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고는 혜만의 분노를 이해하나 또다른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영순위로 보고해야 할 신공의 전달 소식을 먼저 알리지 않은 죄는 확실히 크다.
그러나 그 전에 혈근경을 불태운 책임을 추궁하는 것까지 꾸중을 들은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반야선공도 중요하지만 소림의 씻을 수 없었던 치욕을 청산할 수 있었던 기회도 중요하지 않았나.
아무리 무림맹과 약조했다고 할지라도 강호의 은원 관계란 것이 있는데 천하의 소림이 그냥 넘어간다는 사실 자체가 홍고에게 있어선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보고를 생략하고 그를 따로 불렀다.
자신이 입막음한 승려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아무리 소림을 위해서라도 보고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죄를 저지른 것이니 반대로 옳은 행동이라 생각했다.
“나무아미타불.”
오늘 일어난 일은 면박을 충분히 각오하고 한 행동이었다.
그만큼 답을 듣지 못해 아쉬웠다.
“사부님 약조하신 것이 정말입니까?”
홍고가 실눈을 뜨곤 혜만을 힐끗 쳐다보며 묻자, 혜만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답하였다.
“주 시주와의 비무에서 이긴다면 내 네 죄를 감면해 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질문이든 할 수 있도록 허 해주마. 그러나 이기지 못한다면 주 시주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을 해소하고 사죄해야 할 게다.”
“아미타불.”
홍고가 반장하며 불호를 외웠다.
“그리되었으니 잘 부탁하겠소, 주 시주.”
“저야말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주서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포권으로 답했다.
“삼 초를 양보하겠소.”
홍고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비무의 시작 전, 혜만이 쉬이 이길 수 없다 경고했으나 홍고는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매화정검이 아무리 최근에 뜨는 신성이라곤 하나, 그 소문들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강호의 소문이라는 것은 으레 과장되는 법이며, 혈근경 쟁탈전 때 매화정검의 상대였던 산화일장도 그때는 이미 지쳐 있던 상태였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홍고에게 있어 윗 배분 외에 패배란 어불성설 그 자체.
한 번도 허가하지 않았던 영역이다.
심지어 구파일방 출신의 정식 제자이며 윗 배분인 고수를 이긴 적도 있었다.
강호에 나가 무수한 경험까지 쌓은 홍고에게 있어 주서천은 재능이 조금 뛰어난 후배에 불과했다.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주서천은 사양하지 않기로 했다.
‘힘 조절을 잘하자.’
전력을 다하면 일 초에 제압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지만, 그러면 홍고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향후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납득할 만한 승부를 보여 주는 편이 좋았다.
‘백보권승의 젊을 적 무위는 어느 정도나 될까?’
그래도 전생에는 영웅이었고 권의 초고수였다.
비록 젊었을 시절이라해도 우습게 보지는 않았다.
무심코 익숙해진 유령보를 펼치려다가, 자연스레 발걸음을 바꿔 신행백변으로 전환해 거리를 좁혔다.
“흡!”
그런데 그 속도가 보통이 아니다.
유령신공 덕에 은밀함도 더해져서 발걸음 소리조차 옅어졌다.
은연중, 아니 대놓고 주서천을 우습게 여기고 있던 홍고는 생각 외의 움직임에 상당히 놀랐다.
중의 코앞에 나타난 젊은 도사는 그가 놀라든 말든 손에 쥔 검으로 눈부신 빠르기의 찌르기를 날렸다.
어떠한 초식이 아닌 그저 찌르기에 불과했으나 화경이 내지른 만큼 그 힘과 속력이 보통이 아니다.
이에 홍고가 홈칫 놀라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침착을 유지하면서 금강상처럼 제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아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파앙!
검극이 유성처럼 궤적을 그려 내며 대기를 뚫는다.
그 끝에는 홍고의 흉부가 놓여 있었다.
하나 신기하게도 검극이 닿기 전, 분명 사정 내에 위치해 있던 홍고의 몸이 뒤로 스르륵 밀려났다.
아니, 밀렸다기보다 이동했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하수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홍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검극은 그 앞에서 멈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
주서천이 호,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소림의 절기이기도 한 금강부동신법은 분명 몸을 움직이는 법임에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산처럼, 그리고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고 기둥이 되어 정파를 받드는 것처럼 서 있는다.
주서천 본인 역시 무공의 수위가 낮았다면 그리 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눈엔 확실히 보였다.
‘피했다?’
한편, 그 장본인인 홍고도 놀란 건 매한가지였다.
삼 초를 양보한다 했던 그는 피할 생각이 아닌 막을 생각이었다.
피하는 행위 자체가 자존심이 상해서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우연인가?’
홍고는 주서천이 자기 아래라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하수라고 얕보진 않았다.
절정에 이르는 검수가 찌르기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다면 확실히 위협적인 일격이 나올 만하다.
‘아니, 전력이긴 한 건가?’
다음 초식이 곧장 이어질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주서천을 슥 훑어봤다.
일 초식이라 한다 할지라도 전력을 다했다면 땀방울을 내기 마련인데 호흡에서조차 변화가 없다.
어쩌면 생각보다 어려운 비무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불현듯 들었다.
‘공격으로 응수해야 한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그러나 삼 초를 양보한다는 말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후!”
주서천이 검을 회수했다 자세를 바꾼다.
몸을 살짝 낮추고 까치발을 섰다.
타앗!
흙먼지가 위로 치솟았다.
주서천이 밟고 있던 자리에 발자국이 움푹 들어가며 남았다.
