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길게 느껴졌던 밤이 끝났다.
볼일을 끝낸 주서천은 도망치듯이 정주에서 빠져나왔다.
추적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주변을 경계했다.
다행히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답답했던 인피면구를 벗고 정주를 벗어나 서쪽으로 향했다.
반야신공부터 전달할까 싶었지만 하남곡이 그다지 멀지 않아서 그쪽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하남에서 서로 곧장 가면 황하와 남하 사이에 낙양(洛陽)이 나온다.
아홉 왕조의 도읍으로, 삼국지의 무대로서 유명한 데다가 노자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등의 문인들이 활동해 일찍이 문화와 학문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낙양에는 용문석굴(龍門石窟)이라 하여 사백여 년간에 걸쳐 만든 최대의 석굴이 있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일천하고도 삼백오십여 개였다.
“이곳입니다.”
소령에게 용문석굴로 안내받았을 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여태껏 보았던 유령곡은 차이가 조금씩 있어도 계곡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유령곡 하남 지부는 이 용문석굴에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석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를 사용했다.
“곡주님을 뵙습니다.”
하남곡의 유령들은 도합 남녀 서른 명이었고, 수련령은 다른 지부에 비해서 적은 편이었다.
전력 면으론 수련령을 제외하고 그다지 차이는 없었다.
일류에서부터 초절정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며칠만 신세를 지마.”
당분간 여기서 머물기로 정했다.
대단한 건 아니고 하남곡 출신의 유령들과의 비무를 위해서다.
유은비도와 유령보법.
전부 오성에 오르지 못했다.
그때까지는 꾸준하게 수련할 생각이었다.
혹시 지부마다 수련법에서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지만, 별반 다를 건 없었다.
‘하기야, 다르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하지.’
심살을 도중에 중단한 탈주령이라면 모를까, 유령이라면 수련을 끝낸 순간 주체성을 버리게 된다.
전해져 내려오는 행동 강령과 유령공을 변화 없이 그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일정한 수준밖에 못 낸다.
그로 인해 정신적인 깨우침을 필요로 하는 화경의 길도 막힌다.
실제로 삼백 년 역사 동안 유령들 중에서 초절정을 넘어 화경이 된 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딜 가도 벽곡단밖에.없구나. 이것만을 평생을 먹는다니, 마음이 죽고 못 배기지.”
식단이 전부 벽곡단이란 게 심살의 과정 중에 포함된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식의 즐거움을 모르는 소령을 비롯한 유령들이 불쌍해서 눈물을 금치 못했다.
“무공은 이만하면 됐고 정보나 수집하자.”
새로운 지부에 들를 때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것만큼은 지부마다 차이가 제법 있는 편이었다.
의뢰인이나 혹 암살 기록 등을 비롯하여 지부가 개인적으로 보관해 둔 정보였다.
주요 정보는 서선으로 교환하는 편이었지만, 그 외의 것 전부를 공유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었다.
그래서 등급이 낮다고 여겨지는 정보는 요청하거나 필요로 할 때만 교환됐다.
“햐, 괜히 상왕이 아니네.”
최근 의뢰 기록 중 이의채의 이름이 자주 보였다.
전국적으로 활동하며 돈을 쓸어담은 만큼 엮이는 게 많았다.
주로 경쟁 상단이 암살 의뢰를 많이 했다.
“여기에 있는 것들을 상단주에게 보내도록.”
그래서 위험이 될 만한 신원을 정리해서 하남곡의 유령에게 맡겼다.
전서구나 전서응으로는 불안해 직접 전달하게 했다.
“그리고 너희 중 아무나 정주를 멀리서 지켜봐라.”
얻어 내려는 정보 중 우선이 있다면 강능초였다.
정확히는 강능초에게 접근하는 주변 인물이었다.
‘천기는 조심성이 많아서 섣불리 움직이지 않으니 당장 걱정할 건 없다.’
