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어……”
지일광은 무심코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리 많이 남아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죽을 줄 알면서 남겠는가.
부상자만 남지 않는다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니, 뭐 이리 머저리들이 많나.”
대충 세어 봐도 수백여 명.
거의 천에 가까웠다.
부상자가 없지는 않았다.
반대로 중상자까지 포함되어 상당히 많았다.
“어차피 우리들은 살날이 별로 남지 않았소.”
“우리 탓에 속도가 늦어진다면 문제이지.”
“차라리 방해가 되느니 영웅으로 남는 게 낫지.”
부상자들이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웃었다.
“그리고…… 으음, 앞날이 창창한 후기지수께선 왜 남는 거요?”
“괜한 멋진 척할 시간에, 차라리 여력이라도 만들 겸 심호흡이라도 하고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요.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일 수 있을 테니까.”
당혜가 눈길 하나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독기가 흐르는 그 눈 너머에는 증오심이 보였다.
“말씀은 이렇게 하셔도, 악의는 없으셔요.
반대로 나름대로 걱정해 주시는 편인걸요.”
낙소월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살짝 웃었다.
섬서제일미녀의 웃음에 주변의 남자들이 좋지 않은 상황인 와중에도 얼굴을 붉혔다.
“매화검수까지 남아주다니, 무척 든든하군.”
열넷의 매화검수 중 다섯 명만 남았다.
전력 중 제일 무력이 낮은 막내 셋과 그럭저럭 도움 되는 중간 항렬이었다.
“사제의 복수를 해야지.”
장서은이 눈시울을 붉혔다.
장홍은 말없이 머리만을 흔들었다.
“내기할까?”
“누가 이길지 뻔할 텐데.”
몽각과 담향이 무표정인 채로 대화를 나눴다.
반이 부상자였고, 반은 하수와 고수가 적절히 섞였다.
그러나 이름있는 고수는 몇 없었다.
사실상 이곳에서 목숨을 잃을 예정이니 정말로 도움 되는 이들은 놓고 갈 수가 없었다.
제갈수란은 낙소월이나 당혜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들이 워낙 강고해 막을 수 없었다.
“오는군.”
잔존한 천여 명의 기세가 확연하게 변했다.
잡담과 웃음이 끊기고, 죽음을 각오한 결사의 기세가 요동쳤다.
두두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이 흔들렸다.
그러나 남겨진 이들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나타난 건 삼천의 마교도.
마교도가 흥분으로 인해 눈이 벌게져 남은 이들을 덮치려는 순간, 앞장 선 천마가 그 앞을 막아섰다.
“오호.”
가늘게 떠진 눈매 사이로 기분 나쁜 안광이 타오르듯이 흘러나왔다.
섬뜩한 검붉은 빛이었다.
천마는 잔뜩 흥분한 마교도를 제지한 뒤, 손에 쥔 철검을 들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본좌의 앞을 가로막기에는 충분한 자격이로다.”
상천칠좌의 가공한 기세는 진짜배기였다.
정면으로 마주한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
그러나 남겨진 이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살의 등등한 기세로 마주봤다.
“하하하하!”
천마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남겨진 이들을 보고 대소를 터뜨렸다.
“최대한 한 마리라도 더 죽이고, 시간을 끈다.”
지일광의 최후의 명령이 떨어졌다.
“좋아! 와라!”
십만대산의 대마두가 검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그 검 위로 불길한 구름이 모여들더니, 시커먼 기운이 줄기차게 날뛰면서 대기의 압력을 높였다.
‘태극검만이 희망이다.’
‘은하노사와 백보권승께서도 계시고……’
‘가족들이 걱정이다.
홀몸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결코 쉽지가 않은데……’
‘모사라면 분명 성공하실 것이다.’
‘내가 사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검장께서 무사하셔야 할 텐데……’
‘으휴. 검을 잡기도 힘들구나.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 보상금이 제대로 전해져야 할 텐데……’
‘창룡은 무림의 미래를 이끌 거야.’
‘천마는커녕 부교주나 사대호법은 이길 수 있을지…… 후우!’
