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五章 (138/254)

현경의 필수 조건.

심상구현을 성공하면 각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서 ‘무언가’를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장문인, 검선 우일문 진인은 ‘검’이다.

검을 제 손처럼 조종해 검법을 펼치며, 힘의 소비도 적다.

허공섭물같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사도천주의 경우에는 아직 확신하진 못하지만, ‘영역 지배’일 확률이 높다.

패도제공 덕이기도 하나, 그 정도 되는 위력이라면 분명 심상구현이리라.

아니, 어쩌면 패도제공의 대성 조건 자체가 심상구현일지도 모른다.

남궁위무도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전에 가르침으로 느낀 바에 의하면, ‘창궁’이 아닐까 추측됐다.

마지막으로 혈마의 경우에는 스스로도 말했듯이 ‘기혈’이었다.

정확히는 피(血)에 가까웠다.

육신을 갈아탄 그 비밀 역시 심상구현에 대해 깨닫자 자연히 알게 됐다.

“흑관으로 사람의 의지를 쫓아내고, 그 대신 본체를 집어넣어 그 육신을 빼앗아 움직이는 것. 그게 불사의 비밀이 아닌가?”

아무래도 기혈을 조금 나눠, 흑관 내부에 숨겨 두었을 확률이 높았다.

애초에 몸이 둘이었으니, 사람의 형체가 죽는다 할지라도 혹관 내부의 또 다른 몸을 이용해 적을 죽이고 그 몸을 차지하면 그만이다.

우일문 역시 마찬가지.

피를 손의 형태로 만들어 두고, 가슴을 꿰뚫어 흑관 내로 데려와 잡아먹는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 같으나, 신묘한 주술과 더불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지로 법칙을 만들어내는 심상구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일이다.

“그래서 다신 도망칠 수 없도록, 단전을 막았다.

그 뒤의 흑관까지 뚫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검이 등 뒤를 뚫었지만, 등에 매달린 흑관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진나라 시절에 만들어져 사용된 법보인 만큼, 그 내구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재질이 만년한철이 아닐까 싶었다.

“크, 큭……”

혈마의 입가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알 것 같구나.”

하복부에 검이 꽂혀 있는데도 혈마는 잘만 말했다.

“그들이 왜, 나에게 과한 힘을 쥐여 주면서까지 그대를 죽이려 했는지를…… 말이다.”

확실히 고작 스무 살 무렵에 천하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것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계에 차질이 생길 정도로 힘의 균형을 깨트리면서까지 집착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천기의 불안을, 집착을, 경고를 전부 이해하고 동감했다.

“무림을 손바닥 위에 올려 뒀다고?”

혈마가 들끓는 목소리로 비웃듯이 외쳤다.

“카하하하하!”

아까 전의 보였던 광소.

그 웃음과 표정은 보는 사람이 기가 다 질릴정도로 섬뜩했다.

주서천 뒤로 있는 무림맹의 주요 인사들은 솜털이 쭈뼛 서고, 등골이 오싹한 기분을 맛보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분명, 눈앞의 위험은 끝난 것이 맞다.

아무리 상천십좌라 할지라도, 정확히 단전에 검이 꽂힌 이상 사는 건 물론이고 거동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웃음에 압도되어, 공포에라도 사로잡힌 것처럼 몸이 꼼짝도 하지 못했다.

회광반조.

죽기 직전에 잠깐 기운을 돌이킨다고 하지 않았나.

딱 그말이 맞는 모습이었다.

불길하게 일렁이던 안광은 보다 더붉게, 섬뜩하게 뿜어지면서 뜨거운 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정파의 영웅이여, 그대는 그야말로 괴물이구나!”

혈마가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재능이나 노력 여부가 아닌, 연륜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경지를 아무렇지 않게 올랐다.

깨우침이 깊다 할지라도 고작 약관에 인생을 전부 살았다는 듯이 일생을 정립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확실히 그 말이 맞다. 틀린 말은아니다.

그러나 그의 연령은 실제와 다르다.

회귀라는 수수께끼의 이상 현상을 경험했으니.

하지만 그런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대는 중원에, 무림에, 천하에! 무엇을 나타낼 것인가! 어떤 것을 보여줄 것인가!”

혈마는 패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죽어 가는 것에 의의를 두지 않았다.

그저, 아까처럼 생각을 그대로 말로 전달했다.

“혈마.”

주서천 역시, 담담하게 질문에 답한다.

“현경이란 게, 답습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이 발견하고 만들어내며 일생이 녹아 그 개념을 자기만의 것으로 바꿔 승화시키는 것이라 했나?”

