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주서천도 놀라운 눈초리로 몸을 옆으로 날렸다.
신행백변 덕에 태세의 전환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몸놀림조차도 재빠르다.
마라의 혀처럼 넘실거리던 불조차 주서천에게 닿지 못했다.
“피, 피해?”
구요가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여태까지 피하는 모습, 아니 그 시늉조차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줄 알고 최대의 일격을 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강직하게 받아 내던 모습은 어디다 팔았는지 순식간에 돌변해선 몸까지 날려 피했다.
“본 녀를 감히 능멸하다니!”
구요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
주서천이 뭔 개소리를 하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피하지 않고 받아 내지 않았느냐!”
“하?”
“내 그 점을 높이 사 경의를 담아일도를 날렸거늘, 어찌하여 받아치지 않았느냐!”
“뭔 헛소리야? 위험하면 피해야지!”
주서천이 코웃음 치며 구요에게 접근했다.
“본 녀의 경의를 무시하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구요에게 수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주서천이 공세를 퍼붓기 전에 한 발 앞서 공격을 쏟아 냈다.
우측 위에서부터 좌측 아래를 향하는 대각선.
대기를 둘로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공기까지 태웠다.
“후웁!”
주서천이 숨을 들이쉬며 멈췄다.
힘을 팍 주자 힘줄이 도드라졌다. 맥박이 빨라졌다.
한 걸음, 아니 열 걸음 전진.
일순간 무게를 가볍게 해 구요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
구요가 하마터면 호흡을 잃고, 놀란 목소리를 낼 뻔했다.
‘아뿔싸!’
구희 부족에게 두려움은 없다.
그 성질은 싸움법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열기를 내뿜는 특징 덕이다.
적수를 마주 보고, 순식간에 파고 들어 일차적으로 열기를 쏟아 낸다.
그러면 적이 알아서 접근의 위험성을 깨달으면서 뒤로 물러난다.
이게 일초식이다.
사실상 이 일초식은 허초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초식을 위한 낚시일 뿐이다.
열기에 맞서지 않고 거리를 벌려 피하는 게 예상된다면 그 움직임에 맞춰 거리를 계산해 이초식으로 목숨을 끊으면 그만이다.
실제로 대부분이 먹혔다.
그러나 한서불침인 주서천에게만 통하지 않았다.
실제로 처음부터 피하지 않고 전부 받아치니, 그다음 초식도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방어란 게 없는 구희 부족인데, 공격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니 손쉽게 당해 버렸다.
구요야 워낙 고수인지라 어떻게든 공격을 이어 갔지만, 동수에게 통할 정도의 수준은 되지 못했다.
주서천은 이 점을 공수를 교환하면서 눈치채고, 흉부를 노리고 들어오는 일초식인 허초를 무시했다.
설사 같은 화경이라 할지라도 정면의 열기를 무시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지만, 주서천은 달랐다.
구요는 주서천과 상성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동수여도 힘든데, 상성 면에서 지고 들어갔다.
일초식 다음에 이어지는 이초식은 좀 더 거리가 멀어진 상대를 위한 것.
그런데 그 대상이 품 안에 파고들어오며 공격해 오니 제대로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쐐-액!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섬뜩한 파공음.
주서천의 애검, 태아가 점창파도 감탄할 만한 찌르기를 선보였다.
푸욱!
“커헉……!”
구요의 입에서 옅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굽어진 칼을 쥔 손에서 힘이 풀렸다. 불꽃도 사그라졌다.
사나운 눈매 안에 숨겨진 적갈색 눈동자에 비치는 건 오른쪽 가슴에 구멍을 낸 주서천의 검이었다.
“감히, 감히이이!”
구요가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눈을 불태웠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그의 검을 쥐어 잡았다.
검이 피부를 파고들며 피가 흘러나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꽉 붙잡아 고정했다.
“충왕!”
“하하하하하!”
후위에서부터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살다 살다 구희의 여족장이 도움을 청하는 걸 들을 줄이야!”
사각사각사각!
무언가를 갑아먹는 소리.
그 소리의 정체는 수백, 아니 수천에 이르는 벌레들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호승심이 많은 구요는 싸움이 일어나기 전, 독충 부족의 지도자인 충왕과 어떤 거래를 했다.
식인 부족의 사제, 야수 부족의 검은 물소를 쓰러뜨린 자와 싸우고 싶으니 훼방 놓지 말라고 말이다.
충왕은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주요 부족이 망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 위험하면 끼어들겠다고 말했다.
구요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며 호언장담했으나,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다.
“이 빚은 잊지 말거라, 구희의 족장이여!”
