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章 (173/254)

검신의 위용에 혈독노인이 몸을 흠칫 떨었다.

방금 전까지 잘난 듯이 떠들던 기세나 기분 나쁜 웃음소리도 없다.

고양이 앞의 생쥐 꼴과 같았다.

쿵!

얼음처럼 굳어져 침묵에 잠겨 있는 사이, 지면이 다시 흔들렸다.

초대형거미, 인면지주가 정신 차리라는 듯 발을 굴러 압도당한 혈독노인의 사념을 없앴다.

“건방진 것!”

혈독노인이 주서천을 내려다보며 콧방귀를 꼈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 정도 되는 수를 상대하며 누군가를 지킨다는건 불가능할 게다.”

계획이 틀어져 화산파의 전멸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우선 목표인 낙소월의 목숨만이라면 앗아갈 수 있었다.

“네 사매는 물론이고 당가의 계집도 저승으로 데려가 주마. 괜히 오지랍 떨지 않았으면 조금이라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 참으로 어리석도다.”

중독자의 해독을 돕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행위다.

자칫 잘못하면 독기가 옮겨질 수도 있고, 운기조식처럼 외부의 충격을 받고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모른다.

전자건 후자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굳이 주서천을 쓰러뜨리지 않아도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지금부터 본 부대는 공격이 아닌 수비에 집중합니다.

낙소월과 당혜의 호법을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해독이 끝날 때까지 버틸 생각이오?”

손일산이 물었다.

거미도 벅찬데 칠성사병까지 나타났다.

수를 대충 세어도 몇십 단위다.

얼마나 버틸지가 의문이었다.

“아니오.”

주서천이 검을 빙글 돌려 고쳐 잡았다.

“그 전에 끝낼 거요.”

무릎을 접었다 피면서 튀어나갔다.

마치 활시위에 걸어둔 화살이 쏘아진 것처럼 보였다.

‘매화접무.’

잡초가 발목까지 자라 방해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초식을 전개한다.

나비가 너울거리듯 춤을 췄다.

“크아악!”

앞에 서 있던 칠성사병이 비명을 질렀다.

복면이 얇게 잘리면서 턱부분도 위와 아래로 분리됐다.

매화처럼 흩날리는 피 안개 속에서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매화토염으로 요염한 기운을 내뿜었다.

주변의 광경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혈독노인이 어림없다는 듯 미증유의 힘을 끌어올렸다.

삼단전 중 중단전(中丹田)이라 일컬어지는 심장에서부터 혈기를 뿜어내 혈맥과 기맥으로 동시 순환한다.

혈기가 백회혈을 두드리면서 두뇌를 자극했다.

광기로 일렁이는 안광은 점차 핏빛으로 번졌다.

확장과 축소를 수차례나 반복하는 동공은 기괴하게 느껴졌다.

“노부의 혈어술법(血御術法)을 보여 주마.”

혈독노인의 쉰 목소리가 숲 일대에 퍼졌다.

인위적인 감각신호가 말초신경을 통해 척수로 들어간다.

교감과 부교감 신경이 몇 차례나 부딪치면서 여러 작용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척수가 각종 신호를 뇌로 전달해 특정한 파장을 만들어 냈다.

뇌에서부터 흘러나온 파장은 파도가 되어 주변을 집어삼켰고, 그중에서도 거미의 신경에 녹아들었다.

부르르르.

거미 무리가 일제히 몸을 떨었다.

세 쌍을 이루는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뇌에서부터 내려진 명령은 거미의 혈액을 뒤흔들고 그 육체를 지배했다.

푸슈슈슛!

거미 무리가 일제히 방적 돌기에서 거미줄을 뽑아냈다.

새하얀 실이 그물처럼 퍼져 주서천을 덮었다.

하나도 아닌 수십여 마리가 동시에 뿜어낸 거미줄이 한 곳에 집중되자 설산처럼 쌓였다.

“혈어술법!”

개방도 중 누군가가 놀란 듯 외쳤다.

“거미를 수족처럼 부리는 것의 정체였구나!”

