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귀검수가 나타났습니다.
암천회주의 손이 멈칫했다.
“그 궁귀검수인가?”
“예.”
암천회의 살계부에 올라온 이름이다.
사문반란 때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나타났다가, 천주의 세력에 가담하여 반란을 순식간에 진압했다.
무엇보다 암천회의 수뇌, 천권이 궁귀검수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정파의 훼방꾼을 죽였더니 이제는 사파의 훼방꾼이 날뛰는군.”
그 후 무슨 놈인지 알아보려고 조사했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땅으로 꺼지듯이 사라져 버렸다.
비록 그 활동기는 짧으나 활약이 워낙 강렬하여 정사 할 것 없이 무림인들의 기억에 각인됐다.
“위치는?”
“등왕각입니다.”
“……!”
암천회주의 표정이 변했다.
등왕각의 삼 층은 귀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여러 객실이 준비되어 있다.
하룻밤 보내는데도 금전 한 냥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돈이 많다고 출입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명색이 황제를 접대한 명루다.
그렇다 보니 삼 층만큼은 아무나 들여보낼 수 없었다.
비록 이제는 정치에 멀어지고 소음문이 인수하게 되며 무림 세력으로 변했지만, 권세는 아직 여전하다.
삼 층에서 내려다보는 남창의 풍경은 절경이다.
정문의 방향을 보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나 저잣거리가 보였다.
뒤를 보면 장강의 지류인 감강(贛江)의 동안(東岸)이 펼쳐졌는데 이 역시 절경이었다.
“과연 강남의 삼대 명루.”
주서천은 아닌 척하면서도 주변을 구경했다.
‘내가 그동안 풍류를 모르긴 몰랐구나.’
전생의 삶이야 수련을 끝내고 강호에 출두하니 전쟁이 터졌다.
이후 전란을 겪으며 싸우기만 했다.
풍류라고 해 봤자 객잔에 묵을 때 마시는 술 정도였다.
현생의 삶은 무림 좀 구하느라 너무 바빴다.
머릿속에 여자 대신 얼굴도 모르는 천기부터 떠올랐다.
확실히 어릴 적에는 전생에 여자 손도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들을 꿈꿨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이 소음문에서는 검보다 소리를 조심해야 한다.
“기다렸나.”
음신, 소류금.
그 혹은 그녀의 미성(美聲)이 가슴에 파고 들었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기분 좋은 목소리지만 홀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소류금은 기녀. 아니 소음문도를 대동하고 방 안으로 들어와 상석에 앉았다.
손짓 하나하나에 기품이 흐르는 소음문도는 호화스러운 상을 차려 준 뒤 인사하고 나갔다.
“정체가 무엇이냐.”
“궁귀검수요.”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다.”
소류금이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봤다.
“현경의 고수.”
심상구현은 운으로만 가능한 게 아니다.
천운도 필요하나 천부적인 재능이나 주변 환경이 필요하다.
“강호에 기인들이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지만, 절대고수는 없다.
은둔하거나 봉문한 문파의 고수들 중에서도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드는 게 현경이다.”
소류금도 궁귀검수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 되는 고수는 아니었다.
“사문반란. 그때는 본신의 무위를 숨기고 나타났나?
아니, 그보다 어째서 하오문을 사칭했지?”
궁귀검수에 관한 소문 중 확실한 것이 몇 있다.
그중 하나가 반란에 참전하기 전 신분이었다.
“수상쩍군.”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걸 물으시는군.”
주서천이 살짝 웃어 줬다.
‘그야 그때는 현경이 아니었으니까.’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정체가 사문을 뜻하는 것이라면, 답해 드릴 수 있소.
나는 궁신(弓神)의 전인이오.”
거짓말은 안 했다.
“……!”
궁신의 이름이 나오자 음신이 눈을 크게 떴다.
“일월신궁?”
“그렇소.”
궁신은 고금에서도 손꼽히는 전설의 무인이다.
방금 전 청백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역사도 무공도 그 수준을 달리한다.
놀라는 게 당연했다.
