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九章 (118/254)

나흘 뒤 만독지 근방.

연합군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삼천의 병력은 사상자와 중상자를 제외하곤 이천이 남았다.

그래도 잃은 것에 비해 대승을 거두었다.

검은 물소의 사망. 그리고 야수 부족의 멸족이었다.

주요 부족이 이를 듣고 경계를 높였다.

만독지의 독충을 지배하에 둔 부족과, 불과 불사에 가까운 생명력을 지닌 부족이라 해도 긴장했다.

아무리 하나하나가 일당백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하다 할지라도, 부족을 전부 합해 봤자 팔백 명이다.

그에 비해서 적은 이천이나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합지졸이라 무시했지만, 그 오합지졸이 주요 부족 최대 세력 한 곳을 박살 냈다.

이제는 무시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꿀꺽.

누군가가 긴장됐는지 침을 삼켰다.

그러나 그 얼굴에 공포는 없었다.

대신 투지가 불타올랐다.

“독충과 구희인가……”

주서천이 턱을 매만지며 정면을 주시했다.

앞장을 서고 있는 건 구희 부족이었다.

타오를 것처럼 붉은 머리가 특징이었는데, 왠지 모를 신비감이 묻어나는 부족이었다.

그들은 수풀 앞에 서서 입을 꾹다문 채 서 있었고, 그 뒤 너머로는 음습한 분위기의 사람들이 보였다.

대충 세어 보니 오백여 명 정도 되는 듯싶은데, 숫자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독충 부족이 틀림 없었다.

청화 연합군 대 주요 부족.

그 사이에는 거센 물살이 흐르는 강이 있었고, 각 병력이 둘로 나누어진 채 서로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서로 간의 흐르는 고요한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남만인이 아닌 중원인이었다.

“만나서 반갑다!”

중원인, 주서천이 손에 쥔 무언가를 휙 던졌다.

그것은 포물선을 그리며 강을 넘어 전사들의 눈앞에 떨어져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본 순간,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검은 물소……!”

검은 물소의 상징, 뼈로 된 물소의 가면.

일반적인 물소에 비해 배나 되는 뿔을 보면 확실했다.

이건 검은 물소의 영혼 그 자체다.

“네놈이냐?”

전방의 중앙, 구희의 여족장이 위엄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 눈에는 약간의 호기심이 감돌았다.

소문에 의하면 검은 물소의 앞을 막아서고, 정면으로 부딪쳐 승리했다고 한다.

그게 정말인지 궁금했다.

또한, 그는 그 식인귀의 사제에게도 승리했다고 한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래, 나다!”

주서천이 다른 손을 들었다.

“헉!”

“저건……”

다시 한번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섬뜩한 분위기를 내는 뼈로 된 지팡이.

그 원주인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저렇게 어린 자가 사제와 검은 물소를 이겼다고?”

두 눈으로 봐도 믿기지 않았다.

분명 머리에 뿔이 달리고, 근육은 과할 정도로 부풀어 오르고, 구 척 정도 되는 사내를 떠올렸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다! 라는 식상한 반응은 시간상 부족하니 생략하도록 하자!”

주서천의 검에서 강기가 넘실거리며 빛났다.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와아아아아아!”

“이기러 왔다!”

둥! 둥! 둥! 둥!

쿵! 쿵! 쿵! 쿵!

북소리에 맞춰 이천의 병력이 발을 구른다.

연합군의 무리가 땅을 흔들며 앞으로 천천히 전진했다.

“정지!”

계달이 왼손을 들어 이동을 제지했다.

병력이 멈춘 걸 확인한 그는 당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저, 부탁드리겠소.”

당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뒤로 당가의 무사들이 따랐다.

빠지면 그대로 휩쓸려 갈 것 같은 거센 물살.

그 물살 위로 손바닥만한 호리병이 떨어졌다.

풍덩.

그 뒤로 당가의 무사들도 호리병을 물살에 던졌다.

그리고 얼마 뒤, 물살 위로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바로 나방의 유충이었다.

전체가 날카로운 가시로 뒤덮였고, 덩치도 배는 컸다.

색은 거무튀튀 했는데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족히 수백, 수천 단위에 이르고 강이 순간 변색될 정도였다.

