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튿날.
화인의원에서 의원들을 보내준 덕분일까, 부상자의 치료가 무사히 끝났다.
다만 그중에서도 위중한 이들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후, 난주는 쌓여진 시신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다시 급습해 온 혈교도와 싸우게 된다.
재정비나 치료는 무사히 끝났으나, 휴식을 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채 습격해와 정신없이 싸웠다.
확향산의 효력이 생각보다 강했다.
밤중에 공격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눈을 뜨고 밤을 지새우는 경우도있었다.
그렇게 약 사흘 밤낮을 고생하면서 싸운 끝에 최초이자 최후의 침공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혈교도의 백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고, 그 외에는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무림맹은 사망자 칠백여 명, 부상자 삼백여 명 정도의 피해를 끝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드디어, 끝났나.”
주서천이 막사 밖의 함성을 듣고 안도했다.
‘몸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다.’
사실, 피곤이나 부상은 이틀 전에 전부 나았다.
몸이 훨훨 날아갈 정도로 좋아졌다.
하지만 회복한 뒤에도 전장에 참여하진 않았다.
‘정말로 다 나은 것인지 모르니까.’
무수한 창검이 꼬챙이처럼 날아와 몸에 박혔다.
화타가 살아 돌아와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치명상이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무엇보다 현경에 오르면서 새로이 얻은 깨달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한동안은 운기조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심상구현, 회귀.’
새롭고 특별한 힘이었다.
일평생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한 건 없다.
전생이었다면 모를까 현생은 회귀가 아니었더라면 존재할 수 없다.
설사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심상을 정립하는 데 성공했다.
어떠한 삶을 살아온다 한들, 그 근원은 회귀에 있었다.
‘그 능력은, 회복하는 것, 돌아가는 것.’
얼핏 보면 환골탈태의 세 번째 효능인 완전 재생처럼 보이나, 전혀 다르다. 보다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부상을 입기 전으로 돌아간다.’
바로, 일종의 회귀.
육체의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었다.
사람의 의지만으로 법칙을 무시하다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말로 터무니없었다.
다만 능력이 능력인 만큼 제한이나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라왔다.
범위는 살이나 피, 뼈나 손상된 내장.
그것도 내 몸에서 한해서다.
‘그 외에는 불가능하다.’
흰골탈태의 완전 재생은 기존의 것을 부수고 새로이 만들어 재구성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회귀는 말 그대로 돌아가는 것 부상을 입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한정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야.
하루에 한 번 정도이고, 쓴 직후에는 체력과 기력의 소모가 극심하다.’
싸움이 끝나자마자 극심한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버티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아무리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해도, 전장 한가운데서 정신을 잃었으니 보통이 아니었다.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즉사하면 통하지 않는다.’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나 뇌가 파괴되는 건 불가능하다.
법칙을 무시하는 힘에도 원리가 있었다.
신체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니, 붙어 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머리가 돌아가면 몸이 없어 죽고, 신체가 돌아가면 머리가 없어 죽는다.
‘그리고…… 음, 좋아. 이건 나중에확인해 보자.’
중원 무림에 폭풍, 아니 혈풍이 불었다.
정혈대전의 시작부터 그 과정까지 전황 하나하나가 중원 곳곳에 퍼졌다.
혈교의 침공이 흔한 것은 아니니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전 무림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무림을 경악게 하는 소식이 강타했다.
“검선과 혈마가 죽어?”
“허! 동귀어진이라도 한 건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딜 가던 그 이야기뿐이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정사마를 막론하고 무인의 정점이었던 자들이 죽었다.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상천십좌, 아니 이젠 상천팔좌였다.
특히나 화산파의 경우 그 충격은 헤아릴 수 없었다.
놀란 걸 넘어 혼란에 잠겼다.
문파의 수장, 장문인이 전혀 예상치 못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화산파는 어떠한가?”
“어떻긴 어떻겠나. 청천벽력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난리일 걸세.”
“하기야, 검선이라면 역대 장문인 중에서도 손꼽히는 절대고수가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겠지.”
”쯧쯧쯧. 앞으로가 큰일이군그래. 장문제자인 정휘련은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아이가 아닌가.
스승 곁에서 한참 보고, 들으며 배워야 할때에……”
“그것도 화산의 장문인에게 일인전승 되는 자하신공은 스승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가?”
