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일련의 무리가 금의상단을 떠났다.
주서천이 무리를 이끌었고 제갈승계가 참모로 참여했다.
그리고 금의검문에서 이십 명을 데려왔다.
또한 눈에 보이진 않지만 유령들도 따라붙었다.
“이번에도 같이 가게 됐소.”
초련이 씩 웃었다.
“흐흐, 도련님. 우리 연 좀 많지 않나?”
초련이 제갈승계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새집처럼 엉망으로 만들었다.
“으으! 이 무식한 아줌마가 그냥!”
제갈승계가 진저리 난다는 듯이 화를 내자, 초련은 껄껄껄 하고 호탕하게 웃으면서 넘겼다.
“설마 저희만으로 적림십팔채에 쳐들어가는 겁니까?”
금의검문의 무사 중 하나가 불안한 듯물었다.
“그럴 리가.”
주서천이 고개를 저으며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중경에 가면 합류할 사람들이 있으니 걱정 마라.”
“꿀꺽.”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안심되면서도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만큼 싸움의 규모가 커진다는 뜻이니까.
무곡이라는 괴물에게 훈련받아 강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적림십팔채는 옆집 이름이 아니다.
“그 양반이 따라오지 않은 게 아쉽군.”
초련이 산동 쪽을 힐끗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질풍십객 역시 상단에 머무를 때는 무곡에게 약간의 가르침을 받았다.
처음에 그를 봤을 땐 대단히 여기지 않았다.
질풍십객이 된 이후로 무공만큼 자신감도 늘었다.
하지만 괜스레 자존심을 세워 덤볐을 땐 지옥을 맛보았다.
그때 또 하나의 괴물이란 걸 알게 됐었다.
“상단을 지켜야 하니까.”
금의상단은 전과 달리 약해져 있다.
아직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심각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상계에서 금의상단의 이상을 느끼고 영역을 넘보는 승냥이들 때문에 성가셨다.
언젠가 곤혹스러운 일이 있을 것이고, 그때는 무곡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부러 남겼다.
무선화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무공도 모르는 그녀에겐 너무나 위험한 여정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간다 하면 무곡도 따라올 터.
간곡하게 요청해도 동행할 수는 없었다.
“형님, 저희는 누구랑 합류하는 겁니까?”
“가면 안다.”
산동에 도착해서 사정을 듣자마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전서구를 몇 마리씩이나 보냈다.
“여러모로 숨기는 것이 많은 사형은 놀라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니까요. 그렇죠?”
낙소월이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농담의 무게가 작지 않다.
심지어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크, 크흠.”
주서천이 헛기침을 흘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사매, 내버려 둬서 정말로 미안해.”
며칠 전, 상단주에게 자세한 사정을 듣고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낙소월을 찾아가서 재회했다.
그때의 낙소월은 ‘강호행을 함께하기로 했으면서 절 내버려 두고 혼자 풍류를 즐기신 매화정검 대협 아닌가요?’ 라고, 살 떨리는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이후 정주에서나 소림에서 있었던 일을 적당히 거짓을 섞어 사정을 설명하고 나서야 용서를 받았다.
주서천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찌할 줄 모르자, 낙소월이 재미있다는 듯이 쿡 하고 작게 웃었다.
“농담이에요. 화는 다 풀렸어요. 원래는 좀 더 삐쳐 있을까 했지만, 그러면 사형이 너무 불쌍하니까요.”
낙소월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조차 예뻐서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한편 산동을 떠난 일행을 주시하는 이들이 있었다.
최대의 적, 암천회였다.
“천권성 쪽에서 연락입니다. 금의상단에서 매화정검이 출발했다고 합니다.”
붓을 막 든 천기가 눈을 매섭게 떴다.
“매화정검과 금의상단주가 친분이 제법 있다 하더니 정말이군. 뒤늦게 상황 파악하고 발버둥치는 건가.”
