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강의 눈이 정문의 외벽 쪽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뭐, 뭐라고?”
첫 번째는 당혹감이었고, 두 번째 는 분노였다.
“무림인이 혈공을 왜 써!”
맹강은 외벽이 무너진 걸 보고 그 수법을 한눈에 알아봤다.
“혀, 혈공이요?”
녹룡채의 부채주가 당황하며 물었지만 무시했다.
무림인의 근간은 정도건 사도건, 마도건 간에 스스로의 힘을 갈고 닦는 무공에 있다.
그러나 혈공법은 그 기본적인 개념에서 벗어난다.
구상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실행으로 옮긴 게 어이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맹강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 였다.
정문도 문제지만 바로 앞의 이백여 명도 문제다.
‘어디가 진짜냐?’
이쪽이 미끼고, 저쪽이 진짜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그것 자체도 양동일 수도 있다.
만약 전력을 저기로 이동했다가 뒤쪽이 뚫리면 큰일이었다.
정문과 달리 자그마한 후문 앞에 벽을 세워 막아 두긴 했지만, 어떤 방법으로 침입해 올지 모른다.
“적림도는 들어라!”
일촉즉발의 순간, 아래쪽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백여 명의 무인들 중에서 장년의 남자가 앞으로 나오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힘없는 백성들을 약탈한 죄, 그 벌을 받을 때가 왔다. 그동안 저지른 죄목만 해도……”
그 뒷말은 맹강에게 들려오지 않았다.
“큭!”
맹강이 부채주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반을 데리고 나가 정문의 침입을 막아라!”
“예!”
아쉬워도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상황이 악화된다.
‘제기랄!’
후위의 압박이 보통이 아니었는지라 일단은 전력부터 반으로 나눴다.
“좋아.”
적림도가 반으로 갈라지는 걸 보고 주서천이 웃었다.
전황이 생각한 대로 움직여 주고 있었다.
외벽을 넘어선 토벌대가 중앙으로 고속 진격했다.
대부분의 전력이 뒤에 있던 만큼 막을 것이 없었다.
화산파와 당가가 적절하게 협력하면서 나아간다.
선두에는 장홍과 장서은 그리고 낙소월, 당혜가 있었다.
“쏴라!”
망루 위의 적림도가 소리쳤다.
“어딜!”
주서천이 망루의 사다리를 타고 높이 도약했다.
망루에 도착하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으아아아 ……”
적림도가 비명을 내지르며 망루 아래로 떨어졌다.
주서천은 적림도가 쥐고 있던 활과 화살을 습득하고, 망루에서 다시 도약해 외벽에 올랐다.
“하나!”
시위에 화살을 거는 동시에 놓는다.
파앗!
“끅!”
백발백중의 화살이 아래를 조준하던 궁병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주서천은 다음의 화살을 시위에 걸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림총채주는 관군 출신인가?’
무림인은 활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나 이곳엔 이상하게도 궁병 의 빈도가 높았다.
망루나 외벽에 상당 부분 배치해 뒀다.
성을 연상시키는 산채에서부터 느꼈지만 곳곳에서 관군의 느낌이 묻어났다.
그것도 지휘관 수준의 직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관군 출신의 산적이 드문 건 아니다.
탈주병 대부분은 도망 다니거나 혹은 산채에 몸을 담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전술을 응용할 정도의 수준은 정말로 드물었다.
쿠-웅!
궁병을 하나 처리한 순간이었다.
굉음과 동시에 아래쪽에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진동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하고 시선을 돌리니 전에 정주에서 본 비소돈과 견줄 정도의 덩치가 보였다.
“묵철구(墨鐵球), 장두!”
산채 중 최강인 녹룡채인 만큼 수뇌 대다수가 무공이 강했다.
부채주 다음가는 강자가 바로 장두였는데, 사람 몸만 한 철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괴물이었다.
“으악!”
화산파의 제자가 도중에 전부 피하지 못하고 철공에 맞았다.
스쳐 지나갔는데도 다리뼈가 으스러졌다.
“사제!”
“감히 산적 나부랭이가!”
여기저기서 분노의 외침이 터졌지만, 그래도 아직 이성이 먼저인지 거리를 벌리고 경계했다.
“화산파라 한들 이 묵철구에는 그 누구도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웅웅웅!
왼손으로 쇠사슬의 하단을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상단을 붙잡아 빙글빙글 돌렸다.
사람만 한 철공이 제자리에서 회전하자 위압감이 상당하다.
회전할 때마다 무거운 파공음을 토해 냈다.
철도 그냥 철이 아니다.
