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검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뭔 개소……”
“소령!”
아홉 살, 혹은 열 살 정도의 여아.
소령이 지면을 미끄러지며 사제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쳤다.
그냥 지나간 것만이 아니다.
한 손이 아닌 양손에 쥔 비수를 번개같이 휘둘렀다.
“크아악!”
통나무처럼 굵어진 다리가 무너져내린다.
근육이 찢어지면서 힘을 잃었다.
문신의 빛이 옅어졌다.
하체가 힘을 잃자 균형도 불안해졌다.
지팡이가 검강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밀려나려 했다.
‘웃기지 마!’
여기에서 죽을 수 없다.
자신이 누구인가!
식인 부족의 사제, 남만의 지도자다.
지금까지 일궈 둔 것이 얼마인데 여기에서 당할 수는 없었다.
정체불명의 언어를 중얼거리면서, 주술을 좀 더 증폭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소령이 사제의 등을 밟고 어깨 위로 올라오더니만, 녹색으로 불타오르는 눈 위에 비수를 처박았다.
푹! 푸욱!
“끄아악!”
입에서 비명이 끊이지가 않는다.
동시에 끝까지 쥐고 있던 지팡이가 드디어 손에서 떨어졌다.
소령이 그사이에 사제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목을 꺾었다.
우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사제가 눈을 부릅떴다.
“우, 웃, 기, 지마……”
주술의 힘 탓인지, 아니면 죽기 전의 의지인지는 모르겠으나 목뼈가 부러졌는데도 살아 있었다.
“캬으으끄르륵!”
괴성인지 고함인지 비명인지도 몰랐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가 들끓었다.
눈알을 잃었는데도, 그 시선은 정확히 주서천을 노려보았다.
핏물 속에서 증오가 느껴졌다.
주서천이 십 보 밖으로 물러났다.
목뼈를 부러뜨린 소령도 마찬가지로 십 보 밖에 착지했다.
쐐액!
주서천과 소령이 거의 동시에 비수를 던졌다.
유령곡주와 유령이 동시에 펼친 유은비도였다.
비수가 사제의 오른쪽 목살을 뜯고 지나쳤다.
후위의 비수도 사제의 왼쪽 목살을 뜯었다.
서로 교차하듯이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비수.
그리고 그 비수를 주서천과 소령이 낚아채 회수한다.
사제는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목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과 낚아 채는 소리를 듣고 불길함을 느꼈다.
“설……”
파바바밧!
앞의 비수는 뒤로, 뒤의 비수는 앞으로.
고작 둘밖에 되지 않은 비수였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일순간에 수십 개씩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주서천이 던지면 소령이 잡았다.
소령이 던지면 주서천이 잡았다.
그런 방식으로 문신이 그려진 살을 베어 내고, 꿰뚫고, 뜯어내면서, 마지막에는 심장의 앞뒤에 꽂혔다.
사원의 꼭대기, 수십 년 동안 식인 부족을 지배했던 지도자가 드디어 생명이 끊긴 채로 제단 위에 엎어졌다.
그리고 주서천과 소령이 그 앞에 오연히 선 채 사원을 내려다보았다.
“우……”
수색대에서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 함성으로 이어졌다.
“우와아아아아아!”
육십에 이르는 무인의 함성이 사원에 울렸다.
그 성량이 어찌나 큰지 주변이 울릴 정도였다.
“캬아약 ……”
“커헉, 큭!”
사제의 목숨이 끊어지자마자 주술에도 이상이 생겼다.
식인 부족의 전사에게서 곧장 반응이 나왔다.
시커먼 아지랑이가 새어 나오면서 흩어지고,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던 문신도 멈췄다.
괴이할 정도로 부풀어 올랐던 근육도 쪼그라들었고, 살까지 빠지기 시작했다.
광기가 뒤섞인 적의도 점차 줄어들더니만 이윽고 사라졌다.
전부 지친 기색으로 숨만 거칠게 내쉬었다.
“이때다! 전부 처리해!”