화살처 럼 쏘아진 그 몸은 홍고와의 거리를 재차 좁히면서 날아가 지척까지 다가갔다.
전신에 기로 몸의 운동성을 활성화한 주서천은 나비처럼 날아서 홍고의 품 안으로 들어섰다.
이초식인 매화집무가 끝나자마자 이내 삼초식인 매화토염(梅花吐艶)으로 이어진다.
검에서 뱉어진 검기 자락이 홍고의 시야를 집어삼키면서 매섭게 피어올랐다.
“허! 이십사수매화검법!”
혜만이 한눈에 알아보며 탄성을 자아냈다.
오직 매화검수에게만 허락된 절기가 펼쳐지자 놀랐다.
무엇보다 강호를 유람하던 시절 보았던 어떠한 매화보다 아름답게 피어나는 걸 보고 대경했다.
‘세간에선 운이 좋아 영약을 먹고 고수가 되었다고 했거늘, 순 헛소문이었구나. 정말로 그 이상이로다!’
생각 이상으로 대단했다.
저건 영약으로 어떻게 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머릿속에선 화산의 장문인이자 상천십좌 중 일인인 검선이 스쳐 지나갔다.
홍고 역시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알아보았다.
과거에 후기지수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겪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누구도 주서천만큼 매화의 검을 펼쳐 내진 못했다.
‘이런!’
홍고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금강부동신법으로 피하기에는 검기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하단전에서 그 중심이 되는 정순한 내공이 움직였다.
안전성만큼은 확실한 정파의 무공.
소림의 내공심법 덕에 급격하게 끌어 올렸음에도 문제없다.
홍고는 주저하지 않고 일권을 내질렀다.
그저 내지른 것이 아니라, 권압을 넓게 펼쳐 바람을 불렀다.
뻗어진 주먹 끝에서 바람이 불면서 날아오는 검기 다발과 부딪쳤다.
퍼퍼퍼펑!
검기의 수는 적지 않으나 그렇게까지 막기 힘든 건 아니다.
공력이 분산된 만큼 권풍에 흩어졌다.
‘삼 초를 전부 양보했다!’
매화토염으론 부족하다.
사초식인 매개이도까지 이어져야 방금 전의 공격이 가능했다.
제한이 풀어진 홍고가 재빨리 움직였다.
자존심은 상하나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위험한 걸 알았다.
‘단숨에 끝내야 한다!’
홍고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강호 바깥에 나가서도 이러한 불안과 위험을 느낀 적은 드물었다.
그래서 지금 만큼은 힘을 숨기지 않도록 했다.
승려답게 살의를 담지는 않았으나 투기는 상당했다.
금강석처럼 잘 단련된 몸을 미세하게 움직인다.
움직임은 적었지만 하나하나에서 강맹함이 느껴졌다.
발을 내디디고, 주먹을 내지른다.
법복 위에서도 잘 보이는 우락부락한 근육들이 움직이며 힘을 냈다.
금강석을 연상시키는 그 굳건한 주먹이 나아갔다.
지나간 곳은 공기가 터지면서 폭음을 내려 했으나, 그것조차도 주먹의 강맹함에 짓뭉개졌다.
금강권(金剛拳)!
금강권 자체로는 최상승 무공은 아니다.
권을 일절로 하는 홍고의 최고 절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금강부동신법을 운용 중일 때는 어떠한 권법보다도 최고의 효율을 자랑했다.
그 강맹함은 몹시 단단하여 마치 금강석과 같아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고, 속도는 느리지만 몹시 강했다.
무엇보다 지금같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탐색전이 아닌 전력전을 하고 있을 때는 그 용도가 몹시 탁월하였다.
먼 거리라면 사정거리가 짧아 닿지 않고, 그렇다고 근접한다면 동작이 워낙 커서 제대로 펼칠 수 없다.
거리가 적당하다 할지라도 탐색전 도중이라면 동작이 느릿한 탓에 피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적당한 거리에다가 상황이 탐색이 아니라면 이보다 적절한 무공은 없었다.
‘이것이, 신권인가.’
날아오는 주먹을 본다. 주먹 뒤에 신권이 있었다.
날아오는 주먹을 살폈다. 과거가 연상됐다.
날아오는 주먹을 담는다.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 일권에는 어떠한 마두나 사마외도도 버티지 못했다.
이 주먹은 훗날 무림을 구하는 데 쓰이게 된다.
전혀 보지 못했던 주먹인데, 눈앞에 보였다.
멀리서 그 그림자만 훔쳐봤는데 이젠 아니다.
비록 이젠 없었던 사실이 된 역사임에도 어째서인지 그 기억을 떠올리자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아아! 그야말로 숭산의 주먹이로구나!’
그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낸다는 것이 좋았다.
왠지 모르게 갑자기 입꼬리가 슬쩍 올랐다.
주서천은 살짝 웃었다가, 표정을 되돌리면서 몸을 움직였다.
그제야 세상도 움직인다.
발걸음은 유령신공의 영향인지 기척이 적지만, 그래도 발걸음부터 몸놀림은 화산의 신행백변이었다.
피하진 않는다. 그저 응수를 위한 자세를 취했다.
주먹을 감싸 안은 권압에 맞춰서, 검에 실린 기의 압을 높인 다음 주변을 베어 갈랐다.
검에서 피어오른 매화는 만개하였고, 곧 홍고의 후각을 자극하면서 매화 향을 뿜었다.
그 향이 무엇인지 인식했을 무렵, 검과 권이 부딪쳤다.
