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七章 (140/254)

화산전생 2

알록달록한 단풍이 떨어졌다.

더위가 가시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중원에만 통용되는 날씨였다.

감숙의 고비 사막은 여전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사막도 안녕이군.”

주서천이 기지개를 쫙 켜며 중얼거렸다.

상천십좌가 상천팔좌가 된 지도 어언 두 달이 되어 간다.

무림맹에서 내린 대기 명령이 드디어 해제됐다.

“원래라면 진작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이제야 보내는 걸 용서해 주게.”

우일문을 대신해 난주 지부의 총지휘를 맡게 된 일지광이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사정이 있지 않았습니까.”

다른 곳은 몰라도 우일문을 잃은 화산파의 제자들은 전부 다 돌려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혈교가 다시 옥문관을 통과해 이차 침공을 행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그 탓에 주요 전력을 빼기가 부담스러웠다.

무림맹도 미안해하며 남아달라고 요청했다.

“이해해 줘서 고맙네.

그리고 처음의 무례는 용서해 주게나.”

첫 만남 때는 그토록 복수에 불타있었으나, 지금은 그 모습을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주서천이 살짝 웃으면서 부담되지 않도록 농을 건냈다.

총지휘를 맡게 된 것도 단순히 감숙의 대문파로서가 아니라, 우수한 판단력과 무공이나 명성 덕이었다.

실제로 정혈대전에서도 여러 활약을 해서, 영향력도 제법 있었다.

“그동안 정말 신세를 졌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일 바로 출발하도록 하게나. 고생 많았네.”

시종일관 웃지 않았던 일지광도 옅게 웃었다.

“그러면 내일 출발할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수속은 끝났으니 편할 때 떠나게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서천은 집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수고하십니다!”

나오자마자 경계를 서고 있던 무사들이 절도 있게 경례했다.

그 눈에는 존경이 실려 있었다.

“수고하세요.”

주서천이 조금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인사에 답했다.

복도를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사형.”

“아, 낙 사매.”

고요한 밤.

은은한 불빛 사이에 선녀가 서 있었다.

“아직까지 안 자고 있었어?”

“어쩌다 보니 깼네요. 그러고 보니, 사형은……”

“무림맹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는 걸 막 듣고 온 참이야.”

“정말요?”

낙소월의 낯빛이 환해졌다.

두 달 동안 그래도 밖이 아닌 난주 시내에서 지내긴 했지만, 그래도 지치는 참이었다.

“사막의 일교차는 변덕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좀 힘드니까요.”

“그래?”

“한서불침이라고 너무 관심 없는 거 아닌가요.”

낙소월이 볼을 살짝 부풀리며 툴툴거렸다.

“그보다, 안 주무실 거면 산책이라도 할까요?

야심한 시각에 떠드는 건 좋지 않으니까요.”

“그래.”

경계라곤 해도, 사실상 위협이 없었던지라 이렇게 종종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서 낙소월이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그녀 역시 사형의 행적을 알 수 있었다.

낙소월은 초절정의 끝자락까지 올라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

그 이름이 아직 널리 알려지진 않았으나, 실력만 보면 천하백대고수에는 능히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며 위지결이 보장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낙소월을 비롯해 장홍과 장서은은 스물네 명밖에 없는 매화검수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매화검수라니, 정말로 대단해. 사형으로서 자랑스럽다.”

천재인 낙소월도 낙소월이지만 장홍과 장서은도 보통이 아니다.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언제 들어도 기분이 이상하네요.

사형이 그리 말씀하시니 하나도 대단하지 않은 것 같아요.”

낙소월이 어이없다는 듯이 답했다.

“괜히 띄워주는 게 아니라 정말이니까 너무 그러지 마.”

주서천이 쓴웃음을 흘렸다.

놀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두 번째 삶에 대해서 모른다면 희대의 괴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주서천이 생각해도 터무니없었다.

고작 약관에 화경에 오르고, 그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며 범인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업적을 세웠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연달아서 기록을 갱신하고 있으니 낙소월 입장에선 어이없을 만했다.

“정말인가요, 검룡(劍龍)님?”

낙소월이 눈웃음을 지으며 선녀처럼 미소 지었다.

인룡 호덕창의 죽음으로 오룡삼봉에 빈자리가 생겼다.