무엇보다 천기, 아니 암천회는 눈과 귀를 잃었다.
심지어 정보력은 이쪽이 한 수 위였다.
‘너희 생각대로 흘러가진 않을 거야, 암천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움직였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으나, 그 어떠한 권력가보다 대단했다.
가끔 그 이름에 다가간 사람이 있어도 끝내 알지 못한 채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잃었다.
천하를 조금씩 위협하고, 보이지않는 뒤편 속에서 무림을 위협했다.
그랬던 암천회가 지금 미증유의 사태에 직면했다.
설마 했던 칠성사 천선의 연락 두절.
처음엔 상당한 업무량 탓에 바빠서 그런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반나절이나 한나절이라면 모를까 이틀이나 연락이 두절된 것은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천선에게서 어떠한 언질도 없었다.
천기가 아는 한 그녀는 이렇게 무책임하지 않았다.
단순히 불노와 치장하는 데만 관심을 보이는 머저리라면 모를까, 화경의 고수씩이나 되는 노파다.
인생의 경험으로만 따지면 칠성사의 수뇌 중에서도 상위에 있었다.
연락 두절 첫째 날, 의심을 했다.
둘째 날에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면서 암천회주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셋째 날, 수뇌부에 소집령을 내려 천선의 사망을 확정시켰다.
회주께서는 일정이 맞지 않으셔서 참가하지 않았다.
도감부장 역시 영물의 관리 일로 불참했다.
수뇌 중 칠성사의 여섯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천선이 행방불명, 아니 사실상 사망했다.”
“으음.”
입에서 신음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확실한가?”
천선과 연계하여 첩자로 정보를 수집하던 천권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세간에서 하오문주를 무시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속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수뇌부 중에서는 개양성 정도와 두뇌 역할을 하고 있는 천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무공이 엇비슷하다.
강호에 나온다면 능히 천하백대고수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수 있는 실력인데 누가 죽이겠는가.
무엇보다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살해당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요 삼 일 동안 고민한 것이니 틀림없다. 그리고 그녀가 하루 이상 연락이 두절될 사람이 아니란 걸 천권 자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
천권이 뭐라 하려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천기가 그런 천권에게 핀잔 어린 시선을 보냈다.
“확신을 갖지 마라. 모든 일에 의심해라. 어떠한 일에도 절대적이란 건 없다. 자만에 빠지면 언젠가 독이 되어 돌아올 것을 명심해. 때로는 인정해야 한다.”
암천회가 그토록 틈이 없던 건 천기의 덕이었다.
구 할 구 푼의 가능성이라 해도 천기는 그 일 푼을 유의하고 혹시라는 상정하에 둔다.
“너야말로 확신이라는 이름의 자만이 아닌가?”
내부에서 불신자를 감시하고 주로 암살을 관리하는 옥형이 물었다.
“훌륭한 지적이군. 그 가능성도 충분히 내포하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천기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니 누구나 생각할 만한 것을 제외하고, 혹시 라는 이름의, 최악의 가능성을 말하겠다.”
천기가 가늘게 떠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 어쩌면 어떠한 단체가 우리에 대해 알고 있고, 대계를 방해하려고 움직이고 있을지 모른다.”
“어림없는 소리.”
천추성(天樞星)이 나서서 즉각 부정했다.
그 외의 수뇌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회에 대해 누설할 가능성이 있는 불신자는 옥형이 감시하여, 기미가 보인다면 확실하게 처리했다. 그 외에 정보의 통제에 대해선 그대가 더 잘 알지 않나.”
다들 천추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디까지나 만약, 최악에 한해서니 그렇게 반응할 것 없다. 그래도 가슴 한구석에 품고 있는 것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않나.”
“일리 있는 의견이군.”
“그 외의 가능성은?”
“하오문, 아니 그보단 사적인 원한이다.”
“제일 그럴싸하군.”