“과연. 그 실력은 이해가 가는군.”
소류금이 수긍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무슨 일로 날 만나러 온 건가?
아니, 어이하여 하오문을 사칭했지?”
“수지 타산에 맞지 않은 질문이오. 음신의 질문에 답하였으니, 이제 나의 질문에도 답해 주지 않겠소?”
“지금 누굴 앞에 둔지 알고는 하는 말이냐?”
파르르.
상 위의 그릇들이 제멋대로 떨기 시작했다.
그릇이 떠는 ‘소리’ 자체가 위협이었다.
“그렇소.”
소리가 멈췄다.
그릇들의 떨림도 나지 않았다.
허공섭물은 소류금만의 재주가 아니다.
“……흥, 좋다.”
만약 그가 절대고수가 아니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소류금은 궁귀검수를 대등하게 대해 줬다.
현경끼리는 상성은 있어도 순위는 없다.
각자 지닌 심상이 다르다는 것에 중점을 뒀다.
“옥문관.”
술병으로 향하는 소류금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감숙성 도지휘사.”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소류금은 술병을 잡아 잔에 따랐다.
고사리처럼 가느다란 손이나, 바라보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매혹적인 눈에 동요 같은 건 없었다.
자연스럽게 술병을 잡고, 따른다.
남이 보면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나 주서천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얼마 전, 도지휘사가 낙마 사고를 당했소.
그 말을 조사해 보니 갑자기 광분하며 날뛰었다더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무언가 중독된 것도 아니고, 암기에 당한 것도 아니었소. 마구간지기가 한둘도 아니고 여럿이서 확인까지 하고 내보냈소. 도지휘사가 무슨 일을 당하면 목숨이 위험할 터인데 그냥 보낼 리는 없지.”
“……”
“그 말과 관련된 이들은 전부 참수 당해 정보를 수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럭저럭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소이다.
음공에 당한 것이 아닐까 하고.”
독공은 그래도 수요라도 있다.
그러나 음공은 아니다.
거의 사장된 비주류의 무공이었다.
그래도 음신이 있어서 나름대로 알려지기라도 했지, 아니었더라면 전문 무공이 있나 싶었을 거다.
“음신, 소류금.”
주서천의 입가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감숙성 도지휘사를 살해했냐?”
“아니.”
탁. 드르륵.
문이란 문과 창까지 전부 닫혔다.
“엄밀히 따지자면 살해한 건 내가 아니라……”
챙! 채채채채챙!
파르르르! 덜그럭덜그럭!
그릇들이 다시 마구 흔들렸다.
그 외에도 방 내에 자리한 도자기 등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움직였다.
“말이 아닌가?”
상 위에 올라온 산해진미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대답을 했으니 이제는 다시 내가 질문할 차례다.”
소류금이 손바닥으로 바닥을 후려쳤다.
콰앙!
바닥이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땅에서 솟은 것처럼 악기가 하나 나타났다.
칠현금인 줄 알았는데, 특이하게도 현이 두 줄밖에 없었다.
‘문무현금(文武鉉琴)……!’
하나는 문현이요, 또 하나는 무현이다.
이 두 줄이 있는 걸 문무현이라 불렀다.
그리고 문무현금은 현 무림에서도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보물로서, 소음문의 신물이기도 했다.
문무현은 명주실이 아닌 천잠사를 꼬아 만들어 금으로 환산하면 천금이 나온다.
“어째서 사도의 영웅이란 자가 관료의 죽음을 캐내고 다니는지 알고 싶구나. 혹, 실은 관의 인물인가?”
“그럴 리가 있겠소?”
“반문이 아닌 대답을 해라.”
“난 그저 누가 옥문관을 열어 주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외다.”
“……!”
소류금의 눈빛이 험해졌다.
“누구냐.”
“그러니까, 궁귀검수요.”
“헛소리. 그걸 아는 자는 극소수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천하제일 자객방, 유령곡의 탈주령들도 고생해서 얻어 낸 정보다.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건 사실이다.
‘니야말로 누구냐?’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소류금에게도 무언가 있었다.
