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章 (125/254)

고수가 깨달음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폐관 수련에 들어가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다.

일주일, 이 주일 정도 연락 하나 없이 연무장 바깥으로 나오지 않아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인이 아닌 의원인 신의는 불만이었다.

“혹시 도중에 주화입 마에 빠져 위독한 상태일 수도 있지 않은가?”

구희의 신단을 복용한 뒤의 반응이 궁금했다.

마음 같아선 문을 박차고 얼른 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호법을 선 단하성 등이 기겁하면서 뜯어말렸다.

“자칫 잘못하면 큰일이 나는 건 신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운기조식의 경우는 직접적으로 손을 대지 않는 이상 괜찮지만, 깨달음의 경우는 좀 다르다.

원래의 환경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어떠한 소음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는 데 실패할 수도 있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를 확률로 그리된다면 원수가 되어도 할 말이 없다.

특히나 이류나 일류도 아닌 화경의 고수가 깨달음을 얻을 것 같다면서 들어가지 않았는가.

신의 역시 무인은 아니지만, 무림인인지라 그러한 상식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의원으로서의 원초적인 호기심이나 탐구심 등이 괜스레 촉박하게 만들었다.

“쩝.”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그러나 그 답답함도 잠시, 하늘도 그 마음을 알아준 건지 그 날 저녁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오! 드디어 끝났는가!”

신의가 백 년은 기다린 것처럼 주서천을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주서천이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인사했다.

옷은 누더기처럼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는데 , 거지꼴과 다르게 눈만은 어딘가 모르게 맑고 투명했다.

호수를 연상시키는 눈이었다.

“주 대협, 수고 많았네.”

단하성도 환한 얼굴로 주서천을 반겨 줬다.

“혹시, 계속해서 호법을 서 주신 겁니까?”

주서천이 단하성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구희의 신단을 복용한 뒤에 지하 연무장에 틀어박힐 당시에도 단하성이 문 앞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나, 제법 지난 것 같았는데 단하성이 같은 자리에 있으니 놀랄 수밖에.

“당가와 교대로 호법을 섰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보다, 눈을 보아하니 성취가 있는 듯한데……”

“그리 대단하진 않지만……”

주서천이 조금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참 경사로군! 정말로 축하하네!”

단하성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웃어 주었다.

그저 말뿐만이 아니라 진심이 느껴졌다.

‘좋은 사람이다.’

거의 아들뻘이나 되는 무인이 또 성장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거기에 질투도 느끼기 마련인데, 단하성은 거짓 하나 없이 순수하게 축하해 줬다.

“경사로군, 경사야. 그것보다 꼴이 말이 아니구먼.”

그에 반면 신의는 예의상 축하의 인사를 건네곤, 눈을 반짝이면서 손목을 낚아채 진맥을 짚었다.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면 큰일이니 얼른 진료를 봐야겠네. 안 그런가?”

‘의술에 미친 늙은이.’

주서천이 질린 듯이 혀를 내둘렀다.

하기야, 이렇게 미쳐야 신의 정도는 되지 않겠나.

“제가 들어간 지 얼마나 됐습니까?”

“보름일세. 방해되니까 입 좀 다물게나.”

불만이 입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보름이나 됐어?’

사방이 막힌 곳이라 시간의 흐름은 확인할 수 없었다.

체감상으로 ‘일주일 정도 지났겠구나.’ 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제법 지났다.

신의는 그동안 지어 본 적 없었던 진지한 표정으로 진맥을 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여전히 나이에 맞지 않은 내공일세. 하나, 이상하게도 전과 비교해선 그리 많이 늘지 않았군.”

신의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청석유야 ‘조화’에 쓰였으니 내공을 얻지 못한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희의 신단은 달랐다.

신단이 품은 양기가 얼마나 방대한지는 그것을 제조한 신의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한데 그걸 복용했는데도 내공 양의 증가가 생각보다 적었다.

신의가 의아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자, 주서천은 예상했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곤 눈동자를 옆으로 돌려 뒤에 서 있는 단하성에게로 옮겼다.

“단 대협,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알겠소. 위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단하성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갔다.

지하 연무장의 정문 앞에 둘밖에 남지 않자, 주서천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팔을 슥 그었다.

벌어진 피부 위로 핏방울이 피어오르며 한일자를 그었고, 신의는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일각이 다 지나기 전에 신의의 입에서 억 소리가 났다.

“그런가! 이것이 불로불사의 정체였군!”

누더기로 된 천으로 피를 슥 닦아내자, 검에게 벌어진 피부가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극양의 단면. 생명의 원천으로 인한 회복 능력의 극대화였구나!”

