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 앙!
불타오르는 시퍼런 안광.
그리고 도감부장의 육신 역시 번찍이면서 사라졌다.
정확히 말해선 사라진 게 아니다.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여서 착각한 것뿐이다.
‘자하검결!’
방금 전에는 그래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것은 아니다.
도저히 쫓을 속도가 아니었다.
사람의 한계를 벗어난 속력이었지만,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있었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전력, 공기의 진동, 바람이 어떻게 갈라지는지 등의 외부 정보로 방향을 읽었다.
‘자하개벽!’
위이이잉!
검을 쭉 뻗자, 무섭게 회전하는 강기가 쏘아졌다.
‘화우선형!’
검이 부챗살처럼 펴진다.
일직선이 여러 선으로 나누어지면서 한꺼번에 쏘아졌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그 방향은 위를 향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세 번째 변화를 겪었다.
‘제삼식, 적하매장(赤霞梅藏)!’
위를 향해 한꺼번에 뻗어 가던 수십 개의 검이, 방향을 아래로 틀어 한데 모이면서 폭포처럼 쏟아졌다.
콰과과과과과과!
도감부장이 이성을 잃고 본능에 몸을 맡긴 건 실수였다.
그렇지 않아도 벽력신권은 대부분의 초식이 위력은 높으나 단순하여 읽기 쉬운 편에 속했다.
거기에서 생각을 멈췄으니 ‘나 이렇게 공격한다.’ 라고 큰소리 뻥뻥 치는 꼴이나 마찬가지 였다.
그래서 그 경로를 읽고 자하검결의 초식을 계산하여 완벽한 순간을 노려서 전력을 쏟아 냈다.
“끄아아악!”
어깨 위를 짓누르는 검의 비.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휘황찬란한 자색의 폭포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 광경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워 , 주변에서 숨죽이며 지켜보던 이들조차 무심코 감탄을 터뜨렸다.
정면으로 돌격했으나, 그 몸은 무사하지 못했다.
검으로 된 폭포가 온몸을 꿰뚫어 구멍을 냈다.
누가 봐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 판단할 상황.
몸에 호신강기를 둘렀지만 정면으로 맞았기에 버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나 싶었다.
하나,
주서천은 방심하지 않는다.
주서천은 안심하지 않는다.
주서천은 자만하지 않는다.
‘제사식(第四式).’
붉은빛으로 물든 폭포가 지면에 떨어진 순간, 천지가 진동한다.
세상이 붕괴된 것처럼 흔들린다.
정확히는 한곳을 노리고 폭사된 강기의 양에 지반이 무너지고, 박살 나고, 충격파에 공기가 터졌다.
그리고 그 폭포는 도감부장의 육신을 꿰뚫고 아래로 떨어졌다가, 사라지지 않고 공중으로 떴다.
“교탈조화(巧奪造化).”
의식이 꺼져 가는 중에도 도감부장은 눈이 뒤집어진 채로 피를 울컥 토해 내며 원망과 분노의 외침을 흘렸다.
“네, 이놈…… 주서천……”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주서처어어어어어언-!”
쏴아아아아아!
폭포는 공중으로 떴다가 구름이 되고, 이윽고 소냐기처럼 굵은 빗줄기가 된 검편이 쏟아졌다.
콰과과과과!
살이 찢긴다. 팔이 잘렸다가, 수십 조각으로 나뉘며 고기 조각으로 변했다.
수백 개가 넘는 구멍이 난 그 육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갈기갈기 찢겼다.
와아아아아아!
청화 연합군의 함성이 우레와 같이 퍼졌다.
연합군의 깃발이 여기저기서 바람에 나부꼈다.
약 일주일 동안 이어진 대수림의 내전(內戰).
세력 다툼에서 승리를 취한 건 청화 연합군이었다.
충왕, 독충 부족이 주요 부족이 아닌 연합군에 합류하는 것만으로 승부는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일당백이라 일컬어지며 남만 최강의 부족이라 칭해지는 구희 부족도 전력의 수 차이가 컸다.
