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란 호위로 붙여 준 유령을 말하리라.
보는 눈이 있어 일부러 돌려 말했다.
“마음 같아선 저승에서 고통받고 있을 맹강을 데려와 눈앞에서 다시 죽이고 싶습니다.”
이의채의 목소리에 한기가 서렸다.
그동안 낭비한 시간이나 금전적인 손해를 생각하면 열불이 터졌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잔하시면서 그동안의 고생을 푸시지요.”
“어이쿠, 고생하다니요. 정말로 고생하신 건 천하백대고수 매화정검! 화산파의 사대제자 주서천 대협이시지 않습니까. 주서천 대협 만세! 매화정검 만만세! 화산파 만세!”
술 한 잔에도 감사 인사를 도대체 얼마나 하는지 모르겠다.
이것도 자중하는 편에 속했다.
임무를 끝난 토벌대원들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올라온 진수성찬을 먹으면서 연회를 즐겼다.
“제가 비록 산동에서 나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영웅분들의 활약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습니다.
매협검 장홍 대협, 옥매화 장서은 여협, 화산제일미녀 미점화(美劍花) 낙소월 여협까지…… 그런 분들을 모실 수 있다니! 이 상단주, 가문의 영광입니다.”
이의채가 특유의 간신배 같은 웃음 소리를 흘렸다.
“아, 그러고 보니 사매에게도 드디어 별호가 생겼으니 축하해 줘야겠네. 안 그래, 화산제일미녀?”
주서천이 놀리듯이 웃었다.
“정말이지.”
낙소월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모로 부끄러운지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과연, 화산파. 천하의 금의상단주께서도 화산파부터 기억하시는군요.”
한쪽에 앉아서 독한 술을 아무렇지 않게 마시던 당혜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으윽!’
이의채는 위가 아파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허허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다 같은 영웅들인데 위아래가 있겠습니까. 독봉, 아니 당가의 위명 또한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특히나 대호채에서의 활약을 들었을 땐, 절로 ‘키야! 그건 또 몰랐네!’ 라면서 무릎을 탁 치며 절로 감탄했지요.”
“상단주는 턱이나 배에 있을 지방의 기름을 혀에 칠했는지 말씀도 잘하시는군요.”
여전히 말은 신랄해도 구부러진 눈썹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걸 보면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그렇게 칭찬해 주신다면야 이 상단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또한 제갈 공자께서도 크게 활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기관괴협(機關怪俠)이라니, 크으. 천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기이하다 하지만 경외를 담아 붙인 것이 분명합니다. 기관지술의 일인자, 대천재 제갈승계 공자님이 아니겠습니까!”
“암, 그렇고말고요. 기관지술의 일인자이자 천재라면 바로 저 제갈승계가 아니겠습니까. 역시 상단주라 사람 볼 줄 아는군요!”
제갈승계가 귀를 쫑긋거리며 좋아했다.
‘저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호가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하던 놈 맞나?’
주서천이 그런 제갈승계를 보고 어이없어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축하할 일은 매화정검, 주서천 대협이시지 않겠습니까. 천하제일백대고수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하, 대장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초련이 당연하다는 듯이 술잔을 높여 웃었다.
“아무렴!”
여기저기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대부분 금의상단 사람들만 호응했지만, 그래도 그 열기와 함성 소리는 보통이 아니었다.
“자자, 얼른 제 잔을 받아 주십시오!”
주서천은 술잔을 받으면서도 생각에 잠겼다.
‘천하백대고수라……’
수천 명의 무인 중 오로지 백 명에게만 허락된 자리.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름이었다.
‘정말로 감개무량하구나.’
주서천도 한때 꿈꿔 본 적 있었다.
몇십 년 전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래된 일. 전생이자 과거였다.
그러나 그 명성을 이름 앞에 붙여본 적은 없었다.
전란의 시대야 천하백대고수가 하루마다 바뀌긴 했어도, 그만큼 대체할 수 있는 인재가 많았다.
