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사의 승려는 강시로 적합하지 않았다.
고승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항마의 힘 탓에 강시화가 까다롭고, 만든다고 해도 쓸 만하지가 않다.
‘혈마……’
주서천이 속으로 긴장했다.
여태껏 만난 상천십좌들과는 달랐다.
호의가 아닌 적의가 향하니 자연스레 몸에 힘이 들어간다.
남궁위무와 우일문, 그리고 사도천주는 적이 아니라 아군이기에 무섭기는커녕 편안했었다.
그러나 혈마는 다르다.
자칫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겁이 났다.
‘혈마를 적으로, 그것도 눈앞에 두었다고?’
전생이었으면 감히 꿈도 못 꿀 상황이다.
아마 혈마의 앞에 서기는커녕, 그전에 극마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리라.
‘그것도, 시대를 풍미한 영웅들과 함께……’
곁에는 신권, 모사미봉, 인룡이 있다.
주변에는 일검칠살, 무당이절, 일장향마가 적군이 별동대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돕는 중이다.
향후 역사에 남을 곳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뺨을 툭툭 쳐서 정신을 차렸다.
눈앞의 적은 한눈을 팔 만한 상대가 아니다.
화경의 경지, 그것도 최상위에 있다곤 하지만 그 격차는 무저갱만큼이나 깊으며 높다.
‘그나저나, 저건 뭐지?’
혈마의 등에 한 사람 정도 수용할 크기의 검은 관이 신경 쓰였다.
전생의 기억에 관에 대한 건 없었다.
‘정혈대전의 기록에서 저런 건 없었는데……’
정혈대전 끝에 승전을 알린 것은 무림맹이었다.
혈마는 오늘날처럼 당시의 상천십좌와 정파의 영웅들에게 포위당해 사망했다.
그게 혈마의 최후다.
마도전쟁과 정혈대전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교주까지 잃은 혈교는 패퇴해 중원에서 도망가 은신한다.
그리고 전란의 시대의 막이 내리고 평화가 찾아온 뒤로도 모습을 감춘 채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끙, 정혈대전이 이십여 년 이상은 빨라졌으니 , 못 보던 게 나와도 이상한 건 아니지. 경계는 해 두자.’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생각 하면서도 주변을 경계하는 걸 잊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만약, 저항하지 않고 그 몸을 순순히 내준다면 고통없이 죽여 주도록 하마.”
“갈!”
홍고가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답했다.
“끄으윽!”
혈교도 중 하수들이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했다.
고승의 항마력이 깃든 만큼 외침만으로도 타격을 입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 주마.”
주서천이 입을 열었다.
그 눈빛이 몹시도 차가웠다.
“네놈들도 그 복마검인가 뭔가 하는 자와 다를 게 없구나. 됐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
혈마가 사음장을 들었다가 내렸다.
바닥을 두드리자 사자들이 강시가 되어 일어났다.
“강시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서천이 별동대원 중 반 정도에게 부탁했다.
나머지 반으로는 혈마를 덮칠 생각이었다.
‘복마검은 어디에 있지?’
지운보가 필히 활강시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싸우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자를 찾는 게냐. 그래도 나름 신념이 있는 모양인지, 잔류한 사념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더군.”
혈마가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지운보는 그래도 복마라는 이름을 가볍게 생각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강시화까지 막은 걸 보면 대단했다.
“포위!”
파바밧!
주서천을 필두로 여덟 명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몸을 날렸다.
혈마를 포위하기 위해 원을 그렸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혈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후기지수가 둘이나 있고, 신승의 제자까지 있다 해도 상천십좌에 비해선 태양 앞의 반딧불이다.
전부가 덤벼도 부족한데 고작 여덟 명 밖에 없었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요.”
그 대답은 후위의 제갈수란에게서 들려왔다.
그녀는 깃발이나 부채 대신 비도를 던졌다.
정확히 여덟 개의 비도가 긴 궤적을 그려 내며 땅에 박혔다. 한곳에만 연달아 박힌 것이 아니다.
여덟 명의 주요 인원들의 두 걸음 앞에 박혔다.
