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93/254)

대호채의 토벌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끝났다.

적을 사로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결과는 산혈호가 패배한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다.

만약 금의검문만 이끌고 왔다면 이리 쉽게 정리되지는 않았겠지만, 구파일방의 화산파와 오대세가의 당가가 합류한 덕분에 투항을 쉽게 받아냈다.

괜히 명문이 아니다.

이름만으로도 굴복하게 만드는 것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권위였다.

대호채의 투항을 받아 낸 뒤, 포박한 채 한곳에 모아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맹수들이 몰려왔다.

토벌대는 녹림도의 살려 달라는 외침을 다물게 만든 다음, 미끼에 끌려온 맹수들을 처리했다.

화산파는 녹림도를 감시했고, 금의검문과 당가의 무사들이 산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잔당을 찾았다.

반항하면 목숨을 끊었고, 투항하면 포박한 채 중앙으로 데려왔다.

그 외에는 납치된 사람들을 찾아 풀어 주었다.

“만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살았어! 살았다고!”

매일매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날.

남자들은 맹수의 먹이로 전락했고, 여자들은 죽을 때까지 범해졌다.

살아서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생지옥을 겪고 충격을 받아 텅 비어 버린 사람도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숨어 있는 녹림도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그들을 뇌옥으로 옮겼다.

주서천은 그 와중에 채주와 부채주만 따로 빼내서 심문했다.

“당가의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순순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넵!”

부채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불거렸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 없었다.

“그 새끼가 전부 시켰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온갖 악행까지 꺼내서 이야기했는데, 전부 채주의 탓으로 돌렸다.

대호채의 재물을 어디에 숨겼는지도 전부 말했다.

함께 심문하면 과달륵 탓에 지레 겁먹고 제대로 말하지 않을 것 같아서 따로 했는데, 성공적이었다.

“천하의 호래자식들이군.”

산처럼 쌓여 있는 금은보화를 보고 욕이 나왔다.

재물에 대한 감탄보다, 이 많은 것을 가지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해친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림구채, 그것도 중위에 속하는 산채라서 그런지 축적해 둔 양이 적지 않았다.

금은보화부터 시작해서 온갖 물품으로 가득했는데, 그중에서 의약품과 식량부터 꺼냈다.

산채에 붙잡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사람들의 배부터 채워 준 뒤, 의약품으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아이고, 구해 주신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무림인으로서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서천은 대호채의 창고를 개방해 사람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재산을 분배해 줬다.

목숨은 구했으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길이 암담했던 사람들은 눈물을 쏟아 내며 기뻐했다.

참고로 고향 땅이 습격을 당해 갈 곳 잃은 사람들에게는 금의상단에 의탁하라고 말해 두었다.

“그 정도의 돈이라면 금의상단에서 살 곳이나 할 일 정도는 구해 줄 것입니다.”

“끄흐흑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살아갈 희망이 생기자 감정이 격해졌는지 울음바다가 됐다.

‘좋아. 이걸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금의상단은 상왕의 수완으로 돈과 힘을 쉬이 얻었지만, 그 평이 사람들에게 좋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장사 초기 때부터 전장을 돌아다니며 병장기나 군량을 파는 전쟁상인이어서 그랬다.

게다가 무림에서의 평가 또한 좋지 않았다.

정파에 보급해 주는 건 좋았지만, 칠검전쟁 때 다발화전을 사용하여 그 좋던 인식도 떨어졌다.

이의채가 구휼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효과가 미미하여 어찌할지 고민 중이던 참이었다.

대호채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구해 그 뒤처리를 맡기는 걸로 대신해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분배를 끝낸 주서천은 금의검문의 무사를 불러 녹림도의 신병을 관아로 넘기도록 했다.

“사제. 나는 정말 사제가 자랑스러워.”

장홍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화산에서 재물을 탐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 부끄럽지만, 나는 처음 이 산더미처럼 쌓인 재화(財貨)를 보고 ‘이렇게 많은데 한 움큼 정도는 몰래 가져가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도사라고 욕구가 없을 리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재욕이 있다.

