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회에는 살계부(殺戒簿)란 것이 있다.
얼마 전에 이곳에 주서천의 이름이 윗부분에 새겨졌다.
비록 천선의 부재나 대계로 바쁘지만 천기는 주서천에 대해 생각하고,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확실하진 않으나, 주서천이 본 회의 존재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의심의 근거가 되는 건 맹강이다.
맹강이 암천회를 믿지 않았던 것처럼, 암천회 역시 그를 믿지 못했다.
생김새는 뇌까지 근육으로 둘러싸여 있을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문관 뺨칠 정도로 똑똑한 데다가, 성격 또한 세심하고 철저해 결코 얕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는데 성과가 있었다.
몰래 본 회를 조사하려던 것을 포착했다.
당시에는 보고도 모른 척했다.
눈 감아 준 게 아니다.
미리 대비하여 후에 그걸 믿고 무언가 하려는 걸 막을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도리어 그 믿음이란 걸 이용한 계책을 낼 수 있으니 좋았다.
‘회에 대해서 기억하기 쉬운 거야 남겼을 리 없겠지만, 분타나 첩자 정도는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천기의 추측은 소름끼칠 정도로 잘 맞았다.
괜히 암천회의 두뇌가 아니었다.
그동안 정보가 너무 제한되어 있어서 그렇지, 이렇게 무언가 실마리 같은 게 보이면 금세 눈치챘다.
‘주서천이 회에 대해서 알건 모르건 간에, 그 수기를 보게 된다면 필히 찾아올 터. 그게 기회다.’
일류나 절정 정도의 수준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지만, 그 이상이라서 문제였다.
화경의 경지인지는 아직도 의아하나, 적어도 천하백대고수의 무위를 지녔다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사전에 온갖 기관들을 설치해 뒀다. 결코 살아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천기는 전략에만 능한 게 아니다.
진법은 물론이고 기관에도 조예가 깊었다.
암천회의 기관지술은 전부 천기의 머리에서 나왔다.
‘기관괴협이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애초에 무림에서 사장된 학문이니 공부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기관괴협은 제갈세가의 피를 이은 주제에 머리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해제하기는커녕 알아채지도 못할 게 분명하다.’
* * *
석벽에 드문드문 걸린 횃불이 통로를 은은하게 비춘다.
은은한 빛에 의지하며 일행은 앞을 걸었다.
“히히히. 여길 봐도 기관, 저길 봐도 기관이네. 그럭저럭 힘썼지만 이 천재님 앞에선 무의미한 말씀!”
제갈승계가 신난 얼굴로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암천의 두뇌, 그 천기조차 제갈승계의 이상할 정도로 기관에만 집중된 천재성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기야 이상한 것만은 아니다.
오직 기관에만 집중된 천재성이라니, 고금을 통틀어도 그런 건 없었다.
만각이천의 앞에서는 어떠한 기관도 숨지 못했다.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건 소재가 무엇이 되었건,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의미 없었다.
종류에 상관없이 전부 잡혔다.
제갈승계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침이나 소도 같은 걸로 꾹꾹 누르면서 간단히 해제하고 지나갔다.
처음의 입구 때를 제외하곤 발동된 함정은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기관이 설치되어 있기는 한 걸까요?”
워낙 순탄하다 보니 의아할 정도였다.
‘괜히 만각이천이 아니란 말이야.’
언제 봐도 혀를 내두르는 재능이다.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한들, 지금까지 봐 온 기관을 떠올리면 결코 쉽게 빠져나오진 못했을 것이다.
제갈승계의 안내가 있었기에 시간을 몇 시진, 어쩌면 하루나 이틀이 걸릴 정도를 단축할 수 있었다.
참고로 중간중간 강시들이 등장했는데, 입구에서 마주쳤었던 사강시(死價尸)였다.
사강시는 삼류나 이류는 당해 내기가 좀 까다롭지만, 일류 정도만 되어도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다.
주의할 건 시독과 내공을 불어 넣지 않으면 베이지 않는 몸.