“……?”
혈마가 여전히 의미 모를 얼굴로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보아하니 머리를 쓰는 제갈세가의 계집 같은데, 도대체 무슨 장난을하는 게…… 으음?”
혈마의 붉디붉은 안광이 동요로 일렁였다.
“허어, 내 한동안 강호로 나오지 않긴 하였으나 그래도 나름대로 주시하고 있었거늘…… 준비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이 정도의 진법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은 생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여태껏 여유만만이었던 시선에서 처음으로 이채가 어렸다.
“도대체 무슨 괴술을 부린 것인고!”
진법, 그것도 기문진이었다.
처음에는 진법이 아닌가 싶었다.
일대일이 불가능해 다수로 소수를 막는 데는 최고의 전술이었다.
숫자도 여덟로 떨어지니 구궁팔괘진(九宮八卦陣)을 떠올렸다.
목표인 중궁(中宮)을 가운데에 두고 여덟 곳에 강력한 무인을 배치해 공세를 퍼붓는 효율적인 진법이다.
그러나 비수가 땅에 꽂힌 순간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풍경이 달라진 것이었다.
여덟 명의 무인들이 무슨 영문인지 순식간에 육십사 명으로 늘어났다.
얼굴도 하나같이 똑같으니, 거짓인 게 확실하다.
전부 같지는 않고 여덟 명을 필두로 해서 늘어났다.
이런 장난을 칠수 있는 것은 기문진 밖에 없다.
외부와의 경계를 차단하여, 일정한 고유 영역을 만들어내 환상을 보여주는 것. 기문진만의 신묘함이다.
사실, 기문진에 걸려든 것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다.
혈마가 놀라워하며 감탄사를 흘린 건, 아무런 준비없이 이만한 기문진을 펼친 것에 있었다.
“기문동진(奇門動陣).”
주서천이 혈마의 의문에 대신 답했다.
“모사미봉이 생각해낸, 약점을 보완한 전장의 기문진이다.”
제갈승계를 데리러 제갈세가를 방문했을 때, 제갈수란과 만나 몇 마디 나눈 적이 있었다.
“기문진이란 건, 자연물이나 인공물을 사전에 배치해서 발동하지 않습니까?”
“네?”
“전장의 경우, 변수와 유동이 심하다 보니 기문진이 발동 전에 망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유도하지 않으면 배치한 지역에 오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원하는 곳에 무언가를 던지는 것만으로 기문진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떠한 변수에도 대항하여 원하는 곳에 신속히 기문진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군사의 뒤를 이은 무림맹의 모사, 제갈수란.
그녀는 꾀도 꾀이지만, 훗날 업적 중에서도 손꼽히는 것은 바로 이 기문동진의 발명이었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천군사가 세상을 떠난 뒤, 모사미봉이 군사에 올라 역사에 나타난다.
전란이 한참인 도중 기문진의 성공확률이 그다지 높지 않아, 고민하던 와중에 만들어 실전에 투입했다.
그 효과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기문진의 활용도가 높아져 성공 확률만이 아니라, 준비하는 시간이나 헛된 노력을 단축했다.
이 공적은 기문진 체계를 뒤엎을 정도라, 평화를 되찾은 뒤로도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추앙을 받았다.
혹시나 괜한 오지랍인지 걱정했었는데, 기문동진이 성공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환호를 질렀다.
마음 같아선 기문동진의 원리라거나 자세한 걸 알려 주고 싶었지만, 잘 모르니 그럴 수 없었다.
화산오장로였던 시절 기문진에 관한 서적도 읽었지만, 전문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괜한 이상한 말을 했다가 기문동진을 만들어 내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다.
‘이 정도면 일각은 충분히 버틸 수있을 터.’
파진법(破陣法)에 의하면, 진법이나 기문진에서 빠져나가려면 생문(生門)이나 개문(開門)을 찾아야 한다.
“과연, 이러면 파진하는 것이 성가시겠구나.”
그러나 기문진의 육십사 명이 끊임없이 움직여 공격해 오고, 잘못 움직이면 더욱 곤혹하니 힘들다.
