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천이 머리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대의 위험을 감수하고 천마를 개양으로 받아들인 암천회주와 천기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알고도 아무것도 못 하는 건가?”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암천회의 발을 묶게 됩니다.”
“……?”
“그들은 지금 무림맹과 사도천, 그 외의 정보조직에게 주목을 받는 중입니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위치나 행동, 혹은 약점이 발각됩니다.”
천기는 수를 읽히는 걸 내버려 두는 바보가 아니다.
물론 고의로 보인 뒤 함정에 빠뜨릴 수도 있었지만, 보여주는 수에 비해서 얻는 것이 적었다.
그러니 차라리 결전을 위해서 권세를 내려놓고, 여태껏 쌓아온 것으로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이 좋았다.
“관료가 대다수였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관부가 아닌 무림 세력이 된 암천회라면 괜히 섣부르게 움직였다가 황제의 시선까지 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의 존재라거나 혹은 부정부패를 약점으로 삼아 취득한 것, 황궁무고에서 몰래 빼온 것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파멸이니까요.”
“그건 이쪽에서도 바라지 않는 일입니다.”
제갈상이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진저리 쳤다.
암천회는 무림의 일로 끝내야 한다.
그 존재가 황제의 귀로 흘러간다면 설사 적대 세력이라 해도 정체를 고의로 숨긴 것이 아니냐며 역모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나?”
남궁위무가 주서천에게 물었다.
“괜찮다면, 제가 유추해 봐도 되겠습니까?”
제갈상이 묻자 주서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첫째, 암천회를 무림공적으로 삼아 사도천과의 동맹을 공표해 전쟁을 준비합니다.”
제갈상이 오른 주먹을 들어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둘째, 관부의 움직임 또한 놓치지 않고 주시합니다.”
“맞습니다. 천기라면 상대방이 과신하는 걸 이용해 허를 찌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과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천추를 통해 뼈저리게 알았다.
가능성이란 건 전부 검토해야 했다.
“셋째, 천추 독룡, 당명인의 제거겠지요?”
“예. 그리고 당명인이 알 만한 기밀을 전부 폐기하고 재편해야 합니다.”
“……후우.”
제갈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곱상한 얼굴에 암운이 끼었다.
여태껏 모아온 정보의 가치가 곤두박질 친 것도 가슴이 아프지만, 재편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왔다.
당명인이나 흑영부가 모를 만한 정보 역시 숨기려면 기존의 암호를 폐기하고 새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것도 기존의 정보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신속하게 재편해야만 하는데,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만에 이를 서류를 분류하고 폐기하고 재작성하는 건 물론이고 암호부터 새로이 만들어야 한다니.
“고생길이 훤하군.”
남궁위무가 씁쓸하게 웃었다.
무림맹주의 표정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암호의 수정안이나 혹은 그 외에 폐기 등도 결정하려면 무림맹주의 승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천이 네가 어릴 적부터 머리가 비상하였다고 들었는데……”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남궁위무가 손을 빌리려 하자 주서천이 정색했다.
‘내가 미쳤어? 그걸 하게.’
대충 봐도 업무량이 나온다.
화산오장로 시절 행정 업무도 도맡은 적이 있어 미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주서천은 남궁위무와 제갈상을 진심으로 불쌍하게 여겼다.
동정심이 강이 범람하듯 넘쳐났다.
“마음 같아선 돕고 싶으나, 할 일이 있어서요.”
“정말인가? 거짓을 고하는 건 아니겠지?”
남궁위무가 눈을 부릅뜨며 노려봤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주서천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웃었다.
“할 일이라면?”
“당명인의 무형지독에 대처해야 합니다.”
“으음.”
주서천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하자 남궁위무도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신음을 흘렸다.
“상천칠좌, 현경의 고수를 중독시킨 극독인가.”
“아무리 허를 찔렀다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보통이 아닙니다.”
진심이었다.
당명인의 무형지독은 위험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천칠좌, 절대고수라 일컬어지는 현경이 중독됐다.
그것도 천독지체이며 녹안만독공이라는 신공에 준하는 독공까지 연공했다.
그런데도 중독됐다.
배신자라는 걸 예상하지 못하고 방심해서 당한 것도 있지만, 그 독의 위력만큼은 진짜배기였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간담이 서늘하다.