소음문은 생각지도 못했다.
낙마사고의 음공도 의심 가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일단 온 것뿐이었다.
그러나 음신과 대화를 나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소음문, 아니 음신은 옥문관과 관련이 있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규칙을 어기지 마라, 음신. 질문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다.”
주서천의 분위기도 살벌해졌다. 말투도 변했다.
“혈교냐?”
하단전에서부터 끊이지 않는 진기가 흘러나온다.
“아니면……”
주서천이 소류금을 마주 봤다.
“암천회냐?”
“……하.”
소류금이 머리를 숙이고 웃었다.
허리까지 늘어지는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하하하하!”
소류금이 소리 높여 웃었다.
고개를 들고 상쾌하게 웃었다.
소리가 들린다.
청각을 자극한다.
고막을 두드렸다.
“궁귀검수.”
소류금이 돌연 웃음을 뚝 그치며이름을 불렀다.
“궁신의 전인이 어째서 활을 들고 다니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 말이 진실이라면, 네놈 역시 알고 있을 거다. 궁공이나 음공처럼 비주류의 무공들이 차별을 받는 걸 말이다.”
“정파와 사파가 나뉜 이유를 알고 있느냐?”
소류금은 술잔을 기울이며 입 안에 털었다.
주서천은 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올바른 길과 올바르지 않은 길의 시작이다.”
소류금은 자문자답했다.
“정파의 무공은 인내와 체력, 정순한 마음을 요구한다.
특징을 나열하자면 수련 속도가 좋지 않아 축기가 늦지만 그 대신 주화입마나 내공상실의 위험이 적으며 경지의 벽을 비교적 쉽게 넘을 수 있다.”
만약 이 자리에 무림인들이 있었더라면 하나같이 목숨 걸고 귀를 기울이며 들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천칠좌의 가르침이다.
말 하나하나에 고수로 향하는 단서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사람이란 동물은 자고로 요행을 바라는 법.
누구는 그 요구되는 사항을 참을 수 없어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수련의 속도를 높일 수 없을까 하는 고심에서 그 방법을 고안하게 되고, 무공의 또 다른 방향성을 발견한다. 그것이 사파의 무공이다.”
요컨대 정파는 정석적인 것이고, 사파는 그러지 아니한 것이었다.
사파의 무공은 대신 경지의 벽을 허무는 것이 정파보다 좀 늦고, 기반도 불안정해 주화입마가 심했다.
정파에 고수가 많지만 인원수가 적고, 사파가 인원수는 많으나 고수가 적은 것의 이유였다.
“사람이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조차 잘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르다고 ‘그건 올바르지 않다.’ 라고 비난한다.
그게 정사가 대립하게 된 이유이다.”
정말 별거 아닌 이유였다.
그저 각자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였다.
시간을 거치며 여러 이유로 대립하게 됐다.
정파(正派)는 규율과 윤리를 중시했다.
사파(邪派)는 그 과한 규율과 윤리가 사람의 자유를 억압한다면서 비난하고, 허례허식이라며 욕했다.
무공의 성향은 곧 이념으로 번졌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정파와 사파를 구분 짓기 시작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다.
음공은 어디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느냐?”
소류금의 눈이 서슬 퍼런 빛을 내뿜었다.
“답은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으드득!
소류금이 이를 악물었다.
“무림 역사에서 음공은 제대로 된 무공으로조차 취급받지 못했다. 그 잘난 정파의 놈들은 그저 기예에 불과하다며 배척하였고, 결국 사파에 분류됐다.
그런데 여기서 더 웃긴게 무엇인지 아느냐?”
무림을 향한 분노가 느껴졌다.
“사파에서조차 잘못된 것, 기예에 불과하다며 조롱을 받고 차별받았다! 비주류라는 이유만으로!”
주서천은 소류금을 보고 제갈승계를 떠올렸다.
음공은 기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힘이 약해 그런 취급을 받는 줄 알았다!”
소림사의 사자후 정도가 아니라면 쓰이지 않았다.