“그런데 사제는 잡혀 온 사람들을 위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재물을 분배하자고 말했어. 그런 사제가 정말로 대단하고 자랑스럽다.”

“사형의 말대로야. 연화각의 어린 시절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구나. 무공도 성품도 못 당하겠네.”

장서은이 동의하듯 미소 지었다.

‘널린 게 돈이라서 그런 건데……’

주서천의 양심이 조금 찔렸다.

“후후.”

낙소월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기뻐해 줬다.

“훈훈한 분위기도 좋지만, 슬슬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을까요?”

당혜가 사형제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 물었다.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생각도 말해 주셨으면 해요. 계속 입 다물고 있으면 대응하기 힘드니까요.”

당혜의 지적에 초련이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침 그럴 참이었습니다.”

대호채를 쳐부수고 관아로 사람을 보냈으니 이 소식은 곧 녹림구채를 넘어 중원에 퍼질 것이다.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토벌대의 목적은 적림십팔채의 괴멸, 혹은 그에 준하는 것입니다.”

꿀꺽.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으실 겁니다.”

화산파와 제갈세가가 괜히 과거에 한을 품은 채로 넘어간 게 아니다.

소모되는 인력이 적지 않았다.

토벌대의 구성원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림십팔채를 전부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이번처럼 경계가 허물어진 틈을 노릴 수도 없고, 맹수들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군데를 공격하다가 만약 적의 지원 병력이 포위라도 한다면 끝장이다.

주서천처럼 고수라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는 있으나 그 외의 토벌대원이 살아남을 확률은 낮다.

“대호채에서 반나절에서 한나절 정도 남하하면 녹룡채(綠龍塞)가 나옵니다.”

“아!”

사람들이 무언가 눈치챈 듯 탄성을 질렀다.

“녹룡채주, 아니 적림총채주가 최종 목표입니다.”

도적들의 연합체인 적림의 구조는 무림맹이나 사도천과 비슷하다.

정파는 정파끼리, 사파는 사파끼리 모인 것처럼 도적끼리 모여 손을 잡고 대표를 뽑는다.

녹림구채와 수림구채를 이끄는 자가 적림총채주다.

“저희의 힘만으로 적림을 전부 상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총채주의 목만 빼앗고 후퇴합니다.”

“과연……!”

낙소월이 무언가 눈치챈 듯 손뼉을 쳤다.

“과연, 이해했어요. 총채주의 목숨을 빼앗아 내란으로 당분간 꿈쩍도 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시군요.”

당혜도 모든 걸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낙 사매도 그렇고, 독봉 소저도 그렇고 머리가 참으로 비상하오. 괜찮다면 누가 설명해 주겠소?”

장홍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었다.

“권좌를 두고 일어날 쟁탈전을 이용하자는 뜻입니까?”

제갈승계가 확신을 얻으려는 듯 물었다.

주서천이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끙! 것 참, 머리 나쁜 사람을 위해서라도 어디 알아듣기 쉽게 설명 좀 해 주시오.”

초련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들겼다.

“그들에게 의리 따위는 없습니다. 총채주가 죽는다 할지라도 복수심에 불타기는커녕 새로운 종채주에 누가 앉을지가 더 신경 쓰이겠죠.”

제갈승계가 나서서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총채주를 살해한 뒤 후퇴하지 않는다면, 적림도는 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전쟁을 이어갈 것입니다. 총채주를 뽑는 것은 나중의 일로 미루겠죠. 그러나 토벌대가 물러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총채주가 된다면 녹림과 수림의 모든 도적들을 통솔하게 된다. 그 권위는 보통이 아니다.

“과연.”

장홍이 무릎을 탁 치며 이해했다.

토벌대가 물러나면 적림십팔채는 재정비에 나서고, 그 와중에 불협화음이 튀어나올 게 분명했다.