움직임도 둔하니 그리 걱정할 건 없었다.
처리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적당히 상대해 쓰러뜨린 뒤 다음 길로 향했다.
“응?”
통로가 점차 넓어질 때 쯤.
신난듯이 전진하던 제갈승계가 멈춰 섰다.
눈매도 독수리처럼 매서워졌다.
“무슨 일이냐?”
주서천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이 앞, 전부 함정입니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전부 파악하기도 힘드네요.”
“도대체 얼마나 넣어 둔 거야?”
기관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할까?”
“괜찮습니다. 돌아가면 되죠.”
“돌아가다니?”
“음…… 어디 보자, 여기. 여기를 베어 주시겠습니까?”
제갈승계가 우측 석벽의 곳곳을 가리켰다.
주서천은 강기를 실어 가리킨 곳을 깔끔하게 베었다.
“어?”
알려 준 곳을 찔러 베면 다른 곳과 달리 검 끝이 가벼웠다.
석 벽 너머에 빈 공간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고개를 돌려 제갈승계에게 혹시 하는 표정을 지어 주자 그가 머리를 아래위로 가볍게 흔들었다.
“여기처럼 좁은 곳에 열 가지 이상의 기관을 쑤셔 넣으면 발동 중 문제가 생깁니다. 그걸 막으려면 여유 공간을 만들어서 대비해야 하죠.”
제갈승계가 말을 끝내면서 석벽을 손바닥으로 밀어내자, 쿵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그리곤 머리만 살짝 내밀어 안을 확인한 다음, 손을 들어 표시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기관 장지가 여러 개 있을 텐데,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다음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면 됩니다.
계기가 되는 장치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저기, 제갈 공자님.”
낙소월이 제갈승계를 신기한 듯이 쳐다봤다.
“방금 전에 알려 준 부위는 무엇이었나요?”
“외부의 잘못된 충격으로 기관이 발동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건드려도 되는 부위를 알려 준 겁니다.”
“대단하군요. 도대체 어떻게 안 거죠?”
낙소월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감탄을 흘렸다.
기관에 대해서 모르지만, 제갈승계가 대단한 건 안다.
“크흠 크흠.”
제갈승계가 천장을 찌를 정도로 콧대를 세웠다.
가슴을 쭉 내밀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긴요. 당연한 겁니다. 그보다 어떻게 알았냐고요? 그냥 보이잖아요. 낙 소저도 참. 하하.”
“……네?”
처음에는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표정이나 분위기를 보고 진담이라는 걸 깨달자 당황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을 때, 자신의 사형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저거 정말 안 좋은 유형이니까 귀담아 두지 마. 혹시라도 배울 생각이면 차라리 독학을 해라.”
진심이었다.
신난 듯이 떠들어 대려는 천재를 진정시킨 다음, 일행은 심호흡을 하고 숨은 공간에 진입했다.
내부에 진입하자 정말로 기관 장치가 여럿 있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장치는 보기만 해도 어지러울 정도였고, 입구에서 목숨을 위협했던 초승달처럼 흰 칼날이나 사람을 곤죽으로 만드는 철퇴도 숨어 있었다.
혹시라도 소리를 내서 잘못 건드릴까 봐 숨소리까지 참아 가면서 기관 장치들을 피해 갔다.
지나가기 전까지는 왜 진작 이런 곳으로 안 왔냐고 물으려다가 몸으로 겪어 보니 의문이 저절로 풀렸다.
여유 공간이 그다지 넓은 것도 아니라 움직임에도 한계가 있어서 그런지 매우 불편했다.
‘진짜 질리도록 넣어 뒀군.’
아무래도 이 앞에서 마무리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동안 접했던 함정보다 배는 많았다.
약 일각 정도를 조심하면서 지나갔다.
서서히 기관의 숫자도 적어지면서 여유 공간도 사라졌다.
뱀의 몸통처럼 길게 이어지던 기관 장치도 이제 끝났다.
‘잠깐.’
