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 댕!
대호채 곳곳에서 경종이 울렸다.
한 번 울리면 경계이고, 두 번이면 내부에 큰일이 벌어졌다는 의미다.
술을 마시면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던 녹림도들이 헐례벌떡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 크아악!”
문 바깥으로 이제 막 나온 녹림도가 옆에서 덮쳐 온 호랑이에게 목이 물린 채로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채주님 애완동물이잖아!”
“끄아아악!”
“대체 몇 마리나 탈출한 거야!”
곳곳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는다.
산채의 중앙은 벌써부터 시체들로 엉망이다.
집채만 한 크기의 대호가 시퍼런 눈빛을 뿜어 대며 사냥에 나선다.
산채 내부는 짙은 혈 향으로 가득했다.
녹림도 몇몇이 힘을 합쳐 제압하려 했으나, 쉽게 되지 않았다. 앞발을 휘두르면 두셋이 죽었다.
“으악! 얼른 사육사를 불러와!”
“죽었어!”
굶주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호랑이도 있지만, 힘들게 조련에 성공한 부류도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통제가되지 않았다.
전부 하나같이 잔뜩 굶주린 것처럼 무척 흥분해 있다.
대호채는 우리를 탈출한 호랑이들로 인해 순식간에 혼란에 잠겼다.
무엇보다 전부 대호채주가 아끼는 애완동물인지라 함부로 상처 입힐 수도 없었다.
과거에 호랑이를 길들이려다가 실수로 눈을 찔러 상처 입힌 녹림도가 호랑이 밥으로 갈기갈기 찢겼다.
망루에서 현세에 펼쳐진 지옥을 내려다보던 녹림도는 경종을 울려 대며 제발 채주가 답해 주길 바랐다.
다행히 그 바람은 채주실 앞을 지키던 녹림도에게 전해졌다.
“채주!”
“머저리 같은 놈들! 그깟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해?”
우리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담당을 어떻게 죽일까 고민했다.
그러나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라는 말을 듣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일이 있구나!
자고로 도적의 소굴에는 죄 없는 사람들이 붙잡혀 있다.
대부분 그들은 강제로 끌려왔다.
녹림구채의 대호채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잡혀 온 사람들 역시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을 생각하면 독을 마음껏 쓸 수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죄 없는 사람들까지 중독된다.
그러나 대안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당가의 혈족이자 독봉이다.
그 유명세는 결코 돈으로 바꿔서 얻은 게 아니다.
머릿속엔 독에 대한 무수한 지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에선 이름도 모를 회귀한 독도 있었다.
“허어.”
붙잡힌 사람들을 진정시킨 주서천은 바깥에 나오자마자 펼쳐진 광경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아귀독(峨鬼毒)이라 했나, 사람이라면 몰라도 굶주린 맹수들을 대상으론 참으로 무시무시하구나.”
아귀독은 이름에 걸맞게 굶주림이 끊이지 않는 독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렇게 쓸모 있는 독은 아니었는데, 이는 그 양이 비효율적으로 많이 들어서 그렇다.
성년을 중독시키려면 무려 서너 근이 드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효능이 미미했다.
굶주려서 먹을 걸 찾게 되고 힘이 없다는 정도일 뿐이지, 눈이 홱 돌아가서 인륜을 져 버릴 정도가 되려면 최소 몇 관 정도는 소모해야 한다.
독에 드는 재료가 그리 희귀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노력을 들일 정도로 쓸모가 있지도 않았다.
차라리 정신에 이상이 생기는 독을 사용하거나 남만이나 혈교의 주술을 이용하는 게 더 빠르다.
그러나 이 아귀독은 특이하게도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 이상할 정도로의 뛰어난 효력을 발휘했다.
대호채에서 오랜 시간 동안 조련한 맹수들조차 이성을 잃고 날뛴 것이 바로 이 아귀독 때문이었다.
밤이 지나고 동이 텄을 무렵.
주서천은 당혜에게 아귀독을 받아 대호채에 잠입했다.