설상가상으로 독충 부족이 적으로 돌변했으니, 구희 부족 입장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중원에 의하여 대월의 정권이 무너진 이후, 오로지 힘으로만 대수림을 지배한 야만족의 몰락이었다.
나흘 뒤.
“약조는 지켜야 할 거요.”
여리가 몇 번이나 강조했다.
물론이다.
충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흘 전, 충왕은 주서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부족의 비원이었던 신공, 녹안만독공 그 구결을 전해 듣는 것을 대가로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로 간에 영역을 밟지 않기로도 약조하였다.
애초에 독충 부족의 입장에선 주거지야 만독지 내이고, 외부에 나갈 일이 별로 없어 상관없었다.
연합군 역시 만독지는 위험하여 원래부터 얼씬도 하지 않는 장소였으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그들을 놓아주어도 정말로 괜찮겠소?”
“한때 주요 부족이라 불리며 온갖 행패를 부리던 자들이 아닙니까?”
“삼 년 전 , 내 의동생이 그들의 벌레에게 물려 일주일 동안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가 죽었소.”
그러나 전부 환영을 한 건 아니다.
일부, 아니 상당히 많은 이들이 불만을 품고 반대하기도 하였다.
괜히 야만족이 아니다.
그동안 대화가 아닌, 힘으로 약탈하며 온갖 패악을 부렸다.
지금은 사라져 없는 식인 부족이나 야수 부족보다는 인원이 적어 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때 주요 부족이었다.
반감을 가지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하다.
“어차피 다 합해도 오백 밖에 되지 않은 숫자요. 두려워할 필요가 뭐가 있겠소?”
여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수뇌부의 중재에 나섰다.
“그거야말로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이 맞습니다. 언제 또 송곳니를 드러낼지 모르는 야만족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이야말로 호기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말이 좀 통한다 할지라도 야만족은 야만족이다.
그동안 대화를 하지 않고, 오로지 힘만 내세우지 않았는가.
언제 또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씨족 하나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진정하십시오. 그동안 승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군대가 많이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완채가 나서서 수뇌를 설득했다.
“고작 오백밖에 되지 않은 숫자이나,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다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독충 부족이 사백여 명, 구희 부족이 백여 명.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전혀 그렇지 않다.
이들이 죽기 살기로 덤벼 온다면 어찌 될지 모른다.
“무엇보다 중원의 수색대, 주서천이 더 이상 돕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설사 어찌어찌 이긴다 해도, 연합군은 괴멸 직전까지 갈지 모른다.
“끄응.”
“그렇다면, 뭐……”
주서천이 참전하지 않는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들 입맛을 다시며 포기했다.
마음 같아선 남만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미인계를 사용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뭐가 그리 급한지 벌써 돌아갈 채비를 끝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평화 조약을 맺어야만 했다.
“독선의 진전을 이은 자여, 신공을 돌려준 것에 감사한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해라. 청화 토호와의 약조에서도 그대가 도움을 요청할 경우에는 만독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항이 있으니 부담을 가질 것 없다. 우리는 형제이니.”
충왕에게서 주서천에 대한 적의는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비원을 이룬 덕분인지 호의만 남았다.
“너희 같은 형제 둔 적도 없다. 오해를 부를 만한 발언은 그만둬라.”
독선이라 하면 독마를 뜻한다.
화산파의 제자, 그것도 정파의 영웅이 독마의 후예라는 소문이라도 난다면 입장이 난처해진다.
그리고 중도만공의 특성상, 반절 밖에 익히지 못했으니 진전을 잇지 못했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중원인 구희와의 약조도 잊지 말거라. 만약 전의 놈처럼 허튼짓을 했다간 용서하지 않겠다. 그리고 아무리 협박당했다 해도 본 녀를 속인 것이 괘씸하니 그 의원의 목은 놓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니라.”
구희 부족과도 협상을 했다.
당연하지만 그 내용은 독충 부족과는 사뭇 달랐다.
“차였는데도 잊지 못하고 쫓아다니는 변태 남정네처럼 굴지 말고 그만 포기해라. 그 대신, 독충 부족이 신단의 제조를 다시 한번 돕는다고 약조했으니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걱정할 것 없다, 구희의 여족장이여. 나 충왕은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니 믿어도 좋다.”