제갈승계가 외부로 나가려 석벽을 짚으려는 순간, 주서천이 손을 번개같이 뻗어 막았다.
‘바깥에 누가 있다.’
검지를 들어 입가를 가리고, 귀에 집중하라는 시늉을 보였다.
벽 너머에서부터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청각에 내공을 싣고, 외부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이봐, 최초의 진동 이후 반응이 없는데?”
“입구의 기관에 뭉개져서 죽은 거 아니야? 상천십좌가 아닌 이상 그것에서 살아남기에는 힘들지.”
일행의 눈이 크게 떠졌다.
주서천은 머리를 굴리며 상황 파악에 나섰다.
‘최초의 진동…… 그런가, 입구의 기관? 그것보다 우리의 침입을 알고 있는 눈치인데……’
최악의 경우, 이 장소 자체가 함정일 수 있다.
함정 자체는 무섭지 않은데, 건질 게 없다는 게 문제다.
‘아니, 그래도 이 정도의 준비를 해 뒀는데 아무것도 없지는 않을 거야.’
그리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부디 최소한의 정보라도 있기를 속으로 바랐다.
‘누구지?’
석벽 너머에 누가 있냐에 따라 행동이 변한다.
아직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그래서 누가 이야기하기만을 기다렸다.
되도록 빨리 말해 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유령신공을 수련한 주서천이나 애초에 자객인 소령은 하루나 이틀은 가볍게 버티지만, 다른 둘은 아니다.
“움직여야 하지 않나?”
다행히도 벽 너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입 좀 다물어라, 개양성.”
중저음의 목소리가 짜증을 냈다.
‘개양성!’
주서천의 눈이 번쩍 떴다.
칠성사 중에서 고수를 다수 데리고 있는 곳이 이 개양성이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정예 부대다.
참고로 그중에서도 ‘개양’은 회주 다음의 강자가 맡았는데, 지금은 누가 이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는 이 당시 암천회가 무선화를 치료해 주고, 무곡을 포섭해 개양에 앉히지만 역사가 바뀌었다.
‘들어 보니 칠성사병 같은데……’
회 내에서 칠성사의 우두머리 호칭은 후미에 붙는 ‘성’을 뺀다.
그렇다면 그저 개양성 소속이라는 의미.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다.
자신이나 낙소월은 몰라도 제갈승계나 소령이 순식간에 당할 수도 있었다.
들키지 않도록 내공을 서서히 끌어올리며 청각뿐만 아니라 여러 감각을 활성화하고 드높였다.
중간에 두꺼운 벽이 있어서 방해했지만, 그래도 화경의 고수답게 너머에 있는 숫자를 대충 파악했다.
‘십오에서 이십!’
개양성 외에 다른 소속도 있는 모양이었다.
제일 높은 가능성을 잡자면 천기성이었다.
이 비밀 분타에 있는 기관의 조정 등을 하려면 기관지술을 전담하는 천기성밖에 없었다.
‘좋아. 들키기 전에 친다!’
이대로 기회를 재면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
제갈승계의 무공이 낮다보니 금방 들킬 게 분명했다.
콰앙!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진 기분이 아닐까.
박살 난 석벽의 잔해 사이로 보이는 얼굴들이 그러했다.
눈동자를 최대한 굴려 칠성사병의 인원수를 파악하는 데 힘쓴다.
정확히 열여덟의 숫자다.
“누구 ……”
칠성사병이 외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토끼 눈처럼 동그래진 눈동자를 보아하니 정체를 알아챈 듯했다.
“주서천!”
아니나 다를까 주서천의 이름이 지하에 울렸다.
“어떻게!”
의아해하면서도 몸을 움직였다.
머리를 밀어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대머리가 박도를 휘둘렀다.
꽤나 패도적인 기세지만, 무섭진 않다.
침착한 마음가짐을 유지한 채 중검으로 받아쳤다.
“으악!”
칠성사병의 일도(-刀)는 깔끔하고 빨랐다.
그러나 습격으로 인해 순간 주춤해 버려 평소와 같진 않았다.