유령선공이 있어 들키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고, 뇌옥을 찾아다니면서 아귀독을 뿌렸다.
그 와중에 사람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준비를 끝낸 뒤에는 곧장 우리를 열었다.
“누구냐!”
혼란을 틈타 정문으로 향하던 중 녹림도와 마주쳤다.
“주서천!”
솔직하게 대답해 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녹림도가 급히 칼을 꺼내 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소매에서 비수가 물 흐르듯이 빠져 나와 쏘아졌다.
“컥!”
녹림도의 고개가 꺾이듯이 뒤로 젖혔다.
화살처 럼 쏘아진 비수가 목에 꽂혀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침입자닷!”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주서천이 머리를 들었다.
정문 인근에 설치된 망루와 경종이 보였다.
한 곳이 아니라 두 곳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다.
눈동자를 굴려 그 옆을 살폈다.
정문과 이어진 벽 위에서 활의 시위를 당기는 녹림도가 보였다.
“어딜!”
지면을 박차 도중에 방향을 꺾는다.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주서천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왼팔을 휘두르자, 그 안에서 빛과 더불어 비수가 뿜어져 나왔다.
“끅!”
녹림도가 활을 쥔 채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가슴에 비수가 꽂힌 고통보다 낙하하는 두려움이 컸다.
그걸 보자마자 마음이 급해진다.
용천혈에 내기를 주입해 속도를 올렸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녹림도가 떨어지는 곳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간발의 채로 잡아챈 활을 확인한다.
당연하지만 죽어 버린 녹림도가 걱정스러워서 속력을 낸 게 아니다.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대충 건다.
피융!
화살이 시위에서 떠나며 파도처럼 출렁인다.
내기를 실온 덕에 바람의 저항을 적게 받았다.
그다지 집중을 하지 않았음에도 표적에게 향한 길은 탄성을 내뱉을 정도로 정확하면서도 깔끔했다.
“커억!”
우측 망루 위에 서 있던 녹림도에게 명중했다.
“죽어랏!”
좌측의 망루에서 살의가 느껴진다.
시선을 옆으로 돌려 보니 화살이 이 쪽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주서천은 당황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화살을 하나 날리고, 연달아 쏘았다.
팟!
화살이 아래에서 위로 사선을 그었다가, 아래로 쏘아진 화살과 부딪쳤다.
“말도 안 돼!”
녹림도가 입을 떡 벌렸다.
급습을 노리고 날린 화살인데, 그걸 마찬가지로 화살을 쏘아서 막았다.
전설 속에 나오는 신궁(神弓)이다.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녹림도는 연달아 날아온 화살에 의하여 비명과 함께 망루 아래로 떨어졌다.
더 이상 망루에 감시자들이 없다는 걸 확인한 주서천은 정문을 열었다.
“가자!”
문이 열리자마자 앞장 선 장홍이 튀어나왔고, 그 뒤로 토벌대가 줄줄이 따라서 산채 안으로 들어왔다.
화산파, 금의검문, 당가의 무인들이었다.
“금의검문은 인질들을 구출한다!”
초련이 금의검문의 무사들을 이끌고 흩어졌다.
“화산파는 진격한다!”
장홍과 장서은이 지휘를 능숙하게 했다.
강호의 선배인 만큼 수선행 도중 다양한 것을 배웠다.
낙소월도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지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검을 휘두르는 데 힘썼다.
“크아아악!”
“치, 침입자다!”
대호채 입장에선 첩첩산중이고 설상가상이었다.
호랑이만으로도 심각한 상황에서 침입자까지 나타났다.
“당가는 주변을 정리한다.”
당혜가 차가운 눈초리로 주변을 슥 훑어봤다.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굶주린 호랑이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호랑이는 토벌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근처에 있어도 스리슬쩍 피해 갔다.
아귀독을 사용한다는 시점부터 짐승에게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악취가 나는 분을 발라 대비했다.
“가자-!”
“와아아아아!”
대호채의 상황이 급박해졌다.