‘도대체 어떤 독을 쓴 것인지는 몰라도……’
중독됐다는 걸 의식했을 때, 회귀로 돌아갈까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배신에 충격이 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또한 독이 뇌의 골수까지 치달아 생각이 굳어버렸고, 무의식적으로 해독하는 데 집중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심장이 당해버렸다.
심장이 조각나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의식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하필이면 회귀의 약점을 당했었다.
‘심상구현은 내공에 무관계하게 심력만 있다면 사용할 수 있지만, 목이 잘리거나, 뇌를 송두리째 잃거나, 심장이 사라지는 등의 즉사성이 짙은 공격에는 발동하지 못한다.’
심상(心想)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구현의 성립이 불가한 원리였다.
‘그러나 그 조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구현은 가능하다. 구희의 신단 덕에 살았다.’
구희의 신단을 복용하고 얻은 재생능력.
그 덕분인지 심장이 조각났지만, 어떻게든 혈관과 붙어서 재생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소령에게 업혀서 절벽 밑으로 떨어질 때, 끊어지는 의식 속에서 회귀를 발현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어쨌거나, 이젠 방심하지 않고 경계한다 할지라도 그 이름 모를 무형지독의 대비가 필요했다.
“당명인은 천추이니 단연 암천회의 지원을 받았겠지만, 그 기초가 되는 건 사천당가입니다.”
녹안만독공을 수련했지만, 독에 관련된 지식은 당가를 이겨낼 수 없다.
자문을 받아볼 생각이었다.
“잘됐군요. 마침, 당가의 조사도 필요한 참이었습니다.”
당가의 소가주가 암천회의 수뇌였다.
조사대상이 되는 건 당연하다.
“또한 독룡의 행방이 묘연하여 당가의 독왕이 설명을 요구하고 있으니, 겸사겸사 설명을 대신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끙, 알겠습니다.”
“사전에 서신을 보내 대략적인 설명을 해둘 예정이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머릿속으로 당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을 듣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조금 걱정됐다.
* * *
사천.
쨍그랑.
“이, 이 천인공노할……”
당가의 가주, 독왕 당유기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은 산산조각 났다.
깨진 조각과 찻물이 손에서 피와 뒤섞여 뚝뚝 떨어졌다.
“명인이가 암천회, 그것도 수뇌라고?”
당명인이 어디 그냥 평범한 아들인가.
오룡삼봉이면서 흑영부 소속에, 가문을 이끌어나갈 소가주였다.
헌데 얼마 전부터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문이 돌더니만, 결국 행방불명됐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무림맹에게 문의했더니 무림맹을 배신하고 주서천을 함정에 빠뜨려 죽일 뻔했다는 서신이 돌아왔다.
“이 개 같은!”
당유기가 분노의 일같을 터뜨렸다.
무의식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렸기 때문일까, 독기가 새어나왔다.
미세하게 흘러나온 독기는 햇볕을 잘 쬐도록 창 앞에 둔 화초를 집어삼켜 뿌리까지 썩게 만들었다.
“웃기지 말란 말이다!”
아들이 저지른 죄를 부정하는 것이었을까?
“어떻게 이어온 가문이거늘, 그걸 망쳐?
이 배신자노옴!”
아니었다.
아버지로서 아들을 조금도 믿고 있지 않았다.
도리어 그 배신행위에 누구보다 진노하고 있었다.
“당가의 소가주로서 권리는 실컷 누리더니, 이제 와서 의무는 내팽개쳐? 부끄러운 줄 알아라! 여태껏 희생해 온 당가의 노력을 하루아침에 짓밟다니!”
“힉!”
바깥에서 가신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당가가 독왕의 분노에 몸서리쳤다.
“여봐라!”
“예, 예! 가주!”
“검신이 근시일 내로 당가에 방문한다고 하니, 맞이할 준비를 해라.”
“맡겨만 주십시오!”
“그리고, 미혼에 얼굴이 반반한 여아를 준비하도록 해라.”
“예……?”
‘검신, 주서천이 아무리 무공광이라 하지만 사내인 이상 미인계 앞에선 맥을 못 추릴 것이 분명하다.’
‘주서천을 사위로 받아들여야 한다.’
전에 방문했을 당시에는 천독지체가 탐이 났지만, 나이와 사문이 걸려서 아쉬워하면서 포기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무슨 수를써서라도 데릴사위로 삼아야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가주가 배신했으니 무림맹의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이 위기를 벗어나려면 정파의 영웅, 검신을 사위로 받아야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당가는 발이 좁은 주서천과 나름대로의 연이 있었다.