천여 명의 무인들이 가진 생각은 비슷했다.
그저 미래와 희망을 믿고 뒤를 맡긴다.
그것뿐이었다.
“천마삼검!”
검은 빛이 전장을 뒤덮는 순간.
“자하개벽!”
암흑을 꿰뚫고 자색의 빛이 당도한다.
콰아아앙!
“크흐읏!”
양 측 진영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천마조차 의아한 눈초리를 보였다.
천마삼검 제일식을 위해 검을 휘두르려고 하자 주변에 들끓는 마기를 없애버리는 검 줄기가 쏟아졌다.
마치 유성이 날아와 떨어진 것처럼 천마의 검을 후려치자 충격파가 형성되어 주변을 뒤덮었다.
“콜록, 콜록!”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이한 무림인들은 먼지구름에 헛기침을 토해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천마의 동공에 흥미 어린 빛이 떠올랐다.
“웃……기……지 마……”
후방에서의 누군가의 목소리.
그목소리는, 필시 천기의 것이리라.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웃기지 말란 말이다아아아-!”
절규에 가까운 비명 소리.
“콜록콜록. 아니, 어르신께서 왜 여기에 계십니까?”
“상단주께서 거래처가 박살나면 곤란하다고 좀 도우라 보냈소. 은공께서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라고…… 좀 늦었나?”
“좀 더 빠르셨다면 좋았겠지만, 별수 없죠.
참 나, 그보다 그 돈벌레 재주 한번 좋네.
어떻게 이렇게 맞춰서 보내는지……”
안개처럼 앞을 가리는 먼지구름이 걷히면서 신형이 나타났다.
다만,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누구냐.”
천마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물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그럭저럭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또 다른 사람은 칠 척에 가까운 신장을 지녔으며, 오른쪽 눈 부근에 일자로 된 흉터에 눈매가 매섭고 갓 오십이 된 중년인이었다.
“화산파.”
청년이 말했고,
“금의상단.”
중년이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시에 답한다.
“주서천.” “무곡.”
주서천과 무곡이 좌우로 나란히 섰다.
침묵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눈앞에 벌여진 광경은 그만큼 충격이었다.
천마가 최초에 모습을 드러내, 무림맹 주요 고수들을 박살 내고 쑥대밭으로 만든 것보다 더했다.
일검칠살, 지일광도 방금 전의 기세는 어디다가 팔고 왔는지 입을 뻐끔뻐끔 열면서 제 눈을 의심했다.
“우……”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번에는 마교도의 것이 아니었다.
희망을 잃고 절망에 잠겨, 그저 죽을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무림맹의.함성 소리였다.
“우와아아아아아!”
지축이 뒤흔들릴 정도로의 함성.
부상자가 반이나 있는데도 그 크기는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컸다.
몇몇의 무인들은 감정이 격해졌는지,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면서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사형……?”
낙소월은 죽은 줄 알았던 사형의 등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입가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번졌다.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당장 뒤에서부터 껴안아 얼굴을 묻고 펑펑 울고, 또 웃지 않았을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충동이나 어떻게든 자중하면서 주서천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 옆에 선 당혜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껌뻑였다.
“재회의 기쁨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합시다.”
주서천이 고개만 뒤로 돌려 낯익은 얼굴들에게 인사한 뒤, 다시 원위치로 옮겨 전방을 주시했다.
“쳇. 참, 많기도 하군.”
마교도 삼천.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부교주나 북사호법과 동환호법까지 있다고 생각하니, 부담스러웠다.
“어르신께서 와주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주서천이 검마, 무곡을 힐끗 보고 안도했다.
천마까지는 어떻게 해보겠지만, 그 외까지 신경 쓰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감이 있었는데 잘됐다.
“천마 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괜찮겠소?”
“충분합니다.”
무곡이 옆으로 빠졌다.
“이것 참 흥미롭군.”
천마가 잠시 검을 거두고 웃음을 지었다.
“그 소문으로만 듣던 정파의 영웅이 멀쩡히 살아 있을 줄이야…… 죽은 게 아니었나?”
“죽는데 순서 없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앞날이 창창한 스물한 살인데 이승을 떠나기에는 이르지.”