주서천과 소령의 무위에 넋을 잃고 있던 중, 단하성의 외침이 의식을 깨웠다.
“하앗!”
“죽어라!”
식인 부족에게 자비는 없다.
전투 불능에 빠져 있으니 , 다시 날뛰기 전에 최대한 많이 죽여야 했다.
저항을 하지 않다 보니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이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찝찝한 마음은 없었다.
“이제 좀 쉴 수 있겠네.”
주서천이 숨을 돌리며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전력이 백오십이었던 식인 부족도 수색대의 활약 덕인지 오십으로 줄었다.
사원의 꼭대기를 향해 오르면서 힘을 아끼지 않고 덤벼드는 적들을 죽인 덕분인지 여럿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사제의 주술이 해제되면서 그 반동으로 전투 불능이 되자, 제대로 된 반항 한 번을 못하고 죽었다.
오십도 이십 이하로 줄어들자, 대강 정리됐다.
“그만! 나머지는 포로로 한다!”
혹시 캐낼 것이 있을지 모르니 몇 명은 살려 두기로 했다.
열다섯 명 정도 남았을 때 학살을 멈췄다.
“이제야 좀 여유 있게 있을 수 있겠군.”
단하성이 뒷정리를 맡기고 주서천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강호의 후배가 선배님을 뵙습니다.”
주서천이 먼저 단하성을 보고 인사를 건냈다.
“편하게 대해 주게. 내 전에 독혈곡에서 주 대협에게 생명의 빚을 졌는데, 또 이렇게 빛을 지는구려. 이 은혜는 아무래도 평생이 걸려도 갚지 못할 것 같군.”
“괜찮습니다. 다음에 제게 무슨 일이 있다면 도와주시면 됩니다.”
“사정상 제자를 들일 수 없지만, 대신 내 성하장의 이름을 걸고 얼마든지 도움을 주겠다고 맹세하지.”
점창파는 성하장이 재정난을 해결해 주는 대가로 장주의 아들을 장문인의 적전제자로 받아들여 주었다.
그 대신 몇 가지 조건을 덧붙였는데, 그중에는 전수받은 무공을 발설할 수 없도록 금제를 걸어 두는 것이 존재했다.
그렇다 보니 제자를 받는 게 불가능했다.
“점창칠공자께서는 괜찮으신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궁금하군요.”
정리가 대강 끝나가자 당염과 당혜가 다가왔다.
“아, 오셨습니까. 도와주셔서 감사하오. 당가에게도 빚을 졌소.”
단하성이 당염과 당혜에게도 각각 인사를 건냈다.
“무사해 보이니 다행이군. 어떻게 된 경위인지 대충 알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다만 그건 들어가면서 이야기하지요.”
“가면서라니?”
“사원의 내부입니다.”
식인 부족의 사원은 꼭대기의 제단만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원이 곧 부족의 삶의 터전이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잠자리는 물론이고 식량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나 병기고도 전부 사원 내에 있었다.
그 외에도 부족 바깥에서 사냥해온 짐승 혹은 사람을 감금하는 장소도 존재했는데, 점창파 역시 얼마 전까지는 이곳에 감금되어 있었다면서 그동안의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세세한 것을 제외하곤 주서천의 추측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나저나, 그 여아는 대체 누군가?”
당염의 눈길이 소령으로 향했다.
도저히 인간 같지 않았던 사제, 그 괴물과의 격전을 드문드문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불꽃을 가르면서 튀어나온 주서천과 소령의 눈부신 신위를 보고 감탄했었다.
매화정검의 무위야 독혈곡에서도 그렇고, 중원에 워낙 정평이 나 있으니 ‘과연’하고 수긍이 갔다.
하나 고작 예닐곱, 많아 봤자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여아가 저런 무위를 보이니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보아하니 화산파는 아닌 것 같고……”
단하성도 당염의 물음에 동하여 호기심을 보였다.
당혜야 암천회나 유령곡에 대해서도 들은 것이 있어, 소령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아 아무 말도 안 했다.
