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남들이 본다면 충분히 끝난 일이다.
절대 철무명환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겠지.
그러나 주서천은 아니다.
힘을 줄이기는커녕 힘껏 끌어 올린다.
신행백변으로 태세를 바꿨다.
무게를 버리고, 가벼움을 얻는다.
동시에 기척도 없애 버렸다.
무릎을 굽혔다.
허벅지 근육이 대퇴골을 살짝 누른다.
이 과정조차도 찰나에 불과했다.
타아앗!
주변의 광경이 순식간에 지나친다.
담리백과 사도천주의 얼굴이 보였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를 지나쳤다.
무너져 내린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시선 아래로 서로 병장기를 부딪치며 격렬하게 싸우는 사파인이 보인다.
흙먼지가 코를 찔렀다.
그러냐 주서천의 눈동자는 오직 한곳으로만 향했다.
튕겨져 나가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철무명환이다.
유령이 된 그도 새처럼 날았다.
아쉽게도 경공술의 최고 경지인 허공답보나 능공허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면을 박찬 힘으로 팔다리를 휘저으며 떨어지려는 철무명환의 앞까지는 근접할 수 있었다.
“우오오옷!”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 고함에 발밑의 싸움이 잠시 멈췄다.
‘‘칠성사!’
주서천은 확신했다.
공중에 뜬 철무명환이 고통을 참아내며, 끝까지 놓지 않은 검을 보며 역시 암천회라 생각했다.
설사 화경이라 할지라도, 방금 전 일격에 버텨 낼 재간은 없었다.
원래라면 당황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철무명환은 아니다.
천선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의 오기.
괴물처럼 느껴지는 무공이 증명한다.
그래서 방심하지 않았다.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암천회라면 칠성사라면 반드시 살아남는다.
의심은 없었다. 확신만이 있었다.
어깨를 뒤로 돌린다. 양손을 머리 뒤에 둔다.
손에 꽉 쥐어진 검에 전부를 담듯 강기를 실었다.
복잡한 초식이 있는 게 아니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 다.
그저, 무게를 담았다.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인생을.
모든 걸 담아, 무게로 전환해 내리 그었다.
휘이이이이잉!
그것은 검이었고, 삶이었고, 둔기였다.
철퇴가 된 그 검이 위에서 아래로 힘껏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카아악!”
철무명환의 손에서 검이 미끄러졌다.
째쟁!
동시에 주서천의 검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다.
그리고, 철무명환도 직각으로 꺾여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별똥별이 떨어진 모양새였다.
“으아악!”
“아악!”
그 충격파가 파도가 되어 주변을 뒤덮었다.
멀쩡히 싸우던 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철무명환이 박힌 곳의 지면도 엉망진창이었다.
원형으로 무려 일 장이나 움푹 파이고, 내려앉았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라 주변을 뒤덮었다.
“쿨럭!”
주변이 흙먼지로 뿌옇다.
그 속에서 희미하게 철무명환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
주서천도 멀쩡하진 못했다.
모든 걸 쏟아 부어 착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과한 무게를 담아서 그런지 팔의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왼팔은 뼈가 부러졌다.
찢어진 옷자락,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 흙먼지로 가득한 머리는 거지꼴 그 자체다.
그러나 신음 하나 흘리지 않는다.
강렬한 의지를 담은 눈을 빛내면서 깊게 파인 구덩이로 향했다.
“끄억, 끄흐윽……”
살아 있다. 질긴 목숨이다.
울음인지 신음인지도 모를 소리였다.
만신창이가 된 철무명환이 언뜻 보인다.
주서천은 구덩이를 내려다보다, 무언가 떠올린 듯 입을 달싹였다.
“개양치곤 약하군.”
“천권인가.”
철무명환이 눈을 부릅떴다.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경악과 불신이 느껴졌다.
“도…… 대체…… 누……구……”
힘겹게 쥐어짜 내는 목소리.
주서천은 목소리의 주인을 내려다보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화산파.”
철무명환의 숨결이 옅어진다.
“주서천.”
그 이름을 듣자마자 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철무명환 천권의 심장이 정지했다.
옥형은 암살과 감시를 맡고 있어서 이렇게 대외적인 일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천권과 개양 중 한 명인데, 칠성사 내에서 무력을 상징하는 개양치곤 약해 자연스레 천권을 떠올렸다.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고, 간자들을 통해 천선과 연계하여 정보를 얻어 내는 천권성.
사도천에 잠입하여 담리백을 뒤에서 조종하는 역할로는 알맞았다.