전설에 나오는 만년한철은 아니지만, 일반 강철보다 단단한 묵철이었다.
그만큼 무게도 나가는데 자유자재로 다루는게 신기했다.
공을 던져도 물 흐르듯이 회수가 이어지고 재빠르다.
워낙 위협적이다 보니 다가가기도 쉽지 않았다.
“제가 맡을게요.”
낙소월이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나섰다.
“흐흐!”
장두가 낙소월을 보고 기분 나쁘게 웃었다.
눈에는 음욕이 가득했다.
“허! 고년 참 예쁘구나!”
“장두 형님! 그년 안 다치게 해야합니다!”
뒤에서 적림도가 속속히 도착했다.
죄다 낙소월의 미색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 저쪽이 마음에 드는데?”
“쩝. 어차피 총채주나 부채주께 갈 거 아니냐. 난 언제 저런 미녀들을 맛보냐……”
여기저기서 참고 듣기 힘든 희롱이 난무했으나 정작 대상이 된 낙소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시선은 오로지 장두, 정확히는 그가 손에 쥔 묵철구에 꽂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중할 대상이 없는 당혜는 달랐다.
펄럭!
소맷자락이 부풀어 오르더니만, 바람이 부는 것처럼 흔들리면서 독침을 쏘아 냈다.
중수나 고수가 아닌 이상, 해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독침이 위로 비상했다 아래로 쏟아졌다.
“악!”
“당가의 암기다! 피해!”
음담패설이나 늘어놓던 적림도의 낯빛이 바뀌었다.
전부 혼비백산하여 몸을 날려 재빨리 피했지만, 늦었다.
반 정도는 아니지만 삼 할이 독침에 맞았다.
“어휴, 하여간 사내란 것들은!”
초련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질풍보를 밟았다.
그 경지가 낮지 않아 몸놀림이 바람과 같았다.
제갈승계는 금의검문 무사들에게 맡기고 정면으로 나선 초련은 쾌검을 자랑하며 산적들을 베었다.
“크아악!”
“죽어라!”
“아가씨에게 망발을 퍼부어?”
당가의 원한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했던가.
독봉의 호위 무사들이 분노를 금치 못하며 쫓아다녔다.
화산파도 반으로 찢어져 장두를 지나서 그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적림도에게 공세를 퍼부었다.
나머지는 낙소월이 걱정되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주변을 포위하듯이 둘러싸서 경계했다.
“흐랴압!”
장두가 고함을 지르면서 묵철구를 휘둘렀다.
부우웅!
회전하던 묵철구가 포물선을 그으면서 아래로 떨어진다.
던지는 것만으로도 풍압이 무겁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섬뜩한 건 그 속도였다.
묵철으로 된 철구라면 보통 무거운 게 아닐 텐데, 상당히 빨랐다.
머리 위를 묵철구의 그림자가 집어삼켰다.
콰앙!
시커먼 철공이 바닥에 떨어졌다.
무게나 크기가 보통이 아닌 만큼 파괴력 또한 어마어마했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크게 흔들렸고, 철구가 처박힌 곳이 움푹 파이면서 구덩이가 생겼다.
묵철구가 머리 위로 떨어지기 전, 신행백변으로 몸을 옆으로 이동한 낙소월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 정도의 위력이라면, 스치기만 해도 몸이 남아나질 않을 거야.’
검을 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낙소월은 주변을 시야에 담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강호에서 무명이지만, 그 무위는 진짜였다.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발걸음은 완벽 그 자체라서 보는 이가 감탄을 자아낼 정도다.
선녀나 다름없는 미색을 뽐내면서도, 무인으로서 완벽한 몸놀림으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장두의 측면에서부터 파고든 낙소월이 검을 수평으로 베려다가, 흠칫 놀라면서 황급히 물러났다.
부웅!
바닥에 처박혔기에 다시 빼내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 예상했던 묵철구가 대기에 구멍을 내면서 주변을 휩쓸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저 묵철구에 맞아 비명횡사했을지도 모른다.
‘빨라’
공격도 공격이지만, 회수하여 반격에 나서는 속도도 상당하다.
묵철구를 제 손처럼 다루고 있었다.
“나의 묵철구는 천하무적이다!”
장두가 목청껏 웃으면서 자신감 있게 외쳤다.
“……”
장두와 거리를 둔 낙소월이 검을 고쳐 잡았다.
‘섣부르게 공격하려 들었다간 당해버려.’
대다수 도적들의 수준은 높지가 않다.
그렇지만 장두처럼 고수도 종종 있었다.
