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章 (137/254)

“독?”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낯익은 감각 혈마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의한 틈. 그 순간을 노렸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적의 숨통을 끊는 비장의 수!

‘만중검!’

검을 내빼자, 오른팔이 뒤로 돌아갔다.

왼발을 내디디니 체중이 앞으로 쏠렸다.

주먹도 회수했다.

신행백변의 신속한 전환이 이루어졌다.

자세도 자세지만, 운기 역시 변했다.

콰득!

내디딘 지면에 금이 갔다.

짓눌러진 무게에 지반이 움푹 가라앉았다.

“후웁!”

지금까지의 당한 것을 분풀이하듯 힘을 쏟았다.

‘장문인……!’

일순간, 어릴 적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전생의 기억에선 별로 꺼낼 것이 없었다.

철이 들 무렵에, 정휘련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고 등선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물론, 친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연화각의 일로 종종 엮이긴 했지만, 먼발치였다.

직접 만난 경우는 드물었다.

이렇다 할 대화를 시작한 것도 좀 더 나이를 먹은 뒤였다.

그 외의 교류도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존경했다.

후대의 활약이 워낙 대단해 묻힌 겸이 있었지만, 시대를 풍미한 노고수였다.

무인으로서, 검수로서 정점에 올랐던 사람이고 사문의 존장이며 장문인이다.

경외심을 담아 바라봤다.

편히!

장문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죽음이 충격적이었을지언정 이성을 잃을 정도의 분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건 아니다.

그저, 안타까웠고……

조금, 슬펐다.

“쉬십시오!”

검이 아닌 철퇴를 휘두르듯, 태아를 높이 들었다.

내려오는 순간에 맞춰 회수한 왼손까지 동원해 검파(劍肥: 칼자루)를 양손으로 쥐었다.

‘끝이다!’

오므라진 근육이 활짝 펴졌다.

날개뼈도 그에 맞춰 움직였다.

무게가 앞으로 쏠려 등이 굽어졌다.

대량의 공력이 고속으로 전해지자 기맥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아픔이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쐐애애애애애액!

일성, 이성, 삼성, 사성, 오성!

배로 불어난 무게의 검이었다.

인생과 고뇌처럼 무거웠다.

내공이 용솟음쳐 모였다가 폭발했다.

등 뒤에서부터 그려지는 곡선.

옆에선 곡선이지만, 앞에선 직선이었다.

자색 검광이 시야를 뒤덮었다.

서걱!

온갖 힘이 소용돌이치는 그 검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나누듯, 앞을 둘로 가르며 어깨에 파고들었다.

‘젠장!’

주서천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원래라면 머리를 쪼개야 했을 검이, 혈마가 몸을 틀어 안타깝게도 어깻죽지를 자르고 골반에서 그쳤다.

‘그래도!’

이 정도면 치명상이다.

절반이 덜되는 부위가 잘렸다.

약간의 희망을 품어 보았다.

크하하하!

그러나 희망은 절망이 되고, 기대는 부서졌다.

혈마가 광소를 터뜨리면서 발길질을 했다.

퍼억!

“컥!”

주서천이 숨을 멈추면서 뒤로 날아갔다.

근접해 있었고, 동작이 커서 틈이 생겨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네가 날 흥분시키는구나!”

즐거움이 깃든 그 목소리에선 광기가 느껴졌다.

탈마에 오른다고 마성이 사라지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 본성은 난폭하고, 또 사악하다.

어디까지나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지, 선해지는 게 아니었다.

“크카카캇!”

혈마가 웃었다.

몸의 일부분이 떨어졌는데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쿨럭!”

땅바닥에 부딪혀 몇 번이나 튕긴 뒤, 처박힌 주서천이 일어나면서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좋아, 이 몸을 여기까지 몰아붙인 것은 칭찬해 주마.

진심이다. 그 경의를 표해 좋은 걸 알려 주마.”

안광이 옆으로 슥 돌아갔다.

잘린 어깻죽지를 향했다.

끝까지 잘려 나가지 않았는데 잘보니 잘린 부위에서 흘러나온 혈류가 연결된 끈처럼 잇고 있었다.

기이한 건, 그 혈류란 것이 공중에 넘실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학의 극의라 일컬어지는 화경이란 건, 결국 보고, 듣고, 배우고, 답습한 것을 잊지 않고 전부 끌어올린 것에 불과하다.”

