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서구가 합비를 떠났다.
별 대단한 게 적혀 있지는 않았다.
신의를 구해 내고 임무를 완성했으니 화산으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신의의 구출에 성공한 건 진작 알려졌기에 딱히 놀라울 건 아니었다.
주서천의 귀환을 기다렸다.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은인을 대접 하나 없이 이리 떠나보내는 게 마음이 편치는 않군.”
단하성이 몇 번이나 대접할 기회를 달라 했지만, 주서천은 전부 거절했다.
사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니 어찌 막을 수도 없었고, 대신 그 전날에 가볍게 술잔을 기울였다.
점창파는 그렇다 쳐도 화산파는 약주는 허가해도 과하게 취하는 건 용납하지 않아 제법 건전히 끝냈다.
그래도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법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당 소저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주서천이 당혜를 보고 물었다.
쐐애액!
대답 대신에 극독을 바른 비수가 날아왔다.
“이, 이 미친 여자야!”
주서천이 기겁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당혜가 안심한 듯 가슴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내쉬며 입가에 부드럽게 미소를 그려 냈다.
“난 또, 누군가 당신으로 변장해서 나에게 접근한 줄 알았잖아. 안 하던 짓은 하지 말아 줘. 그리고 그렇게 느끼한 어조로 말하다니, 화가 나서 뺨이 불그스름한 게 보이려나? 보렴, 닭살도 돋았잖니.”
당혜가 소매를 슬쩍 올려서 새하얀 팔을 보여 줬다.
“안 돋았는데?”
“여전히 눈이 옹이구멍이구나.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온 거야?”
“내일쯤에 화산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넌?”
사천은 섬서 바로 옆에 있다.
돌아가는 길이 같으니 함께 가겠냐고 물어보려고 왔는데, 괜히 왔나 싶어 갑작스레 후회됐다.
그냥 이런 위험한 여자 따위는 내버려 두고 혼자 화산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가는 길이 무료하지 않으니 끌리는 제안이지만, 거절하도록 할게. 당분간 돌아갈 일은 없으니까.”
당가의 가주는 어째서인지 당혜를 방임하고 있다.
하기야 정파의 후기지수이고 아이도 아니니 내버려 둘만 하지만, 그래도 너무 관심이 없지 않나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몇 가지 물어보고 대화도 나누고 싶었으나, 과한 오지랍인가 싶어 속으로 삼켜 넘겼다.
그리고 당혜가 당가로 돌아가지 않으면 나쁘지 않다.
금의상단이 곤란할 때 대신해서 도울 수 있었다.
주서천은 잘됐다면서 신의의 협력을 받기로 한 걸 가르쳐 주며, 금의상단까지 호위를 부탁했다.
“무림맹에서 할 일이 몇 가지 있어서 그런데, 그것만 처리하고 가도 괜찮을까?”
“신의, 그 괴팍한 늙은이가 얼마나 참아 줄지 모르니까 되도록 빨리 끝냈으면 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니까 걱정 마.”
당혜가 대답하면서 찬장에서 술잔과 술병을 꺼냈다.
주서천이 의문이 깃든 시선으로 쳐다보자, 당혜가 고혹하게 웃으면서 잔에 술을 담아 건냈다.
온 김에 대작(對酌)이라도 해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듯이 독을 탔다는 말에 하마터면 술상을 뒤엎을 뻔했다.
이튿날.
주서천은 천독지체의 위용으로 숙취 하나 없는 채로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며 무림맹을 떠났다.
일행은 하나도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무림맹에서 마련해 준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렸는데, 나름 명마를 준비한 것인지 속도가 제법이었다.
그래서 고삐를 쥔 채 신나게 달렸는데, 아무리 명마라고 해도 체력이 무한정하진 않았다.
하루 내내 적절한 휴식 없이 움직이니 말도 거품을 물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중간에 마을에 들러 말을 팔아버린 뒤, 경공을 사용해 섬서를 향해 달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괴물 같은 내공이야.’