천하백대고수의 반열에도 올라온 혈독노인은 독공의 고수임과 동시에 타고난 재능을 지닌 주술사다.

혈독노인은 섭혼술을 즐겨 사용하며 그중에서도 혈어술법은 혈교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상위 주술이다.

온몸의 기혈을 비롯하여 심장을 통해 감각신호를 만들어 내고, 대상의 뇌에 침투하고 혈액을 지배해 최종적으로 몸을 조종한다.

그게 혈어술법이었다.

다만, 능력은 강력해도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사람의 경우에는 뇌 구조가 복잡하여 까다롭고, 정신력이 강할 경우에는 잘 통하지 않았다.

소림사처럼 항마가 깃든 심법을 수련했다면 두말할 것 없다.

조금도 침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성가신 점이 있음에도 혈어술법은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과거의 전쟁 도중, 초절정 고수가조종당해 내부에서 날뛰어 전쟁의 패인이 된 경우가 있었다.

여러모로 혈마의 심상구현과 닮았다.

굳이 따지자면 하위호환에 속했다.

‘끝이다.’

혈목노인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인면지주도 인면지주지만, 그녀의 자식들 또한 영물이다.

체내에서 뽑아낸 거미줄의 끈적임이나 탄력은 보통이 아닌데 그게 집중되었으니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상천칠좌라고 한들……”

파앙!

거미줄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거미집.

그 중심에 사람만 한 구멍이 뚫리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상천칠좌가 뭐라고?”

주서천이 무심한 목소리로 검기를 뽑아냈다.

휘익!

애검인 용연을 휘두르며 초식을 잇는다.

예기를 품은 검기 다발이 정면에 뿜어졌다가 도중에 직각으로 꺾여 위로 치솟고, 이어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수많은 매화 잎이 떨어지는 것 같은 광경이 혈목노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사초식인 매개이도에서부터 칠초식 매화빈분까지.

순식간에 이십사수매화검법이 펼쳐졌다.

키에에엑! 캬악! 끼이이이익!

어지럽게 떨어지던 매화가 눈을 껌뻑이니 혈우(血雨)로 변했다.

거미의 몸에 수많은 검흔이 남았다.

“아아악!”

“컥!”

거미만이 아니다.

요광이 배정해준 칠성사병들에게도 어김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 무슨……”

혈목노인이 믿기지 않는 듯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주서천은 거미줄은커녕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호신강기.”

주서천이 아무렇지 않은 듯 친절하게 답했다.

거미줄이 분사되기 직전, 강기의 막을 반구형으로 펼쳐 막아냈다.

그 증거로 사람만 한 크기의 구멍이 뚫린 곳의 내부가 반구형으로 비어 있었다.

“이익!”

혈목노인의 피부 위에 새겨진 고문이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싶더니, 격렬하게 움직였다.

핏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던 광채의 세기도 커지기 시작했다.

마치 감정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냐, 주서천! 검신이란 건 허명이 아니로구나!”

분노에 휩싸인 목소리가 숲 곳곳에 울렸다.

“하나, 혈마조차 넘어선 이 노부를……”

푹!

혈목노인의 목이 꺾이듯 뒤로 젖혀졌다.

‘무, 슨……’

주서천이 왼 손목을 털듯이 흔들더니만, 소매 자락 안에서부터 비수가 튀어나와 이마에 꽂혔다.

설마하니 검신이나 되는 정파의 절대고수가 암기를 던질 줄 몰랐는지, 생전의 얼굴은 황당함을 띠고 있었다.

털썩.

육체가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인면지주에 올라 일행을 내려다보던 노마두는 지면으로 떨어졌다.

“혈마를 넘어서?”

주서천이 어이없는 듯 코웃음을 쳤다.

“혈마를 모욕하지 마라.”

천마도 천마지만 혈마 역시 손꼽히는 강자다.

무공도 주술도 혈목노인은 그 발끝만도 못하다.

만약 혈마와 다시 싸우라고 하면 그 결과는 주서천도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최후는 재앙 그 자체였다.

흑관이라는 법보를 이용해 육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큭!”