혈마가 느긋한 발걸음으로 주서천에게 다가갔다.

“기존에 있는 것을 남들보다 조금 더 알고 있는 것만으로 극의다 뭐니 칭하다니…… 하하하!”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러하다면 그 위는 무엇인가? 답습한 것을 넘어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만들어 내는 것. 혹은, 일생의 관념이 녹아들어, 그 개념을 자기만의 것으로 바꾸고, 승화하여 물질적으로 구현하는 것!”

어깨에서 흐르는 피가 일렁이더니, 스멀스멀 피어오르면서 사람의 얼굴처럼 변해 갔다.

“……!”

주서천이 전율에 찬 듯 몸을 떨었다.

남궁위무와 우일문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각자 다른 말이, 혈마의 외침에 겹쳐졌다.

“그 사람의 일생을 증명하는 근본이며, 나타내는 경지란 것의 정체는 심상구현(心狀具現)이다!”

콰드드드드득!

어깻죽지에서 핏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덜렁거리던 어깨까지 원래의 위치를 잡았다.

이상 현상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몸집을 불리듯 핏줄기가 늘어나면서 사람의 형상은 악귀나찰처럼 일그러졌다.

그 광경은 마치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인간의 영역을 가볍게 뛰어넘는 힘이었다.

“보아라! 이것이 이 혈마의 심상이로다! 중원이여, 무림이여, 천하여! 사람이 피로 되어 있는 이상, 그 사람 속에서 이 나는 끝없이 살아 있으리라!”

혈교의 근원은 변질되었으나, 결국은 피이다.

마공 역시 대부분 그렇고, 기혈마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다다른 것은 그 근원이며, 시초였다.

끝내 그 일생이 피와 일체해 구현하는 데 이르렀다.

”캬하하하핫!”

푸화아악!

우일문의 육신이 터졌다.

그 눈과 코,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더니 온몸에서 솟구쳐 뿜어졌다.

그 핏줄기는 검이나 창의 형태로 변하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뛰쳐나가 주서천을 덮쳤다.

푹! 푹푹푹!

피로 된 창검이 몸에 구멍을 냈다.

팔과 다리 , 복부. 온몸 곳곳을 난도질했다.

그래도 마지막 자비를 베푼 것인지는 몰라도 머리만은 노리지 않았다. 그 대신 온몸에 창검이 꽂혔다.

“안 돼!”

누군가가 절규로 뒤섞인 비명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소리도 무색하게, 뒤에서 추가적으로 뛰쳐나온 창검들이 살을 꿰뚫고 바닥에 꽂혔다.

아까 전에 열 자루의 검에 꽂힌 혈마와 다르게, 이번에는 주서천의 몸이 병장기들로 가득했다.

“허어!”

아연실색한 제갈수란을 앞에 두고, 속속히 도착한 무림맹의 주요 전력들이 탄식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너무 늦은 건가!”

운학이 안타까운 듯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보다 저 얼굴은……!”

지 일광이 혈마의 육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면서 사정은 들었지만, 설마 정말일지는 몰랐다.

“……아, 이런 나도 모르게 즐거워져 격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었구나.”

악귀 나찰의 형상이 점차 줄어들더니만, 안개처럼 흩어졌다.

주서천의 육신을 난도질하고 목숨을 끊어낸 피로 된 창검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허어, 아쉬운 것. 아직 물을 것도 많았고, 정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헤치지도 못했거늘……”

혈마는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새로이 나타난 정파인들에게 시선이 향했다.

운학과 일지광, 홍고와 홍진이 몸을 움찔 떨었다.

방금 전에 보여준 그 힘이 너무나 압도적이었는지라, 도저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침을 꿀꺽 삼키며 어찌할지 말을 꺼내려는 순간, 혈마조차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가, 없군.”

좌중이 숨을 삼켰다.

“……?”

혈마의 고개가 느릿하게, 아주 천천히 돌아갔다.

“무림맹주님이나 장문인의 가르침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는데, 정작 정신 나간 대마두가 한 말에 모든 걸 깨우치다니…… 참 나, 웃음도 안 나오네……”

그곳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분명 그 몸에는 무수한 구멍이 남겨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전부 매워져 있었다.