구희는 불사의 요정이다.

그러나 그 힘의 원리 등은 신의 영역.

사람이 오를 수 없었다.

그래도 그 후예들은 구희의 피를 이어 불로불사는 아니나,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회복이 빠르고 노화도 늦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조상인 구희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구희의 피를 이용해 여러 실험과 단약술을 연구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구희의 신단.

화의 화신인 극양기로 생명력을 극대화해 불사에 가까운 재생력을 얻은 것. 요컨대 자유 치유 능력의 고속화였다.

‘아쉽지만 벽을 넘을 수는 없었군.’

구희의 신단의 힘을 빌려 어떻게든 그다음의 경지에 오르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대로 간단하지 않았다.

무공의 성취가 없었던 건 아니다.

열여덟 살 이후로 변동이 없었던 자하신공에서 변화가 생겼다.

팔성에서 십성까지 단번에 오를 수 있었으니, 나름 희소식이었다.

자하신공은 원래 십성 이전까진 제대로 된 효력을 내지 못한다.

거의 반절 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동안은 내공으로 밀어붙였던 것에 불과했는데 , 이젠 그러한 쓸데없는 내공의 소모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자하검결 역시 동일하게 강해지리라.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자하신공을 숨길 수 없다.’

혹시 모르는 마음으로 검 끝에 강기를 만들어 봤는데 , 전처럼 희미하지 않고 눈에 띄는 자색이 보였다.

강기처럼 유형화할 경우, 이렇게 자하신공의 특성이 확연하게 보였다.

은폐성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자하신공이야 어차피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역시 경지를 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구나.’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지가 아닌가.

전생에서 이루지 못한 영역에 도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영역이란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무리 신단의 힘을 빌렸어도, 벽을 뚫진 못했다.

정말로 그다음 경지에 오르려면 깨

달음이라는 계단을 타고 올바른 수순을 밟아야만 했다.

괜히 정도(正道)가 아니었다. 편법은 용납받지 못했다.

환골탈태나 한서불침 등의 신체 개조는 가능했지만, 경지를 올리는 것만큼은 불가능했다.

“괜히 불로불사의 약으로 전해지는 게 아니었군.”

신의는 한참을 주서천의 몸을 살펴보더니, 이윽고 만족한 듯이 웃으면서 맥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확실히 , 상처가 어떠한 약도 없이 저절로 눈 깜짝할 사이에 재생된다면 불사로 전해져도 이상하지 않다.

아마 노화 역시 늦어지는 효능을 지녔을 것이다.

“협력해 줘서 고맙네.”

신의는 등을 돌리더니, 생각의 정리를 하듯 혼자서 의학 용어를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서천이 나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더니만, 이젠 별 관심도 없어 보였다.

“신의께 제안이 있습니다.”

주서천은 신의가 자기만의 세상에 빠지기 전에 얼른 그를 불러 세웠다.

“제안?”

신의가 중얼거림을 멈추고, 다시 몸을 돌리더니 수염을 매만지면서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예, 정확히는 부탁 겸 제안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영약 중에 감정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흉마의 무덤이라거나 혹은 암천회를 쓰러뜨리면서 얻게 된 부산물이었다.

금의상단으로 전부 보내서 감정을 의뢰했으나, 그중 몇몇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네.”

“몇 개는 암천회에서 얻은 겁니다.”

“흠, 그럼 보기라도 해 볼까?”

신의가 태세를 곧바로 전환했다.

공청석유나 되는 영약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구희의 신단이라는 소재를 알고 있던 암천회다.

그 단체에서 얻어 온 것이라고 하니 관심을 보였다.

“제안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귀한 영약이나 내단을 보여 드리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복용 후의 효능 역시 자유롭게 기록해도 상관없습니다.”

“흘흘흘, 내주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이라. 제자들이 근처에 없는 걸 다행으로 알게. 아마 그 말을 들었다면 ‘건방진 놈! 어딜 뚫린 입으로 말하는 거요!’ 라면서 발광을 떨었을 걸세.”

신의가 누구인가.

천하의 무림맹주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돈을 주면서 감사 인사는 못할 망정 제안이라면서 ‘보게 해 준다.’ 라는 건방진 소리를 했다.

화인의원이나 신의에게 빚을 진 사람이 있었더라면 화를 참지 못하고 욕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그러나 신의에게 그런 건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그것보단 귀한 영약과 내단의 소재가 더 중요했다.

‘부디 그것들이 신의의 관심을 끌어야 할 텐데.’