콰-앙!
그 충격이 고스란히 검과 권에 전해졌다.
주서천은 예상하고 있었기에 아무렇지 않았지만 홍고는 그 충격이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향했다.
금강권이 비록 최고 절기는 아니라도, 그 주먹에는 홍고의 일생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굳건히 서 있어야 하며, 모든 걸 압도할 강맹함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실제로 그 주먹에 무릎 꿇은 자들도 상당했다.
고수들 또한 눈살을 찌푸리면서 대다수가 물러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주서천은 눈살 찌푸리긴커녕 왠지 모르게 흡족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더더욱 충격적인 건, 스무 살 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청년이 그 주먹을 받고 아무렇지 않아 하는 또한 전심전력을 다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아직이다!’
홍고는 팔을 힘껏 휘두르면서 뒤로 물러났다.
‘나무아미타불!’
머릿속에서 잡념을 떨쳐 내려 했다.
놀라움을 지워 내고 평정심을 되찾아 온몸에 힘을 주었다.
꿈틀거리는 건 근육 뿐만이 아니다.
피부 위로 돋아난 퍼런 핏줄만이 아니다.
사부에게 전수받았던 역근(易筋)을 근원으로 한 내기가 기맥을 타고 흘러 힘을 준다.
이 다음으로 펼칠 것은 검보다 긴 것 백보(百步) 내외로 타격할 수 있는 신권이었다.
“홍고!”
혜만이 흥고의 분위기가 바뀌는 걸 보고 급히 외쳤다.
아무리 화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력으로 펼친 백보신권을 받는다면 위험했다.
제자를 다치지 않게 제압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에서 상대가 필사적으로 덤벼 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혜만도 설마하니 홍고가 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비무가 순식간에 생사결이 됐다.
‘질 수 없다!’
홍고에게 었어 패배란 건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닌 사문을 욕하는 것이기에.
소림의 무공은 천하무적이어야 하고, 그 상대가 구파일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지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
홍고라는 사람 자체를 구성시키는 근원이 거부하고, 이성을 마비시켰다.
모든 것이 부서지기 전의 일촉즉발의 순간.
주서천은 그저 담담히 맞이하며, 감격에 젖었다.
‘아!’
자신에게 있어 홍고는 먼 나라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 백보신권은 이름만 들은 무공이었다.
마치 오래된 이야기를 적어 둔 역사서에 있는 기분이다.
혹시 이것이 꿈이며 실은 어떠한 힘도 없는 화산오장로가 책을 읽다가 잠이 든 게 아닐까.
그러한 심심찮은 생각을 하며, 검을 든다.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분명히 늦게 반응한 건 주서천이었다.
홍고는 백보신권을 펼치기 전이었다.
설사 몸을 날린다 할지라도 그땐 늦는다.
백보신권이란 그러한 무공이다.
거리를 두고도 적을 격타할 수 있는 권법.
상천십좌가 아닌 이상 그 전에 공격할 수 없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 검은 매화가 춤추듯이 너울거리면서 나아가 홍고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크읏!”
푸픗!
법복에 기다란 선이 그어졌다.
천이 열리며 그 안에 있던 피부가 갈라져 피가 튀었다.
이제 막 백보신권을 날리려던 홍고의 몸이 멈칫했다.
고통 따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대로 주먹을 뻗으면 어찌 될 지였다.
홍고의 머릿속으로 주먹을 그대로 내질렀다가 검에 베여 날아오르는 팔이 지나갔다.
“이럴 수가……”
공수에 응하기도 전에 당하다니!
만약 어깨가 아니라 목, 혹은 사혈을 노렸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홍고는 방금 전의 일격에 섬뜩해하면서도 손도 못 댄 채 당했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상념을 깨우는 것은 스승인 혜만의 목소리였다.
“그동안 네가 얼마나 오만방자했는지 깨달았느냐.”
홍고의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살짝 벌린 다리의 무릎을 굽혔다.
정권을 내질러 주먹에 실린 공력을 분출하려던 순간, 백보신권이 펼쳐지기도 전에 제지받았다.
중년에 이르는 승려의 얼굴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입이 벌려져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주먹을 뻗을 것 같던 그 자세는 혜만이 다가와 엄중한 목소리를 내서야 풀렸다.
“아미타불. 정중지와(井中之崩圭)라는 말이 따로 없구나. 소림이 전부라고 생각하니 견문이 좁아서 드넓은 세상을 모르고 있던 기분은 어떻더냐?”
“이, 이건 소림의 무공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다 못난 이 소승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흥고가 뒤늦게 정선을 차리면서 반발했다.
“어허, 이 못난 제자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혜만이 혀를 차면서 홍고를 엄히 꾸짖었다.
“노승이 언제 소림의 무학이 화산의 무학보다 떨어진다고 하였느냐.”
“하, 하오면……”
“애초에 공부란 다름이 있어도 위아래 같은 것은 없느니라. 네놈은 그동안 불학 외의 공부를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같은 중임에도 소림 외의 사찰을 우습게 보는 경향도 보였다. 그야말로 우치(愚擬)가 아니더냐!”
우치, 어리석은 마음.
홍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팔정도(八正道)에서 정어(正語)를 조심하여야 하고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가 부족하니 앞으로 너는 이를 정념(正念)하여 공부에 정진해야 할 것이니라.”
팔정도라 하면 번뇌와 고통을 해탈하여 열반에 들기 위한 수행의 여덟 가지 길을 말한다.