주서천이 예상한 대로, 암천회는 군자금을 끌어오기 위하여 금의상단을 손안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몇 번의 제안이 있었음에도 이의채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수뇌는 심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빼앗기로 마음먹고 습격에 나섰다.
“회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이참에 일망타진할 수 있겠구나.”
매화정검, 주서천!
그 이름을 어찌 잊으랴.
잘난 정의심을 내세워 혈근경을 불태워 모처럼 계획한 걸 망친 장본인이다.
마음같아선 그날 곧장 잡아와 족치고 싶었으나 도망치듯이 화산파에 들어가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강호로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고, 드디어 때가 왔다.
“준비는 해 두었으나 부족한 검이 조금 흠이군.”
천기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불과 얼마 전, 암천회가 천선을 잃으면서 정보 공백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됐다.
그로 인해 보통 바쁜 게 아니다.
천기도 잠까지 줄여 가면서 천선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 힘썼다.
무엇보다 좀 더 우선으로 할 일이 산더미다.
과거에 혈근경을 불태워 모든 것을 망친 것은 괘씸하나 심혈을 기울일 정도는 아니었다.
천기는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별하는 인물이다.
무엇을 더 우선순위에 놓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치밀한 성격만큼 준비는 빈틈이 없긴 했으나, 그래도 약간의 불안감이나 아쉬운 점이 많았다.
다만 그것은 신경 쓰여도 어쩔 수 없이 양보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최근에는 소림에 반야신공까지 전달했다지? 하나부터 열까지 온갖 훼방을 놓는구나. 어릴 적부터 기연이 많더니 운만큼은 타고났군.”
천기는 혀를 차면서 봇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다만 그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찝찝해 보였다.
‘과연 정말로 이것이 우연일까?’
넘어가려고 해도 뒷간에 다녀오고 뒤를 안 닦은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다.
마음이 자꾸 걸렸다.
의아함이 의심을 낳고, 생각이 꼬리를 물려 하지만 이성이 나타나 이럴 시간 없다면서 타박했다.
조금만 생각하면 무언가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암천회의 주요 일이 떠올라 진행할 수가 없다.
가슴이 꽉 막힌 이 기분이 싫었으나, 천기는 입맛을 다시면서 잡념을 떨쳐 내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주서천은 산동과 하남을 지나 섬서에 당도했다.
화산이 보였으나 들르지는 않고 곧장 남하하여 중경을 앞에 둔 안강(安康)에 도착했다.
객잔을 잡아 여장을 풀었을 때, 문이 열리면서 방문객이 찾아왔다.
“장홍 사형, 장서은 사저!”
낙소월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시선 끝에 서 있는 건 소매에 매화가 그려진 검수들이었다.
그중 앞의 남녀가 눈에 익었다.
과거 연화각 출신인 동시, 후에 두 사람보다 앞서 강호에 출두했었던 장홍과 장서은이었다.
그 뒤로도 화산파의 제자들이 따라 들어왔다.
“사제!”
장홍이 환하게 옷으면서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형.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너야말로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과거 앳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는 사내다움이 물씬 풍기는 장홍이 씩 웃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엮이다 보니 주서천은 전이나 지금이나 혼자가 편했기에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화산파 식구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 외에도 여러모로 할 일이 많았는지라 아는 사람들과 영 만날 기회가 없었다.
강호에서 보는 것도 사실 이번이 처음이다.
전에는 칠검전쟁으로 인한 귀환령 때 화산에서 봤다.
“요 녀석, 낙 사매를 독차지하려고 한 건 아니지?”
장홍이 옆구리를 찌르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는데, 그 눈초리에서 과거의 장홍을 엿볼 수 있었다.
활기와 더불어 약간의 장난기는 여전하다.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십시오, 사형. 그보다 이번에 사저와 함께 매화검수로 확정됐다고 들었습나다.”
“그래. 운이 좋았다.”