“혈독노인이 당했다……”

생존한 칠성사병들이 당황했다.

설마 혈독노인이 저리 허무하게 당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임무를 수행한다.”

천기는 낙소월의 사망이 확인되지 않으면 철수를 불허했다.

이대로 돌아가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낙소월을 사살한다.”

“당혜는?”

“포기해도 좋다. 낙소월을 우선으로 해라.”

“명.”

칠성사병이 각자 쥔 검병기에 힘을 주었다.

그들은 필사를 각오한 눈으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성가시다.’

주서천은 칠성사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연대구품이나 천마군림보처럼 실체와 같은 허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으니 문제였다.

천기가 목적의 달성을 위해 힘 좀 썼는지, 눈앞의 칠성사병들의 무위가 절정에서 초절정뿐이다.

심지어 합격진에도 능한 건지 각자 조를 짜고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덮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탐색대가 호법을 서고 있었지만, 하나라도 놓치면 큰일이다.

“징한 놈들! 겁 좀 먹고 도망쳐라!”

사병인 주제에 개개인의 무력이 몹시 대단한 데다가, 심지어 필사의 각오까지 거리낌 없이 한다.

방심하지 않는다는 점도 여전히 짜증났다.

“주서천. 그만 좀 방해하고 죽어라. 부탁이다.”

칠성사병이 진심을 다해 말했다.

주서천 탓에 희생된 동료들만 해도 수백 단위다.

딱히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는 건 아니지만, 그 다음 희생자가 자신이 될 생각에 한숨만 나왔다.

“목숨을 걸고 지켜라!”

담향이 호기롭게 외쳤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서천이 탐색대원을 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殺).”

칠성사병 중 누군가가 명령을 내렸다.

양측이 부딪치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커허억!”

칠성사병이 피를 울컥 토해냈다.

“무, 무슨……”

시선을 아래로 천천히 내려 봤다.

가슴에 뻥 뚫린 구멍 사이로 거미의 다리가 보였다.

푹! 푸욱!

“커헉!”

“아악!”

“끅!”

여기저기서 비명이 난무했다.

다행히도 아군의 것은 아니었다.

전원 칠성사병의 입을 통해 나왔다.

‘……’

주서천도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거미!’

난리의 원인은 제어에서 풀려난 거미였다.

스스스슥!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어둠에서 괴생물체가 기어온다.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운 거미가 점차 늘어났다.

장서은이 기겁하는 비명이 들렸다.

굳이 뒤편을 볼 것도 없이 주변에 거미의 무리가 까맣게 몰려들었다.

“……사람……의…… 아이야……”

방금 전까지 일행을 농락했던 목소리.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여기저기서 경악과 불신 어린 외침이 터졌다.

“혈독노인?”

목소리의 정체는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혈독노인이었다.

여전히 이마는 비수에 꽂힌 채였다.

다른 게 있다면 등이었다.

바닥에 엎어져 있었는데, 등 위로 거미의 다리가 보였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배 위의 무늬가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는 초대형 거미, 인면지주가 있었다.

“가증, 스러운, 노마에게, 서, 구해준, 것을, 고맙게, 여기마.”

무인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믿기지 않지만 정황상 인면지주가 혈독노인의 발성기관을 빌려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나 아무리 영물이라도, 거미가 사람의 신체를 빌려 사람의 말을 한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그, 답례, 로……”

“내단을 내놔라.”

주서천이 검신에 강기를 실었다.

“큭큭큭, 괜한 반항 하지 않고 내단만 내준다면 너와 네 자식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도록 하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정파의 영웅이 아니라 마도의 마두 같았다.

인성파탄자로 불려도 할 말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인면지주가 사람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이 워낙 커서 유야무야 넘길 수 있었다.

“그리, 어렵, 지, 않은, 일, 이다.”

“협상은 결렬인가. 할 수 없…… 응?”

“나의, 것은, 무리지, 만은……”

끼기긱_인면지주의 배 아래로 열댓 마리의 거미 무리가 무언가를 들고 기어 나왔다.

“본녀, 와, 같은, 종, 의, 수컷이다.”

