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七章 (152/254)

주서천은 은밀하게 떠날 준비를 했다.

물론, 떠나기 전 신뢰할 수 있는 두 사람에게 여러 부탁을 해 뒀다.

“많이 바쁜 모양이오.”

반가운 얼굴을 봤다.

“오랜만입니…… 으응?”

주서천이 검마, 무곡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으응?”

무곡에게서 무언가의 변화가 느껴졌다.

주서천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봤다.

“혹시……?”

“호오, 은공은 심상구현을 이룬 건가. 대단하군.”

“허!”

주서천이 깜짝 놀랬다.

“이미 현경에 계셨던 겁니까?”

전에 만났을 적에는 무곡의 경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화경과 현경 사이에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현경이 되고 보니 전혀 아니었다.

무곡은 화경과 현경 사이가 아니라 현경이었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소.

나 역시 최근에서야 이 경지에 오를 수 있었으니까.”

무곡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왜 그동안 실력을 보이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서천이 의아한 듯 묻자, 무곡은 별거 있냐는 어조로 대답했다.

“검 좀 휘두르는 것 가지고 뭐 보일 게 있겠소.

딸도 구해 내지 못하는 검술 따위 자랑할 게 못 되오.”

과연 암천의 검. 힘을 상징하는 개양성이 될 만하다.

남들이라면 천운이 닿아도 평생에 오를까 말까 한 경지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평소에 어르신의 비호 덕에 상단이나 검문이 이렇다 할 문제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인의 부탁이니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오.

그리고 어르신이라 부르지 말고 편하게 대해 주시오.”

“어르신이 편합니다.”

무곡은 알게 모르게 금의상단에서 해결사라 불렸다.

가끔씩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무곡이 나서서 그 막강한 무력으로 처리해 주곤 했다.

금의검문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는데, 이 역시 무곡이 가끔씩 무공을 봐준 덕분이었다.

“앞으로도 어르신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예정이라, 신세 좀 지겠습니다.”

“물론이오. 부담 갖지 말고 마음껏 부려 주시오.”

“아 참, 무선화 소저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딸의 이야기가 나오자 무곡의 표정이 변했다.

“물론이오. 건강이야 옛적에 찾았고, 최근에는 저에게 검까지 가르쳐달라고 조른다오.”

입이 살짝 찢어진 걸 보면 전형적인 딸 바보였다.

“호오. 검 말입니까?”

“그렇소. 왜 배우고 싶냐고 물어보니, 뺨을 붉히 면서 누군가의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하더구려.”

‘으, 응?’

주서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 이 아비가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도록 호신용으로 배우려고 하는 모양인데, 괜히 신경 쓰지 않게 하려고 거짓말을 한 것 같소.

그 아이 심성이 또 어찌나 고운지……”

“그, 그렇군요. 역시 무선화 소저입니다.”

등에서 땀방울이 흘렀다.

도움이 되고 싶다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최근에는 딸아이가 제 한몸 지킬 만한 호신술 정도는 가르쳐주는 재미에 산다오.”

딸을 위해 마귀가 된 무곡의 과거가 떠올랐다.

이 딸 바보 아버지가 진실을 알게 되면 어찌 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의동생, 제갈승계를 향한 동정심이 깊어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오. 선화, 그 아이가 머리도 좋은지, 공방까지 출입해가며 기관의 도해도 제작까지 돕는다고 한다오. 그 성질머리 안 좋은 제갈세가의 꼬맹이에게 인정까지 받았다니.

내 딸이지만 정말로 대단하다니까! 허허허!”

그 무뚝뚝하고 살벌한 무곡이 이렇게까지 웃을지는 몰랐다.

어색한 걸 넘어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차라리 입 다물고 있자.’

끝까지 눈치 못 채는 게 서로 행복하다.

그래도 제갈승계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럼 저는 이만 슬슬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나는 혼잣말을 했던 것뿐이오.”

“감사합니다.”

밑바닥 생활을 제법 해서 그런지 눈치가 빨랐다.

그런데 딸의 연애 쪽으로는 영 눈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쪽이 좀 더 사람답고 좋구나.’

원래의 역사에서 검마 무곡은 그야말로 악귀였다.