그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 말에 대부분 긍정해. 하지만, 틀린 것이 있다.”

주서천이 혈마에게만 들릴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답습 또한 그 범주에 들어가네.”

혈마의 안광에서 의문이 떠올랐다.

“아쉽게도, 이 늙은이는 칭송받을만큼의 천재성은 가지지 못했네. 그저, 예로부터 가르치던 대로 따라가며 배웠을 뿐일세. 영웅의 등 뒤를 바라보며 그 뒤를 쫓아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왔네.

난 괴물이 아닐세, 혈마.”

“그대는……”

죽음이 다가온 것일까, 헛것이 보였다.

눈앞에는 청년이 아닌 쇠약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것도, 이제 막 화경에 막 오른 범재였다.

“그동안 답습한 것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 역시 없었을 걸세. 정말로 심상구현에 일생이 필요하다면, 답습이란 것을 빼놓을 수 없지. 안그런가?”

노인은 조금 기쁜 듯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사문의 문하에 있는 제자들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지식을 배우고, 스승의 지혜를 참조하는 법일세. 또한 무림인들은 영웅을 동경하고, 의지하며, 때로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나 역시 그러하네.

그게 평범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매화의 잎이 너풀거리며 떨어졌다.

“이 소인이 무의의 끝자락에서 본 것, 그리고 새로운 단계에서 재차 확인한 것은 ‘답습’과……”

다시 매화 잎이 노인의 얼굴을 가리며 지나가자 여태까지 대면했던 청년이 드러났다.

“조금 특별한 것이 있다면, 돌아가는 것[回歸].”

주서천이 경의를 표하며, 눈인사를 보냈다.

“잘 가라, 혈마. 상천십좌와의 대결을 잊지 못할 거다.”

그 눈인사에 혈마의 안광은 멍한 듯이 껌뻑이다가 이윽고 점차 옅어지면서 평온에 잠기듯 침묵했다.

주서천은 생명의 불꽃이 꺼진 혈마의 가슴 위에 발을 올려 두곤, 밀어내면서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상천십좌가 둘이나 거친 그 육신은 수분이 전부 빨린 것처럼 미라처럼 변했다가 잘게 부서졌다.

“후우……”

한시름 놓은 듯 한숨을 내쉬는 주서천. 

그리고 전장의 침묵을 깨우듯, 흑관을 머리 높이 들었다.

“들어라! 무림인들이여!”

주서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한 단계 위의 경지에 오르면서 내공의 응용법도 늘어난 것인지, 그렇게 크지도 않은데 전원에게 들렸다.

“혈교의 극악무도한 사교주, 상천십좌 혈마는 검선 우일문 진인과 나 매화정검 주서천의 손에 죽었다! 이 흑관과! 부서진 사음장이 그 증거다!”

주서천이 보라는 듯이 허공섭물로 사음장의 잔해를 끌어 올려 허공에 조합해 만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대충 조각을 붙인 것이지 복구한 게 아니었다.

“정말인가……?”

“혈마가 주서천 대협께 당했다고?”

승전의 소식에 도리어 무림맹 측이 어안이 벙벙한 반응을 보였다.

낯빛에는 의구심이 묻어났다.

워낙 거물이다 보니 그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말이다!”

눈치 빠른 운학이 확증하듯 외쳤다.

“혈마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혈교의 대마두는 죽었다!”

일지광도 옆에서 도왔다.

운 좋게 살아남아 혈마와 주서천의 혈전을 목격했던 정파인들도 하나둘 입을 열어 증언해 줬다.

그래도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다시 한번 외치려던 순간 천지가 뒤흔들리는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아아!”

그 함성은 땅에서 솟구쳐 , 하늘을 찔렀다.

고수들도 몸을 움찔 떨며 깜짝 놀랄 정도의 크기였다.

정파인들은 다 이겼다는 듯이 서로를 얼싸안고 환희의 감정을 내보였다.

“천륜을 저버리고, 사이한 종교에 빠져 중원을 어지럽히는, 마성에 미쳐 버린 사교도여!”

제갈수란도 목소리를 높이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엔 부채가 잡혀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무림의 협의가 그대들에게……”

“하? 뭐라는 거야!”

혈교의 군세 중, 마두가 제갈수란의 말을 막았다.

“혈조귀.”

학송이 얼굴을 굳혔다.

“이 말코 도사 새끼, 싸우던 와중에 도망치더니만 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게냐!”

“혈조귀, 얌전히 손을 거두고 무릎을 꿇어라. 적어도 고통 없이 죽여주마.”

“헛소리!”

“혈교주는 죽었다!”