거미 중에선 짝짓기 중 암컷이 수컷을 먹잇감이나 위협으로 착각해 죽이는 경우가 존재한다.

인면지주의 경우가 그랬다.

그녀에게 수컷이란 번식을 위한 개체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배가 부르고 귀찮으면 내버려 두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짝짓기를 하려 근처에 오면 가차 없이 죽인다.

그중에는 그녀처럼 영물로 태어나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낸 동족도 존재했다.

이 내단의 주인도 그랬다.

‘흐응.’

주서천이 거미에게서 내단을 건네받아 확인한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둥근 공의 모습이었다.

‘가짜는 아닌 것 같고……’

손에서 전해지는 기의 흐름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직 복용하기도 전인데 이 정도의 느낌이라면 그 효능은 두말할 것도 없다.

진짜배기가 틀림없었다.

‘이 정도의 지성이라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인면지주.”

“말, 해라.”

“거래하지 않겠나?”

“거, 래?”

주서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믿을지 말지 자유지만, 이 서식지밖에는 너희를 노리는 무리가 존재한다. 그들은 너희의 내단뿐만 아니라 거미줄 등을 노리고 있다.”

“알고, 있다. 기억이, 나는, 군.”

인면지주의 영험함이나 오성은 보통이 아니다.

혈어술법의 지배하에 있었음에도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일을 기억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그녀를 괴롭혔던 건 거미줄부터 시작해 독이나 피를 억지를 뽑아내던 광경이었다.

혈독노인이 독공에도 조예가 있다보니, 독이나 피를 뽑아서 만혈독 등의 제조에 실험재료로 사용했다.

“그 무리를 처리해 주마.”

“흐, 응.”

외부의 적이야 죽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전례의 피해를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 없었다.

인면지주는 삼십 년을 넘게 암천회에 지배당해 가축처럼 살아왔다.

그 고통은 말로 헤아릴 수 없다.

아이들의 경우는 지성이 낮아 잘 모르거나, 아예 인식조차 못 하지만 높은 지성의 소유자인 그녀는 달랐다.

괜히 후에 중상을 입을 경우를 대비하여 숨겨둔 동족의 내단을 시원스레 내준 것이 아니다.

“그대, 가, 원하는, 것은, 무엇, 인가?”

“정기적인 독과 거미줄의 제공.”

혈독노인에 연결된 다리가 꿈틀거렸다.

만약, 은혜가 없었더라면 당장이라도 찢어발겼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무리가 안 가는 선에 한할 거니 오해하지 마라. 너무 작지만 않으면 그 양은 네가 정한다.”

“인간의, 욕심, 은, 끝이, 없다.”

인면지주가 무얼 걱정하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독이나 거미줄은 그렇다 쳐도, 영물의 내단은 무림인에게 있어 돈으로 결코 환산할 수 없는 보물이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눈을시뻘겋게 붉히며 달려들 게 뻔한 일이었다.

“이곳의 위치를 아는 건 극소수이니 걱정할 것 없다.

앞으로도 그럴거고.”

이 주변은 난해하고 무시무시한 기문진으로 감춰져 있다.

일반인은커녕 무림인도 쉬이 접근할 수 없었다.

“만약, 이후에 숲에 열 명 이상이 출입할 경우 판단 하에 죽여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 서식지에 방문할 이들은 정해져 있다.

당가의 적통 정도다.

서식지의 출입구이자 기문진의 생문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참고로 서룽협에 오기 전, 탐색대원에게 기밀을 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았다.

당가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밀인지라, 당유기가요구했다.

‘일반적인 무림문파는 몰라도 당가에게 독과 거미줄, 내단 중 선택하라 하면 당연히 전자다.’

독인에게 있어서 극독이란 내단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녹안만독공을 수련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최소 천 년 이상의 세월을 지내온 영물, 인면지주의 내단의 가치는 천고의 보물에 해당한다.

단기적으로 생각한다면 최고는 인면지주다.

하나, 장기적으로 생각한다면 무형지독의 재료인 거미줄과 상급의 독의 정기적인 제공이 최우(最秀)였다.