특히 같은 오룡삼봉인 독봉, 당혜와 연인사이라는 소문도 있으니 그야말로 호기다.
“당혜 그 아이부터 불러와라.”
주서천은 소령을 대동하고 사천의 당가로 향했다.
무림맹에서 임무 수행을 돕기 위해서 무사를 붙여준다고 했지만, 도리어 방해가 될 것 같아 거절했다.
“소령, 또 너랑 여행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답답하구나. 벙어리가 된 기분이야.”
“……”
“낙 사매가 보고 싶다……”
종전 후 화산까지 동행했지만, 무림맹까지 함께하지는 못했다.
‘매화검수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니까.’
현재 검장인 위지결이 중상이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행동에 제약이 생겼다.
그래서 아쉬워하면서도 나중을 기약하고 잠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화산에서 시간을 보냈다.
“최근 사형을 보면 위기감이 느껴져요.”
“위기감? 무슨 위기감?”
“예전에는 얼굴도 그냥저냥이고 친구도 별로 없는 내향성 외톨이셔서 여자가 꼬일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은근슬쩍 심한 말 하고 있지 않아?”
오룡삼봉 중 일룡에 정파의 영웅, 그리고 상천칠좌인 검신이다.
남자에겐 선망이자 동경의 대상이요, 여자에겐 왕자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무후무한 신랑감이었다.
설사 못생겼다 할지라도 여인들이 줄을 설 정도로 능력이 좋았다.
“사형도 무공이나 검이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낙소월이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렸던 게 떠올랐다.
참고로 그때 너무 귀여워서 쓰러질 뻔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직 이르다고 생각해.”
“무림의 혼령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그건 무공의 수련 때문이지 않나요?”
무림인 대다수는 명가에 태어나 정략혼을 했거나, 혹은 낭인이나 삼류가 아닌 이상 혼기가 늦은 편이었다.
특히 대문파의 경우 사랑보다는 무공 수련과 높은 경지의 성취를 우선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연정에 빠지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해이해져 방해가 된다는 의견도 존재하다 보니 멀리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주서천은 이미 극의에 해당하는 화경도 모자라 시대를 풍미할 현경의 성취까지 이루지 않았나.
“아직 구해야 할 사람들이 많으니까.”
스스로 말하고도 낯간지러웠지만 그래도 멋졌다.
대신 지금 생각하니 자다가 벌떡 일어나 이불을 찰 정도로 부끄러운 대사였다.
“사형……”
낙소월도 조금 답이 없는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이 노려지게 할 수는 없다.’
사랑은 곧 약점이 된다.
전생에서도 연인이 노려져 어이없이 목숨을 잃은 영웅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천기라면 그 약점을 이용하고도 남는다.
‘친분 교류는 최소화해야 한다.’
친한 사람이 많을수록 약점이 늘어진다.
주서천이 사람을 사귀지 않은 건 원래 외톨이 기질이 있던 것도 있었으나, 암천회에게 노려질 것을 우려해서다.
암천회에 끝까지 정체를 숨기려던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제갈승계나 이의채도 실제로 알게 모르게 노려졌지만, 검마나 금의상단, 유령의 호위 덕에 살아남았다.
암천회 외에도 각종 적대 세력에게 위협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당혜나 제갈수란은 개개인의 무력도 있으나 오대세가나 무림맹에서 붙여준 비밀 호위가 존재했다.
더불어 각 지방에서 몰래 뒤따르는 유령도 곁을 지키기도 했다.
‘친구가 별로 없는 건, 어쩔 수 없어서다! 그럼!’
영웅은 고독한 법이라며 위로 했지만, 전생에서도 친구가 없었던 사실을 깨닫지 못한 주서천이었다.
* * *
사천, 당가.
“어서 오시오, 검신.”
주서천은 환대를 받으며 당가에 입성했다.
과거 원수 취급을 받았을 때와는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설마하니 가주인 독왕이 직접 마중을 나왔을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독왕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주서천도 포권으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검신이다……”
“정파의 영웅이 아닌가.”
“히야, 무공이 얼마나 대단하면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거지?”
“무슨 일로 온 거지?”
“아가씨를 뵈러 온 게 아닌가?”
“설마하니 검신을 보게 될 줄이야……”
한때 봉추라는 조롱 섞인 별호로 불리던 그였으나, 그 흔적은 이제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가의 주점을 통해서 원한을 해소했을 뿐더러 천독불침이라는 걸 증명해 일등신랑감 후보가 됐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주서천이 누구인가.
