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二章 (169/254)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심부름 겸 호위를 붙여 준다고 했지만 불편할 것 같아서 거절했다.

그러자 당유기는 차라리 주변이 신경 쓰이지 않도록 해 준다면서, 장원의 일부분을 내어주었다.

일반 방문을 막아준 건 고마웠지만, 유동 인구까지 통제해서 배려치곤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대낮에는 소문을 듣고 온 방문객으로 시끌벅적했는데, 지금은 풀벌레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야달을 비추는 연못 앞의 정자(亭子)앞, 낯익은 얼굴의 여인이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게 보였다.

‘구렁이 같은 노인네.’

발걸음을 돌려 산책의 행선지를 바꿨다.

“당혜.”

당혜는 대답 대신 턱 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주서천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 옆자리에 앉았다.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당혜가 술을 따랐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누구?”

“정말로 모르는 건 아니겠지?

진심으로 묻는 거라면 당신 창자를 끊어뜨릴 거야.”

“신승께서 돌아가신 날.”

“예상은?”

“생각지도 못했다.”

주서천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심장이 위치한 가슴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아직, 안 좋아?”

당혜가 길게 침묵했다가 물었다.

머리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동안 안 본 사이에 꽤나 건방져 지셨네요, 검신.

헛된 상상을 하고 있다면 운기조식이라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어떨까요? 아, 아니면 그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이미 뇌가 맛이 간 것인지요.”

“하하.”

“웃지 마. 정드니까.”

술잔이 두툼하고 반짝이는 입술로 옮겨졌다.

꿀꺽꿀꺽. 쪼르륵.

당혜는 잔이 비워지면 술잔을 채웠다.

주서천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달만 올려다봤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리를 굴려 봐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위로를 해 볼까 싶었지만, 괜한 참견이면 어쩌나 싶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여인을 대하는 건 어렵다.

전생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이라곤 싸우는 법, 살아남는 법 밖에 없었다.

“……어렸을 적 무렵.”

먼저 침묵을 깬 건 당혜였다.

“그는, 오라버니는 자랑이고 우상이었어.”

그녀는 빈 잔에 술을 채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명인.

가주인 아버지, 독왕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무공이면 무공, 학문이면 학문까지.

나이에 맞지 않은 오성 또한 갖춰져 있어 어릴 적부터 찬사와 각광을 받아오면서 기대주로 자라왔다.

격차가 너무 크고 비현실적이라서, 비교당해도 당가의 피에 새겨진 자존심조차 문제가 안 됐다.

도리어 당명인의 명예에 흠집이 가지 않도록, 언젠가 도움이 되고 싶어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오라버니를 목표로 열심히 할게요.”

남매로서 사이도 좋았다.

당명인은 밝고 열정적인 성격의 아이였고, 어른스러웠다.

여동생을 배려해 주고 아껴주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당명인이 열 살이 되던 해부터 이상해졌다.

말수는 줄었고, 웃는 모습은 사라졌다.

언제나 환하게 빛나던 눈도 어두워졌다.

표정은 지독히 차가웠다.

아직 어렸던 여동생은 오라버니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고 적응하지 못했다.

당황은 어려움과 두려움으로 바뀌었고, 결국 며칠 동안 뭐라 말도 못 붙인 채 그냥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당명인이 모습을 감췄다.

“오라버니는 어디에 있나요?”

“네 오라비는 소가주지 않느냐. 세가를 이끌어 갈 사람으로서 책무를 수행하고, 교육을 받느라 무척 바쁘단다. 그러니 너도 오라버니를 본받도록 해라.”

그 말을 듣고서야 당명인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공부가 너무 많아서 힘든 모양이구나.

당혜의 걱정이나 생각은 깊지 않았다.

그녀도 총명했지만, 진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다음에 보면 힘내라고 전해 줘야지.’

하나, 그 마음은 전해지지 못했다.

약 삼 년 만에 대면하게 된 오라버니의 얼굴은 결코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눈빛은 꺼멓게 죽었고, 입은 꾹 닫았다.

말을 걸어도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무시했다.

“아직도 그 얼굴이 생생해. 마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 같아서 대단히 무섭고, 소름 끼쳤어.”