미쳐 날뛰는 호랑이에 의한 피해도 작지 않았지만, 방금 전 정문이 열리며 들어온 침입자가 문제였다.
열댓 명도 아니고 대략 봐도 오십이 넘는다.
들려오는 보고에 의하면 실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썅!”
대호채주, 산혈호(山血虎) 과달륵의 머리 위로 퍼런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었다.
“어흥-!”
과달록의 분노를 대변하듯 호랑이 울음소리가 산채를 가득 메웠다.
그러나 좋지만은 않았다.
“아아악!”
“채주! 채주! 살려 주십시오!”
산채에 곳곳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는다.
머리를 드니 멀리서부터 수하들이 도망쳐 오는 게 보였다.
그걸 본 과달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콰지직!
“끄아악!”
도망치던 녹림도가 결국 붙잡혀 머리 째로 뜯겼다.
뜯겨진 목 사이에서 피가 솟구치면서 주변을 덮었다.
과달록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앞으로 걸었다.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호랑이가 그걸 느끼곤 과달록에게 덤벼들었다.
“감히 주인에게 덤벼들다니!”
그러나 과달록이 누구인가.
대호채주이자 천하백대고수인 산혈호다.
과달록은 허리춤의 칼조차 뽑지 않고, 얼마 전까지 귀여워하던 호랑이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꼈다.
우드득!
“허억!”
오줌을 지린 채로 도망쳤던 수하가 숨을 멈췄다.
‘채주가 괴물이라 하더니 진짜구나!’
과장해서 집채만 한 호랑이가 단숨에 죽었다.
도저히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뭣들하고 있어!”
과달륵이 화풀이하듯 호랑이를 발끝으로 차 버렸다.
목이 꺾인 호랑이가 날아가 지면을 굴렀다.
“주인에게 송곳니를 보인다면 봐줄 것 없다! 전부 죽여 버려라!”
“치, 침입자는 어떻게 할까요?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예사롭지 않으면 도망칠 생각이냐?”
과달록이 눈을 번뜩이면서 노성을 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꿀꺽!
괜히 심기를 건드려 호랑이의 먹이로 던져지고 싶지는 않았다.
“뇌옥에서 식량들 꺼내 와서 인질로 써 보고, 안 통하면 알아서 싸워! 어차피 수적으로 이쪽이 위다!”
노략질을 위해 녹림도 대부분이 바깥에 나가 있지만 그래도 삼백 명 정도는 산채에 남았다.
그러나 그 삼백여 명 중 백여 명이 맹수들에 의하여 줄어든 것을 과달록은 뒤늦게 깨달았다.
화산의 검수들에게 물러서는 일 따위는 없었다.
검을 휘두르면 녹림도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러나 완전히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수적으로 차이가 나다 보니 내공의 소비가 빨랐다.
그리고 그것을 주서천만이 유일하게 눈치했다.
‘사대제자, 그것도 대다수가 경험이 없다 보니 조절할 줄을 모르는군.’
연화각의 사형제들은 알아서 조절해서 괜찮았지만, 그 외의 제자들은 대다수가 자중이란 걸 몰랐다.
근처에서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신경 쓰였고, 그 외의 쏟아지는 공격에 힘이 들어갔다.
“자칫 잘못하면 내공을 전부 소진할 수 있으니, 중앙의 사형제들께서는 이를 신경 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중앙을 향해서 경고를 던지자 화산파의 움직임이 미미하게 변했다.
화산파의 공세가 줄어들자 쓰러지는 녹림도의 속도도 떨어졌으나, 그래도 태세가 안정적으로 변했다.
“악! 소매 안의 매화! 화산파다!”
시간이 지나자 녹림도가 그제야 눈치를 챘다.
“크어억!”
“당가도 있다!”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거나, 상처를 입고 도망치려던 녹림도가 목이나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혈색이 시커멓게 물든 것을 보니 중독된 것이 틀림 없었다.
일련의 무리가 전장 곳곳을 누비면서 무언가를 뿌리거나 혹 암기를 던지자 그 정체를 알아냈다.