처음 만났을 때 역시 별반 다를것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 재미를 느끼고, 딸 이야기를 할 때 평범히 웃는 아버지다.

평범한 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이런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거렸다.

산동을 떠나 제일 먼저 한 일은 신분이었다.

일단 얼굴부터 바꾸기로 했다.

전에 만나 본 적 있는 장인을 찾아가 인피면구의 제작을 부탁했다.

“후, 오랜만이군.”

수면에 비친 얼굴을 보고 뺨을 매만졌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궁귀검수의 상판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그동안 신분을 숨긴 채 얌전히 지냈지만, 이제는 아니다.

마음껏 행동할 수 있었다.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

정마대전이 아직이다.

도중에 참전하여 흥분된 걸 가라앉히고 함께 싸울 수 있도록 조정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정신없이 돌아다녀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 종일 경공을 극성으로 펼쳤다.

“소령아, 일단 이것부터 먹자.

안 그러면 나 따라오기가 힘들다.”

금의상단에서 몇 개 챙긴 영약 두 알을 소령에게 복용시켰다.

과거 신의에게 의뢰해 효능도 알아냈다.

소령은 이 영약 두 알 덕에 거의 일 갑자에 가까운 내공을 얻게 됐다.

여전히 심살 탓에 다음 경지로 넘어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내공은 거의 끊이지 않았다.

힘이 부족하면 자문주술을 발동해 일시적으로 화경에 이르는 실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문제없었다.

“그나저나, 필요한 것 없니?”

만약 심장이 뚫렸을 때 소령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회귀 도중에 목이 잘려 죽었을 것이다.

생명의 은인을 막 부려 먹기에도 좀 그래서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려 했는데, 별로 소용이 없었다.

“질문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소령은 명령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형이었다.

마음을 고쳐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몇 번 노력해 봤지만 결국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삼안선투야말로 악마지.”

심살이라는 과정의 후유증은 지독했다.

“자, 그러면 요광부터 찾아보자.”

감숙성의 도지휘사에 대해서 조사를 시작했다.

옥문관을 개문한 정이품의 고위 관료였다.

하지만 초장부터 벽에 막히고 만다.

“도지휘사가 죽어?”

정혈대전 때 요광의 흔적을 찾았는데, 그 유일한 단서가 사라져 버렸으니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인을 살펴 보니 낙마였다.

“낙마라고?”

주서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호도독부에 예속된 도지휘사사.

그것도 국경선의 책임자라면 무관이다.

확실히 가끔 낙마 사고가 일어나지만, 그 정도의 유능한 무관이 훈련 도중 사망한 건 이상했다.

‘꼬리를 잘랐구나, 천기!’

쉬운 일 하나 없다.

천기의 뒤처리는 깔끔했다.

그리고 관료를 아무렇지 않게 죽인 것이 대단했다.

‘그냥 낙마 사고일 리는 없다. 그 정도 되는 무관이라면 떨어질 때 낙법이라도 시도할 터.’

주서천은 감숙곡의 유령들을 최대한 투입시켜 낙마 사고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게 했다.

사고가 일어난 지 제법 됐지만, 아무래도 사고자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었다.

‘훈련 도중 군마가 갑작스레 미쳐 날뛰었다는 게 이해가 안 가. 도지휘사가 타는 말이니, 더욱 신경 썼을 터.’

이 나라에서 고위 관료는 왕에 필적한 힘을 낸다.

그러다 보니 훈련을 위해 군마를 준비할 때는 마구간지기나 관리인이 셋에서 네 명씩 붙는다.

사전에 전문인들의 꼼꼼한 확인을 받은 뒤 나온 군마가 갑자기 미쳐 날뛸 확률은 없었다.

혹시 독이나 암기로 인해 날뛰었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의심을 갖고 조사하니 추가적인 단서가 나왔다.

“음공(音功)이다.”

음공이란 이름 그대로 소리를 매개로 한 무공이다.

사자후처럼 소리의 전달부터 시작해서 음파로 물리적인 파괴를 행하기도했다.

또는 일반적인 내가중수법처럼 타격을 입히는 것도 가능했다.

정말로 여러 다양성의 효능을 지녔으나 독공 이상으로 비주류에 속하는 무공으로 차별을 받아 왔다.

