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밀림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확신에 가까운 승리.
그 감각에 심취한 계달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목청껏 외쳤다.
“자, 가자!”
계달이 밀림도를 휘둘렀다.
코앞까지 다가왔던 야수 부족의 전사가 막지 못하고 가슴을 허용했다.
푸슈슈슛!
벌려진 피부 사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 사이를 지나치고, 주변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기세다! 이 기세로 야만족에게 천벌을 내려주자!”
계달은 주서천의 등을 보고 희망을 품었다.
거리가 제법 됐는데도 이상하게 눈에 잘 들어왔다.
마치 골목 싸움에서 다 이긴 어린아이처럼, 이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설욕할 수 있겠구나.’
주요 부족과 숱하게 싸워 왔다. 대부분이 패배였다.
대놓고 모욕을 받으면서 도망친 적도 있었고, 형제처럼 지냈던 수하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힘이 부족해 피눈물을 흘려 가며 후퇴했다. 계달은 그 원
한을 결코 잊지 않는다.
“죽어간 이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내 오늘이야말로 그동안의 숙원을 풀……”
서걱!
“……어?”
계달은, 몸을 멈춘 채 생각을 잇지 못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눈을 껌뻑이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파야… … - ?
없다.
적의 숨통을 끊을 칼이 없다.
칼을 쥐고 있던 손이, 팔이 없다.
어깨까지 깔끔하게 잘렸다.
어찌나 깔끔한지,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미끄러질 정도의 수준이다.
콰아아아앙!
그리고 뒤늦게 이어지는 폭음.
“으아악!”
“아악!”
“끄아아아악!”
후위에서 수하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 비명이 멍한 정신을 깨우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게 해줬다.
정면에서부터 휘리릭 소리를 내며 양날 도끼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날아온 것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자신의 팔을 너무나도 간단히 잘라 버리곤, 그 뒤에 있는 병력 한가운데에 떨어져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검은……”
알고 있다. 단 한 번, 저 도끼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저 도끼를 보았을 때,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악몽이 떠올라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야수 부족의 부족장.
“물소!”
“구오오오오오오오오!”
도끼의 주인, 검은 물소의 울음소리가 전장에 울렸다.
곳곳에서 일어나던 격전이 멈출 정도였다.
딱딱딱!
턱뼈가 부딪치면서 소리를 낸다.
털이 곤두서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어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멈추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성이 마비되면서 , 본능이 얼른 도망치라고 경종을 울렸다.
구 척에 가까운 거인.
도저히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체구.
그리고 그 기세는 폭풍과도 같다.
일당백 아니, 일당천에 이르는 기백.
그기백에 몸서리치며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살려 주었더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이제 볼 것도 없다.”
쿵쿵.
검은 물소가 걸을 때마다 땅이 흔들린다.
그것이 두려움이 만들어낸 착각인지, 진짜인지는 몰랐다.
뼈로 된 가면 사이로 짐승의 것을 닮은 동공이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마치 고양이 앞에 생쥐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내버려 두는 건 위험하겠군.’
야수 부족은 대부분이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 맡긴다.
그러나 검은 물소만큼은 다르다.
부족의 지도자가 되려면 힘 외에 지성도 요구된다.
‘이대로 두면 후에 부족 간의 기싸움에서 불리해진다.’
배나 되는 병력이었으나,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오합지졸일 테니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니 생각보다 부족의 피해가 심했다.
패배하지는 않겠지만, 숫자가 줄게 되면 독충 부족이나 구희 부족에게 얕보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구경하던 걸 멈추고 직접 나섰다.
장난은 이제 그만. 야수의 힘을 보여 줄 차례다.
“끝이다……”
“우린 다 죽었어……”
병사들의 입에서 절망이 흘러나왔다.
팔을 잃은 천인장 역시 암담해졌다.
잊었던 공포. 압도적인 무력.
방금 전에 보여 준 괴성까지.
머리가, 가슴이, 영혼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저 멀리서 활약을 보여 주던 중원인에 대해서도 잊었다.
저들이 이 난전을 뚫고 이곳까지 오는 데 시간도 걸릴뿐더러, 애초에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었다.
“자, 전부 쓸어 주마.”
검은 물소의 몸 위로 시커먼 아지랑이가 흘러나왔다.
넘실거리던 실자락이 하나가 되면서, 두꺼워진다.
특히나 눈에 띄는 건 물소의 거대한 뿔.
마치 그게 악마나 도깨비의 것처럼 느껴졌다.
끝이다. 저 뿔을 본 순간, 살아남는 자는 없었다.
