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에 전해져 오는 위력이 사뭇 대단했다.
유효풍은 화경의 고수이면서도, 활강시가 되어 부활했다.
제조 도중 강화되면서 까다로운 상대가 됐다.
“월아천문주가 미쳤거나 혹 강시가 되었다곤 들었으나, 그게 사실일 줄이야……”
구풍이 침음을 흘리며 옆에 섰다.
“그나저나, 전에 자네가 한 말과 좀 다르지 않냐?”
은하노사도 유효풍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사음장으로 강시가 된 이는 급조된 탓에 몸집이 별로 단단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손목에 휘둘려진 검을 아무렇지 않게 튕겨 내던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것도 고수가 휘두른 검이니 단단함이 보통이 아니리라.
“그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음장에 대략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지는 않았다.
정혈대전에서 워낙 유명해진 법보인지라 대략적인 능력만 알고 있는 정도다.
“어쨌든, 시간이 없습니다. 월아천문주는 제가 맡을 테니, 구출을 서둘러 주시겠습니까?”
“알았네.”
시간이 갈수록 공동파와 항산파가 위험해지고 있다.
전력을 잃을 수 없기에, 잡담은 그만두었다.
“은하노사와 십사검협께선 돌파구를 만들어 주십시오!
주변에 잔당의 처리와 수비는 제가 맡겠소!”
두종이 강시가 된 월아천문도를 처리하면서 외쳤다.
파스슷!
“언마다!”
“크악!”
땅 밑에선 언마가 솟고, 그 위에선 혈교도와 강시가 무림맹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적진 한가운데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주서천이 외치면 두종이 듣고 지휘에 나섰다.
적어도 그는 상환 판단을 못 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대문파의 제자, 그리고 정파의 영웅이라는 점이 지휘 체계에 힘을 불어 넣었다.
한편 포위된 정중앙의 상황은 다급하게 흘러갔다.
“으아아악!”
“아악!”
언마가 등장한 이후로 공동파와 항산파는 혼란에 빠진 채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지 못했다.
눈앞의 혈교도와 강시만으로도 성가신데, 땅 밑에서 튀어나오는 언마의 손은 그야말로 공포였다.
“안 돼!”
“사형! 정신 차리시오!”
“캬아악!”
“끄아악! 나요! 당신의 사제란 말이요!”
그리고 정말로 무서운 건 죽음을 맞이하면 강시로 변하는 사형제들이었다.
평생을 함께해 온 이들이 적이 되는 것은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설사 강시이고 그다지 강하지 않다 할지라도, 생전에 사형제였던 시신을 베겠는가.
도리가 아니다.
“정신 차려라!”
지운보가 강시가 된 동문의 목을 베었다.
“이것들은 사형제가 아니라 한낱 강시일 뿐이다!”
“하나, 대사형!”
“복마를 잊지 마라! 정신 차리지 않으면 죽는다!”
지운보가 눈앞의 마귀들을 무찌르기 위해 날뛰었다.
“이 무슨 일인가……!”
수경이 염주 알을 엄지로 굴리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눈앞의 광경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불학에서 육신보다는 혼과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나,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사자를 이리도 모욕하다니, 혈마여! 천벌을 받을 것이다!”
수경의 분노가 극의에 올랐다.
그녀의 손에서 펼쳐지는 절매산엽검식이 혈교도의 무리를 처리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운보처럼 마음이 독하지는 않은지, 사형제가 강시가 되면 차마 베지는 못했다.
그래서 장풍을 쏘거나, 혹은 장력으로 밀어내어 넘어뜨렸다.
눈을 돌려 퇴로를 확인해 보려 했으나, 무림맹이 아닌 혈교의 군세가 가득한 걸 보고 안타까워 했다.
“함정에 빠졌구나!”
위기에 빠지자 비로소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수경이었다.
과거에도 고수의 몸으로 활강시가 된 경우를 본 적이 있었다.
초대의 유령곡주인 삼안신투였다.