”캬하하하! 누가 말코 도사 아니랄까 봐 별 병신 같은 말만 지껄이는구나.”

혈조귀가 머리를 뒤로 젖히며 광소를 터뜨렸다.

“혈교주가 죽건 말건, 그게 뭔 상관이냐?

나에게 그딴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다!”

파스슷.

손가락 끝에 핏빛이 맺혔다가 굳었다.

조강이다.

”캬르르륵!”

적들의 반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혈마의 사망 직후, 강시들이 잠시 거동을 멈춘 듯 싶었으나 이윽고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는 혈마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난폭해졌다.

“하하핫!”

“죽어라, 죽어라!”

그 외의 혈교도 역시 눈이 회까닥 돌아 주변을 마구 공격했다. 심지어 그중에는 아군까지 껴 있었다.

“어? 팔, 내 팔이 어디 있지?”

“머저리! 네놈 팔은 방금 저 강시가 먹었잖아!”

“그런가? 으히히!”

전란에 다시 폭풍이 몰아쳤다.

그것도 끝까지 치달아 광기로 가득한 바람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술사인 혈마가 죽었으니, 강시도 멈춰야 하는 게 아닌가?”

일지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그 반대일세.”

학송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강시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파괴하지 않으면 멈추지않네. 특히나 조정을 맡던 술사가 죽었으니, 더더욱 날뛸 것이야.”

“전부 없애면 그만입니다.”

홍고가 나서서 말했다.

“……제갈, 소저.”

“주 공자?”

제갈수란이 놀랐다.

주서천의 목소리가 병자처럼 쇠약하게 갈라져 있었던 탓이었다.

자세히 보니 낯빛도 별로 좋지 못했다.

정말 병자처럼 창백했다.

“아군의 전력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천이 조금 넘어요. 이미 반이 당했어요.

그것보다, 괜찮으신가요?”

“솔직히, 그다지 괜찮지 않습니다.”

그 혈마와 정면 대결을 했다.

무언가의 기적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멀쩡할 리가 없다.

“적의 숫자는 얼마나 됩니까?”

“대충 가늠해 보면 사천 정도……”

“믿을 수 없습니다. 저희가 천 밖에 해치우지 못했다는 겁니까?”

홍고가 미간을 찌푸리며 따지듯이 물었다.

혈교의 군세가 대단하긴 했지만, 무림맹 역시 약하진 않았다.

어떻게든 처절하게 싸워 가며 적을 죽였다.

특히나 혈교도는 무작정 돌격하는자들이 많아 해치우는 데 쉬운 편이었다.

“사음장입니다. 혈마는 저와 싸우는 와중에도 사자들을 계속해서 살렸습니다. 죽은 만큼, 강시로 되살아난 자들도 많습니다.”

주변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혈마는 정말 토가 나오도록 강했다.

특히나 그 주술은 자연재해였다.

“교주인 혈마가 죽었지만, 적들의 사기는 내려가기는커녕 더더욱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아군의 사기 역시 올라갔지만 많이들 지쳐 있습니다. 전략상 후퇴해야 합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보다, 말을 아끼도록 하세요. 낯빛이 많이 안 좋아요.”

제갈수란이 주서천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말했다.

‘끄응. 눈이 점점 감기는군. 적의마두들도 아직 건재하다. 이대로 가다간 후퇴도 실패하지 몰라.’

시야가 흐릿해지자 걱정과 불안이 솟았다.

‘무언가 좋은 수가 없을……’

“사형!”

그때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고개를 획 돌리니 언덕 너머에 무림맹에 소속된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주서천의 시선을 끄는 것은, 화산오장로 매화검장과 낙소월을 포함한 매화검수였다.

“위지결 ! 매화검장 위지결인가!”

운학이 위지결의 얼굴을 알아보고 외쳤다.

“매화검수!”

정파인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화산의 최정예, 매화검수의 수장이 강호에 나오게 되면 그 밑의 검수들 또한 따라온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다.

무림 역사에 따르면 최소 열 명은 붙고는 했다.

“지원이다! 지원이 왔다!”

무림맹 무사가 언덕 위를 보고 환호를 내질렀다.

매화검수만이 아니었다.

그 뒤로 무림맹 깃발이 한둘씩 추가되면서 여러 무리들이 나타났다.

일반적인 무사에서부터 도사나 승려, 그리고 개방의 거지들까지 보였다.

“아군을 도와 적을 무찔러라!”

위지결의 명령이 떨어졌다.

”와아!”

일천에 이르는 무인들은 목청껏 함성을 내지르곤, 언덕 아래로 달려가 전장에 참전했다.