분명, 검은 물소에게 목숨을 잃을 거라고.
“구오오오오오!”
쿠구구구구!
검은 물소가 땅을 박찼다. 멧돼지, 아니 물소였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면서, 지면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대기의 벽이 꿰뚫리고 그 뒤로는 돌풍이 불면서 근처에 있는 이들을 피아 구분 없이 날려 버렸다.
“아……”
계달은 눈을 감았다.
그 옆과 뒤에 있던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저건 죽음이었다.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감겨진 시야에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콰아아아아앙!
굉음이 터졌다. 고막이 떨어질 정도의 크기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충격의 여파도 보통이 아니었다.
사원을 둘러싼 수풀이 뿌리째 뽑혀 나갈 정도로 흔들렸다.
태풍이 한바탕 지나간 거리와도 같았다.
“어?”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죽은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몸의 감각이 여전하다.
머리카락을 헤집고 지나간 바람, 피부 위로 돋아난 닭살, 비릿하게 맡아지는 혈 향까지 고스란히 남았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계달이 눈을.떴다.
어둠이 걷히고 빛이 들어온 순간, 계달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건……”
눈앞에 사람이 있었다.
물소의 뿔을 붙잡고 버티고 있는 청년이 보였다.
그 등은 결코 넓다고 볼 수는 없었다.
물소에 비하면 몹시 좁았다.
하나 이상하게도 저 등이 남만의 어떠한 고목이나 커다란 잎사귀보다 크게 느껴졌다.
“왜 애꿎은 곳에 와서 힘자랑하고 그러냐.”
청년 , 주서천이 입꼬리를 말아 비틀어 웃었다.
“네 이놈……!”
검은 물소의 눈동자에 분노가 어렸다.
그 누구도 자신 앞을 막은 적이 없었다.
물소가 지나가는 길을 막는 자는 빈대떡처럼 납작해졌다.
검은 물소는 앞을 가로막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옴!”
검은 물소가 냉정을 잃었다.
호수처럼 잔잔한 평정심이 무너졌다.
분노로 인해 눈이 벌겋게 충혈됐다.
혈압이 오르자 피부가 검붉게 달아올랐다.
콧방귀를 씩씩 내면서, 전진하기 위해 발을 열심히 놀렸다.
파바바밧!
왼발을 내디디고, 오른발을 내디딘다.
오른발을 내디디고, 왼발을 내디딘다.
발걸음을 서로 교차하며 달리고 또 달린다.
“후웁!”
주서천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멈춘다.
내력을 폭발시켜 최대한 끌어 올렸다.
상완근이 부풀어 올랐다.
부웅.
“어어?”
야수 부족의 전사들에게서 얼빵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헤 벌렸다.
언제나 앞에서 모든 걸 부술 기세로 전진하던 검은 물소가 들렸다.
공중에 떠올라 직각으로 섰다.
주서천은 천근추의 요령으로 무게를 늘리고, 굳건한 두 다리를 기둥 삼아 버렸다.
그리고 폭발적인 근력을 이용해 뿔을 잡은 채 검은 물소를 들어 올렸다.
“설마……”
누군가의 중얼거림. 그리고 설마가 사실이 된다.
“으랍챠아아아아앗!”
주서천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이어진 행동은, 바닥으로 내리꽂는 거였다.
쿠와아아아앙!
“끄아아아아아악!”
야수 부족의 부족장, 검은 물소.
남만의 최강자가 어이없게도 뿔이 잡힌 채 바닥에 내리꽂혔다.
거의 구 척에 이르는 거구가 아래로 힘껏 떨어지니 , 무게도 나가는 만큼 그 위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수직이 수평이 된다. 지면 위로 배가 부딪쳤다.
갈비뼈가 우지끈! 소리를 내면서 부러졌다.
조각난 뼈가 내장을 찌르며 피를 울컥 토해 내게 만들었다.
내공의 순환이 엉망이 된다.
뿔에 실린 강기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이런, 개새……!’
검은 물소가 고통 속에서 욕설을 내뱉었다.
얼른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한 번 더 간다아아앗!”
주서천은 뿔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지반이 뒤집어지긴 했지만, 균형도 잃지 않았다.
검은 물소의 몸을 들어 올려 온 힘을 다해 한 번 더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아앙!
“커허어억!”
검은 물소가 피를 울컥 토해 낸다.
어딘가 또 부러진 것 같은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칼에 베여도 생채기로 끝나는 그 단단한 피부와 근육조차 압도적인 충격에 버티지 못하고 파열했다.