당연히 주서천이 앉게 됐다.

사실, 그 무위나 명성은 이미 오룡삼봉 수준을 넘었다.

그러나 오룡삼봉이란 약관에서 이립까지의 후기지수 중에서 최고를 뜻하는 호칭이니, 틀리진 않았다.

그동안 오룡삼봉에 속하지 않았던 건 기존의 오룡삼봉에 변동이 없었던 것도 있었고, 굳이 누굴 밀어내며 주서천이 그 자리에 오를 연유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호덕창의 죽음으로 그 빈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주서천의 이름이 올라갔다.

‘검룡이라……’

주서천이 새삼 신기하다는 듯이 생각에 잠겼다.

정파의 영웅이라 칭해지며, 놓치면 평생 가질 수 없는 후기지수의 우상인 오룡삼봉에 들었다.

그 역시도 한때 부러워하며 꿈꿔왔던 적도 있었지만, 주제도 모른다며 낙담하며 포기 했었다.

그토록 멀게 느껴졌던 꿈을 이루니 기분이 이상하다.

“……”

주서천이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 낙소월이 별을 구경하는 척 하면서 사형의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 묻고싶은 기색이었는데 몇 번이나 말을 삼키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저, 사형.”

주저하기를 몇 번.

낙소월이 말을 어렵게 꺼냈다.

“응?”

“혹시, 사형은…… 장문인이 되실 생각이신가요?”

“엥?”

사매에게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뜬금없는 물음이 돌아오자 주서천이 황당하다는 듯이 갸웃거렸다.

“얼마 전부터 조금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사형이 정휘련 장문제자 대신 장문인이 되려고 한다고요. 사람들도 처음에 헛소문으로 치부했지만, 사형이 정혈대전에서 자하신공을 보였다는 목격담이 들리고 있어요.”

‘드디어 왔구나.’

하기야, 정혈대전에서 강기를 쓰며 그리 날뛰지 않았는가.

도리어 ‘이제 와서’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동안 별별 일이 있었으니까.’

자하신공의 목격담이 묻힌 것도 이해가 갔다.

당장 상천십좌가 팔좌가 된 것부터 시작해서 정혈대전이나 각 세력의 반응 등 여럿 있었다.

주서천은 기감을 열어 주변을 슥 훑고 낙소월을 불렀다.

“사매.”

“네, 사형.”

낙소월은 뜻밖에 동요하지 않았다.

눈에 약간의 불안이 보였다.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비교적 담담하게,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하신공의 여부를 묻는 거라면, 그건 사실이야.”

주서천은 아무렇지 않게 진실을 고했다.

낙소월은 그저 담담했다.

화를 내거나, 실망하거나, 당황하지도 않았다.

“놀라지 않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놀랐는 걸요.

하지만 사형을 믿으니까요. 어떠한 사정이 있는 거죠?”

‘선녀인가.’

그 목소리에서 신뢰가 느껴져 감동했다.

하마터면 눈물을 찔끔 흘릴 뻔했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래.”

“그러면 억지를 부려 묻지는 않을게요.

대신, 나중에 어떻게 된 사정인지 말해 주셔야 해요?”

“물론이지.”

주서천의 대답에 낙소월은 어째서인지 안심한 것처럼 웃었다.

언제봐도 넋이 빠질 정도로 예뺐다.

두근두근.

큰일이다.

‘이러다가 일 저지르겠네.’

화산제일미녀, 아니 섬서제일미녀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으니 설렘이 멈추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한참 어린, 그야말로 손녀 뻘의 아이가 앞에 있는데도 맥박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육체가 젊어서 그런지, 혈기가 넘치는 건가…… 감정 조절이 힘들군.”

“사형, 속마음이 또 밖으로 나오고 있어요.

그리고, 손님이 오신 것 같은데 이상한 말씀 마세요.”

낙소월이 고개를 숙여 붉어진 뺨을 숨겼다.

“아.”

주서천이 어색해하며 뒤로 물러났다.

“어흡 실례했습니다, 제갈 소저.”

“……아니요. 저야말로 대화 도중에 실례했는 걸요.”

구름 사이로 가려진 달빛이 미세하게 흘러나와, 그림자를 비춘다.