강호는 은원이라는 이름의 굴레로 돌아간다.
암천회도 별반 다를 것 없이 그런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천선은 칠순이 넘은 노파가 아닌가.
무림의 대선배로서 그만큼 사정도 많았다.
“그렇게 된다면 일이 아주 복잡해지겠지.”
천선의 정확한 출신은 모르지만 다들 흑도인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만큼 어릴 적부터 우여곡절을 겪었고, 원한 살 행동도 많이 했기에 과거를 일일이 추적하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암천회에서 정보를 원활하게 다룰 수 있던 건 천선뿐이었기에 천선이 없는 현재 암천회의 정보력은 극감한 상태였다.
물론 평소에 연계하던 천기나 천권 등도 다룰 수 있긴 하지만, 여러모로 제한되어 있는 게 많았다.
“개개인이라면 그렇게까지 또 어렵진 않다. 사람이 라면 응당 실수하는 법. 어딘가에 흔적을 흘렸을 테니 그걸 쫓으면 된다. 천선성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니, 그동안 분담해서 적절히 사용하면 되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어째서 인독종을 내버려 두고 있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데……”
현 하오문주의 행적이 묘연해지자마자 웬 잡배가 나타나서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수족으로 알려진 삼인방까지 살해당한 걸 보면 확실히 수상쩍다.
무음사자란 자객도 마음에 걸렸다.
“천선이 그따위 잡배에게 당할 것이라곤 생각하진 않지만, 분명 무언가 관계성은 있지 않겠나?”
“남화루의 화재도 신경 쓰인다.”
“이미 조사를 해 봤으나 이렇다 할 목격자가 없어 확인이 불가능하다.”
“남화루면 눈에 띄는 곳에 있는데 목격자가 없다고? 눈에 뛸 수밖에 없었을 텐데?”
“칠성사병이 외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탓에 그곳엔 하수들밖에 없었다. 흑도에서 뭘 바라나.”
절정, 아니 어쩌면 일류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목격자 없이 잠입할 수있다.
“후우.”
여기저기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인독종의 처리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대들도 알다시피 천선이 보통내기가 아닌 건 알고 있지 않나. 그런 그녀를 우리들의 눈을 피해서 살해한 것은 무위가 보통이 아니라는 의미. 눈에 뻔한 꼬리를 잡는다고 잡힐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를 끌어내기 위한 함정일지도 모르는 일이지.”
천기는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겁이 많다.
생각이 많은 만큼 다양한 가능성을 추측한다.
그렇지 않아도 미증유의 사태로 인해 누군가 자신들을 알고 있고,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 내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사실 천선의 행방이나 죽음이 오리무중이 된 건 천선 스스로가 이번 정주 사태를 쉽게 생각하고 비밀스럽게 처리하려 했기 때문이었지만, 그러한 내부 사정이 있다는 걸 천기나 암천회가 알 리 없었다.
“그러니 시간을 들여 천천히 접근한다. 천선성의 업무는 분담하고, 대계의 준비는 중단 없이 진행하도록.”
* * *
숭산(腐山).
오악(五嶽) 가운데 중악(中岳)이라 불리는 숭산은 보기만 해도 영험하여 성스럽게 느껴졌다.
비록 그 봉우리는 오악 중에서도 가장 낮았으나 중원인들에게는 천하제일의 산이라 칭송받았는데, 그 연유는 태실(太室), 준극(峻極), 소실(小室)로 일컬어지는 봉우리 중 서쪽의 소실봉에 있었다.
준험한 산세를 따라 북쪽 중턱쯤 다다르면, 태산북두라 일컬어지는 중원 무학의 본향이 나온다.
‘소림사!’
천년 소림이라 불릴 만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소림사의 그 웅장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근을 아우르는 종소리는 잡념을 모조리 씻어 낼 정도로 청아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정도였다.
전란의 시대에서도 그 굳건함은 끝까지 유지되어 정파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버텼었다.