“크읏!”
구요의 낯빛이 치욕으로 벌갛게 달아올랐다.
충왕의 수족인 벌레가 수풀에서 기어 나왔다.
꺼멓게 우글거리는 벌레 떼가 순식간에 이동해 주서천의 발등을 뒤덮으며 순식간에 머리까지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너희, 나랑 상성이 많이 안 좋구나?”
얼굴을 감싼 벌레 떼가 옆으로 물러나며, 주서천의 한쪽 눈이 드러났다.
그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옅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혹시, 천독불침이라고 들어는 봤니?”
충왕은 두 눈을 의심했다.
“뭐, 뭐라고……?”
그가 수족처럼 다루는 벌레는 그냥 벌레가 아니다.
만독지 내에서도 수준급의 독을 품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무서운 건 한두 마리도 아닌, 수천에 이르는 개체 수라는 점이다.
충왕이 괜히 충왕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벌레의 왕이자 남만의 독왕이었다.
“퉤!”
주서천이 입에 들어간 벌레들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으, 징그러.”
주서천이 성가시다는 듯 발을 굴렀다.
용천혈에서 뿜어져 나온 기의 파도가 몸에 달라붙은 벌레들을 슥 훑었다.
그러자 충왕의 독충이 몇 차례 요동치더니 힘을 잃고 바닥으로 픽픽 쓰러졌다.
수천 마리가 되는 벌레가 지면으로 후두둑 떨어지니, 시커먼 구름을 보듯 바닥을 가득 채웠다.
강심장을 지닌 사람도 이 광경을 보면 혐오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징그러웠다.
“충왕! 어떻게 된 게냐!”
구요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천독지체……”
충왕이 혼란을 잠시 접어 두고, 주서천의 물음을 곱씹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헛소리! 천독지체만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천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체질. 확실히 흔한 편은 아닌지라 놀랍지만 그것만으로 수긍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천독지체만으로 막을 수 있는 독이 아니다.
충왕 본인도 천독지체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설마 네놈도 독공을 수련한 게…… 허어?”
충왕의 시선이 주서천의 왼쪽 눈으로 향했다.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옅은 녹색의 빛이 보였다.
“녹안만독공?”
“응?”
충왕에게서 낯설지 않은 이름이 흘러나왔다.
한편 충왕은 주서천의 반응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럴 리가 없다!”
충왕의 목소리에서 불신이 묻어났다.
놀라면서도 어째서인지 무언가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분께서 평생 동안 이루신 것을 대월의 사람도 아닌 중원인이 익히고 있다니, 나를 모욕하려는 것이냐!”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주서천의 표정에도 놀라움이 묻어났다.
녹안만독공을 창시한 독마는 중원인이 아닌 남만인, 그것도 대월의 진조 왕조의 군인이자 독인이었다.
일찍이, 대월의 진조 왕조의 명장으로 원나라의 침공을 막아 낸 진홍도는 독마의 가치를 알아봤다.
독마는 이름 없는 연구자에 불과했던 자신을 알아준 진홍도에게 충의를 맹세하고 독에 매진하였다.
그의 연구는 남만이 아닌 중원으로까지 영역이 확장됐고, 무림까지 찾아가 정사와 마교를 헤집었다.
다양한 걸 경험하고 연구한 덕에 녹안만독공을 완성하나, 그 과정 도중 문제가 생겨 무림 공적이 된다.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끝내 추격을 이기지 못하고 숙원을 이루지 못한 채 일생을 끝낸다.
하나 녹안만독공은 둘째 치고, 독마가 본래 중원이 아닌 남만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없다.
몇십 년 뒤의 미래에서조차 그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것을 충왕이 알고 있으니 의아해하는 건 당연했다.
“너희, 독마랑은 무슨 관계냐?”
주서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충왕은 주서천의 입에서 독마라는입이 나오자,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고민에 빠진 것도 잠시. 충왕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더니만 그 시선이 구요에게로 향했다.
“구희의 여족장이여,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
시치미 떼지 마라!
충왕이 뿌드득 소리를 내면서 이를 갈았다.
“그 중원에서 온 놈들이 한 제안과는 다르지 않나!”
‘제안?’
주서천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충왕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구희의 신단을 이야기하는 거다!”
충왕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의 소매에서 흘러나오는 벌레가 둘로 갈라져 주서천과 구요에게 향했다.
“중원에서 온 의원이 신단을 제조하면 너희는 신단을 얻고, 신공은 우리에게 왔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 이름도 모를 중원인에게 그분의 신공이 있는 것이더냐!”
