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호, 북서망루.
원래 청해호에는 망루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림맹이 정마대전을 위해 임시로 건축했다.
망루 위에는 경계 무사 둘이 앉아 입을 쩍쩍 벌리며 하품을 내뱉었다.
선임 무사는 얼마 전에 막 들어온 후임 무사를 툭툭 건드리면서 놀다가, 질렸는지 제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았다.
“으허어억!”
“헉, 뭐야!”
선임 무사는 이제 막 잠들려다가, 후임 무사의 굵직한 비명을 듣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혹시 마교가 나타나기라도 한 것일까 하는 마음에 지평선 너머를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뭔데?”
선임 무사가 눈에 힘을 팍 주고 부릅뜨자, 후임 무사는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며 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선임 무사의 시선이 후임 무사의 손끝을 따라서 위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한낮일 텐데 위가 어둡다.
“아.”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웠다.
구름이 아니었다.
족히 수만 마리나 되는 새 떼였다.
“철새 떼군.”
철새는 번식지와 월동지를 한철마다 오가는 새다.
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움직이기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이 노했다면서 불안에 떨기도 한다.
선임 무사는 철새 떼가 전부 지나간 것을 확인한 다음, 피식 웃고는 후임 무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에라이, 이 촌놈아. 철새 처음 보냐. 놀랐잖냐.”
후임 무사가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선임 무사는 잘 테니 깨우지 말라고 엄벌을 놓고 눈을 감았다.
“으악!”
“아, 또 뭐!”
선임 무사는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고 후임 무사를 어떻게 죽여야 할까 고민했다.
후임 무사는 선임 무사의 고함에 대답하지 않고, 그 대신 천장의 종과 연결된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땡땡땡땡!
미친 듯이 흔들리는 종소리가 청해호에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망루에서도 같은 소리가 났다.
선임 무사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지평선을 보았다.
“마교다! 마교의 군세다!”
* * *
“패신군?”
천기의 목소리가 분노로 들끓었다.
“웃기지 마!”
농담거리도 아니다.
더 이상 웃을 수도 없었다.
그 꼴도 보기 싫은 주서천을 고생 끝에 죽였다.
살려 둘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손해를 감수하고 없앴다.
남겨진 계획을 차근차근 밟아 가며 이제 좀 제대로 해 보겠구나 생각했는데, 문제가 또 터졌다.
설마 했던 회의 수뇌가 또 살해당했다.
칠성사와 도감부장을 포함하면 네 명 째였다.
전면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는데 벌써 반이 당했다.
궁귀검수가 등왕각에 나타났다고 급보를 받았을 때 무언가가 불안했지만,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천칠좌니까.
음신이니까.
그러나 안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급히 서신을 보내 칠성사병을 움직여서 등왕각을 포위했어야 했다.
설마 했던 음신의 사망은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흉수가 패륜아의 반란 때 천권을 죽인 놈이라는 걸 듣고 혀를 깨물고 싶었다.
정파의 영웅을 죽였더니 사파의 영웅이 방해한다.
“아니!”
천기가 탁자를 부술 듯이 내리쳤다.
“그놈이 거기서 왜 나와! 왜!”
암천회의 산하 기관, 칠성사는 전부 중요하다.
버릴 말이 없다.
그 우두머리야 두말할 것도 없다.
옥형은 내외부로 감시와 암살을 맡는다.
고위 관리인 정이품 도지휘사도 어렵지 않게 사고사 시켰다.
그 외에도 소류금의 음공은 여러 방면으로 쓰였고, 특히나 등왕각의 기녀들은 접대로 쓰기에 적절했다.
하지만 소음문주가 사망한 이상 이용할 수가 없었다.
사도천주 때문이다.
사도천주는 야욕에 환장하는 늙은이다.
등왕각처럼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그냥 둘 리 없었다.
그동안은 음신이 있어 눈치를 봤지만, 그 훼방꾼이 죽어 버린 이상 운영에 개입할 것이 분명했다.