“……”

“그 후로도 대면하지 않고 지내다가, 나 역시 일 년 뒤에 당가의 치부에 대해 교육을 받게 되고서야 모든걸 이해할 수 있었지.”

“……지독한 이야기다.”

“그래.”

열 살이다.

고작 열 살이다.

그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지독한 현실을 전해들었다.

아버지이자 냉혹한 가주, 당유기의 태도도 변했다.

“네 오라비처럼 책임과 의무를 질 때가 됐다.

너는 오늘부터 독공이나 학문에 보다 성실하게 임해야 하며, 당가의 핏줄에 걸맞은 남편감을 데려오기 위해 매력 또한 가꿔야 할 것이다.”

당혜의 삶도 열 살 때부터 혹독해지기 시작했다.

혹여나 자칫 잘못해서 당가의 치부를 발설할지 몰라 감시를 받아야 했고, 교육도 심히 엄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당혜 역시 당명인만큼은 아니지만 재능이 있어 혹독한 교육에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괜찮은 사윗감 후보에게서 혼례가 들어왔다.

서른다섯 살이라 조금 흠이긴 하지만, 그래도 생식 능력에는딱히 문제도 없고, 아이를 낳기에는 문제없을 거다.”

당유기는 차가운 눈으로 딸을 내려다봤다.

“하나 아이를 갖기에는 너의 자질이 너무나도 아깝구나.

이대로 독공에 매진하여 나이 스물에 오룡삼봉 중 일봉이 독봉이 된다면, 혼례는 취소하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당혜는 운명을 증오하고 저주했다.

이대로 아이를 낳는 도구 취급 받으며, 패배자로서 살아가는 건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아버님이나 오라버니처럼은 되지 않아.’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 노력했다.

잠도 줄여가며 공부하고 독공에 매진하여 오룡삼봉에 올랐다.

비록 그 탓에 주변과의 교류를 포기하고 담을 쌓듯이 살아왔으나, 외로움은 상관없었다.

다행히도 당유기는 약속을 번복하지 않았다.

혼례를 취소하고 운신에도 제한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만족할 수 없었다.

오룡삼봉이란 정파의 후기지수여야한다.

서른이 된 순간 그 자격이 박탈당한다는 의미였다.

그날이 오면 혼기와 임신 적령기를 연유로 아이를 낳는 도구로 전락해 살아야 한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저주받은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오라버니를 패배자로 여겨 왔는데……”

당혜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사실은, 그 반대였던 거야.”

그녀의 고운 손가락 사이로 술이 떨어졌다.

동시에 술잔도 아래로 빙글빙글 돌아 지면에 부딪쳤다.

쨍그랑!

고요한 밤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정말로, 우스워. 웃겨서 참을 수 없어.

괜찮아, 나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비웃어도 좋아.”

평소의 독기는 없었다.

툭 건드리면 마치 바스러질 것처럼 느껴졌다.

“누가 누구보고 멋대로 패배자라 부르고 잘난 듯이 지껄였는지……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잖아.”

누구보다 앞서 나가고, 운명에 저항하고 있던 건 다름 아닌 당명인이었다.

당가만이 아니라 정파, 나아가 무림 전체를 오시하며 농락한 세력의 수뇌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평생을 해 왔던 것이 무의미해졌다.

“……”

주서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소도 분노도 위로도 아닌, 침묵을 택했다.

한참이 지났을까, 당혜가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점잖게 앉는다.

달빛을 비추는 눈과 입술은 촉촉했다.

당혜가 허리를 숙이면서 입을 힘겹게 열었다.

“검신께서는 그동안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소녀, 사실은검신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연정을 품고 있었사옵니다. 비록 부족한 몸이오나 소녀를 받아 주신다면 앞으로 성심성의껏……”

“안 돼.”

주서천이 손바닥을 보이며 거절했다.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다면, 고쳐보도록 하겠사옵……”

“응, 안 돼”

주서천이 정색했다.

“……이……유를……여쭤봐도……”

“취향이 아니니까.”

“……뭐?”