“사정이 있어서 말씀을 드리기에는 조금 애매합니다. 괜찮다면 제 얼굴을 보고 넘어가 주시겠습니까?”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솔직하게 답할 수도 없고, 둘러대기도 어려워서 쓴웃음을 지으며 숨겼다.
“알겠네. 내 그러도록 하지.”
단하성은 은인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 의문을 남기면서도 깔끔하게 포기했다.
강호 무림에서 어떠한 사정을 자꾸 캐묻는 것도 실례인 일.
단하성은 그리 무례하지 않다.
당염은 미련이 남은 표정이었지만, 당혜가 눈짓을 보내 오자 입맛을 다시며 의문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남만을 수색하기도 전에 운이 나빠 이곳에 잡혀 왔으나 그게 또 나쁜 것만은 아니었네.”
“혹시, 신의의 행방을 찾은 겁니까?”
“그건 아니네만, 실마리를 찾았네.”
예상외의 희소식에 일행의 안색이 환해졌다.
이 넓은 대수림, 남만에서 신의 한 사람을 어찌 찾아야 할지 막막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단하성은 사원의 깊숙한 곳, 다른 곳보다 불빛이 적은 곳으로 이동했는데 나타난 곳은 뇌옥이었다.
그것도 보통의 뇌옥이 아니었다.
“쯧!”
당염이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주서천과 당혜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소령만 무표정했다.
뇌옥의 근처에는 주방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 여러 식재료뿐만 아니라 말린 고기나 가죽이 보였다.
그러나 그 고기와 가죽은 짐승의 것이 아닌 사람이었다.
일행은 기분 나쁨을 느끼면서, 열 명 밖에 남지 않은 식인 부족을 그냥 죽여 버릴까 고민했다.
“어어?”
뇌옥을 지나치던 도중, 갇혀 있던 사람들은 식인 부족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하러 왔소! 뇌옥을 열어 줄 것이니, 당황하거나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질서를 유지하고 나오시오!”
단하성은 뇌옥의 열쇠 꾸러미를 흔들며 일부러 들으라는 듯 소리를 냈다.
끼익. 철컹.
뇌옥의 문이 하나하나 열렸다.
그러나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의심 탓에 섣불리 나오지 않았다.
몇몇은 너무 오랫동안 감금되어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는지 벽 구석에서 몸을 웅크려 경계했다.
“주, 중원인?”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던 중, 수많은 뇌옥 중에서 몇몇만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당신들이 어떻게……?”
오랫동안 씻지 않아 얼굴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꾀죄죄했지만, 이상하게도 살은 또 후덕하게 꼈다.
식인 부족이 사람을 식량으로 쓰기 위해서, 끼니는 필요 이상으로 챙겨줬다.
다들 살이 찌면 어떻게 될지 알기에 거부하기도 했으나, 그럴 경우 죽이거나 고문했기에 어쩔 수 없이 공포에 떨면서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오, 거기에 있었군.”
단하성이 마침 찾고 찾던 사람을 보고 웃었다.
“칠공자가 아는 사람인가요?”
“남만의 청화(淸化)라는 지방의 토호(土豪)인 여리라는 자요.”
‘여리?’
주서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다.
그것도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청화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같고……’
전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안개처럼 흐릿해서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아무리 남만에 대한 서적을 읽었다고 할지라도 중원도 아닌 일이고, 오래전이니 전부 알 수는 없다.
책에서 읽은 건 확실한데,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쉬웠다.
“토호? 남만은 야만 부족밖에 없는 게 아니었나?”
당염이 토호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에 신기해했다.
“정말로 야만족뿐이라면 대화가 통할 리가 없지요. 확실히 남만은 식인 부족처럼 주요 야만 부족의 지배 하에 놓여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는 아닙니다. 그중에는 상식인도 있습니다.”
중원은 남만을 오랑캐라 폄하하여 여기고 있지만, 그래도 한때는 원과 명에 대항하던 국가였다.