음신에게는 제자들이 있으나, 이렇다 할 인재들은 없으니 사도천주의 꾐에 금방 넘어갈 것이다.
무엇보다, 음신이 그동안 워낙 원한을 여기저기 뿌린 탓에 문파를 지키려면 사도천의 보호가 절실했다.
이로서 암천회는 많은 걸 잃게 됐다.
한편 사도천주도 당황하고 있었다.
‘패신군?’
지배자는 영웅을 좋아하지 않는다.
별호에 임금이 들어가면 더 싫어한다.
권세를 빼앗길 수 있어서다.
사도천주의 입장에선 불온한 세력을 언제든지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인물이었다.
‘곤란하군.’
공적인 자리에서 소음문도가 조롱받은 사건 탓에 음신, 소류금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죽음이 달갑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도사문이니 협력 관계이고, 사도천의 전력이 반 토막 난 후에는 그 힘이 특히 필요했다.
하지만 패신군의 등장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수정된 수준이 아니라 거의 뒤집어졌다시피 했다.
자고로 강자, 그것도 사파의 절대고수는 하나같이 자존심이 강하며 지배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협력적으로 나오지 않게 된다면, 상상 이상으로 성가셔진다.
“후우.”
일단은 만나 봐야겠다.
사도천주는 겉으로는 사파 출신의 상천칠좌의 교류라는 명목으로 패신군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그사이, 사파인들은 패신군의 위명을 듣고 강남으로 조금씩 모이게 된다.
새로운 세력의 등장이었다.
패신군, 주서천은 주변에 모여드는 사파인들을 내쫓지 않고 그들은 대동한 채 사도천으로 향했다.
같은 날, 무림맹과 마교가 청해에서 충돌했다는 소식이 중원 전역에 알려졌다.
정마대전의 시작이었다.
향후 사파의 신비 고수로 알려질 패신군, 주서천은 등을 돌려 조금씩 불려 가는 무리를 보고 만족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형. 아랫것들 다 부를까요?”
족히 오십은 되어 보일 법한 김팔이 비굴하게 웃었다.
“아니. 됐다. 그리고 입 냄새 나니까 비켜라.”
“예, 대형!”
김팔이 스스슥 하고 뒤로 물러났다.
“너희도.”
“넵!”
여덟 동생들도 물러났다.
남창에서 음신과의 대결 이후, 김팔을 비롯하여 사파의 무인들이 여럿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종자들은 점점 불어나더니 하나의 세력이될 정도가 됐다.
최초로 따라온 김팔 구형제들은 바람잡이가 되어 패신군의 신위를 널리 퍼뜨렸는데 일부러 내버려 뒀다.
“사파의 형제들이여! 패신군의 뒤를 따라라!”
“그의 패도에 막을 건 아무것도 없다.
음신조차도 패신군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사도반란 때의 일이 기억나는가? 그 영웅의 위대한 발자국이 되어라. 우리는 역사에 남을 것이다!”
사기꾼 행세를 오래 해서 그런지, 혀 놀림이 제법이었다.
그들의 말에 추종 세력이 형성됐다.
괜히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다.
이러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개인 세력으로 사도천주를 압박하고, 협력시킨다.’
원래의 목적은 요광의 추적이었다.
그러나 옥형인 음신을 죽이면서 상황이 바뀌자 목적을 틀었다.
두 번째인 사도천의 협력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상천칠좌의 이름값을 적극 이용하자.’
무림맹과 달리 사도천은 중앙 집권체계다.
사도천주가 워낙 막강하고, 위엄이 보통이 아니라 그렇다.
그러나 사문반란 이후로 그게 좀무너졌다.
반란은 실패했으나, 일어난 것 자체가 사도천주와 맞먹어도 괜찮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돼서 그렇다.
거기에 충성을 맹세한 세력이 반토막이 났으니 노릴 만도 했다.
사도천주의 걱정이 현실이 됐다.
주서천은 이 불온한 바람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귀찮기는 해도 추종자들을 막지 않았다.