홍고는 행동으로선 부족하지 않다.
반대로 중으로서 누구보다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다.
고통을 받는 빈민 등의 백성들을 구휼하고, 어려움에 빠진 중생들을 돕기 위해서 강호에 나섰다.
위 배분들에게는 무승이건 아니건 간에 존경하고 겸손한 태도를 배우며, 아래 배분에겐 친절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림 외의 공부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언제나 소림이 제일이라 여겼다.
“너는 너 자신이 부족한 것을 알고 노력하고 있으나, 꼭 스스로를 낮춘다고만 하여 자만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네가 포함되어 있는 소림이 유아독존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 또한 자만이다. 아미타불.”
혜만이 불호를 외며 염주를 매만졌다.
“세대의 교체도 얼마 남지 않아 소림 내도 어수선한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계속 이런 식이라면 너한테 어찌 마음 편히 자리를 건넬 수 있겠느냐.”
소림의 일대제자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이대제자인 혜자 배분도 슬슬 물러날 연령이 됐다.
참고로 홍고가 혜만의 진전을 이을 수 있는 건 단순히 제자여서가 아니었다.
홍고의 소림에 대한 과한 자부심이나 자만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기에, 많은 존경을 받았다.
무공이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민초의 구휼에 힘쓰고 협의를 위해서 발 바쁘게 뛰어다녔으니 당연하다.
“……”
홍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음 속에서 피어오르는 악감정을 잠재우려는 듯, 불호를 외웠다.
‘괜찮겠지?’
주서천은 머리를 들지 못하는 홍고를 보고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 신권이라 불릴 홍고의 과한 자부심은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다만 그것이 어떠한 연유로 사라지는지는 모른다.
공덕과 더불어 연륜을 쌓아 저절로 사라졌을지도 모르고, 혹은 어떠한 일이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못난 제자를 생각해 주시고 가르침을 내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부님……”
홍고가 힘없는 목소리로 합장하여 인사했다.
비아냥거린 것이 아닌, 순수한 감사의 인사였다.
그걸 본 주서천이 속으로 감탄했다.
‘괜히 다음 대 방장으로 추대받는 게 아니구나.’
불혹에 이제 막 강호에 출두한 청년의 앞에서 꾸짖음을 받으면 불쾌할 텐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승려라 하여도 무림인, 특히 고수라면 자존심이 대단할 텐데 저런 반응이 신기하기만 했다.
만약 남들이었다면 아무리 스승이라 할지라도 불쾌함을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주 시주, 그동안의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 못난 중을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오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조금만 늦었다면 저 역시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과연 소림사, 덕분에 식견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홍고의 사죄에 주서천도 포권으로 답했다.
‘다행이다,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는구나.’
주서천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신승도 있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다.’
혜만대사가 입적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신승이 있으니 괜한 걱정은 덜기로 했다.
하물며 전란이 일어난 것도 아니니 별일 없을 터.
주서천은 안심하면서 미미하게 웃었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며 지면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아직 길게 늘어진 줄이 보이는 산문을 벗어나, 내원의 뒷문 앞에 선 주서천이 혜만에게 인사했다.
“하오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짧지만 신세 많이 졌습니다.”
“헐헐 신세는 무슨 신세인가? 자네야말로 이 노승의 억지에 어울려주지 않았나. 고맙네.”
“그리고, 깜빡하고 전해 주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주서천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레 꺼냈는데, 목함이었다.
‘쩝.’
이걸 전해 줄지 말지 얼마나 고심했는지 모른다.
마음 같아선 비밀로 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스승의 얼굴 탓에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건……”
목함이 열리자 혜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야신공과 발견했습니다.”
한 알의 소환단이었다.
‘사부님께서 한 알이라도 돌려주라 했었지?’
원래는 수중에 열 알이 있었다.
그중 네 알은 주서천과 제갈승계가 두 알씩 복용했다.
남겨진 여섯 중 넷은 이의채에게 맡겼고, 나머지 둘은 본래 스승에게 선물하려 했다.
그러나 유정목은 허락 없이 도난품을 복용할 수 없다면서 거부했었다.
원래는 두 알 전부였으나 한 알은 어쩔 수 없이 급하여 복용하게 됐다.
주서천은 유정목에게 나머지 한 알도 복용하라고 권했으나, 유정목이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곳에 쓰려고 해도 유정목이 돌려줘야 한다고 해서 별수 없이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수중에 아직 네 알이나 남았으니 한 알 정도야 건네도 상관없다.
유정목 또한 네 알에 대한 존재는 모르니, 이 한 알만 처리하면 심적으로 편했다.
“묻는 것이 늦었네만, 반야신공을 어디서 찾았는가?”
혜만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칠검전쟁이 벌어지기 전, 강호를 유람하던 중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서 주웠습니다. 그때는 배를 굶은지 제법 됐는지라 경황이 없어 마을로 향해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반야신공은 삼안신투의 비고에 있었으나, 삼안신투가 소림사에 잠입해 훔친 것은 아니다.
신투의 활동 시기는 삼백 년 전이지만, 반야신공은 그보다 더 전에 실전되었다.
어째서 실전되었는지는 그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전대에서부터 온갖 노력이 있었으나 끝내 찾지 못했고 숙원으로만 남았다.
혜만이 주서천에게 복잡 미묘한 것도 이래서다.
숙원을 풀 기회를 날렸으나, 동시에 숙원을 풀어 준 은인이니 참으로 애매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말게. 이렇게 찾아서 전해 준 것만 해도 고맙네.”