“뭐,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주변에서 무사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주서천은 시선과 수군거림을 무시한 채, 숨을 거둔 철무명환의 시신을 어깨에 둘러메고 몸을 돌렸다.
등을 돌리니 붉은 기왓장의 전각이 보였다.
저기에서 날아왔는데 , 거리가 제법 됐다.
‘이게 얼마 만의 고통이더라.’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소매로 슥 닦았다.
왼팔은 부러져서 쓸 수 없다.
소모한 내공도 제법 많아서 탈력감이 들기 시작했다.
허벅지 근육이 심하게 당겨 왔다.
그러나 이 통증이 생각보다 나쁜 건 아니었다.
위기감이 솟구쳤지만, 묘한 상쾌감도 느껴진다.
피식 웃곤 전각을 향해 걸었다.
그의 앞을 막는 사람들은 없었다.
마치 파도처 럼 옆으로 슥 갈라졌다.
“허어, 저런 고수가 있었던가?”
“잠깐, 저거 내단검문주 아니야?”
“정말이잖아! 철무명환이다!”
“문주님!”
사파인들이 그제야 눈치채고 놀란 목소리를 냈다.
특히나 내단검문의 동요가 심했다.
마음 같아선 뛰쳐나가 구해 내려 했지만 이상하게 발이 안 떨어졌다.
주변의 모두가 주서천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끼고 감히 접근하지도 못했다.
‘유령보.’
그 강렬한 시선 속에서, 주서천은 대기에 녹아들 듯이 사라졌다.
괜한 싸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몸이 정상이라면 모를까, 좋지 않은 상태에서 싸웠다간 이후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헉! 사라졌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사파인들이 귀신에 홀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크하악!”
담리백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나가떨어졌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을 구르니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치켜떴지만, 그뿐.
사도천주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졌다.’
‘이럴 수가.’
임초건과 갈홍석의 얼굴에 시커먼 그림자가 꼈다.
궁귀검수가 철무명환을 데려가면서 결과는 이미 정해졌다.
상천십좌는 감히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지금이라도 기회를 주마.”
사도천주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걸 실토한 뒤, 자결해라. 내 그럼 편히 죽을 수 있도록 손써 주마.”
“아비가 아들에게 자살하라고 하다니, 거참 너무한 거 아니요? 완전히 패륜이구려.”
담리백이 ‘흐흐흐’ 하고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허, 참.”
사도천주가 어이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임초건이나 갈홍석의 표정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하기야, 자식을 장기 말로 사용하는 양반인데 부성애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지……”
담리백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에서 혈광을 내뿜었다.
그의 발 밑에서 붉은 실 자락이 넘실거렸다.
“인제 와서 불쌍한 척을 할 거라면 늦었다.”
“으하하, 불쌍한 척? 헛소리. 내 숙원을 풀 기회가 왔는데 내가 뭐하러 그런 짓을 해야 하나?”
미약하게나마 지키던 예우도 사라졌다.
이젠 아비가 아니라 원수를 보는 시선이었다.
“어리석은 놈.”
사도천주가 노기 어린 눈으로 담리백을 노려봤다.
마지막으로 베풀어 준 아량도 거절했다.
이젠 주저할 필요 없었다.
그사이 담리백의 혈광이 짙어졌다.
피부 위로 퍼런 핏줄과 힘줄이 도드라졌다.
살기도 쏟아져 나왔다.
마치 지닌 힘을 전부 개방하듯, 소름 끼칠 정도의 핏빛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동안 빨아들인 혈액을 증명하듯 코가 마비될 정도의 혈 향이 맡아졌다.
“죽어랏!”
담리백이 몸을 날렸다.
혈안흡혈공이 극성으로 치솟았는지, 흰자까지 시뻘갛게 물들었다.
확실히 몸서리칠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괜히 마공이 아니다.
푸후욱!
“커헉!”
그러나 승패는 결정됐다.
어떠한 반전도 놀람도 없다.
사도천주의 손바닥이 담리백의 흉부를 후려쳤다.
핏빛으로 일렁이는 강기가 수도에 실렸지만, 그 끝자락조차 사도천주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원, 통…… 하도다……”
담리백이 미련 가득한 눈으로 사도천주를 노려봤다.
사도 통일이 눈앞에 있었거늘, 막혀 버렸다.
아비를 죽이고 천하제일인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났다.
스스슥.
“쯧!”
사도천주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매정하다 할지라도, 친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건 결코 기분이 좋지 않다.
게다가 정보를 수집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죽이지 않고 살리려 했지만, 괜히 조절했다가 저 섬뜩하게 느껴지는 혈강기에 당하기라도 하면 치명상을 면치 못했으리라.