정파 무림을 구한 영웅이며 오룡삼봉 중 검룡, 그리고 상천칠좌인 검신이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며 무인이라면 열에 다섯 이상은 입에 담는 존경하는 위인이었다.
주서천의 방문 소식은 당가뿐만이 아니라 사천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검신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약간의 선물을 들고 당가를 방문하게 됐어요.”
“방문 목적이요?
음…… 그냥 주서천 대협을 뵈러 온 걸로 해주세요.”
“무공도 고강하시고 대문파의 제자에……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금의상단의 투자자라서 돈도 많다며?”
“주색을 밝히기는커녕, 멀리한다고 하더라.”
“멋있어……”
사랑에 빠진 소녀들은 주서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꺄르르 웃거나 혹은 몽롱한 눈빛으로 넋을 잃었다.
“주서천이 사천에 가 있다며?”
“뭣이? 당장 짐 싸고 그리로 가게나!”
“주 대협께서는 중원제일의 중매자가 아니겠는가!
끌끌끌!”
“어허, 이 사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 대협의 명성에 누가 될 표현은 삼가게나.”
주서천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여인, 특히나 미녀들이 따라왔다.
천운이 닿아 눈이 맞는다면 가문의 영광이요, 약간의 인연만 만들어 두어도 대박이지 않겠는가.
또한, 사내란 미녀를 좋아하는 법.
이 기현상에 방방곳곳의 노총각 및 남정네 무리가 따라다니게 됐다.
게다가 이렇게 유동 인구가 증가하다 보니 장사를 위해 상인이 늘어났고, 자연스레 상권이 형성됐다.
혼자서 지역 경제에 영향까지 끼치는 주서천이었다.
당가의 가주에게 대접받는 차는 일품이었다.
독이나 약을 다루다 보면 식물 전체에 일가견이 생긴다고 하던데, 그 말대로였다.
‘음, 일을 마치면 챙겨달라고 해야겠군.’
“오랜만에 뵙소, 검신.”
당유기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만…… 부디 가주님께서는 말을 편히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오대세가의 가주이시고 강호의 대선배이신 독왕이신데, 후배가 많이 부담스럽습니다.”
말투도 전과는 달랐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당가의 가주이며 강호에서 배분이 높다고 하지만, 눈앞에 앉은 자는 무림의 정점이 아닌가.
“그럴 수는 없소. 후배, 아니 검신께선 상천칠좌이자 정파의 영웅이지 않소. 설사 아들이나 손자뻘이라 할지라도, 검신에게 그만한 예우를 갖추지 않는다면 당가는 강호의 손가락질을 받을 거외다.”
“어쩔 수 없군요.”
차에 대한 칭찬 등의 인사를 섞어 몇 마디를 나누다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제갈상이 사전에 말한 대로 이야기를 대강 해 둔 덕분에 당유기의 놀라움이나 분노는 덜했다.
“협력하겠소.”
당유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약간의 주저함도 없는 답변이었다.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주서천이 다시 한번 물었다.
당명인은 소가주다.
그것도 어린 시절부터 세가에서 기대와 지원을 받으며 자라온 장남이 아니던가.
“의중을 살피려고 괜한 말할 필요없소, 검신.”
당가의 가주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무림맹에서 보내온 서신에 의하면, 검신께서는 본가와 흑영부의 관계를 알고 있다고 들었소만, 맞소?”
“예.”
“그렇다면 이야기는 빠르겠구려.”
당유기의 주름살 가득한 눈꺼풀 아래의 눈동자에 진득한 살의가 비춰졌다.
“본가는 어느 순간부터 힘이 부족하여 오대세가에서 빠질 정도로 도태되기 시작했소. 어떻게든 쇠락을 피하려고 온갖 발버둥을 쳤지만, 제일 중요한 절대고수의 배출은커녕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했지.
그래서 택한 것이 무림맹의 그림자, 흑영부요.”
당가는 무공이 무공이다 보니 전부터 흑영부에 일시적으로 소속되거나, 혹은 도움을 주고는 했다.
그러나 본격적은 아니었다.
당가역시 정파의 오대세가인 만큼, 치부인 흑영부의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역대 무림맹주나 흑영부장, 혹은 군사가 사정사정하여 그에 걸맞은 대가를 받아 수행하는 정도였다.
