기만은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충고할게.’ 라면서 인성 터진 독설을 낙 사매에게 퍼부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자존심으로 우열을 가릴 수 있다면 당혜는 우스갯소리로 상천칠좌에 들수 있다.

그 정도로 드세다.

동일한 상황을 겪었음에도 누구는 화경의 올랐으니, 그녀 성격상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그런 게 아니니까요……!”

낙소월이 주서천의 말을 듣고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이 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흥.”

당혜는 기분 나쁜 듯 눈살을 찌푸렸다가, 콧방귀만 끼고 몸을 휙 돌렸다.

‘보는 눈이 많으니 내가 혼자 있을 때 죽여 버리겠다는 뜻인가? 밥 먹을 때 조심해야겠군.’

콧방귀의 의미를 해석하던 도중, 손일산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할 말이라면 정말로 많으나, 하나만 묻겠소. 다 끝난 거요?”

“이런, 죄송합니다.”

그제야 사람의 시선을 눈치챈 주서천이었다.

“호법을 서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만, 수고스럽게도 한 번만 더 호법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정도야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니 얼마든지 해주겠소만…… 누구의 호법을 말이오?”

“접니다.”

주서천 역시 신체 내부에 영기가 감돌고 있었다.

두 사람을 돕느라 흡수하지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

“허, 설마 그만한 걸 지금까지 품고 있었던 거요?”

손일산이 놀라는 것도 이상한 건아니었다.

보통, 인면지주 정도 되는 영물의 내단을 복용할 경우에는 최대한 빨리 자기 것으로 갈무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단의 기운을 날숨으로 소실하거나, 체내에서 폭주해 신체를 망가뜨리기 때문이었다.

“상천칠좌가 그것도 못하면 비웃음 당합니다.”

무공의 극의를 넘어선 단계, 현경 정도 되면 내가진기의 운용이 자유로워진다.

영약이나 내단을 복용하여 외부에서부터 흘러 들어온 기운 또한 마찬가지라서, 딱히 문제되지 않는다.

날숨으로 영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기맥이나 단전에 저장해 두는 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인면지주.”

인면지주로 향하는 주서천의 시선이 좀 바뀌었다.

아무리 협상을 체결했다곤 하지만, 섣불리 믿을 수는 없었다.

틈을 보이면 배신할 것 같아 경계했다.

만약 낙소월과 당혜가 위급하지만 않았더라면 장소를 바꿔서 해독했을것이다.

도중에 훼방이라도 놓았다면 주화입마를 초래했을지도 모르니 당연했다.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서 도왔으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다행히도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네 독이 필요하다.”

주서천이 인면지주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위험, 한, 일을, 생각하는, 군.”

“눈치챘어?”

거미의 위턱과 아래턱 사이, 엄니 바로 밑으로 손을 내밀었다.

“주 대협!”

“검신!”

주서천!”

곳곳에서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그렇지, 배고픈 맹수의 아가리 안에 머리를 집어넣는 격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끌어내고 싶었지만, 자칫 잘못해서 인면지주가 흥분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호법을 서되 제 근처로는 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나름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통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냥 시끄러운 걸 뒤로 하고 진행했다.

“역시, 인간이란, 욕심, 의, 생물, 이로구나.

그 용맹, 함에, 경의를, 표한다.”

뚝.

독니에 맺힌 시커먼 물방울이 손바닥 위로 떨어지자마자, 몸 내부에 그 독을 전부 흡수했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동안 사람들은 주서천이 말한 대로 근처에 가지 못하고, 그 주변을 감돌면서 노심초사하게 지켜봤다.

혹시라도 방해가 될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리고 한 시진 뒤.

주서천이 미소를 지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생각한 대로다.’

왼쪽 눈이 녹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만독불침(萬毒不侵)에 올랐다.’

백독불침, 천독불침의 상위 경지.

만 가지 독도 침범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정말로 정확히 만 가지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실상 그 어떤 독도 통하지 않는 전설 상의 경지였다.

약 백여 년 전의 절대고수, 녹안만독공을 창공한 독마가 이 만독불침의 경지였다.