설사 혈마, 아니 혈마의 조부가 온다 해도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굳이 팔문을 찾을 필요가있겠느냐.”
혈마가 어둡게 웃었다.
핏빛의 아지랑이가 그의 발 밑에서부터 솟구쳤다.
“혈마……!”
주서천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막으려고 몸을 날리려 했으나 늦었다.
혈마가 사음장을 허리 높이까지 올리더니, 힘껏 내리찍었다.
쿠와아앙!
사음장이 지반을 뚫는다.
구멍을 내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 충격이 일렁이며 주변을 슥 훑었다.
핏빛으로 된 파도의 정체는 강기의 충격파였다.
지반이 뒤집어지고, 암석들이 잘게 부서졌다.
폭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압도적인 풍압이 쏟아졌다.
”큿!”
주서천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만중검으로 무게를 높여 자리에서 버텼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땅에 꽂힌 비도도 마찬가지였다.
부서지거나, 지면에 새겨진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범위가 무려 십 장씩이나 됐다.
혈마를 중심으로 십 장 바깥이 반구형으로 움푹 파였다.
“크허억!”
“아, 아파……”
“으으으.”
콜록, 콜록!
코가 간지럽고, 목에 먼지가 걸려 따갑다.
매캐한 먼지의 구름이 걷히면서 무인과 마인들이 나타났다.
아군인 별동대원은 물론이고, 적군인 혈교도들도 충격파에 다친 것인지 신음을 흘려 댔다.
“……”
제갈수란이 고운 눈썹을 구부렸다.
파진법이라면 파진법이다.
결국 기문진이란 건 사람과 사물이 있어야만 발동이 된다.
그렇다면 그 요건을 없앤다면 기문진은 사라지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자칫 잘못 움직이면 사문으로 빨려들어갈 수도 있고, 생문이라도 건드려서 없앤다면 큰 문제다.
그래서 보통이라면 외부에서 파괴하기 마련인데, 혈마는 그 상식을 깨부쉈다.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선 힘으로 주변을 박살 내 기문진을 날려 버렸다.
“어디, 실력 좀 봐야겠다!”
쿠웅.
마치 무소가 돌격해 오는 착각이 들었다.
혈마가 밟고 지나간 곳은 자그마한 구멍이 생겼다.
상천십좌가 날아온다는 사실은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소름이 다 끼쳤다.
“매화정검!”
혈마가 사음장을 머리 위로 올렸다가 내리친다.
어떠한 묘리도 들어있지 않다.
그저 단순한 휘두르기다.
그러나 사음장에 실린 공력은 단순하지 않았다.
현경의 깨달음과 평생을 쌓은 무지막지한 공력이 실려 있었다.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빛이 불길하게 빛난다.
“흡!”
주서천이 놀랐다.
감정보다 본능이 더 먼저 반응했다.
자색으로 물든 강기를 두른 검이 위로 향했다.
콰앙!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검과 봉이 부딪쳐 날 소리가 아니다.
화약을 폭발시킨 것처럼 굉음이 터져 나왔다.
‘뭐, 이딴……!’
주서천이 이를 악물었다.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검에서 전해져 온 충격이 근섬유를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다리가 약간 후들거렸다. 내장도 쿡쿡 쑤셨다.
비명을 내뱉을 뻔했다.
가볍게 휘두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뼈가 시릴 정도의 충격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안 그래도 마공은 정도나 사도의 무공보다 위력이 배는 높다.
상천십좌의 마공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으응?”
혈마의 목소리에서 의문이 묻어났다.
“자하신공?”
중원 무림, 아니 온 천하를 뒤져도 자색이라는 특징을 지닌 건 한 가지 무공 밖에 없다.
화산파의 일대신공, 자하신공.
그러나 일반 제자에겐 허락되지 않은 무공이니 의아한 건 당연했다.
‘지금이다!’
약간의 틈이 생겼다.
그 틈을 놓칠 주서천이 아니다.
‘자하!’
자색 찬란한 내공을 끌어 올렸다.
내기가 외기로 바뀐다.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순도가 높았다.
‘개벽!’
우르르.