“하하하! 참으로 재미있구나!”
천마는 유쾌한 목소리로 대소를 터뜨렸다.
“운 좋게 혈승의 비급을 취하게 되면서 이름을 알린 애송이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 그것도 아니군.”
혈마 이상으로 섬뜩한 안광이 고요하게 빛난다.
“요 얼마 되지 않은 싸움 탓으로 흥분해서 그런지, 아니면 본좌의 눈이 잘못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대의 무위가 참으로 흥미롭구나. 만약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면, 굳이 태극검을 기다릴 필요도 없겠군.”
천마가 입술을 혀로 적시면서 씩 웃었다.
“긴말하지 않겠다.”
쿠구구구!
“가마.”
콰앙!
마치, 폭풍을 쏟아낸 것처럼 보였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천마의 신형이 튀어나갔다.
남들이 보기에는 사라졌다가 나타난 걸로 보였다.
그러나 동수인 주서천의 시야에선 달랐다.
그 움직임이 확실히 보였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리 그어지는 천마의 검.
주서천은 용연을 바로 잡고, 아래에서 위로 힘껏 치켜 올려 머리를 쪼개려는 천마의 검과 부딪쳤다.
채애애앵―!
길게 늘어지는 금속음.
콰아앙!
그리고 그 안에 실린 막대한 공력이 마찰한 순간, 충격파가 검 사이에서부터 형성되며 주변을 덮었다.
주서천과 천마는 서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과연, 천마!’
일격에 나름 최대한의 공력을 담아서 휘둘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밀어내지 못했다.
가공할 크기를 지닌 마기, 내공에 치가 떨렸다.
한편, 천마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다.
“중원 무림에는 기인기사가 모래알처럼 많다 하지만, 그대 같은 무인이 있다면 중원은 진작 망했을 것이다.
이렇게 부딪쳐봤는데도 도저히 믿기지 않구나.”
알다시피 마도의 무공, 일명 마공은 일반적인 무공에 비해 공력의 밀도나 크기. 그리고 파괴력이 높다.
또한, 그 사용자가 마도 최고수이자 상천칠좌의 절대고수인 천마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상천칠좌 구성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도, 순수한 파괴력만으로는 천마를 이길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가 와도 정면 대결은 피해야 할 상황이거늘, 주서천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마.”
주서천의 시선이 천마로 향했다.
“암천회주와 싸웠냐?”
천마는 답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아니, 질문을 바꾸지.”
주서천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개양성이 됐나?”
암천회주의 오른팔이자 상천십좌, 검의 마귀라 일컬어지던 검마의 합류 시점은 의외로 늦은 편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암천회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그러니까 칠검전쟁 또는 정사대전 때였다.
그러나 칠성사를 구성하는 개양성은 예전부터 존재했다는 걸 생각하면 여기에서부터 의문이 발생한다.
‘암천회는 어찌하여 전대를 내버려두고, 전광검귀라는 불확실한 무인에게 접근해 개양을 제안했나?’
무림 정서 상, 전광검귀라는 별호는 별로 좋지 않다.
무림인이 돈에 너무 관련되면 멸시를 받다 보니 평가도 절하된다.
당시 무선화를 구하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돈에 혈안이 됐던 무곡이다 보니 과소평가된 부분이 있었다.
암천회주가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몰라도, 용케 찾아내서 개양으로 삼아냈지만 말이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기 전의 암천회라면 특히나 그런 도박을 할 리 없다.’
가장 그럴싸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판을 짜놓는 암천회의 성격상 너무나도 맞지 않다.
‘하물며 칠성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방향까지 파악한 뒤 움직이려는 천기가 아닌가.’
무곡의 무공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는 일곱 명밖에 없는 우두머리를 쉽게 바꿀 리는 없었다.
하물며 회에서 힘을 상징하는 개양.
전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암천회주 다음가는 고수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바꾸는건, 주서천이 알고 있는 천기나 암천회가 아니다.
추측이지만 모종의 이유…… 천명이 다해 자리가 비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어르신을 찾았겠지.’