이론상 녹안만독공을 대성할 때쯤에 만독불침에 든다곤 했으나, 중도만공의 제한에 가로 막혔다.

현경의 절대고수인 데다가 천독불침이라면 웬만한 독은 통하지 않지만, 무형지독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혹시 하는 마음으로 갖은 수단을 찾아보고 독왕에게도 물어봤지만, 존재하지 않아 체념했다.

차선책으로 인면지주의 거미줄을 얻지 못하도록 보급을 끊는 걸 택했었다.

그러나 인면지주를 본 순간,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인면지주의 기운을 전부 독으로 전환한다.’

독의 내성이란 건, 결국 면역력이다.

술을 마시면 늘듯이 독 역시 단계별로 복용하면 내성이 생기게 된다.

독공의 수련이 여기에 해당한다.

어릴 적부터 약한 독부터 먹여가며 독기를 저장할 수 있도록 한다.

목숨이 위험할지는 몰라도 무척 효과적이었다.

주서천도 이 방법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인면지주의 내단을 복용한다.

그리고 그 영기를 인면지주의 독으로 자극한 다음 전부 독기로 전환한다.

독공 중 신공의 반열에 드는 녹안만독공이 있으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나, 누군가가 특히 독공을 수련한 이가 이 속내를 듣는다면 미쳤다고 기겁할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그럴싸 하지만, 미친소리였다.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인면지주는 영물 중의 영물이며, 독물 중의 독물이기도 하다.

만혈독만큼은 아니어도 극독에 이르렀다.

헌데 그 극독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영기로 융화한 뒤 중폭까지 시켰다.

아무리 나누었다곤 하지만 인면지주씩이나 되는 영기를 전부 독기로 전환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사람의 면역력이란 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무림인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독공이라 해도 한계는 있다.

‘녹안만독공, 천독불침, 중도만공.’

그러나 갖가지 요건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녹안만독공으로 독의 제어는 문제없었다.

조금 버겁기는 해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영기가 인면지주의 극독에 녹아들면서 전부 독으로 전환되자, 천하의 주서천도 조금 버겁기는 했다.

천독불침이 아니었더라면 사태가 위중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는 중도만공이 큰 역할을 했다.

중도만공은 무공심법의 고유의 성질에 상관없이 다수의 무공이 공존할 수 있게 해 준다.

음양이기는 물론이고 마도의 기운조차 조화(調和)를 이루게 하는 게 그 원리였다.

이 원리를 응용하여 홍수처럼 범람한 독기가 체내에서 어울릴 수 있도록 거부감을 최소화했다.

그 결과 성공적으로 만독불침에 오를 수 있었다.

“인간의, 가능성은, 끝이, 없다고는, 생각, 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이야.”

유일하게 주서천의 생각을 눈치챘던 인면지주가 믿기지 않는 듯, 놀라운 감정을 드러냈다.

“사형!”

낙소월이 새처럼 날아오듯이 다가왔다.

상승의 벽을 허물고 화경의 고수가 된 만큼 움직임도 남달라졌다.

남들에게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으세요?”

낙소월이 주서천을 올려다봤다.

걱정스러운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면 절로 애처로운 느낌이 난다.

‘아니.’

심장이 영 좋지 않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몸짓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에서 은은하게 감도는 매향은 후각은 물론이고 뇌까지 자극했다.

“혹시 아직 편찮으신 건가요?”

사형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낙소월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둥둥 굴렸다.

“어흐흠, 괜찮으니까 걱정 마.”

“정말로요? 절 안심시키려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죠?

그런 거라면 저, 화낼 거니까요.”

쌍심지를 켜며 엄한 표정을 짓는 것조차 예뺐다.

“봐봐, 피부색도 이렇게 멀쩡하잖아.”

주서천이 소매를 걷어 팔을 보여줬다.

낙소월은 팔 외에도 목이나 낯빛 등을 한참이나 이리저리 살펴보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이내 눈썹을 찌푸리면서 잔소리를 퍼부었다.

“정말이지, 사형과 지내다 보면 간이 콩알만 해지는 것 같다니까요. 이게 몇 번째인지 아세요?”