신의가 시원스레 받아들인 건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흥미를 끌 만한 걸 제시하면 얼마든지 암천회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이렇게, 임시적이나 신의와 그 뒤에 있을 화인의원의 협력을 구할 수 있게 됐다.

신의에게 약조를 받아 낸 주서천은 엉망이 된 옷을 갈아입을 겸 배정된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연무장 바깥으로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무림맹주, 남궁위무가 뒷짐을 쥔 채로 서 있었다.

설마하니 무림맹주가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던지라, 주서천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인사했다.

‘이 능구렁이 영감이 무슨 일이지?’

무림맹주가 직접 찾아온 것이니 보통 일은 아닐 터.

피곤이 싹 가시며 긴장감이 찾아왔다.

“내가 널 잡아먹거나 탓하러 온 것은 아니니, 그리 긴장할 건 없다. 편히 있거라.”

남궁위무가 옆집 할아버지처럼 미소 지었다.

그러나 옆집이 아닌, 무림맹주이자 상천십좌인 검성이다.

결코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깐 걷지 않겠느냐?”

아무래도 작정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인기척 하나 없었다.

“송구하오나 제가 지금 방금 막 연무장에서 나왔는지라, 차림새가 볼품이 없어……”

“걱정 없다.”

남궁위무가 엄지와 중지를 부딪치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흑의인이 나타났다.

흑의인은 잘 정돈된 도복을 주서천에게 건네곤,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철검암영대(鐵劍暗影隊)!’

정파의 무림맹 내에는 여러 부대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최강으로 일컬어지는 부대가 철검암영대였다.

다만 규모나 구성원이 전부 특급 기밀이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무림맹주뿐이었다.

알려진 것이라곤 어떠한 불가능한 임무도 해결한다는 것, 그리고 전부 최소 절정의 고수라는 점이었다.

전란의 시대가 끝난 후에도 이들에 대한 정보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아서 주서천도 잘 몰랐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머릿속으로 철검암영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도복을 건네받아 제자리에서 갈아입었다.

소매 안을 힐끗 살펴보니 자수로 새겨진 매화가 보였다.

만나려고 작정하고 준비한 모양새인데, 무슨 말이 나올지가 궁금해졌다.

“일단 장소부터 옮겨야겠다. 이 근처의 사람들을 물리긴 했지만, 그래도 보는 눈이 많을 것 같으니까.”

남궁위무의 뒤를 따라 무림맹 본관에서 반 시진 정도의 거리에 있는죽림으로 이동했다.

전에도 와 본 적 있던 은신처였다.

“흡!”

발을 내민 순간, 적의가 쏘아져 왔다.

남궁위무가 등을 돌려 검 끝으로 목덜미를 찌르는 게 그려졌으나 그게 실현되지는 않았다.

전에는 은신처에 도착하자마자 실력을 보겠다며 검초를 날렸지만, 이번엔 다행히도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호오.”

남궁위무가 기세를 거두면서 감탄사를 흘렸다.

“그새 안 본 사이에 성취를 또 이루었구나. 나도 네 나이 때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적의와 살의를 섞어 날렸는데, 물러나기는커녕 몸을 살짝 움츠리는 걸로 끝냈다.

“마음의 준비를 해 둬서 그렇습니다.”

주서천이 전의 일을 떠올리며 속으로 욕했다.

“암천회.”

남궁위무의 입가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주서천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이 있지 않느냐?”

‘과연, 무림맹주.’

주서천이 짐짓 감탄했다.

무림맹에 암천회에 대해 전부를 보고한 건 아니다.

여러 사정이 겹쳐 몇 가지를 숨겼다.

그중에는 전생에 대해 알리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지만, 또 다른 사정이 있었다.

“그들에 대해서 믿어 주시는 겁니까?”

“흥, 믿는다는 전제가 아니라면 널 이리로 부르지도 않았다.”

대나무 숲 사이에서 등이 굽은 노인이 걸어 나왔다.

무림맹의 군사, 제갈중호였다.

“네 말대로라면 그 암천회란 것들이 맹 내부에도 누군지도 모를 첩자를 숨겼다는 의미인데……”

제갈중호가 주름 가득한 눈살을 찌푸렸다.

“나름대로 머리 좀 쓴다는 네 녀석이 그들이 듣는 앞에서 모든 걸 말할 리 없지 않느냐.”

주서천이 동의하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군사님이십니다. 눈치채 주실 줄 알았습니다.”

원래라면 무림맹에 도착하자마자 말하려 했다.

그러나 신의가 옆에 붙어 다니며 신단을 언제 복용할 거냐고 묻는 탓에 그럴 수 없었다.