그걸 놓칠 주서천이 아니다.
검을 비스듬하게 올려쳐서 간단히 튕겨낸 뒤 곧장 하단으로 내려 벤다.
외관만 보자면 평범한 검 같지만, 그 위력은 전혀 아니다.
배나 되는 무게가 실려 대검과도 같았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검이 두개골을 박살 내고 그 안의 뇌까지 쪼개면서 가랑이까지 이어졌다.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의 잔인한 광경이었으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후퇴! 재정비!”
누군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석벽이 무너지면서 생긴 먼지가 시야를 가려 섣불리 싸울 수가 없었다.
보통이라면 갑작스런 습격에 당황하여 어떻게든 반격하려 할 텐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처음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금방 침착하고 냉정해졌다.
“어딜!”
주서천이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신행백변으로 보법을 밟았다.
검에 실은 무게를 지우고, 몸을 가볍게 한다.
그리고 지척에 있는 칠성사병에게 접근해 흉부를 노리고 검을 내질렀다.
“으아!”
칠성사병이 도망치던 와중에 발걸음을 멈추고 반격에 나섰다.
검기를 싣고 전력으로 받아 내려 했다.
스윽.
다급함이 보이던 그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검을 받아 내려고 휘둘렀으나 맞지 않았다.
검극을 흔들어서 잔상을 만들어 내는 허초에 속아 넘어갔다.
착시가 사라지고 진짜배기가 나타나 흉부에 구멍을 냈다.
“컥!”
단말마의 비명.
나머지 인원들은 뒤로 물러나 진을 쳤다.
“난 니들이 정말 싫어.”
반응 한 번 귀신같이 빠르다.
웬만한 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최적화된 움직임을 보인다.
수적으로도 차이가 날 텐데, 자만하지 않고 뒤로 물러난 다음 최적의 환경부터 만든다.
“주서천……”
남은 인원 중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눈 부근에 낀 주름살을 보니 꽤 나이가 있는 듯 보였다.
남들보다 작은 편의 체구는 그렇다 쳐도, 몸을 보니 선은 가늘고 근육은 적다.
무인은 아니다.
‘천기성인가.’
암천회는 무인이 아니어도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다면 얼마든지 입회할 수 있다.
무인이 아니라 문인처럼 보인다면 팔 할은 천기성이요, 나머지는 간자를 심어 두는 천권성이다.
“강소 분타주냐?”
“……”
아무도 반용하지 않았다.
그저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만 했다.
‘예상했다?’
그들의 반응을 보니 이 상황을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가. 암천회도 맹강을 믿지 못했군.’
내부의 인물들도 믿지 못해 옥형성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감시하고,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척살하는 단체다.
단순히 협력 관계인 사람을 신뢰할 리 없었다.
‘그나저나 함정을 잔뜩 준비해 놓고, 뒤에 칠성사병까지 배치해 둬? 이런 변태도 또 없지.’
방금 전까지 거쳐 간 함정들은 화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부담스러운 것들 뿐이었다.
설사 화경이라 해도 내공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많지 않다면 함정들을 막아 내려다가 내공의 소모로 당했을지도 모른다.
강기라면 만년한철로 된 방 안에 갇히지 않는 이상 두부 가르듯이 전부 베어 버릴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공이 무한할 경우다.
강기란 게 내공의 소모가 극심해서 물 쓰듯이 쓸 수 있는 게 아니 다.
“어떻게 그리 돌아올 수 있었던 거지?”
강소 분타주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돌아오는 건 불가능하다.
섣불리 벽을 건드렸다간 발동하고 만다.
분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관이었다.
“저승사자에게 가서 물어봐라. 그럼 친절히 알려 줄 거다.”
“입만 살았구나, 주서천.”
강소 분타주의 안광이 불타올랐다.
“급습에 놀라긴 했지만, 거기까지다. 앞질렀다 생각했다면, 그건 크나큰 착각이다.”
입가가 비틀어 올라갔다.
“걷든, 뛰든, 날든.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 아니, 부처조차 우리의 손바닥 위에 있다.”