총채주가 산적이냐 수적이냐에 따라 득실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림십팔채 정도의 내란이라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고, 그사이 금의상단을 집요하게 노리는 약탈도 중단될 거 라는 계산이었다.

“어째서 대호채를 노리는 건지 궁금했는데, 단순히 녹룡채와 가까워서 그랬군요?”

낙소월이 추측하듯이 물었다.

“그래.”

대호채는 그저 녹룡채와 가장 가까이 있었기에 이런 봉변을 당했던 것이다.

이튿날.

반야신공의 회수로 떠들썩했던 강호가 또다시 소란스럽다.

녹림구채 중 한 곳인 대호채의 몰락 때문이었다.

어제 저녁, 대호재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치료하고 전부 하산시켰다.

그리고 금의검문의 무사가 관아에 도착해서 관리에게 대호채의 토벌에 대해 보고했다.

관리가 혹할 재물을 손에 쥐여 준 것이 도움이 됐다.

날이 밝자마자 관병이 움직였다.

대대적인 토벌이 필요하다면 함부러 움직일 수 없지만, 투항한 녹림도를 데려간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반대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라면서 좋아했다.

“대호채라,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아니, 이 사람 무슨 산속에서 살다 왔냐?”

“에잉, 산적이 거기서 거기지. 백성들 등골 빨아먹는 기생충이 아닌가.”

“그 기생충 중 대호채주인 산혈호는 천하백대고수이자 적립총채주의 의동생일세. 무엇보다 대호채라면 사람들을 납치해 범의 먹이로 쓴다는 놈들이지.”

“허어!”

“화산파와 당문, 그리고 금의검문이 나서서 그들을 쓸어버렸으니, 두 발 뻗고 안심할 수 있겠구먼.”

“괜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아니란 말이지!”

무림인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관심을 보였다.

그동안 민초들을 괴롭혀 온 산적이 사라졌다니 기뻐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사람들은 토벌대를 칭송했다.

“토벌대에 누가 있는지 들었나?”

“아아, 알고말고. 매화정검 주서천, 독봉 당혜, 매협검 장홍, 옥매화 장서은, 질풍십객 초련이 아닌가?”

토벌대의 수준이 낮지는 않았으나, 아무래도 다섯 명의 유명세가 대단해 그 외는 묻히는 감이 있었다.

“주서천 대협께선 안 끼는 곳이 없군그래.”

“그만큼 의협심이 남다르다는 거겠지. 대협이야, 대협!”

“대호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전원 구출했을 뿐만 아니 라, 뒷일을 생각해 재물까지 분배해 줬다며? 크!”

“그러니까 대협이고, 정파인이 아니겠는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침이 되자마자 소문이 부풀려져 삽시간에 퍼졌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점심 쯤 될 무렵에는 다른 지방까지 전해졌다.

참고로 재물을 나눠 주었다는 걸 듣고 그걸 노리는 사람들도 생겼지만 관아의 개입 탓에 어림도 없었다.

원래라면 그 돈조차 나라의 돈이라며 관아에 빼앗겼을지도 모르지만 대호채에 재물이 남아 있다는 걸 듣고 내버려 두었다.

안 그래도 소문이 워낙 빨리 퍼져 그걸 빼앗기도 애매해 굳이 그럴 연유가 없었다.

한편, 토벌대와 대호채의 소식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무렵 적림십팔채 역시 시끄러웠다.

녹룡채.

그곳은 일개 산적의 소굴치고는 컸다.

성문을 연상시키는 으리으리한 대문은 목조 건축물이었으나, 몹시 두꺼워 공성 병기가 아니라면 외부에서 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문으로 이어진 외벽은 산채를 길게 둘러싸 침입을 불허했고, 높이 역시 족히 삼 장이 넘어 철통 같은 요새를 구현했다.

팔방으로 설치된 망루는 일 리 바깥에서 접근해 오는 적들을 감시할 수 있고, 매의 눈을 가진 감시병이 자리 잡아 열두 시진을 교대하면서 근무했다.