타고난 괴력도 괴력이지만, 내공이나 무위의 경지도 낮지 않았다.
붕붕붕.
장두의 팔이 제자리에서 회전한다.
그에 따라 묵철구도 원을 그려 내면서 매섭게 움직였다.
몸집이 워낙 크다 보니 사람이 아니라 대성성(大狼雅 : 고릴라)이 철공을 휘두르려는 것처럼 보였다.
“크하압!”
부앙!
장두의 머리 위에서 회전하던 철공이 떠났다.
그 목적지는 낙소월의 정면이었다.
워낙 크고 빨라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었는지라,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몸이 굳어 피하지 못한다.
팟!
그러나 낙소월은 주저하지 않고 보법을 밟아 좌측으로 이동해 회피한 뒤,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어딜!”
장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쇠사슬을 쥔 팔뚝에 힘이 들어가면서 울퉁불퉁하게 부풀어 오른다.
촤르르륵!
쇠사슬이 파도처럼 크게 출렁였다.
그 힘의 전달이 철공까지 옮겨지더니, 방향을 억지로 틀었다.
정직하게 직선을 그리던 철구는 우측으로 꺾어 습격해 왔다.
“위험해!”
“으악!”
지켜보던 사형제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차!’
공격한 장두도 아차 싶었다. 무심코 전력을 내 버렸다.
이렇게 되면 저 고운 얼굴이 전부 뭉개져 버린다.
아쉬운 것도 아쉽지만, 미녀라면 사족을 못 쓰는 총채주가 화를 낼 것이 떠올랐다.
이제 와서 방향을 바꾸거나 회수하기도 늦었다.
“읏!”
낙소월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리를 꺾듯이 뒤로 젖혔다.
허리 외에 다리도 눕듯이 젖혔다.
후웅!
철공이 지나간 자리에 바람이 위에서부터 쏟아져 나와 낙소월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휴우!”
지켜보던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철공에 맞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은 면했다.
‘이걸 피해?’
장두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껌뻑였다.
그사이에 낙소월이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제자리에서 일어난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쏘아졌다.
“흡!”
장두가 놀란 나머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래도 하수는 아니라고 반격에 나갈 준비를 한다.
낙소월의 검극이 눈 부신 빛을 내뿜으며 쏘아졌다.
한 치의 흔들림 하나 없는 곧고 깨끗한 검이었다.
‘위험하다!’
장두가 위험을 느끼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무리해 힘을 내서 그런지 단전이 저릿저릿하고 아파 왔다.
촤르륵!
인력(引力)이 발생하면서 철공을 불러냈다.
전력을 다해 던진 철공도 곧장 귀환시킬 수 있는 비결이다.
“하앗!”
낙소월이 귀신같이 반응했다.
처음으로 그녀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매서운 찌르기에 속력을 더한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검으로 향하던 내공의 흐름을 끊었다.
그러나 급작스럽지는 않았다.
이때 만을 기다렸다는 듯, 예상과 판단에 맞춘 준비된 행동이었다.
애초에 앞이 아닌 몸의 중심에 체중을 실어서 그랬는지 전환이 빨랐다.
이번에는 우측으로 틀었다.
멧돼지처럼 앞을 향해 나아가던 낙소월은 또다시 유려한 몸놀림으로 곡선을 그리며 반 회전했다.
“쌰, 썅!”
장두가 욕설을 내뱉었다.
기껏 무리해서 철공의 방향을 틀었는데 낙소월이 방향을 꺾어 버렸다.
아무리 철공을 제 손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장두라고 할지라도, 이번에 또다시 전환하기에는 늦었다.
무리를 하면 가능은 하지만, 그랬다간 내기가 역류하여 주화입마에 든다.
결국은 옆구리를 내줘야 했다.
그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날아올 검격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몸에 잔뜩 힘을 주고 방어에 신경 썼다.
팟!
검신이 햇빛을 반사하면서 빛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두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면서 피를 뿌렸다.
“크읏!”
장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온갖 고통은 맛보았기에 이런 공격쯤은 참을 만했다.
그러나 문제는 옆구리가 파이면서 상체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늦춰졌다는 점이다.
낙소월이 그사이에 왼발을 축으로 몸을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재빠른 찌르기를 선보였다.
푸욱!
“크아아악!”
척추 부근으로 검극이 들어왔다.
그래도 근육이 워낙 많아 뼈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걱정인 것은 신경이었다.
그쪽이 잘못된다면 자랑하는 철공을 들기는커녕 앞으로의 생활이 문제다.
“이 빌어먹을 년이!”
장두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됐다.