여타 무인들과 비교하자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고, 전란의 시대가 끝나 평화가 찾아온 뒤로도 실력을 증명할 기회가 없었다.
화산오장로로서 일하느라 제법 바빴다.
그 외의 시간에도 무공 수련과 책을 읽는 데 정신이 팔렸다.
말년에 화경에 오르는 데 성공하나 얼마 가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았던 무인.
전무후무한 전란의 역사에도 기억되지 않은 사람.
눈을 감을 때도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랬던 보잘것없는 무인이…… 지금은 다르다.
‘대협,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협객이야, 협객!’
‘팔과 아내의 복수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단한 무공이시군요.’
‘천하백대고수, 매화정검 주서천!’
사람들을 구했다.
영웅이라 불렸다.
처음에는 낯간지러웠다.
그렇나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릴 적 꿈만 꾸었던 천하백대고수라는 이름이 앞에 붙는다.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가슴이 뜨거웠다.
매화검봉, 만각이천, 상왕, 독봉.
원래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어딘가의 밑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봐야 보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떠들고, 웃는다.
‘그래……’
마치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그 광경 속에서, 주서천은 무언가를 다짐했다.
“여러분, 괜찮다면 잠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무림의 전복을 꾀하려는 흑막, 암천회.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혼자서는 암천회의 음모를 막을 수 없다.
그들의 규모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육대금공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강호에 나오면 능히 피바람을 부를 만한 비급서를 수두룩하게 보유하고 있으며, 정사와 마도이세뿐만 아니라 상계까지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무리 과거의 기억을 지니고 있고,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다 할지라도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제 그 도움을 제대로 받으려면, 거짓이 아닌 필요 이상의 진실이 필요했다.
‘이제는 도약할 때다.’
준비가 전부 끝난 건 아니다.
하지만 전처럼 숨죽이고, 자신에 대해 철저히 숨기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적립총채주나 되는 인물을 죽이면서 싫어도 큰 주목을 받게 됐다.
아마 이번 일로 암천회에서도 척살부의 상위에 올라왔을 터.
이제 혼자 움직이는 것에도 한계가 왔다.
앞으로는 주변의 도움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맡길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들도 있었다.
매화검봉 낙소월, 만각이천 제갈승계, 상왕 이의채 , 독봉 당혜, 검마 무곡까지.
이 다섯 명과 이야기했다.
물론 전부를 이야기한 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전생했다는 사실 자체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암천회에 대한 것만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그들의 음모나 구조 등에 대해서였다.
혼자서 강호를 돌아다니 다가 암천회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그들을 추적하다 보니 여러 가지를 알게 됐다.
낙소월은 일전에 들은 적이 있어 놀라움이 덜했다.
나머지 네 사람은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허, 흉마의 무덤 건도 그들이 계획했다는 겁니까?”
제갈승계가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그래.”
“흐음.”
이의채가 푸짐한 턱살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평소처럼 과장하거나 촐랑거리는 모습은 없었다.
눈은 가늘게 뜨고, 그 안에는 한없이 진지해진 눈빛을 담았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인 건 압니다. 아마 쉽게 믿기 어려우시겠지요? 하지만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한 번 만이라도 좋으니 진지하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진심이었다. 혼자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이 진리는 전생을 통해서 깨우친 것이었다.
한 세대를 풍미할 재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수많은 전장을 겪은 무인도, 그리고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 절대고수인 상천십좌조차도 그랬다.
영웅이건 절대고수이건 혹은 은거기인이건 암천회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괜히 전란의 최후에 온 무림인들이 협력하여 암천회에 대적한 게 아니다.
그만큼 막강한 힘을 지녔다.
“이미 힘을 빌리고 있지 않습니까, 형님.”
제갈승계가 놀라움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주서천의 요청에 제일 먼저 손을 들어주었다.
“이 제갈승계, 어릴 적에 형님에게 속은 걸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 혼은 이미 영약에 팔렸죠.”
제갈승계가 살짝 웃었다.