핏자국이나 옷에 난 구멍을 보면, 분명 몸이 뚫렸던 것이 맞다.

하나 결정적인 흔적이 없다.

애초에 뚫리지 않았던 것처럼 어떠한 상처 하나 없었다.

“……?”

섬뜩할 정도로 시뻘건 안광에 떠오른 것은 의문.

그리고 그 의문을 표현하기도 전에, 주서천이 흐릿해졌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속도는 명확하게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 혈마조차 겨우 잡을 정도로 빨랐다.

“허?”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목소리.

“이.”

휘리릭!

주서천이 오른팔을 머리 위로 들며, 손에 쥔 검을 위로 던졌다.

“악물어라.”

부웅!

반격의 서막을 알리는 주먹이, 묵직한 파공음을 내면서 혈마의 얼굴 정중앙에 힘껏 꽂혔다.

광기로 뒤섞인 웃음, 시야가 붉게 물드는 것을 인식했을 때는 몸에 창검이 꽂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겪기도 전에 남궁위무와 우일문, 혈마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네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나 외의 상천십좌에게 물어봐도 답은 같을 게야.”

“사람이란 것이 본디 다를진대, 어찌 그 깨우침이 같겠느냐.”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자신(自身)이 되겠구나.

또한, 과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되 그걸 전부 놓지 않도록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걸 잃게 될 것이야. 너와 난 적어도 승려는 아니니 말이다.”

“자존(自尊)일 수도 있고, 자존(自存)일 수도 있느니라. 무엇이든 정말로 중요한 건 자신(自信)이다.”

“화경이란 게 무인이 쌓아 올린 무학(武學)의 극의라면, 현경이란 미지의 영역을 향한 도약이자 모험이며, 동시에 창조이니라.”

“네가 어떤 존재인지 천하에 자랑하고, 알리고, 빛내 보거라. 하나 그렇다고 거기에 고집했다간 영영 알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것조차 집착하게 된다면 역시 답을 구하진 못할 것이니.”

상천십좌 중 세 명이 각기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남궁위무는 화경의 다음 단계, 현경에 필요한 심상구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둘러서 말했다.

또한 혹시라도 다음 경지에 크게 집착하면 마음에 문제가 될 것 같아 경고도 해 두었다.

‘과한 집착이나 욕심을 버리되, 전부 놓지 말라는 것은 곧 지금까지 쌓아온 나 자신과 일생이 녹아들어 구체화하려는 심상이 도로 아미타불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였다.’

우일문 역시 남궁위무처럼 혹시라도 주서천의 고유 관념, 유일무이한 심상에 훼방을 놓을까 봐 일부러 뜬구름 잡듯 돌려 말했다.

자기만의 품위를 높이고, 독립적인 것을 갖게 되는 자존(自尊)과, 자기 존재인 자존(自存)을 요점으로 했다.

또한, 간접적으로 심상구현을 설명해 주었다.

정혈대전이 일어나기 전, 자하신공에 대한 의심을 단번에 수긍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만약, 정말로 매화기공에 숨겨진 비밀이 자하신공과 비슷해 깨우침을 얻은 것이고…… 그 생각이 심상에 고스란히 영향을 끼쳤다면 구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대대로 내려오는 이 일대신공 또한 비슷한 경위로 현경에 다다른 무인이 창안했을지도 모른다.

심상구현에 성공한 현경의 고수가 깨달음을 비급에 담아냈다면, 신공이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맹주님도, 장문인께서도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은 건, 사람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었다.’

설사 가르쳐 주었다고 해도 혼란만 가중할 뿐 이해하진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사문이 같아 성장이나 주변 환경이 비슷한 우일문이라 할지라도, 그가 평생을 보고 느낀 것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참조할 뿐이지, 그 인생에 녹아든 경험은 결국 남의 것이고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직접적으로 말해 어떤 영향을 끼쳐 영영 오르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되기도 했다.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 맞다.

이 모든 것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되새겼지만 알 수 없고 의문만 늘어났다.

참조를 하되, 이해하지 못해 머리 한 구석에 내려두었던 기억.

그 기억이 혈마에 의해 활성화됐다.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그 뜻이 깊어 헤아리지 못했다.

여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했다.