“……”

인면지주는 고민에 잠긴 것인지 침목에 잠겼다.

기분 나쁠 정도의 고요함.

그 고요함이 주서천을 포함한 일행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만약 여기에서 거절한다면 어찌 될지는 뻔하다.

언제라도 싸울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했다.

표정이라도 살피면 좋겠지만, 거미의 얼굴 따위 자세히 봐도 알아볼 리 없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받아, 들, 이지.”

“정말인가?”

“괜찮, 은, 조건, 이다.

그리, 고, 어, 차피, 선택권, 은, 없으니까.”

‘대단하군.’

더 이상 영물치곤 똑똑하다 뭐다하며 왈가왈부할 수준이 아나었다.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파악하고 있으며 이해득실에 관해서 생각하고 답변을 내놓았다.

여기서 제안이 거절되면 사냥을 당할 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주서천!”

협상이 타결되자마자 급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몸을 휙 돌렸다.

“두 사람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담향의 표정에서 다급함이 보였다.

주서천의 몸이 흐릿해졌다가 낙소월과 당혜 앞으로 나타났다.

‘……’

근처에 다가가자 역한 냄새가 풍겼다.

‘검은 땀.’

악취의 정체는 검은 땀이었다.

독을 땀으로 배출하고 있다는 뜻이니 나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괴로운 듯 잔뜩 찡그리고 있었고, 낯빛도 좋지 못했다.

당혜까지 목 위로 피부색이 점차 변하고 있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위험하다.’

정상적인 해독이라면 이렇게 괴로워하거나, 피부색이 안 좋을 리 없다.

낙소월만 그랬으면 모를까, 당혜까지 동일한 현상을 보이는 걸 보면 중독이 옮았을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 하지?’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도 주저함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낙소월 혼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미 당혜가 접촉하고 있으니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사람의 신체 내부에 타인의 기가 들어올 경우, 의도가 좋다 할지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할 경우, 기가 뒤엉켜 제어를 잃고 폭주해 기혈을 망가뜨릴 수 있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세 사람이나 되는 의지가 개입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흐읏!”

‘……!’

낙소월의 신음소리를 들은 순간, 홍수처럼 범람하던 주저함이나 고민이 싹 사라졌다.

“호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서천은 낙소월과 그 등을 짚고 앉은 당혜의 옆에 앉아 삼각형이 만들어지도록 자리 잡았다.

“들릴지 안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미리 말해 둘게. 지금부터 내가 개입할 거야.”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섣불리 입을 연다는 건 자살행위다.

“자, 간다.”

주서천은 손을 옮기기 전, 품 안에서 인면지주의 내단을 꺼내 입 안에 넣었다.

으득!

몇 번 씹기도 전에 물처럼 녹아내리면서 목 너머로 넘겼다.

위에서부터 녹아내린 영기가 몸 전체에 골고루 퍼지기도 전, 두 사람의 어깨 위로 손을 얼른 올렸다.

‘……’

자하진기가 침투한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기맥을 타고 훑어볼 필요도 없었다.

‘역시, 대강 예상한 대로다!’

아무 생각 없이 도움을 주겠다고 한 게 아니다.

나름대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추측해 봤다.

독을 땀으로 배출한다는 건 해독은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중독현상이 지속된다는 건, 해독의 속도가 중독을 따라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요컨대, 힘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만혈독.

독혈곡이자 지옥으로 일컬어지는 애뇌산의 독물이 재료이니 그 위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당혜가 아무리 독의 대가이며, 후기지수로서 심후한 내공을 지녔다고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수십 년 이상을 살아온 노마두가 심혈을 기울인 만혈독에는 이겨내지 못했다.

‘다행히 문제가 복잡하진 않으니 힘만 보태면 돼.

단, 이 경우에는영기(靈氣)로 한한다.’

무림에는 벌모세수(伐毛洗懿)라는게 있다.

절세고수가 내공으로 신체에 축적된 노폐물을 제거하고, 임맥이나 독맥 등의 기맥을 뚫어주는 걸 말한다.

이럴 경우 무공을 익히기에 최적의 육체가 된다.