잘생긴 만큼 웃는 얼굴이 정말로 멋있다.
어떤 말을 해도 멋있어 보였다.
“무림이, 천하가 아닌 형님이 절 인정해 줬습니다. 남들에게 쓸모없고 머저리 같다고 평가되던 제가 천재라고, 기관의 가치를 알아주셨습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성장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가족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꿈이다.
응원받기는커녕 제지까지 받았었던 공부였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시종들조차 별난 사람으로 취급할 정도였다.
가족은 물론이고 무림, 아니 중원의 모두가 천시하던 지식과 공부였다.
바보 같다고 욕을 먹었다.
그러나 어느 날 눈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것도 화산의 인재라 불리는 소년이었다.
연령은 비슷하나 그 능력이나 행동은 전혀 달랐다.
그런 사람이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며, 노력해 달라고 했다.
그대로만 노력해 달라고.
지략이건 진법이건 무공이건 간에 하지 않아도 좋으니 하던 걸 하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전 믿습니다.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믿습니다.
형님이 믿어 달라 하면 믿겠습니다. 무림이, 중원이, 천하가 형님을 믿지 않아도 전 믿겠습니다. 칠 년 전에 절 알아봐준 것처럼 믿고, 함께하겠습니다.”
가슴이 뭉클했다.
언제나 ‘기관! 기관!’이라고 외쳐 대던 최악의 천재가 저렇게 생각해 줄 줄은 몰랐다.
평소의 모습을 떠올리니 왠지 모르게 감동도 배가 되는 것 같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맺혔다.
“이 소상도 믿고 따르겠습니다!”
이의채가 언제나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평소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언제나 비굴함으로 가득했던 눈은 온데간데없고, 얼음처럼 차가우며 수면 아래처럼 잔잔함이 있었다.
“아니, 설사 거짓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누구 말이라고 안 믿겠습니까. 힘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대협을 위해서라면 손실도 마다치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모든 걸 잃지 않게만 해 주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헤헤헤.”
‘과연, 상왕인가.’
주서천은 순간 긴장했다.
이의채는 돈과 관련될 때만 되면 이렇게 가끔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금의(金意). 금에 의의를 두다. 돈에 의의를 두다.
그게 훗날 상왕이라 불릴 이의채의 전부다.
이의채는 오직 황금이자 ‘이익’이라는 신념하에 행동하고,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게 삶이고, 죽음이며, 철학이요, 전부였다.
그에게 도중에 배신당할 걱정은 할 필요 없었다.
정당한 대가만 지불한다면 누구보다 믿을 수 있다.
그 신뢰 관계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양날의 검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지불한 대가가 사라지면 어찌 될지 모른다.
물론, 금의상단이 망하지 않는 이상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었다.
전생에서의 금의상단은 이의채가 주변의 도움 없이 혼자 쌓아 올렸지만, 현대에서는 여러 도움이 있었다.
귀주에서 무림맹과 거래할 수 있도록 소개시켜 준다거나, 삼안신투의 유산이 있었다.
이 둘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금의상단은 없었을지 모른다.
최근의 적림 일도 마찬가지다.
전부 합치면 그 빚의 대가는 아무리 갚아도, 갚아도 부족하다.
‘하지만 앞으로 받을 도움으로 인해 금의상단이 혹시라도 망하기라도 한다면 관계는 변한다.’
황제나 관부에게 이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망할 리는 없으나, 암천회가 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준비해도, 몇 발 앞서가도 방심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이 벌어져 상단이 망할지 모른다.
만약 그 일로 인해 상단의 전부를 잃는다면, 그동안의 도움이나 지원을 대가의 지불로 보고 여태 쌓아온 신뢰나 관계가 초기화될 확률이 높았다.
‘잊어서는 안 돼 상왕은 의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실익을 추구하는 사람이란 걸 유의해야 해.’
처음부터 이걸 알고 접근했다.