독충 부족의 숙원이 녹안만독공이라면 구희 부족의 숙원은 오랫동안 만들지 못한 신단의 제조다.
이들이 신비 부족이라 칭해지며, 괜히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게 아니다. 제조의 과정만으로도 부족 전원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서였다.
“그나저나, 좀 살살 하지 그랬느냐. 그것도 하필 강에서 그 난리를 피우느라 신단을 잃어버리다니……”
구요가 힐난의 눈초리를 보내 오며 중얼거렸다.
주변을 살살이 뒤져 찾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물살이 워낙 거세 잃어버린 순간 이미 끝났다.
처음에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화를 참지 못하고 도감부장의 시신을 찾아 짓밟고 불살라서 버렸다.
여하튼 서로 간에 아직 미련이 남았으나, 현실적인 사정을 고려하여 평화 조약을 맺게 됐다.
충왕과 구요는 각각 부족을 이끌고, 만독지의 보이지 않는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여리가 주서천의 손을 맞잡은 채 허리를 숙였다.
얼마 전에는 고마움 반, 두려움 반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눈빛에 감사함과 경외심이 담겼다.
“그 뇌옥에서 식인귀의 뱃속에 언제 들어갈지 몰라 벌벌 떨던 제 목숨을 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이라 여겼던 주요 부족의 토벌을 앞장서서 도와주시고 승리를 거머쥐게 해 주신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이 청화의 토호, 여리. 대수림의 영웅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드립니다.”
여리가 감정이 격해졌는지 눈을 글썽였다.
“감사드립니다.”
군사, 완채도 여태껏 해 왔던 하오체를 거두고 존경을 담아 인사했다.
겉치레가 아닌 진심이 느껴졌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주서천이 오묘한 감정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대수림의 영웅. 즉, 남만의 영웅이 아닌가.
남만이 망한 건 중원, 명나라 탓이다.
따지고 보면 원수의 나라 사람인 입장인데 영웅 취급을 받으니 기분이 참으로 기묘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영웅의 부탁이라면 한걸음에 달려가겠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아니, 부탁이니 오지 마시오.”
주서천이 정색했다.
주요 부족은 그렇다 쳐도, 대월의 후인이라는 청화 연합군이 국경을 넘으면 사정이 심각해진다.
최악, 남만이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돕는다고 판단되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주서천은 혹시 몰라 여리와 완채에게 사정을 설명한 다음, 몇 번이나 명심해 달라며 강조했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고, 며칠만 더 묵고 가십시오. 영웅을 푸대접했다고 남들에게 욕먹을지도 모릅니다.”
“토호께서도 뒷정리로 바쁘시고, 제가 끼어들면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전쟁에 승리했다고 끝난 게 아니다.
그 뒷정리는 언제나 머리 아픈 법이다.
하물며 남만이라는 영토의 세력의 판도가 바뀌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다.
주요 부족 탓에 이 땅이 워낙 개판으로 변했고, 그걸 복구하면서 연합군 호족도 관리하려면 바쁘다.
특히나 힘을 빌린 이들과 공적 분배 등을 하려면 아무래도 주서천의 존재가 걸린다.
권력을 지닌 정치인에게 영웅은 달갑지 않은 법이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러면, 최소한의 성의라도 받아 주십시오.”
여리는 감사의 의미로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
돌아갈 길이 먼 것을 알고 최대한 값나가는 걸 골라 줬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중원 무림의 수색대는 귀향길에 올랐다.
떠나기 전, 화인의원으로 서신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수색대는 이 지긋지긋한 대수림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환호를 질렀다.
“이제 습하고 후덥지근한 기후도 끝이로군!”
“여편네의 입술 자국 대신, 벌레 물린 자국이 온몸에 가득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후우. 얼른 돌아가 객잔에서 소면으로 배도 채우고, 죽엽청이라도 마시며 얼큰하게 취하고 싶네.”
“크으!”
수색대 역시 장기간 임무로 많이 지쳐 있었다.
입맛이 맞지 않은 음식, 끊임없이 나오는 벌레, 짜증만 솟구치게 만드는 기후 등 모든 게 불만이었다.