그 대신 필요 이상으로 적의를 끌어내고, 전면 전쟁이라는 인식을 줘서는 아니 됐다.
“대형, 근데 정말로 사도천을 정복하러 가는 거 아닙니까?”
“또 그 질문을 한다면 사도천주에게 찾아가서 네놈의 야욕을 직접 전달해 주마.”
“사도천 만세! 사도천주 만만세!”
그 외에도 몇 가지 수확이 있었다.
옥형성의 우두머리가 무엇을 숨기고 있었을지 몰라 소류금의 주거 공간을 찾아가 주변을 살살이 뒤졌다.
제갈승계를 데려왔다면 비밀 공간을 추가적으로 찾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그래도 기관지식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어 소음문주의 보고를 털 수 있었다.
생각 이상의 재보(財寶)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과연 암천회의 수뇌이자 상천칠좌 다웠다.
그중에서 제일 기뻐한 건 태아를 대신할 수 있는 보검의 발견이었다.
“용연(龍淵)!”
용연은 태아처럼 구야자와 간장이 초나라 왕의 명으로 만들었던 세 자루의 검 중 하나로서, 진나라가 망한 후 항우가 태아와 함께 소유했던 명검이다.
어째서 이만한 명검을 천하에 보이지 않고 숨겼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전 주인이 주인이니 이해가 갔다.
소류금이 돈이 궁한 것도 아니었으니, 괜히 이 용연으로 검의 고수가 늘어나는 걸 원치 않았으리라.
태아의 형제인 만큼 겉으로 봐도 범상치 않은 예리함과 튼튼함을 지녔다.
그렇지 않아도 일반적인 철검은 만중검으로 몇 번 휘두르면 부서져 버려서 대체할 것을 찾고 있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무공 비급.”
무공 비급도 발견됐다.
그런데 이 비급들이 정작 일반적인 무림인들이 보면 실망할 만한 것들 밖에 없었다.
음공을 유일하게 다루는 소음문답게, 음공밖에 없었다.
소음문은 생전에 천하의 음공을 전부 수집하려던 목적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알려진 것부터 시작해 희귀한 서적들이 쌓여 있었다.
만약 남들이 봤다면 쓰레기라면서 그냥 지나쳤겠지만, 주서천은 달랐다.
세 가지를 골라 가져갔다.
사자후나 소음후 계통의 용후(龍吼).
검신을 튕겨 음파를 내는 탄검음(彈劍音)이었다.
탄검음의 상위 호환이 소류금의 철음진파다.
철음진파는 위력도 좀 더 높고, 탄검음처럼 검신으로 제한되는 게 아니라 쇳소리면 전부 가능했다.
어차피 오성이 한계이고, 주력 무공으로 쓰지도 않을 테니 상관없었다.
마지막은 전음입밀(傳音入密)이다.
일정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타인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몰래 전하는 기예였다.
음공이긴 하지만 싸우는 용도로는 쓰이지 않는다.
상당한 내공의 소모가 필요해서 초절정 고수라도 조금 부담이 된다.
또한 음공의 고수여야 했다.
정말로 편한 기예이지만 이걸 위해서 음공을 택할 이유가 별로 없어서 무림인 중 쓰는 자는 몇 없다.
주서천은 사도천주를 만나러 가는 동안 탄검음과 전음입밀을 성실하게 수련했다.
탄검음이야 심심하면 검신을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수련하면 됐고, 전음입밀은 소령을 대상으로 했다.
둘 다 심상구현 답습과 현경에 오른 깨달음 덕인지 보름이 채 되지 않아 오성까지 올릴 수 있었다.
용후의 경우는 광범위적이고 피해가 워낙 심해서 수련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추종자들에게 경고를 전달할 때만 사용했다.
“나를 따라오는 건 너희 마음이지만, 그 권세를 등에 업어 패악질을 하는 놈들은 용서하지 않겠다!”
머릿속을 앵앵 울리는 용후에 추종자들이 깜짝 놀랐다.
그들은 공포에 압도되어 얌전히 지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사파인들은 남이 명령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고, 반골 성향도 다분하다.