그때 당시에도 삼안신투는 본신의 무위를 그대로 발휘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하진 않았다.
생전에 도둑답게 보법이나 신법 위주로 수련한 탓인지, 전체적인 무력은 초절정의 수준에서 그쳤다.
그에 비해 월아천문주, 유효풍은 달랐다.
화경의 고수이기도 하고 삼안신투처럼 보법이나 신법에만 특화되어 있지 않았다.
그 무위가 몹시 대단했다.
무엇보다 사람이 아닌 강시로 태어난 새로운 육신은 그 힘을 몇 단계 위로 끌어 올렸다.
째애앵!
검과 언월도가 부딪쳤다.
금속음이 길게 늘어지면서 앵앵 울렸다.
사람과 강시가 서로 마주 봤다.
‘정찰전은 없구나.’
강시는 사람과 다르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온다.
괜히 기량을 파악하려 했다간 낭패를 본다.
살아있어도 보통 적이 아닌데, 죽어서 몇 단계 더 발돋움했다.
화경중에서도 극상에 있는 게 분명했다.
“오냐, 나도 전력을 다해 주마.”
펄럭!
발끝에서부터 자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소매 안이 부풀어 오르면서 펄럭였다.
모든 힘의 근원, 자하신공이 폭발적인 힘을 낸다.
힘줄이 돋더니만 퍼런 핏줄까지 보였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호흡이 느려졌다.
기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흐압!”
타앗!
지면을 박차고 뛰쳐나간 건 주서천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주변의 금속음이 사라졌다.
이 세상 속에 홀로 남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혼자는 아니다.
활성화된 감각이 파도가 되어 주변을 슥 훑는다.
지면에 발바닥이 닿는 순간, 그아래의 지맥의 움직임까지 샅샅이 잡아냈다.
콰드득!
땅밑에서 흙더미를 토해 내며 언마의 손이 올라왔다.
그 목표는 당연히 주서천의 발목이었다.
그러나 목표가 된 몸은 진작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주서천은 앞으로 몸을 날려, 지면을 굴렀다.
시야가 거꾸로 돌아가고 등이 지면에 닿기 전, 검을 휘둘러 수평선을 그었다.
서걱!
땅 밑에서 치솟은 손이 뎅겅 잘려 날아갔고, 떨어지는 순간에 맞춰 한바퀴 다 구른 주서천도 다시 지면을 밟았다.
유효풍과의 거리도 지척에 이르렀다.
부웅!
유효풍이 언월도를 휘둘렀다.
위력이 몹시 대단한 듯, 묵직한 파공음이 터졌다.
기세가 위협적이었으나 주서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똑바로 바라보며 검으로 반격에 나섰다.
쿠와아아앙!
검과 언월도가 부딪친 순간, 그곳에 담겨진 막대한 힘이 폭발하면서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금속이 부딪쳤는데도 화포를 쏘아낸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쯧!”
검강이 막히자 혀차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리 화경의 고수로 제조된 활강시라 할지라도, 생전의 무공을 쓸지언정 강기는 형성하지 못했다.
이는 강기란 것이 단순히 내공을 많이 써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의한 정신이 필요해서 그렇다.
그 대신, 화경의 고수로 된 활강시는 그 경지에 알맞게 순도가 짙은 내공을 전환해 몸을 강화한다.
그렇다 보니 강기로 맞받아치지 않고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도 내부에 기만 있다면 막을 수 있었다.
단점이 있다면 공격으로 쓸 수 없다는 것이지만, 그 정도는 별 상관없었다.
지치지 않는 몸이나 특수한 능력만으로도 충분했다.
‘주변에 시신이나 강시가 있다면, 사기를 뽑아내서 흡수해 회복하는 건 여전하구나! 성가시군!’
유효풍의 내공 역시 마르지 않은 샘물이 됐다.
파바바밧!
유효풍이 언월도를 바로 세워, 앞으로 힘껏 내질렀다.