혜만은 의심할 만한데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것이 산공을 무사히 전달해 줘서 인지, 아니면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는 데 도움을 줘서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건 넣어 두게.”
“하지만 ……”
“은인에게 제대로 된 대접도 하지 못하고 돌려보내는 것이 편치 않은 참이었네. 그러니 가져가게나.”
사실 은인이라고 해도 소림 내에서 주서천의 입지가 참으로 애매해서, 대접하기도 조금 그랬다.
혜만은 주서천에게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 고마웠다.
“그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주서천이 옅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그러면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주서천이 숭산에서 내려갔다.
얼마 뒤, 혜만이 수뇌를 불러들여 회의를 열었다.
혜자 배분뿐만 아니라, 세대 교체 중으로 다음 대 소림을 이끌어 갈 홍자 배분도 모였다.
승려들의 인내심조차 떨어지고 있을 때, 기다리고 있던 반야신공이 전달됐다 하자 다들 불호를 외웠다.
반년 전부터 쌓였던 어두움이 사라졌고, 그 대신 환한 빛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얼굴도 전달자의 이름을 듣고는 하나같이 복잡 미묘하게 변했다.
“허어!”
“주서천이라 하면 분명 매화정검의……”
매화정검, 주서천. 그 이름을 모를 리 없다.
예상했던 대로 대다수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혈근경을 불태워 소림의 치욕을 지울 기회를 없었던 장본인.
그러나 동시에 반야신공을 찾아 준 은인이었다.
실전되었던 반야신공의 가치는 작지 않은지라 반응하기가 그만큼 곤혹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라며 혈근경을 불태웠는지라 그에 대한 감정 자체가 애매했었다.
“방장 사형, 혹여나 그가 이 일을 예상하고 이용한 것은 아닙니까?”
소림의 율법을 관장하는 곳, 계율원(戒律院)의 혜정(慧正)이 수상한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계율원주인 만큼 여타 승려들과 다르게 자비가 없으며 성정이 냉정하여 객관적인 시선을 지녔다.
방장뿐만 아니라 여러 고승들 역시 율법을 지켜야 하는 만큼 계율원주의 의견을 무시 못 한다.
“맞습니다. 신공을 지니고 있으니 혈근경을 불태워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걸 악용했을지 모릅니다.”
홍자 배분의 승려들이 옳다구나 하면서 반응했다.
“매화정검은 칠검전쟁을 겪기 전에 무명이나 다름없지 않았습니까. 명예를 단숨에 드높이기 위해……”
“과한 생각일세.”
혜만이 제자에게 보여 주었던 엄한 모습과 달리 자비롭게 웃음을 지으면서 소란을 멈췄다.
“그러나 있을 만한 일이지 않습니까.”
혜정이 주서천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계율원주로서 좀 더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방장이 사리분별이라도 하지 못한다면 소림이 잘못된 길을 걸을 수 있다.
계율원주는 그와 같은 경우를 경계하기 위해서 존재하며, 소림을 법으로 수호한다.
“사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네만, 주 시주는 그러한 의도를 가질 사람이 아닐세. 무엇보다 그는 이름을 충분히 떨칠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 있네.”
“산화일장이 고수란 건 알고 있으나, 당시의 그는 심히 지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객당주, 홍수(洪受)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박했다.
그를 뒤로한 홍자 배분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고 사형께선 어디 가서 뭐하고 계신 거지?’
지금 같이 중요할 때에 없는 것이 의문이었다.
원래라면 홍고가 앞장 서 주서천을 비난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렸다.
“설사 산화일장이 만전의 태세였어도 주 시주를 이기지는 못했을 걸세.”
“불가능합니다.”
산화일장이 비록 사파인이라 할지라도, 나름대로 이름이 난 고수이다.
후기지수 중 최고라는 오룡삼봉도 긴장하게 할 정도의 무인이었다.
“아니, 가능할세. 노승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까.”
“그게 무슨……”
“그가 떠나기 전, 홍고와 비무를 하여 승리했네.”
“험!”
좌중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심지어 혜정의 눈동자도 심히 흔들렸다.
백보권승, 홍고.
나한승 중에서도 그 힘은 제일이었으며, 재능뿐만 아니라 혀를 내두를 정도의 노력까지 한다.
오룡삼봉에 일찍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천하백대고수에 들어 소림의 고수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런 홍고가 오룡삼봉에도 들지 않은 주서천에게 졌다는 건 확실히 경악할 만했다.
“무림의 흥복이로군. 아미타불.”
혜정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불호를 외웠다.
매화정검, 주서천.
소림에 그 이름이 정확히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 * *
숭산을 내려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다가왔다.
“하북곡 출신의 금령(金靈)입니다.”
“금령?”
주서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북곡이라면 최초로 방문한 유령곡인데, 기억 속에 그런 이름은 없다.
“상단주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아!”
그제야 누군지 깨달았다.
유령들은 연령도 체구도 전부 다르지만, 문제는 그동안 만났던 유령이 워낙 많아 구분이 힘들었다.
어조나 기척도 비슷하니 힘들 만하다.
알아볼 수 있는 유령이라곤 항상 곁에 맴도는 소령 정도다.
“무슨 일이 생겼나?”
주서천의 얼굴이 금세 굳었다.
호위 겸 손발로 붙여 둔 유령은 둘 뿐이다.
그중 하나를 보냈으니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펼쳐진 서신은 ‘급(急)’이라는 글자부터 시작됐다.
주서천이 소림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다.