분노로 인해 이성이 차츰 마비된다.
살의가 용암처럼 들끓었다.
“으아악!”
척추의 고통으로 인한 비명이 아니다.
분노가 가슴에서 치솟아 목구멍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장두는 이제 봐주지 않겠다는 듯, 내공을 있는 대로 쥐어짜내서 묵철구를 휘둘렀다.
부웅! 부웅! 부웅!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쇠사슬을 꽉 쥐고 온몸을 팽이 삼아 돌고, 또 돈다.
팽이처럼 도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팽이가 됐다.
“으악!”
“혀, 형님! 저희도 있습니다!”
근처에서 싸우던 무인들도 덩달아 놀랐다.
아군도 적군도 하나같이 장두와 거리를 벌렸다.
철공과 한 몸이 되어 연달아 회전하는지라 피아 구별이 불가능했다.
주변을 부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다가갈 수가 없어……!”
낙소월이 낭패 어린 눈으로 어찌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저곳에 들어갔다간 뼈도 못 추린다.
설사 파고들어 공격해도 멈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우오오옷!”
장두가 돌고, 돌고, 또 돌았다.
시점이 맞지 않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화가 났다.
균형을 잃을 법도 한데 잘만 버텼다.
부우웅!
묵철구가 일으킨 바람이 불었다.
풍압 자체만으로도 굉장해서 섣부르게 다가갈 수 없었다.
“어어?”
비교적 가까운 적림도가 바람에 균형을 잃고, 뒤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퍼억!
그 몸뚱아리가 철공에 맞았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절명했다.
휘잉.
무엇보다 무서운 건 그 위력이었다.
맞는 순간 상체가 꺾이면서 통째로 뜯겨졌다.
거기서 끝나면 또 모를까, 철공에 맞고 바깥으로 튕겨져 날아가 멀리있는 망루에 처박혔다.
콰르르!
망루를 지탱하던 기둥이 부서졌다.
그 대신 뿌옇고 매캐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면서 땅을 침식하듯 넓게 퍼졌다.
“히, 힉!”
“허어!”
여기저기서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하나같이 안색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토벌대도 적림도도 거리를 최대한 벌렸다.
낙소월도 방향을 꺾어 아예 벗어나려 했지만, 장두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장두는 복수를 하려는 듯이 낙소월이 있는 방향으로 집요하게 쫓아오며 묵철구를 마구 휘둘렀다.
마치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듯 장두의 묵철구가 지나간 곳은 전부 초토화 됐다.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가 있던 곳도 민둥산이 됐고, 몇십 년 묵은 거목도 뿌리째 뜯겨져 나갔다.
“사매!”
장서은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구할 방법이 없다.
“위!”
당혜가 명령을 내리며 암기를 던졌다.
그 뒤로 당가의 무사들이 알아듣고 장두의 머리 위로 던졌다.
파바밧!
사천당가의 절초인 만천화우(滿天花雨)는 아니었으나, 그에 견줄 정도로 암기의 비가 내렸다.
팅! 티팅!
하나 그 위력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나라도 맞춘다면 중독되어 도움이 되겠지만 전부 튕겨졌다.
머리 위는 비었으나 뿜어져 나오는 풍압에 의하여 접근조차 못 했다.
이대로 놔둔다면 장두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 전에 먼저 당할 것이다.
‘안 돼!’
낙소월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천재라 할지라도 낙소월은 강호 초출이나 다름없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이런 돌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낙 사매!”
“……!”
절체절명의 순간, 위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 파악할 필요는 없었다. 익숙한 목소리다.
머리를 드니 외벽 위를 바람처럼 달리는 주서천이 보였다.
“사형!”
위기의 순간임에도 낙소월의 낯빛이 환해졌다.
“막아랏!”
“어딜!”
주서천이 향하는 길목에 적림도 둘이 막아섰다.
하나는 시위에 화살을 걸고, 하나는 칼을 들었다.
피융!
화살이 시위를 떠나 쏘아졌다.
활솜씨가 제법 보통이 아닌 듯 달리는 걸 계산해 관자놀이를 노렸다.
주서천은 여전히 낙소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앞을 보지도 않고 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었다.
서걱!
화살이 두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주서천이 적림도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으합!”
적림도가 주저하지 않고 도를 사선으로 휘둘렀다.
주서천의 시선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동공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옆에 눈이 달린 듯, 사선으로 휘둘러지는 칼을 물 흐르듯이 피한 뒤 검을 대충 휘둘렀다.
크악!
가슴에서 피를 흩뿌리는 적림도를 지나치고, 화살을 새로 걸려던 적림도에게 검을 휘두른다.