찾는 사람들도 없다 보니 그 명맥 역시 대부분 사라졌다.

지금에 와서남은 곳은 한 곳뿐이었다.

“사도사문(邪道四門) 소음문(部音門)!”

* * *

청해호에 주둔하는 정파가 늘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설치된 막사들의 규모가 제법 컸다.

난민촌이 떠오르는 초기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중에서도 묘한 열기에 휩싸인 막사가 있었다.

천막 위에 매화가 새겨진 깃발이 세워진 곳이었다.

“……!”

쨍그랑.

낙소월의 손에서 검이 빠져나왔다.

“아가.”

심옥련이 다가와 낙소월의 손을 쓰다듬었다.

어릴 적부터 검을 휘둘러 와 굳은살은 진작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수준을 넘어 만신창이가 됐다.

얼마나 많이 휘두른 것인지 굳은살이 찢어져 피가 잔뜩 났다.

심옥련은 품 안에서 붕대를 꺼내 낙소월의 손을 감아 주었다.

“전 괜찮아요.”

낙소월은 사조를 안심시키려는 듯 살짝 웃었다.

“……”

그 웃음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굳이 사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억지 웃음이었다.

그러기에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좀 쉬려무나.”

심옥련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놀랄지 모른다.

그녀는 화산파 내에서도 엄격하기로 소문 나있다.

휴식은커녕 여유가 있으면 공부라도 하라고 한다.

수련생들에게 있어서 기피 대상 중 제일 위에 있었다.

그만큼 낙소월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주서천……’

그 일이 있은 직후 어언 한 달이 지났다.

화산파도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당황했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헛소문으로 치부하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행적이 묘연해지고 소문에 힘이 실리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화산파의 제자들 대부분이 슬퍼하고 분노했다.

그때부터였다.

낙소월의 모습이 좀 이상해졌다.

몸을 혹사시킬 만큼의 수련을 시작했다.

보는 사람이 다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종종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부당했다.

억지로 휴식을 취하게 해도 이튿날에 배는 더 수련했다.

손에 맺힌 굳은살은 이미 찢어진지 오래고, 최후에는 살가죽의 흉터에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보다 못한 심옥련이 무리하지 말라고 혼냈지만, 그다지 소용없었다.

낙소월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 아이의 죽음이 그리 슬프더냐?’

그 검에는 미세한 분노가 느껴졌다.

어째서 무리하면서 검을 휘두르는지 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파의 영웅이자 화산 최고의 사대제자, 주서천.

심옥련은 주서천이 원망스러우면서도 그리웠다.

화산오장로로서 고마웠으나, 이리도 일찍 죽어 버린 것이 싫었다.

입에선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만하라면서 검을 빼앗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다, 이러다간 정말로 죽겠구나 싶을때만 막아 줬다.

하지만 그것도 내일이 되면 소용이 없어졌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검을 휘두르며 수련에 임했다.

사손의 열심히 하는 모습이 전혀 기쁘지 않은 사조는 안타까워했다.

* * *

강서(江西) 남창(南昌).

장시 분지의 비옥한 논 지대를 비롯해 자연 자원이 풍부한 도시이다.

쌀을 비롯해 차, 목화, 잎담배, 삼, 목재, 도자기 등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는 명승지로 등왕각(滕王閣)이 있었다.

강남의 삼대 명루 등왕각.

당나라에 창건되어 시대에 걸쳐 중건됐다.

삼 층으로 된 건물은 높이가 약 구 장 정도며, 너비는 오 장 정도됐다.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기도 하지만, 남창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건물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 위용에 무심코 압도되고, 누각의 장엄함에 현혹된다.

현을 튕겨 내는 금음(琴音) 에 섞인 노랫소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끌어들였다.

등왕각은 명의 개국 황제인 주원장이 잔칫상을 벌려 대신들에게 공로를 표창했고, 문인들이 시와 글을 짓거나 그 외에도 귀인들을 대접한 곳이다.

하나 그것도 옛이야기다.

등왕각은 명실상부 관인을 대접하려는 기루였으나, 세월에 따라 여러 전쟁에 휘말려 여러 번 파괴됐다.