매화검수란 이름에 좌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까이에 있던 금의검문의 무사들은 헉 소리까지 냈다.
‘화산파의 정예 검수!’
그 이름을 어찌 모르랴.
소림에 나한이 있다면 화산에는 매화검수가 있다.
오직 이십사 명에게만 허락된 그 이름은 전대의 고수들 또한 쉬이 여길 수 없는 무게였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장홍과 장서온이란 이름에서 무언가를 떠올린 듯 무릎을 탁 쳤다.
‘매협검(梅俠劍) 장홍, 옥매화(玉梅花) 장서은!’
화산에 후기지수가 매화정검만 있는 건 아니다.
그가 워낙 화제가 되어 다른 제자들의 이름이 잠시 묻혔던 것뿐, 당연히 전부터 이름을 떨친 제자들도 있었다.
장홍과 장서은이 그 안에 있었다.
칠검전쟁이 벌어지기 전만 해도 명문대파의 자제들과 어울리며 후기지수로서 이름을 날렸다.
전에 들렀던 귀주에도 재방문해 사마외도와 싸워 충분한 공을 세웠다.
두 사람이야 어렸을 적부터 기재였고, 또한 둘 다 괴물 같은 사제에게 자극을 받으면서 노력을 했다.
그 결과 강호에 출두했을 무렵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수준이 되었다.
비록 오룡삼봉에는 들지 못했으나, 그 이름은 나름 알려져 있다.
“설마하니 두 분께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화산에 도움을 요청하긴 했으나, 와 봤자 사대제자 중 막내들이라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은 사적인 일에 가깝다.
주서천이 주변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금의상단과 어울렸기에, 그 연은 조금만 조사해도 알 수 있다.
아니, 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현재 적림십팔채가 금의상단을 노리는 건 소문이 나 있지 않나.
그 상태에서 적림도를 토벌하겠다고 연락한다면 어떠한 의도일지는 안 봐도 눈에 훤하다.
적림십팔채가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지원을 보내기에는 적절한 명분이 되지 않아 큰 기대는 안 했다.
“많아 봤자 열 명 언저리라고 생각했는데……”
장홍과 장서은까지 합해 스무 명이었다.
“적림에게는 빚이 있으니까.”
“그래. 연화각에 있을 때의 기억을 잊었니?”
과거, 강호에 처음으로 나왔을 때의 일.
귀주에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화산으로 돌아가던 중 장강에서 수적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날 주서천이 급류에 휘말려 행방불명이 됐고, 화산파는 어린 제자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후에 다행히 주서천이 되돌아오기는 했으나, 당시에 화산은 적림에 이를 갈며 원한을 품었다.
습격도 열 받는데 성년도 되지 못한 제자, 그것도 자랑하는 인재 기관인 연화각 출신이 아닌가.
“그래도 매화검수를 보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하여간 주 사제는 전부터 띄워 주는 데 익숙하네. 내정 받기는 했지만, 아직 매화검수는 아니야.”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나오지 못했을 거야.”
적림십팔채를 우습게 여길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매화검수를 내보낼 정도의 수준은 되지 않는다.
“예검수(豫劍手)라서 실망했다면 미안하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서천은 장홍과 장서은이 와 줘서 고마웠다.
무공이 강해서만 반가운 것이 아니라, 화산파에서 친하게 지낸 사형제와 함께하는 것이 기뻤다.
전생에선 언제나 혼자였지 않은가.
이렇게 사문의 사형제와 함께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한편, 주서천이 사형제들과 재회를 만끽하고 있을 무렵 적립십팔채도 그 소식을 듣게 된다.
“금의검문이 토벌대를 보내?”
한창 금의상단을 털고 있으니 그 이름을 모를 리 없다.
각지에서 약탈을 시도하며 그들과 싸우고 있지 않나.
그러나 그 사이에 더 신경 쓰이는 이름이 보였다.