우중충한 구름 사이에서 우레가 쳤다.
정말로 친 건 아니다.
자하검결의 일초식을 펼칠 때 나는 소리다.
한일자로 쭉 뻗어지는 검.
평소와 달리 근접해 있었다.
그만큼 파고드는 공격도 빨랐다.
“자하검결?”
과연 연륜이 있는 만큼 무공에도 조예가 깊었다.
자하개벽을 보자마자 어떤 것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용권풍처럼 회전하는 강기를 머금은 검이 혈마의 흉부를 노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닿지 못했다.
눈부신 찌르기를 선보인 자색의 빛줄기는 사음장의 석장 대에 막혀 흩어졌다.
그런데 사음장엔 어떠한 것도 맺혀있지 않았다.
무형강기(無形理氣)!
현경에 이르면 몇 가지 변하는 것이 있다.
화경의 증거인 강기도 그중 하나다.
원래는 고유의 무공이나 성질에 따라 색이나 힘을 갖게 된다.
그러나 현경, 혹은 탈마(脫魔)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면 형태라는 것이 무의미해져 사라지게 된다.
이름 그대로 형태가 없는 강기를 쓸 수 있게 되는데, 몹시 까다롭다.
보이지 않다 보니 거리도 가늠할 수 없게 되고, 무엇보다 강기를 실은 공격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된다.
“오늘따라 정말 해괴한 일을 많이 겪는구나.
기문동진이란 것도 그렇고, 장문인의 제자도 아닌 것이 자하신공을 쓰다니…… 허허.”
혈마는 아직까지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저 신기한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갈!”
그사이, 백 보 밖에서 외침과 함께 쏘아진 권풍이 혈마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반쯤 썩은 몸이 흔들린다.
종남의 인룡, 호덕창도 몸을 날렸다.
쿵쿵.
몸집이 큰 만큼 발걸음도 묵직하나 싶지만, 아니다.
지나간 자리에는 국자 모양으로 이어진 발자국만 남았다.
종남파의 북두천강보(北斗天剛步)였다.
“하앗!”
호덕창은 처음부터 끝까지 과묵했다.
별말을 하진 않았다. 대신 기합과 공격으로 표현했다.
북두천강보는 보법이면서도 신법이다.
일곱 걸음씩 내력과 힘을 다음 공격에 축적했다가 쏟아 냈다.
그 힘을 오뢰정인에 고스란히 담았다.
호덕창은 혈마의 뒤에서부터 접근해 등을 짚었다.
빠직, 빠지직!
손가락 끝에서 다섯 줄기의 시퍼런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번쩍이는 것도 잠시, 혈마의 신체 내부로 침투한다.
극양의 기운인지라 열기가 보통이 아니다.
정면에선 자하검결, 후위에선 오뢰정인 그리고 옆구리로 백보신권이 들어왔다.
탈마, 아니 탈마 할아비가 와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끄흐흐……”
혈마의 입에서 신음인지 모를 웃음이 흘러나왔다.
“도를 넘은 고통에 실성이라도 한게냐.”
홍고가 혈마의 웃음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혈마가 쭉 찢어진 입으로 웃었다.
왼쪽 뺨은 완전히 찢어져, 입 근육조차 없어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입술 오른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인 것을 보고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러나!”
무언가가 잘못됐다.
시급한 마음에 경칭까지 생략하며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혈마의 안광에서 섬뜩한 빛이 뿜어졌다.
“쿨럭!”
돌연, 호덕창이 피를 토해 냈다.
눈을 부릅뜨고 팔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얼굴이 붓기 시작하더니만 곧 터질 것처럼 커졌다.
“커혹, 컥!”
입은 물론이고 코와 귓구멍에서도 피가 주르륵 흘렀다.흰자위도 벌겋게 물들더니 피눈물을 흘렸다.
”끅!”
상체의 근육과 지방까지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 전에 호덕창의 호흡이 끊겼다.
맥박도 멈추었다.
호덕창은 마지막에 가슴을 쥐어뜯듯이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즉사했다.
‘인룡이…… 죽었다고?’