“끝났군.”
일찍이 도착해, 부자(父子)의 혈투를 지켜보던 주서천이 중얼거렸다.
* * *
패륜아의 반란.
소천주로 알려진 담리백이 일으킨 반란이 끝났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누가 이길지는 뻔하지.”
“상천십좌에게 대들다니, 미친 게 틀림없군.”
“마공을 익히지 않았는가. 그럴 수밖에.”
이 소란은 순식간에 무림, 아니 중원을 넘어서 새외까지 퍼졌다.
한 획을 그은 사건이니 당연했다.
안휘, 무림맹.
사파의 영원한 숙적, 정파도 이 소식에 민감했다.
개방의 거지들을 풀어 정보를 수집하도록 명했다.
‘허어, 사이가 좋지 않다곤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남궁위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전의 시작이었던 담리백의 마공수련.
정파는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반가워했다.
사파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낮출 수 있어서였다.
실제로 백성들의 입에서 사파를 욕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남궁위무는 이를 노리고 싸우기도 전에 입소문을 통해 사파에 타격을 입혔다.
이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지는 몰랐다.
사도천주 성격상 난봉꾼 아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으니, 투옥하거나 죽여 끝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군사진도 어떻게 해야 이 사건을 효율적으로 키워서 사파에게 타격을 줄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사도천에서 대대적인 내전이 터졌다.
“사도팔문 중 반절이 소천주에게 붙었었다고?”
남궁위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림맹의 장로진도 매한가지였다.
툭 까놓고 말해서, 미친 짓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마공을 수련한 자를 세력의 반이 편들다니.
“어디인가?”
“야수문, 쌍도문, 술진문, 그리고 내단검문입니다.”
부군사, 제갈상이 답했다.
“사도팔문이 사도사문이 되겠구나.”
사도천주에게 용서란 건 없다.
특히나 배반자가 나온다면 그 친척까지 싸잡아서 처리한다.
괜한 불안이나 위협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반란이 끝나자마자 그들을 잡아들였다.
반란의 주역이 된 사도사문과 관련이 있는 자들은 혹시라도 괜히 꿰일 것을 두려워 숨기 시작했다.
“문주들은 어떻게 됐나?”
“야수문주 임초건과 쌍도문주 갈홍석은 단전이 폐해진 채 투옥됐고, 술진문주 나각과 내단검문주 철무명환은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건 사도천주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갈상은 개방이나 여타 정보 단체에서 수집해 온 것을 축약하여 알기 쉽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내전이 일어난 경위 등 자세한 과정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과연, 개방.
내전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정보를 수집해 왔다.
괜히 정파의 눈이자 귀가 아니다.
“음? 이상하군. 당시 전장이 된 사도천의 본부에는 이렇다 할 고수가 없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각이야 그렇다 쳐도, 철무명환은 혜성처럼 나타나 천하백대고수의 자리를 차지한 화경의 고수였다.
“그러니 당연히 사도천주가 쓰러뜨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그럼 도대체 누가 상대하였는가?”
“궁귀검수요.”
군사, 제갈중호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궁귀검수? 내가 아는 그 궁귀검수 말인가?”
끄덕.
“뜬금없군.”
남궁위무가 궁금해했다.
폭섬도문의 멸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파의 고수.
그러나 그 이후 행적이 불분명해 찾지 못했다.
보통 인물이 아닌 듯하여 개방도를 풀어 찾아보았지만, 사도천과 마찬가지로 무림맹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나타났다.
“하오문의 장로라는 말이 있네.”
“그건 또 뭔 소리인가?”
남궁위무가 제갈중호의 말에 어이없어 했다.
폭섬도문주 구종과 내단검문주 철무명환과 정면으로 싸워 승리한 궁귀검수는 최소 화경의 고수다.
그런데 그러한 고수가 하오문의 장로라니.
아무리 흑도 방파 중 제일이라는 하오문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고수를 장로로 둘 정도로 크지는 않다.
하물며 문주라면 모를까 장로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군사진도 헛소문이 아닌가 싶어 조사 중입니다.”
“과연 그럼 그쪽은 맡기겠네, 부군사.”
“맡겨만 주십시오.”
“그렇다면 그 궁귀검수는 지금 어디에 있나?”
“그게……”
제갈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사라졌네.”
제갈중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사도천에 거센 돌풍이 불었다.
피바람이었다.
반란에 관련된 자들은 전부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대부분이 죽거나, 뇌옥에서 고문을 받았다.
야수문, 쌍도문, 술진문, 내단검문.
하루아침에 문주를 잃은 사도사문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모, 목숨만은!”
