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141/254)

화산의 매화가 눈 속에서 피어났다.

그 색채가 하얗게 물들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죽립 위로 눈이 쌓인다.

산문 근처는 눈을 치우는 빗질 소리로 가득했다.

“얼마 있었다고 또 강호로 나가는겁니까, 사질.”

정휘련의 시선 속에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장문인. 보는 눈이 많습니다.”

주서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질도 참 고집이 쎕니다.

비록 사질이 스승은 아니오나, 그래도 장문인의 무공 사범이 아닙니까.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은 존경받아야 하는 법. 하물며 정파의 영웅이자 화산의 자랑이니 당연히 그래야지요.”

“끄응.”

주서천은 약 넉 달 동안 정휘련의 곁에 바짝 붙어 자하신공을 비롯한 자하검결을 최대한 가르쳤다.

‘천재긴 천재렸다.’

과연 그 검선이 고른 제자답게 재능은 뛰어났다.

직접 검을 가르치면서 감탄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낙소월과 견주어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경지 역시 이미 초절정에 들어섰으며, 그 난해하다는 자하신공조차도 벌써 오성에 들었다.

자하검결도 제이식의 형태를 수련 중이다.

나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빠르다.

쟁각해 보면 정휘련이 제대로 된 인정을 받고 장문인에 올랐을 때도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천재성을 지녔음에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성실이 임하니 높은 성취는 당연하지.

이 시대는 정말 비정상적으로 천재와 인재, 영웅들이 수두룩하구나.’

괜히 역대 최강이라 평가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래도 덕분에 화산파는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

정휘련은 어리나, 오성이 뛰어나며 성질 또한 급하지 않고 차분하다.

경험이 부족하나 그건 화산오장로가 있으니 걱정할 건 없었다.

“정말로 아쉽습니다. 전 상관없으니 사질이 장문인에 올랐으면 참으로 좋았을 텐데……”

가끔 이렇게 무한한 신뢰 이상의 무언가를 보내오며,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를 가르치는 와중에도 정휘련은 끝없이 장문인을 대신 맡지 않겠냐는 제안을 몇 번이나 해 왔다.

기겁하면서 뭔 소리냐니까 ‘나 같은 것보다 뛰어난 천하제일인이 장문인이 되는 건 당연하다.’ 라면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이의채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칭찬을 침을 튀기며 쏟아 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요 몇 달동안 장문인과 지내면서 확신했습니다.

화산파의 장문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휘련 장문인께서 되셔야 합니다.”

주서천은 입가에 미소를 그려 내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전대가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장문인께서는 흔들리지 않는 우직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취임식 때 불안을 보이는 사형제들을 안심시켰고, 누구보다 더 독하게 노력하시지 않았습니까.”

정휘련은 주서천이 장문인 자리를 거절한 것을 누구보다 더 끝까지 아쉬워했다.

그러나 검선, 우일문 진인이 앉아있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쉴 틈 없이 공부하고 일했다.

‘미래를 위해 봐주지 않고 온갖 고생을 시키며 혹독하게 굴렸다. 불만을 낼 만도 한데, 그러기는커녕 남는 시간에 스스로 장로님들을 찾아 업무를 배웠다.’

주서천처럼 지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한계가 있음에도 이를 악물고 일하는 점이 특히 대단해 보였다.

그 와중에도 화산의 제자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가끔씩 얼굴을 비치며 인사를 하고 다녔다.

심지어는 사문이 적어도 어떤 업무가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며 주방까지 찾아가며 간략히 일도 배웠다.

게다가 장문인이지만 삼대제자인 신분인 걸 고려해서 이대제자에게는 끝까지 존칭을 놓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리다며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

그러나 그 인식은 빠르게 나아지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주 사질께서 그리 칭찬해 주시니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마음 같아선 계속 붙들고 싶으나, 무림맹주께서 도움을 요청했으니 별수 없군요.”

“사정이 사정이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러면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습니다.

주 사질을 목표로 더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그동안의 가르침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정휘련이 경의를 담아 인사했다.

‘아닙니다, 장문인.

저야말로 장문인을 목표로 정진하고 있습니다.’

주서천은 속말을 삼키며 인사에 답했다.

과거, 전란의 시대에서 역대 장문인들은 목숨 바쳐 화산파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을 구했다.

정휘련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그 시기가 좀 짧았다 해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주서천은 그러한 영웅들을 존경하면서 등 뒤를 쫓았다.

그 감정과 경의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러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아무래도 현생은 화산에 오랫동안 머물 운명이 아닌가 보다.

반년도 채 되지 않았건만 벌써 떠나야 했다.

“중원의 그 누구도 사형만큼 바쁘진 않을 거예요.”