중원이 괜히 남만을 내버려 둔 게 아니다.
귀한 열대 과일은 맛있지만, 그 외의 것은 별 가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향수병에 날이 갈수록 기분이 우울해졌지만, 이제 좀 마음이 가벼워졌다.
반대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방긋방긋 웃으며 수다까지 떨었다.
“그나저나, 주 대협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나?”
“보면서 소름이 다 돋더군. 정말로 화경인지 의아할 정도일세.”
점창파, 당가 할 것 없이 무림인들은 장본인이 안 보는 사이에 그의 무위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매화정검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익히 들었으나,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
식인 부족의 사제, 야수 부족의 검은 물소, 구희 부족의 구요, 독충 부족의 충왕. 전부 천하백대고수에 견줄 정도의 고수들이었다.
그중에서 사제란 자의 사술과 능력은 특히 대단했다.
근처만 가도 피부가 다 녹을 것 같은 불꽃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다 떨려 온다.
그런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정면으로 헤치고, 쓰러뜨렸으니 절로 경외심이 들었다.
“전부 보지 못한 것이 다 아쉽더군.”
하나같이 격전뿐이라 그다지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가끔 힐끗 보는 정도로만 끝났다.
검은 물소 때만 좀 자세히 구경할 수 있었지, 그 외의 싸움은 그럴 여유가 없어 결과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대단해서, 다들 목소리를 죽인 채 그에 대해 떠드느라 바빴다.
“흠, 크흠.”
주서천이 귀를 쫑긋 세우며 기분이 좋은지 살짝 웃었다.
고수답게 청각이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다.
전생에선 주목을 받기는커녕 , 이름조차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던 취급이었는지라 기쁠 수밖에 없었다.
“이보게,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숨죽여 몰래 웃던 도중 신의가 말을 걸어왔다.
“물론입니다. 편하게 물어보십시오.”
“그, 약. 언제 복용할 생각인가?”
신의의 물음에 주서천이 몸을 움찔 떨었다.
“약이라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늙은이 앞에선 능청 떨어도 소용없네.”
신의가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코끝을 툭툭 건드렸다.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쏟아 부었는데도 한곳은 노리지 않다니. 정말로 대단하더군.”
주서천이 끄응, 하고 신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신의를 속이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았다.
“괜히 신의가 아니시군요.”
후각부터가 남달랐다.
숨기려고 해도 이렇게 손쉽게 들켜 버렸다.
일행과 조금 거리를 둬서 다행이었다.
신의도 밝힐 생각은 없는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구희의 신단, 자네가 가지고 있지?”
“예.”
주서천이 포기한 듯 순순히 답했다.
“도로 빼앗을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원한다면 비밀도 지켜주겠네.”
신의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 대가가 뭡니까?”
“흘흘, 눈치가 빨라서 좋구먼.”
신의가 흡족한 미소를 흘리며 눈을 빛냈다.
“그걸 복용한 뒤의 효능을 알고 싶네.”
“효능, 말입니까?”
물건이 물건이다 보니 내심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긴장했는데, 생각만큼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네. 이 늙은이가 직접 만들긴 했지만, 자고로 약이란 건 , 특히 처음으로 제조한 물건은 먹어 보지 않으면 그 효능은 모르는 법일세. 구희의 일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그 소문이 진실인지 알고 싶네.”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반짝이는 신의의 눈.
비록 그 주변은 주름살로 가득하나, 눈빛만큼은 아이 같았다.
‘이 영감, 생각보다 위험하다.’
주서천은 신단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겠다는 신의를 보고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각심을 세웠다.
‘희귀한 의서부터 시작해 새로운 약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정체도 알 수 없는 세력에게 이용당했으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일절 없었다.
그런 것보다는 제조한 신약의 효능을 보고 싶다면서 눈을 빛내 왔다.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여기에 오면서 누가 보냈느냐, 어떻게 된 것이냐 등의 질문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전쟁의 뒷정리를 하면서 수색대가 사전 설명을 해 줬지만, 이건 관심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암천회가 다른 걸 미끼 삼아 접근이라도 한다면, 의심은커녕 환영하면서 입회할 기세다.’