행방불명은 기본이요, 어디 멀리나가면 연락도 잘 되지 않는다.

아무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지만, 여태까지의 행보를 보면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실력이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 걱정이 들었다.

“하하하.”

“웃을 일이 아니에요.”

낙소월이 불만인 듯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네.’

팔불출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사실이다.

토라진 모습조차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의 화를 어떻게 가라앉혀야 할지 어쩔 줄 몰라 할 때쯤,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악!”

“괴, 괴물!”

“이, 인면지주다!”

일행의 시선이 목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수풀을 헤치고 나은 건 반으로 갈라졌었던 탐색대였다.

“꽤나 놀랍네요.”

파검봉, 단리화에게서 미성(美聲)이 흘러나왔다.

점혈법은 도중에 구출한 탐색대에게 도움을 받은 그녀였다.

“웅권협은 왜 저 모양인가?”

손일산의 시선이 이출에게로 향했다.

정신을 잃은 채 죄인처럼 나무줄기로 포박된 채였다.

“아무래도 서로 해줄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요?”

단리화가 앵두 같은 입술을 검지로 꾹 누르며 웃었다.

긴 속눈썹 아래의 눈동자에는 흥미가 감돌았다.

“양측의 사정을 전부 알고 있는 건 한 사람밖에 없은데, 맞나요?”

시선이 한 곳으로 몰렸다.

단연 주서천이었다.

주서천은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설명에 나섰다.

서릉협에 들어온 이후부터 요점만 뽑아 설명했다.

이출의 이름이 나올 때는 대부분 분노를 금치 못했다.

거미 무리가 움찔 떨 정도로 살기가 들끓었다.

“예상은 했으나 함정에 이리도 쉽게 걸려들 줄이야.

부끄럽군.”

몽각이 혀를 차며 자책했다.

혈독노인이 등장한 후부터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으나, 그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웅권협.”

손일산이 어느덧 정신을 차린 이출을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이 정파를 배신한 겐가.”

웅권협이라면 천하백대고수에 들기전부터 약자를 돕고, 신의를 지키는 협객으로 유명했다.

젊었을 적부터 사리를 분별했으며 넘치던 혈기는 사람을 돕고 악인을 처벌하는 데 사용했다.

비록 역사에 남을 정도로의 위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백성들을 비롯한 정파인에게 존경을 받았다.

괜히 이번 여정에서 부대주로 추천받은 게 아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누구보다 믿을만한 협객이었다.

그 중거로 무림맹 출신 소속 무사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찌하여 배신했냐고 물었소?”

적의 가득한 눈초리가 손일산으로 향한다.

“나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무얼 말하는 거요?

근본도 없는 무공으로 어쩌다 운이 좋았던 무인?”

이출은 비꼬듯이 물으며 코웃음 쳤다.

“웅권협……”

“위선 떨지 마시오, 금주봉개. 역겨우니까.”

이출이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성난 곰과 같았다.

“명문지파의 무인으로서 태어나거나, 거두어진 당신네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 심정을 모를 거요.”

고아 출신이 응당 그렇듯, 이출 역시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한적한 촌에서 살다가 도적 떼에 습격당해 일가친척을 모두 잃었다.

이출은 노비로 팔려나갈 뻔했다가, 운 좋게 도망치는 데 성공하여 중원 전역을 떠돌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소문파의 문주의 눈에 들어 제자로 들어갔는데, 그곳이 바로 웅권문(熊拳門)이다.

웅권문은 그리 대단하진 않은 곳이었다.

문도도 이출을 포함해 여섯 명이었고, 문파 수준도 이류였다.

그래도 스승이자 웅권문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곰의 형상을 참조한 권법을 열심히 수련했다.

이출은 무공에 그럭저럭 소질이 있어 날이 갈수록 강해지긴 했으나, 호사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강호에 잠시 출두해 있던 웅권문주가 불의의 사고로 그의 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후 이출은 평소 정의롭고 협의를 중요시했던 웅권문주의 뜻을 이어 강호에 출두해 사람을 도왔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여러 싸움을 겪으면서 상승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었고, 자랑스러운 별호도 얻었다.