“꺽!”
적림도가 목을 붙잡고 끅끅거리며 비틀거렸다.
그 몸은 외벽을 넘어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주서천은 용천혈에 내공을 주입해 속도를 높였다.
사매가 위험한 만큼 내공의 순환도 가속한다.
“흡!”
주서천이 숨을 참으면서 땅을 박찼다.
그 몸이 외벽을 떠나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아래에서 낙소월의 자그마한 비명이 들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손에 쥔 검에 힘을 줬다.
회오리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치솟는다.
주서천의 몸을 밀어내려 했으나, 그 육체는 꿈쩍하지 않았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지는 힘을 포함해 단전에서부터 끌어낸 내공의 힘이 합하여 풍압을 없애 버렸다.
“하아앗!”
주서천이 소리를 내질렀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은 펼쳐지지 않았지만, 강기의 검이 빛났다.
부우웅-!
회전하는 묵철구가 위에서의 침입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몸을 박살내겠다는 듯 덮쳐 왔다.
철공이 다가온다. 주서천이 제비를 돌았다.
철공이 다가왔다. 주서천이 검을 휘둘렀다.
철공이 부딪쳤다. 검신을 두른 강기가 베었다.
“으헉?”
한참을 돌던 장두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의 회전이 드디어 멈췄다.
강철보다 몇 배나 단단하다는 그 묵철조차 강기를 당해 내지 못했다.
철공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파앗!
그러나 철공에 향해지던 힘은 아직 남아 있었다.
반으로 갈라졌으나, 방향을 꺾어 쭉 날아갔다.
주서천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하나는 아무도 없는 외벽으로 날아가 문제없지만, 나머지 하나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적림도만 있었다면 모를까, 토벌대가 뒤섞여 있다.
눈치를 채는 것보다 날아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어딜!’
매화가 그려진 소맷자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 안에 숨겨 두었던 비수가 번개같이 뿜어졌다.
하나가 아니라 무려 네 개였고, 각각 유은비도를 운용해 기를 주입해뒀다.
채앵!
날아간 비수가 철공의 잔해와 부딪쳤다.
묵철이다 보니 흠집밖에 남기지 못하고 불꽃을 토해 냈다.
그러나 의도는 성공했다. 방향이 틀어지면서 옆으로 기우뚱했다.
챙! 채챙!
나머지 세 개의 비수가 연달아 맞았다.
한쪽 방향으로 꺾을 수 있도록 한곳이 아니라 여러 곳을 쳤다.
“으아악!”
무인들이 뒤늦게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쿠웅!
철공의 잔해는 아무도 없는 외벽에 처박혔고, 천만다행으로 토벌대와 적림도는 몸이 빈대떡처럼 뭉개지는 걸 면할 수 있었다.
“ ……?”
반으로 잘린 철공의 그림자에 놀랐던 무인들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공포가 사라지고, 안도와 더불어 놀라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살았다!”
적림도가 기쁜 나머지 싸우던 것도 잊고 환호했다.
“미친놈아, 장두 형님이 당했다고!”
“헉!”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는 적림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지?”
영역 밖의 무인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반으로 갈라진 철공이 코앞까지 날아왔다.
토벌대의 무인들은 그걸 보고 비명까지 질렀다.
그런데 누군가 끌어오듯 공중에서갑자기 각도가 꺾였다.
“당신, 그런 건 또 언제……”
대다수가 눈치채지 못했지만, 당혜는 달랐다.
오룡삼봉 정도 되니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분은 목격했다.
강기야 원래부터 알았다고 치니 그러려니 했지만, 최후에 비수를 쏘는 걸 보자 눈이 커졌다.
화산파의 고수가 암기를 그것도 능숙하게 다루는 걸 보니 놀랍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만약 이 자리에 그녀의 아버지이자 당가의 가주인 당유기가 있었다면, 데려오라 말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천독지체인 주서천을 사윗감 후보로 눈여겨보고 있으니까.
“사매 괜찮아?”
주서천이 낙소월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야 사형 덕분에 괜찮죠.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낙소월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생긋 웃었다.
‘여전히 심장에 안 좋군.’
주서천의 정신이 순간 아득해졌다.
산적들과 검을 부딪치는 것보다 낙소월의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게 더 힘들었다.
그 미소에 좀 더 치유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거세게 뛰는 맥박을 진정시켰다.
“다친 곳은 없고?”
“네.”
“좋아.”
주서천이 안도하며 등을 돌렸다.
그 시선 끝에는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있는 무인들이 보였다.