‘신공? 설마 녹안만독공을 말하는 건가?’
주서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충왕이 남긴 말들을 떠올리며 상황파악에 나섰다.
중원에서 온 의원 , 신단, 신공.
의원이야 신의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고, 신단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신공은 녹안만독공이 틀림 없었다.
‘…… 대충 유추해 보자면, 구희 부족은 신단의 제조를 위해 신의를 이용한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재료로 독정이라는 것이 들어가는 모양인데, 녹안만독공을 미끼로 협력을 요청한 건가. 잠깐, 협력 제안을 한 건 중원인이라고 했잖아? 그건 신의인가?’
이제는 신의에 대한 정체조차 의심스러웠다.
신단을 신약이라 착각하여 , 의학적 호기심에 신단의 제조예 도움을 주고 있다면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녹안만독공을 대가로 약속한 게 수상찍다.
그건 여태껏 독혈곡 내에 잠들어있다가 자신이 발견했다.
전부 외우고 소각했기에 누가 알 리도 없다.
“충왕이여. 그대는 지금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느니라.”
구요가 무언가 잘못된 걸 느끼곤 미간을 찌푸렸다.
“날 속이고 있는 것이라면 그 중원인은 물론이고 네년과 부족 역시 가만두지 않겠다. 반은 벌레들의 먹이로 던져 주고, 반은 죽여 버린 뒤 시독의 추출용으로 써 주마.”
충왕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그 표독스러워진 눈빛에선 살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어리석은 놈! 지금 이럴 때가 아니란 말이다!”
구요가 오른쪽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며 고통이 뒤섞인 신음을 토해냈다.
“주변을 보거라! 이대로 두었다간 우리의 필패니라!”
주서천이 구희 부족의 열기에 대응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이 화근이었다.
중원의 수색대가 앞서서 구희의 전사들과 싸웠고, 청화 연합군이 그걸보고 반격에 나섰다.
구희 부족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당백.
확실히 열기를 제외하고도 강했으나 수의 차이가 극심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싸우는 법 자체가 열기를 기초로 해서 그 전력이 급감하니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독충 부족도 뒤늦게 합류하여 도와주기는 했으나, 생각보다 그들의 독이 효과적으로 통하지는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독이 왜 그것밖에…… 크아악!”
“커허억!”
청화 연합군에는 당가가 있었다.
며칠 전, 당가는 전략 회의 중 독충 부족의 독을 대비하여 몇몇의 해약초나 해독약을 준비했다.
중원에서 남만에 오는 것이니 준비한 것도 있었고, 대수림에 도착한 뒤로 꾸준하게 해약초 같은 것도 찾았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다.
남만이 독초나 독물의 천지라는 건, 곧 독공을 수련한 자들 입장에선 보물이 널려 있는 것과 같다.
이왕 온 김에 독의 수집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해독 등에 대해서도 간간이 공부하면서 지냈다.
오룡삼봉 중 독봉인 당혜가 천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력가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말 돌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구희의 족장이여. 우리에게 신공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을 텐데?”
충왕이 어림없다는 듯 낮게 으르릉거렸다.
“설명이고 자시고 간에 숨기고 있는 것 자체가 없도다. 애초에 신공을 제안한 건 본 녀가 아닌 그 중원인이지 않은가!”
“그걸 어떻게 믿고?”
충왕의 얼굴에서 의심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이야 주요 부족이지, 이 동맹은 어차피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가?”
“작작 하여라, 멍청한 놈!”
“신단을 손에 넣어, 힘을 얻은 너희가 대수림을 정복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애초에 추궁할 대상을 잘못 고르지 않았느냐! 정말로 그렇게 의심스럽다면 본 녀가 아닌 그 신공인가 뭔가 하는 걸 지닌 중원인이나 저놈에게 따지거라! 어리석은 놈!”
구요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출혈 중임에도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충왕도 그제야 흥분한 걸 알았는지, 잠시 숨을 고르곤 시선을 돌려 주서천을 노려봤다.
한편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시작한 내부 분열이 멈추자 아쉬웠던 주서천은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는 여전히 의구심 반, 살의 반으로 타오르고 있는 충왕의 안광을 본 주서천이 혹시 하고 물었다.
“과연, 이제야 알겠다. 진홍도 장군이 누군가를 위해서 부대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게 너희냐?”
“……!”
진홍도는 독과 전염병을 전쟁에 쓰려고 독마를 지원했다.
그리고 그 지원에 독자 부대도 창설됐다.
아마 일부는 독마를 따라 중원에 갔을 것이다.