그것도 삼연속으로 이어지는 찌르기였다.
채앵!
불꽃이 튀었다.
챙! 채챙! 채채챙!
그리고 연달아서 마찰음이 터졌다.
유효풍은 쉬지도 않고 언월도로 정면 찌르기를 선보였다.
주서천도 검을 내질러 맞받아쳤다.
수십 번에 이르는 공방이 교환됐다.
잔상이 남을 정도의 속도였다.
화경끼리의 싸움만큼 대단했다.
웬만한 무인들은 보는 것조차 불가능한 속도!
‘하! 강시란 게 역시 여간 성가신게 아니구나!’
월아천문의 무공의 특징은 본래 무거움이지, 빠르기가 아니다.
이런 쾌속의 찌르기는 불가능하다.
언월도란 것이 무게도 제법 나가기도 하고,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에서 무리를 했다간 근맥이 찢어져서 그렇다.
하나 강시의 몸은 그런 제약이 없었다.
강시로 다시 태어났다 보니 근력 역시 몇 배나 증가한 데다가, 어차피 기로 움직이니 찢어져도 괜찮다.
‘하지만!’
주서천이 눈을 부릅떴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배꼽 아래, 하단전에서부터 힘이 용솟음쳤다.
검과 손이 이어진 기맥이 요동치면서 힘을 불어 넣었다.
네 몸은 단단할지 몰라도!
챙! 채앵! 째애앵!
검과 언월도가 수없이 부딪친다.
수직과 수평을 긋고, 이윽고 사방팔방으로 빛줄기를 뿜어 댔다.
눈으로 좇을 수 없는 빠르기의 검격과 도격이 허공에서 격돌하고, 싸우면서 금속음으로 노래를 했다.
순간에 불과한 싸움 속에서 수백 번의 충돌이 있었고, 갑자기 언월도에 균열이 거미줄처럼 생겼다.
“네 무기는 그만큼 단단하지는 않지!”
문주의 무기답게 평범한 건 아니다.
그러나 월오삼검 태아에 비해선 조족지혈이었다.
사람의 몸의 한계를 넘어선 능력을 계속해서 받아내 쉬지 않고 무리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쨍그랑!
결국은 언월도가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쇠가 아름답게 비산하며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수십 조각이 된 도신은 햇빛에 반사되어 각각 제 주인과 적의 얼굴을 비쳤다.
유효풍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편안해 보였다.
“잘 가시오, 월아천문주!”
주서천이 경의를 담아 검을 쭉 뻗었다.
한일 자로 그어진 그 선은 유효풍의 머리를 통과했다.
푸욱!
검극이 피부를 가르고, 두개골을 꿰뚫어 그 안에 있는 뇌에 구멍을 냈다.
깔끔한 일격이었다.
“……하아!”
잠시 멈췄던 호흡이 제대로 되돌아오자, 한숨이 나왔다.
몸은 아직 지치진 않았지만, 정신이 피곤했다.
나름대로 고전한 화경의 고수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주서천이 뒤통수를 관통한 검을 뽑자, 유효풍은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툭 쓰러졌다.
“앞은 어떻게 됐습니까!”
상황이 급박하지 않았더라면 도호라도 외웠겠지만, 유효풍이 죽은 걸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휙 돌렸다.
“이제 좀 앞이 보이는구나!”
구풍이 곧바로 답했다.
그 외에도 은하노사, 두종을 비롯한 무림맹 병력이 앞으로 제법 나가있는 게 보였다.
아직 전부는 아니지만, 사람들 틈 사이로 지운보의 모습도 언뜻 보였다.
“홈, 공동의 복마검인가. 제법 괜찮은 제물이로군.”
일촉즉발의 순간, 좌중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행색의 대마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혈마!”
지운보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겁먹고 어디에 숨어 있었느냐! 그래도 용기 있게 나타난 건 가상하구나! 하하하!”
지운보의 검에 실린 강기가 요동쳤다.