“이대로 돌파한다!”
오랫동안 회전했던 장두는 그 여파로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감각이 망가진 듯, 일어나려 해도 돌에 맞은 개구리처럼 몸을 파르르 떨어 대기만 했다.
“와아아아!”
토벌대의 함성이 산이 떠나가라 울렸다.
한껏 사기가 올라간 사람들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이 치는 소리처럼 엄청났다.
“……”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에 적림도가 압도당했다.
그에 따라 사기도 아래로 떨어졌다.
전쟁에서 고수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기를 올렸다가 내린다.
장두가 당하자 그 영향이 바로 왔다.
“끄응!”
부채주가 사기가 떨어진 수하들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그의 얼굴에는 곤란함이 묻어났다.
‘장두가 머리는 나빠도 산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데…… 나와 그다지 차이도 안 나고……’
바닥에 누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장두를 보니 입이 바싹 말랐다.
‘도대체 고수가 얼마나 있는 거야? 저 여자도 무명이기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거늘……’
부채주가 낙소월을 쳐다봤다.
전장 한가운데서도 이목을 끄는 미색이었다.
그러나 미모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무공도 보통이 아니었다.
처음에 장두를 맡겠다고 하자 코웃음을 쳤다.
한데 그다음으로 보인 몸놀림이나 검술은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매협검이나 옥매화, 당문의 독봉을 보니 상황은 암담해지기만 했다.
“뭣들 하고 있어!”
적림도가 주춤이자 부채주가 윽박질렀다.
“대호채에서 한바탕하고 온 놈들이니 지쳐 있을 게 뻔하다! 숫자도 우리 쪽이 더 위란 말이다!”
지쳐 있지 않았다.
대호채는 무혈입성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체력이나 기력을 소모하긴 했지만 충분히 휴식했다.
주서천은 땅굴을 파는 동안 토벌대에게 대호채에서 가져온 금창약 등을 나눠 줬다.
적림십팔채 중에서 최강으로 군림하는 산채가 적이니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왔다.
“우리가 누구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어찌할 줄 모르는 녹룡채가 아니더냐! 총채주님을 떠올려라!”
녹룡채의 부채주가 적림도에게 사기를 불어넣었다.
“그래, 종채주님이 바로 뒤에 계신다!”
“매화정검? 그껏 애송이 따위 총채주님이 오신다면 별것 아니지!”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범하자!”
“천하제일 산채, 녹룡채가 나가신다!”
나락의 끝자락까지 떨어졌던 사기가 치솟았다.
그들에게 있어 총채주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맹강은 실제로 그 정도의 힘이 있었고, 그 악명도 자자했다.
그에게 당한 정파 고수가 여럿이다.
무림맹도 사도천도 맹강의 이름을 들으면 경계한다.
원초적인 폭력의 명성이 적림도에게 힘을 줬다.
“와아아아-!”
토벌대와 적림도의 함성 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한눈에 봐도 전력 차이가 상당했다.
녹룡채의 전력은 반으로 나눴음에도 백 명이었다.
그에 반면 토벌대는 고작 육십이었다.
원래는 칠십 명이 넘었으나 관아로 보낸 금의검문 무사와 대호채의 뇌옥을 감시하느라 몇 명을 남겼다.
그러나 전력 차가 그다지 심하게 나는 건 아니다.
수적으로는 밀려도 토벌대의 무위가 몇 수 위였다.
녹룡채라 할지라도 대다수가 삼류거나 이류다.
일류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반면 토벌대는 수준 높은 무인들로 구성됐다.
“매화검진(梅花劍陳)을 펼쳐라!”
장홍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렸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화산파의 검수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화산파의 기초 검진이기도 한 매화검진의 장점은 매화검법만 배웠다면 누구나 펼칠 수 있다는 점이다.
덧붙여 인원수나 경지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운용할 수 있으니, 안전성과 응용 면으로는 최고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혼자만 상승의 검법을 펼칠 경우 경지가 낮은 자가 따라가지 못해 검진의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이나, 매화검법만으로도 검진의 위력을 충분히 낼 수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검진의 운용과 통솔을 위해 장홍이 중앙에 위치했고, 전위와 후위는 각각 낙소월과 장서은이 맡았다.
“아아악!”
“크악!”
괜히 구파일방의 화산파가 아니다.
매화검진의 운용을 시작한 화산의 검수들은 위협적이었다.
한 번 빠지면 생문(生門)을 찾기도 전에 검격에 휘말려 난도질 당했고, 검진을 깨뜨리기도 힘들었다.