낙소월이 죽립 위에 쌓인 눈을 털며 옅게 웃었다.

“비약이야.”

“전혀 아닌 것 같은데요.”

무림맹, 정확히 말해선 무림맹주 남궁위무의 호출이 있었다.

화산파의 사정을 알고도 불린 걸 보면 아무래도 사안이 제법 급하거나 중대한 모양이었다.

원래는 혼자 가려 했는데 화산파에서 만류했다.

정파의 영웅이며 동시에 장문인의 무공 교육을 맡게 됐다. 호위 하나 없이 보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고강하다 할지라도 대대적인 암살단에게 노려지면 큰일인지라, 호위 겸 안내를 붙였다.

그것도 화산파의 최정예, 매화검수가 무려 셋이냐 붙었다.

다 합해 봤자 넷 밖에 되지 않으나 차라리 이게 더 낫다.

괜히 사람이 많아 봤자 움직이는 데 힘들다.

차라리 소수 인원으로 보이지 않게 이동하는 것이 나았다.

특히 낙소월을 제외한 둘은 매화검수 중에서도 경신법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음, 날이 점점 더 쌀쌀해지는구나.”

왠지 모르게 둔해 보이는 덩치에 도사답지 않게 인상이 조금 험상궂은 중년인이 중얼거렸다.

삼대제자이자 매화검수인 몽각이다.

“한기의 침입을 막으려면 필연적으로 내공의 소비가 있을 수밖에 없지.

지속된 소비로 지치는 걸 생각하고 습격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유난히 눈매가 매서울 정도로 찢어진 미중년의 여성, 담향이 몽각의 말에 적의 가능성을 꺼냈다.

그녀 역시 삼대제자이면서 매화검수다.

몽각과는 젊었을 적에 경쟁자 관계로서 자웅을 다투기도 했다.

“……!”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척이 느껴졌다.

과연 매화검수답게 눈치채는 게 빠르다.

기도의 전환도 순식간이었다.

손은 언제든지 검을 출수할 수 있도록 허리춤에 있었다.

“……하나?”

낙소월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사전에 부른 아군입니다.”

주서천이 몽각과 담향, 낙소월을 진정시켰다.

“오랜만이다.”

주서천이 나뭇가지 위에 수북하게 쌓인 눈을 올려다봤다.

위에서 누군가 스르륵 하고 나타났다.

“……아!”

낙소월이 누군가를 보고 아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그 이름을 속으로만 삼켰다.

‘탈주령, 가무량!’

주서천이 최초로 방문한 유령곡, 하북곡의 유령들.

그러나 심살의 과정을 이겨 내지 못하고 지친 나머지 결국 도망친 탈주령 (脫走靈)들의 수장이었다.

낙소월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기억인지라 아직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사실을 모르는 몽각과 담향이 옆에 있어 눈치가 보였다.

“……”

가무량은 매화검수들을 슬쩍 살펴보곤, 다시 탐탁지 않은 눈으로 말없이 주서천을 노려봤다.

“정말로 아군이냐?”

몽각이 가무량의 시선이 그다지 좋지 않은 걸 느끼곤 주서천에게 물었다.

“사정이 좀 복잡하게 꼬이긴 했지만, 아군입니다.

괜찮다면 자리 좀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주서천.”

담향이 눈살을 찌푸렸다.

“알고 있습니다. 위험하다면 곧장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야 할 정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마음 같아선 함께 듣고 싶지만, 무림맹의 기밀과도 관여된 것인지라 그럴 수가 없는 걸 이해해 주십시오.”

“……끙.”

몽각과 담향이 앓는 소리를 냈다.

호위의 입장에선 저런 수상쩍은 자와 둘만 남게 할 수는 없었지만, 본인이 저리 말하니 어찌할 수 없다.

무엇보다 정휘련이나 위지결이 주서천을 호위하되 그의 말에 웬만하면 따르라 해서 뭐라 할 수 없었다.

“일각이다. 그 안에 오지 않으면 찾으러 가겠다.

너무 멀리 나가지도 말고.”

“알겠습니다.”

주서천은 일행을 남기고 가무량과 자리를 옮겼다.

“서신이 아니라,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보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인가.”

“……흥.”

가무량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콧방귀를 꼈다.

마흔다섯 명의 탈주령.

첫 만남이 대략 이 년 전이었으니 열아홉 살 때다.

당시에 하북곡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탈주령들을 유령신공으로 굴복시켰으나,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아 자유를 대가로 주고 일종의 협력 관계로 남기로 했다.

마흔다섯의 탈주령은 자유를 얻는 대신 비밀 보장과 무림 세력에 속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했다.

또한 가끔씩 유령곡주가 손이 필요하다고 연락을 해 오면, 정당한 보상을 받는 전제하에 임무를 수행했다.