“화산보다 못했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오늘 잠은 다 잤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당혜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당가의 무사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지는 것을 싫어하며 자존심이 상당한 당혜답게 누가 말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경쟁심을 불태웠다.
당혜는 중앙에서 조금 벗어났으나, 홀로 앞으로 나서서 주변의 녹림도를 한꺼번에 상대했다.
“크아아악!”
“이 계집년이!”
“아악!”
당혜의 손에 자비란 건 없었다.
봉황이 날갯짓하듯 손을 휘두르자 소매 안에서 무수한 독침이 튀어나와서 주변을 뒤덮었다.
가까스로 중독을 피한 녹림도가 가까이서 도를 휘두를 때는 당문의 금나수를 이용해 목을 낚아챘다.
“커허어억!”
녹림도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새하얀 손가락이 닿은 부위가 타오를 것처럼 뜨거워졌다.
여자에겐 그다지 통하지 않지만, 남자일 경우 독기를 보내 지닌 양기를 과하게 불려 화상을 입힌다.
목이 타들어 가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찌 저리 끔찍할 수가!”
“독봉에게 다가간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더니, 정말이로구나.”
“적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이봐, 사제. 아까 전에 당가가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말 취소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사제도 저렇게 될지 모르거든.”
화산파의 제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들도 정파인지라 은연중에 독과 당문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독의 무서움을 눈앞에서 보고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자 인식을 조금 고칠 수 있었다.
“화산파랑 당가라고?”
“단순한 습격이 아니잖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껴 있는 것만으로 녹림도의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인질을 데려와라!”
수염을 아무렇게나 기른 산적이 외쳤다.
기도를 보아하니 하수는 아니었다.
대충 봐도 일류가 넘는다.
“예, 부채주!”
아니나 다를까 대호채의 부채주였다.
뇌옥에 비교적 가까이 있는 녹림도들이 움직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헐레벌떡 튀어나왔다.
“부, 부채주! 뇌옥에도 누가 있…… 크아악!”
녹림도가 누군가에게 등을 베이며 쓰러졌다.
“웬 놈들이냐!”
부채주의 목소리가 불안감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화산파와 당가만 해도 벅찬데, 여기서 더 있다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만 아니기를 빌었다.
“금의검문의 질풍십객, 초련 님이시다!”
처음에 봤을 때는 근육이 워낙 대단하여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를 들어 보니 여자였다.
“휴우!”
부채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심하는 것이 일렀다.
금의검문이라는 이름이 걸렸다.
‘금의검문이라고?’
얼마 전에 녹림, 아니 적림에서 회의가 있었다.
금의상단이 보복을 목적으로 토벌대를 결성해 무사들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인솔자가 문제였다.
부채주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그 시선은 화산파 무리에 고정됐고, 무언가 찾는 듯 바쁘게 움직였다.
“초련! 보고!”
주서천이 부채주는 무시한 채로 초련에게 외쳤다.
초련이 주서천을 보고 엄지를 들었다.
“확보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대장. 간수도 적어 손쉽게 정리했소. 마음껏 날뛰시오!”
“오냐!”
전황을 바쁘게 살피며 명령을 내리는 것도 끝이다.
금의검문이 인질의 보호로 참전하지 못하겠지만, 상황이 워낙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흘러가 상관없다.
대호채의 피해가 생각 이상으로 커서 좋았다.
“대호채의 부채주! 긴말 하지 않겠다!”
주서천이 앞으로 걸어 나가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목숨이 아깝다면 항복해라. 그러면 살려 주마!”
“새파란 애송이 따위가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떠들어대는구나!”
부채주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대신 누군가를 반기는 표정을 지었다.
“산혈호!”
초련이 과달륵을 알아봤다.
“산혈호, 과달륵……”
장홍이 검에 쥔 손에 힘을 꽈악 주었다.
약간의 여유조차 사라지고 대신 긴장감이 감돌았다.
울긋불긋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은 과연 검이 들어갈까 의문이 들었고, 팔뚝은 통나무처럼 굵었다.