“대호채가 함락됐다니, 뭔 정신 나간 소리냐?”

산채의 최심부,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음에도 값비싼 야명주가 설치되어 낮처럼 밝은 방 안이었다.

발목까지 깊숙이 파일 정도로 푹신푹신한 비단이 깔개로 이용되고, 박제된 맹수의 머리가 벽에 걸려 있다.

그 외에도 무소불위의 권력자나 대상인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사치품이 방의 가치를 높였다.

하나 이 중에서도 이목을 집중시키는 건 값비싼 물품도,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옷차림의 미녀도 아니었다.

사내답게 각진 턱 선과 사자 갈기처럼 자라난 무수한 수염,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레 위압감이 느껴지게 하는 험악한 인상.

눈썹은 굵직굵직하나 매서운 사선을 그려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을 더욱 악화시켰다.

“총채주! 주서천입니다. 매화정검 그 새끼가 금의검문뿐만 아니라 화산파와 당가까지 동원했습니다!”

적립총채주(賊林總塞主), 맹강(猛鋼).

녹림구채와 수림구채의 지배자였다.

“뭐라고?”

맹강이 그제야 정신을 번찍 차리고 귀를 기울였다.

“그 두 곳이 움직였다면 모를 리 없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자세히 말해 봐라.”

“화산파와 당가가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주서천 그놈이 개인적인 연줄을 이용했습니다.”

토벌대는 백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워낙 소수다 보니 그 움직임이 고요하고 재빨라 포착이 어려웠다.

무엇보다 적림십팔채가 토벌대를 우습게 여긴 것이 문제였다.

다들 신경 쓰기는커녕 무시했다.

안 그래도 적림도가 외부에 나가 금의상단을 터느라 전력이 상당 부분 비어 있었는데 방심까지 했다.

이렇게 허술하니 함락당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부분이 애송이들 밖에 없는데 하루도 안 돼서 함락당해?”

맹강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과달륵, 그 새끼는 뭐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당해? 호랑이랑 떡이라도 치고 있었냐?”

누가 산적 아니랄까 봐 입담이 참 걸쭉하다.

“주서천에게 당했답니다.”

녹룡채 부채주가 대답했다.

“쯧쯧. 애송이라고 방심했다가 당한 게 안 봐도 훤하다.”

“마을에서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일격에 죽었다고 합니다만……”

“무공도 모르는 놈들이 본 건데 뭘 알겠냐. 어쩌면 겁먹게 만들려고 과장해서 소문냈을지도 모르고.”

맹강은 술잔을 나눈 의동생의 죽음에도 눈물 하나 흘리지 않았다.

반대로 어리석다며 욕을 퍼부었다.

녹림도에게 의리가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맹강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적들에게 의리라니, 입에 담기도 민망하다.

수하만 앞에 없었다면 실컷 비웃었다.

“아쉽군. 그놈이 바치는 것들이 제법 마음에 들었었는데 말이야.”

맹강이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대호채로 애들을 내려보냅니까?”

부채주가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대호채의 재물을 심히 아까워하는 표정이었다.

“관군도 움직이고 있을 테고, 지금 움직여 봤자 늦으니 관둬라. 그보다, 그 잘난 토벌대는 어디에 있지?”

“오늘 아침 대호채에서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이곳, 녹룡채라고 합니다.”

“허?”

맹강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부채주도 마찬가지였다.

녹룡채를 그저 그런 산채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경비(警備)에 들어간 돈부터 다른 산채들과는 비교를 불허했다.

게다가 산채의 위치 역시 험준한 산세를 골라 농성으로는 최적이었다.

관군이나 무림 세력이 토벌을 주저하는 연유 중에서 하나가 바로 이 철옹성에 있었다.

무엇보다 총채주의 근거지답게 고수도 많았다.

당장 총채주만 해도 무림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였으니까.