애초에 천재 중의 천재, 운까지 따라야 하는 경지의 단서가 그리 간단할 리 없었다.

하나 혈마는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직설적으로 현경과 심상구현에 대해 알려 줬다.

그의 입장에선 주서천이 어떤 영향을 받건 말건 간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발언은 생각 이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남궁위무와 우일문의 조언이 동시에 떠오르면서, 아직까지 알 수 없었던 말의 의미를 깨우치게 됐다.

머릿속에 우레가 쳤다.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충격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라고 체감할 만큼 까마득했던 높이가 낮아졌고, 거리가 좁혀졌다.

정신을 차리니 앞에 나타난 안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앞의 단계에 드디어 도약할 수 있었다.

‘아!’

입에서 흘러나온 탄성.

정말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마음속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전신을 슥 훑고 지나가는 감각에 전율을 느꼈다.

아랫입술, 승장혈(承康穴)에서 시작한 기류(氣流)가 둘로 나뉘어졌다.

하나의 줄기는 입술을 돌아 코밑 잇몸에서 또 갈라져 양쪽 눈 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남아 있던 줄기는 몸 앞의 정중앙을 타고 가슴의 단중혈(膻中穴)과 그 밑의 구미(鳩尾)와 배꼽, 신궐(神閑)을 지나서 음부와 항문 사이에 있는 회음혈(會陰穴)로 내려갔다.

동시에 항문 뒤 장강혈(長强穴)에서 시작된 기는 몸의 뒤로 돌아 척추를 타고 꼬리뼈 위의 요유혈(膜兪穴)과 경추 끝에 자리한 풍부혈(風府穴)을 지나갔는데, 이윽고 정수리인 백회혈(百會穴)까지 닿고 잇몸의 은교혈(隱交穴)로 올라갔다.

경추로 올라가기 직전에는 자그마한 가지가 튀어나와 양쪽으로 또다시 갈라졌는데, 어깨뼈를 찍었다가 쇄골 사이의 흉추인 도도(陶道)에서 만났다.

아랫입술에서부터 몸 앞으로 내려와 회음에 닿는 것이 임맥(任脈)이고, 항문 뒤에서 척추를 타고 올라가 백회를 지나치는 경로가 독맥(督脈)이었다.

임독맥을 타통해 소주천과 대주천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얼마나 걸렸는지, 언제 끝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경락을 씻듯이 지나가는 그 물줄기는 폭포와 같이 굵직하고 빨라 속도도 힘도 몇 배나 증량하였다.

도학(道學)에서는 사람의 몸은 소우주이며 우주가 그 몸에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유의 관념, 사상, 무학이 집결된 한 사람만의 우주가 있고 그걸 바깥으로 꺼내는 것이 심상구현.

그 단계와 영역을 현경이라 칭한다.

“후우……”

주서천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새로이 얻어낸 ‘무언가’를 정립하고, 흡수해 마음속에 나열했다.

새로워진 심념은 눈빛에 고스란히 깃들어 은은한 현기가 감돌았다.

“주 공자……?”

웬만한 일에도 표정에 변화가 없던 제갈수란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껌뻑였다.

그 옆의 무림맹 주요 전력들도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전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서천은 눈동자만 굴려 일행들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모습을 보여준 뒤, 다시 정면을 쳐다봤다.

주먹에 맞고 나가떨어졌던 혈마가 사음장을 지팡이 삼아서 반 이상 뼈만 남은 육신을 일으켰다.

혈마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누군가가 소리를 낼 때쯤 턱을 움직였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구나.”

순수한 감탄이었다.

그 목소리에선 불신과 경악이 묻어났다.

“그대는 정말로 약관인가?”

호칭이 바뀌었다.

그 어조에선 비록 조금이지만 존중이 느껴졌다.

대신 목소리에 의심이 묻어났다.

“고작 그 나이에 심상을 정립하는것은 불가능하다.

깨우쳤다 할지라도, 현경에는 오를 수 없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한 건 네놈이다, 혈마. 이런 일도 있는 법이지.”

“허튼소리.”

답지 않게 목소리에서 여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심상을 구체적으로 만들기 위해선, 무학만이 아니라 일생이 녹아들어야 한다. 즉, 그대는 고작 스물에 인생을 전부 경험했다는 건데? 그게 물리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인가?”