광오했다. 그러나 그 광오함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로 천기성이냐?”
“……?”
강소 분타주의 입가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고, 눈가의 주름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껏 어떠한 말에도 반응하지 않던 칠성사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동요가 파도처럼 퍼져 휩쓸었다.
“아무래도 몇 가지 재주 믿고 큰소리 떵떵 치는 모양인데, 그게 패인이 될 거다. 하기야, 천기 성격에 오만방자한 놈을 중요한 곳에 배치하지는 않지.”
“…뭣!”
강소 분타주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복면으로 입을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입 부근이 깊게 파인 걸 보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뭘 놀라고 그래, 암천회.”
주서천이 히죽 웃었다.
“부처님 손바닥 위라고 하지 않았나?”
목줄기에 가느다란 선이 그어졌다.
시뻘건 혈선이었다.
우측 끝에 있던 칠성사병이 옆으로 쓰러진다.
주서천이 아니었다.
소령이었다.
처음에 석벽을 무너뜨린 뒤, 먼지 구름에 몸을 숨기며 호흡을 멈추고 존재감을 없애 버렸다.
그리고 주서천이 시선을 끄는 사이 몰래 접근하여 칠성사병의 목 동맥을 슥 그었다.
“주서천은 생포해라!”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열네 명이 된 칠성사병이 움직였다.
각각 열 명과 네 명으로 흩어졌다.
그중 열이 자신에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주서천은 눈동자를 굴려 나머지 넷을 찾았다.
넷이 둘로 나뉘어져 소령과 낙소월에게 붙는다.
석벽 안쪽에 숨어 있는 제갈승계는 내버려 두었다.
‘다행이다.’
제갈승계의 존재감을 눈치 못 챈 건 아니다.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차라리 이러는 편이 좋았다.
전력을 분산시켜 제갈승계를 노렸다면 꽤나 성가신 싸움이 됐을 것이다.
마음을 편히 놓은 순간, 정면으로 무려 여섯이나 되는 검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여섯 개의 검격 전부 보통이 아니다.
검극에서 느껴지는 기를 보니 최소 절정 정도의 수준으로 보였다.
‘흡!’
숨을 힘껏 들이쉬고, 검에 무게를 실었다.
기의 순환은 느리지만 안정적이고 굳건했다.
막을 형성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검기를 평소보다 두껍고 넓게 펼친 다음 수비에 힘썼다.
채재채챙!
금속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앞에 있는 여섯의 눈에서 이채가 서렸다.
“전부 막아 내다니!”
한두 개 정도 쳐 내고 피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전부 막은 것도 모자라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매화검이 아니야?’
암천회에서 주서천에게 척살령을 내렸던 만큼, 그에 대한 정보, 주로 무공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져 있었다.
주로 회피하여 환검이나 변검, 혹은 산검을 쓴다 해서 그에 알맞게 대응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셋 다 전부 아니다.
화산의 검중에서 중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합!”
주서천이 짧은 기합과 동시에 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에 실린 압력이 바람처럼 불어 전방을 밀어냈다.
여섯 명이 검을 갈무리하면서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나머지 넷이 풍압을 뚫고 들어왔다.
‘어딜!’
중검을 거두고 태세를 변환하여 검을 내지른다.
검 끝이 미세하게 흔들려 허초를 만들어 냈다.
넷 중 셋이 허초에 속아 넘어가 빈 곳을 찔렀다.
하나가 제대로 된 검격을 받아쳤다.
“쿨럭!”
그러나 공력의 차이가 심했다.
주서천의 내공을 밀어내지 못하고 내상을 입었다.
입에서 피를 토했다.
파밧!
검이 섬광을 토해 낸다.
검격이 연거푸 쏟아졌지만, 막아내지 못했다.
심장 부근이 꿰뚫리며 구멍이 났다.
하나를 처리한 다음 허초에 넘어간 셋이 자세를 틀려고 한 게 보였다.
주서천이 얼른 발을 굴렀다.
쿠웅!