새삼 과거의 일을 회상한 주서천은 뱀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진 방문 행렬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남곡에서 볼일을 끝낸 뒤 곧장 소림사로 달려갔다.
‘하루라도 빨리 이 무거운 짐을 전달하고 돌아가자. 낙 사매에게 금방 돌아온다고도 말했었고.’
한 달이란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강호행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낙소월이 삐쳐 있을게 눈에 훤했다.
품 안에 썩혀 둔 반야신공의 무게가 천근처럼 무거웠다.
새삼 이의채의 괴로움을 느끼게 됐다.
“이 줄에 서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구나.”
무림인, 그중 같은 구파일방 출신의 제자라면 무림인 전용의 줄이 따로 준비되어 있다.
산문으로 올라가자 아래에서부터 이어진 행렬의 끝과는 반대로 아무 줄도 없는 탁자가 보였다.
줄이 없는 곳으로 가자 방문록을 앞에 둔 승려가 주서천의 소매 안에 새겨진 매화를 힐끗 쳐다보곤 합장하여 인사했다.
“소림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에 사문과 성함, 그리고 별호와 방문 목적을 기재해 주시겠습니까?”
방문목적을 그대로 기재했다간 어떤 소란을 불러들일지는 뻔하다.
다행히도 무림맹주가 보내온 서신중에 만약을 위한 상황을 대비한 암호가 있었다.
“고불경 (古佛經)……?”
승려는 방문 목적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이내 방문록의 이름과 별호를 보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매화정검!’
소림사의 제자라면, 아니 무림인이라면 최근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다시피 했다.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혈승의 비급을 불태운 장본인이 아닌가!
무엇보다 소림사의 입장에서는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소림의 숙원을 풀 기회를 영영 없애 버린 장본인!
“괜히 눈에 띄고 싶지 않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조용히 들여보내 주시겠습니까?”
승려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대경했다가, 이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산문에서 무림인들을 받다 보면 이렇게 유명인이 종종 오곤 했다.
그들 중 몇몇은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는 등의 이유가 있어 조용히 방문하기를 원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손님들을 대접하는 지객당(知客堂)으로 곧장 안내받았다.
신승(神僧) 혜만대사(慧晩大師).
소림사의 현 방장이자 상천십좌 중 일좌.
그 이름은 무림맹주와 비견될 정도였다.
석벽으로 되어 있는 방 안.
자그마한 불상이 중앙 끝자락에 있고 그 앞에는 누렇게 변질됐으나 그래도 잘 관리된 불경이 정리되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어찌할꼬……”
혜만에게서 근심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혈근경.
소림사의 숙원을 풀 수 있는 마공이 강호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지도 어언 반년이 넘었다.
원래라면 소림사 역시 비급 쟁탈전에 참전했어야 하나, 이러저러한 사정이 겹쳐서 구경만 해야 했다.
소림사가 나서게 된다면 쟁탈전이 아니라 정마대전 혹 정사대전 등으로 번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인 만큼 은원 관계를 이리 간단히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불학을 공부하는 소림사가 대전쟁의 계기가 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리 치욕으로 남았던 숙원이라 할지라도 이념 그 자체를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무림맹이 완승을 거두었으나, 정작 중요한 혈근경이 소림의 치욕을 풀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와 함께 한 줌의 재로 불타 없어졌다.
이후에 소림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두말할 것도 없었고, 결정을 내렸던 혜만도 난처해졌다.
그래도 다행인 건 무림맹주가 혈근경을 대신할 수 있는 수를 건네줘서 소란을 어찌어찌 진정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고, 좋지 않은 건 아직까지 그것이 소림사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백팔나한이라도 보내 가져오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눈에 띄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저 믿고 맡기라는 무림맹주와 군사의 설득에 결국 이렇게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직 혈기가 넘치는 편인 손아래 배분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특히나 혜자 배분의 바로 아래, 앞으로 미래를 짊어질 홍(洪)자의 목소리가 상당해서 난처했다.