“강호 무림도 결국 힘의 세계니까!”
소리에 내공을 실어서 성량을 높이거나 사방으로 퍼뜨리게 하는 응용은 있으나 그건 무공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다!
그저, 그저 보통의 무공처럼 인정받고 싶어서!
음공에 대한 차별을 없애려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무인의 정점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좀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뀌는 건 없었다.
음공은 여전히 비주류의 무공이라며 천대받았다.
사도팔문 중에서도 문도의 숫자가 제일 낮았다.
음신은 무서워해도 소음문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언제는 사도천에 잔치가 열린 적이 있었다.
당시 소류금은 소음문도를 대신 보냈다.
그리고 다녀온 소음문도가 이리 말했다.
“문주님! 사도천의 한 장로가 절 보고 소음문도니 재주나 부려 보라했습니다. 잔치의 흥을 돋우기 위해 운율을 뽑고, 춤을 추라 했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문도의 눈물을 본 소류금은 진노했다.
“무림은…… 썩었다.”
무림은 썩었다.
인식을 바꾸려 노력했지만 바뀌지 않았다.
이상(理想)이 아니라 이상(異相)이었다.
소류금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 문무현금의 줄을 꽉 쥐었다.
손이 떨렸지만 현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이 썩어 빠지고, 남을 인정하기를 죽었다 깨어나도 싫어하는 무림을 바꿔 보기로 마음먹었다.”
소류금이 입술을 혀로 적셨다.
“그 순간, 그들이 나타나더군.”
주서천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암천회.”
“무림의 뒷면. 시커먼 하늘. 보이지 않는 세력.
재미있지 않느냐. 정도나 사도, 마도도 아니라니 말이다.
마음에 들었고, 그만큼 힘도 있었다.
그래서 흔쾌히 그들의 손을 붙잡고, 무림을 전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복이 아닌 전복.
소음문주, 음신 소류금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생각이 좀 달라졌다.”
소류금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회의 대계를 망가뜨린 장본인이고 천권을 죽인 놈이니 호기심이 생겨 이야기 좀 나눠 볼까 했는데, 네가 날 개심시켰다.”
“개심?”
“그래. 어차피 암천회의 힘으로 무림을 뒤집어 봤자 이름이 알려지는 건 소음문이 아니라 암천회다.”
그 말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원래의 역사에도 암천회의 이름만이 남았다.
“옥형(玉衡)이 아닌, 이 음신이 무림을 뒤집는다.”
소류금은 입회하고 옥형성을 맡았다.
암살이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것.
음공의 사용자인 소류금이 제격이었다.
‘옥형이라고?’
주서천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암천회일 가능성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수뇌부, 그것도 옥형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새삼 암천회의 저력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상천칠좌, 음신을 끌어들인 건 보통이 아니다.
“자아, 천하제일인이 될 이 음신이 제안하마.
나와 손을 잡자. 궁공 역시 무림에서 핍박받지 않는가.
그 마음과 괴로움, 분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소류금이 문무현금에서 손을 떨어뜨리고 악수를 하듯 손을 건넨다.
“너와 나 사이에서 누가 위고 밑이라는 관계는 없다. 대등한 관계다. 음공이나 궁공처럼 비주류의 무공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무림을 만들어 보지 않겠는가.”
‘……’
주서천은 머리를 굴렸다.
‘기회다.’
옥형성, 소류금은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일단, 궁귀검수란 건 가짜 신분이다.
따지자면 궁신의 전인은 맞기는 한데 완전하지는 않았다.
중도만공 특성상 대성을 이루는 게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의 고향은 사문인 화산파지 궁신이 아니었다.
분함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오. 신궁의 무공이잖아. 익혀두면 쓸 만하지 않을까? 하하.’ 라는 가벼운 마음 밖에 없었다.
‘좋아. 그러면 이 상황을 이용한다.’
소류금을 통해서 암천회의 정보를 얻기로 했다.
요광이 들키지 않도록 도지휘사의 암살을 부탁한 모양이니, 옥형이라면 요광에 대해서 알고 있을 터.