좀 더 물리적인, 단순 명료한 이야기다.

아무리 고금에 손꼽히는 천재라고 해도, 인생이란 걸 논할 정도로 경험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것도 인격 형성이 시작되는 건 유아기이니 , 그 전을 빼면 이십 년조차 되지 않는다.

“원래 무인의 인생은 짧고 굵은 법이다.”

타앗!

주서천이 몸을 활등처럼 굽혔다가 펼쳤다.

경신법의 최상승 응용법, 궁신탄영이었다.

지면을 튕기면서 쏘아진 그 속도는 가히 신속이었다.

“헛!”

혈마가 혓바람을 들이켜며 사음장을 얼른 들었다.

검이 목을 베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막아 낸다.

콰아앙!

아까 전과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째앵이 아니라, 폭음이 터졌다.

바닥이 반구형으로 내려앉았다.

심지어 그 충격파는 돌풍을 형성해 자갈들을 주변으로 날려 버렸다.

“정말이란 말인가!”

살 떨리는 위력에 혈마가 경악했다.

“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말이 참 많구나.”

주서천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뇌에서 근육으로 내리는 명령을 비롯해 반응 속도, 근력과 속력까지 신체 능력이 복합적으로 올라갔다.

힘의 근원이 되는 자하신공도 십이성 즉 대성에 올랐는데, 그 밖의 무공도 성취를 한계까지 올렸다.

다음 경지로 도약한 다음 얻은 건 심상구현 만이 아니었다.

운동성 등도 사람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 주…… 입으로 떠드는 것도 끝이다.”

주둥아리, 라고 표현하려다가 육신은 장문인이라는 걸 떠올리곤 얼른 바꿨다.

“간다, 혈마.”

촤르르.

사음장이 사시나무처럼 떨어 대자, 붙어 있는 금속 고리들도 움직이면서 마찰음을 내뱉었다.

그 근원지는 혈마가 아니다.

사음장과 맞대고 있는 검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보이지 않는 기였다.

형상화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이윽고 그 형태조차 간섭되지 않게 된 강기가 고요하게 진동했다.

언뜻 보면 자색이 잔류한 것 같지만, 그 색도 얼마 뒤에 바로 묻혔다.

“제일식.”

적에게 들으라는 듯이 초식명을 내뱉었다.

혈마가 흠칫하고 급히 물러나더니, 핏빛 아지랑이를 발밑에서부터 끌어내 막을 만들어 냈다.

그것도 한 겹이 아니라 무려 네 겹이었다.

“자하!”

쿠르릉!

여느 때처럼 벼락이 치는 굉음이 터졌다.

웅웅!

무형의 강기가 검신을 휘감아 맹렬하게 회전했다.

“개벽!”

검을 힘껏 내지르면서 무형의 강기를 쏟아 냈다.

전과 달리 화려함은 없어졌으나, 실속은 다르다.

보다 단단해졌으며, 늘어났고, 매서워졌다.

생전에 검선이 보여 주었던 자하검결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혈마를 덮쳤다.

콰아앙!

“크흐윽!”

정말로, 기나긴 사투였다.

혈마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쭉 찔러진 검격이 네 겹으로 이루어진 막에 구멍을 냈다.

원래라면 충분히 막았어야 할 공격이다.

그러나 검선과의 오랜 격전으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새로운 육신에 적응하기도 전이었다.

하수도 아닌 동수의 공격을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쩌적!

그리고 혈교가 중원을 침공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주었던 사음장에 드디어 균열이 생겼다.

조금씩 새어 나온 균열은 검강의 압력에 버텨내지 못하고 이윽고 여러 갈래로 나뉘며 박살이 났다.

“안 돼!”

푸욱!

조각난 파편 사이를 지나간 검극은 심장으로 향하는 듯하다가, 도중에 방향을 바꿔 단전을 찔렀다.

“……!”

혈마의 입에서 핏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여태껏 보였던 피가 전부 기이한 주술처럼 보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상처로 인한 출혈이었다.

꿈틀꿈틀.

복근이 벌레처럼 꾸물거리며 움직였다.

그 내부의 기맥도 어떻게든 힘을 내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기혈.”

주서천이 속삭이듯 읊조렸다.

“그게 네 본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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