마침 그때 여러 방문자들이 귀찮게 굴기도 했고, 무림맹주와 군사도 바빠 보여 나중을 기약했다.

다행히도 지하 연무장에 나오자마자 남궁위무와 제갈중호가 눈치를 채고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줬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서천도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무림맹의 수뇌부, 또는 정파의 수뇌 중에서 누군가 한 명, 암천회의 간부가 숨어 있습니다.”

남궁위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추성 (天樞星).’

칠성사의 일곱 기관은 각각 맡은 바가 다르다.

천기성은 두뇌이며, 천선성은 정보이다.

천권성은 균형과 간자, 옥형성은 암살과 배신자를 배제하기 위한 감시대다.

개양성은 소수 정예로 된 힘이며, 요광성은 ‘병사’로 칠성사병의 대부분이 이 요광성에 속하는 편이다.

마지막으로 천추성이 맡은 역할은 ‘중심’으로서, 요컨대 중간 관리자 등의 간부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밝혀지진 않았으나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다거나 자금이나 인맥을 내줄 수 있는 인재 등이 분포해 있다.

“그 머리가 맹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더냐?”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끄나풀이 수뇌에 있을 확률은 높습니다.”

전란의 시대 이후 암천회에 대한 정보는 대략적으로 알려졌으나 여전히 비밀인 것도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를 꼽자면 천추 본인이었다.

천추는 정파의 인물이란 것 외에는 밝혀진 것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그 외의 정보는 전부 은폐됐다.

‘전란의 시대로 인해 무림은 멸망 직전까지 갔다. 그런데 그 직접적인 원인인 암천회의 간부가 무림맹이나 주요 정파의 수뇌였다는 게 알려진다면 그 여파는 감당할 수 없을 거야.’

당시 정파는 평화를 겨우 손에 쥐었으나, 세력이 반 토막 나서 회복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인재가 부족해 나 같은 사람을 장로로 삼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 그런 와중에 구심점 하나가 박살이 나는 걸 정파가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을 거야.’

전란의 시대는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세력이 전성기의 반절도 되지 않았다.

돈이 부족해 파괴된 구조물조차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태여서 힘이 약해진다면 그 미래는 어떻게 될지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정파의 선택은 오로지 하나. 차후 화근이 될 정보를 극소수만 알고 배제한다.’

천추에 대한 건 화산오장로의 권위로는 부족했다.

그렇다 보니 암천회의 중심인 천추성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전무하다 할 정도로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에 대해 조사하려면 은밀함과 무림맹 내의 고위 인물의 도움이 필요했다.

‘천기, 요광, 개양, 천추…… 그리고 암천회주. 남은 건 다섯 명. 내 기필코 너희를 찾아내겠다.’

주서천은 암천회 수뇌의 이름들을 곱씹으면서 다짐했다.

“후우……”

남궁위무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갈중호의 반응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막막하군.”

마음 같아선 첩자를 잡아내고 싶었지만, 그 첩자가 고위의 인물이라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괜히 섣불리 의심이라도 했다간 그 뒤에 있을 세력이 불쾌해하며 따지고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쪽의 움직임이 알려진다면 경각심이 높아져 숨어 버릴 수가 있다는 걸 주의해야 한다.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그 외에 말할 건 또 없느냐?”

“그 외에는 없습니다만…… 회의가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궁금하군요.”

제갈중호의 물음에 주서천이 답했다.

무림맹 회의가 시작된 이후, 거의 곧장 지하 연무장에 틀어박혔으니 내용을 듣지 못해 궁금했다.

“그리 간단히 결론이 날 안건이 아니더구나.”

남궁위무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신의나 점창칠공자, 독봉 등의 의견이 수렴됐다곤 하지만 바로 수긍할 리는 없었다.

중원 무림을 뒤에서부터 조종하는 배후 세력.

명예를 비롯해 자존심이라면 하늘을 찌르는 정파인들이 그러한 사실을 듣는다 해도 쉽게 인정할 리 없어서, 시간이 제법 걸릴 듯했다.

어떤 이들은 자존심 탓에 콧방귀만 꼈지만, 그래도 몇몇은 믿어 주며 혹시 내부에 첩자들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싶은 불안감에 따로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그렇군요.”

주서천이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예상한 일이었다.

전생에서도 암천회가 대대적으로 나서기 전까진 그 누구도 그들에 대한 존재를 알지 못했다.

약간의 정보가 새어 나갔는데도 망상일 뿐이라며 코웃음 쳤다.