‘매화검수로서 내정된 세 사람이라서 그런지 다들 검진의 운용에 정말로 능숙하구나.’
주서천은 따로 움직이는 것이 편해 홀로 싸웠다.
‘적어도 화산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매화검수가 되면 검진은 필수다.
한 사람이 아닌 몇 사람씩 짝지어 행동하니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런지 예검수인 장홍과 장서은, 그리고 내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낙소월은 꽤 익숙해 보였다.
평소 수련을 적지 않게 했다는 걸 증명하듯 완벽한 검진의 운용을 보여 줬다.
“주서천의 목을 가져온 자에게 금을 내리겠다! 살리면 더 많은 돈과 여자를 주마!”
부채주가 소리 질렀다.
그 말에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주서천에게로 향했다.
피식.
옛 생각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전란의 시대, 이름도 모를 전장에서 터무니없는 고수가 등장했을 때 저런 말을 듣기는 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그 말의 대상이 될지는 몰랐다.
“장두 형님을 상대하느라 힘을 소모했을 터!”
“저놈의 목은 내 것이다!”
주변의 살기가 한곳으로 집중됐다.
한 사람도 아닌 수십 명의 살기가 집중되니 양이 보통이 아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살기에 휘말려 몸이 돌처럼 굳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주서천은 아니었다.
“승계야!”
의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무릎을 굽혔다.
다리에 힘을 잔뜩 주자 허벅지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전부 이거나 처먹어라!”
토벌대의 후위, 금의검문 무사들이 찝찝한 표정으로 죽통에 달린 끈을 잡아당겼다.
제갈승계의 품 안에도 죽통이 들려 있었는데, 반가운 도구였다.
파바밧!
죽통이 열리면서 그 안에 들어 있던 화살이 뿜어졌다.
통 여러 개를 한꺼번에 열어 숫자가 상당했다.
“악!”
“크악!”
화살 비가 적림도 중심과 후방에 떨어졌다.
뒤에서 대기하거나 도망치던 적림도 십여 명이 쓰러졌다.
‘승 공자의 발명품은 언제 봐도 기상천외하군.’
‘아니, 그보다 정말로 제갈세가 사람 맞아?’
‘사실 당가의 사생아 아닐까?’
금의검문 무사들이 죽통노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제갈 공자와 대화를 나눠 보고 싶네요.”
당혜도 당가의 사람답게 새로운 암기에 반응했다.
사실 화살을 몇 개나 담아서 그런지 죽통의 크기가 커 암기로 쓰기에는 애매했고 병기가 맞았다.
그래도 만드는 방식이나 그 원리는 흥미를 끌었다.
“저 새끼도 잡아!”
부채주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히, 힉!”
자신이 지목을 당하자 제갈승계가 얼른 숨었다.
“참 나, 지 장기를 쓸 때랑은 천지차이라니까!”
주서천이 헛웃음을 흘리며 뛰쳐나갔다.
등 뒤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머리를 돌려 슬쩍 확인해 보니 난장판인 산채 내부가 그대로 보였다.
“끄응!”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니 신음이 절로 나왔다.
맹강은 고개를 원래 위치로 되돌리며 성을 냈다.
“도대체 뭔 속셈이냐, 이 개새끼들아!”
정문의 외벽이 돌파된 지 일다경 정도가 지났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후문은 아직 싸움도 시작 안 했다.
아직까지도 신원을 알 수 없는 이백여 명이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했는데, 그다지 뜨겁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진위 여부를 알 수 없었다.
가짜라면 지나치면 그만인데, 만약 진짜일 경우 몸으로 번진다.
“……”
아래에 모인 이백여 명은 처음을 제외하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위를 쳐다보기만 했다.
각자 병장기를 들고 있기는 한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저것들을 무시하고 돌아갈까 싶었지만 만약 그게 함정이라면, 뒤를 내주는 것이 되어 버린다.
“어디, 이걸 맞고도 가만히 있나 보자!”
맹강이 옆에 선 수하가 쥔 손도끼를 빼앗아 힘껏 던졌다.
휘리릭!
손도끼가 화려하게 회전하면서 아래를 향해 날아갔다.
내공을 불어넣은 만큼 위력도 상당하다.
“쯧!”
중년인이 혀를 차면서 앞으로 나섰다.
그 머리 위로 맹강이 던진 손도끼가 쪼갤 기세로 날아왔다.
“하앗!”
짧은 기합.
쐐액!
검이 하단에서 상단으로 수직선을 긋는다.
채-앵!
나쁘지 않은 솜씨다.
그러나 천하백대고수의 내공을 실은 손도끼의 위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큭!”