“저희는 문주가 시키는 대로만 했습니다!”
“어떻게 사도천주님께 대항하겠습니까!”
목숨이 아까운 자들은 투항하면서 그동안의 일이나, 혹은 사문의 보금자리 등에 대해 고했다.
“으아악!”
단악!”
“사형이 배신했다고? 이런 호로자식!”
사도천주는 이 정보를 토대로 도망자들을 잡아들여 처형시키거나 또다른 정보를 토하게 만들었다.
천주의 아군이자 네 곳밖에 남지 않은 사도천의 최대 세력들은 옳다구나 하면서 정리를 도왔다.
여덟 개로 분산된 권력이 넷으로 쪼개졌으니 싫어할 리 없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반란의 뒷정리에 힘썼다.
그중 몰락한 가문의 재물을 빼내는 일도 있었으나, 사도천주는 도와주는 값으로 쳐 눈감아 줬다.
‘궁귀검수라……’
한편 사도천주도 궁귀검수에 대해 알아봤다.
도와준 것은 고마우나,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힘을 보탰다고 그걸 가만히 놔둘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하오문주가 된 인독종, 강능초에게 서신을 보내 봤으나 알려줄 수 없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하오문 주제에 건방지군!”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전부 죽여야 합니다!”
성격이 급한 자들은 건방지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당장 강능초를 잡아 족쳐야 한다면서 날뛰었다.
그러나 참모진의 의견은 달랐다.
“천주님, 내전으로 세력이 약해졌습니다.”
“안 그래도 술진문이 몰락하게 되면서 정보력이 약해졌습니다. 불쾌하셔도 참으셔야 합니다.”
사도천의 전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요 세력인 사도사문이 배반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정파와 마도이세의 눈초리가 많이 험해졌다.
얕보이지 않으려면 정보력과 전력을 보충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오문과 척을 지는 건 좋지 않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배반자들 중에서도 깊게 관여하거나 수상찍은 놈들을 제외하곤 투항을 받아들여 줬다.
‘마치 영웅이로군.’
아무런 보답 없이 도와주곤 사라진다.
어릴 적에 읽었던 영웅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사도천주는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로 시선을 옮겼다.
사도천이 약해졌다. 심각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괜한 욕심에 움직일 수 없을 정도는 된다.
주서천은 여기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여기서 괜히 손을 대면 어떠한 변수를 부를지 모른다.
그래서 관여되지 않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빠져나왔다.
강능초에게서 사도천주에게 서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밀을 지켜 줬다는 소식에 조금 안도했다.
‘천권을 죽였다.’
천선에 이어 천권을 처리했다.
장족의 발전이다.
이걸로 간자도 제대로 조종할 수 없게 됐다.
천기가 대신 도맡겠지만, 예전보다 못할 것이 분명하다.
입가에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과거에는 이름도 남기지 못한 무사가 이런 업적을 세울 줄이야.
“사파의 영웅?”
이번 일로 궁귀검수의 명성이 매화정검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기분이 묘했다.
정파인인데 사파의 고수라고 불리다니.
사람들이 이걸 안다면 얼마나 놀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너희 마음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칠성사도 이제 다섯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을 전부 처리하고 도감부장과 암천회주의 목을 끊는다.
그것이 최종 목표였다.
“슬슬 화산으로 돌아가 보실까.”
비밀 분타에서 얻은 정보 중에서 따로 처리할 일은 이제 별로 없었다.
그것들도 이 사태로 변화할 터.
그러니 앞으로 할 일은 기다려 보는 것 정도였다.
무림이 어떻게 변화할지 봐야 한다.
그래야 암천회가 어떻게 움직일지 대충이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소령과 합류해 북으로 달렸다.
혹시라도 꼬리가 붙을지 몰라 조심했다.
인기척이 없어질 때쯤, 그제야 한동안 쓰고 다니던 인피면구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무림의 험준함을 경험한 사나운 인상의 무인은 사라지고, 그 대신 화산파의 검수가 나타났다.
“이제 좀 살겠군.”
인피면구를 만들어 준 노인의 실력이 뛰어나 답답함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물감은 느껴졌다.
아무리 실력이 좋다 할지라도 착용한 것과, 착용하지 않은 것에서는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낙 사매가 놀라겠네.’
주서천이 피식 웃었다.
얼마 전에 제갈승계가 무안해할 정도로 훈훈한 이별을 했는데, 얼마되지도 않아 다시 만나게 생겼다.
그렇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화산으로 돌아가 정겨운 얼굴들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사파의 영웅, 궁귀검수가 다시 사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