알다시피 경공이란 건 내공의 소비가 극심하다.
한데 한 시진, 두 시진을 달려도 아직 전부 소진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해와 같은 내공이 줄기는 했다.
참고로 체력의 경우엔 전혀 지치지 않았다.
내공으로 대신한 것도 있었지만, 구희의 신단 덕인지 조금만 쉬어도 체력이 금세 회복돼서 좋았다.
정말로 불사라도 된 기분이라서 신기했다.
막대한 내공과 지치지 않는 체력, 그리고 경공에 들린 재미 덕인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화산에 도착했다.
화산파에 오면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불초 제자, 임무를 완료하고 왔습니다.”
“녀석.”
유정목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임무의 보고 전에 스승부터 찾아와 문안 인사를 건네는 건 기뻤으나, 한편으론 곤란했다.
장문인이나 화산오장로가 주서천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위가 살짝 아파 왔다.
그래서 차 한 잔만 마시고 제자의 등을 떠밀 듯이 상궁으로 올려 보냈다.
“사대제자, 주서천. 임무를 수행하고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정말로 고생 많았다.”
화산오장로, 지검옹 학송이 주서천을 크게 반겼다.
‘음, 위지결 장로님은 안 보이시는군.’
매화검장이 자리를 비운 건 아직 예검수들의 훈련이 덜 끝났다는 걸 의미한다.
화산파에 온 김에 반가운 사람들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무래도 좀 아쉬웠다.
상궁에는 위지결을 제외하곤 화산의 수뇌들이 전부 자리해 있었다.
“얼른 보고하도록 하여라.”
명수악 조무양이 궁금한지 닦달했다.
전에 서신으로 남만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한 적 있었기에, 이번에는 중요한 사실만 집어 보고했다.
이미 한번 들은 것이나, 그래도 서신과 직접 말하는 것은 달라서 다들 귀를 기울이며 보고를 들었다.
암천회에 대한 것은 생략했다.
제갈중호는 무립맹에서 결론이 나올 때까지는 웬만해선 비밀을 유지해 달라고 부탁했다.
괜히 혼란만 부르며 곳곳에서 문의가 들어온다면 회의가 길어질 수 있다는 이유였다.
“화인의원에게 빚을 지게 만들다니, 정말로 장하다.”
단약사 영진이 껄껄 하고 웃으면서 좋아했다.
구할 수 없는 귀한 약도 화인의원을 통하면 얼마든지 조달해 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 모르는 것이 있다면 화인의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컸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이만 들어가도록 하여라. 정말로 고생 많았다. 화산의 자랑이로구나.”
학송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 아이가 이렇게나 대단해질 줄이야……’
철혈매검, 심옥련이 말없이 주서천을 쳐다봤다.
과거에는 사손의 훼방인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화산의 후기지수로 조명을 받더니 약관이라는 나이에 화경에 올라 천하백대고수가 됐다.
그뿐이랴.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하면서 실적을 쌓고, 화산파가 전성기를 맞게 되는 활약을 했다.
최근에는 중원도 아닌 남만까지 가서 야만족들과 싸우고, 납치(?) 당한 신의까지 데려왔다.
무림인들도 하나같이 매화정검의 이름을 부르면서 칭찬을 쏟아내고 있으니,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한편 화산파는 매화정검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다시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주서천 대협은 언제 볼 수 있습니까?”
그 광경이 무림맹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주서천이 가는 곳에는 항상 사람이 가득했다.
화산에 오기 전까지는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 다니고, 유령보로 모습을 감췄기에 피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소란의 중심인 주서천은 사람들의 방문을 전부 임무로 인한 피로를 핑계 삼아 거절했다.
또한, 혹시 사부인 유정목을 귀찮게 굴지 않도록 따로 엄히 말을 해두기도 했다.
성격 좋은 스승이기에, 이렇게 해 두지 않으면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할 게 뻔했다.