도리어 이런 사람이기에 앞으로의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상단이 완전히 망하지 않는 한, 이의채는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된다면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전생처럼 정파와 사파, 마도이세와 암천회를 넘나들며 장사를 할지 모른다.
그중에는 자신도 포함되리라.
“나 역시 진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소.”
무곡이 팔짱을 낀 채로 담담히 말했다.
“그저 은인을 따를 뿐이오.”
딸의 목숨을 구해 줬을 때, 그리 맹세했었다.
무곡의 원동력이자 살아가는 의의는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은의(恩義)일 뿐이고, 이는 절대적이다.
“농담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진담일 줄은 몰랐네.”
당혜의 목소리가 주서천의 상념을 깨뜨렸다.
‘이 여자에게 말하는 건 고민했지만……’
당혜에게 이야기할지 말지를 가장 고민했다.
낙소월, 제갈승계, 이의채, 무곡.
이 네 사람은 그래도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설사 모른다 할지라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신뢰가 있었다.
하나 당혜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도 잘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첫 만남도 그다지 좋지 않았고, 이후에도 복수심과 원한을 지닌 채 찾아와 기회만 노리지 않았는가.
그래도 그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됐다.
그동안 지내며 불신할 정도는 아니라고 느꼈다.
여러 일을 겪으면서 다양한 도움을 받았다.
궁귀검수에 관한 일도 비밀로 해 줬다.
혹시 몰라 유령을 붙인 적도 있었지만, 딱히 수상한 움직임은 보인 적 없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그녀의 유능함이었다.
독만 보자면 중원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전문가고, 무공이야 후기지수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비록 당가의 혈족답게 자존심이 보통이 아니나, 그래도 판단력이 없어질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그 외에도 의술을 할 줄 안다거나, 정보에 눈이 밝거나, 강호의 경험도 상당하다는 등 유용한 부분이 많았다.
‘하루에 독설을 하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을 만큼 성격이 더럽지만, 능력 면으로는 최고다.’
무공으로나 두뇌로나, 심지어 사천당가의 직계 혈족이라는 것까지 합하면 이보다 완벽할 수 없다.
이 정도의 여인이 전생에서 제대로 활약조차 하지 못하고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게 어이없었다.
“믿어?”
“그럴 리가.”
당혜가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당신이 그동안 숨겨 온 게 한둘은 아니잖아. 이것도 어떤 것의 일환일 지도 모르는 일인걸. 무엇보다 당신의 말을 제외하곤 근거가 부족해. 그런 걸 섣부르게 믿는다면 그거야말로 머리를 의심할 일이지.”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예상한 반응이었다.
도리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앞의 세 명이 조금 이상한 편에 속했다.
그들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었으나, 낙소월이나 당혜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낙소월은 아직도 반신반의하고, 당혜의 눈초리를 보면 반이라도 믿는 지가 의문이다.
“그러니까……?”
당혜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볼 생각이야. 어차피 아직 내기로 묶여 있는 몸이니까.”
당혜는 내기를 떠올리며 기분이 상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주서천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낙소월이 물었다.
“좋은 질문이야.”
품 안을 뒤적거리고 한 권의 책을 꺼냈다.
“표지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네요?”
“굳이 말하자면 맹강의 일기 비스름하다고 말해야 하나.”
맹강은 관의 눈을 피하려 암천회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협력을 구했을 뿐, 믿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을 의심하고 경계했다.
무언가 속셈이 있는 건 아닐지, 혹은 관에 자신을 팔아넘기진 않을지 의심하다 보니 그 관계는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그래서 언제든지 일방적으로 이용당하지 않도록, 또한 도망치거나 반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그 ‘준비’란 것이 그건가요?”
“그래. 적림 내부에 침투한 간자부터 시작해서 암천회와 관련된 표국이나 상단의 목록까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암천회를 적대하는 입장에서 보면 보물이었다.
어떠한 영약이나 법보도 비교될 수 없다.
이 정보는 어떠한 것보다 귀중하다.
괜히 맹강이 철저한 관리까지 하면서 숨긴 게 아니었다.