살의로 번들거리는 그 눈은 사냥감을 노리는 것처럼 예리해졌다.
“안 돼! 도망치십시오!”
혈마를 보고 안색이 변한 주서천이 외쳤다.
“흥! 한낱 사교주, 주술사에 불과한 놈이 멀리 떨어지지 않고 근접해봤자 무슨 수가 있겠느냐!”
지운보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또 무슨 사술을 쓸 것이 신경 쓰여, 혈마에게 날아가듯 뛰어들었다.
“죽어라!”
복마검의 푸르스름한 강기가 햇살에 반사되어 더더욱 빛났다.
머리 위로 든 검이 아래로 휘둘러졌다.
툭.
지운보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졌다.
그 눈에 비친 건, 고사리 같은 손으로 검을 잡은 혈마였다.
“혈마는 주술로 상천십좌에 오른 게 아니오!”
주서천이 전생의 악몽을 떠올리며 소리쳤다.
무공이란 말이다!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상황은 이미 늦었다.
“오호, 또 이렇게 써먹을 제물이 나타났구나.”
혈마의 텅 빈 눈구멍 속, 검붉은 안광이 빛났다.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라는 느낌이 묻어났다.
“그래도 손이 조금 따끔한 것이, 복마라는 것이 허명은 아니로구나. 명실상부(名實相符)로다.”
“이이익!”
경악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치욕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전력을 낸 일격이 막힌 것도 모자라, 힘을 주고 있는데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무엇보다, 마치 무술을 어린아이의 재롱으로 보듯이 평가하는 태도에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쯧쯧쯧. 어째 정파의 고수들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것 같구나. 함정이 있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다니, 이 무슨 우치더냐.”
“네 이놈! 감히 날 모욕하다니 !”
지운보가 치욕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래도 상천십좌 앞에서 겁먹지 않은 것이 용했지만, 만용에 가까웠다.
”혈교주!”
지운보가 검을 거두고 뒷걸음질 쳤다.
정확히 세 걸음이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도망친 것이 아니다.
그다음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훌륭한 보법이었다.
혈마는 손에서 적의 무기가 빠져나갔지만 딱히 다른 자세를 취하진않았다. 움직임이 아예 없었다.
‘아직까지도 날 우습게 보다니!’
그 무관심이 지운보의 자존심을 박살 냈다.
상천십좌라고 해도, 천하백대고수이자 공동파의 최고수를 이리 푸대접하는 게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복마검이라면 정사마에 상관없이 놀라거나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반응을 보였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후회하게 해 주마!’
하단전에서부터 내공을 끌어 올렸다.
운기의 순환이 약간 바뀌면서 성대에 연관된 곳을 지나갔다.
“혈마아!”
혈마!
지운보의 목소리가 주변을 휩쓸었다.
고비 사막 전부가 떨 정도의 크기였다.
“크아아악!”
그저 목소리만 큰 것이 아니다.
공력이 담겨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혈교도와 강시만 반응했다.
강시는 움직임을 잠시 멈췄고, 혈교도는 멈춘 걸로도 모자라 눈을 부릅뜨고, 귀를 막으면서 괴로워했다.
“복마신후(伏魔神吼)인가?”
공동파의 도술이면서도 무공에 분류된다.
소림사의 사자후와 견줄 수 있는 음공으로서,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성량의 울음소리를 내뱉는다.
무인이 아닌 자들은 그 자리에서 고막이 찢어져 뇌까지 영향이 가고, 무인들도 일시적인 마비를 겪는다.
그리고 사자후에 항마(降魔)가 깃든 것처럼, 복마신후도 이름처럼 마도인에게 특히 효과가 좋았다.
여태껏 복마신후를 코앞에서 듣고 멀쩡한 마인은 보지 못했다.
내공의 반절을 썼으니 꼼짝 못 하리라.
‘끝이다!’