“주서천과 제갈승계……”
그 이름을 모를 리 없다. 화산파와 제갈세가와 척을 지게 만든 원인이 되는 장본인이 아닌가.
약 칠 년 전, 무림맹과 사도천이 귀주에서 영역 쟁탈전을 벌였다.
결과만 말하자면 무림맹의 완승이었다.
피해가 치명적인 정도는 아니었으나, 사도천주는 ‘완패’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이대로 당하고만 싶지 않았던 사도천주는 당시 주역이었던 화산파와 제갈세가를 함정에 빠뜨렸다.
당시 일행의 귀환행에는 장강이 껴 있어서 수림구채가 마침 제격이었는지라 그들에게 맡겼다.
하나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설마하니 십사검협이 장강에서 도수창병을 이길 줄 누가 생각했겠나.
“그때 죽여야 했어!”
나중에 기적적으로 생환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그런 어린아이 따위 그다지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매화정검이라는 그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 적림십팔채는 긴장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구파일방, 화산의 제자가 원한을 갖고 고수가 됐다면 그냥 넘길 수는 없다.
“흥, 뭐 그리 호들갑이요?”
“영웅이라 해 봤자 결국은 애송이. 듣자 하니 숫자도 적다 들었소.”
“산이나 강이 아니라면 모를까,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러 온다는 데 무서울 것 없지!”
“어쩌면 괜스레 경계하게 만들어 바깥에 나가 있는 애들을 돌아오게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지.”
금의상단이 가진 것이 보통이 아니다.
하나만 털어도 한동안 떵떵거릴 정도로의 금액이 나온다.
채주들은 이 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지레 겁먹고 수하들을 불러오면 그게 더 손해다.
“남아 있는 애들로 대응하면 그만!”
“고작 한 사람 따위에 겁먹고 숨으면 어찌 거시기 달린 사내라 할 수 있는가?”
“암! 그렇지! 우리가 누구인데!”
“산과 강을 지배하는 적림도가 아닌가!”
“하하하! 그럼! 여봐라! 술과 여자를 대령해라!”
* * *
안강에서 화산파의 제자들과 합류한 토벌대는 곧장 남하하여 중경의 북부 산지에 도착했다.
참고로 그 와중에 몇몇의 도적들과 길거리에서 마주했는데, 굳이 힘쓸 필요 없이 간단하게 처리했다.
“삼림 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제갈승계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갈 길을 떠올리니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괜히 이곳에 녹림도가 자리 잡은 게 아니었다.
중경은 대체로 산지와 산림뿐. 북부는 특히 더 그렇다.
날이 어두워지자 토벌대가 적당한 곳에 자리 잡아 여장을 풀 때 즈음,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나!”
초련이 앞장서고, 금의검문 무사들이 제갈승계를 중심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화산의 제자들 역시 눈을 매섭게 뜨며 검과 같은 기세를 내뿜었다.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곧장 반응하는 그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주서천이 손을 들어 제지하자, 수풀 속에서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의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오! 대식아!”
그 얼굴을 본 주서천이 반갑다는 듯이 인사했다.
“무례한 것은 여전하구나, 주서천! 누가 대식이냐!”
대식 , 아니 원대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사형께서 아는 분인가요?”
낙소월이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물었다.
그러자 원대식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자고로 사람은 미인에게 친절하기 마련이다.
“당가의 무사인 원대식이라 합니다. 부족하나 독봉 아가씨의 곁을 지켜 드리고 있습니다.”
“독봉!”
토벌대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가씨께서 기다린다, 주서천.”
원대식은 한껏 인상을 쓰더니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턱짓을 했다.
토벌대는 짐을 다시 챙기곤 그 뒤를 따라갔다.
“사형, 당가에 도움을 청하셨어요?”
낙소월이 곁에 붙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 뒤를 따르던 일행들도 귀를 쫑긋 세워 집중했다.