뇌가 흔들리는 충격. 전 감각이 망가졌다.
힘 하나 제대로 낼 수 없다. 생각이 이어지지 못했다.
이윽고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고, 뼈로 된 가면을 벗으려는 순간, 그 육중한 몸이 다시 붕 떴다.
그리고 그다음 들려오는 절망 어린 말.
“물소 검법!”
주서천이 검은 물소를 잡은 채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악!”
깨갱!
사람과 동물의 비명이 뒤섞여서 울려 퍼졌다.
주서천은 검은 물소를 마치 무기처럼 휘두르며, 눈앞의 적들을 쓸어버렸다.
워낙 그 몸이 육중하다 보니, 사람이라기보다는 기둥을 뽑아서 휘두르는 모양새였다.
당연히 딱히 베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위력이 보통이 아니라서 부딪치는 족족 튕겨져 날아갔다.
“저, 저게 뭐야!”
“부족장님?!”
야수 부족 진영에서 경악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족의 지도자를 검 대신 삼아, 마구 휘두르는 괴상망측한 광경을 보니 정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무, 무슨……?”
팔을 잃은 계달도 마찬가지였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당황한 건지, 여전히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주변의 병사들도 공포 대신에 당혹감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흐랴아아압!”
아군과 적군이 당황하건 말건, 주서천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도리어 그 틈을 노려 공세를 퍼부었다.
야수 부족의 전사들은 모여 있는 인형이라도 된 듯, 주서천이 휘두른 검은 물소에 맞아 쓸렸다.
그야말로 추풍낙엽.
빗자루로 낙엽을 쓸어 버리는 것처럼 예닐곱 명씩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해치우는 속도가 워낙 빨라, 순식간에 팔십 명이 어이없게 당했다.
“정신 차리시오!”
아직도 멍하니 있던 와중, 완채의 목소리가 고막을 후려쳤다.
“헛!”
계달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전장 한가운데 서 있지 않은가.
이럴 때가 아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품 안에서 거적때기를 꺼내 팔이 잘린 부위를 감아 출혈을 방지하고, 밀림도를 반대로 들었다.
주로 쓰던 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불평할 수는 없다.
밀림도를 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지금이다!”
계달이 목청을 높이며 고함쳤다.
“검은 물소가 당했다! 이때를 노려라!”
그의 고함이 전장에 울려 퍼지며 멍하니 있던 병사들의 정신을 깨웠다.
“대수림의 악도(惡徒)를 가만두지 마라! 연합군의 힘을 보여 주도록 하자!”
여리도 지지 않고 지휘봉을 세워 명령을 내렸다.
검은 물소의 패배 소식에, 청화 연합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졌다.
그들의 입에서 천지를 뒤흔들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오며 전장을 메웠다.
깃발은 그 기세에 나부끼고, 고수는 북을 치면서 병사들의 가슴에 다시 불을 붙였다.
와아아아아아!
격전 탓인지 삼천의 숫자가 이천오백으로 줄어들었다.
중상자까지 포함하면 이천에서 이천백이다.
과연 야수 부족.
배나 되는 전력의 차이인데도 이 정도까지의 피해를 입힌 건 대단했다.
그러나 야수 부족 역시 피해가 큰 건 매한가지였다.
삼백 마리의 짐승은 백 이하로 떨어졌고, 전사들 역시 오백에서 육백 밖에 남지 않았다.
무엇보다 크나큰 손실은 부족장의 부재.
부족 최강의 전사가 패배하니 사기의 하락도 그만큼 컸다.
야수의 세계에서 힘이란 건 중요하다.
그 힘의 상징성이 사라졌으니, 후유증도 남들보다 컸다.
“하하하하!”
단하성은 주서천이 날뛰는 걸 보고 웃었다.
그래도 단하성이기에 그냥 웃어넘길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보통의 정파인이자 검수였다면 주서천의 꼬락서니를 보고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을 검처럼 휘두르다니. 저건 검법도 뭣도 아니다.
결코 보기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
단하성이 점창파라서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는 것도 있었다.
실전 무학으로도 이름 높은 점창파는 그 성향이 정파와 사파가 뒤섞여 있었다.
도가적인 수행보다는 전장에서의 실전을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가끔씩 정파의 예의에 어긋난 행위도 종종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물론, 점창파의 입장에서도 기괴한 건 마찬가지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준 은인이니 그냥 넘어갔다.
“크아악!”
“아악!”