천근추의 수법. 만중검을 더해 그 무게가 늘어났다.
살짝 구른 것에 불과한데 지면이 움푹 파였다.
자세를 틀려고 했던 셋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삐끗할 뻔한 발을 제자리로 돌리느라 시간이 걸렸다.
주서천의 손에서 검이 번개같이 출수했다.
쐐―액!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섬뜩함이 느껴졌다.
만중검이 사라지고, 드디어 장기가 튀어나왔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이다.
검기가 화려한 빛줄기를 토해 냈다.
“크아아악!”
“커허억!”
자세를 바로잡으려던 칠성사병들이 결국 균형을 완벽히 잃었다.
피 안개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뭐하고 있어!”
강소 분타주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암천회의 무력 집단인 개양성이다.
그런데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당했다.
‘어떻게 저리 강하지?’
설사 재능이 넘친다고 할지라도, 열아홉이면 경험이 부족해 실전에선 전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온갖 실전에서 구른 칠성사병이 농락당하고 있었다.
눈으로 봐도 믿을 수 없었다.
파앙!
공기가 터졌다.
대기가 둘로 갈라졌다.
한곳이 아니다. 사방에서 소리가 났다.
아까 전에 나가떨어졌던 여섯 명의 칠성사병이었다.
그들이 다시 일어나 전력을 쏟아 냈다.
한곳을 노리고 절정의 고수들이 공력을 전부 쏟아 내니 대기에 분포된 기가 터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끝이다!”
강소 분타주가 신난 듯이 외쳤다.
“그래?”
주서천의 안광이 불타듯이 빛났다.
단전에서 팔을 따라 검으로 향하던 기의 순환이 방향을 바꿨다.
배꼽 아래에서 용솟음 친 내공은 몸 곳곳을 타고 회전했고, 이윽고 몸 외부로 막을 형성했다.
“호신강기!”
누군가가 경악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째애앵-!
절정의 고수 여섯이 낸 전력도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순도 높은 강기의 막 앞에선 소용없었다.
호신강기가 나타나자마자 대기를 몇 조각으로 나누었던 검기와 도기가 순식간에 소실됐다.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복면 너머에서 놀란 목소리가 귀를 통해 고막에 닿았다.
휘리릭!
옆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자세히 보니 비수다.
그러나 목표는 자신이 아니었다.
푹!
코앞의 칠성사병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의 관자놀이에 비수 하나가 꽂혔다.
멈춘 듯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 주서천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저 멀리 칠성사병의 목을 허벅지 사이에 끼고 부러뜨리고 있는 소령이 보였다.
왼손은 적의 목을 감싸 안고 있었고, 오른손은 쫙 펼친 채 앞으로 쭉 내밀고 있었다.
‘과연, 승계에게 위협이 없다는 걸 판단하고 날 돕기로 한 건가.’
유령에 대한 지식이 하나 더 늘었다.
최우선 명령이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면 곡주를 돕는다.
주서천이 관자놀이에 꽂힌 비수를 왼손으로 뽑았다.
‘다섯!’
‘켁!’
손목을 살짝 튕겨내 비수를 다시 날렸다.
좌측에서 다음 동작을 이으려던 칠성사병의 목에 꽂혔다.
공격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주서천이 몸을 틀어서 이번엔 바로 오른쪽의 칠성사병을 베었다.
칠성사병이 반사적으로 놀라 몸을 움츠리고 검으로 막으려 한다.
그러나 검강 앞에선 통하지 않았다.
두부를 베듯, 검과 함께 몸이 동강나면서 목숨을 잃었다.
여섯이 넷으로 됐다. 나머지 넷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형!”
주서천이 허리를 꺾듯이 뒤로 젖혔다.
그 위로 수평선을 그리는 낙소월의 검이 나타났다.
“크하악!”
방금 전에 전력을 쏟아 낸 것이 화근이었다.
충분히 막아 내거나 피할 수 있는 것도 허용해 버렸다.
“허억!”
“흐읍!”