오대세가인 당가가 합류한다면 든든하지 않겠나.
“그건 아니야.”
“그러면 혹시……”
“독봉.”
“봉추!”
슬픔뿐인 별호가 튀어나오자 가슴을 쥐어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에 그 별호를 필히 없애리라.
“사제, 설마 토벌 도중에 뒤통수를 맞고 싶어서 부른 건 아니라고 믿을게. 정말로 괜찮겠어?”
장서은이 소리 죽여 물었다.
혹시라도 원대식이 들을까 봐 눈치를 봤다.
봉추라는 별호에 대한 일화는 워낙 유명하다.
사람들은 주서천과 당혜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알고 있는 부분이 조금 잘못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혜가 주서천과의 내기에서 패배해 짙은 원한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무림인이라면 당가가 한을 품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다.
설사 같은 정파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장서은을 비롯한 일행은 그것이 걱정이었다.
“괜찮습니다. 독봉과는 화해했습니다. 그녀와 제법 친합니다.”
주서천이 가슴을 두들기며 호언장담했다.
“어서 와, 주사천.”
주서천이다.
“이런 그새 안 봤다고 이름을 잊어버렸네. 주철서.
사과의 의미로 내가 준비한 독약을 복용해 주겠어? 당신이 녹아내린 위장을 붙잡고 바닥을 구를 모습이 기대돼서 잠도 못 잤는걸. 이번에는 자신 있으니까.”
“……?”
토벌대는 독봉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미색에 넋을 잃었다.
독을 품었다는 것조차 하나의 매력이었다.
괜히 남자들이 위험을 감수하고도 독봉의 내기에 도전하는 게 아니다.
봉황의 아름다움은 대단했다.
‘따라오길 잘했군.’
‘히야, 진짜 미치겠다!’
낙소월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신경 쓰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심장이 떨리는데, 당혜까지 함께하다니.
비록 대화는 한마디도 하지 못해도 그녀들과 여행을 함께한다면 부러워 할 사내들이 줄을 서리라.
“잡설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주서천이 녹림 산채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준비는?”
“나흘 전에 도착해서 끝내 두었으니 걱정하지 마.”
“좋아.”
주서천이 흡족하게 웃으면서 토벌대에게 작전을 전달했다.
“이 앞에 녹림구채 중 하나인 대호채(大虎塞)가 있습니다. 날이 밝으면 습격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장,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소. 싸울 준비야 됐지만, 그래도 작전의 준비가 필요하니 말이오.”
모르고 싸우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는 크다.
작전이 없다면 불안할 것이고, 있다면 미리 말해 주는 편히 좋다. 그게 도움이 된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의견을 조율하느라 조금 늦어지게 됐다.
“그다지 어렵지 않으니 걱정 말도록.”
‘누가 여기에 숨어들었을지도 모르니까.’
지원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괜한 심술, 혹은 깜짝 놀라게 만들기 위해서 따위가 아니었다.
만약 당가, 특히 독봉이 참전한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암천회나 적림십팔채의 경계가 심해질 것이다.
방심하고 있을 때 치는 것이 상책(上策) 아니던가.
한바탕 날뛴다면야 상관없지만,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괜한 경각심을 만들 이유가 없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왕팔은 저잣거리에서 주먹질을 일삼던 잡배였다.
주로 얻는 수익은 백성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하나 그것도 잠시, 재수 없게도 관병의 가족을 건드렸다.
이후 뒷감당이 무서워 도망치듯이 뛰쳐나왔고, 떠돌아다니던 왕팔은 대호채에 몸을 의탁하게 된다.
그러나 그 생활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왕팔은 주먹질을 좀 하는 편이었지만, 그런 사람은 산채에도 널 렸다.
괜히 녹림구채가 아니었다.
벌써 이 년이 흘렀음에도 왕팔은 말단에서 막 벗어난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취급은 그저 그랬다.