몇 마리가 강 위로 기어오르자, 당혜가 살포시 밟아 터뜨렸다.

핏물이 터져 나오면서 습기 가득한 바닥을 녹이거나 하지 않았지만, 인체에 들어가면 죽음에 이른다.

“정찰병을 보내기를 잘했군.”

완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에 하려면 사전 답사는 필수다.

얼마 전에 정찰병을 보냈을 때 강에 독벌레 천지란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당가에게 처리를 부탁했다.

“돌격!”

여리의 지휘봉이 정면을 향했다.

멈춰 있던 병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난 벌레가 힘 하나 못 써보고 죽었는데 , 이걸 어찌해야 할꼬.”

여족장이 들으라는 듯이 크게 비웃었다.

그녀의 뒤편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 사이에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외모.

음습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청년이 바로 독충 부족의 족장이다.

“흥.”

충왕(蟲王)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입술을 곱씹었다.

“사천의 당가인가.”

고수와 고수는 서로 알아본다 하지 않던가.

충왕은 당가의 무리를 보고 한눈에 알아봤다.

당가는 남만은 잘 몰라도 만독지는 안다.

독충 부족도 중원은 잘 몰라도, 독혈곡과 당가는 안다.

서로 독에 일평생을 매진한 만큼, 독에 대한 건 타지에 대해서도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래 봤자 잔재주다.”

충왕이 코웃음 쳤다.

그가 지닌 독에 대한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중원에서 독으로 이름 높다고 해 봤자, 독충 부족에 비해선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며 폄하했다.

“와라 벌레들의 먹이로 던져 주마.”

충왕의 입가에 징그러운 미소가 번졌다.

청화 연합군이 강을 건넜다.

물살이 거세지만, 못 건널 정도는 아니었다.

평소 같으면 저주받은 땅에 대한 두려움에 감히 발을 내딛지 않았겠지만, 전시라 그런지 그럴 틈이 없었다.

눈앞의 구희와 독충 부족의 움직임에 집중됐다.

주요 부족은 연합군이 강을 건넘에도 훼방을 놓지 않았다.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오만해서도 아니다.

독충 부족의 힘은 만독지의 독물에서 나온다.

그래서 숲 밖으로 떠나지 않는 편이 더 좋았다.

구희 부족은 독충 부족처럼 환경에 제한되는 건 아니지만, 그들과의 연계 탓에 일부러 움직이지 않았다.

와아아아아!

연합군의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어찌나 큰지 수림의 나뭇가지를 흔들 정도였다.

강을 건넌 연합군은 하체가 물로 젖어 있음에도 신속하게 움직여 적진에 뛰어들었다.

“이야아아압!”

“죽어라!”

싸울 의지로 가득 찬 외침.

그리고 살의의 폭풍이 뿜어져 나오면서 격전이 시작됐다.

채재챙!

연합군의 밀림도와 구희 부족의 밀림도가 부딪치면서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한두 번으로 시작된 소리는 이윽고 천이 넘게 되면서 마치 서로 공명하듯 시끄럽게 울어 댔다.

“아악!”

“크아아악!”

“내 팔!”

그러나 그 금속음도 잠시, 이윽고 병사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에 묻혔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청화 연합군은 얼마 전 대승을 거두었으나, 자신감에 차 있을지언정 결코 자만에 빠지지는 않았다.

주요 부족에게 힘으로 굴복당한 세월이 긴 만큼, 그들의 힘을 얕보지 않고 최대의 위기로 경계했다.

전력의 차가 두 배 이상 나지만 엉덩이에 힘을 팍 주고, 긴장감을 쥔 채 진지한 태도로 임하였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부족을 쉽게 이길 수 없었다.

그들은 숨막힐 정도로 강맹했다.

특히나 구희의 힘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아악!”

“뜨거워!”

“내 몸, 내 몸!”

강물에 담갔던 하반신은 일찍이 말랐다.

격전 탓이 아니다. 구희 부족이 원인이다.

구희의 피를 이은 자는 특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불과 불사에 가깝다는 재생력이다.

그러나 부족의 숫자가 적고, 앞에 잘 나서지 않다 보니 그 능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자는 적었다.

그래서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직접 맞대 보니 그 소문의 힘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열기(熱氣)!