둘 밖에 남지 않은 칠성사병들이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 눈동자에 묻어나는 건 공포였다.
“이럴…… 수가……”
강소 분타주가 넋 나간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열셋이 당하는 데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피를 흩뿌리면서 쓰러졌다.
그들이 누구인가.
회 내에서도 강하기로 소문난 개양성이다.
무공이나 경험. 그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그런데 당했다.일방적이라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무리 천하백대고수라 할지라도, 화경이라 해도 절정의 고수 열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어렵다.
“으음.”
낙소월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암천회에 대해서 대강 들었지만, 그동안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오늘의 경험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이곳의 시설은 개인 세력만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칠성사병의 강함이 충격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이류나 일류도 아닌 절정이다.
겨우 둘밖에 붙지 않았으나 이조차 상대하기가 벅찼다.
도중에 소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애먹었으리라.
“분타주, 금방 거기로 갈 데니까 허튼짓하지 마라.”
적의는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 보여 준 무위에 압도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절대 방심하진 않았다.
강소 분타주는 주서천이 터덜터덜 걸어오자 몸을 움찔 떨곤 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멈춰라, 주서천! 대화다. 대화를 하자.”
“무슨 대화?”
“그 도적놈에게 무엇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넌 지금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오해? 무슨 오해?”
“본 회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만큼 강력하다. 잘난 영웅심에 취해 어떻게 해 볼 수 있지 않단 말이다.”
주서천은 잠시 멈춰 서서 어깨를 으쓱였다.
말이 통했다고 생각한 강소 분타주는 신난 듯이 떠들었다.
“여기에서 날 살려 준다면 그분들께 내 너에 대해 잘 말해 주겠다. 약속하지. 너처럼 고수, 그것도 화산파의 제자라면 기뻐하시며 받아들일 거다. 여기에서 순순히 항복하고 입회하면 ……”
“분타주.”
주서천이 강소 분타주를 쳐다봤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이었다.
“소리가 들려.”
초조해 보이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
눈에 확연히 보이는 동요.
“제기랄!”
강소 분타주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지만,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고수 입장에서 보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릿함이었다.
그러나 여유를 부리지는 않았다.
천기성이니 무엇을 할지 모른다.
몸을 날려 곧장 쫓아가려 했다.
“막으려고?”
칠성사병이 앞을 막아섰다.
결과가 뻔해도 목숨을 걸고 막아 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였다.
“미안하지만 상대할 시간 없다.”
보법을 극성으로 펼쳐 지나쳤다.
뒤에서 쫓아오려는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낙소월과 소령이 막아섰다.
“분타주!”
보법을 극성으로 펼쳤는데 따라잡지 못할 리 없다.
공간을 접듯이 이동해 뒷덜미를 붙잡았다.
“으윽!”
“일단 정신 좀 차리자.”
암천회의 천기성은 대부분 머리가 좋다.
어떤 짓을 할지 몰라서 머리를 붙잡고 땅에 거칠게 처박아 뒀다.
강소 분타주에게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어서 다시 쿵소리가 나면서 피가 바닥을 적선다.
“이제부터 몇 가지 물을 건데, 바른대로 말 안 하거나 혹은 허튼짓하면 몸이 좀 아플 거야.”
“주…… 서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 크아악!”
섬뜩한 소리가 나면서 검지가 부러졌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을 확인한 주서천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일이 쉬울 것 같다.
암천회의 일원들은 대부분이 입이 무겁다.
조금이라도 실수한 순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서다.
설사 적의 협박에 넘어간다 할지라도, 후에 알려지게 된다면 이유가 어찌 됐건 간에 목숨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천권성이나 옥형성이 성가시다.
고문에 대비한 훈련을 해서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천기성의 경우는 쉽다.
애초에 외부에 잘 나오지 않는 데다가 고통 자체에 익숙하지가 않았다.
강소 분타주가 대표 격이었다.
“손가락이 전부 끝나면 발가락이다. 발가락뼈가 전부 부러지면 손톱을 뽑아 주마.”
“무, 무슨 이따위…… 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