세 걸음 밖의 지운보는 끝장을 내겠다는 듯이 공력을 있는 힘껏 끌어올리며 공동의 절기를 펼치려 했다.
‘대주천복마……’
“장난은 슬슬 끝인 것 같구나.”
퍼억!
“커헉!”
지운보가 눈을 부릅떴다.
그 표정은 경악과 불신으로 일그러졌다.
“복마검!”
수경이 비명을 지르듯 지운보를 불렀다.
“이, 이런…… 말도……”
지운보가 끓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슴에서 도를 넘은 통증이 느껴졌다.
고통이 한계를 넘어 도리어 아프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고개가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간다.
흉부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구멍에는 혈마의 팔이 박혀 있었다.
“흉하지 않게 강시로 만들어 줄 테니, 걱정 말거라.”
“카, 아악……!”
지운보가 눈을 까뒤집었다.
끓는듯이 흘러나오는 비명도 잠시, 생명의 불꽃이 완전히 꺼졌다.
“안 돼!”
“대사형!”
공동파의 제자들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후퇴해!”
지운보의 죽음에 슬퍼할 틈은 없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할 때다.
“당장!”
주서천이 소리쳤다.
사자후나 복마신후 정도는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주변에 다 들릴 정도는 됐다.
“복마검께서 전사하셨으니, 공동파의 제자들께선 제 말에 따라 주시기를 바라오! 후퇴하시오!”
두종이 주서천의 외침에 도움을 줬다.
“매화정검과 난주 지부장의 말을 따르게!”
은하노장이 혈교도 무리를 쓰러뜨리고, 퇴로를 만들었다.
“으아아! 혈마!”
“죽여 버리겠다!”
공동파의 제자들 중 일부가 뛰쳐나갔다.
아무래도 지운보와 각별한 사이의 사형제인 모양이었다.
“원수가 눈앞에 있어 흥분한 심정 은 알고 있지만, 지금은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전략적 후퇴입니다!”
주서천은 그들을 말끔히 포기했다.
대신 아칙 어찌할 줄 모르며 서 있는 공동파와 항산파를 설득했다.
“큭!”
수경이 등을 휙 돌렸다.
가증스러운 화산파의 제자의 말에 동의하기는 싫지만, 이대로 있는 건 자살행위다.
“후퇴한다!”
항산파가 수경을 따라 퇴로로 물러났다.
“후, 후퇴해!”
“제기랄!”
“두고 보자!”
“언젠가 복수하겠다!”
공동파의 제자들이 피눈물을 삼키고 물러났다.
여태껏 지휘를 거부할 수 있는 건, 지운보가 있어서였다.
그가 죽었으니 지휘권은 자연스레 넘어간다.
“캬하하핫!”
“어딜 가느냐!”
“피를 좀 나눠주게!”
“강호의 동포여!”
혈교도가 뒤로 물러나는 무림맹을 조롱했다.
“죽어랏!”
“아악!”
“제기랄! 저리 꺼지란 말이다!”
“아아! 날 버리지 마시오!”
“안 돼!”
푹!
푸욱!
채애앵!
처절하기 그지없는 비명, 쇳소리의 뒤섞임 속에서, 난주의 무림맹은 패퇴하였다.
암천회.
“하하하!”
천기의 웃음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그래, 이래야지!”
아직 전부는 아니나, 대계의 일부가 성공했다.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음에 천기는 만족하였다.
“주서천, 네까짓 놈이 또 무슨 훼방을 놓나 싶었으나 괜한 걱정이었나 싶구나. 순천자존(順天者存)이고 역천자망(逆天者亡)이니, 본때를 보여 주겠다!”
매화정검, 주서천!
그 이름을 들으면 혈압부터 오른다.
그만큼 천기가 세운 계획을 틈만 나면 궁귀검수와 함께 방해를 해왔다.
갖은 수를 써 봤지만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박살 내고, 심지어 암천회의 대계에 차질을 빚게 했다.