그런데 고작 백여 명도 되지 않은 인원이 이곳 녹룡채를 향해 오고 있다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끙!”

맹강이 수염을 벅벅 긁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뭔 속셈이지?’

미치지 않은 이상 저 인원으로 덤벼 올 리도 없다.

녹룡채도 금의상단을 터느라 전력을 내보내긴 했지만, 그래도 백여 명의 전력에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하겠다는 판단을 내리기에는 일렀다.

‘만약 요것들이 미끼고, 양동 작전을 펼친 거라면 성가셔진다.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봐야겠군.’

대호채에서 출발한 토벌대는 녹룡채로 남하했다.

중간에 적당한 휴식을 취해 소모됐던 체력이나 내공 전부 충분히 회복할 수 있었지만, 속도가 느려졌다.

급속 행군으로 갔다면 하루에서 이틀 정도 걸릴 거리였으나, 속도를 내지 못해 나흘이나 걸렸다.

참고로 녹룡채 앞까지 가지는 않았고, 반 시진에서 한 시진 정도 되는 거리에서 멈춰 진지를 세웠다.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망루 위에서 진지를 살펴보던 맹강이 중얼거렸다.

토벌대가 근처에 도착한 지도 어언 이틀이 흘렀거늘, 쳐들어오기는커녕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 맹강도 섣부르게 움직 일 수 없었다.

토벌대 자체는 위협이 되지는 않으나 혹시 함정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었다.

“총채주!”

부채주가 망루의 아래에서 위를 향해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맹강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날렸다.

서너 장 정도의 높이였으나 전혀 상관하지 않는 몸놀림이었다.

쿠웅!

사람이 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집채만 한 바위가 떨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척후병에게서 온 보고입니다. 남쪽으로 한나절 거리에서 이백이 넘는 무리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렇지!”

맹강의 눈빛에서 생기가 감돌았다.

그동안 답답했던 것이 풀려 속이 다 시원했다.

“소속은 확인했나?”

“기세나 발걸음을 보아하니 무인인 건 확실한데, 어디서 왔는지는 파악하기가 힘들답니다.”

“쯧 그건 어쩔 수 없군.”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녹룡체를 노리고 있는 이상 최소 일류의 무인들을 불렀을 게 분명했다.

녹룡채가 아무리 도적들치곤 강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다.

만약 정파에서 작정하고 정예들을 골라 보내왔다면 접근조차 힘든 게 현실이다.

‘대충 무슨 속셈인지 알겠군.’

이백여 명 정도면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다.

적림십팔채를 전부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머리가 열기를 내뿜으며 활발하게 돌아갔다.

‘나를 죽여 적림채의 내란과 자멸을 노리는구나!’

맹강이 눈을 번쩍 떴다.

“앞에 있는 진지는 미끼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백여 명도 되지 않은 인원이 대문으로 당당하게 돌격해 올 리 없었다.

“시선을 돌리고 뒤에서부터 접근해 오는 정예로 어떻게 해 볼 생각이었겠지만, 헛고생이다. 내 이럴 줄 알고 주변의 접근을 알 수 있도록 곳곳에 척후병을 숨겨 두었지!”

맹강이 음험하게 비웃으며 몸을 돌린 다음, 바깥에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줄이고 명령을 내렸다.

“후문으로 전부 이동하되, 바깥에서 보이지 않도록 머리를 숨겨라. 눈치채고 도망이라도 치면 곤란하니까. 실수하는 놈들이 있다면 내 친히 목을 베어 주지.”

“정문 쪽은 어떻게 합니까?”

“이십여 명 정도만 남겨 둬라. 어차피 충차라도 가져오지 않는 이상 정문은 못 뚫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부채주가 존경을 담아 대답했다.

‘역시 총채주시다. 그동안 있었던 채주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무공만 무식하게 강한 것이 아니라, 전략에도 능하시고 현명하지 않은가!’

무림맹과 사도천이 적립십팔채와 싸우는 걸 껄끄러워하는 것도 총채주인 맹강에게 있었다.