“으악!”
이의채는 서신을 보고 비명을 꽥 질렀다.
“적림십팔채, 이 호래자식들!”
이의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살로 뒤덮인 그 손이 뒷목으로 옮겨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상단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무사가달려왔다.
“으으, 도적 나부랭이 놈들!”
이의채가 치를 떨며 싫어했다.
도적은 거지처럼 중원 곳곳에 있다.
없는 곳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다.
아니,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서조차 길목을 막아서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 그게 도적이다.
또한 이 도적들은 백성도 백성이지만 대부분이 상단을 목표로 삼는다.
규모가 큰 만큼 거래액이 보통 작은 게 아니며, 이걸 빼앗을 경우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었다.
웬만한 중소 규모의 산채를 몇 년이나 먹일 수 있는 금액이기에 소위 ‘대박’이라 불렸다.
상단 역시 액수가 액수인 만큼 낭인이나 표사들을 고용하여 상품을 지켜 왔고, 금의상단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최근 그 이름이 높아진 만큼 노리는 자는 더더욱 많았다.
금의검문이 있다 하여도 타 상단만큼 오래되지 않아 그 무력을 얕보는 자가 여럿이었다.
상인답게, 아니 그중에서도 특히나 돈에 집착을 하는 이의채는 이러한 손실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어쩌다가 한 번이라도 손실을 보면 그것이 아까워서 삼 일 밤낮 동안 잠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래서 평소 호위에 더더욱 신경을 많이 썼다.
다행히도 칠검전쟁 이후 주서천과 함께 전장을 누빈 금의검문의 무사들 덕에 도적이 좀 줄긴 했다.
그러나 안도하는 것도 잠시.
얼마 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도적이 들끓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먹고 살기 힘들어져서 백성들이 도적질하러 나왔나 싶었는데, 착각이었다.
도적이 많아진 게 아니었다.
금의상단을 노리는 도적이 이상할 정도로 많아졌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조사해 봤는데, 적림십팔채, 바로 녹림구채와 수림구채가 튀어나왔다.
길목에서부터 산과 강 등 전부 그들과 관련되었다.
한둘도 아니고 적림십팔채가 힘을 합해 작정하고 덤벼들자 금의상단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중원 전역에서 활동하는 만큼 반응도 그만큼 느리다.
질풍십객이 있어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일주일 만에 핼쑥해진 이의채가 말했다.
매끈매끈했던 피부는 얼마 안 봤다고 푸석푸석해졌다.
눈 밑에는 검은 기미가 꼈고, 어떠한 이익도 놓치지 않으려는 예리한 눈도 힘없이 처졌다.
“흠.”
주서천이 침음을 흘렸다.
산동의 제남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확실히 중요한 일이기는 했다.
오자마자 낙소월에게 인사도 하지않은 채 이의채를 찾았다.
‘왜지?’
적림십팔채. 연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악연이 있다면 화산파와 제갈세가지, 금의상단에는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 자신이 수적들과 싸우긴 했으나 대대적으로 활약한 건 구풍이 아니던가.
금의상단을 집요하게 노리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신흥이라고 얕보고 있는 건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중경에서 벗어나는 건 좀 과하다.’
적림십팔채는 대부분 중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강이 흐르는 곳 인근에도 활동하고 있지만, 그렇게까지 멀리는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달랐다.
이상하게도 산채를 제법 벗어나서 금의상단을 약탈하기도 했다.
‘설마!’
머릿속에서 어떠한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상단주, 전에 미친 소리를 지껄인 사람에 대해 기억하십니까?”
이의채가 기억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아, 호구 말이지요?”
“호구?”
“그 이후로도 아마 열댓 번은 방문했을 겁니다. 처음엔 열 냥이더니 가면 갈수록 곱절을 내놓더군요. 다만 용건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중원의 상권을 전부 손에 넣게 해 줄테니 복종하라는 말이었습죠.”
이의채가 말하면서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시엔 그냥 미친놈인가 하고 돈만 받고 대화를 적당히 흘려듣고 쫓아 냈었다.
“서, 설마 그자가 적림십팔채와 어떤 연관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그의 입장에선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금의상단주 정도 되면 정말 별별 이상하거나 미친 사람이 자주 찾아 온다.
그중에는 밑도 끝도 없이 자신감을 내보이며 기가 막힌 사업이 있다면서 천금을 달라는 이도 있었다.
값비싼 금품 등을 선물하고 상당히 기다렸는데도 이렇게 별별 이상한 용건이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이의채는 귀를 기울일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흘려들으며 내보내는 경향이 있었다.
‘천권성에서 보내온 사병.’
주서천이 골치 아픈 듯 눈살을 찌푸렸다.
온 신경을 천선에 곤두세우느라 천권성일지도 모르는 접근을 그만 깜빡하고 잊고 있었다.
‘상왕이 제안을 들은 척도 안 하니 포기한 거군. 그리고 그걸 강제로 손에 넣으려고 움직인 건가.’
암천회가 중원의 상단을 지배하여 자금줄로 이용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부분 제안을 받아들이면 적절하게 거래 관계로 이용했었고, 그렇지 않으면 힘으로 굴복시켰다.
암천회가 전생에서 금의상단을 건드리지 않았던 건 대체할 상단이 얼마든지 있었고, 결정적으로 상단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였다.
금의상단이 본격적으로 성장하여 이름을 떨치게 된 건 암천회가 준비를 끝내고 시작한 전란의 때였다.