비록 아직 인생을 전부 앗아 간 유령곡에 대한 증오심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괜찮은 조건에 손에 넣을 수 있어 묵묵히 따랐다.

가끔씩 정보의 수집을 맡았는데, 이 부분에선 일반적인 유령들보다 그 질이 무척 뛰어났다.

심살 과정을 끝내고 마음이 죽어버린 유령은 능동적이지 못해 정해진 것만 수집해 온다.

그에 반면 탈주령은 사고 의식이 남아 있어 적절한 판단과 의심, 추측으로 양질의 정보를 얻어 왔다.

요 몇 달 동안 화산에 틀어박혀서 정보를 모았는데, 탈주령이 가져온 것은 하나같이 질이 좋았다.

“옥문관에 대해서 알아냈다.”

주서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전부 말해 봐라.”

중원과 새외의 경계선 중 한 곳인 옥문관.

혈교의 군세는 그 옥문관을 순식간에 통과했다.

관군이 미치지 않는 이상 오천이나 되는 무림인들을 복잡한 절차 없이 그냥 보냈을 리 없었다.

무림맹에서도 이상하게 여겨 개방을 동원해 조사해봤지만,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옥문관이 군정 기관의 관할하에 있다 보니 알아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도지휘사(都指揮使)가 엮여 있다.”

명나라에는 열여섯의 도지휘사사가 있다.

도지휘사사는 오호도독부가 예속되어 있으며 병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성을 총괄하는 군정 기관이다.

이 도지휘사사 소속으로 성의 군정을 장악하며 위소(衛所)를 통솔하는 이가 정이품 도지휘사다.

“…… 그런가.”

“별로 놀라지 않는군.”

정이품이라면 고위 관직이다.

감숙성은 국경 근처라 변방이나, 그래도 그 권력은 몹시 대단하다.

그런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면 놀라는 게 정상이다.

“대충은 예상했으니까.”

옥문관은 서역 지방과의 연결 통로.

국경을 지키는 관문이다.

그 문을 열려면 권력가의 힘이 필요하다.

‘요광의 손길이 닿았구나.’

암천회의 주요 기관 칠성사, 요광성은 회 내에서 병(兵)을 맡는다.

칠성사병 대다수가 요광성이다.

그리고 그 수장, 요광은 군정 기관 혹은 황궁에 있을지도 모른다.

정파에는 천추가 있고, 사파에는 천권이 있었다.

천선은 흑도에 있으며 요광은 군정기관에 있다.

천기와 옥형, 개양은 불분명하다.

‘드디어 그 꼬리를 잡았다.’

암천회는 무림만이 아니라 관부에도 숨어 있다.

괜히 중원 무림이 멸망 직전까지 간 게 아니다.

무력만이 아니라 금력과 권력까지 손에 넣었다.

다만 그 정체는 천추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사정에 의해 장막에 감싸져 비밀로 붙여졌다.

‘나라의 요직에 앉아 있는 자가 무림에 관련되어 괜한 일을 저질렀다거나 한 게 알려지면 곤란하지.

조금이라도 엮여 있다는 것까지 밝혀진다면 어떤 권력자도 무사하지는 못할 테니까.’

무림인이란 건 곧 힘이며 병사이다.

명이 무림에 관여하지 않는 건 북방의 오랑캐, 몽골족과의 싸움으로도 정신이 없는 것이 있지만 혹시 봉기를 일으키기 위해 무림인을 모으는 것이냐며 괜스레 트집을 잡힐 것 같아서다.

아무리 권력가라 해도 일정 수의 사병을 모으는 것은 엄밀히 금해져 있다.

역도로 돌변할 것 같아서다.

그렇다 보니 예로부터 무림에 관여하지 않는 게 관례가 됐고, 서로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불문율이 전란의 시대에 와서 깨졌다.

‘그래도 이걸로 최소 감숙성의 도지휘사와 관련된 건 알아냈다.’

 천추도 천추지만 요광에 대한 기록도 별로 없다.

“그래서, 도지휘사와는 어떻게 엮여 있는 거지?”

“옥문관의 개문과 폐문의 군사 훈련이다.”

전쟁에서 개문과 폐문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문을 열고 군사를 내보낸 뒤, 신속하게 닫지 않으면 적의 침입을 허용한다.

혹은 퇴각 중인 군사가 돌아올 때, 재빨리 문을 열어 수용하지 못하면 적의 침입을 우려해 결국 기회를 놓쳐 못 열고, 문밖에서 죽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인시(寅時 : 오전 3시에서 5시)에 행해졌다.”

해가 저문 이후 한창 밤일 때는 경계가 삼엄하다.

그러나 인시, 사람이 막 일어날 무렵, 특히 해가 뜨기 직전에는 안심하여 경계가 제법 많이 풀어진다.