그렇다 보니 이를 무시하고 패신군의 이름을 이용한 이들도 있었는데, 직접 찾아서 죽기 직전까지 팼다.
단전을 폐하고 싶었지만, 사도천주를 만나기 전까진 이탈을 피하고 싶어 팔다리 중 하나만 분쇄하듯이 부러뜨려 주고 내쫓았다.
“과연, 패신군!”
$패왕이로다!”
겁에 질리거나 불만을 가지고 이탈하는 자도 있었지만, 도리어 위엄있고 멋있다며 열광하는 자들도 존재했다.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암천회를 부수면 패신군으로서의 신분은 버려야겠다.’
화산파의 제자, 그것도 정파의 영웅이 사파의 상천칠좌란 게 알려진다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 모른다.
그래서 괜한 은원 관계를 만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사도천 본부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무림맹과 마교가 격전을 치르고 있겠구나. 부디 문제가 없어야 할 텐데……’
* * *
신강에서 청해 땅을 밟은 마교의 군세는 대략 일만.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이 유난히 흉해 보였다.
지평선 너머로 전해져 오는 살의의 폭풍은 보는 이가 절로 실금을 지릴 정도다.
둥! 두둥!
고수(鼓手)가 북을 친다.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두 사람이 세 사람으로.
마치 전염되듯 북소리가 군세 전체로 퍼져 각자의 자리에 위치한 고수들이 순간에 맞춰 북을 쳤다.
대기가 떨려 오는 그 진동음이 정파인들의 가슴을 자극했다.
“캬하하핫!”
“저기 먹을 것들이 보이는구나!”
위엄에 맞지 않은 경박한 웃음소리.
입가에 번진 웃음이 잔혹했다.
정면에는 먹지 못해 삐쩍 마른 노비들이 서 있었는데, 쇠로 만든 형구가 목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목줄처럼 쇠사슬이 이어져 마인들의 손에 들렸다.
혈교의 군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담았다.
혈교도가 사교에 빠져 광기에 젖어 있다면 마교도는 종교인보다는 잘 단련된 전사가 떠올랐다.
성급하지 않고 느긋하게 전진하던 마교의 군세는 청해호에 접근하자, 도중에 멈춰 섰다.
일만의 숫자를 약간 넘어서는 마교의 무리가 합을 맞춰 동시에 멈추는 광경은 제법 장관이었다.
“정파의 위선자들이 마중을 나왔구나.”
바람에 펄럭이는 시커먼 깃발 아래, 몸집이 산만 하고 호랑이를 닮은 노인이 거친 수염을 긁적이며 히죽 웃었다.
검은 빛깔의 말 위에 타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명마였다.
노인은 명마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정면을 쳐다봤다.
북소리는 없었으나 마교의 군세와 대치하듯, 백색과 청색의 조화를 이루는 무림맹의 군사가 있었다.
대신 그 숫자는 적었다.
마교는 일만의 병력이었지만, 무림맹은 칠천 밖에 되지 않았다.
정파 무림은 원래부터 인력이 그다지 많지 않고, 얼마 전 정혈대전의 피해 탓에 동원 수가 적었다.
남부의 사도천 영역도 막아야 하다보니 수적으로 열세를 보였다.
“만나서 반갑다!”
노마(老魔)가 고삐를 움직여 앞으로 나섰다.
“노마는 부교주, 전호마(戰虎魔)라 한다!”
“전호마!”
전호마는 한 시대를 풍미한 대마두로서, 호랑이를 닮은 얼굴에 싸움을 특히 좋아하는 마교인이다.
전호마를 찾으려면 십만대산이 아니라 전쟁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어릴 적부터 마인으로서 자라와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으며 일찍이 대마두로 불려 부교주가 됐다.
“해는 중천에 떴고, 구름 한 점 없구나!
싸우기 딱 좋은 날씨다!”
전호마가 조롱이 아닌, 진심으로 기쁜 듯 쾌활하게 웃었다.