그렇다 보니 재건되는 동안은 황제를 비롯한 관인들은 다른 곳을 찾기 시작했고, 차츰 발걸음도 끊겼다.

이후 등왕각은 존속을 위해 일반 백성이나 돈 많은 상인을 대상으로도 개방하게 됐다.

그리고 이 등왕각은 한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는데, 무림의 한 문파가 돈을 내고 인수하게 된다.

그 문파가 바로 소음문이었다.

“히야, 등왕각이다. 등왕각.”

“등왕각의 이 층에 올라 보는 게 내 꿈일세.”

등왕각은 층마다 그 격차가 고수와 하수의 경지만큼 컸다.

이 층에 올라가 음주가무를 즐기기 위해선, 일반 백성이 평생을 모은 돈을 바쳐야 할 수준이었다.

참고로 삼 층의 경우에는 돈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주된 고객이 상류층이었기에 그에 걸맞은 품위나 예, 그리고 명성 등이 요구됐다.

그러나 굳이 삼 층에 가지 않아도, 이 층만으로 남자의 혼을 쏙 빼는 기녀들이 있어 만족한다 한다.

일 층 역시 이 층 만큼은 아니지만 웬만한 기루보다 수준이 높다.

가격도 그만큼 상당했다.

등왕각 주변에는 놀고 싶은데 돈이 없고, 기녀 얼굴을 조금이라도 보려는 사내들로 가득했다.

“소령아.”

주서천이 등왕각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명령을.”

“따라오지 말고 이 근처에서 대기.”

“존명.”

등왕각 앞의 계단을 올라 정문으로 향했다.

“이보게나! 집문서는 놓고 온 거 맞겠지?”

“껄껄껄!”

주변을 둘러보며 올라가니 처음 온 모양새가 냐는 모양이다.

근처의 사내놈들이 장난을 걸어왔다.

정문의 통로를 지나 들어가니 떠들썩한 말소리가 들렸다.

“와하하하!”

“마셔라, 마셔라!”

“이리 좀 오너라!”

점소이가 바쁘게 뛰어다니고, 기녀들이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고, 술에 취해 꼬인 발음으로 뭐라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등왕각에 오신 걸 환영하옵니다.”

입구에 선 기녀들이 허리를 숙이며 맞이했다.

양편으로 나열한 그녀들의 몸짓은 예의가 묻어났다.

‘과연, 사파 무림의 소굴이구나.’

기녀나 점소이나 전부 무림인들이었다.

무공을 익힌 흔적이 보였다.

삼류에서 이류가 특히 많았다.

열린 감각 속에서 숨어 있는 이들도 잡혔다.

대부분이 일류에서 절정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오문의 홍루와 청루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소음문의 관할답게 보통이 아니다.

‘하기야, 문주가 문주이니.’

등왕각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주머니를 뒤져 무려 십 냥 무게의 금원보를 꺼냈다.

“허억!”

금원보가 나오자 여기저기서 놀라는 목소리를 냈다.

개중에는 탐욕으로 눈을 번쩍이는 이도 있었다.

“이 층으로 모시겠사옵니다.”

기녀가 금원보를 조심스레 받아들이며 인사했다.

“아니.”

주서천이 손을 내저었다.

“삼 층.”

스스슥.

위에서부터 움직임이 느껴졌다.

주변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던 사람들의 시선도 조금 옮겨졌다.

금원보를 건네받은 기녀는 송구스럽다는 듯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실례하오나 대협, 존함을 여쭤 봐도 괜찮겠사옵니까?”

“궁귀검수.”

뚝.

시간이 얼어 버린 것처럼 멈췄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뚝 끊겼다.

주변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새로운 손님이 아니라 일 층 구석에서 기녀에게 둘러싸여 술을 마시던 무인들이었다.

“감히 어떤 놈이 대형을 사칭하느냐!”

숫자는 아홉.

하나같이 험상궂은 얼굴에 칼자국이 가득한 무사들이었다.

허리춤에 검이 보였다.

“사칭?”

주서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의 이름은 김팔! 나로 말하자면 궁귀검수의 아홉 동생 중 첫째로서, 사문반란(四門飯亂)에 공을 세운 사도의 협객이시다!”

“시팔! 대형의 이름이 중원 오지에 퍼지니 이젠 웬 잡놈 새끼가 대형을 사칭하는구나!”