즉, 감시가 제일 허술하며 정신도 늘어질 때. 그리고 아직 밝지 않아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는 시간.

“인시에?”

척 봐도 수상쩍었다.

야전(夜戰)을 대비한 훈련이라면 야심한 시각에 행했어야 하고, 아침을 생각했다면 좀 더 늦췄어야 했다.

“도지휘사가 독단으로 시행한 훈련이다. 급습에 대비한 불시 훈련이라 생각하기에는 시기가 기묘하지.”

마침 그날 혈교의 군세가 옥문관을 넘었다.

“그 외에는 없나?”

“이 사실을 알아내는 데만 해도 장장 네 달이란 시간과 노력, 돈이 소모됐다. 있을 것 같나?”

군사 훈련은 대부분이 기밀에 붙여진다.

설사 다른 기관의 관리라 해도 열람하는 게 제한된다.

도리어 인시에 행해진, 눈에 띄지 않는 훈련과 누가 주도했는지 알아온 것 자체가 대단했다.

“수고했다. 돈은 평소처럼 금의상단에서 수령해라.”

“추가 임무는?”

“도지휘사의 행적 중에서 수상해보이는 게 있다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알아봤으면 좋겠는데.”

과한 호기심은 가끔씩 재앙을 부른다.

그 호기심에 암천회, 그리고 군부가 연결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그리고 하오문주나 상단주에게도 이 사실의 전달을 부탁하고 싶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전서구를 보냈다가 그 전서를 누군가 본다면 큰일이니까.”

도지휘사와 연관되어 있다. 함부로 할 수는 없다.

가무량의 기척이 사라졌다.

‘알아볼 게 많아졌군.’

슬슬 일각이 지날 무렵이라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몽각과 담향, 낙소월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 봤으나, 무림맹에서 전달한 기밀 사항이라고 대답해 숨졌다.

가무량에 대해서 아는 낙소월에게는 나중에 따로 알려 주겠다고 말해두었다.

이 날로부터 무림맹에 도착한 건 엿새 뒤였다.

* * *

섬서 화산에서 안휘 합비까지 오는데 그다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대신 꼬리가 제법 붙기는 했다.

주서천은 유명인이다.

이제 무림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안다.

일반 백성들이야 두말할 것 없었다.

이렇다 보니 각종 세력의 꼬리들이 붙었다.

주로 사도천이나 의뢰를 받은 자객방이었다.

그중에서 암천회도 있을 법했지만,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누구인지 솎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꼬리들을 달고 싶지 않아 인적이 드문 곳을 찾거나 험한 길을 지나쳤다.

혹은 따라올 수 없도록 경공을 극성으로 펼쳐 전속력으로 달렸다.

어찌어찌 떨쳐 낼 수 있었다.

합비에 도착해서 다시 수상한 시선이 늘어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무림맹 안에 있으면 알려진다.

도착 시기를 서신으로 미리 정해둔 덕에, 안내인이 미리 나와 주목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룡삼봉의 지룡, 제갈상이었다.

‘여전히 잘생겼군.’

얼마 전에 물에 비친 얼굴을 보고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라고 중얼거렸던 게 후회됐다.

 지금 당장 바닥에 누워 허공에 발차기를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맹주님께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매화검수분들께는 따로 객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알겠소.”

무림맹주가 따로 불렀으니 아무리 호위라 한들 따라갈 수는 없다.

깔끔히 포기하고 시녀에게 안내를 받았다.

주서천만 제갈상을 따라서 맹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 오려무나.”

문을 열자 산처럼 쌓인 문서와 씨름하고 있는 남궁위무를 볼 수 있었다.

문이 닫혔지만 제갈상은 나가지 않고 남궁위무를 보좌하듯 곁에 섰다.

“화산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할 텐데, 이 늙은이가 쉴 틈도 없이 불러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화산파의 내부 사정을 알고도 불렀으니 이렇게 될 건 대충 예상했다.

“검선의 일은 유감이다.”

남궁위무는 긴말 하지 않고 짧게 말했다.

그러나 그 표정이나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전에 서신으로 말씀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는 성의가 부족하지 않나.

마음 같아선 조문하러 가고 싶었으나……”

“자리가 자리고, 정혈대전의 뒷정리로 인해 바쁘시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이해합니다.”

“고맙구나.”

난주에서도 경계를 부탁한 게 줄곧 마음에 걸리는지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한 남궁위무였다.

아니면 어떠한 사정 탓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만…… 음?”

남궁위무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름진 눈꺼풀 아래에 보이는 건 의아한 눈이었다.

“맹주님?”

“……?”

제갈상이 불렀으나, 남궁위무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주서천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뭔가가 변한 것 같은데……?”