보고와 뒷정리가 대충 끝나자 소환령이 떨어졌다.
장문인의 집무실이자 기거하는 곳인 자하각이었다.
주서천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계단을 오르면서 자하각으로 향했다.
자하각.
“어서 와라.”
신선풍의 노인이 감은 눈을 슬며시 뜨며 인사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주서천이 부복하며 예를 올렸다.
“차 한잔하겠느냐?”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음.”
장문인이 직접 타준 차를 건네받아 마셨다.
한 모금 몸에 스며들자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부른 것인데, 놀라지 않는구나.”
“대충은 예상했습니다. 곧바로 부르셔도 되는데, 저를 배려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 타지까지 가서 고생한 문도이거늘, 어찌하여 그리하겠느냐. 이 장문인은 나찰이 아니다.”
우일문이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흘렸다.
주서천도 쓴웃음을 지으면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다시 차를 홀짝이기를 잠시, 우일문이 꿰뚫어 보는 눈빛을 번뜩이면서 입을 열었다.
“화산의 사대제자, 주서천은 들어라.”
“하명하십시오.”
“지금부터 묻는 말에 너는 거짓 없이 진실되게 답해야 할 것이니라. 만약, 이를 어긴다면……”
방구석의 책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안의 꽂힌 서적들 역시 빠져나올 듯 말 듯 움직였다.
‘이게 상천십좌란 건가!’
목이 죄여 오듯 숨이 막혔다.
몸이 의지의 제어를 떠나 잠시 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검림 (劍林) 한가운데 있듯, 조금만 움직여도 검에 찔리거나 베이는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특별히 그동안의 공을 생각하여 근맥을 절단하거나 단전을 폐하진 않겠다. 하나, 화산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밀지 못할 것이니 , 이를 명심하도록 하여라.”
“명심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자하신공의 출처를 말하여라.”
‘역시나.’
주서천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지었다.
자하신공은 십성에 오르면 은폐성은 사라지고, 도리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의 특징을 지닌다.
물론 소란을 일으킬 것 같아 화산에 와서 자색으로 된 강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검선에게는 무의미했다.
동일한 무공을 수련해서 그런지 십성에 오른 자하신공을 눈으로 보자마자 알아챘다.
동수나 하수라면 모를까 고수, 그것도 상천십좌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장로들에게 말하지 않고 너만 부른 건, 괜히 몰아붙여 네가 제대로 말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시간은 얼마든지 줄 테니, 차근차근 말해보도록.”
자하신공은 장문인에게만 허락된 무공이다.
예외는 없다. 정파의 영웅이라고 해도 문제가 된다.
타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설사 같은 화산파 출신이라고 해도 허가가 없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건 출처였다.
‘이 아이가 어떻게 자하신공을 얻은 거지?’
자하신공은 일인전승으로만 전해져 내려온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사본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구결도 한두 개 정도 빠져있는 데다가 습득 난이도가 워낙 해괴해 독학으로는 불가능하다.
전대의 가르침이 필수 불가결인데, 주화입마 없이 익힌 것도 모자라 무려 십성의 성취를 이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제부터 잘 말해야 한다.’
주서천은 머릿속으로 전부터 준비해 둔 말을 몇 번이나 되새김질했다.
자하신공과 자하검결은 시간이 지나면 무조건적으로 밝혀진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어릴 적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정말 몇 번이나 머리를 굴리고, 갖은 변명을 떠올리면서 의심받지 않을 답변을 준비해 뒀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답변을 내민 순간, 화산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
“매화에서 보았습니다.”
뜬금없는 답변이었다.
그러나 우일문은 뭐라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절정과 초절정의 벽을 허물면서 그다음 경지로 도약할 수 있었던 건 생사의 갈림길이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록 현생이 아닌 전생의 경험이었으나,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초절정으로 칠십여 년을 넘게 살다가 천명이 다한 걸 느끼게 되면서 화경에 오르는 데 도움이 됐다.