절대고수라 해도 수명을 이겨낼 수는 없다.
이 경우라면 아무리 알고 있던 미래에서 벌어진 일이라 해도 현생에서 반드시 일어난다.
암천회는 불가피하게 개양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고, 마침 이 시기에 천기의 그림자가 마교에 보였다.
그 의문과 추측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
‘천마는 암천회주에게 패해 개양이 됐다.’
무력만 있다면 굴복이 가능하니 어렵진 않다.
“본좌를 즐겁게 해준 대가로 답해주마.”
허무할 정도로 시원스러운 답변을 내며 천마는 천마잠형술로 육안에서 사라진 뒤, 주서천의 곁으로 접근했다.
쐐애액!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은 매섭기 짝이 없었고, 신속하면서도 파괴적이다.
이만한 위력을 지닌 공격을 아무런 소리 없이 순식간에 행한다는 것이 대단했다.
“그 말대로다!”
째애앵!
어떠한 조짐도 없이 명줄을 노리려는 공격. 그러나 이처럼 은밀하고 급격한 방식은 실컷 경험했었다.
속으로 새삼 유령곡과의 수련을 주기적으로 행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파르르.
맞부딪친 검이 힘 대결을 하듯 떨어댄다.
주서천은 검 너머의 마안을 마주보면서 몇 가지 더 물어보려 했으나, 공세에 가로막혀 묻지 못했다.
“그리 알고 싶은 것이 많다면, 힘의 증명부터 해라.”
콰드드득.
발밑의 모래알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더니, 천마의 몸을 중심으로 해서 나선형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질 것이고, 패자는 가지지 못할 것이니!”
눈에 훤히 보일 정도의 시커먼 줄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쁜 사악함이 느껴졌다.
“타핫!”
여태껏 광오했던 그가 초식명을 부르짖지 않았다.
그 대신 기합을 터뜨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천마삼검의 제일식을 펼치자 시커먼 빛이 시야를 가린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시신경.
뇌가 천마삼검의 원리를 깨닫는다.
‘외부로 발산하는 내공의 밀집포화!’
그 안을 살펴보니 참으로 무식하기 그지없었다.
저 광채의 정체는 강기가 맞다.
검을 휘감은 시커먼 것은 기요, 그게 응집되고 굳어 강기가 된다.
검을 휘두르면서 그 강기를 얇고 넓게 퍼뜨리는데, 여기에서 추가적으로 몇 겹을 쌓아 올린다.
본래 응축되고 몸집이 작아져야 할 강기이거늘 집중된 그 양이 상상을 뛰어넘는 바람에 넘쳐 흘러 이러한 빛을 내뿜게 됐다.
‘무식한 놈!’
주서천이 혀를 차면서 만중검의 천근추로 몸을 고정시켰다.
머리예서 짓누르는 검압이 워낙 대단하여, 다리가 발목까지 지면을 파고들었다.
‘자하개벽, 화우선형!’
호신강기만으로는 버텨낼 재간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도 가만있지 않고 반격에 나섰다.
제일식이 펼쳐졌다가, 매화를 피우기도 전에 부채꼴 형태로 바뀌면서 천마삼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돌풍이 됐다.
돌풍은 곧 폭풍으로 변해, 사납게 울며 주변을 뒤덮었다.
콰과과과과과!
자색과 흑색으로 물든 광채가 뒤섞였다가, 사방팔방으로 뛰쳐나가 날뛰었다.
공간과 공간 사이가 일그러졌다가, 갈기갈기 찢겨나가면서 상처를 남겼다.
허공으로 비산했던 수만에 이르는 모래알조차 광채의 폭풍우에 집어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콰아앙!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
주변의 공기는 그 충격파만으로 격렬하게 떨린다.
격전지도 무사하진 못했다.
서로 맞붙어 있던 절대고수들도 충격파에 못 이기고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일 장 높이의 허공으로 몸이 붕 떠오른 주서천은 그대로 제비를 돌면서 손가락을 세 번 튕겨냈다.
‘자하지!’
손에서 쏘아진 빛줄기가 곧은 직선을 그려내면서 천마가 도착한 지점에 맞춰 화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흐!”