고수는 하수를 알아본다.

주서천이 아무리 경지를 숨겨도, 현경과 화경에는 현저한 격차가 있어서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심상구현을 손에 넣어 동수에 올랐다.

“허! 설마!”

남궁위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작년에 봤을 때만 해도 그 경지가 훤히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남궁위무가 입을 쩍 벌렸다.

“제 자신을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

남궁위무가 숨을 멈췄다.

놀라는 걸 넘은 무언의 감정까지 느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이었다.

“지금,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것이냐.”

“물론입니다. 어차피 맹주님 앞에서 감출 수도 없는 거,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허허……”

남궁위무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허탈하게 웃었다.

제갈상만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허허, 그것참……”

남궁위무는 그저 말을 잇지 못했다.

심상구현의 단계, 현경이 어떠한 경지인가.

재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천운이 닿아도 힘들다.

설사 백 년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는 천재라 할지라도 특정한 조건을 이루지 못한다면 성취하지 못한다.

설사 현경, 상천십좌가 단서를 주었다곤 해도 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영역.

생사와 천지의 차이라 비유할 정도의 경지다.

현 무림에 열 아니 여덟 명도 이상할 정도로 많다.

그 정도로 어려운, 도달할 수 없는 무경이었다.

검성, 남궁위무는 혈마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현경의 처음이자 마지막, 근원인 심상구현을 이루려면 일생이 녹아들어야 한다.

그런데 스물한 살에 그걸 해냈다고 하니,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남궁위무는 주서천을 불러낸 연유도 잊은 채, 무인으로서 순수한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냈다.

“정말로 말이 안 나오는군.”

남궁위무는 할 말을 잃은 채, 집무실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허어.’ 하고 감탄사만 연발했다.

“머리는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정작 이 눈과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 뭐라 표현할 수가 없구나.”

“맹주님께서 판단하시면 됩니다.

굳이 조목조목 따져 가며 설명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괜찮다면 저도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갈상이 답답한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음…… 부군사에겐 미안하군.”

남궁위무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어색한 듯 괜히 수염을 매만졌다.

“물어볼 건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볼일이 있었으니 나중으로 미루지.”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마교의 준동.”

마교(魔敎).

마도의 전신이며 ‘힘’이 진리인 것처럼 이를 교리로 내세우는 정신교이자 무력 단체다.

전성기에는 십만교도라 불릴 정도로 세가 대단했으나, 현재는 그 세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언제 움직이나 했습니다.”

마교의 준동, 예정된 일이었다.

나아가 침공은 결코 미래를 알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무림의 현 상황을 본다면 누구든지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정사와 마도로 나누어진 무림 세력.

그중 사파는 패륜아의 반란으로 전력이 반이나 쪼개졌고, 정파와 혈교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었다.

본래 비등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던 체계가 이로써 박살 났으니, 마교가 야욕을 드러내는 건 당연했다.

“아직 마교에 관한 소문이 돌지는않고 있으니, 중원을 앞에 두고 있지는 않겠군요.”

중원 밖 새외, 신강은 서장을 남에 두고 청해와 감숙을 각각 남동으로 두고 있다.

“아니면 혹시 혈교처럼 오천 정도 되는 병력이 갑작스레 나타나 옥문관을 순식간에 통과한 겁니까?”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게 가능했겠나.”

“맹주님의 말씀대로, 옥문관 외 청해의 국경에도 경계병들을 배치한 상태요.”

제갈상이 보충 설명을 했다.

그리고 곤륜파가 정혈대전에 참전하지 못하는 대신, 마교의 움직임을 무척 신경 써 주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신경 쓸 것이 많은 만큼, 주의를 기울였다.

“마교에 심어 둔 첩자의 말에 의하면 교 내부에서 병장기나 군량미를 확보하는 등의 전쟁 준비가 한창이라 하오. 그 외에도 여러 경로로 비교하며 알아본 것이니 믿어도 괜찮소.”

그 천군사가 알아 온 것이기도 하고 정황상 맞아떨어졌다.

‘다만, 암천회가 개입했느냐 안 했느냐가 문제로다.’

마교는 혈교만큼 광적인 단체다.

‘힘’이 모든 것이라며, 무력이란 걸 숭배하는 그들의 정신 세계는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 탓에 행동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중원을 침공한 건지, 아니면 혈교처럼 암천회가 등을 민 건지 알 수 없었다.

“마교의 다음 목표는 아마 정파일게다. 사파 연합, 사도천은 지리적으로 머니 당연한 이야기지.”

사도천은 물론이고 사파 세력이 거진 남부에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파가 마교와 연달아 전쟁할 여력이 없다는 게지.”

남궁위무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느껴졌다.