아무리 독마라 할지라도 혼자 광활한 중원을 조사하는 건 불가능하니, 수족이 될 자들이 필요했겠지.
그렇다면 남겨진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부대의 창설 목적에 따라 진홍도의 밑에서 독과 전염병을 이용해 전쟁에 참여했을 게 뻔했다.
다행히 독마가 남긴 것을 비롯하여 그들의 힘으로 원의 침략을 막는 데 성공하나, 어이없게도 원이 명에게 망했고, 대월 역시 명에게 파국을 맞이한다.
“설마하니 백 년도 더 된 부대가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 정확히는 그 후예인가?”
대월과 왕조가 망하면서, 군부(軍部) 역시 폐지됐다.
부대 역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그들이 설마하니 살아서 그 명맥을 야만족으로서 이으며 살아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좋다, 충왕. 제안을 하나 하지.”
주서천이 검을 거두고 검지를 들었다.
“그따위 망발을 하다니, 겁을 상실했구나.”
충왕은 적의를 거두지 않았다.
바닥에 기어 다니는 수천 마리의 벌레에게서 독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지금 그 제안으로 엿 먹은 것 같아 기분이 말로 형용할 수 없거늘, 또다시 제안이라고?”
“그야 그건 네놈이 누군지도 모를 중원인에게 속아서 그런 거고, 난 진짜니까.”
“네놈 역시 누군지도 모를 중원인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나?”
“아니, 그건 좀 다르지. 아무래도 독마의 유품이라도 보고 속아 넘어간 것 같은데, 난 아니니까.”
“……”
눈앞의 중원인이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녹안만독공과 독마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독마의 신원이나 그 부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후예인 자신들을 제외하곤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부대의 여러 기밀성 때문에 당시 군부의 관계자나 지도자만 알고 있었는데 , 대월과 함께 전부 사라졌다.
그렇다면 분명히 독마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관계가 있을 터.
중원 무림에서의 활동이 제법 길었으니, 수긍하지 않는 건 아니다.
“독충 부족, 항복하고 날 따라와라. 그러면 그 대가로 이 자리에서 녹안만독공의 구결 반을 알려 주마.”
“충왕!”
구요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나머지는?”
“설마 그걸 아무런 도움 없이 달라는 건 아닐 거야. 방금 전까지 서로 검 끝을 겨누지 않았었나?”
지금 이 상황에서 독충 부족의 항복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구희 부족, 아니 주요 부족의 패배가 확실시되는 동시에 불필요한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에 대항할 힘을 얻음과 동시에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다.
‘있다.’
그들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앞에 드러나지 않고, 누군가의 뒤에서 존재했다.
중원을, 천하를 위에서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암천회가.
화타의 재림이라고도 칭해지는 명의, 신의.
신의가 어떠한 제안을 받은 건 시간을 되돌려, 아직 중원에 있을 적이었다.
어느 심야, 창을 통해 어떠한 인물이 찾아왔다.
“나는 죽는 겐가?”
신의는 소리도 지르지 않고, 겁을 내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히 눈을 뜨고 복면인을 맞이했다.
“과연, 신의. 무인도 아니거늘 배짱이 보통이 아니로구나. 대화할 자세는 갖추었으니, 선물을 주마.”
“이건……”
“공청석유(空淸石乳)다. 입구를 열어도 상관없지만, 한 방울 밖에 없으니 떨어뜨렸다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귀한 약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신의다.
대가건 뭐건 간에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병을 열어 확인했다.
우유빛으로 반짝이는 액체.
일반인과 다른 후각 기관을 지닌 신의가 코끝을 움직여 확인했다.
“정말로 공청석유로군!”
공청석유는 전설에서나 나오는 영약이다.
천지간의 조화가 서린 동굴에서 백 년에 한 번씩 고이게 되는 액체인데, 한 방울이라도 마시게 되면 무림인은 막대한 내공을 얻게 되고, 일반인은 무병장수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록이 워낙 오래되고, 만년하수오만큼 보기가 힘들어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신의는 입맛을 다시며 공청석유를 복면인에게 건네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남만의 신단에 대해서 혹시 알고 있나?”
“신단?”
“그래. 구희라는 부족에 전해져 오는 연단술로 제조할 수 있는 불로불사의 약이기도 하다.”
“구희…… 제래의 딸인 불사의 요정을 말하는가?”
“호오, 알고 있군.”
“원래 영약, 그것도 자연산의 위치는 전설이나 설화, 고대 신화와 관계된 것이 많네.”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에 살이 붙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관계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적긴 하지만 관련된 걸 조사하다가 영약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된 사례도 존재했다.