“과연, 있을 만도 하군요. 암천회 입장에선 약탈하지 말아야 할 표국이나 상단이 있을 테니까요.”
이의채가 두툼한 턱 살을 매만지며 눈을 빛냈다.
“그쪽은 상단주께 맡기 겠습니다. 관련된 정보를 전부 넘길 데니, 그들이 가진 걸 전부 빼앗아 주십시오.”
“흐흐흐, 얼마든지요.”
불어날 재산에 벌써부터 눈을 빛내는 이의채였다.
주서천은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 중에서도 정말로 중요한 정보는 바로 이것, 비밀 분타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마치 무저갱처럼 그 깊이가 보이지 않았다.
“하하.”
빛 한 줌 새어 나오지 않은 암흑 속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썩 기분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하하하!”
웃음소리가 점차 커져 갔다.
“으하하하하!”
커져 가던 웃음소리는 이윽고 주변을 뒤흔든다.
소림의 사자후조차 작게 들릴 정도의 크기였다.
“……”
천기는 피를 울적 토하려던 걸 참았다.
웃음소리에 담긴 공력만으로도 가벼운 내상을 입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천기만이 아니었다.
바깥에서 발이 담 아니 피가 나도록 뛰어다니는 도감부장을 제외하곤 칠성사의 모두가 숨죽인 채로 부복했다.
배꼽 아래의 단전이 찌릿찌릿하며 아파 온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엄습했으나 전부 참아 냈다.
만약 지금 어떠한 소리를 내거나, 몸을 떨기라도 해서 주인을 거스르게 되면 어찌 될지 모른다.
“재미있지 않느냐.”
암천회주가 웃음을 뚝 그쳤다.
“어떻게 그렇게 사사건건 방해할 수 있는지 궁금하도다.”
“죽여 주십시오.”
쿵! 쿵! 쿵!
천기가 지면 위로 머리를 몇 번이나 부딪쳤다.
어찌나 강한지 두 번 부딪칠 때 피가 쏟아졌다.
“어허, 그만해라. 본 회의 소중한 머리인데, 그 머리를 다치게 하면 쓰나.”
“회주님의 아량을 생각하지 못한 점 역시 죄송하옵니다. 부디 이 못난 놈을 죽여 주십시오.”
실패했다.
“못나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본 회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고작 도적의 우두머리가 죽은 것뿐인데 말이야.”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직접적인 타격은 없으나, 실패했다.
최초는 제의를 거부하고, 상계에서 실권을 쥐려는 금의상단을 무너뜨려 권리와 이익을 빼앗으려 했다.
그래서 적림도에게 맡겼고, 겸사겸사 주서천의 제거도 맡겼다.
그러나 실패했다.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심지어 협력 관계였던 적림총채주가 사망하면서 적림십팔채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통제가 불가능해졌다.
후에 협력 관계를 쌓는다고 해도 그건 나중의 일이다.
후에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장기짝으로 준비했는데, 잃어버렸다.
다시 쓰려면 시간이 걸린다.
“주서천, 주서천, 주서천이라……”
암천회주가 훼방꾼의 이름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선 불쾌하다는 감정이 묻어났다.
“당가의 계집이나 쫓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송곳니를 숨겨 둔 호랑이였단 말이지. 흥미롭군.”
최근에 일어난 강호의 사건, 사고에는 전부 주서천이 껴 있었다.
그의 행보는 확실히 놀라웠다.
아직 열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거늘, 한 사람이 평생 이루기 힘든 업적을 서너 개씩 세우고 있다.
무엇보다 최전선에서 군부의 장수로서 활약하고, 무림인이 된 맹강을 단신으로 박살 냈다.
이제는 더 이상 경시할 수 없는 문제다.
그동안 준비한 전쟁과 적림의 통제를 한 사람으로 인해 잃게 되었다.
“본 회의 영약을 훔쳐서 달아난 도둑놈, 흉마의 무덤을 무너뜨린 도굴꾼, 그리고 화산파의 주서천.”