전쟁을 앞에 둔 그의 감정은 격양됐다.
무림맹과 사도천, 그리고 마교와 혈교가 세력의 균등함을 지니면서 평화 협정을 맺은 뒤로 싸우지 못해 얼마나 답답했던가. 그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아직도 살아 있다니, 명줄 한 번 길구나.”
무림맹 측에서도 누군가 몇 걸음 앞서서 나왔다.
수염이 희끗희끗한 노인이었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늙은이가 아니라, 신비감과 위엄이 동시에 존재했다.
전호마는 노인을 보고 반갑듯이 이름을 불렀다.
“오오! 곤륜의 장문인, 상명진인이 아닌고!”
“닥쳐라!”
상명진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곤륜파와 마교는 예로부터 철천지원수였다.
오늘날처럼 마교가 중원 무림을 침공하려면 청해의 땅을 필수적으로 밟아야 했고, 항상 곤륜파와 제일 먼저 접촉했다.
설사 평화가 지속되어도 마찬가지다.
종종 사람에 굶주리거나, 미쳐 버린 마인들이 중원으로 흘러들어 오면 곤륜파가 나서서 토벌했다.
이러한 역사가 길다 보니 그동안 쌓인 원한의 깊이도 상당했다.
또한 상명진인과 전호마는 젊었을 적 악연이 있었다.
무림맹과 마교의 전투에서 공수를 섞어 봤다.
“어허, 이 친구야. 너무 화내지 말게나. 이 노마는 옛 호적수를 봐서 얼마나 기쁜지 알고 있는가.”
“말이 많은 건 여전하구나. 좋다.
내 오늘이야말로 네놈의 혀와 함께 목을 자르겠다.”
“클클클. 곤륜의 장문인이신 도사께서 말이 너무 험하지 않나. 뭐, 그래도 환영하네.”
전호마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 안의 눈빛을 보면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했다.
“자아, 그럼……”
전호마는 턱을 들고 눈을 내리 깔았다.
그 오연한 시선에 무림맹이 불쾌한 듯 인상을 구겼다.
정파인들이 화를 내건 말건, 전호마는 개의치 않으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확 떴다.
“자아, 들어라! 마교의 교도들이여!”
노마의 기세가 바뀐다.
마치 호랑이가 포효하듯, 사람보다는 야수에 가까운 기세가 주변을 뒤덮었다.
“올바르다니, 올바르지 못하다니! 정도이니, 사도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약자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두근두근!
피와 살을 볼 생각에 첫사랑을 본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바짓가랑이에 열기가 모이고, 뇌가 뛰었다.
“사람의 역사란 예부터 힘으로 시작했으며, 힘으로 끝났다! 동지들이여! 마교(魔敎)라 불리는 것을 인정하자! 힘이 약한 것은 죄악이요, 마라이다!”
털이 쭈뼛 서고 소름이 끼쳤다.
이제 곧 일어날 싸움에 가슴이 떨리고, 양물이 서고, 입이 귀에 걸렸다.
전호마의 동공이 짐승의 것처럼 세로로 쭉 찢어졌다.
심지어 색깔 역시 범처럼 황금색으로 번뜩였다.
“재물이 부족하면 약탈하면 되는 것이고, 미인이 탐스러우면 범해라! 누군가 짜증나게 한다면 죽이면 되지 않는가! 힘 앞에선 모든 것이 공평하다!”
“캬하하하하! 누군가가 옳은 말을 한다고 생각하면 죽여라! 그러면 이제 나의 말이 옳은 말이 되리라!”
악마들이 웃었다.
사도천에 도착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추종자 세력이 따라오기는 하지만, 신경 쓸 건 없다.
어차피 추종자들이 있다는 것만 알리면 된다.
호남과 광동의 경계선. 사도천 본부.
이 년 만이었다.
그때는 구경할 것도 없이, 사문반란에 참전하여 싸우느라 정신없었다.
다시 와서 약간의 여유를 두고 보니 풍경이 좀 다르게 보였다.