이곳에 오면서 누구를 죽였는지 몰라도 살갗이 피로 뒤덮여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대호재의 채주인 과달록은 단순한 산적 나부랭이가 아니다.
천하백대고수에 드는 강자다.
“만나서 반갑다, 산적. 주서천이라고 한다.”
“……!”
부채주가 숨을 삼켰다.
주변의 녹림도도 놀랐다.
“매화정검? 흥!”
과달륵이 콧방귀를 꼈다.
“주상철인가 뭔가 하는 놈이 상인에게 영혼을 팔아 하인을 자처한다던데, 그게 네놈이렸다?”
“이놈! 어따대고 지껄이느냐!”
장홍이 자기 일처럼 분노를 터뜨렸다.
과달륵의 동공이 장홍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홍에게는 오래 머물지 않고, 옆의 낙소월로 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슥 훑어본 뒤 얼굴에 고정한다.
입가에는 음욕이 가득한 미소가 나타났다.
“화산에 절세미녀가 있다곤 듣지 못했는데 , 이름이 무엇이냐? 내 특별히 첩으로 삼아 주도록 하마.”
낙소월이 마음에 안 드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내 이름은 주서천이다.”
주서천이 말했다.
“호, 저기 한 성깔 할 것 같은 년도 미색이 보통이 아니로군. 혹시 내 눈을 호강시키려 왔느냐?”
당혜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 듯 독기를 끌어 올렸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아지랑이가 주변을 덮자, 꼿꼿하게 자라난 잡초가 시커멓게 바스러졌다.
“내 이름은 주서천이다.”
주서천이 말했다.
“좋아, 내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주도록 하마. 여자들을 넘긴다면 사내놈들의 목숨만은 내버려 두겠다.”
“헛소리!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감히 이분이 누구신지 아느냐! 독봉이신 당혜 아가씨다!”
원대식의 서술 어린 목소리가 전장에 울렸다.
“그리 벌주를 마시겠다 하면……”
“내 이름은 주서천이다.”
“입 닥쳐라, 매화정검! 네까짓 놈의 이름 따윈 그다지 궁금하지 않으니 정정하지 않아도 된다!”
과달륵이 끝내 참지 못하고 반응했다.
“나름의 상냥함이라고 생각해라. 이제 곧 죽을 터인데, 누가 죽였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뭐라고? 크하하하!”
과달륵이 허리까지 젖히면서 크게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미친놈!”
“정파의 후기지수 아니랄까 봐 오만방자하구나!”
“클클클! 넌 이제 죽었다!”
대호채의 녹림도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지하 밑까지 곤두박질쳤던 사기는 살아난 지 오래다.
산혈호가 나타난 순간부터 없던 힘이 솟아나고, 도망치기 급급했던 눈초리에는 살의가 넘쳐난다.
설사 이 자리에 오룡삼봉이 있다고 한들, 채주인 과달륵과 비견될 정도는 아니다.
“어쩌다 운이 좋아 산화일장을 이긴 것을 가지고 세상을 자기 밑에 둔 것처럼 행동하는구나, 건방진 놈.”
스르릉.
과달륵이 몸집과 어울리는 대도(大刀)를 뽑았다.
도신이 햇빛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빛났다.
“아무래도 독봉과 협공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게 큰 착각이란 걸 깨닫게 해 주마.”
산만 한 몸집에서 살의가 뿜어져 나와 몰아쳤다.
그동안 살해한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세 자릿수가 넘는 만큼, 살의의 농도도 짙었다.
녹림도라 하지만 천하백대고수라는 이름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걸 증명하듯, 공기부터 달라졌다.
토벌대원들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대형을 바꿨다.
화산파는 검진을 준비하고, 당가도 숨겨 두었던 비장의 독과 암기에 손을 옮겼다.
과달륵은 살기로 가득한 폭풍우의 중심 속에서 자신의 대도를 크게 휘두르며 외쳤다.
“정파의 위선자들이여, 대호채의……”
“거참, 말 진짜 많네!”
주서천이 과달륵의 말을 끊고 튀어나갔다.