주서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흙 위에 아무렇게나 널린 조각들을 발로 차서 멀리 날려버렸다.

조각이 날아간 수풀 속에서 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당혜.”

주서천은 당혜를 똑바로 쳐다봤다.

“뭘 하고 싶어?”

“다신……”

“뭘 하고 싶냐고.”

“……”

당혜는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려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고민하기를 한참. 그녀의 입이 다시 열린다.

“……오라버니에게…… 지고 싶지 않아.”

그는 동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랑이었다.

그는 우상이었다.

그는 영웅이었다.

그렇기에 그 등만 보고 싶지 않았다.

함께 걷고 싶었다.

언젠간 넘고 싶었다.

“그야, 분한걸. 이렇게 노력해왔잖아.”

“알아.”

“허세부리지 말래?”

“전에 봤으니까, 알아.”

당혜가 무림맹 독원 앞에서 문을 살피던 모습은 증오 따위가 아니었다.

업신여기던 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남매 간에 사이가 안 좋나싶다고 생각했지만, 전에 당명인을 봤을 때 착각이란 걸 깨달았다.

그 시선은 동경이었다.

누군가의 등을 좇는 눈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불쾌하고, 저주스러운 신세에서도 벗어나고 싶어. 휘둘리는 삶은 질색이야.”

가슴 속에서부터 무언가 끓어올랐다.

여태껏 참아 왔던 속내가 폭발했다.

평소에는 몇 번이나 생각하고 정리되었을 말이, 신기하게도 입으로 바로 거쳐서 나왔다.

“그래.”

“아이를 낳는 도구 취급이라니, 이보다 질 나쁜 농담도 없어. 툭 까놓고 말해서 기분 나빠.

아버님, 독왕 그 사람은 부성이란 걸 모르는 광인이야?”

당혜가 주먹을 꽉 쥐었다.

눈썹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그럴지도.”

“나 역시 어릴 적부터 당가의 권리를 누려왔으니, 책임과 의무를 져버리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 방식을 자유의사를 빼앗긴 희생으로 강요 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딴 건 착취에 불과해.

그러니까,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정정당당하게 마주쳐서 바꿀 거야.”

“응.”

당혜는 연달아 쏘아낸 말을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그러니까……”

조심스레 뻗는 손.

가늘고 긴 손가락 끝이 주서천의 소매를 놓칠 듯말 듯 잡았다.

“……그, 나 혼자서는…… 힘들어서 그런데…… 도와주지, 않을래?”

“도와줘?”

“……그래.”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주서천이 웃었다.

“좋은 아침이오, 검신.”

당유기가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을 보였다.

“간밤은 평안하셨소?”

“산책 중에 수풀 속에서 덩치가 산만 한 쥐새끼를 봤습니다. 그걸 제외하곤 문제없었습니다.”

“허어, 그렇소?

이상하군. 분명 청소할 때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어디에선가 흘러들어 온 모양이오.”

당유기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답변했다.

주서천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과연, 당가의 가주인가.’

전 세대의 흑영부원인 동시에 오대세가의 가주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말솜씨나 연기도 일품이었다.

“음, 오늘 아침에 괜찮은 찻잎이 들어와서 그런데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 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본론으로 들어 가도록 하지요.”

“방금 전에 막 들어온 것이라서……”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주서천이 눈썹을 슬쩍 구부렸다.

차를 핑계로 당혜를 부를 속셈이 뻔히 보였다.

당유기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끄덕였다.

“무형지독에 대해서 알고 있소?”

“어떠한 빛깔도 띠지 않으며, 향이나 맛은 물론이고 형태조차 불특정하다는 극독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렇소. 그야말로 전설로나 전해지는 독이요.”

판별이 불가능한 극독이라니, 그야말로 지고의 병기였다.

해독약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다.

“정말로 존재하는 겁니까?”

당유기는 무형지독에 대해서 듣고도 놀라거나 못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짚이는 바가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당유기가 검지와 중지를 폈다.

“무형지독이라 불리는 것은 두 가지가 있소.”

“두 가지?”

“그 첫째는 심독(心毒)이오.

검술의 극의인 심검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거요.”

“아!”