천마도 검이 아닌 손바닥을 내밀어 파천수라장으로 자하지에 응답했다.
손바닥에서부터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시커먼 광채가 일순간 번쩍이더니, 몸집보다 몇 배나 되는 크기의 장풍이 자하지가 내려오는 공중으로 뿜어졌다.
콰아아!
자하지가 파천수라장에 집어 삼켜 사라졌다.
그사이, 주서천은 바닥으로 내리꽂히듯 착지해 땅을 박차고 신형을 날려서 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쐐액!
허공에 구멍을 내듯 꿰뚫어지는 일직선의 검은 십만대산의 마귀의 숨통을 끊으려고 목을 노렸다.
채애애애애-앵!
그러나 아쉽게도 검극은 살을 짓누르지 못했다.
바로 직전에 천마가 검신으로 막아냈다.
“후웁!”
공기를 폐 깊숙이 빨아들인다.
오밀조밀한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단전에서부터 내공이 치솟았다.
기맥 곳곳에 뻗어가는 대해와 같은 공력이 신체능력을 일순간 높여 그 힘을 공세와 함께 퍼부었다.
파바바바밧!
공격에 실패했지만 상관없다.
무너지면 다시 일어나 공격하면 그만이다.
머리가 앵앵 울릴 정도의 금속음이 났다.
일순간, 검이 수십 수백 번 번쩍이면서 유성처럼 쏟아진다.
화경의 고수조차 감히 좇을 수 없는 쾌속의 검!
째재재재쟁!
몇 번인지 모른다.
그야말로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주서천과 천마가 공수를 수백 번 넘게 교환했다.
검압만으로 머리카락이 전부 뒤로 넘어갔다가, 바람에 휘날리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절대고수밖에 인식할 수 없는 공간.
수축된 동공이 검의 움직임을 좇아가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손은 눈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검격을 뱉어냈다.
“하하하!”
천마가 기분 좋은 듯이 대소를 터뜨렸다.
웃으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는 게질렸다.
‘더럽게도 강하다.’
음신도 음신이지만 천마는 더 괴이했다.
음신은 적어도 내공으로 무식하게나마 버텨낼 수라도 있지, 천마는 달랐다.
다방면으로 뛰어났다.
신체능력은 물론이고 공격과 수비 골고루 갖췄다.
‘과연, 개양.’
괜히 암천회에서 무력을 담당하는게 아니었다.
“후웃!”
공수가 거의 천에 이르는 순간, 약간의 틈이 보였다.
신행백변으로 재빨리 검을 거둔 다음, 근접한 채로 몸을 붕 띄운다.
그 다음 이어지는 공격은 후려차기.
대퇴부에 힘을 팍 주고, 무게를 실은 다음 천마의 갈비뼈를 노려 힘껏 휘둘렀다.
부웅!
마치 둔기를 휘두른 것처럼 느껴지는 무게감.
근력과 더불어 내공의 힘이 실린 다리가 덮쳤다.
천마는 회피가 불가능한 걸 깨닫고, 거의 반사적으로 팔을 수직으로 세우고 겨드랑이에 모았다.
콰―앙!
일반적인 격타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둔기로 후려친 것처럼 박살음이 터졌다.
천마는 버텨내다 싶었더니만, 결국 그 육신이 화려하게 튕겨져 나가며 후려친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에 주서천은 숨도 채 쉬지 않고, 땅 위에 착지하자마자 궁신탄영으로 튕겨져 나가 천마를 쫓았다.
‘자하지!’
왼손을 쭉 뻗어서 손가락을 튕겼다.
자색으로 된 빛줄기가 위를 향해서 대각선을 그렸다가, 직각으로 꺾이면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후려차기에 맞고 튕겨져 나간 천마는 바닥에 부딪치면서 공중에서 제비를 돌아 균형을 되돌리려 했으나, 자하지가 그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덮쳐 왔다.
콰과과과!
신형이 떨어지는 순간을 맞춘 빛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실려 있는 공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바닥에 부딪치자 지반을 뒤집어 놓았다.