제갈수란의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전 잠깐 바람을 씌러 온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만 가 보도록……”

“아니요. 차라리 잘됐습니다.

마침 소저께 말씀드릴 게 있었습니다.”

“……?”

제갈수란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협력을 좀 요청하려 합니다.”

“협력…… 이요?”

“예.”

더 이상 혼자 싸울 필요 없다.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는 암천회에 대해 알려 주는 게 좋았다.

정파에 천추가 숨어 있으니 더더욱 도움이 필요하다.

그가 멋대로 날뛰지 않도록 손을 써야 했다.

무림맹 수뇌에겐 사전에 말해 두었다.

그것만으로도 견제가 된다.

다만, 정말 중요한 건 밝힐 수 없었다.

장로 중에서 천추가 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래서 일부러 최소한의 정보만 밝혔다.

대신 몇몇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겐 그 이상의 정보도 전달해 주곤했다.

무림맹주 남궁위무, 군사 제갈중호, 그리고 부군사이자 훗날 천군사라 불릴 지룡 제갈상이 그랬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조금, 아니 많이 터무니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디 흘려듣지 마시고 들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서천이 진지한 표정을 짓자, 제갈수란도 무언가 느꼈는지 몸을 다시 되돌려 마주 봤다.

“이 무림을 암암리에 지배하려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정도도, 사도도, 그리고 마도도 아닙니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말했다.

기감을 최대한 넓히고 주기적으로 이 주변을 탐색해 확인까지 했다.

조금이라도 이상을 느끼면 잠시 말을 멈추고 경계했고, 문제가 없다면 말을 다시 이어 갔다.

주서천은 제갈수란에게 암천회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 내용이 제법 풍부하고 세세했다.

무림맹 수뇌는 물론이고 주변사람들에게 알려 준 것보다 많았다.

모사미봉의 가치는 모략과 지략.

그러니 알면 알수록 더욱 큰 힘이 되어 준다.

곤란한 것을 제외하곤 웬만한 것은 전부 알려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제갈수란은 여타 사람들과 다르게 놀라거나, 믿지 못하거나, 혹은 당혹스러워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눈썹도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게, 정말이라면……”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

“정말로, 무서운 자들이군요.”

“예.”

최근의 정혈대전만 봐도 알 수 있다.

마도이세 중 한 곳을 자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겠는가.

전무후무한 단체다.

정말로 무서운 건, 정면에 나서지 않고 피해를 최소화해 이득을 취하려는 점이었다.

그 외에도 각종 영약이나 법보 등까지 생각하면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다.

“몇 가지……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어째서, 제 협력이 필요한 건가요?”

“제갈 소저의 천재성, 지략과 모략이 필요합니다.”

즉답이었다.

“……높게 평가해 주셔서 무척 감사하오나, 세간에 알려진 평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라면 오해하시고 계세요. 강호에는 기인이 모래알처럼 많다 하니, 조금만 찾아봐도 저보다는……”

“아니오. 없습니다.”

주서천이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모사미봉은 결코 허명 따위가 아닙니다.

실제로 향후 진법의 체계를 뒤바꿀 기문진을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그 외에도 전장이나 지휘부에서 활약한 걸 보았습니다.”

그 지략의 방면도 다양하다.

제갈세가의 특기인 진법부터 시작해서 군략이나 다양한 모략까지 짜낸다.

“웬만한 무인들도 시간이 지나면 미쳐 가는 그 살벌한 대규모 전장 속에서, 소저께선 냉정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리어 무인들의 당황을 바로잡기도 하셨죠.”

정혈대전을 통해서 그 뛰어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시시각각 바뀌는 전황에 따라 대응하는 지휘관 혹은 모략가가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와중에도 대단하진 않지만 적절한 무위를 지녀 자기 몸까지 챙겼다. 괜히 고평가되는 게 아니었다.

‘천군사와 모사미봉, 그리고 만각이천.

이 셋이 살아 있는 한 패배할 일은 없다.

전의 역사는 그 힘이 합해진 적이 별로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과거에 ‘이 천재들이 동시에 활약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라는 명제로 토론이 열린 적도 있었다.

후대 역사에 담길 정도의 천재들.

그들이 제약과 비극없이 살아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으리라.