김팔의 뒤로 선 무사들이 험악한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너희 같은 동생 둔 적 없다.”

주서천이 김팔 외 여덟 명을 보고 피식 웃었다.

“허!”

김팔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사기꾼 놈이 잘도 혀를 날름거리는구나.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이로다.”

“정말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이로다.”

주서천이 김팔을 보고 옅게 웃었다.

‘뭐지, 이놈?’

김팔은 조금 불안감을 느꼈다.

‘내가 거짓말하는 걸 알고 있나?’

김팔은 일류의 무인이다.

비록 고수의 반열은 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실력은 있는 편이었다.

고수가 적고 하수가 다수인 사파의 경향을 생각하면 나름 출중한 실력을 지녔다.

그러나 김팔은 실력에 비해 욕심이 너무 컸다.

여자나 술 이야기만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고, 수중에 돈이 있으면 여자부터 안으러 갔다.

파락호 시절에는 돈을 빌려서 흥청망청 쓰다가 신분을 바꾸고 숨어 지낸 적도 있었다.

일류의 무인이 돼서도 그 버릇은 줄지 않았다.

도리어 커지기만 했다.

나름대로 돈이나 실력이 있어서 여인을 안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눈 돌아갈 미녀를 품기에는 어려웠다.

특히 남창에 온 이후 등왕각에서 큰마음 먹고 고급 기녀를 불러 놀았을 때의 맛이 안 잊혀졌다.

등왕각에서 놀면 다른 곳은 절대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몸이 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맞는 말이었다.

‘어떻게 돈 좀 쉽게 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 후 김팔은 남창에 눌러앉았다.

어떻게든 동왕각에서 장기간 동안 놀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찾았다.

하루하루를 손가락 빨며 지내는 나날, 패륜아 담리백이 사도팔문 중 사문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다.

김팔 역시 사도천 소속이었고, 나름대로 일류의 무인이었는지라 부름을 받아 한쪽에 붙어야 했다.

선택한 건 사도천주였다.

아무리 생각지도 못한 반란이 일어났다 해도, 담리백의 승산은 적어 보였다.

그 판단은 현명했다.

패륜아는 죽었고, 그를 따르는 세력도 전멸했다.

사도천주는 그들을 용서치 않았다.

덕분에 제법 괜찮은 돈을 벌었다.

다만 그 돈도 등왕각의 이 층에 들르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시 돈이 궁해졌을 때, 김팔은 기가 막힌 돈벌이를 생각해 냈다.

‘궁귀검수!’

혜성처럼 나타나 사라진 사도의 영웅, 궁귀검수.

김팔은 궁귀검수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가 있던 전장에 참전하여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내전이 끝나고 궁귀검수가 모습을 감추자,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바로 의형제의 사칭이었다.

본인도 아니니 실력을 발휘할 필요는 없고, 의형제이니 딱 알맞았다.

실제로 효과는 굉장했다.

궁귀검수의 의형제라고 하니 여기저기서 우러러봤다.

일류나 절정의 고수들까지 찾아와 인사했다.

고수들은 도중에 사도천의 인재 고용에 불려가 떠났지만, 그 외에는 같이 의형제 행세를 하게 됐다.

궁귀검수의 이름만 대면 사파인들이 알아서 눈을 깔았다.

그를 흠모하는 여자들이 찾아왔고, 술을 먹이고 적당히 거짓말로 꼬신 다음 하룻밤을 잤다.

돈이 부족하면 그 이름을 빌려서 상인들이나 중소 문파의 문주에게서 금전을 갈취했다.

너무 편했다.

최초에는 의심하는 사람들도 생겼지만.

궁귀검수 본인이 나타나 부정하거나 하지 않으니 점차 거짓말에 진실이 부여되기 시작했다.

소문이 커져 가면서 끝내 아무도 건들지 않게 됐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웬 놈이 나타나서는 궁귀검수라 칭했다.

등왕각에 눌러앉아 허구한 날 궁귀검수의 의형제라 말하고 다니니, 사람들의 이목이 바로 집중됐다.

김팔은 몸을 움찔 떨었으나, 궁귀검수라 칭한 자를 보고 안도하며 자신 있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동업자였군!’