암천회주가 권좌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 위압감에 칠성사의 여섯 명이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그 셋을 잡아 족쳐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잡아 와라. 생포하지 못하면 죽여서라도 데려와라.”
“존명!”
여섯 명밖에 남지 않은 칠성사가 답했다.
‘죽여 버리겠다.’
천기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 눈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일이건 간에 흔들리지 않던 이성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크나큰 감정의 파도에 버티지 못한다.
‘가족이건 연인이건 친구건, 하나부터 열까지 그놈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모조리 , 모조리, 모조리……!’
모조리!
‘죽여 달라 빌 정도로 박살을 내주마!’
시간이 흘러 십일월이 됐다.
알록달록하게 물들었던 단풍잎이 떨어지면서 바닥에 쌓인다.
그동안 맹강의 기록을 참조해 비밀분타를 찾았다.
정보에는 하오문과 유령곡의 도움을 받았다.
그중에는 분타가 아닌 곳도 있었다.
맹강 개인이 암천회의 분타로 의심 가는 곳을 적어둔 것이니 별 수 없었다.
시간을 들여 조사한 끝에 유력한 후보 몇 곳이 나왔다.
주서천은 그 중 한 곳을 골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 형님 저희 전에 훈훈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러니 저 좀 내버려 두시면 안 됩니까? 왜 절 가만두지를 않습니까.”
제갈승계가 눈물을 글썽이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분타를 습격할 인원이 정해졌다.
주서천과 낙소월, 그리고 제갈승계와 소령이었다.
“그야 그곳에 기관이 있을 테니까.”
현대의 무림에선 사장된 것이나 다름없는 기관지술.
그러나 암천회는 자주 응용하곤 했다.
분타처럼 주둔지나 무언가 숨겨 두는 곳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관을 설치해 뒀다.
“기관이요? 그런 건 빨리 말씀하셔야죠.”
죽을 것 같이 싫은 표정이 단숨에 변했다.
“암천회 그것들 그래도 보는 눈은 있네요. 암, 그래. 중원을 정복하려면 그 정도 기술은 있어야지!”
기관을 애용한다는 것만으로 평가가 높아졌다.
“암천회에서 기관 구경시켜 준다고 하면 따라갈 놈일세.”
“사형도 차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낙소월이 쓴웃음을 흘렸다.
“헉, 기관을 구경시켜 줘요……?”
제갈승계가 귀를 쫑긋 세웠다.
“……”
주서천과 낙소월이 침묵했다.
두사람 다 눈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걱정 마세요.”
당혜가 조소를 흘렸다.
“아무리 제갈 공자가 그 제갈세가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머저리 같다 할지라도 애도 아니고 따라가겠어?
무엇보다 제갈 공자는 친구가 없잖아. 우리가 없으면 놀 사람은 물론이고 대화할 사람도 없을 테니까 분명 우리를 배신하지 못할 거야. 아, 제갈 공자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이니까요.”
“……”
제갈승계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 소저도 참. 그렇게 사실 폭력하지 말아 주세요. 제갈 공자님께서 상처 입으시잖아요.”
“사, 사실……”
제갈승계가 낙소월의 말에 두 번째 상처를 입었다.
‘어찌 저리 잔인할 수가……’
주서천이 낙소월과 당혜를 보고 탄식을 토해 냈다.
“그나저나, 정말로 넷으로 충분하겠어?”
그래도 비밀 분타가 아닌가.
온갖 위협이 도사려 있을 것이 분명할 텐데 습격 인원이 너무 적어 보였다.
“그래.”
사람들을 대동해 가 봤자 눈에 띈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적어도 분타의 습격 전에 신분이 노출되는 것은 삼가야만 했다.
무엇보다 그곳이 기관 천지라면, 자칫 잘못해서 기관을 잘못 발동하는 위협도 무시 못 한다.
사람이 많을수록 그만큼 변수가 따르는 노릇이니, 차라리 소수 인원으로 가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럼, 자리를 비우는 동안 잘 부탁한다.”