‘정말로 여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시간에도 정마대전의 희생자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괜히 다급해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짐을 싸들고 부랴부랴 사도천에 방문하면 차후의 협력이 어려울 수 있었다.
사도천주는 무공도 무공이지만, 눈치도 빠르며 지략에도 능하다.
만약 여유 없이 급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눈치 빠른 늙은이가 유리하다는 걸 깨달을지 모른다.
협상을 불리하게 끝내고 싶지 않고, 좀 더 확실하게 싶어서 일부러 빠르게 달리지 않았다.
참고로 사도천으로 향하는 행렬 동안에 정말로 여러 사람들이 붙었다.
“히야, 저자가 패신군인가 보군.”
"멀리서 봐도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구만 그래.”
“그나저나 생각보다 젊지 않나?
많아 봤자 이제 막 이립을 조금 넘은듯한데……”
“쯧쯧 이래서 하수 놈들은 안 돼.
원래 무공이 높은 자일수록 노화가 느린 법이고, 특히나 화경에서 벗어나면 환골탈태를 겪게 되며 최소 십오 년에서 이십 년은 더 젊어 보이지 않나.
본인이 동안이라면 더욱 그렇지.”
“그러는 너도 하수 아니냐? 어휴, 하여간 입만 살아서는!”
“어허. 이 무식쟁이야. 원래 이론이 중요한 거야.”
“이제 보니 완전 정파인이네, 정파인. 낄낄낄, 아는 거 많아서 좋겠다! 샌님아.”
“뭣? 정파인? 이 새끼가!”
무림인들은 패신군을 보고 조금 젊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겉모습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푸줏간 지하의 장인이 만들어 준 인피면구 덕이기도 하지만 일부러 기세를 흘려 그리 믿도록 했다.
화산오장로 시절부터 나름대로 눈치 있게 행동하고, 현생에서 거짓말이나 연기를 밥 먹듯이 하다 보니 이런 것만 늘었다.
참고로 알게 모르게 암살의 위협도 존재했다.
소음문의 경우 문주의 복수를 위해 살수 단체를 찾아서 의뢰를 맡겼다.
등왕각이나, 혹은 소류금이 모아둔 재물 덕에 돈이야 충분했다.
금액이 상당했지만 하나같이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다.
무림의 절대고수의 의뢰 등급은 불가능이었다.
개개인의 무력도 이유가 되지만 그정도 되는 고수가 되면 이미 개인이 아니라서 그렇다.
예를 들어 검성, 남궁위무는 무림맹주다.
암살하려면 무림 사대 세력 무림맹에 깊숙이 침투해 상천칠좌를 죽여야 하는데 사실상 불가능하다.
무림맹 내에서도 고수들이 수없이 있다 보니, 바깥에 혼자 나오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했다.
아니, 그것마저도 무력 차이가 심해서 불가했다.
몇몇 자객방은 돈에 눈이 멀어 의뢰를 받아들였지만, 패신군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보고 포기했다.
그 외에도 천기가 암천회의 천선성이나 옥형성 출신의 칠성사병들을 붙였지만 이 역시 불가했다.
주서천이 ‘다가오면 너희를 죽일거야.’ 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겼는지라 추종자들 사이에 섞여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럴 경우 암살 대상의 가족 등을 찾아서 인질로 삼아 어찌해 보는데, 이 방법 역시 불가능했다.
가족은커녕 관련된 사람들조차 없었다.
바람잡이인 김팔이 포함된 구형제가 유일했는데, 사기꾼들이란 걸 금방 깨닫고 포기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패신군.”
천기는 정마대전의 일로도 무척 바빴지만, 그 와중에도 사도 무림의 일을 신경 쓰며 머리를 굴렸다.
암천회의 간부진이 둘이냐 살해됐으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패신군은 너무나도 수상쩍었다.
이 정도 되는 절대고수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난 게 이상했다.
다방면으로 알아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 그 의심은 더 깊어졌다.
무엇보다, 사도천이 회의 손에서 거의 멀어진 탓에 정보의 취득도 어려워져 더욱 답답해졌다.