반경 일 장 정도가 반구형 형태로 내려앉았는데, 천마가 지나간 곳을 따라서 십여 개 정도 이어졌다.
대부분이 맞추지 못했지만, 딱 하나만 천마의 움직임을 쫓아서 흉부를 노리고 파고들을 수 있었다.
“훗!”
하나 천마가 이를 용납하지 못했다.
한쪽 발이 지면에 닿자마자 몸을 회전해,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주서천은 속으로 질린 듯이 혀를 차곤, 천마의 정면에서부터 접근해 재빠르게 자하개벽을 쏘아냈다.
웅웅웅!
천마가 어느새 이가 다 나간 철검에 마기를 응집시킨다.
대기의 기가 들끓어 오르더니 사납게 날뛰었다.
‘아까의 그것인가?’
주서천은 자하개벽을 화우선형으로 이어갔다.
천마삼검 섬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판단은 너무나도 섣불렀다.
천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면서 검을 비틀었다.
스으윽.
소리가 사라졌다. 빛도 없어졌다.
분명 형상화될 정도의 양을 지닌 마기가 겹쳐지려는 순간이었는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주변의 대기조차 원상태로 돌아왔고 시커먼 아지랑이도 없어졌다.
일순간 빛나려던 찰나 급작스레 이뤄지는 변화.
천마삼검의 제이식인 변(變)이었다.
‘……!’
주서천의 눈이 커졌다.
겉보기로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검이나, 그 안은 다르다.
도리어 소름이 다 끼쳤다.
섬이 주체하지 못하는 강기의 포화라면 변은 그 반대인 정리하고 가다듬어 승화하는 것.
무형강기였다.
화우선형으로는 막지 못할 것이 안봐도 뻔한 일.
재빨리 거두고 신행백변으로 다른 수를 쓰려 했다.
‘아니, 그러면 늦는다!’
마공은 일반적인 무공에 비해 안전이나 균형, 정신력 등을 제외한 능력이 전부 높다.
반응속도 역시 마찬가지.
하물며 그게 동수, 현경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신행백변이 공격 중 전환에도 능숙하다 해도 그 속도를 쫓아갈 수는 없었다.
‘피한다!’
무형강기의 특징은 형태만 없는 게 아니다.
밀도 역시 보다 짙기에 강기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방어를 포기하고 회피를 선택했다.
‘움직여라! 움직여!’
신체의 능력을 전부 한계 이상으로끌어올렸다.
‘유령보!’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을 얻어야 한다.
영혼의 무게까지 버린다는 생각으로 몸을 날렸다.
생각이 닿기도 전에 발이 먼저 움직였다.
회피에 집중할 생각으로 호신강기조차 펼치지 않았다.
조금만 늦어도 치명상을 피하지 못하는 상황.
천마의 검이 스윽 하고 몸을 훑으며 지나간다.
스걱!
겉옷이 깨끗하게 잘려나간다.
그 너머의 피부까지 얇게 베이면서, 피가 튀었다.
좌측 가슴 위에서부터 우측 옆구리까지 선이 이어졌으나 천만다행으로 쩍 벌어지며 내장이 튀어나오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무형검강이 스쳐 지나가면서 피부만 베어 갈랐다.
쓰러지듯이 뒤로 넘어가는 몸.
주서천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몸을 그대로 뒤집어 바닥을 손으로 짚고, 몇 바퀴 회전하고 화려히 착지했다.
“하아, 하아……”
천하의 주서천도 정신적으로 지쳤는지 숨을 거칠게 내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정말로 대단하도다, 주서천.”
천마가 짐짓 감탄을 흘렸다.
“반사신경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 판단력이나 움직임하며, 마지 산전수전을 겪은 노고수 같군.”
천마삼검의 제이식은 그럭저럭 알려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제일식에서 제이식으로 확 펼칠 수 있는 자는 역대 교주 중에서도 몇 없었다.
있다 해도 워낙 옛일이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이 급변에 대해서 알려져 있는 것도 아니니, 섬에서 변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상정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즉, 직접 대면하게 되면 이 변화를 예상하지 못해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서천은 아무렇지 않은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피해냈다.