정파는 바로 얼마 전에 혈교로 홍역을 치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돈과 사람이 부족하오.”

제갈상이 나서서 현재 처한 상황의 문제를 설명했다.

“정혈대전의 뒷정리에 금전적인 소모가 제법 컸소.

주 대협 덕에 사망자나 부상자를 최소화할 수 있었으나, 그래도 적지 않은 돈이 들었소.”

전쟁은 돈이 든다.

그것도 상상 이상으로 소모된다.

승패는 상관없다.

패하면 모든 걸 잃지만, 승리해도 많은 걸 잃는다.

병장기부터 시작해서 치료약, 의원의 비용, 그 외에도 장례라거나 공적에 따른 보상까지 따지면 셀 수 없을 정도라서 총금액을 보면 욕이 나올 정도였다.

종전 이후 한동안 전쟁이 나지 않거나, 혹은 사정상 휴전을 하는 건 돈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사망자만 거의 삼천에 이르며, 더 이상 무인으로 살 수 없게 된 이들도 구백여 명. 대문파의 경우는 사정을 이야기하면 괜찮지만, 무림맹 소속이거나 혹은 중소 문파들에겐 확실한 보상을 해야 하오.”

무림맹을 구성한 대문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제자나 가족이 죽어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

어차피 무림맹의 예산 대부분이 그들에게서 나오는 것인지라, 후에 사망자나 중상자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외하고 지불하면 딱히 이렇다 할 문제는 없었다.

하나, 중소 문파나 무림맹 소속의 개인들은 사정이 다르다.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당연히 무림맹이 이를 대신 처리해줘야 한다.

그게 무림맹이 하는 일이다.

목숨 바쳐 싸워 줬는데, 그에 따른 보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누가 싸우겠나.

신뢰도가 떨어지는건 물론이고 어떠한 문파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순수하게 인의만으로 싸우는 경우도 몇 없다.

실제로 과거, 무림맹이 약세였던 적이 있었는데 재정이 부족해 보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탈주병은 물론이고 소집령에 응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래서, 주 대협의 도움을 좀 받으려 하오.”

“도움이라면 혹시…… 기부금이 필요하다는……?”

“하하하.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남궁위무가 무릎을 탁 치며 웃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도사가 그런 돈이 어디 있겠소.”

제갈상도 옅게 웃었다.

“주 대협께서는 영웅이시지 않습니까.

조금 기분 나쁠 수는 있으나, 그 이름을 빌려 정파를 위해서 기부활동을 선전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하오.”

오룡삼봉 전부를 합해도 검룡의 이름값보단 적다.

주서천의 현 위치는 상상 이상이다.

그 영향력을 이용한다면 마교의 침공을 막을 만한 돈이 모인다.

‘휴!’

주서천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또 비고를 털어서 독식한 게 들킨 줄 알았네!’

도와 달라고 해서 ‘사실 네가 비고턴 거 알고 있었다. 다 내놓아라.’ 라고 할 줄 알았다.

천군사의 지혜가 워낙 보통이 아니다 보니 그런 착각을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이용해 주십시오.”

“허!”

주서천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남궁위무와 제갈상이 놀랐다.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요 며칠 동안 준비했는데, 그 고민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구먼.”

정혈대전이 끝나고 일이 년이 지났으면 모를까, 아직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재정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 억지를 부릴 각오까지 했다.

돈이 없으면 사람을 데려올 수 없고, 그러면 정마대전이 불리해진다.

심지어 거절하면 어떻게 설득할지 군사와 부군사를 불러 밤늦게까지 논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인 그것도 정파인의 경우 명예에 극히 민감하기 때문이었다.

무예로 쌓아 올린 명예이거늘, 결국 그걸 돈을 버는 데 쓰겠다는 게 아닌가.

화내도 이상하지 않다.

이 시대의 무인들이야 중요하게 여기겠지만, 전란이라는 잔혹한 시대를 살아온 주서천은 아니었다.

명예보다는 실리를 취하자는 주의였다.

“사문에는 잘 말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그 외에 특별히 문제 되는 건 없습니까?”

“그러면 한시름 놓을 텐데 말이야……”

남궁위무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정혈대전의 뒤처리와 마교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다른 일이 또 터지는 구먼.”

무슨 일입니까?

“내부의 배반자. 전에 말한, 그 암천회일 수도 있을지 모르는 이들에 대해서요.”

제갈상도 눈살을 찌푸렸다.

주서천의 표정도 굳어졌다.

“얼마 전에 지하 뇌옥에 수감된 혈교도 몇몇이 독살되는 일이 있었소.”

정혈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난주에서 도주 중이던 혈교도 백여 명 정도를 잡아 본부로 데려왔다.