심지어 전란의 시대가 한창일 무렵에도 끝까지 믿지 못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결국 그 오만함과 불신이 파멸을 불렀고, 벼랑 끝까지 내몰린 상황이 돼서야 전원이 믿게 됐다.

아직까진 시간이나 사건이 필요한 일인지라 성급하게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무림맹 최고 권위자가 아군이 되어 주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 같아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사정상 그러기가 힘들 듯 싶습니다.”

“아니, 이 중요한 때에 어디 가려고?”

제갈중호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사문에는 보고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서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끙.”

제갈중호는 여전히 불만 어린 표정이었으나, 뭐라 하지는 못했다.

도중에 무림맹이 걸친 의뢰이긴 했으나 화인의원은 화산파에 의뢰를 맡겼으니, 직접 보고는 필요했다.

피치 못한 사정이 있다면 서신으로 대신해도 괜찮지만, 그런 게 아니니 직접 갈 필요성이 있었다.

“그나저나, 내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느냐?”

남궁위무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화산에 가기 전에 내 부탁 하나만 함세.”

“부탁이라면 ……?”

“내 손녀랑 한번 대면 좀 하지 않겠는가?”

“……”

주서천이 할 말을 잃었다.

무림맹주씩이나 되는 양반이 잔뜩 분위기를 잡고 말하길래 뭔가 했는데 설마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옆에 있던 제갈중호도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오랜 벗을 보고 욕했다.

“에잉, 쯧쯧. 보는 눈 없다고 추태를 부리는 것 좀 보소. 정신 좀 차려라, 정신 좀 차려! 이 영감아!”

“쩝.”

남궁위무가 제갈중호의 힐난에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어차피 이 녀석은 내 손녀하고 재미보고 있는 중이니까 쓸데없는 훼방 놓지 말게나.”

콜록 콜록!

주서천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기침을 토해 냈다.

제갈중호는 주서천이 당황하건 말 건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자기 말을 막힘없이 쏟아 냈다.

“자네 손녀는 끼어들 틈이 없어요, 틈이. 내 얼마 전에 들었는데 저 녀석이 전에 수란이가 진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하더라고? 미래에 부부가 될 예정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화합이 좋아!”

제갈중호가 껄껄 하고 웃어 댔다.

“뭣? 그게 사실이더냐?”

남궁위무가 눈을 부릅뜨면서 물었다.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 이상 볼일이 없으시다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주서천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흠, 늙은이들이 잠시 추태를 보여 줬구나. 미안하다.”

남궁위무도 머쓱한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바꿨다.

“무엇을 보았느냐?”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목소리.

특히, 그 눈과 마주 보면 속내의 깊숙한 곳까지 꿰뚫리는 것 같았다.

주서천은 남궁위무의 질문에 놀라워했다가, 이내 감정을 추스르며 질문의 의도를 깨닫곤 답했다.

“벽, 아니 그 이상의 것을 보았습니다.”

화경을 앞둔 벽과는 수준이 달랐다.

마치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경계의 선처럼 뛰거나 날아서 넘어갈 수는 없을 거라고 느꼈다.

“허어, 네 나이에 화경이란 경지도 괴상망측한데, 벌써 그 앞까지 가다니……”

남궁위무가 비꼬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갈중호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무(武)의 경지에 대한 토론인가 하고 유추할 뿐이었다.

“성급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도리어 집착하게 된다면 영영 도착하진 못할 테니까.”

주서천은 남궁위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결코 잊지 않도록,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기면서 집어넣는데 바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상천십좌에 속한 절대고수의 가르침이다.

값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다.

“그러하면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답은 간단하다.”

남궁위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알아서 해라.”

“예?”

“네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나 외의 상천십좌에게 물어봐도 답은 같을 게야.”

주서천은 남궁위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이란 것이 본디 다를진대, 어찌 그 깨우침이 같겠느냐?”

남궁위무는 부드러운 눈길로 후학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자신(自身)이 되겠구나. 또한, 과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되 그걸 전부 놓지 않도록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걸 잃게 될 것이야. 너와 난 적어도 승려는 아니니 말이다.”

“……?”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욕심을 버리되 그걸 전부 놓지 않아야 한다니.

그리고 자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부터 열까지 수수께끼였고, 뜬구름 없는 말이었다.

머리를 굴려봐도 아는 건 없었다.

상천십좌의 가르침을 머릿속에 넣긴 했는데, 차분히 곱씹어 봐도 고개만 옆으로 기울여졌다.

“뭔 개소리야?”

제갈중호가 주서천의 마음을 대변하듯 중얼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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