납치해 온 여자들을 범하려고 해도 지위가 낮아 불가능했고, 손에 떨어지는 돈이나 술도 많지 않았다.
“육시랄, 언제까지 이렇게 보내야 하는지!”
왕팔이 걸쭉한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불평했다.
“히, 히익!”
쇠창살 안에 웅크린 사람들이 왕팔의 외침에 몸을 움찔 떨었다.
서로 껴안고 떠는 것이 안쓰럽다.
“크르르!”
뇌옥의 구석에서 심기 불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소리에 뇌옥에 갇힌 사람들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어 대며 공포에 질렸다.
“시펄 언제까지 이딴 짐승의 수발이나 들어 줘야 하나.”
대호채에서는 호랑이를 기르고 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열댓 마리나 된다.
그렇다 보니 드는 먹이가 보통이 아니다.
이 먹이를 구하는 데만 해도 산적들의 등골이 휜다.
웬만한 중소규모의 산채라면 엄두도 못 하지만, 녹림구채인 대호채면 어떻게든 구해 왔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불평이라도 마음껏 해 봐야지. 평소에 했다간 먹이로 던져지겠지? 퉤!”
대호채주는 인육에 맛이 들린 호랑이에게 사람을 던져 놓고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크허엉-!”
천둥이 내려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의 박력이었다.
소리만으로 몸이 경직된다.
“끅 끄흡……”
뇌옥에서 공포에 질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썅! 배고파서 또 지랄 나셨구만!”
왕팔이 인상을 팍 구기며 짜증을 냈다.
이 일을 시작한 지도 어언 일 년이 되어 간다.
들으면 척이다.
호랑이와 대화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울음소리 몇 가지를 분간할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어떤 놈울 고를까요……”
대호채의 말단이지만 납치당한 사람들에게 왕팔은 명줄을 쥔 염라대왕이다.
“흐, 흐아악!”
“꺄아악!”
뇌옥 안의 사람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벽에 달라붙으면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이것들이 미쳤나? 오늘따라 왜 이리 소란이야?”
먹이를 던져 줄 시간이 되면 괜히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떠들기는커녕 보통 조용해진다.
콰직!
“어?”
왕팔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 순간, 시야가 반 바퀴 회전했다.
그 몸은 바닥에 누운 것처럼 수평선을 그었다.
다만 몸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은 채 허공에 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파악하려 했으나 허리에서부터 덮쳐 오는 끔찍한 고통에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콰지직!
“끄, 끄아아아아아악!”
무지막지한 턱 힘이 허리에 압력을 가한다.
피부를 꿰뚫은 송곳니가 내장을 집어삼켰다.
몸을 발버둥 치려고 하자 호랑이의 육중한 앞발이 뼈를 부러뜨리며 짓눌렀다.
우득! 우드득!
소름 끼칠 정도로 섬뜩한 소리가 뇌옥의 내부를 가득 메웠다.
왕팔이 고깃덩이가 된 건 순식간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안은 채, 입을 꾹 다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크르르!
입가가 피투성이인 호랑이가 머리를 들었다.
주변을 압도하는 그 눈은 굶주림으로 사납게 빛났다.
호랑이는 먹이가 가득한 쇠창살 안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저 좁고 불쾌한 곳이 어디인지 잘 안다.
그간 자신을 가둔 곳이지 않나.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었다.
그러나 빠져나올 수 없었다.
배를 채울 수 있는 먹이가 있어도 꺼낼 수가 없다.
아쉽지만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어차피 먹이야 바깥에도 있지 않은가.
얼굴도 모르는 인간을 입에 털어 넣은 뒤, 위쪽으로 향했다.
“중 능으~I
一, 一-, .
“흐으윽!”
“끄흑!”
호랑이가 물러나자 사람들이 그제야 안도한 듯 뒤늦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천장이 꺼지면서 그림자가 뛰쳐나오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구해 드리러.왔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