불의 정체는 열기였다.

닿으면 화상을 입어 버릴 정도의 열기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칼에 베이면 마치 대장간에서 달군 쇠에 베인 것처럼 녹아내렸고, 가끔씩 불이 붙기도 했다.

“호호호!”

구희의 여족장이 턱을 세우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고작 사람 따위가 구희의 후예에게 도전장을 내밀다니! 어리석도다! 주제를 알거라!”

화르르륵!

남만의 지독한 열기가 구체화됐다.

괜히 ‘불의 화신’의 후예를 자칭하는 게 아니다. 그만한 능력이었다.

“정말로 신의 후예란 말인가?”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아악! 물! 물!”

몇몇의 병사는 고통에 실성한 것인지 등을 돌려 강으로 뛰어들었다.

물살에 쓸려 실종된 이들도 생겼다.

과연, 일당백의 전사들. 괜히 삼백이란 적은 숫자로 남만의 주요 부족이 된 게 아니란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

연합군 측에서 공포에 짓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지려 한다.

남만은 주술이 발달해서 그런지, 미신이라거나 전설에 관한 영향을 쉽게 받는다.

적이 신의 후예란 걸 상기하니 적의가 사라지면서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접근만 하면 열기에 닿아 공격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이 컸다.

창으로 어떻게 해 보려 해도 몸놀림이 워낙 재빨라, 빠르게 피하고 열기로 공격해 오니 속수무책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치솟았다.

“허어, 이런……”

중원의 수색대도 기이한 힘에 당혹했다.

점창파 역시 별별 실전을 겪었지만 구희의 힘은 처음이었다.

특이한 힘에 어찌 대항할 줄 몰라 했다.

연합군처럼 일방적으로 당하진 않았지만 버거워하는 모양새로 싸웠다.

“호호홋!”

여족장의 콧대가 세워졌다.

그러나 잘난 척하는 것도 잠시였다.

혼란과 공포 속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사람이 존재했다.

“뭐야, 마교 애들이랑 비슷하잖아?”

주서천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당가! 점창파! 당황할 것 없소!”

상황이 급박하니 경어는 생략했다.

“마교의 염화살마를 떠올리시오!”

“……아!”

남만인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중원인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각자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중원,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신강의 마교에도 구희와 비슷한 힘을 지닌 이들이 존재했다.

이 년 전, 칠검전쟁에서 마도의 주력 부대로 참전했던 소살대(燒殺隊)다.

천하백대고수로도 이름이 알려진 마두, 염화살마가 이끄는 그들은 불꽃까지 내뿜는 마공을 익혔다.

그들은 악명이 알려진 만큼 대처하는 법도 잘 알려져 있었는데 그 방안이란 게 실로 간단했다.

“열기를 내뿜을 수 있는 건 한쪽 방향 뿐이오!”

주서천은 연합군이 들을 수 있도록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최소 셋에서 넷이 짝을 지어 합격한다!”

덧붙인 설명은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이해했다.

열기를 낼 수 있는 건 오직 한곳 뿐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 외의 방향은 틈이 생긴다는 의미다.

요컨대, 미끼가 되어 정면을 봉인하면서 그 외의 방향으로 동시에 공격을 하면 된다.

“……?”

방금 전까지 의기양양했던 여족장의 얼굴이 굳었다.

“열기에 지레 겁먹지만 않는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적은 신의 후예가 아니다! 야만족일 뿐이다!”

“저 입을 막아라!”

여족장이 주서천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파바밧!

근처의 구희 부족 전사가 여덟 명이나 뛰쳐나갔다.

그들의 힘은 열기만이 아니다. 신체 능력도 뛰어나다.

몸놀림은 야수 부족 못지않게 재빨랐다.

퇴로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순식간에 포위망을 형성해 그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주서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감각에 의지했다.

뒤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구희 부족 전사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여덟 명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오는 것도, 손에 쥔 밀림도를 어떻게 움직이려는지도 느꼈다.

후끈!

여덟 개의 밀림도가 불에 달군 것처럼 벌갛게 달아올랐다.

도신이 시뻘게지며 극열을 뿜어냈다.

대기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머리 위의 태양이 가까워지는 게 아니다.