“정말로 불로불사의 약인지는 의아하나, 흥미가 생기는군.”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원망(願望)의 집합체.
늙지 않으며 , 죽지 않는다.
진시황조차 손에 넣지 못한 꿈의약, 역대 황제는 물론이고 옆 나라의 왕까지 원했던 가공의 물질.
신의도 과거 황제의 곁에 있을 때 라거나, 개인적인 호기심에 찾아도 봤지만 소득은 없었다.
인제 와서 불로불사라거나 하는 말을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전해져 올 정도로, 효능이 뛰어난 약이라고 생각하여 신단을 꼭 제조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복면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호위 무사로 삼아 제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만까지 왔다.
복면인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있었지만,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관심 있는 것이라곤 남만의 신단이고, 그것만 보고 제조를 해주게 한다면 큰 불만은 없었다.
신의가 세간에서 괜히 괴의라 불리는 게 아니다.
그 성격이 워낙 괴팍해 사고방식 자체가 남달랐다.
운남을 지나서 남만에 도착한 뒤, 복면인은 호위 무사를 몇몇 남기고 기다리라며 종적을 감췄다.
남만에서만 볼 수 있는 약초라거나 독초 탓에 기다리는 건 지루하지 않았다.
호위 무사를 대동한 채 , 청화 지방이라거나 곳곳을 돌아다니며 진료도 봤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중원으로 서신을 마지막으로 보낸 뒤, 복면인이 돌아와 준비를 끝냈다고 말했다.
“앞으로 주요 부족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 웬만하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당분간은 그들을 무상으로 치료해 주며 신뢰를 쌓아라.”
“그리하겠네.”
남만의 주요 부족은 폐쇄적이다.
외부인이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신의는 신뢰를 위해서 여러 사람을 진료해 주었다.
얼마 뒤, 그의 놀라운 솜씨에 주요 부족은 감탄올 금치 못했고 신의에게 경의와 고마움을 표했다.
참고로 만독지 근방의 주요 부족에 오기 전, 복면인은 주요 부족을 순회하며 교섭을 본 모양이었다.
각 부족에게 무언가 필요한 것을 주고, 특히 독충 부족, 구희 부족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고 들었다.
여하튼, 협력 관계가 되면서 구희 부족에게는 연단술을 전수받았고 독충 부족에게는 만독지를 마음껏 돌아다니며 재료를 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
목숨을 걸고 고생을 한 끝에 독정을 비롯한 재료들을 손에 넣는데 성공하고 신단의 제조에 들어갔다.
호위 무사로 변장한 복면인이 곁에서 여러 가지를 도와줘서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
제조 도중 주변이 무언가 시끄러웠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신단의 제조였다.
그리고 해가 저물며 황혼이 찾아올 무렵.
“완성했다.”
신의가 땀방울을 훔치며 흡족하게 웃었다.
주름진 눈살 사이에 숨겨진 눈동자에 붉은 단이 비쳤다.
겨우 두 마디밖에 되지 않은 크기.
그 표면은 미끄러울 정도로 매끈매끈하고, 타오를 듯이 붉었다.
실제로 불을 담은 것처럼 뜨거웠는데 주변에만 가도 기온이 올라가 대장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완성했나!”
복면인 , 아니 복면을 벗은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그 눈은 환희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걸 본 신의가 신기한 듯 긴 흰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자네는 언제 봐도 이상하군그래.”
“흐흐흐, 무얼 말이냐?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 내 특별히 들어 주겠다.”
“그야, 신단을 원하는 건 분명한데 그에 대한 탐욕이 존재하지 않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신단을 제조하면서 호기심을 충족하니, 그동안 제쳐 두었던 궁금증 같은 것이 솟아났다.
처음에는 무인으로서 내공의 증진이라거나, 혹은 불로불사를 노리는가 싶었다.
그런데 함께 지내다 보니 그게 아니란 걸 저절로 알게 됐다.
이 남자는 신단을 원하나, 그건 본인이 복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 늙은이를 죽일 거라면, 적어도 궁금증은 풀어 주고 가지 않겠는가?”
“괜한 걱정할 것 없다, 신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으마.”
“호오, 기밀을 위해 입을 막을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남만의 신단이다.
소림사 대환단 이상의 가치를 하는 영약이다.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보물이라는 것은 피를 부르는 법이니까.
신단의 제조가 끝난 뒤 인멸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구더기 이하라면 모를까, 괜한 저항을 하지 않고 고분고분 말을 듣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신의, 따라와라. 이제 이 지긋지긋한 곳과도 안녕이다. 귀한 약재를 구경시켜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