특히나 사도천주와 패신군이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지가 신경 쓰였다.
사도천의 위용은 여전하다.
한때는 반란으로 화려한 건축물들이 부서졌었지만, 지금은 전부 멀쩡하다.
비록 세력이 반으로 줄었으나 사파의 대표 연합체로서 위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정문 앞에는 사도천 소속 무사가 경계를 섰다.
오늘따라 몸짓 하나하나에 기합이 들어가 있다.
자세히 보면 얼굴이 잔뜩 경직됐다.
“……”
무림맹이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듯, 사도천 역시 그렇다.
언제나 사람들도 북적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밑바닥 삼류부터 시작해서 일류를 넘어선 고수들까지.사파의 무인들이 양옆으로 나열해 서 있다.
그 숫자가 족히 수백 명이었는데, 정문 앞에서부터 저 멀리까지 꼬리를 문 것처럼 이어져 있었다.
평소라면 저잣거리에 온 것처럼 시끄럽고 온갖 음담패설이나 저급한 욕설이 오가야 하는데, 무슨 일인지 묵언 수행 중인 수도승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아……!”
누군가가 길목의 끝을 보고 놀란 목소리를 낸다.
곧 놀라 스스로 입을 가렸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좌중의 이목은 길목을 향하고 있었다.
서른이 좀 넘은 연령, 매서운 눈매,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겨와 절로 상대를 압도하는 남자가 걸어왔다.
길 옆으로 사파인들이 노려보듯이 쳐다봤으나 눈길 하나 주지 않고, 길을 쭉 따라서 정문에 도착했다.
“신분을 대시오!”
문지기가 바짝 군기든 목소리로 외쳤다.
“상천칠좌.”
남자가 정문 너머를 살펴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패신군.”
그 말에 문지기들이 차렷 자세로 외쳤다.
“상천칠좌의 방문을 환영하는 바이오!”
와아아아!
그 말에 수많은 사파인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사도의 새로운 강자를 향한 나름의 대우였다.
‘쪽팔려!’
환대해 주는 건 고마운데, 너무 힘을 넣었다.
얼굴을 슥 숙이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숨이 넘어갈 정도의 미색을 갖춘 미인이 안내해줬다.
척 봐도 무가의 여식이었는데, 이렇게 환대해 주며 안내를 직접 해주니 감개무량했다.
만약 낙소월이나 당혜, 제갈수란등 미녀들의 외모에 익숙해 있지 않았더라면 넋이 나갔을지도 모른다.
“안내를 부탁하겠소.”
“이리로 오세요.”
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안내를 해주었으나, 속으로는 놀라워하면서도 은근 자존심이 상했다.
‘날 보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다니, 분명 고자일 거야. 흥.’
사파인 중에서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
특히나 미녀라면 환장한다.
예의를 중시하는 정파와 다르게 대놓고 음욕을 드러내며 음담패설을 한다.
그건 고수가 돼도 마찬가지인데,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차마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주서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미녀를 따라가면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감각을 활성화했다.
‘음, 의외군.’
천장이나 바닥에 수하들을 숨겨둘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걸어, 사도천의 화려한 건축물을 지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무림맹처럼 숨겨 둔 오두막에라도 안내받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조금 떨어져 있기는 해도 화려해 보이는 별채가 나왔다.
“어서 오시오, 패신군.”
방까지 안내받으니 딸뻘 되는 미녀들에게 둘러싸여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도천주가 보였다.
주서천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맞은 편에 앉았다.
“오랜만이오, 사도천주.”
‘히익!’
주서천이 경어를 생략하자 미녀들이 기겁했다.
그러나 사도천주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손을 들어서 여인들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영웅호걸은 미녀를 좋아한다고 하여 나름 준비해 봤는데, 패신군께선 별로인가 보오.”
사도천주는 격식체도 잘 쓰지 않는다.
말을 높이는 대상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예외가 있다면 바로 동수인 상천칠좌다.