그리고 바로 얼마 뒤에 무림맹에서 제의가 왔다.

‘그래. 무림맹이라면 내 뜻을 펼칠기회가 더 많을 것이다.’

스승은 항상 사문의 재건보다는 의협을 중시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무림맹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집을 잃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어린아이를 구원했던 것처럼,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러나 무림맹은 썩었다.”

무림맹이 오욕칠정에 휘둘리는 막장 집단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내부에선 정도와 어긋난 것이 존재했다.

바로 차별이었다.

“몇십 년 동안 노력해서 일군 무위로 협의를 이루어도 대문파가 아니라면 우습게 보이는 것이, 지금의 무림맹이다.”

오대세가인 당가도 은연 중에 무시받는 곳이 무림맹이다.

중소문파 출신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웅권협은 충분히 존경받는 무인임에도, 무림맹 내부에서의 취급은 참으로 미묘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강호를 떠돌던 시절에도 정파의 철부지들이 명문지파라는 인맥만 믿고 거들먹거리던 걸 제법 봤다.

몇몇은 나이 먹고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자존심만 드세 별별 추한 짓을 하는 경우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정파의 중심인 무림맹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중소문파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무시를 당했다.

“정파 연합? 헛소리!”

이출은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무림맹은 정파 연합이 아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이루어진 명문지파 집단일 뿐이지!”

언제는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다.

무림맹에 신설부대가 생겼다.

이 신설부대의 대주로 두 후보가 추천됐다.

첫 번째는 후보는 이출이 아끼던 수하였다.

비록 삼류문파 출신이었으나,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절정 고수였다.

부하들에게 인망도 두터웠다.

두 번째 후보는 구파일방 출신의무인이었다.

무공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하진 않았다.

이제 겨우 절정에 오른 새파란 애송이였다.

인성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출의 수하에 비해선 실력도 경험도 부족했다.

당연히 대주가 되는 건 수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달랐다.

대주직은 구파일방 출신의 무인에게로 돌아갔다.

“이보게나, 웅권협. 자네가 모르나본데……”

“그 ‘어쩔 수 없었다’라는 사정 말인가!”

이출이 분노의 일갈을 터뜨렸다.

“무림맹을 세운 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일지 몰라도, 그 외의 정파인 또한 함께한 걸 왜 모르는가!”

이출도 현실을 모르는 어린아이는 아니다.

“그 기둥인 구파일방 출신을 무시한다면, 불협화음을 만들 것이 분명하니까!”

순수함을 유지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무슨 말인지 알고 있다! 어쩔 수 없다는 거, 잘 알고는 있다! 현실을 모르는 게 아니란 말이다!”

무림인, 특히 정파인은 명예를 누구보다 중요시한다.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자존심이 밥 먹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잖나!”

구파일방 출신 제자가 한낱 무림맹 소속 무사, 삼류문파 출신에게 진다면 그 명예도 떨어진다.

문제는 명문지파 등의 정파인들이 이 점을 지적하면서 옛날 같지 않다며 비웃는다는 것이었다.

우습게도 그것만으로 무림맹 내부에서도 발언권이 줄어들고, 무시까지 당한다.

“우리는 정도를 걷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정식제자나 속가제자도 줄어들고, 밥줄도 끊길 수밖에 없다.

의뢰 역시 줄어든다.

정파 무림의 경제는 곧 자존심이며 명예였다.

“이 위선자 새끼들아-!”

그래서 강호의 협객은 천추성이 됐다.

웅권협, 이출의 외침은 정파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머리로는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무림맹, 아니, 정파에선 확실히 출신을 중요시한다.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강력한 무공, 무림에 끼치는 영향력 등이 있으니 대접받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이러한 대접이 과도해지는 것이 문제였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문제다.

“공자왈, 군자주이불비(君子周而不比) 소인비이부주(小人比而不周)라 하였다.”

군자는 사람을 넓게 사귀되 패거리를 짓지 않고 소인은 패거리를 지을뿐 사람을 넓게 사귀지 않는다.