전생의 경우는 검마의 회유 탓에 신의를 포기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검마를 만나지 못했으니, 신의는 회유할 인재 중에서도 탐나는 자였다.
신의 경지에 이른 의술도 의술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데려올 수 있다는 게 환영할 만한 점이었다.
‘잡아 둬야 한다.’
화인의원의 의뢰를 받아 들기 전부터 생각했지만, 신의는 암천회와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된다.
개인의 의술은 물론이고, 신의를 중심으로 한 화인의원이 따라 준다면 부상은 걱정할 것 없었다.
무엇보다, 신의가 암천회의 도감부에 등록된 영약이나 내단에 회유될 것 같아서 불안했다.
“좋습니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내 이래서 젊은이들을 좋아하네. 이야기가 막힘 없이 시원시원하게 진행되니까 말일세. 흘흘흘.”
신의가 주서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럼, 저도 몇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부담 없이 물어 주게나.”
주서천은 신의에게 도감부장, 나아가 암천회에 관련된 것을 물었다.
여태껏 묻지 않은 건 떠날 채비를 하느라 바쁜 것도 있었지만, 납치되어 약해진 심신을 걱정해서였다.
그러나 이렇게 대화를 나누어 보니 그런 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실제로, 신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동안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음, 과연.’
어느 정도는 예상한 것뿐이라 놀라울 건 없었다.
하지만 전부 믿는 건 아니었다.
신의가 암천회에 포섭되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피곤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속내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믿을 수도 없지만, 웬만하면 아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신경 써야 했다.
중원에 도착하면 유령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선 중원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속도를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수색대가 지쳐 있어 불가했다.
그동안 신의의 목숨이 걱정되어 쭉 강행군이었으니, 지쳐 있는 것도 당연했다. 적절한 휴식을 취했다.
주서천은 수색대원들만큼 지쳐 있지 않아 휴식 시간을 힘을 키우는데 대신 사용했다.
“소령, 이리 와 앉아 등을 보여라.”
“네.”
소령이 스윽 하고 나타나 앞에 앉았다.
“움직이지 마. 호흡도 웬만하면 참도록 하고.”
부동과 호흡을 참는 건 자객의 특기다.
그 기술이 극의에 이룬 유령에겐 딱히 힘든 일이 아니었다.
‘자문주술(刺文呪術).’
남만을 공포로 물든 괴물, 식인 부족의 족장이자 사제에게 대대로 내려온 주술의 정체였다.
살갗을 바늘로 찔러서 상처를 낸 뒤, 먹물 등의 도료를 흘려 넣어 무늬나 글씨를 새기는 게 자문이다.
보통은 적을 위협하거나 부족 내의 전사의 계급 등을 알리는 경우로 사용되나, 식인 부족만은 다르다.
새겨진 무늬나 글씨에 따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연습은 충분히 했다.’
무늬나 글씨를 한번 새기면, 지우기가 쉽지 않다.
여러 고통도 따르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래서 주술서를 얻은 직후 간간이 연습했다.
검을 쓰는 솜씨가 조금은 도움이 돼서 아예 처음 접하는 것치곤 습득이 빨랐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일행에게 화산의 절기를 수련할 것이라고 엄두를 내려 뒀으니, 찾아올 경우는 상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혹시 몰라 단하성에서 호법을 부탁했는데, 그 정도는 얼마든지 맡겨 달라면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후우.”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쉬었다.
정신을 바짝 세우고, 손을 쥔 침을 들어 준비한 합성 도료에 색을 바르고 소령의 등에 상처를 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하학적인 도형을 손끝의 침으로 옮긴 다음 살갗 위에 그려 낸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작업이기에 숨 쉬는 것도 잊은 채로 무늬를 새기는 데 집중했다.
유령선공의 호흡법으로 숨을 참아내 움직임을 멈추고,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중압감에 평정심이 무너지려 할 때면 도가 무학의 심법으로 안정감을 되찾았다.
중도만공과 천행백변의 전환심을 비롯해 그동안 공부한 무학이 조화를 이루며 자문주술을 완성시킨다.