당연히 포로 취급한 게 아니라 혈교에 대해서나 그쪽에서 심어 둔 첩자의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그 지하 뇌옥이 위치가 관련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곳에었다는 거요. 당시 경비에 의하면 수상한 자는 없었다 하니, 내부의 소행이 틀림없소.”

“자결은 의심해 보셨습니까?”

“물론이오. 수감 전에 신체 곳곳을 뒤져 독약을 숨겨 둔 건 아닌지 검사했었소.”

‘……천추.’

범인이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정파의 내부 깊숙한 곳에 숨어 있으며 정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조종하려는 암중 세력.

암천회의 간부, 칠성사 천추.

“별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는 걸 보면 의심가는 자도 별로 없는 모양이군요.”

“부끄럽게도.”

세상에는 실수나 능력 밖의 일을 해내지 못한다는 걸 그놈의 자존심 탓에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특히나 명예를 중시하는 정파인이라면 그러한 면이 잦은 법이고, 지위가 높으면 두말할 것 없었다.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려 변명을 하기 마련인데, 순순히 인정하는 점이 보기 좋았다.

괜히 훗날 영웅이라 일컬어지며 존경받는 게 아니다.

그만큼의 성품도 있어서 가능하다.

“괜찮습니다. 정파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면 보통 이가 아니겠지요. 도리어 간단히 단정 지을 수 있었다면 정말일지 갸우뚱했을 겁니다.”

암천회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전란의 시대가 다 끝날 때쯤 정체가 밝혀진 천추라면 더더욱 그렇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남궁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그 일로 골치인지라 방금 막 꺼내려 했는데, 잘 말해 주었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사인이 독살일 경우, 맹 내부의 관련자나 수뇌부 출신 중에서 제일 먼저 의심받는 곳이 있다.

흑영부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 있느냐?”

”흑영부? 흑영부가 정말로 있는 곳이었습니까?”

주서천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무림맹도 깨끗한 것만은 아니라는 악소문이 있다.

가끔씩 필요로 인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데, 주로 정보를 캐내기 위해 고문부터 시작해 첩자가 입을 열도록 혈족을 찾아내 납치해 협박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소문이었다.

정파를 보고 ‘위선을 떤다.’ 라고 말할 때 거론되는 기밀 기관이긴 한데, 그 실체는 비밀로 감싸져 있다.

그 괴소문이 워낙 커져, 한 번은 무림맹에서 적대 세력의 선동이라며 전면적으로 부정한 적이 있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맞닥뜨릴 때가 있는 법이지.”

남궁위무가 씁쓸하게 웃었다.

예를 들어 치명적인 피해가 될 함정의 정보를 포로 중 누군가가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섭에 실패하면 고문을, 고문이 불가능하면 협박을 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면 윤리까지 버려야 했다.

그러나 정도(正道)를 중시하고, 대표하는 무림맹이 이런 과격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고 싶지 않으니 기피한다.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개개인의 행동이 사문에까지 피해가 가니 더더욱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이를 위해서 결성된 조직이 바로 이 흑영부였다.

사실 사인(死因)을 밝혀내거나, 해독을 위한 독의 연구를 도맡는 독원(毒院) 역시 흑영부 산하에 있다.

포로의 감금과 고문, 그리고 독에 관련된 상층부라면 흑영부가 제일 먼저 의심받는 건, 당연했다.

“지금 누가 제일 의심받고 있습니까?”

“독룡(靑龍) 당명인.”

 “독룡?”

주서천이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크게 떴다.

독봉 당혜의 오라비이자, 당가의 소가주였다.

“독룡이 흑영부 소속이었습니까?”

오룡삼봉은 정파의 후기지수를 뜻한다.

어찌 보면 정파의 대표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무림맹의 어두운 면에 속해 있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존재할 줄이야……’

흑영부에 관한 소문은 전생에서도 말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궁금해 조사한 적도 있었다.

화산오장로 시절, 무림맹 기밀을 열람할 권한을 얻어 열람한 적 있었다.

흑영부에 대해서 나름대로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헛소문으로 치부하며 넘어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화산오장로조차 닿을 수 없는 수준의 기밀이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무림맹의 치부이니 관련자가 아닌 이상 함부로 가르쳐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무림맹, 아니 정파의 더러운 면이 세간에 공표된다면 평범한 비난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서천이 네가 말한 대로, 범인이 금방 의심당할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흑영부가 의심받도록 일부러 독살을 선택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제갈상도 동의하듯 옆에서 고개를끄덕였다.

“하지만 흑영부나 독에 대한 인식이 인식이다 보니…… 시선이 그리 곱지는 않구나.”

정파에서 독인은 평가가 좋지 않다.

필요해서 마지 못해 인정하는 수준에 그쳤다.