밀림의 기후는 변화가 없다.

열기의 정체는 팔방(八方).

약간의 틈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일종의 합격진이다.

‘과연’

발열의 방향은 일직선이다. 옆도 뒤도 아닌 앞.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수를 늘리고 포위를 택했다.

더더욱 무시무시한 점은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고, 한곳에 모이면서 확산되어 위로 향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위로도 뛸 수도 없다.

몸이 녹아내릴 정도의 열기가 모이면서 그를 압박하리라.

그러나……

“음. 뜨뜻하군.”

주서천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포근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로 편안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

회전하면서 열의 회오리를 만들어내던 여덟 명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이 열기의 회오리 앞에선 화상을 입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주서천은 화상은커녕 땀도 흘리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기분이 좋다는 듯이 웃기까지 했다.

“미안하다. 나 사실 한서불침이다.”

더위나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는 건, 열기나 냉기에 면역이라는 의미다.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사제의 불꽃이나 열기처럼 반칙적인 힘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주서천은 여덟 명의 전사가 경악어린 표정을 짓기도 전에 제자리에서 검을 휘둘러 원을 그렸다.

슈슈슛.

검에서 흘러나온 기의 자락.

검기가 열기를 갈라내면서 깔끔하게 없애 버렸다.

“뭐, 뭣……?”

부족 내에서도 나름대로 이름 높은 전사들이 당황했다.

여덟 명 이 막아내려고 급히 밀림도를 세웠다.

파바밧!

“끄아아악!”

그러나 적수가 안 좋아도 너무 안좋았다.

피하려고 해도 너무 가까워진 게 흠이었다.

심지어 틈을 안 주려고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걸 놓칠 주서천이 아니다.

밀집된 걸 노려서 여덟 명이나 되는 전사를 일검으로 목숨을 끊었다.

“시간 끌지 말고 금방 끝내자.”

주서천이 여족장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구희 부족은 천적(天敵)을 만났다.

“막아랏!”

감히 누구에게 덤비려는 것이냐!”

십수 명의 구희 부족 전사가 앞을 가로막았다.

주서천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열둘.’

하나같이 최소 일류에 이르는 전사들이다.

심지어 대부분이 절정에 이르는 고수들뿐이었다.

몸놀림 역시 재빠르지만,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었다.

평소의 비무 상대인 소령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주서천이 그 사이로 몸을 날렸다.

화아아악!

안면을 덮치는 열기. 원래라면 피부가 달아올라야겠지만,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십수 명이 동시에 뿜어낸 열풍을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가고, 달려드는 전사들에게 검격을 쏟아 냈다.

“아아악!”

터져 나오는 비명.

두말할 것도 없이 구희 부족의 전사들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열기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거냐!’

구희 부족은 부모의 이름을 말할 무렵부터 열을 발출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예외는 하나도 없다.

이 강력한 힘 덕에 주요 부족에 당당히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근원이 통하지 않는다니.

“하압!”

주서천이 잔상을 남기면서 재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그의 손에서 이십사수매화검법이 펼쳐졌다.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더니, 나머지 인원도 버티지 못하고 쉽게 쓰러졌다.

‘생각대로 수비에는 약하군.’

구희 부족의 싸움법은 극단적일 정도로 공격에 치중되어 있다.

열기를 방출하면서 접근을 하지 못하게 만드니, 굳이 방어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공격을 중심으로 발달됐다.

유일하게 방어의 역할을 하는 열기가 통하지 않으니, 팔을 벌린 채 공격을 받아들이는 거나 다름없다.

열기를 제외하면 동수의 공격도 제대로 막지 못하는데, 하물며 적이 고수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화산의 검이 번찍일 때마다 구희 부족의 전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죽어 나갔다.

벌써 이십여 명이나 넘게 쓰러졌다.

그것도 나름 정예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비켜라!”

여족장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며 드디어 움직였다.

격렬하게 흘러가는 전황 속에서도 눈에 돋보이는 미모였다.

역시 눈에 띄는 건 붉은 머리카락.

중원에서는 보기 드문 단발이었다.

눈은 적갈색이었고, 불을 담은 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눈초리가 치켜 올라가 인상을 사납고 강인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연령을 보면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들어갈 때는 들어가고, 나올 때는 나온 육감적인 몸매였다.