“종종, 운이 좋다거나 미모만으로 오룡삼봉에 든 것이라는 망언을 일삼는 자들이 있으나 속 좁은 이들이 소저를 시기한 것이니 전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 그렇다고 제갈 소저의 용모가 뛰어나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언제 봐도 호흡하기 곤란할 정도로……”

할 말이야 수없이 많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그 외에도 과거에 세운 업적이 한둘이 아니다.

당시 시대에 인재들이 수없이 죽은 것들도 있지만, 괜히 어린 나이에 지휘봉을 잡은 게 아니었다.

“그, 그만……”

“전에도…… 예?”

어떻게든 꼬셔 보려고 칭찬을 주절주절 읊어 보려고 했는데 막혀 버렸다.

“아, 알았으니까…… 그만해 주세요……”

제갈수란은 손을 모은 채, 소매 끝자락을 꾸욱 잡으면서 머리를 푹 숙였다.

몸도 살짝 떨고 있어 혹시나 화가 난 것은 아닌가 싶어서 표정을 확인했다.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고, 입술은 무언가 꾹 참아내듯 살짝 깨문다.

‘이런, 실수했나?’

주서천이 아차 싶었다.

칭찬도 과하면 좋지 않은 법.

사람에 따라선 비꼬는 것으로 들을 수도있다.

그리 오해한 것이라면 도리어 최악이다.

영웅의 행적을 떠올리다 보니 그만 흥분해 버렸다.

“아부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아, 아뇨…… 그……”

이번엔 그녀가 그의 말을 막는다.

“마, 말씀은 감사하나…… 그……부끄러우니까……”

제갈수란이 어렵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음……”

주서천이 침음을 흘렸다.

‘동일 인물인가?’

현경의 고수임에도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웬만한 일에는 동요도 하지 않는 그 냉정함의 모사가 얼굴을 붉힌 채 몸을 떠니 입이 떡 벌어질 뻔했다.

여러모로 굉장해서 호흡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두근거 릴 뻔했다가 참았다.

“사형을 다시 보게 됐네요.”

대화하느라 옆에 누군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뱁새눈을 뜬 낙소월이 보였다.

“강호를 유람하시면서 풍류라도 즐기셨는지, 여인의 마음을 농락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네요.”

“…… 말에 가시가 있지 않아?”

“흥.”

낙소월이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노려봤다.

“어쨌거나, 부담스러우셨다면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한 치의 거짓 하나 없는 의견입니다.

저는, 아니 저희는 제갈 소저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어요.”

“믿어 주시는 겁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 공자의 말씀이니까요.”

이래서 명성이란 게 중요하다.

아무리 대단한 힘을 지녀 봤자, 영향력을 끼칠 만한 명성이 없다면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주서천은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튿날.

주서천을 포함해 난주에 잔류한 정파인들이 대대적으로 귀향길에 올라섰다.

화산파가 제일 먼저였다.

참고로 위지결의 경우 정혈대전이 끝나자마자 몇몇 제자들을 데리고 귀환했다.

아무리 전쟁 도중이며 대기 명령이 떨어졌다곤 해도, 사문이 곤혹스러우니 화산오장로로서 갈 수 밖에 없었다.

화산파도 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주서천은 난주에서 등을 맞댄 전우들과 인사했다.

“매화정검 대협과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가문 대대로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무림맹의 몇몇 무사들이 감격에 겨운 듯 인사해 줬다.

부담스러우면서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홍고의 인사는 담백했다.

그 외에 주요 인사들과도 그럭저럭 인사했다.

시간이 없다 보니 전부 인사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 전날에 대강 가볍게 인사했으니 괜찮았다.

화산으로 향하는 길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주에서 준비해 준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리다가, 더 이상 달리지 못하게 되면 경공을 썼다.

하나같이 일류 이상의 정예들인지라 속도도 속도고 잘 지치지 않았다.

특히나 매화검수는 압도적이었다.

도적 역시 만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도적들이 마주치고 싶지 않아 숨어 다녔다.

혹시라도 협의라거나 귀찮은 걸 자극할 것 같아 노략도 잠시 멈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산에 도착한다.

* * *

화산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소란스러웠다.

“왔나.”

주서천은 마음 같아선 사부의 얼굴부터 보러 가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좋지 않아 참기로 했다.

유정목 역시 성격상 좋아하지 않을 터.