“그러게 말일세. 어쩌면, 최전성기인 화산파가 가까운 시일 내에 몰락할지도 모르겠어……”
현 무림에서 영향력이 큰 문파를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화산파를 말할 것이다.
우일문도 우일문이지만 향후에도 없을 고금 제일의 천재이자 영웅, 주서천을 배출한 덕이었다.
후기지수를 가뿐히 넘어 천하백대고수들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 데다가 협의로 민초들을 구하기도 했다.
자칫 잘못하면 장기화될 칠검전쟁을 하루 만에 정 리했고, 반야신공을소림사에 돌려줬으며 , 녹림도를 토벌해 적립십팔채의 약탈을 잠재웠다.
그 덕분에 화산파는 명예를 드높여 미래가 밝은 듯 싶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장문제자가 장문인으로서 자격을 갖추기도 전에, 장문인을 잃는 전무후무한 사태가 벌어졌다.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크다.’
주서천의 걱정도 짙어졌다.
‘역사가 뒤바뀌면서 무림의 미래도 불투명해지더니, 화산파라고 피할 수는 없구나. 정해졌다면, 정해진 미래인데…… 전보다 상황이 좋지 않다.’
전란의 시대, 전날 승리로 이끈 영웅이 이튿날 시체로 발견되는 일은 잦았다.
오십 년도 되지 않아 장문인이 전사하는 경우도 흔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사태는 화산파도 피할 수 없었으며 자하신공의 특성 탓에 구결을 전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장문제자가 스물이 되기도 전에 전대가 죽는 일은 없었다.
‘골치 아픈 일이 늘어났군.’
한편, 그 밖의 여러 소식도 넓게 퍼졌다.
“전에 월아천문주, 유효풍이 날뛰었던 건 미쳐서가 아니라, 당시에 활강시라서 그랬다고 하네.”
“그랬나? 뭐, 지금에 와서야 별 상관없는 일이지.
그것보다, 공동의 복마검이 죽었다던데……”
“오룡삼봉, 종남의 인룡 호덕창이 죽었네.
무림을 이끌어 갈 인재였는데, 참으로 안타까워.”
“아이고, 아이고! 왕구야! 무림맹무사가 됐다면서 기뻐하더니만, 죽어서 그게 다 뭔 소용이더냐!”
“난주의 백성들이 혈 향에 미칠 지경이라는데……”
전쟁이란 비극이며 파멸이다.
승자건 패자건 간에, 그 슬픔은 지워지지 않는다.
승자라 할지라도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면 기뻐할 수가 없다.
당사자에게 때로는 패전보다 최악이었다.
동원된 무림맹 소속 무사, 구파일방, 오대세가, 중소 문파 등에서 희생자가 나왔으니 마냥 기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아직,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아 참, 그래도 희소식이 없는 건 아닐세.”
“뭐가 있나?”
“화산파가 그래도 악운에는 강한 듯 허이.
검선과 혈마의 생사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솔직히, 그렇게까지 많이는 알고 있지 않네.
동귀어진을 했다는 정도……?”
“어허. 이 사람. 아무것도 모르고있구먼.
나도 들은 것이지만, 사실 최후에 혈마의 목숨을 끊은 것은 검선이 아니라 매화정검이라 하더군!”
“으응? 아니, 그게 뭔 소린가?”
당시 전장은 정신 차리기도 힘들 정도로 난장판이었으나 그래도 운명을 건 승부를 놓치진 않았다.
검선과 혈마가 격돌할 때마다 그 충격파는 주변에 있는 무인들이 싸움을 멈출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서 졸지에 내상을 입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그 생사결을 비교적 자세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주서천이 끼어든 것부터 시작해서 혈마가 죽었다가 되살아나, 우일문의 몸을 빼앗은 경위도 알려졌다.
“허허허, 예끼! 이 사람아! 사람이 어떻게 되살아나나?”
그러나 하나같이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구르면서 껄껄 웃으며, 너무 막나간 거 아니냐면서 조롱했다.
워낙 허황되어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고 무림인조차도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상천십좌, 상천십좌 하지만은 사람이 신도 아닌데 어찌 그리될 수 있겠는가.”
“무언가 잘못 본 것이 분명하네.”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사실 나도 그러네.
전장에 있었으니 피도 좀 흘리고, 지쳐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할 걸세. 아니면 무슨 진법이나 사술에 걸려서 헛것을 본 거겠지!”