아무리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을 했다고 해도, 수십, 혹은 수백 년 이상 전해져 내려온 주술을 첫 번째 실전에서 실수 없이 성공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두 번째의 삶에 의한 깨달음과 여러 공부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면서 큰 도움이 됐다.
후아!
약 한 시진하고도 반 시진이 지났을 무렵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 끝나면서 겨우 참은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이마에는 닦지 않은 땀방울이 가득했다.
소령의 등을 비롯하여 살결 위에는 연한 녹색으로 물든 무늬와 잊힌 언어의 글자들로 빽빽했다.
자칫 잘못하면 공포감을 형성할 수도 있으나, 기묘함이 묻어나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자, 그러면 다음 간다.”
그러나 이걸로 전부 끝난 건 아니다.
작업이란 건 어디까지나 글자를 새기는 것에 한했다.
주서천은 도료 앞에 준비해 둔 두개골을 꺼냈다.
“소령 , 조금만 더 참자. 잘하고 있어.”
살갗에 상처를 내는 것이다 보니, 고통이 따른다.
그런데도 소령은 신음 하나 없이 잘 참았다.
아무리 심살을 겪어 마음이 없다 해도,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건네곤 다음 과정을 진행했다.
그의 입에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잊힌 고문(古文)이 흘러나왔다.
그 주문에 따라 앞에 둔 두개골의 안광에서 어두침침한 빛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서천도 옛 문자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다.
화산오장로였던 시절 여러 책을 읽긴 했으나, 무공에 관련된 것도 아니고 워낙 어려워 포기했다.
사제의 주술서는 그 고문을 기초로 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역대 사제들이 후계를 위해서 각자 시대에 맞게 번역하여 주석을 달아 두었다.
자문주술이란 건 정확한 발음이나 전해져 오는 주문, 그리고 정기라는 삼요소를 필요로 한다.
잘못 발음하면 발동하지 않기에 이렇게 역대 사제들이 친절하게 표기해서 따라 할 수 있었다.
파아앗!
주술문을 외우자 두개골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강해졌다.
여전히 불길한 느낌의 시커먼 녹색의 빛이었다.
‘선대가 죽으면 그 머리를 주술의 도구로 쓰다니,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정말 지독한 놈들이다.’
신비의 힘을 지닌 사제조차도 불사는 아니다.
늙으면 세월을 피할 수 없고 죽게 된다.
그리고 그 사후도 평범하지 않았다.
후계가 선대의 심장을 먹고, 뇌가 남은 머리를 잘라서 주술의 도구인 지팡이로 삼는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점은 그게 믿음이 아니라, 정말로 이렇게 주술의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마도이세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잔혹한 행위다.
아비이자 스승의 머리를 잘라 도구로 삼다니.
‘천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너희 같은 놈들은 편히 잠들 자격조차 되지 않는다.’
사제에 대한 혐오감을 삼키며, 주문의 마지막을 읊었다.
쩌적!
사제의 마지막 흔적.
두개골에도 균열이 생기더니, 이윽고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그 뼛조각은 열풍을 타고 대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휴우! 드디 어 끝났…… 으, 으응?”
주서천이 중얼거림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커, 커졌잖아!’
커졌다. 아니, 자랐다.
무사히 끝나고 확인하려고 눈을 돌린 순간 온몸에 무늬가 가득한 묘령의 여인이 앞에 앉아 있었다.
피부는 여전히 새하얀 눈을 연상시켰고, 단발이었던 검은 머리카락은 등허리까지 자랐다.
얼굴에 있던 젖살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고, 매끈한 턱 선이 보였다.
눈은 천으로 가려 확인할 수 없었다.
정말로 눈에 띄는 건 얼굴이 아니라 적은 천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잘빠진 몸이었다.
가슴은 그다지 성장하지 않았지만, 매끈한 일자 복근과 더불어 군살 하나 없는 몸은 조각과도 같았다.
잠시 당황하고 있는 사이, 무늬에서 흘러나오던 불길한 검은 빛이 점차 줄어들더니만 깨끗이 사라졌다.
눈에 띄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합성 도료를 사용했는데, 다행히도 성공한 모양이었다.
다만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워낙 충격적이라서 그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