일행은 인사를 끝내고 제남을 떠나 남하했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으려 정체를 숨기고 움직였다.
마을도 웬만하면 들르지 않고 숲이나 산, 혹은 강가에서 잠을 청하거나 끼니를 때우곤 했다.
이동은 말이 아니라 경공을 택했다.
제갈승계의 경공이 낮긴 했지만, 그냥 걷는 것보다는 낫다.
무엇보다.그의 내공 수위가 그다지 옅지 않았다.
과거에 영약을 복용한 만큼 내공도 상당했다.
제갈승계가 도중에 온갖 불평을 했지만 깔끔하게 무시해 줬다.
덕분에 경공의 수련만큼은 확실히 했다.
싸우는 것을 못하면 도망치는 것이라도 잘해야 하지 않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혹독하게 수련시켰다.
꾸준하게 달린 덕분인지 며칠 지나지 않아 강소(江蘇)에 도착했다.
도적을 만난다거나, 혹은 시비가 걸리는 등의 일은 없었다.
은밀하게 움직인 덕이기도 했지만, 강소는 중원에서도 치안이 비교적 양호한 지역 중 하나였다.
남으로는 사도천의 세력권인 절강이 있었으나, 바로 옆 서쪽으로 무림맹이 위치한 안휘가 있었다.
무엇보다 강소의 남경(南京)이 명나라 초기의 도읍이었던 만큼, 관의 영향력도 남아 있었다.
여하튼, 이후로도 꾸준하게 쉬지 않고 이동한 덕분인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강소 남부의 운하(運河) 도시, 소주(蘇州)였다.
수나라 시절 대운하의 개통 이후로 크게 번영한 소주는 중원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도시에 속했다.
남부의 장강 삼각주 평원 위에 위치해 있었고, 대운하와 외성하(外城河)가 성곽을 두른다.
예로부터 운하를 비롯하여 정원이 아름답고, 미인이 많았다.
토지는 비옥하여 생산이 풍부해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 불렸다.
밤에 도착한 일행은 적당한 곳을 찾아 잠을 청한 뒤, 이튿날 아침이 밝자 소주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객점을 찾아 배부터 든든하게 채웠다.
그동안 요리라 할 것도 없이 적당히 사냥해서 배를 때우느라 미식(美食)에 굶주려 있었다.
식비는 충분히 있어 아끼지 않고 진수성찬을 즐겼고, 세 사람 다 만족했다.
소령도 평소의 유령 차림이 아니라 저잣거리의 소녀처럼 입히고 함께 먹었으나 별 감홍은 없어 보였다.
“맛은 어때?”
그러고 보니 함께 다니면서 뭘 먹어도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감상을 내놓을까 궁금해졌다.
“민물고기를 사용했습니다. 그 외로는 소금을 비롯하여 각종 조미료를 사용했고, 독은 없습니다.”
“……”
만약 방을 따로 잡지 않았더라면 숙수나 종업원의 얼굴이 일그러졌을 지도 모른다.
먹는 도중에 독의 이야기를 하다니,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다.
‘그나저나, 소주에서 붙은 건 없나.’
들어온 이후로 비밀 분타가 위치한 도시라는 건, 다르게 말하자면 암천회의 소굴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며 최대한 조심했다.
숙소를 비롯해 객점에선 비싼 값을 치르고 방도 따로 잡았다.
행동반경도 좁았고, 시간도 짧았다.
밤에 도착해 짧게 자고 남들보다 빠른 시간에 끼니를 챙겼다.
주변을 경계했으나, 다행히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소주에 온 이후로 기감을 최대로 전개했다.
“좋아, 그러면 밤까지 기다리다 가보자.”
소주의 절경이나 특산품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런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이렇게 약간이나마 휴식을 취한 것도 천선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에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예사롭게 볼 수 없는 게 암천회였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비밀 분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소주의 명원(名園), 사자림(獅子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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