“요컨대 혈마가 죽은 줄 알았지만, 살아 있었던 탓에 뒤를 당했단 것 아니겠나.”
“강호의 소문이란 건 으례 과장되는 법이라던데 그 말이 딱 맞구먼.”
“흠, 그렇다면…… 아! 드디어 어떻게 된 줄 알겠구먼.
매화정검은 장문인이 눈앞에서 살해당한 걸 보고 원수에게 덤벼들었고, 마침 혈마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으니 피하지 못하고 당한 거군그래!”
전황이 워낙 허황되게 느껴졌을 탓이었을까, 아무도 믿지 않다 보니 각자 그럴싸한 추측을 내놓았다.
그렇다 보니 주서천의 활약상이 줄어든 감이 있었다.
사람이란 직접 보지 않으면 잘 믿지 않는 의심의 동물이며, 또한 상식에서 인지할 수 없는 수준의 일이 벌어지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피하기 마련이다.
주서천 역시 이에 대한 소문을 듣긴 들었으나 굳이 이의를 제기하거나 혹은 진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이게 낫다.’
어차피 진실을 말해도 잘 믿지 않는다.
아무리 영웅이다 뭐다 추앙을 받는다 할지라도, 고작 약관에 상천십좌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승리하려면 심상구현의 단계, 즉 현경이자 절대고수의 경지라는 의미인데 그걸 누가 믿겠는가.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치명상이 아니지만 그래도 우일문 덕에 약화된 건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본신의 무위가 어떤 정도인지 천기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다.’
아무리 천기라고 해도 약관에 현경의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최악의 수까지 가정하에 머리를 쓰는 자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한편 , 안휘의 합비.
“신강 밖은 여전히 조용한가?”
“예. 개방도가 예의 주시하고 있으나, 딱히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습니다. 조용합니다.”
“흐으음, 설마하니 선발대가 본대였던 건가?”
옥문관을 순식간에 통과한 혈교의군세는 오천이었다.
명색이 중원 침공이니 선발대만으로 끝내지는 않았을 터.
그러나 잔당이 보이지 않으니 수상찍었다.
혹시라도 이쪽은 미끼고 다른 곳에서 침공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전역을 주시했지만 여전히 조용했다.
“조금만 더 신중하게 지켜보는 게좋겠습니다.”
규모가 규모인 만큼 섣부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난주의 전력을 복귀시키지않고 당분간 대기하여 주변을 경계하고 감시하도록 했다.
승리라면 승리인데, 상천십좌 우일문을 비롯해 여러 인재들을 제법 잃어 손실도 적잖게 있었다.
“경계령을 내리도록.”
회의 끝에 난주의 전력은 당분간 철수시키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동안 난주의 관리나 백성들의 반감을 사지 않도록 시신을 대신 치우는 등 정리를 맡아야 했다.
대기 명령이 떨어진 직후, 난주 지부는 대대적인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유족들에게 돌려보낸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등의 대문파는 본산이나 본가에서 직접 찾아왔고, 그 외에는 무림맹이 수행했다.
다만 숫자가 워낙 많아서 시간이 제법 걸리는 듯 싶었다.
“이럴 때야말로, 강시술이 필요한 것을……”
운학이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강시술이란 사실 주술이 아닌 도술에 속했다.
그 근원은 도교가 막 뿌리를 내릴 때까지 올라가는데, 원래는 이번처럼 전쟁터나 혹은 객지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고향으로 옮겨 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의도와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의도가 변질되고, 사자를 모욕한다거나 병기로 이용되어 여러 의견 충돌 끝에 사이한 주술로 분류됐다.
최종적으로는 마교와 혈교로 흘러들어가, 그 근본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도록 사라져 버렸다.
어쨌거나 난주의 대기령은 생각보다 제법 걸렸다.
너무 조용한 것이 이상해, 중원 밖에서 들려온 소문이나 정보를 알아보며 혈교의 움직임을 조사했다.
강시술의 실험체와 마공의 제물로 교도가 무분별하게 제물로 받쳐져 인구난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여름이 끝나고 가을에 막 들 무렵이었다.
정혈대전이 막을 내렸다.
퍼억!
내장이 뒤흔들리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천기는 입을 꾹 다문 채, 신음조차 흘리지 않고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움직이지 못했다.
몸이 뒤로 날아가려 하면 보이지 않는 힘이 가로막아 신체를 붙잡았다.