형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연합군이 겁을 먹어 주춤거렸지만, 지금은 그 반대다. 야수 부족이 겁을 먹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전세(戰勢)가 훤히 보였다.
승세는 연합군이 가져가고 있었다.
우두머리가 없으니 그 잔당을 처리하는 건 쉬웠다.
남만의 주요 부족이라 할지라도 족장을 잃고 배나 되는 전력 차를 어떻게 해 보는 건 어렵다.
특히나 눈을 번뜩이며 사람의 무리를 사냥하려던 짐승도 꼬리를 내리더니 슬금술금 물러났다.
그걸 시작으로, 야수 부족도 지쳐가다 결국 후퇴를 시작했다.
“어딜!”
“야수 부족이 도망친다!”
“놓치지 마라!”
그러나 그걸 놓칠 연합군이 아니다.
그들은 주요 부족에 대한 원망이 큰 만큼, 도주를 용납하지 않았다.
몸은 삐걱거리고, 페가 찢어질 것처럼 아프지만 적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한 시진 뒤.
사원의 위로 연합군의 깃발이 올라왔다.
야수 부족이 패배했다. 완패였다.
식인 부족처럼 전부 멸족한 건 아니었지만, 지도자를 잃고 흩어졌으니 사실상 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남만의 손꼽히는 대전사, 검은 물소 역시 사망했다.
소문에 의하면 검은 물소는 어떤 중원인의 손에 잡혀, 방망이처럼 휘둘리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대전사답지 않게 굴욕적 인 최후였다.
그 여파 탓인지 야수 부족의 사기는 나락까지 떨어졌다.
결국 오합지졸이 되어 도망만 치다가 연합군에게 잡혀 무참히 살해당하는 걸로 끝났다.
그리고 이 소식이 남만 전체에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뭣이?”
남자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도대체 뭣들 하는 거야!”
천하고도 삼백 마리.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멸족이나 다름없는 피해를.받았고, 그에 비해 적군인 연합군의 피해는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설사 졌다고 해도, 완패를 당해서는 안 됐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야수 부족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끌어야 했다.
아니, 끌지 못해도 섣불리 덤빌 수 없도록 피해라도 입혔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격전이 끝나 버렸고, 적의 숫자조차 큰 변화가 없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이천을 넘는 전력과 부딪치게 된다.
아무리 주요 부족이라 해도 전력 차가 심했다.
“이 일이 끝나면 독충이건 구희건 그 부족장 연놈들을 내 손으로 직접 찢어 죽이겠다.”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을 셋으로 나누어 독립적으로 운용한다고 들었을 때는 두 귀를 의심했다.
마음 같아서는 말리고 싶었지만, 자존심 높기로 이름난 자들인지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청화 연합군이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건 이해하나 이번에는 중원인이라는 변수가 있지 않나.
무엇보다 삼천이라는 숫자를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봤다.
그게 패인이었다.
“중원인들에 대해서는 알아 왔나?”
“아무래도 독봉이 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당가와 점창파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만약 이곳이 중원이었더라면, 그 정체를 보다 빠르고 자세하게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은 남만이다.
서로 관심이 없다 보니 제대로 알려진 게 별로 없었다.
널리 알려진 것이라곤 중원에서 누군가를 찾으러 온 수색대의 무위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사실 정도였다.
“설마 그게 끝이라는 건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한심한 놈.”
지금은 전장을 살펴보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
손이 워낙 부족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인재가 중요했다.
“신의는?”
“만독지에서 독정을 손에 넣었다고 합니다.
다만 돌아오는 데 닷새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수하가 손바닥 위에서 꿈틀대는 벌레를 보여 줬다.
음저충(音肝蟲)이라는 벌레인데, 특이한 특성을 지녔다.
수컷이 번식기가 되면 주변의 소리를 무작위로 저장했다가 마찬가지로 번식기인 암컷에게 찾아가 전달하는데, 독충 부족은 이 특성을 이용해 중원의 전서구처럼 전달 체계로 사용했다.
“구희의 연단술, 독충의 독정.”
남자가 입술을 혀로 적시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것만 완성되면 이 지긋지긋한 남만도 이제는 안녕이다.”
남만은 끔찍한 곳이었다.
열대 지방이다 보니 가만히 있으면 덥고, 습하고, 짜증이 솟구쳤다.
가만히 있으면 덥지 않다고 지껄이는 자는 전부 잡아서 족쳐야 했다.
그 정도로 짜증 나는 곳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신의는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
“살려 둬라. 그리고 연합군이 쳐들어오면 최대한 보고하도록 하라. 나는 연단에 집중하도록 하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