주서천은 충격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룡삼봉, 인룡은 여기에서 죽을 인재가 아니다.
한참 뒤에 종남파의 고수로서 암천회와 싸울 영웅이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기혈마공(氣血魔功)……”
제갈수란이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혈교의 대사제이자 교주인 혈마의 독문마공이었다.
기혈마공은 기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그 범위는 자기 자신뿐만이 아니라, 타인도 포함된다.
특히 혈류(血流)의 조작에 능하여 방금 전처럼 피를 역류시키는 행위도 가능했다.
본래 사람의 신체에는 혈액의 역류를 막아 주는 판막(辯膜)이라는 것이 있다.
설사 무슨 문제가 나 피가 역류한다고 해도, 이 기관과 압력이 거꾸로 솟는 피를 막아내 원래대로 되돌리니 몸에 문제가 생겨서 목숨까지 위협하지는 않는다.
하나 기혈마공은 이 판막을 무시했다.
정확히 말해선, 기혈을 조종해 더한 압력으로 판막을 찢는다.
그러면 더 이상 역류하는 혈류를 막아낼 수 없고, 혈관이 파괴되며 심장까지도 문제가 생겨 죽는다.
“십수 년만 더 지났다면 이 다 쓰러져 가는 몸으론 버텨 내진 못했을게다. 한동안 등골이 쓰리겠군.”
나름대로 적수를 향한 칭찬이었다.
혈마는 사음장을 들지 않은 손을 들었다.
검지와 중지를 제외하고 세 손가락을 접었다.
부웅.
호덕창의 시신이 공중에 천천히 떠올랐다.
허공섭물(虛空攝物)로 보이나 실상은 다르다.
기혈마공으로 혈류를 움직여, 공중에 떠오르게 했다.
파스슷.
굳어 가는 핏방울이 하나둘씩 떠오르더니만, 이윽고 호덕창의 몸에서 혈액이 뽑혀 나왔다.
마치 핏빛을 뿜어내는 기의 아지랑이처럼, 피가 몇 줄기로 나뉘어서 공중에 뭉쳤다.
“네 이노옴! 혈마!”
홍고가 분노의 일갈을 터뜨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그 권압이 대단했으나, 혈마는 시선을 돌린 것만으로 무형의 얇은 막을 펼쳐 막아 냈다.
호신강기였다.
“고것 참 아까부터 시끄럽구나. 역시 중이 방해로다. 도움도 안 될 거 네놈부터 처리해 주마.”
혈마가 이번엔 엄지와 중지를 구부리고, 나머지 손가락을 쫙 폈다.
공중에 떠오른 호덕창이 떨어졌다.
그의 몸은 마치 수분을 전부 빨린 것처럼 뼈와 가죽만 남았다.
‘안 돼!’
주서천이 다급해졌다.
신권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는 차후 암천회와의 전면전에서 필요한 인재다.
다행히 시간이 좀 남았다.
지면을 박차 몸을 날려, 홍고의 앞을 막아섰다.
“용기가 가상하구나.”
호덕창의 시신 위, 혈마의 눈앞에 핏덩어리가 어린아이 머리만 한 크기로 모여 혈구(血球)가 됐다.
“그렇지만 어리석도다.”
혈마가 엄지와 중지를 튕겼다.
그러자 혈구의 일부분이 떼어지면서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워낙 순식간이라 눈으로 좇을 수없는 속도였다.
그러나 직감이 이성보다 빨리 반응했다.
주서천이 검을 눈부신 속도로 휘둘러 혈구를 베어 갈랐다.
‘제기랄!’
주서천이 이를 악물었다.
혈구는 베어졌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몸집이 둘로 나뉜다.
하나는 다행히 궤도를 벗어났으나, 나머지 하나는 어깨에 구멍을 내고 지나갔다.
‘크읏!’
하필이면 검을 쥐고 있던 팔이었다.
검을 놓지는 않았지만,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용한 것.”
혈마가 칭찬하며 손가락을 다시 튕겼다.
긴 궤적을 그려 낸 혈구가 반대쪽 어깨와 다리에도 구멍을 냈다.