그래서 일단은 보고부터 서두르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서천은 상궁회의에 불려졌다.

“네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거라.”

위지결도 대충 들은 것이 있었지만, 그래도 당사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또 다르다.

주서천은 흑관이라거나 심상구현을 돌려 말하면서 당시의 일을 세세하게 이야기했다.

제법 지루한 시간이었으나, 화산오장로 그 누구도 한눈 팔지 않았다.

귀를 기울인 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전부 들었다.

종종 의아하여 묻기도 해서 성실하게 답변했다.

“……이상입니다.”

“후우……”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충격이었다.

그 외의 대체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현재의 난처한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섭정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지……”

“어허. 큰일 날 소리.”

“어이쿠.”

섭정이란 직접 통치할 수 없는 사정에 빠진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것.

보통 임금이 불치병에 빠졌거나, 혹은 임금이 이렇다 할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어린 나이일 경우 섭정을 한다.

대신할 용어가 없어 섭정이라 표현했지만, 단어 자체는 임금을 뜻하기에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린다.

“설상가상으로 자하신공의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거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화산오장로가 하나같이 끙끙거렸다.

“그래서, 저에게 생각이 있습니다.”

주서천이 입을 열었다.

“생각?”

“예. 일단은 자하신공의 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 보게.”

“우선, 정말로 뜬금없지만 전 천재라고 합니다.”

“하?”

화산오장로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쳤냐는 눈초리였다.

눈초리가 비난으로 물들기 전에 주서천이 다음 말을 이었다.

“저에 대한 세간의 평가입니다.

그평이 얼마나 허황됐냐면, 제가 태어날 때부터 천골지체였다거나 혹은 영약을 밥 먹듯이 먹었으며 이십사수매화검법조차 일주일 만에 대성했다고 합니다.”

전부 틀린 말은 아니다.

전생이란 비밀이 숨겨져 있지만 따지고 보면 몇 개는 맞다.

“그래서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건가?”

명수악, 조무양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지금 장난이라도 치냐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딴 헛소문은 누가 믿는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제 무위 역시 상식적으로 불가능하죠. 억지를 좀 부리면 됩니다.”

약관에 천하백대고수 중에서도 최상위, 그것도 화경에서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경지에 있다.

그 외의 업적도 생각하면 정말 터무니없다.

반대로 천골지체라거나 여러 타당한 연유가 없다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뭐라 할 것이다.

“그러니, 자하신공의 십성 이상의 성취를 빨리 이룬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제 이름이 막 알려진 이후부터 배워서 열심히 수련해서 올렸다고 우기면 됩니다.”

“끙,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거 시원하게 말해봐라.”

단약사, 영진이 답답한 듯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전 장문인, 검선께서는 사실 우화등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

철혈매검, 심옥련이 무언가를 눈치챘다.

“과연, 무슨 의도인지 알겠다.”

팔짱을 끼고 침묵을 지키던 위지결이 나섰다.

“등선에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나 밖에 없는 제자가 어리고 부족하면 문제가 심각하지.그런 경우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다.”

“예. 자하신공을 사문의 누군가에게 전수해서 대신 가르칠 수 있도록 손을 쓰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장문인께서는 너를 따로불러 검을 가르쳐 주셨으니, 이상할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인 너라 해도 전부 맡기는 것은 좀 그러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의심을 받을 게야.”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자하신공을 전수받은 건 저 혼자만이 아니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게 무슨……?”

“화산오장로, 전부입니다.”

무림은 화산파의 행보에 집중했다.

역대 최전성기라 일컬어지는 화산파가 장문인을 잃고 어떻게 나올지를 궁금해했다.

얼마 뒤, 화산파에 대대적인 발표를한다.

“정휘련을 내세워?”

강호인들이 깜짝 놀랐다.

“아니, 뭐 정통성을 생각하면 그게 맞는데……”

정휘련이 다음 대 장문인이 되는건 정해져 있다.

일인전승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다.

“화산오장로가 장문인을 꼭두각시로 내세울 생각은 아닌가?”

그러나 정휘련은 장문인으로 내세워지기는 어리다.

어떤 이들은 섭정에서 흔히들 생겨나는 꼭두각시 지도자를 떠올렸다.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참고로 악소문을 내는 데는 암천회의 손길도 거쳤다.