“매화기공에는 화산이 모르는 비밀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장문인께선 알고 계십니까?”
“화산이 모르는 비밀……?”
우일문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이것 역시 거짓말은 아니었다.
몇십 년 뒤, 전란이 지나고 평화가 찾아온 시대.
한 천재로부터 매화기공의 비밀이 밝혀진다.
매화생공. 매화나무와 공생하고 호흡하여 그 생명력을 조금씩 흡수한다.
느린 축기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사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훗날 태어날 후학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일부러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전부를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화경의 위에 있는 무언가를 봤습니다.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경계선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입니다.”
“허어, 벌써 그걸 보았다고?”
우일문이 진실을 추궁하는 와중에도 진심으로 놀란 듯 감탄사를 흘렸다.
벽을 보았다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그 이상의 것을 설명해 주자 남궁위무처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번 것 역시 거짓이 아니다.
구희의 신단을 복용하여 그 힘으로 어떻게든 넘으려다가 실패를 맛보고 결국 되돌아와야만 했다.
화경의 끝자락을 살짝 넘었지만, 그뿐이었다.
깨달음이 부족하니 그 이상의 세계를 보지 못했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아쉬움이 얼굴에 절로 드러났다.
“흐음……”
우일문이 눈부시게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먹혔나?’
주서천은 겉으론 드러나지 않고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거세게 뛰려는 심장을 필사적으로 제어했다.
여기서 거짓인 게 들키면 모든 게 끝장이다.
최악, 파문제자가 될 각오를 하고 화산파를 뛰쳐나와 암천회와 싸워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고심한 끝에 내놓은 거짓말이다.
완벽한 거짓말을 위해선 다소 진실이 섞여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나.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게 했다.
“그러니까, 네 말을 정리해 보자면 매화기공에 대한 비밀을 알아보다가 자하신공을 알게 됐다는 게냐?”
“예, 그렇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며 화낼 말이다.
화산파의 계자라면 누구나 거쳐간다는 기초 무공에 자하신공에 이르는 비밀이 담겨 있다고? 헛소리다.
그러나 전무후무한 천재라고 알려진 주서천의 경력과 여러 가지가 그 거짓말에 힘을 불어넣었다.
우일문은 한참을 생각하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과연,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건가……”
자하신공은 화산파의 일대신공이다.
그러나 이 일대신공이 최초의 무공은 아니다.
역사만을 따지자면 매화기공이 훨씬 길다.
화산 무공의 기초는 어디까지나 매화기공이다.
매화기공이 없다면 자하신공도 없다.
매화기공을 근간으로 하여, 수많은 세월과 경험이 쌓이면서 연구된 끝에 자하신공이 완성됐다.
“터무니없는 말이긴 해도, 근거 없는 말은 아니로구나.”
정말로 이론만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가능은 해도 그걸 현실로 옮기는 건 쉽지 않다.
개파조사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불가했다.
한데 그걸 장문인도 아니고 고작 약관의 사대제자가 해냈다는 건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디 사대제자가 보통 사대제자인가.
약관에 화경에 오르고, 그 위의 것까지 본 천재다.
이 밑바탕이 근거를 사실적으로 만들었으며, 이게 아니라면 지금 상황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사본을 훔쳐서 어찌어찌 보았다고 할지라도, 결국 장문인이 전수하지 않으면 수련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믿음이 가는 건? ‘위’의 경지였다.
“흠, 과연 이게 ‘과정’ 이라면…… 확실히……”
우일문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일다경 후.
우일문이 중압감을 풀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프게 됐구나.”
‘휴우.’
아무래도 위험한 순간은 넘긴 듯했다.
그러나 아직 안도하진 않았다.
스스로가 한 말이긴 하지만 이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억지인 줄 알고 있었다.
자하신공의 원리와 그 구성은 매화기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다.