전란 때야 암천회가 워낙 바빠 금의상단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후, 이거 여간 머리 아픈 게 아니구나.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건 예상할 수 없는 큰 흐름이야.’
주서천이 말없이 생각에 잠기자 이의채는 불안한 듯 노심초사했다.
그로서도 주서천이 이런 표정을 짓는 건 거의 처음 봤으니까.
‘적림십팔채에 누가 숨어 있는지는 잘 모른다.’
전란의 시대에서도 도적은 빠지지 않았다.
반대로 전란을 기회로 여기고 날뛰었다.
싸움이 끊이지 않은 덕에 무인들은 숫자가 나날이 줄어들었고, 그만큼 치안에도 신경을 크게 못 썼다.
도적들은 그 틈을 타서 노략질을 일삼았고, 훗날엔 관부까지 움직여 결국 멸망한다.
알고 있는 정보라곤 암천회에게 버리는 말 정도로 쓰인 정도였다.
전생의 기억 중에서도 그냥 전란으로 일어난 혼란을 이용해 여기저기서 노략질을 한 정도다.
‘아무래도 금의상단이 아직 힘을 기르는 중이란 약점을 이용해 곁에서 부추긴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제대로 된 추측은 어려웠다.
“흑흣, 대협 말씀 좀 해 주십시오. 뭐라도 잘못된 겁니까? 설마하니 야반도주를 해야 하는 건지요?”
“그럴 리가요.”
주서천이 쓰게 웃으면서 이의채를 진정시켰다.
“그래서, 어떻게 대응하고 있었습니까?”
“호위를 늘리긴 했으나, 아무래도 전국에서 벌어지는 일인지라 인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표사나 낭인들을 대거 고용했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가 늘어나는지라 돈이 여간 부담되는 게 아닙니다.”
“대대적인 토벌이 필요하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이의채가 환하게 웃으면서 주서천의 말에 동조했다.
확실한 방법은 문제가 되는 적림십팔채를 혼쭐을 내 주는 것.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와 드리기가 조금 힘듭니다.
약간의 무사들을 내어 줄 수는 있으나, 아무래도 각지의 화물을 지켜야 하는 만큼……”
무림맹이나 사도천조차 적림십팔채를 부담스러워하여 나서기를 꺼려했다.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걱정 자체를 하지 않았다.
“조금만 도와 주시면 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정이 어려워 절 부른 것 아닙니까?”
“과연, 대협이시옵니다! 척하면 척이지요! 이 소상, 대협의 천뇌(天腦)에 깊이 감복하였습니다!”
손바닥을 비비면서 씩 웃는 상인.
그야말로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소인배 악당이었다.
주서천은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좋아하는 이의채를 질린 눈초리로 쳐다보곤 생각에 잠겼다.
* * *
적림십팔채, 중경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도적 무리들은 산과 들, 강 등 안 가는 곳이 없었다.
대부분이 삼류나 이류로 이루어진 오합지졸이었으나 흑도의 하오문처럼 숫자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래도 하오문보다 나은 것은 나름대로의 고수가 있다는 것이고, 채주들 몇몇은 천하백대고수였다.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주서천이 토벌대의 편성을 고민하는 동안, 소림사에서 있었던 일이 강호 전제에 퍼졌다.
“반야신공이 소림사로 돌아왔다며?”
“허! 반야신공이면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무공이 아닌가? 도대체 어디서 찾았다고 하던가?”
“듣기론 산골짜기 깊은 곳에서 우연히 발견했다더군. 그리고 지금 장소 같은 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세.”
“과연, 누가 찾았는지가 더 궁금하군. 무공의 총본산이라 불리는 소림의 신공을 갖고도 욕심을 갖지 않다니. 어떤 멍청이인가?”
“주서천!”
“주서천? 매화정검 말이야?”
강호인들은 주서천의 이름을 듣고 놀라워했다.
대략 반년 전에 전쟁을 종식한 장본인 아닌가. 이후 활동이 뜸하더니 이렇게 또 이름을 날렸다.
한 사람이 일생에 이루기 힘든 공적을 둘이나 세웠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군!”
“그야말로 대협이 아닌가!”
서책에서 나올 법한 영웅이 따로 없었다.
비록 지쳤으나 산화일장이나 되는 고수를 홀로 쓰러뜨리고, 혈근경을 불태워 전쟁을 끝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출신도 뛰어나며, 용모까지 준수하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사실상 소림의 은인이 됐다.
사람들은 이에 관심을 가지며 열광했다.
언제나 신진고수, 그것도 젊은이는 무림에서 주목을 받는 법이다.
“매화정검이 직전제자이긴 해도 아직 대단하다 할 지위를 가지진 않았지?”
“스승인 소유검 또한 외부에서만 활동하고 내부에선 어떠한 자리에도 있지 않다고 하더군.”
“진전을 이을 것이 없다고? 뭐하고 있어? 어서 혼담 준비해!”
원래부터 주목받았던 주서천이었다.
안 그래도 높았던 인기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몇몇 중소 문파나 가문에서는 주서천을 사윗감 후보에 영순위로 올려 혼기에 찬 여인들을 준비시켰다.
도가의 적전제자라 할지라도 주요 지위가 없고 절기만 전수하지 않는다면 결혼이 가능하다.
“칫!”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운이 좋았을 뿐!”
“듣자 하니 어릴 때도 기연이 있었다며?”
“영약 조금 잘 먹은 걸 가지고!”
그러나 사람들이 전부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알이 뒤틀리는 게 사람이다.