대부분 내공의 소비가 극심하여 잘 회복되지도 않고, 난이도도 상당해 그리 자주 사용되진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생명이 얼마 남지 않거나 혹은 일인전승 문파에서 주로 사용됐다.

어쨌거나, 이 벌모세수란 것도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효능만큼 조건도 까다로웠다.

바로 어떠한 내공심법도 익히지 말아야 할 것 즉, 무공을 수련하지 않은 자가 대상이었다.

타인의 기를 주입하는 건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위험하다.

시전자의 진기가 주입될 경우, 기존의 진기와 충돌하여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설사 동일한 심법을 수련했다 해도마찬가지다.

사람의 육체란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다.

괜히 도가에서 소우주로 표현하는 게 아니었다.

강으로 생각하면 쉽다.

그 시작점은 같다 할지라도 누군가 돌을 던지거나, 혹은 물고기의 생태계나 주변의 지형 등으로 그 흐름이나 성질은 바뀌기 마련이다.

무인의 진기 또한 성별이나 연령을 비롯해 깨달음 등으로 성질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이렇다 보니 벌모세수의 대상은 기의 그릇, 단전이 생성되기도 전의 깨끗한 상태여야 했다.

이처럼 대신 힘을 보태려면 영약이나 내단처럼 비교적 중립을 띠는 영기로 해결해야 했다.

무림인이 성질이 좀 달라도 내단이나 영약을 복용하고 내공증진이 가능한 것은 영기 덕분이었다.

물론 너무 극단적으로 치달을 경우 독으로 적용될 수는 있으나, 어떤 것은 그저 효력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만으로 끝날 때도 있다.

그만큼 범용성이 좋다.

‘독기를 나에게 옮겨 대신 처리하는 방법도 있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기맥이 상할 대로 상했는지라, 자칫 잘못하면 통로가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다.’

당혜가 선택한 수법이 이것이었다.

독기가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 절반 정도를 부담해서 스스로 해독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절반으로 나눠도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서 이 사달이 나버렸지만 말이다.

‘조절을 잘해야 해.’

인면지주의 영기의 양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 양과 질은 만년화리에 걸맞을 정도다.

두 사람이 평소의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비정상적인 몸 상태라면 독으로 적용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독기만으로 벅찬데 영기까지 쏟아진다면 신체의 균형이 순식간에 붕괴된다.

이 점을 유의해서 배분 또한 세심하게 나눠서 전달했다.

‘임맥과 독맥을 노리고 영기를 보낸다.

임독맥 중 하나라도 타통한다면 해독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부디, 그동안 문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수많은 세월을 보내온 인면지주.

그의 내단은 일평생 동안 쌓아온 기운의 집합체였던 만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대단했다.

주서천의 미세한 조정으로 인해 영기는 정확히 세 등분으로 나뉘어 그녀들에게 스며들었다.

‘만혈독.’

어깨 부근 쇄골 상단의 오목하게 들어간 곳, 결분혈(缺盆穴)으로 들어가니 독기와 마주한다.

오물에 닿은 듯한 기분 나쁨, 질척함으로 가득 찬 부정(不淨)의 힘이 기혈에서 날뛴다.

주서천은 영기를 등을 떠밀 듯이 밀어 넣었다.

굳이 쑤셔 넣는다거나 억지를 부릴 필요는 없다.

추진력을 불어 넣기 위해 살짝 미는 것으로 끝났다.

그 후부터는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다.

그래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손을 떨어뜨리진 않았다.

몇 걸음 물러서서 지켜봤다.

콰아아.

영물에서부터 생성된 기운은 두 차례 분배됐음에도 그 기세는 여전히 폭발적이었다.

폭포수처럼 굵은 줄기는 기의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독기와 노폐물을 파도처럼 집어 삼켰다.

‘아……!’

낙소월과 당혜가 속으로 탄성을 자아냈다.

독기에 침식되어 점차 흐릿해지던 의식이 깨어났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절벽에서 거미 무리가 기어 나와 그녀들을 가로질러 위협을 몰아냈다.

‘지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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