빠진 구결도 어떻게 매울 수가 없는데, 그걸 스스로 깨우쳤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하면 무엇이 우일문을 수긍하게 만들었을까?
그 의문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고 해소됐다.
“네가 정말로 벽 이상의 무언가를 보았다면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으나, 조언을 해 주마.”
“장문인의 말씀을 귀담아듣도록 하겠습니다.”
주서천이 긴장한 와중에도 눈을 반짝였다.
상천십좌 검선의 가르침이다.
남궁위무처럼 무엇 하나 놓칠 수는 없었다.
“혹시 몰라 말하는 것이지만, 조언을 듣되 결코 담지는 말아야 한다. 또 해답일 수도, 해답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으니, 이를 명심해야 한다.”
“그러하겠습니다.”
“화경의 위의 단계가 무엇인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 정한 건 아니나, 현경(炫境)이라 부르니라.”
“현경……”
생소한 이름이었다.
화경의 위를 부르는 명칭은 딱히 없다.
그 대선, 상천십좌처럼 시대에 따라 절대자를 부르는 이름이 존재하였다.
굳이 따지자면 절대고수였다.
“빛날 현 자를 써서 빛나다, 비추다, 자랑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자, 어떤 의미일 것 같으냐?”
“빛나다…… 입니까?”
“‘자랑하다’ 이다.”
의외의 대답에 조금 놀랐다.
자랑하다, 는 잘못 보면 거만하게 느껴지는 표현인지라 답과는 거리가 제일 멀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선인이라고도 존경받는 우일문은 과시욕 같은 건 초탈해서 아닐 것이라 장담했다.
하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주서천이 의아한 눈길로 우일문을 쳐다보자, 화산의 장문인은 수염을 매만지며 살짝 미소 지었다.
“자존(自尊)일 수도 있고, 자존(自存)일 수도 있느니라. 무엇이 되었든 정말로 중요한 건 자신( 自信)이다.”
‘자신!’
남궁위무의 조언과는 완전히 같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라는 말은 동일했다.
“화경이란 게 무인이 쌓아 올린 무학(武學)의 극의라면, 현경이란 미지의 영역을 향한 도약이자 모험이며, 동시에 창조이니라.”
그리고 의미 모를 말이란 것도 공통됐다.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 천하에 자랑하고, 알리고, 빛내 보거라. 하나 그렇다고 거기에 고집했다간 영영 알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것조차 집착하게 된다면 역시 답을 구하진 못할 것이니.”
‘뭔 개소립니까?’
하마터면 장문인 앞에서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하면 도리어 방해가 될 것 같으니 그만하도록 하마.”
“불초가 몹시 아둔하고 부족하여, 장문인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때가 되면 저절로 이해할 것이니 조급해할 필요 없다. 어쩌면, 네가 자하에 뜻을 두었다면 신공이 그 ‘과정’이 될 수도 있겠구나.”
‘미치고 팔짝 뛰겠군!’
자하에 뜻 같은 걸 둔 적은 없다.
자하신공에 대한 건 전생에 관한 걸 이야기할 수 없어서 그럴싸하게 포장해 거짓말을 한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여기 와서 ‘전부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그냥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십시오.’ 라고 할 순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이 상태를 보아하니 솔직하게 고한다고 해도, 현경에 확실히 오를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물어봐도 의미 모를 답변만 돌아오고, 본인도 마음엔 두지 말라 했으니 포기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문제로구나.”
이번에는 우일문에게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하신공은 그 특색이 워낙 강하여,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세를 방출하는 것 정도는 괜찮으나, 강기를 내보인다면 장님이 아닌 이상 알아볼 게다.”
기의 유형화, 그것도 자색인 것은 오로지 하나뿐.
자하신공 외에는 없다.
이에 대한 특성이 워낙 잘 알려져 있기에 무림인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까지 아는 정도였다.
“본 문의 제자가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은 좋으나, 마냥 기뻐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쉽구나.”
우일문이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