그것이 천마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지금까지의 격전에서부터 상상 이상의 것을 봤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경험이 느껴졌다.
“정말로 사람인가?”
천마가 의아한 듯 물었다.
비꼴 의도는 아니었다.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애초에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는데 심상구현을 이루고 현경의 성취를 얻어냈다는 게 말도 안 됐다.
상식을 너무나도 벗어났다.
여러모로 반칙적인 마공이나 육대금공을 떠올려도 이 정도는 불가능하다.
“사람이다, 이 마귀야.”
주서천이 혈도를 짚고 지혈하며 답했다.
미간은 찡그려져 있었다.
‘강해.’
혈마의 경우는 전 장문인, 우일문이 힘을 깎아뒀었고 음신의 경우는 상성 면으로 유리한 편이었다.
상천이라는 절대지경에 든 고수와 제대로 싸운 것을 따지자면 천마가 처음이었는데 손이 다 떨렸다.
마공의 무식한 위력부터 시작해 그 외에 전체적인 능력이나 경험 면에서도 무시무시했다.
‘이 천마를 팔다리 자르지 않고 이긴 회주는 얼마나 괴물일지 상상이안 가는구나. 어휴.’
암천회주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오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기야, 전생에서도 상천십좌가 몇 명이나 붙었다.
앞으로의 싸움을 생각하니 짜증과 걱정이 솟구쳤다.
“천기가 왜 네놈을 그토록 신경 쓰고 경계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겠다.”
천마가 피식 웃으면서 이가 다 빠진 철검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본좌는 힘의 증명을 본 것이 아니라면, 쉬이 믿지 않는다. 솔직히, 네놈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파의 영웅 또는 매화정검.
혈근경을 불태운 몹쓸 놈. 그 정도였다.
그러나 명성이 알려지면서 흥미가 생겼고, 암천회의 개양이 된 이후로는 그 행적을 보고 궁금해했다.
그리고 오늘날 얼굴을 맞댄 순간, 몸에 조금이지만 전율이 흘렀다.
“몸 풀이도 여기까지다.”
남들이 들었다면 입을 떡 벌리고도 남을 말이다.
여태껏 보여준 무공만으로도 도저히 사람으로 느껴 지지 않았다.
여파만 해도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데 그것이 고작 몸 풀이에 불과하다니.
다행히 지금까지 피운 난리 탓에 거리를 벌려둬서 듣지 못했지, 들었다면 놀라 까무러쳤을지도 모른다.
“자아, 현경답게 서로의 무를 증명해 보자.”
통제를 할 생각조차 보이지 않았던 마기가 천마의 육신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흡수되어 사라졌다.
주서천은 천마의 기세가 순식간에 가라앉자, 바짝 긴장하면서 언제든지 반격할 태세를 잡았다.
“와라.”
주서천이 천마를 도발하듯이 까딱인다.
“천마.”
“하하하하!”
천마가 주서천의 도발에 소리 높여 웃었다.
“좋다! 본좌, 아니!”
그가 힘껏 발을 굴렀다.
콰아앙!
한 발을 그저 조금 힘차게 굴린 것에 불과한데, 지면이 부서지면서 가라앉았다.
그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공기가 터지고, 거대한 압력이 어깨를 짓눌렀다.
“나의 모든 걸 보여주마!”
콰르르롱!
마른하늘에 우레가 쳤다.
머리 위 불길한 구름들이 더 시커멓게 변색됐다.
“주, 서, 천-!”
마귀의 목소리가 천하에 울려 퍼졌다.
천지가 뒤흔드는 착각이 들 정도의 크기였다.
가히 음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목소리.
딱히 어떤 공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생명체들이 목을 움츠렸다.
콰앙!
천마가 지면에 발을 떨어뜨린 순간, 그 몸은 유성이 됐다.
‘타앗’ 같은 소리가 아니라 쾅 소리가 났다.
잿빛과 시커먼 색이 뒤섞인 광채가 뿜어져 나왔는데, 실린 내공이 어찌나 많던지 대기가 요동쳤다.
‘천마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