지금은 전쟁에 패배하여 이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잘 살펴보면 제대로 된 문명이 잔재해 있다.
“여리 공, 안심하게나. 식인 부족은 전부 처리했으니 걱정할 것 없네.”
“그럴 리가!”
여리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뇌옥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군거렸다.
식인 부족의 강함은 거짓이 아니다.
사람을 먹는 괴물답게 그 힘은 남만에서도 손꼽혔다.
특히나 부족의 지도자, 사제의 주술은 사술의 수준을 넘었다.
그 힘을 떠올리면 몸이 떨렸다.
“내가 거짓을 고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
여리는 의심을 전부 거두지 못했으나, 단하성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는지 뇌옥 밖으로 슬쩍 나왔다.
‘정말인가?’
평소라면 경비가 있어야 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제야 낯선 얼굴들이 보였는데, 특히나 당혜를 본 순간 여리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허어…… 내 지금 선녀를 보고 있는 건가?”
혹시나 이미 식인 부족의 배 속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절 예쁘게 봐주시는 건 감사하나, 슬슬 답답해지려니 그 기분 나쁘고 불쾌한 살덩어리를 출렁이면서 얼른 나와 주셨으면 해요.”
당혜가 언제나처럼 점잖은 목소리로 독설을 퍼부었다.
“괜히 돌려서 물을 생각도 없고, 댁의 심신이 취약해져 있다고 배려해 줄 생각도 없어요. 저희의 사정이 급하니, 웬만하면 얼른얼른 나와서 화인의원의 신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으면 해요.”
“……”
여리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하성조차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떡 벌렸다.
“어째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시간을 보내시는지 조금 이해가 안 가는군요. 괜찮다면 목소리가 나오도록 창자가 끊어지는 독을 선사해 줄 수도 있는데, 꼭 그런 방법을 써야 할까요?”
“아, 아닙니다! 소저!”
여리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곧장 반응했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는 당혜의 손바닥에 모인 독기로 향했다.
“제 말을 이렇게나 빠르게 이해하시다니, 현명하신 분이네요. 정말로 기뻐요. 안 그래도 싸우고 오느라 피곤했는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답니다.”
‘난 왜 이 여자랑 자꾸 엮이는 걸까?’
주서천이 당혜의 독설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신의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곳에 잡혀 오기 전에 중원에서 온 명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당혜뿐만 아니라 수색대가 눈을 빛냈다.
중원인이 남만으로 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것도 의원 중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치료해 주는 보답을 금은보화가 아닌 약초나 독초를 요구하던 게 좀 특이했습니다.”
“신의로군!”
당염이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그 명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주서천도 조금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까지는 잘……”
여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절 청화로 데려다 주신다면 찾는 데 도움은 줄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리로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색대는 남만의 청화 지방으로 향했다.
남만은 중원에 패하여 지배를 받게 됐고, 전에 있던 왕조 역시 반란으로 인하여 사라졌다.
중원, 명은 남만의 전통과 풍습을 금지시키고, 기존의 책을 불태워 버려 문명과 역사를 없애 버렸다.
그리고 사서오경을 배포해 성리학과 유학을 가르쳤으며, 불교와 도교까지 전파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명령에 지나지 않았다.
남만이 워낙 척박한 땅이며 가져갈 것이라곤 인력 외에 없어서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파견된 관리들은 감시도 없겠다 사리사욕을 재우는 데 열중하여, 남만은 결국 무법 지대가 되기에 이른다.
통제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무법지대에는 약육강식이 자연스레 자리잡게 됐고, 식인 부족처럼 야만족들이 창궐하였다.
그래도 그중에서 양심과 도덕을 버리지 않아 최소한의 대화가 통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곳이 바로 청화였다.
남만, 청화.
“토호님께서 살아 돌아오셨다!”
망루 위의 경계병이 여리를 보고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밀림의 고목을 소재로 해 어지간한 석벽만큼의 두께를 자랑하는 벽 너머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드르륵. 끼이익.
외부의 침입을 불허하는 문이 열린다.