싸우는 것이라곤 그저 치고받는 것 밖에 모르던 산적이나 수적들의 수준이 높아진 것도 총채주 덕이다.

맹강이 오기 전의 적림은 오늘만 보고 살았지만, 그가 온 뒤로는 내일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하나, 그 여유도 한나절 뒤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예라고 생각했던 무리가 후문에 도착했을 때, 맹강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크게 웃었다.

“으하하! 네놈들의 생각을 모를 줄 알았느……”

콰앙-!

천지가 뒤흔들 정도의 굉음이 터졌다.

무슨 일인가 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정문 쪽에서부터 올라오는 시커먼 연기가 보였다.

“후하하! 기관의 천재, 제갈승계님 나가신다!”

공성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에서 혈(穴)이라는 것이 있는데, 성벽 바로 밑에까지 굴을 파서 화기를 설치해 불을 붙여 성벽을 무너뜨린다.

정문을 도저히 돌파할 수 없다면, 그 옆의 벽을 무너뜨려 생긴 공간으로 침입하면 된다.

그러나 이 혈법이란 건 공성법.

즉, 공성과 수성에 익숙한 관군에서나 쓰이지, 무림에선 안 쓰였다.

애초에 공성이나 수성이란 개념조차도 희미하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어디에도 문파나 집안이 성처럼 되어 있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그런 짓을 했다간 관부에서 반역을 의심하고 사람을 보내기 십상이다.

그러나 무림에서 사장되다시피 한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주서천과 제갈승계다.

전생에서 할 일이 없어 말년에 독서를 즐겨 했던 주서천은 무공 외에도 이러한 잡지식도 가지고 있었다.

제갈승계야 공성 병기나 수성 병기 등 기관과 관련된 것은 어렸을 적에 완독한 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제갈세가가 아닌가.

워낙 머리 굴리는 걸 좋아하는 일족인지라 알고 있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다만 무공이나 진법 등의 학문을 공부하는 것도 시간이 부족해 공성법을 깊게 공부한 사람은 적었다.

“허, 참.”

초련이 무너지는 외곽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완전히 무인과는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금의검문 무사가 쓰게 웃으며 감상을 내놓았다.

각자의 사정이 있어 돈이 필요해 상단에 몸을 의탁하게 된 이후, 있던 자존심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공이 아니라 화기를 기초로 한 기관으로 싸우려니 마음에 걸렸다.

“이러다가 관에서 잡으러 오는 거 아닙니까?”

누군가 걱정이 된다는 듯이 물었다.

본래 무림에서 화기를 이용한 무기는 금지인 것이 관습이지만, 무엇보다 관의 개입이 걱정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럴 줄 알고 상단주께서 관군에 뇌물…… 커흐흠, 사정하여 허가를 구했습니다.”

“사정이라 하면……?”

“화기는 군용 외에도 광산의 채굴 용도로도 사용됩니다.”

제갈승계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방금 전까지 땅굴에 있다 나와서 그런지 얼굴이 흙투성이였다.

하지만 본인의 활약이 기쁜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꼬맹이도 꼬맹이지만, 주 대장도 대단하구나.’

며칠 전, 녹룡채를 친다고 들었을 때 솔직히 주서천의 머리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의심부터 했다.

사전에 작전을 들었음에도 녹룡채 인근에 도착하여 진지를 세웠을 때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성문을 연상시키는 산채의 입구와 외벽을 보았을 때, 저것을 뚫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의심했다.

진지를 세운 뒤, 그 안에서 주서천과 땅굴을 파고 있을 때는 정말 뭐하나 싶었다.

그러나 두 눈으로 외곽이 화려하게 무너지는 걸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상식에서 벗어난 무력도 무력이지만, 통찰력을 비롯한 지휘와 지혜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범상치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 일 줄이야. 어떻게 해야 저렇게 되는 거지?’

한 번 죽었다가 과거로 돌아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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