분야(?)는 달라도 궁귀검수와 관련된 사칭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눈매가 좀 험하긴 하지만, 겉을 훑어보니 무공이 대단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눈매가 좀 닮은 걸로 사기를 치고 다니는 놈인 듯했다.

“좋은 말할 때 당장 돌아가는 게 좋을 게다.”

김팔은 주서천 앞에 가서 콧방귀를 꼈다.

“그리고, 이 금원보는 대형께 대신 전해 주마.”

김팔의 손이 기녀가 쥔 금원보로 향했다.

뒤편에서 동생들이 낄낄 하고 웃는 게 들렸다.

‘흐흐흐! 이 돈이면 이 층에서 질펀하게 놀 수 있겠구나!’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벌써부터 가랑이 사이에 힘이 들어갔다.

기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손, 얌전히 거두는 게 좋을 거다. 적어도 날 대형으로 모시는 동생들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다.”

“뭣이?”

김팔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사기꾼 주제에 기어오르는구나.”

“사기꾼에게 사기꾼이라 듣다니 기분이 묘한데.”

“감히 날 모욕하다니!”

김팔이 허리춤에 손을 옮기려다가 멈췄다.

눈앞에 자칭 궁귀검수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소음문의 관할에서 소란을 피웠다간 쉽게 안 넘어간다.

굽혔던 다리를 펴고 뿜어내었던 살기를 거둬들였다.

“부모 욕은 참아도 내 욕은 참을 수 없……”

“아, 좀! 거 조용히 좀 하지!”

쿠앙!

탁자가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꺄악!

놀란 기녀들이 뒤로 물러났다.

천장 위에 숨어 있던 고수들이 내려와 소속 기녀들을 뒤로 숨겼다.

“너, 넌 또 뭐냐?”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구석에서 홀로 앉아 술을 마시던 삼십 대 중반 정도의 남자가 부서진 탁자를 걷어차며 앞으로 나왔다.

“미친놈이구나!”

김팔이 엉망이 된 탁자를 보고 사색이 됐다.

“히, 히익! 난 이만 가보겠소!”

기녀를 어떻게든 안아 보려고 헤벌쭉하던 사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등왕각을 뛰쳐나갔다.

대신 안에 들어가진 않고, 밖에서 안을 살펴보듯 머리만 빼꼼 내밀고 구경했다.

‘상황이 좋지 않다.’

김팔도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여덟 명의 의형제들도 언제 도망칠지 각을 쟀다.

“거참, 등왕각의 술이 맛이 그리좋다 해서 왔는데 이거 순 엉망이 아닌가!”

“이 미친놈아. 더 이상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마라.”

김팔은 위층을 힐끗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죽였다.

“이 등왕각이 누구 소유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냐?”

“소음문주 말이냐.”

“미, 미친놈아! 음신(音神)이 네 친구냐!”

상천칠좌(上天七座).

소음문주(音召音門主) 음신(音神).

거칠기로 소문나고 툭하면 싸워 대는 사파인들이 등왕각에서 얌전히 지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김팔이 그토록 조심하고 눈치를 본 건, 이 등왕각의 소유주가 상천칠좌인 탓이었다.

사도팔문, 아니 이제는 사도사문이 된 사도천의 수뇌로서 사도의 절대고수였다.

“흥, 어차피 그래 봤자 노래 좀 부르는 자가 아닌가.

이 청백도(淸白刀) 앞에선 허명일 뿐이로다!”

“청백도? 그 신비 문파 청백도문 말인가?”

김팔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주서천도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떴다.

청백도문은 일인전승으로 전해지는 신비 문파다.

약 칠십 년 전에 등장해 여러 전장을 누비며 활약하다가 사라졌었다.

놀라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정말로 청백도냐?”

칠십 년 전의 청백도는 강했다.

등장하자마자 천하백대고수의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 고수가 칠십 년 만에 뜬금없이 나타났으니, 쉬이 믿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허, 이 칼을 보고도 모르겠느냐.”

청백도가 허리춤에 칼을 뽑아 보였다.

척 봐도 평범하지 않은 예기를 풍기는 명도였다.

그리고 곧 청백색으로 물든 강기가 실리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정말로 청백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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