무엇보다 그 외에도 천기라거나 개양, 암천회주에 관련된 정체도 얻어낼 기회였다.
주서천은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 내고 소류금이 건넨 손을 잡으려 했다.
“알았다. 이 썩어 빠진 무림을……”
“그런데.”
소류금이 손을 내뺐다.
“어찌하여 활을 놓고 왔는가?”
“…………잃어버렸다.”
주서천의 침묵이 유난히 길었다.
“크흐……”
소류금이 진득한 웃음을 흘렸다.
“결국은 네놈도 별반 다를 건 없는 놈이구나. 아니, 더한 놈이로다.
궁신의 전인을 자처하는 주제에 활을 잃어버렸다고?”
그 가느다란 손가락이 다시 문무현금을 잡았다.
“헛소리. 기본적인 자긍심조차 없구나.
애초에 정말 그리 생각한다면 검을 쓰지 말아야 했다.”
“아, 젠장.”
주서천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됐다.”
웅웅웅.
소류금의 주변에 보이지 않는 파장이 퍼졌다.
덜그럭덜그럭!
다시 음식을 담은 그릇들이 마구 떨어 댔다.
당장 튀어 나갈 것 같이 들썩였다.
음식이 마구 튄다.
띵.
소류금이 문무현금의 줄을 조심스레 튕겼다.
다행히 또 벽이 뚫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고운 음색을 담은 선율이 흘렀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음신의 연주를 들으면 귀로 마약을 하는 것 같다는 표현이 있는데, 직접 들어 보니 이해가 갔다.
줄을 튕기는 음이 시냇물을 흐르듯 부드럽게 퍼졌다.
방 내를 감돌면서 가득 메웠다.
산뜻한 날씨에 꽃밭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풍류를 즐기기 딱 좋은 소리였다.
입이 절로 씰룩이고 어깨도 들썩였다.
“등왕각. 높은 누각이 강가에 있는데, 옥 소리, 방울 소리, 가무가 사라졌네.”
등왕고각임강저(滕王高閣臨江猪).
패옥명란파가무(個玉鳴緊龍歌舞).
“아침에는 단청한 마룻대에 남포구름이 끼이고, 저녁에는 주렴 걷고 서산의 비를 보노라.”
화동조비남포운(畫棟朝飛南浦雲).
주렴모권서산우(朱廉暮抱西山雨).
“떠도는 구름 물에 비쳐 언제나 한가롭고, 세상 바뀌고 세월 흘러 몇 해나 지났던가.”
한운담영일유유(閑雲潭影日悠悠).
물환성이도기추(物換星移度幾秋).
“이 누각 속 주인 지금 어디 있는고, 난간 밖 장강 물만 부질없이 흘러가네.”
각중제자금하재(閣 中帝子今何在).
함외장강공자류(艦外長江空 自流).
“초당의 시인, 왕발의 ‘등왕각’을 섭혼음(攝魂音)으로 풀어 보았다.”
섭혼음은 연주로 듣는 이의 심령을 뒤흔들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음공이다.
신선박이 몸을 마비시키면, 섭혼음은 정신을 마비시켰다.
“그래?”
주서천의 눈이 흐릿해졌다가 되돌아갔다.
“……”
소류금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사실, 음공의 취급이 박한 것에도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섭혼음의 경우, 결국은 내가중수법이기에 내가고수일 경우는 잘 통하지 않는다.
하수에게라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겠으나 사용자보다 고수나 동수에겐 잘 닿지 못했다.
특히나 정파인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섭혼음은 정선을 흐리게 만드는 것인데, 정파의 무공은 정신 수양을 중시해 내성이 기본적으로 높았다.
만약 섭혼음 같은 음공이 적에게 잘 통하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당하니 선호되지 않는 건 당연했다.
“활 좀 잃어버렸다고 너무 뭐라 하지 마라.
거참, 깜빡할 수도 있지. 상천칠좌치고는 째째하네.”
주서천이 태아 대신 평범한 철검을 뽑았다.
“이노오옴!”