크기가 크다 보니 열리는 속도가 느릿느릿했다.
“뭣 토호님께서?”
“그보다 저들은 누구지?”
행방불명됐던 토호도 토호지만,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자 이목이 집중되면서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여리 공!”
토호의 생존 소식을 듣고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나온 건 가족이 아닌 혈맹을 맺은 군사, 완채였다.
“아이고, 이 사람아! 무사히 돌아왔군!”
완채는 눈을 글썽이면서 여리를 끌어안았다.
“완채 공!”
완채가 크게 반겨 주자 여리도 반가워했다.
생환을 기뻐하면서 끌어안기를 잠시.
여리가 뒤에서 수색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삼십을 넘은 남정네들이 얼싸안는 걸 보여줘서 미안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저분들은 누구고?”
완채도 낯선 방문객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일단 자리부터 옮기지. 내 전부 이야기해 주겠네.”
* * *
남만에서 주요 부족에 속하지 않는 부류는 둘로 나뉜다.
힘에 굴복당하여 식민화당하거나, 혹은 그 힘에 맞서 대항하는 자들이었다.
청화는 그중에서도 후자의 대표 세력에 속했다.
이곳의 토호인 여리는 생각보다 이름 있는 자였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어째서 식인 부족 한가운데에 있던 겁니까?”
주서천이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애초에 토호가 적대 세력 뇌옥에 갇혀 있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처음에는 배신이라도 당한 줄 알았는데, 정작 청화에 와 보니 전혀 아니었다.
그의 생환에 대한 반응만 봐도 인망이 어떤지 대충 알 수 있었다.
“힘이 부족해서였습니다.”
여리는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그 동안에 있던 사정을 알기 쉽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청화 지방군은 남만의 주요 부족에게 대항할 수는 있었지만, 그 사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승세를 갖기는커녕 전력이 부족해 밀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평소 주요 부족에게 착취당해 불만이 쌓인 이들이나, 대항할만한 힘을 가진 세력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사안이 중요하다 보니, 마음을 움직이려면 토호인 제가 직접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있는 제 군사는 미쳤냐며 반대했지요.”
“그래서 이 사달이 나지 않았나.”
완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그들이 멸족했다는 게 정말이오?”
완채는 죽을 날만 기다리던 여리가 중원인들에게 도움을 받은 걸 듣고 대경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식인 부족은 그 주요 부족 중 하나인 동시에 옛적부터 골치였던 야만족이었던 탓이다.
그들은 비록 숫자가 적었으나, 부족원 하나하나가 뛰어난 전사였으며 사냥꾼이었다.
밀림을 자기 집처럼 돌아다니면서, 칼을 다루는 솜씨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독침은 공포였다.
무엇보다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귀가 아닌가.
대수림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던 악마들이 한둘도 아니고 전부 당했다고 하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믿건 말건 간에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것보다는 토호를 구해준 대가를 받아야겠는데요.”
당혜가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이런, 은인 분께 실례를 저질렀구려.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순수하게 놀라서 그랬소. 기분이 나빴다면 죄송하오.”
“저희 일행이 시간이 많지 않다 보니 조금 예민합니다. 그걸 이해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이오.”
완채가 주서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중원에서 온 명의의 행방을 알고 있습니까?”
“예.”
완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좋았어!”
단하성이 주먹을 불끈 쥐며 웃었다.
그러나 기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완채의 좋지 못한 표정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가 문제였다.
“어디에 있습니까?”
“만독지(萬毒地).”
“쯧!”
주서천이 혀를 찼다.
당혜나 당염의 얼굴도 좋지 못했다.
아니, 안 좋은 걸 넘어서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허어……”
여리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탄성만 흘렸다.
단하성도 분위기가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최악이죠.”
당혜가 눈썹을 찡그리면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손가락 사이로 새카만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흘러내려 그 와중에도 고혹적인 미색을 뽐낸다.
“위험한 곳이오?”
“저주받은 곳입니다.”
주서천도 좋지 못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