심검은 검술의 극의에 이르는 경지를 뜻한다.

검선, 우일문의 심상구현이었던 이기어검보다 위인 단계로 의지만으로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다.

무인의 극의가 화경이며 그 다음이 현경이라면, 심검이란 곧 사람이란 종을 넘어 신의 경지다.

고금을 통틀어도 심검의 성취를 이룬 무인은 극소수에 한할 뿐더러 사실여부조차 확실치 않다.

“사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신경 쓰지 마시오.”

애초에 심독이라는 경지가 의문이며, 설사 존재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머지는 무엇입니까?”

“유형이나 무형처럼 보이는 경우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인면지주(人面卿妹)에 대해서 알고 있소?”

“영물 중에서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거미에 대해서 묻는 거면 알다마다요.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 인면지주의 거미줄이 무형지독의 재료요.”

“인면지주……”

만년화리나 칠각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영물인 동시에 독물이었다.

“인면지주는 무색무취무미의 거미줄을 내뿜는데, 이 줄을 각종 극독과 배합하여 용독술로 풀어내면 무형지독이 완성되오.

검신께선 아마그것에 당했을 거요.”

“처음 듣는군요.”

“당가의 직통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비법이니 당연하오.

도리어 알고 있었다면 검신을 의심했을 거요.”

맞는 말이었다.

‘이런 게 있었나?’

전란의 시대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독이었다.

“다루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요.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의 목숨까지 보장하지 못하고, 해독이 존재하지 않아 동귀어진을 기본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요.

너무 위험하여 금기로 정해졌소.”

역대 가주 중에서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을 정도로 고난이도였고, 배합조차 위험천만했다.

“무엇보다, 주재료인 인면지주의 거미줄은 천만금을 주어도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귀하오.”

영물이란 건 사람만큼 똑똑하다.

인면지주는 그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오성이 뛰어났다.

눈치가 빠르다 보니 몸을 숨기거나 피하는 데도 능숙했고, 무엇보다 그전에 보통 강한 것이 아니었다.

거미줄만 어떻게든 구하려 해도, 천잠사처럼 튼튼한 데다가 접착성 또한 상식을 넘어선 수준이라서 회수하려다가 함정에 걸려 잡아먹히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니 검신께서는 걱정할 필요없소.”

주서천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당유기를 쳐다봤다.

“검신께서 중독된 무형지독은 당명인, 그 배신자가 본가에서 훔친 것이오.”

지고의 병기이자 최강의 독인 만큼, 최후의 보루로 삼아 제조해 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실물을 보니 쓸 만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봉인한 채 내버려 두었다.

“방법을 알아도 재료를 구할 수 없으니 만들 수 없을 것이외다.”

‘아니. 구할 수 있다.’

주서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감부.’

그 수장인 도감부장은 없으나, 그 기관이 사라진 건 아니다. 암천회의 저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인면지주가 있던가?’

전생의 기억을 뒤져봤지만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주서천이라고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다.

‘……아니, 있었다 할지라도 남겼을 리 없다.’

정파 최악의 치부, 천추에 대한 정보다.

그 전에 당가의 제조 비법이다.

공개되는 게 이상하다.

‘인면지주는 암천회의 관리 하에 있다.’

만년화리나 칠각사가 존재한 것처럼 인면지주라고 없으라는 법이 없다.

존재 확률이 구 할 이상이었다.

“신중함도 중요하나,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은 법이오.”

‘성가시군.’

적당히 구슬려서 당가의 식구로 삼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어렵다.

빈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대세가의 수장이 이렇게까지 칭찬하면 잘난 맛에 헤벌쭉 넘어가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사천제일미녀인 당혜의 미색까지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대접까지 해 주지 않았나.

조금은 마음이 풀어질 줄 알았는데, 틈을 조금도 보여 주지 않았다.

경계심이 철벽과 같았다.

‘멍청한 것. 눈앞에서 옷이라도 벗으라고 했거늘.’

마음 같아선 춘약을 내주고 싶었지만, 그 대상이 절대고수인 상천칠좌이니 감히 시도할 수 없었다.