‘앞으로의 길이 결코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천기는 주서천과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기로 마음먹었다.

손이 가는대로 온갖 수를 동원했다.

그러던 중 추가적인 소식이 강호를 강타한다.

“어째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구먼. 화산파가 아무 생각 없이 정휘련을 앞에 세운 게 아닐세.”

“그게 무슨 말인가?”

“듣자 하니 화산오장로를 비롯한 수뇌부가 어리고 성취도 부족한 장문인의 교육을 실시한다더군.”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일단 얼마 전에 혈마와 동귀어진한 검선에 대한 것부터 말해야 하는데……”

화산파의 사정.

검선이 사실은 등선을 앞두고 있었으며, 아직 어린 제자를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는 게 전해졌다.

자하신공을 정휘련 외에도 화산오장로와 다른 한 사람에게 전수한 것.

그 한 사람이란 건 주서천이었다.

“허, 전례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군.

우일문 진인은 생전에 제자를 너무 늦게 들였어.”

“한데, 화산오장로는 그렇다 쳐도 주서천에게 전수한 연유는 뭔가? 혹시……”

주서천은 화산오장로와 달리 젊다.

능력도 출중하며, 그 영향력도 단연 손에 꼽혔다.

혹시 제자의 자질에 만족하지 못한 우일문이 주서천에게 맡기려 했던 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이에 화산파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응했다.

“헛소문이오.

화산의 미래를 이끌 사람은 정휘련 장문인이외다.”

화산파는 괜한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못을 박았다.

무림, 특히나 정파는 공적인 말이 특히 중요했다.

대문파의 경우 명분이라는 것을 중시해, 직접 한 말은 주워담지 못한다.

주서천 역시 공적인 자리에 가끔씩 얼굴을 비치며 사람들에게 장문인이 될 생각이 없다는 걸 강조했다.

“그러면 주서천에게 자하신공이 전수된 이유가 뭐요?”

주서천은 정파의 영웅이지만, 정작 사문 내에선 어떠한 지위도 없다.

화산오장로야 수뇌부이니 자하신공을 전수받는 건 그렇다 쳐도 주서천은 달랐다.

그게 의문이었다.

“그건, 화산의 그 누구도 주서천의 천재성을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오. 화산오장로나 매화검수조차도 자하신공을 전수받아도 정휘련 장문인을 가르칠 정도는 되지 못하오.”

화산오장로는 구결을 전수받았으나, 정작 실제로 익히지는 못했다.

이미 연령이 연령인지라 배울 수 있는 시기는 한참 지났고, 자질 역시 맞았다면 장문인 후보가 됐으리라.

“사실 기회가 되면 밝힐 예정이었소.

원래는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정혈대전이 일어나버려 본의 아니게 숨기게 됐으니, 강호의 동도께서는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하오.”

똑똑한 사람들은 이 내막을 조금은 눈치챘다.

‘과연 정휘련이 자하신공의 성취를 이루려면, 주서천의 가르침이 필수다. 하나 장로도 아닌, 그것도 사대제자에게 신공을 주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니 화산오장로 전원에게 전달한 건가.’

정답에 걸맞긴 했다.

자하신공이 정휘련 외에 주서천에게만 전달된 것이라면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오장로도 알게 됐다.

다만 검선의 등선 탓에 신공을 전수한 건 달랐다.

우일문은 생전에 매화심공의 비밀과 더불어 주서천이 화경의 끝자락, 현경 직전에 있어 ‘자하’를 스스로 깨우친 것일지도 모른다면서 수뇌부를 납득시켰다.

다행히도 수뇌부는 나름대로 수긍했다.

상천십좌, 정말로 우화등선 근방의 성취를 이룬 절대고수가 그리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 덕에 전생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자하신공의 문제를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미스러운 말들이 튀어나왔으나, 화산파가 “번복한다면 봉문에 들겠다.” 라는 강수를 내걸자 잠잠해졌다.

그렇게, 정혈대전의 뒷정리와 더불어 화산파의 사정 등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부터 시작해 수많은 중소 문파가 변화를 겪느라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가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겨울이 온다.

눈이 한참 펑펑 내릴 무렵, 마지막 해가 내렸다.

주서천은 스물한 살이 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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