“사형, 괜찮으세요?”

그사이 낙소월도 내려와 안부를 물어봤다.

“조금 피곤한 것 빼고.”

주서천이 반가운 얼굴을 보자 농을 던졌다.

“늦어서 죄송해요.

원래라면 장문인께서 출발할 때 함께했어야 했는데, 연락이 잘 닿지 않아서 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폐관 수련 중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후발대가 출발할 무렵, 화산파에선 매화검수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정예의 차출을 위해선 그 책임자인 검장의 승낙이 필요했고, 하필이면 위지결이 예검수들을 비롯해 매화검수를 이끌고 폐관 수련에 들어간지라 연락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우일문은 고민한 끝에 정혈대전에 관한 설명을 대충 남겨 놓고, 화산을 떠났다.

그 후 어찌어찌 긴급 연락 체계를 통해 밖으로 나온 위지결은 매화검수를 이끌고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아, 그리고 난주로 오는 도중 무림맹에서 추가적으로 소집한 무인들과 만나 합류했어요.

여기, 합비에서 전달하라는 서신이에요.”

제갈수란은 낙소월에게 서신을 건네받아 읽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추가 지원을 보낸다.

부군사, 제갈상……”

‘과연, 천군사!’

주서천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매화검수와 합류시킨 것도 모자라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하게 조정했다.

괜히 하늘이 내린 군사가 아니다.

“그러면 제갈 소저 , 앞으로의 일은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와 드리고 싶지만, 조금 피곤해서……”

눈꺼풀이 무거웠다. 쉬고 싶었다.

“맡기세요.”

제갈수란의 침착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퇴각을 정정합니다.”

추가 지원 병력은 천여 명 정도였다.

본대와 합류하면 삼천이 조금넘는 숫자다.

혈교의 군세는 아직 사천이나 남았으나 그렇다고 불리한 건 아니었다.

피에 이성을 놓은 광인들 밖에 없으며, 그중 사 할 정도는 몸도 약하고 이지를 상실한 강시다.

“반격하죠.”

“기다리던 바다.”

일지광이 복수로 들끓는 목소리를 냈다.

비록 혈마는 죽고 없지만, 그 대신 혈교도의 목숨을 취해 사형제의 넋을 달랠 생각이었다.

“크아아악!”

“아악!”

삼천과 사천의 군세가 격돌했다.

 초기에는 혈교가 맹렬한 공세를 퍼부어서 밀어붙이는 듯 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해가 질 무렵쯤 되자 혈교의 군세는 점차 줄어들어 무림맹보다 수적으로 밀리게 됐다.

사음장을 이용해 그 자리에서 바로 부활한 대신, 그만큼 단단하지 못한 강시들이 추풍낙엽처럼 먼저 나가떨어졌다.

뒤늦게 강시술사 몇몇들이 조종하려고 애썼으나 숫자가 많아 문제였고, 또 원래 다루던 강시만으로도 힘이 벅찼다.

새삼스레 혈마가 얼마나 괴물같이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심상구현의 단계에 오른 무인이며, 동시에 최고의 주술사이자 강시술사였으니 말이다.

여하튼, 눈앞에 보이던 강시가 천을 넘어 추가적으로 오백 정도가 사라질 때쯤 혈교도 정신을 차렸다.

“커헉! 제, 제기랄!”

“지옥으로 돌아가라, 혈조귀.”

천하백대고수, 마두 혈조귀가 무당이절 운학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땅 밑으로 꺼져라!”

”캬악!”

언마대도 대부분이 괴멸했다.

일지광이 이끄는 공동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그 밖에도 혈교도 대부분이 죽었다.

사천이었던 숫자가 반이나 줄어 이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퇴각하라!”

“제기랄!”

피가 차가워졌다.

마성이 잠시 잠들 정도로 상황의 심각함을 느꼈다.

혈교에 비해 무림맹의 전력은 비교적 멀쩡했다.

사망자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기껏 해 봤자 오백 정도.

거의 반절을 잃은 혈교에 비해 극히 적었다.

끝내 혈교가 끊어진 정신줄을 잡고 퇴각했다.

“따라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추격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각자 다른 곳에서 제갈삭과 제갈수란이 말했다.

“어째서요?”

“정파의 협객분들께서 대단한 건 알고 있으나, 다들 지쳐 있으니 무리해서는 아니 되오.

게다가 날도 어두워지고 있고, 사막의 밤은 몹시 춥다고 하니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버티지 못할 거요.”

“끄응.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아도 않았으니 지원대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나?”

“아니요. 전장의 열기 탓에 잊고 있지만 그분들도 난주까지 꾸준히달려오느라 제법 지쳐 있을 거예요.