흑영부야 두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존재 여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입에 담기도 꺼려 한다.

그들이 수행하는 임무가 전부 정파와는 거리가 멀고, 사파에 가깝다보니 그런 취급은 어쩔 수 없었다.

흑영부의 방식을 인정하는 건, 평생을 앙숙으로 지내 온 사파를 인정하는 꼴이었다.

‘재정도 부족하고, 내부의 적도 날뛰니 정신이 없구나.

언제나 여유를 풍기던 영감이 조금 피곤해 보이더니만, 그럴 만도 하지.’

정혈대전의 뒤처리만 해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다.

그런데 그 외의 문제도 터지니 큰일이었다.

아무리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현경이라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은 있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

흑영부의 독룡에게도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정파의 영웅이 직접 찾아가서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인다면 인식이 조금은 나아질 겁니다.”

“정말로 괜찮겠느냐?”

“그러는 편이 향후를 위해서라도 훨씬 낫습니다.

어차피 기부금을 위해서라도 당분간 무림맹에 있어야하지 않습니까. 독룡의 여동생인 독봉과도 나름대로 친분이 있으니 이야기야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독봉 역시 부른 참이오.

내일이면 도착한다 하니 그때 찾아가면 될 것이오.”

과연, 천군사. 준비는 철저하다.

“그럼 이번에야말로 끝입니까? 또 뭐가 문제여서 부탁할 일이 있다면 차라리 절 죽이십시오.”

주서천이 맡은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물었다.

“커흐흠, 이놈아. 그렇게까지 양심없지는 않다.”

남궁위무도 민망한지 헛기침을 내뱉었다.

맹주의 집무실을 나와 복도를 거닐었다.

“그나저나, 부군사님.”

“무슨 일이오, 주 대협?”

“그…… 항상 경황이 없다 보니 깜빡했습니다만, 예전처럼 말씀 편히 놓으셔도 됩니다.”

주서천이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강호 초출 때 제갈상과 형 동생 사이가 된 장홍과 장서은은 동행한 주서천도 편히 대하라고 말했다.

제갈상은 예의가 아니라며 그럴 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당시의 주서천은 반대로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훗날 천군사가 될 사람과 친분을 쌓아 놓으면 좋다고 생각해서 말을 편히 놓아 달란 적이 있었다.

“그럴 수는 없소.”

제갈상이 즉답했다.

“그때는 워낙 어리지 않았소이까.

무엇보다 그리 많이 차이도 나지 않는데 연령만으로 형 동생을 정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구려.”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만……”

“하하. 그러면 영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제갈상이 이렇게 나오니,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나저나, 승계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나이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형님된 도리로서 제대로 챙기지도 못해 마음이 불편했었는데…… 정말로 다행이오.”

비록 배는 다르다 할지라도 형제이다.

형으로서 동생이 하는 일을 응원하고 도와주고 싶었지만, 가문의 눈치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기관지술.

중원에서 외면되고 사장된 기술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의 눈치를 받았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공부하는 그 모습이 걱정되면서도 자랑스러웠다.

“주 대협을 만나 가치를 인정받아 참으로 다행이오.

저 같은 것보다는 주 대협이 더 형님으로서……”

“아닙니다.”

주서천이 단호한 어조로 제갈상의 말을 끊었다.

“확실히 승계와는 의형제의 연을 맺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연이 제갈세가의 혈연만큼 깊은 건 아닙니다. 물론 얕은 것도 아니지요.”

“주 대협……?”

“비록 제갈세가의 눈치 탓에 대놓고 도와주진 못했으나, 형님과 누님이신 공자와 소저께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승계를 보살펴 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갈상이나 제갈수란은 기관지술을 이해하지는 못했을지언정, 동생을 사랑하였다.

가문의 핍박이 심해질 때쯤이면, 나중에 몰래 찾아가 위로해 주거나 혹은 제지해 준 적도 있었다.

전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전란이 일어나 바빠져 더 이상 동생을 챙겨 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도우려고 노력했었다.

최후에는 제갈승계의 기관지술을 이해하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고 후회했었다.

“승계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과 누이의 이야기를 할 때는 자랑스러워 하면서 눈을 빛냅니다.”

“승계야……”

제갈상이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 눈은 동생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감사함으로 가득 찼다.

‘제갈세가, 아니 역사에 남을 천재가 동시대에 태어난 형제자매인 데다가 우애까지 깊다니…… 하하.’

정파에겐 그야말로 홍복이다.

참고로 빈말 같은 게 아니다.

정말로 제갈승계는 형제자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잘난 척을 하곤 했다.

정작 그 둘이 앞에 있으면 어색해하거나 긴장 탓에 잔뜩 굳지만.

‘천군사, 모사미봉, 만각이천.

그 누구도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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