손도끼를 가까스로 막아 내긴 했지만, 부딪침과 동시에 무식한 공력이 내부를 강하게 흔들었다.
잘 보면 지면을 밟고 있던 자리도 뒤쪽으로 약간씩 밀려났다.
“이, 개 같은……!”
아래가 아니다. 위에서 욕이 들려왔다.
머리를 드니 얼굴이 걸레짝처럼 일그러진 맹강이 보였다.
진법!
중년인이 움직인 순간, 아래의 풍경이 변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아니, 여러 사람처럼 보였다고 하는 게 맞았다.
본체를 거울처럼 비추는 환상이었다.
하나가 움직이자 연결된 여러 명이 움직였고 손도끼 대신 앞에 사람, 허상을 베어 형체를 지웠다.
“여기까지네요.”
소속 불명의 토벌대에서 미성(美聲)이 울렸다.
“제갈 세가아아……!”
맹강이 그제야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수란 아가씨, 어떻게 할까요?”
손도끼를 막아 낸 중년인이 등을 돌렸다.
그 시선 끝에는 훗날 모사미봉이라 불릴 제갈수란이 서 있었다.
“으아아악!”
맹강이 화를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 쳐 죽일 연놈들이!”
당했다. 완전히 당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상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 꼴이었다.
인생을 통틀어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이 없을뿐더러, 적들 대부분이 애송이란 게 더욱 참기 힘들었다.
“화산파, 제갈세가! 이 개새끼들아-!”
주서천이 서신을 통해 도움을 청한 세력은 총 세 곳.
화산파와 사천당가, 마지막으로 제갈세가였다.
제갈세가는 화산파처럼 적림에 빚이 있었다.
그들을 움직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지원을 어느 정도 보내야 할 지가 애매했다.
전과 동일한 연유로 대대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주서천도 그런 걸 바라지는 않았다.
적들의 이목을 끌 수 있고, 속일 수 있는 진법만 원했다.
그래서 고민한 끝에 소수 정예를 보내기로 했다.
“네 이년! 네년이 이 일을 전부 꾸몄구나!”
맹강의 불타오르는 눈동자가 제갈수란을 향했다.
“모사미봉(謀士美鳳)!”
오룡삼봉 중 세대교체가 있었다.
봉황 중 맏언니가 서른이 되면서 후기지수에서 빠졌고, 그 자리를 제갈수란이 대신 차지했다.
본래 이 별호를 얻게 되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지만 이미 원래의 역사에서 꽤 벗어나 변화가 생겼다.
“전부는 아니에요.”
제갈수란이 안색 하나 안 바꾸고 답했다.
“으으으.”
맹강은 당장이라도 제갈수란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필사적으로 인내했다.
별호에 괜히 모사가 붙은 게 아니다.
그녀의 머리에서 나오는 책략은 심히 부담스럽다.
정예라고 생각했던 이백여 명은 사십으로 줄어들었지만, 저기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우라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아래로 내려갔다간 진법에 걸려들지 모르고, 무시한 채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문제 되는 건 상황의 촉박함이었다.
느긋하게 결정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등 뒤에서 본대인지 분대인지도 모를 토벌대가 진입해 오고 있어 신경이 쓰였다.
‘혹시 이렇게 고민하도록 묶어 두는 것이 목적이라면 어떻게 하지?’
맹강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이래서 제갈세가가 싫단 말이다!’
혹시 이 고민조차도 적의 의도 대로인 것은 아닐까?
괜스레 불안과 짜증이 치솟았다.
“적림총채주.”
제갈수란이 말했다.
“항복하세요.”
어떠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작전의 성공에 의한 성취감도 없었고, 실패를 걱정하는 불안감도 없다.
그렇다고 승리를 눈앞에 둔 자신감이나 도적이라 경시하는 눈초리도 아니다.
열기가 감도는 홍조나 냉기 어린 삭막함도 아니다.
고요함 그저, 담담하게 항복을 권고한다.
“지랄!”
맹강이 콧방귀를 꼈다.
“얼굴이 반반하여 첩으로 들이려 했으나, 보면 볼수록 짜증만 나니 잔인하게 죽여 주도록 하마!”
“감히!”
주인을 향한 모욕에 호위 무사가 즉각 반응했다.
“괜찮아요.”
하나 정작 장본인은 아무렇지 않고, 도리어 손을 들어 호위 무사들을 제지했다.
제갈수란은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맹강은 듣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렸다.
“저년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수비해라. 조금이라도 허용하게 된다면, 전원 내 친히 참수해 주지.”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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