또한, 환경 변화라는 건 생각보다 중요해요.”

난주는 사막 도시다.

모래가 앞을 가로막지는 않지만, 사막이다 보니 낮에는 미치도록 뜨겁고 밤에는 춥다.

보통 때보다 체력의 소비가 심하니 주의해야 했다.

결국 군사진의 의견에 뭐라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면서 수긍했다.

“그들이 도망칠 염려를 하시는 것이라면 걱정 마세요.

방책을 준비했으니까요.”

“방책?”

“……마침, 바람도 북서 방향이네요.”

난주에서 바람이 북서로 불면 옥문관 쪽.

그러니까, 혈교가 퇴각한 방향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곧바로 자세한 설명을 듣고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당가에서 조달한 확향산(摘香産)이라는 건데, 특정한 향을 퍼뜨릴 수 있는 도구에요.”

제갈수란이 확향산이 들어간 병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핏방울을 넣어서 섞이기 쉽게 흔들었다.

그리고 북서 방향으로 뚜껑을 열자, 피 특유의 비릿한 향이 넓게 퍼지면서 바람에 날아갔다.

“이대로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올 거예요.

저희는 그동안 부상자를 치료하고 재정비를 하죠.”

피를 보는 것 외에도 냄새만 맡아도 흥분하는 혈교도의 습성을 잘 이용한 전략이었다.

물론 한두 방울로는 부족하겠지만, 워낙 흐른 피가 많다 보니 충분히 통할 만한 방법이었다.

“허어 , 그게…… 정말이오……?”

한편, 재정비를 위해 모인 무림맹 수뇌부는 전황에 대해서 전해 들으면서 큰 충격에 잠긴다.

그중에서도 화산파의 매화검장, 위지결의 충격이 특히 컸다.

“장문인께서……”

설마 했던…… 검선, 우일문의 죽움.

그것도 천명이 다해 우화등선에 든 것이 아니라, 혈마에게 끝을 맞이한 것이기에 충격이 더 컸다.

원수인 혈마가 죽은 것을 먼저 듣지 않았더라면, 복수하겠다며 눈을 붉혔으리라.

“서천이는 어떻게 됐소?”

“조금 지쳐 있긴 하나, 멀쩡하답니다. 걱정마십시오.”

정혈대전의 큰 공로자인 만큼 대우도 극진했다.

더불어 화인의원에서 보내온 의원들 중 셋이나 주서천에게 붙어 진료했는데, 도중에 잠에서 깬 주서천이 괜찮다면서 의원들을 쫓아내듯 내보냈다 한다.

“매화정검이 정말로 큰일을 해 주었네.”

운학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동감일세.”

일지광도 동의했다.

“목숨 걸고 혈마를 끌어낸 별동대도 대단하나, 그래도 그가 없었다면 이기지 못했을 걸세.”

“……그건 좀 과장이 아닌지요.”

여태껏 입을 가만히 닫고 있던 항산파의 수경이 불만인 듯 중얼거렸다.

“외람되오나, 그 자리엔 정파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분들께서 계시지않았습니까. 굳이 그가 아니었더라도, 혈마의 목숨을 충분히 취할 수있었을 겁니다. 또한, 당시 혈마는 검선께 부상을 입어……”

“그건 아니오.”

운학이 정색하며 수경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만약, 그 자리에 계셨다면 그 말이 나오지 않았을 거요. 혈마를 본 순간, 왜 그가 상천십좌 중 일좌에 있는지 몸으로 느끼게 됐소.”

황급히 달려와 도움을 요청한 제갈수란을 따라 혈마 앞에 선 순간, 온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싸워 보려 했으나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주서천이 기적적으로 일어나서 우일문의 복수를 하듯 혈마의 목숨을 끊었다.

“……”

수경은 운학이 꾸짖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상했으나, 별다른 이견을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주서천이 마음에 들지는 않긴 하지만, 그래도 그 활약을 모르는 것이 아닌지라 가만히 있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소.

오늘밤의 경계는 맡기고 이만 쉬도록 하시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피곤한 얼굴이었다.

하루 종일 전장에 있었으니, 지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최후에 온 지원 병력이 불침번과 경계를 서기로 했고, 그 책임자는 위지결이 맡았다.

사실 좀 더 물어볼 것이나 할 이야기는 많았다.

검선과 혈마의 대결의 좀 더 자세한 경위와 피로 된 창검에 맞고도 멀쩡했던 주서천이 대표적이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시간도 늦고, 낮아진 기온에 맞춰 바람도 불기 시작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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