‘이럴 수가……’
혈마의 강함은 진짜배기 였다.
방심하진 않았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격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기문동진으로 일각은 끌 줄 알았는데, 한순간에 밀려났다.
그 뒤로 별동대 중에서 주요 전력이 한꺼번에 덤벼, 공격까지 성공했는데 별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상황이 너무나도 안 좋다.
“마음에 드는구나. 네놈은 다음에 처리하마.”
혈마가 손가락을 다시 모았다.
“도망쳐!”
주서천이 처절하게 외쳤으나, 홍고도 제갈수란도 꼼짝하지 못했다.
맹수 앞의 초식 동물과 같았다.
“다 함께 저승에서 만날 것이니 걱정할 것 없……”
혈마의 안색이 변했다.
쐐액!
어디선가 섬광이 날아왔다.
“흡!”
혈마가 손을 바꿔 검지와 중지를 모아 움직였다.
혈구가 순간 넓게 퍼지며 막을 형성해 앞을 막았다.
째애앵!
금속음이 터졌다. 귀가 앵앵 울린다.
주서천은 그 소리가 선계의 연주음처럼 느껴졌다.
우우웅.
“드디어 납시셨나.”
혈마가 혈막을 거두며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섬뜩하게 타오르는 안광이 바라보고 있는 건, 두둥실 떠오르는 검을 곁에 두고 뒷짐을 쥔 노인이었다.
“검선, 우일문.”
상천십좌 간에 서열은 없다.
절대고수 정도 되는 경지에 오르면 만날 일이 없어서다.
대부분이 각 세력의 대표 격이다보니, 정말 큰일이 아니라면 나서지 않는다.
평소에도 싸울 일이 거의 없는데 , 그것이 상천십좌끼리의 싸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시간에…… 맞춘 건가……’
주서천이 우일문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우일문의 시선이 호덕창에게로 향했다.
입에서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무림의 미래를 짊어진 인재가 죽지는 않았을 터인데……”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사람이란 게 원래 언젠간 죽는 게 아니겠나.”
혈마가 여유 가득히 웃었다.
검선의 등장에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았다.
“나타날 걸 예상한 겐가?”
“내 눈이 없어도, 못 보는 것이 아니다.
귀도 다 떨어져 가지만,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
혈마는 무인이자 주술사, 그리고 지도자다.
“동일한 마도라고 해도, 마교처럼 머리가 비어 있진 않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죽는 것은 사양하지.”
“아가야, 아무래도 우리가 읽힌 모양이구나.”
우일문이 제갈수란을 힐끗 바라보았다.
탓하는 것이 아니다.
수를 읽혔으니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상천십좌는 상천십좌가 아니라면 이기는 것이 불가능할 터. 그걸 모르지 않는 이상 이런 희생을 낼 리가 없지. 어지간히 골이 비어 있다면 모를까.”
“수다는 그만하면 됐네.”
“대화를 길게 끄는 동안, 사문의 기대주를 내빼는 건 끝냈나. 나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잘됐군.”
홍고가 부상을 입은 주서천을 데리고 제갈수란이 있는 쪽까지 물러났다.
“자아, 그러면 검선의 실력좀 볼까.”
혈마가 손가락을 튕겼다.
퓨퓻!
호덕창의 몸에서 뽑아낸 혈구가 전부 쏟아졌다.
그야말로 피의 비 였다.
혈선이 쭉쭉 그어졌다.
우일문도 뒷짐을 쥔 오른손을 꺼내 손가락을 튕겼다.
자색의 빛줄기가 번쩍였다.
자하지(紫霞指)다.
파바밧!
허공에서 자선(紫線)과 혈선(血線)이 부딪쳤다.
그 숫자가 동일했다.
격돌한 순간 주변 공기를 집어삼키면서 폭발한다.
그 안에 깃든 공력이 보통이 아니다.
펑! 퍼퍼펑!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각자의 장기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위력이 천지를 뒤흔들 정도로 강했다.
검선도 혈마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당연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가벼운 탐색전으로 보이나 강기를 줄기차게 쏘아 냈다.
그 위력에 주변의 소란과 싸움이 잠시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