그 원한은 결코 잊을 수 없다.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혈교가 움직인 순간부터 그를 주시했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끝내겠다.”
천기는 승전에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았다.
혹시라도 방심이 화를 부를까 봐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웃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대계의 자잘한 수정이나 설립을 멈추지 않았다.
안휘, 합비.
“난주에서 일차 격돌이 발생했습 니다.”
“어떻게 됐나?”
무림맹 수뇌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제갈상의 낯빛이 어두웠던 탓이다.
“삼천삼백 중 팔백 이 사망하고, 이백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경상자를포함해 전력은 이천삼백 정도입니다. 복마검 지운보가 혈마에게 목숨을 잃었고, 난주 지부는 패퇴했습니다.”
“끄응!”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난주는 도대체 뭐하는 건가!”
팽군평이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올두드렸다.
첫째 날의 피해가 예상보다 막심했다.
제갈상은 난주에서 전해져 온 서신을 읽으며, 당시 전장에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했다.
“공동검, 그 친구가 전부터 마인들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줄은 알았네만…… 으휴!”
황견이 차마 욕을 하진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무아미타불……”
경인사태가 명복을 빌어 주었다.
“적은 어떠한가?”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천만다행으로 진군하지 않고 접전지에서 대기 중이라 하외다.”
제갈상 대신 황결이 답했다.
“혈교의 피해도 많았던 건가?”
“적지는 않았네. 그러나 혈교도나 난주의 정파인들을 강시로 만들어서 결국 오천 명 그대로일세.”
“괜히 법보가 아니로군.”
사음장의 위력이 새삼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면, 어째서 대기 중인지 이해가 안 가는군.
단순히 재정비라면 소득이 별로 없지 않나?
차라리 후퇴한 아군을 추격하여 목숨을 끊는 것이 좋을 텐데.”
점창파의 현 장문인의 일제자, 점창일공자이며 무림맹의 장로이기도 한 우백(禹白)이 의문을 표했다.
“아마, 복마검 때문일 것이라 사료됩니다.”
“복마검? 어째서인지 설명 좀 해주겠나, 부군사.”
제갈상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일단 강시의 제조법이나 사음장에 대해서 설명하고 다음 말을 이었다.
“강시 중 최고라 일컬어지는 활강시를 제조하려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마 혈마는 복마검을 활강시로 만들기 위해서, 군세를 잠시 멈춘 듯합니다.”
“사음장이 있으니 그럴 필요는 없지 않나?”
“확실히 사음장이 있다면 그 과정은 생략되고 단축됩니다. 그러나 전에도 설명했다시피, 그러면 내구성이 정식 절차에 비해 약해집니다. 혈마 입장에선 모처럼 화경의 고수를 시신으로 얻었는데 그리 만드는건 아깝다 여긴 것이겠지요.”
“호오, 과연.”
제갈상의 설명에 여기저기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흠, 그런데 일반적인 강시도 만드는 데 최소 한 달은 소요된다 하지 않았나? 활강시라면 몇 년, 혹은 십 년 이상은 걸릴 텐데……? 생각해보니 월아천문주도 의문이로군.”
좌중의 시선이 황견에게 돌아갔다가, 다시 제갈상으로 되돌아왔다.
“아무래도 그것까지는 제가 부족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갈상이 괜히 아는 척을 하지 않고, 자신의 무지를 솔직하게 인정하 며 사과했다.
‘부군사가 확실히 난 사람이긴, 난 사람이야.’
‘오대세가의 자제라면 보통은 자존심이 세기 마련인데, 쉽게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군. 게다가 겸손해.’
‘괜히 지룡이 아닌가. 군사께서 후계를 잘 잡았어.’
그 누구도 부군사를 트집 잡거나 혼내지 않았다.
지금껏 한 활약 등이 워낙 많아서 그렇다.
“아마도 주변의 사기나 혈기를 모아 그 단점을 보완했을 거요. 혈교, 아니 중원 제일의 주술을 지닌 자이니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