나이가 많건 어리건, 강호 무림에서 배분이 높건 적건 상관하지 않았다. 오로지 무공만 봤다.
“아, 일단 술 좀 마시겠소?”
사도천주가 술병을 들며 눈짓을 줬다.
주서천은 잔을 들어 술을 건네 받았다.
쪼르륵.
맑고 투명한 액체가 떨어진다. 향도 상당했다.
딱 봐도 명주였다.
“상천의 좌에 오른 걸 진심으로 감축하는 바요.”
“감사하오.”
쨍.
술잔끼리 부딪치자 청명한 소리가 났다.
주서천은 주저 없이 술잔을 목 뒤로 넘겼다.
“술 한번 시원하게 마시는군. 과연 패신군!
술 마시는 것조차 패기가 넘치는 것 같소!”
사도천주가 소리 높여 껄껄껄 웃었다.
“술도 받아 마셨으니, 사파인답게 허례허식 없게 이야기 좀 나눴으면합니다.”
주서천이 술잔을 상 위에 절도 있게 내려 두었다.
독이야 당명인이 아니라면 별로 무섭지 않다.
‘어차피 암천회는 사도천주 앞에 오지 못한다.’
주서천이 사문반란 때 천주에게 힘을 주고, 오늘날 힘을 빌리려고 또다시 방문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사도천주는 비록 전란 도중에 수명이 다해 죽고 말지만, 끝까지 암천회를 배척하면서 싸웠다.
무엇보다 의심이 많고 빈틈없는 치밀함을 지니고 있어서, 암천회가 침투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천기도 사도천주를 포기하고, 그 아들인 패륜아 담리백을 파고 들어 반란을 도모했다.
“호오?”
사도천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생각이냐, 패신군.’
사파라고 해도 사이가 안 좋은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음신만 해도그랬다.
아니, 도리어 사파이기에 뒤통수를 조심해야 한다.
사파가 정파를 보고 위선이라 비판하는 것처럼 정파가 사파를 보고 비겁하다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주서천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도천의 힘이 필요하오.”
사도천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주서천은 사도천주가 흥분하기 전에 말을 가로 챘다.
“오해할 것 같아서 말하지만, 천주를 향한 도전이 아니오. 말 그대로 사도천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오. 굳이 말하자면 협력 관계요.”
“협력?”
“그렇소. 추종자들을 데리고 압박하듯이 온 것에는 사죄드리오. 천주를 설득하기 위해서 필요했소.”
“설득? 압박을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
“부정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었소.”
“……이야기를 들어 보겠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주서천.
일단 최악은 면했다.
그러나 지금부터 중요했다.
“혹시 암천회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 있소?”
“암천회……?”
사도천주가 의아해했다. 당연하다.
아직 이 시기의 사도천주는 암천회를 모른다.
주서천은 예전에 무림맹이나 주변인들에게 이야기해 준 것처럼, 암천회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사도천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진지한 태도로 주서천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리고 긴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침음을 흘렸다.
“흠…… 솔직히, 황당하군.”
무림의 암중 세력, 암천회.
흉마의 무덤을 시작으로, 혈근경이 화근이 되어 시작된 칠검전쟁.
그뒤로 사문반란, 정혈대전, 정마대전 등 굵직한 사건들에 개입하고 조종했다는 이야기.
당연하지만, 황당무계한 이야기였다.
만약 눈앞에 있는 사람이 패신군이 아니었더라면 능멸하냐면서 고함을 지르며 내쳤을지 모른다.
무림의 사대 세력이 고작 어떤 조직에 의해 농락당했다는 걸 들으면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단문주 철무명환은 그렇다 쳐도, 상천칠좌나 되는 음신이 암천회 소속이었다니.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 것도 이해하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납득시키고 설득하기 위해서라면 시간을 두고 말해도 상관없었다.
여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괜히 급한 마음에 협력을 받지 못하면 그거야말로 패망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진실이란 걸 부디 알아주시오. 증명을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그에 맞춰 보도록 하겠소.”
“……”
사도천주는 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진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