끓어 오르려던 노기를 가까스로 참아내고, 주서천에게 말을 걸었다.

“정 불안하시다면 인면지주의 서식지로 추정된 곳을 알려줄 수는 있소.”

“알고 계십니까?”

“워낙 오래되어 확실치는 않소.”

무형지독을 제조하려면 인면지주의 거미줄은 필수였다.

소재의 파악은 급선무다.

다만, 무형지독이 봉인되면서 자연스레 소재 파악도 중지됐다.

그 세월이 제법 오래됐다.

“협력을 요청드립니다.”

‘헛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뭐, 상관없다. 좋은 기회다.’

당유기 의 눈이 기분 나쁜 빛으로 번들거렸다.

“그 대신, 조건이 있소.”

“무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협력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가의 비법에 해당하는 사항을 덜컥 내줄 수는 없지 않소.”

당유기가 주서천의 공격을 능숙하게 받아쳤다.

“조건이라 해도 대단한 건 아니오.

여정에 저희 아이들을 동행시켜 달라고 요청하려 했던 것뿐이오. 혜를 포함해 여아들뿐이라 소란스러울지도 모르지만 말이오.”

‘정말로 뻔뻔하군.’

의도가 너무 훤히 보여 민망할 정도였다.

“독왕.”

주서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이는 부모의 도구가 아니오.”

자식이 커서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한다며 반포지효(反唯之孝)라는 말이 있으나, 효(孝)에 적정선이 있다.

“부자자효(父慈子孝)라는 말을 알고 있습니까?”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행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남의 집 사정에 이래라 저래라 할생각은 없습니다만, 적정선을 지키십시오.”

독왕, 당유기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사라졌다.

“생지축지(生之畜之) 생이불유(生而不有).

낳고 기르되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이 말을 명심하십시오.”

주서천이 경고하듯 위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가가 권세를 위해서 정파의 치부, 흑영부를 도맡게 된 것에 대해선 뭐라 할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흑영부를 지지하는 건 아니나, 여태껏 해 오던 일을 부정할 생각도 없습니다.”

주서천은 혈기와 열정만으로 희망에 차 있지는 않다.

그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어쩔 수 없는 경우, 잘못됐으나 용인해야 하는 현실을 무작정 부정할 정도로의 머저리도 아니었다.

“그들의 활약이 있어 정파는 수많은 인명 피해와 위기를 겪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없던 걸로 할 생각은 없으며, 감사한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전생에서는 정보 열람 권한이 낮아 그 활약을 듣지 못했지만, 분명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았을 터.

대외적으로 보답 받을 수는 없지만 필요악으로서의 휘생으로 나름의 고마운 마음은 존재한다.

“휘생이란 타인이나 어떠한 목적을 위해 자기 자신을 불태우는 고결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게 누군가의 강요로 인한 것이라면, 착취일 뿐이라는 걸 명심하십시오.”

“역시 영웅이시구려. 감복하였소. 동의하는 바요.”

당유기 의 표정은 말과 다르게 몹시 차가웠다.

“그대의 딸이 한 말입니다.”

“……”

“권세의 유지를 위해 흑영부를 택한 건 어디까지나 선택 중 하나일뿐,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생각해주십시오.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서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당 소저와는 인면지주 탐색에 동행할 생각이니 괜한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 전력이 되지 못하는 이들을 데려갈 생각은 없으니 참고하십시오.”

주서천은 당유기의 답변도 듣지 않고 떠났다.

약 일각 정도가 흐르자, 메마른 사막처럼 쩍쩍 갈라진 입술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상천은 상천인가.”

독왕이라면 천하백대고수 중에서도 실력자다.

그런데도 주서천이 쏘아내는 위압감에 꼼작도 못 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끈적끈적했다.

등골은 오싹해서 북해의 땅에 와 있는 것은 아닌지 착각이 들었다.

“흑영부가, 전부는 아니다……”

당유기의 얼굴도 평소의 지치고 공허한 것으로 돌아왔다.

“애석하게도 그 외의 것은 불가능하네, 검신.”

당가의 가주는 쇠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흑영부를 후대가 잇지 못하면 쌓아 올린 것을 잃고,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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