논어에 수록된 말이다.

“정파인이 아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만을 위한 현 무림맹 따위는 무너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출은 혐오 어린 눈으로 주변인을 둘러봤다.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게 된 파벌이 차별을 낳는 순간, 무림맹의 운명은 끝난 것이다.”

증오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눈빛은 잠시 가라앉으며, 주서천의 바로 옆인 당혜에게로 향했다.

“독봉, 그대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지 않나.

독공이라는 연유만으로 얕보이고, 무시당한 일을 말이다.”

“……”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내부에서도 공공연연한 차별이 존재하니 우스울 일이지.”

이출은 이죽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대의 오라비 역시 일찍이 무림맹의 위선과, 그 부당함을 깨닫고 천추성을 이끌게 됐다.

비록 오대세가의 소가주이나, 혜안을 지닌 분으로 푸대접이 아닌 존경을 받아야 할사람이다.”

기득권층을 향한 이출의 분노는 막대하였으나, 당명인 같은 사람은 제외였다.

그에게 당명인은 도리어 강요받은 희생을 수행하였음에도, 주어지는 특권을 거절한 채 잘못된 걸 고치려 하는 이였다.

“그러니, 그대 또한……”

“헛소리하지 마라.”

주서천이 이출의 말을 가로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또 무얼 지적하는 건지는 잘 알고 있다. 하나 그게 정당화될 수는 없다.”

“주서천……!”

“암천회, 천기는 사람의 마음에 교묘하게 파고들어 감언이설로 그럴듯하게 회유하여 남의 이상을 사익에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확실히, 무림맹은 잘못됐다. 그걸 부정하진 않는다.

이출의 지적은 옳았다.

물은 고이면 썩기 마련이며, 친목이 과도하면 파멸을 부른다.

약자를 돕고, 신의를 지키며, 나아가 무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공공집단이 시간이 흐르면서 구성원의 이익을 위해서 사유화되는 건 잘못된 게 맞다.

사도천처럼 개인의 권리 및 이익이 목적이었다면 또 모른다.

정도인 무림맹이 그래선 아니 됐다.

전생의 역사에서도 비스무리한 일이 많았다.

무림맹의 기득권층에 신물이 난 이들이 돌아서기도 했다.

무언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에 암천회에 입회하여, 여덟 기관의 일원이 됐다.

“정녕 잘못된 걸 알고 있다면……!.”

“의도는 좋았지만, 방법이 잘못됐다는 말이다!”

주서천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 외침에 주변인들이 깜짝 놀랐다.

“정말로 올바른 길을 걷고 싶었다면, 잘못된 걸 고치고 싶었다면, 암천회만큼은 택하지 말았어야 해!”

“……”

“사람이건 동물이건 간에 온갖 생명체를 제물로 써대는 피에 미친놈들이나, 힘이 곧 전부라면서 면죄부인 양 지껄이는 마교를 끌어들인 놈들을 믿다니, 제정신이냐?”

설사, 암천회의 진정한 목적이 기득권층의 부조리를 없애는 것이라 해도 한참은 잘못됐다.

“상황에 따라 필요하면 죄 없는 사람은 물론이고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조차 끌어들여 희생시키는 게 암천회다!”

전란의 시대.

정말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 광경이 잊혀지지 않는다.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강을 만들었다.

가족 잃은 사람의 절규가 귓가에 감돌았다.

고통으로 가득찬 비명 소리가 마음을 파고들어 괴롭혔다.

수십 넌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은 기근과 질병으로 허덕였다.

그야말로 대학살이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일어나 버렸다.

인생을 다시 사는데도 막지 못했다.

그저 피해를 최소화할 뿐이다.

“어떤 목적을 가졌건 간에, 목적을 위해 각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전쟁을 일으키는 천하의 개쌍놈 새끼들이랑은 상종하지 않았어야 한다.”

전쟁만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은 전쟁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야.”

어떤 이유로도 생기지 말아야 할 다툼이었다.

“……아…지……않……가……”

이출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웅권협이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머리 아래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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