하물며 모르는 이가 잘되니 온갖 시기가 흘러나왔다.
“어쩌면 그가 이걸 노리고 혈근경을……”
소림사에서 나왔던 의심스러운 의견도 나왔다.
몇몇 이들은 대놓고 주서천을 깎아내렸다.
그렇게, 소림을 넘어 무림 전체에 주서천의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나흘 후, 주서천이 산동에서 준비를 끝냈다.
“아니, 형님. 모진 사람은 왜 끌고 갑니까?”
공방에서 살다시피 하는 제갈승계가 질색했다.
“일일부작일일불식(一 日不作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냐. 앞으로 큰 싸움이 남았으니 힘 좀 빌려야겠다.”
제갈승계의 기관지술은 삼안신투의 비고나 흉마의 무덤에서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전에 있었던 죽통노나 다발화전처럼 별 힘을 들지 않아도 이길 수 있는 병기만 봐도 알 수 있다.
“병기가 필요하다면 사용법을 알려드릴 테니 그냥 가져가면 되지 않습니까.”
제갈승계가 불만이란 듯 툴툴거렸다.
“최종 목적지가 비록 도적들의 소굴이지만 그래도 적림십팔채 아니냐. 중경에 박혀서 산 지도 제법 되었으니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흠, 그건 좀 관심이 가는군요.”
제갈승계가 턱을 매만지면서 눈을 반짝였다.
집, 아니 방 바깥에서 나가는 걸 지독히 싫어하면서도 기관만 연관되면 이렇게 눈빛부터 달라진다.
“어차피 우리만 가는 것도 아니고, 너도 내공이 보통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
제갈승계는 과거 소환단을 복용했다.
그 덕에 상당한 내공을 소유하여 일반적인 수준은 넘었다.
다만 순수한 신체 능력이 그 정도인 것이지, 아직 초식 등의 무공 전체 수위는 상당히 낮다.
“그러니까 얼른 준비나 해. 상단주의 애가 바싹 타들어 가고 었으니 늦어도 내일은 출발할 거야.”
“저, 저……”
“응?”
주서천과 제갈승계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아, 소저.”
무곡의 딸, 무선화였다.
안 본 사이에 더 건강해졌다.
눈에 띄게 좋아진 혈색을 보니 안심이 됐다.
다만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걱정스러워 보여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혹시 저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
주서천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지?’
무선화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녀는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호기심이 많진 않다.
가끔 금의상단의 지부에 들러 무선화의 소식을 들었을 때 별 특이사항은 없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았던 탓에 인근의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 정도였다.
산적 소굴을 들어갈 수준은 아니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무선화가 걱정 어린 표정인 채로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제갈 공자님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식사도 거르시는 분인지라……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가슴 위에 고이 모아진 손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듯 옷자락을 쥐고 있었다.
“……?”
주서천이 두 귀를 의심하며 방금 전 말을 되뇌었다.
생각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해 순간 멍해졌다.
“아니, 제가 애도 아니고 그럴 리 있겠습니까. 언제나 말하지만 무 소저는 걱정이 많아 탈이요.”
“그렇지만 전에도 그리 말씀하셔 놓고 삼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셔서 핼쑥해지셨잖아요.”
“그때는 새로운 기관을 설계하느라 어쩔 수 없었고, 굶은 건 내공으로 대신할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역시 믿을 수 없겠어요. 은공, 부탁이니 절 데려가 주……”
“거길 어디라고 무 소저가 가십니까? 전 어르신에게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저 좀 봐주세요.”
제갈승계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고, 무선화는 계속해서 조목조목 따져 가며 말했다.
그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주서천의 입이 점점 벌어지더니 이윽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 둘, 그렇고 그런 사이야?’
무선화가 제갈승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범상치 않았다.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내처럼 보였다.
“저, 혹시 그……?”
주서천이 결국 힘겹게 말을 꺼냈다.
“승계와 무선화 소저께선 그렇고 그런……?”
“……?”
제갈승계와 무선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무선화였다.
“어, 어머나.”
무선화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뭔 소립니까?”
제갈승계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랍니다.”
“허어.”
이번에는 진심으로 놀랐다. ‘아직’이라는 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아!”
제갈승계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사제 관계라고 오해하셨군요.”
“하?”
주서천이 진심이나는 표정을 지었고, 무선화의 낯빛에 그늘이 끼었다.
제갈승계는 눈치 없게도 허리를 뒤로 젖힌 채 조금 거만한 자세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기관을 만들다 보면 가끔씩 무 소저께서 가까이 와 구경하고 가시더군요. 최근엔 기관지술에 대하여 가르쳐 드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형님 다음으로 기관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주신 분이지요.”
제갈승계가 어떠나는 얼굴로 코를 높이 세우면서 기관에 대해 잘난 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주서천은 그런 제갈승계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옆에서 쓴웃음을 짓고 있는 무선화에게 물었다.
“아버님께선 알고 있습니까?”
“그게, 아직……”
이의채는 편히 있으라며 만류했으나, 무선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딸을 위해서 아비가 대신하여 일하고 있는데 쉬고 싶지만은 않았다.
무곡도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으나 억지를 부려서 약간의 일을 조금씩 돕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 제갈승계와 교류가 많아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감정에 눈뜨게 됐다.
주서천은 아직도 떠들어 대는 제갈승계를 딱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승계야 ……’
전생에서 딸을 위해서 마귀가 된 무곡이다.
그 팔불출의 눈에 잡힐 상상을 해 보니 그가 불쌍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