지면을 쳐 내고 쏘아져 나간 그 몸놀림이 워낙 순식간이었는지라 남들에게는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과달록도 설마하니 주서천이 급습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 기겁하면서 공력을 끌어 올렸다.
째앵!
금속끼리 부딪치면서 마찰음을 토해 냈다.
‘무, 뭔!’
과달륵에게서 보이던 여유가 싹 사라졌다.
그 대신 당혹감만이 남았다.
“내가 조금 바쁘다. 그러니까 시간 길게 끌지 말고 얼른 끝내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기가 검을 두른다.
얇은 막이 점차 두꺼워지고 단단해졌다.
과달륵의 눈이 보름달만 해졌다.
‘거, 검강?’
십여 년 동안 꿈꿔 왔다가 포기한 것이 눈앞에 있다.
내공을 힘껏 끌어 올렸지만 강기를 막지 못했다.
마을에서 소문난 장인들을 데려와 만들었던 애도(愛刀)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절단되려 한다.
그걸 본 과달륵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급히 말했다.
“이보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
서걱!
“으악!”
과달륵이 볼썽사납게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위엄 어린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대도도 동강 난 채 바닥에 떨어졌다.
“……?”
한껏 과열된 열기가 찬물에 적셔졌다.
함성을 내지르려던 전장은 차디찬 적막감으로 가득 찼다.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토벌대도 녹림대도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뿐.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누구보다 어안이 벙벙한 건 과달륵이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천하백대고수, 대호채의 채주 산혈호가 아닌가!
그런데 새파란 애송이에게 반격도 하지 못하고 당했으며, 무엇보다 믿을 수 없는 건 적의 검강이었다.
‘화경이라고?’
상천십좌조차 화경에 오르는 데 삼십 년이 넘었다.
약관 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영역이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도 불가능하다.
과달륵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 눈앞에 놓인 상황을 부정했다.
“그래, 사술이 틀림없다!”
과달륵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눈을 부릅떴다.
“매화정검 이 비겁한 새…… 켁!”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발이 날아와 가슴을 찼다.
“바쁘니까 시간 길게 끌지 말라니까. 너에게 물어볼 게 많으니 괜한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자.”
과달록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수하들 앞에서 형편없이 넘어진 대호채주라니.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다.
토벌대와 녹림도 역시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주서천이 사라졌다가 나타나더니 과달륵이 누웠다.
사형제들의 눈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주서천의 무공을 전부 알고 있는 사람들만 놀라지 않았다.
“예로부터 정신 못 차리는 악인에게는 몽둥이가 약이었다.”
퍼억!
“케헥!”
과달록의 입에서 비명이 절로 나왔다.
‘쌰, 썅!’
아프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아무렇게 휘두른 것 같지만 실은 내공을 실어서 후려쳤다.
고통을 최소화하려고 내공을 끌어올리려 해도 혈도를 골라 때리는 탓에 집중이 흐트러져 불가능했다.
주서천은 과달륵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대호채주는 나 주서천에게 패배했다!”
녹림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몇몇은 벌써부터 눈치를 보며 도망칠 틈을 찾고 있었다.
한편 토벌대는 허탈해했다.
이제 막 격렬한 공세를 펼치려던 차 모든 것이 끝났다.
‘아니, 주서천이 저렇게 강했어?’
‘산화일장에게 이긴 건 운이 아니었구나!’
‘주서천 사형이 장문인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더니, 깨달음을 얻고 저리 강해진 건가? 부럽다.’
‘천하백대고수가 저렇게 허무하게 패배할 줄이야!’
매화정검의 유명세는 크지만, 그 무공을 목격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렇다 보니 주서천의 무공에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화산파가 특히 그랬다.
주서천이 워낙 혼자 행동하니 무공을 보기는커녕 만나 본 적도 없었다.
‘대호채가 끝났구나!’
챙그랑!
녹림도가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의 손에서 병장기가 하나둘씩 떨어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대협!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부채주가 지면에 머리를 부딪치며 애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