“천기여.”
“죽여 주시옵소서!”
천기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사죄했다.
그 목소리에는 공포 이상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동공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리고, 입가에선 피가 주르륵 흘렀다.
눈을 꽉 감고 있다.
“슬슬 이 몸은 의문이 드는구나. 혹시나, 천기 그대가 일부러 지고있는 것이 아닌지 말이다.”
“다, 당치도 않는 말이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까,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그저 덜덜 떨면서 부정할 뿐이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이리도 실패하느냐.
그대는 무림, 아니 천하의 둘도 없는 천재이지 않은가.”
암천회주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했다.
“그 능력이 어떤지는 이 몸이, 그리고 본 회가 알고 있다. 제갈세가 따위와 비교도 되지 않는 지략을 지녔으며, 오만에 빠져 실수하지 않는 겸손함과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세세함까지 지니고 있지 않느냐.”
천기는 그저 머리를 숙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태껏 그 무엇도 용납하지 않았던 암천의 두뇌가 이리도 지속된 실패를 겪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 떠올릴 수 있는 건 그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천기는 당장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했다.
머리카락은 산발이고, 이마는 찢어져 피가 흘러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체투지를 하듯 사죄를 올렸다.
“……후우.”
암천회주가 짜증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천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여태껏 천하를 손에 쥐고 있다 하며, 여유를 잃지 않던 암천회주에게서 부정의 감정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한 형벌을 받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다. 죽이지는 않으마. 그렇지 않아도 회에 인재가 부족한데 그대까지 죽는다면 어찌 되겠느냐.
네 부탁에 보고(寶庫)에서 흑관을 꺼내느라 조금 고생한 것을 떠올리면 괘씸하나, 그래도 검선이 죽어 화산파의 미래가 불투명해졌으니, 그걸 감안해 사면해 주마.”
원래의 예상대로라면 정혈대전이 장기화되었어야 한다.
최소 삼 년 이상은 지속됐어야 할 계획이었다.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어야 했고, 기나긴 전쟁으로 백성들의 인심을 잃게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조기에 끝났다.
불행 중 다행으로, 검선의 죽음으로 화산파가 위기에 빠졌고, 무림맹은 인재들을 잃어 타격을 입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이 실적도 없었다면 목숨은 부지하지 못했다.
‘주서천! 주서천!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새끼!’
천기가 머리를 숙인 채 분노로 들끓었다.
오해를 받을까 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지도 못했다.
속으로 어떻게든 삭혀 보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다.
그 훼방꾼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혈압이 올랐다.
그래서 듣지 않으려고 과한 수까지 동원했다.
혈교에 과한 힘을 내주고 싶진 않았지만, 확실히 끝내기 위해 흑관까지 꺼내 전달해 줬다.
심지어 전달하면서 경각심을 가지도록 주의를 주고 몇 차례나 강조까지 했다.
‘도대체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다고 이리도 훼방을 놓느냐는 말이냐!’
정혈대전은 전에 세운 계획과는 조금 달랐다.
이 중에서 삼 할이 주서천의 사살이었다.
너무 과한 반응이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간에 주서천 탓에 수틀린 일이 셀 수도 없이 많다.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오고, 짜증이 났으며 판단에 해를 끼쳤다.
그걸로 충분했다.
무엇보다 회에 대해서 적지 않게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척살해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죽이려고 온갖 수를 준비해 봤는데, 박살 났다.
죽이지 못했다. 실패했다.
“이 못나고 어리석은 자를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고,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를 올립니다.”
천기는 머리를 다시 바닥에 찧어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눈을 번뜩였다. 그 눈빛은 차갑게 불타올랐다.
“그래도, 득이 없지는 않습니다.
정혈대전의 소란을 틈타 천권성의 첩자들이 늘어났으며 특히 천추는 행동 반경과 권한이 늘어나 정보의 질 역시 보다 좋아졌습니다.”
비록 최근에는 잇단 실패를 겪은 천기이지만 그 실력은 진짜배기다.
정혈대전처럼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 실패했으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최대한 이득을 취하려 한다.
준비한 수가 뒤틀리거나 망가져도, 필사적으로 다른 수를 떠올려서 실패를 어떻게든 메우려 한다.
그게 또 그저 어떻게든 유야무야 넘어가려는 수작이 아니라는 점이 더 대단했다.
“절 믿어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증오와 분노를 믿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