흑영부 소속으로 배속되는 경우도 방계거나 세가 내에서 밉보인 인물, 그도 아니면 범죄자밖에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사실은 본가 내에서도 극소수에게만 전해져 내려 왔소.
만약 이 소문이 알려지게 된다면, 무림에서 어떤 취급을 받을지 뻔하니까.”
흑영부는 무림맹의 그림자요, 정파의 어둠이며 필요악이었다.
그렇기에 결코 인정받지 못했다.
정도를 중시하는 이들이 흑영부의 존재를 인정할 리 없었다.
극소수에 해당하는 무림맹 상층부 중 반이 언짢아할 정도이니, 밝혀지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는 뻔했다.
과거에야 세가 내에서 죄를 저지른 자만 따로 골라 형벌을 대신하여 흑영부에 보내 감금시키듯 임무를 수행하게 하면 그만이었지만,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치부를 발설하지 않으려면 누구보다 신뢰가 있어야 했고, 무림맹과 연계하여 흑영부를 관리 감독할 실력자야 했소. 이 모든 것에 적합한 인물이란……”
“당가의 적통 중에서도 영재인, 소가주로군요.”
“바로 그렇지.”
아무에게나 함부로 맡길 수 없다면, 단연 직통 중에서도 빼어난 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가주는 무에 대한 재능과 오성이 특출 나야 선별되고, 각종 영약과 교육을 지원받으며 특별한 사고가 없는 이상 가주가 될 테니 책임도 능력도 적합했다.
“자고로 힘과 권력이란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가 수반하는 법이 아니겠소.”
“……가주께서도 흑영부였습니까?”
“당연한 소리를.”
당유기의 눈은 지쳐 보였다.
어딘가 모르게 공허한 느낌도 묻어났다.
“충년(沖年 : 열 살 안팎의 나이)이 되면 치부에 대해 교육을 받는다오. 소가주로 결정된 해부터는 흑영부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앞으로 할 일을 보게 되고, 성년에 강호에 출두하여 약관까지 활동하다가 이후 무림맹에 들어가 흑영부원으로 살아가게 되지.”
주서천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목 위로 치밀어 오르는 욕을 집어삼키면서 대신 질문을 던졌다.
“독봉…… 따님께서도 흑영부인 겁니까?”
머릿속으로 당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아는 해당되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소.”
당유기는 주서천이 당혜의 이름을 꺼내며 걱정하는 표정을 짓자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아이를 잘못 낳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무리를 시킬 수는 없다. 특히나 천재일수록 말이지.’
당혜는 당명인만큼은 아니지만 재능 면으론 뛰어나다.
독고에 대한 공부나 열정도 대단한 편이었다.
그녀의 아들이라면 분명 최소한의 기대를 할 것이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그림자가 있으면 빛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 아이는 세가를 위한 대외적인 활동을 맡아주고 있소. 훌륭한 아이요.”
빈말이 아니었다.
세가의 누군가는 양지에서 활약을 해야 했다.
현재에는 그게 당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활약해 당가의 이름을 높였고, 눈앞의 최고의 신랑감을 데려오게 됐다.
“하지만, 그에 비해 당명인 그 배신자는 이전 세대부터 이어져 온 고통 섞인 희생을 모욕하고, 권리만 취한 채 책임과 의무를 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정파를 배반하였소. 또한 검신을 암습하였다고 들었소.
이에 대단히 사죄를 드리니, 부디 용서를 바라오.
책임지고 그놈을 죽이는 데협력하도록 하겠소.”
당유기가 머리를 숙이며 진심을 담아 사죄했다.
주서천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생각했다.
‘당가는…… 미쳤다.’
미쳤다는 표현 외에 대신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당유기가 딸인 당혜를 내놓은 자식처럼 내버려 두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딸이란 정을 나눌 핏줄이 아니 라, 도구에 불과했던 것뿐이었다.
‘당명인이 엇나가기 시작한 건, 아마……’
머릿속으로 당명인의 멍한 눈매와 영혼을 잃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 지친 눈빛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미쳤다고 생각하오?”
당유기가 주서천의 심중을 꿰뚫었다.
“미쳐버린 사회 속에선 미치는 게 정상이오.”
당유기는 자조 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이를 먹으니 주책이 많아지는군.
말이 잠시 새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일단 먼 곳에서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터이니, 이야기는 내일 계속하겠소. 푹 쉬시길 바라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