소류금이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
“노오오오옴!”
음신이 부르짖었다.
그냥 부르짖은 것이 아니다. 공력을 담았다.
얼핏 보면 사자후 같지만 전혀 달랐다.
사자후라면 청명하면서도 위엄이 있어야 했는데, 음신의 부르짖음은 소름 끼치고 기분 나쁜 외침이었다.
“소음문의 소명후(縣鳴吼)!”
주서천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오냐, 이것도 막나 보자.”
소류금은 음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주서천이 아무렇지 않게 막아 내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가녀린 손가락이 문무현금의 줄을 힘껏 튕겼다.
타앙!
방금 전 들려준 음색과는 달랐다.
듣는 순간 뇌가 흔들리고, 소름이 끼치는 소음(甄音)이었다.
마치 공기가 찢겨 나가는 소리.
문무현금이란 발음체에 의해 파동이 생긴다.
곧 음파가 요동치면서 정면의 적을 집어삼키려 쏟아졌다.
키아아앙!
천잠사로 된 문무현금의 위력이 여기서 발동된다.
평범한 금의 줄은 내력을 일정 이상 담으면 끊어져 버린다.
위력도 크게 줄어 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음인들의 보물은 다르다.
음신의 심후한 내력도 아무렇지 않게 버텨 낸다.
가공할 공력으로 전환되어 음파를 증폭시켰다.
“아, 좀!”
주서천이 불만을 내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형태가 없는 강기가 넓게 퍼졌다.
검에 실린 것이 아니라, 몸의 정면에서부터 생겨나 둘러쌌다.
호신강기를 무형으로 펼쳐내서 층을 내듯 겹겹이 쌓았다.
그리고 문무현금에서 발산된 음파가 호신강기와 충돌한 순간, 폭발이 일어나며 충격파가 쏟아졌다.
하나 무슨 영문인지 어떠한 소리도들리지 않았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한정되어 있다.
아무리 내공으로 감각을 높여도 한계가 존재한다.
즉, 그 영역에서 벗어난 소리를 듣게 되면 도리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아 이상함을 느꼈을 무렵 그 의문이 무색하게 음파 공격이 주서천을 밀어냈다.
콰아아앙!
주서천은 듣지 못했지만, 등왕각의 내부에 숨죽이고 있던 문도들이나 밖의 구경꾼들은 달랐다.
삼 층에서 터져 나온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친 거냐며 위를 올려다봤다.
“사람이다!”
“뭐, 뭐여!”
구경꾼들이 위를 보고 외쳤다.
사람이 날고 있다. 아니, 떨어지고 있었다.
‘과연, 음신인가……!’
공중에 붕 떠오른 주서천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전력을 다해서 호신강기를 펼쳤다.
부딪친 순간 내공의 상당 부분이 소모됐다.
그만큼 음파에 깃든 공력이 많았다.
무형강기로 이루어진 막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물리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쭉 밀려났다.
뒤에 벽 대신 있던 문은 손쉽게 박살이 났고, 그대로 삼 층의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뭔 위력이 이래?’
주서천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렀다.
특히나 좁아터진 방에서 음파가 사방으로 나가지 못하고 정면에 집중되자, 터무니없는 위력을 냈다.
만약에 호신강기를 겹겹이 쌓지 않았더라면 천하의 주서천이라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궁, 귀, 검, 수!”
음신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엄마야!”
남창의 백성들이 놀랐다.
등왕각 주변이 아니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 들었다.
괜히 절대고수가 아니었다.
상식에서 벗어난 힘을 지녔다.
‘일단은 자세부터 제대로 잡는……’
주서천이 허우적거리며 균형을 잡으려다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니, 썅! 뭔 원수라도 졌어?”
소류금도 삼 층에서부터 몸을 날렸다.
마치 공중을 달리듯이 발을 열심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허공답보(虛空踏步)!
경공술 최상승의 경지.
허공을 걷어차며 순간적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
그러나 내공의 소비가 워낙 극심하고 그 거리도 한정되어 있어서 잘 사용되지는 않는다.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