기후가 기후라서 그런지 천의 면적이 좁았는데, 태양에 잘 그을린 피부와 일자형 복근이 훤히 보였다.

“쓸모없는 것들!”

여족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녀 주변을 호위하듯 지키고 있던 전사들이 머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중원에서 온 무림인이라고 했느냐. 검 솜씨가 제법이로구나. 좋다, 이름을 말해 보아라.”

“주서천.”

남만에서 온 이후로 처음으로 이름을 대는 것 같았다.

“그 이름, 기억해 줄 테니 기뻐하도록 하여라. 자비를 베풀어 비석 정도는 세워 주겠니라. 또한, 본 녀의 이름을 들을 영광을 내리도록 하마. 본 녀의 이름은 구요(姬妖)이니라.”

“그래?”

타앗!

주서천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뛰쳐나갔다.

한가하게 잡담 떨 생각은 없었다.

“건방진 것!”

구요가 노성을 내뱉으면서 칼을 세웠다.

화르륵!

도신이 시뻘갛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이윽고 화염이 넘실거리면서 칼을 휘감았다.

열기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눈에 확연히 보이는 불꽃을 만들어 낸 것이 더 대단했다.

채앵-!

주서천의 검과 구요의 굽은 칼이 부딪쳤다.

금속음이 길게 늘어짐과 동시, 그 충격의 여파가 파도가 되어 주변을 뒤덮었다.

“으!”

근처에 있던 전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복부 아래가 욱신거릴 정도로 그 여파의 세기가 대단했다.

‘도강인가.’

주서천이 입술을 혀로 적셨다.

눈동자에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불꽃을 휘감은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붉은 기가 도신을 둘러싸 중첩된 게 보였다.

주요 부족의 족장은 곧 부족 내의 최강자이다.

강기를 쓸 수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아아앗!”

구요가 소리 높여 기합을 내뱉음과 동시에 열기, 아니 화염을 뿜어냈다.

도신의 불꽃이 커졌다.

‘과연. 최소 화경의 고수라는 건가.’

주서천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서불침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의 열기.

바닥에 자란 잡초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게 보였다.

쐐애액!

한가하게 잡초 따위를 볼 때가 아니었다.

불꽃을 휘감은 칼날이 뒤로 빠졌다가 앞으로 수직을 그었다.

꿈틀거리는 불꽃과 다르게 직선을 그려 내는 칼.

그 위력도 속도도 군더더기 하나 없이 대단하다.

야수 부족의 검은 물소도 강기를 실을 수 있는 화경이었지만, 힘만 앞선 짐승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구요에게는 검은 물소에게는 없는 기교가 있었다.

채애앵!

중원의 검과 남만의 칼이 부딪치면서 불꽃을 토해 낸다.

약간의 불씨가 아니다. 구희 부족의 불이다.

구요는 불처럼 맹렬한 기세로 칼을 휘둘러 왔다.

숨을 쉴 틈은 있는 건지 의아할 정도로 격렬했다.

챙! 채앵!째애애앵-!

길게 늘어지는 마찰음.

그러나 곧바로 고막을 후려치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구요의 칼이 곳곳을 노려온다.

주서천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구요가 화려하고 맹렬하게 퍼붓는 도격을 막는 데 집중했다.

만약, 전장이 아니라 비무 대회였다면 막는 데만 급급하여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고 봤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밀어붙이고 있는 측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피하는 게 아니라, 전부 받아치고 있다고?’

여인이라고 힘이 아닌 기교 위주의 칼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코 다친다.

그녀의 힘은 상상 이상이다.

남만을 뒤져 봐도 이 칼을 받아친 자는 검은 물소를 제외하곤 없다.

놀라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디, 이것도 잘 받아 내는지 보겠느니라!”

구요의 위엄 어린 목소리가 우레처럼 터져 나왔다.

“하아아앗-!”

도병을 쥔 손에 퍼런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도신을 휘감은 불꽃이 일순간 폭발하며 흘러넘쳤다.

일순간이지만 화염에 휩싸이면서 길이가 늘어났다.

뿜어져 나오던 열기도 비교도 안될 만큼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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