얼마 전만 해도 제자와의 대화가 어찌나 골치 아프던지.
‘마도이세나 사도천이 아닌, 같은 구파일방의 제자로 인해 이리될 줄이야. 그러니 부디 반야신공을 한시라도 빨리 전달해 주시오.’
혜만은 이때만 해도 설마하니 그 전달자가 혈근경 사태로 인해 문제가 됐던 매화정검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차가 차갑게 식은 지 한참이다.
일다경도 아니고 반 시진이 지났을 때 쯤, 고개가 절로 기울여졌다.
아무리 암호문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전달이 늦어도 너무 늦는다.
지금 자신의 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일각도 되기 전에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왔어야 한다.
그런데 달려오기는커녕 지객당에 온 뒤로 누구도 들어오지 않으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늦는다고 언질이라도 주었다면 모를까, 아무런 말도 없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리셨소.”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쯤, 마침 그 순간에 맞춰 문이 열리면서 승려가 들어 왔다.
그러나 겉모습부터 예사롭지 않은 승려였다.
법복 차림인데도 확연히 보이는 근육들이야 소림사의 외가무공이 워낙 잘 발달되어 이상하진 않다.
다만 칠 척에 가까운 신장이나 험상궂은 얼굴을 보면 부처라기보다는 수라를 연상시켰다.
‘초절정인가?’
무위를 가늠해 보니 그쯤 되는 듯 하다.
그것도 하위가 아니라 상위에 속했다.
‘응?’
얼굴이 어디선가 낯익었는데, 누군지 떠올리지는 못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무승이 따라오라고 해서 먼저 발걸음부터 옮겨야 했다.
처음에는 팔대호원(八大護院)에 둘러싸인 방장실로 가나 싶었으나 가벼이 지나쳤다.
크고 작은 전각을 지나쳐 경내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수록 마주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그동안 지나쳐 오면서 상당한 인사를 받았는데 아무래도 동행하고 있는 승려 ㅣ의 배분이 높은 듯했다.
얼굴이 낯이 익은 걸 보면 전생에서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승려가 아닌가 싶어 기억력을 더듬어 갔다.
기억이 날듯 말듯 할 때쯤, 돌로 된 불탑들이 늘어진 숲을 지나 한적한 곳에 도착하자 승려가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봤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하다.’
전란을 겪으면서 예리해진 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피부를 쿡쿡 찌른다.
“매화정검, 주서천.”
승려가 주먹을 쥐락펴락하면서 읊조렸다.
“어째서 불태운 거요?”
“예?”
“혈근경.”
여태껏 얼굴조차 제대로 보여 주지 않았던 승려가 몸을 돌려 똑바로 섰다.
얼굴에 묻어나는 그 감정이 분노는 아니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탐탁지 않게 여기는 느낌이다.
‘무엇인가 잘못됐다.’
주서천이 뒷걸음질 쳤다.
“그건 원래 소림사가 처리해야 할 일이었소. 내 알기론 그대가 몰랐던것도 아니라고 들었는데, 알고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자리를 만들었지.”
“알고 계신지 모르겠으나 전 이런 곳에 있을 때가……”
“고불경, 반야신공을 말하는 거면 나도 알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도대체 뭐야?’
반야신공의 암호명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다.
그 사실이 주서천을 더더욱 혼란케 했다.
반야신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자신을 이런 곳까지 불러 지난날의 혈근경에 대한 추궁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본 문의 신공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해 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오. 그러나 잘잘못은 따져야 하지 않겠소?”
얼굴이 점차 험악해졌다.
“스님은 뉘시오?”
“이런,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건 용서해 주시기 바라오. 소승은 홍고(洪高)라 하오.”
“……”
주서천이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디선가 봤다 싶더니, 신권(神拳)이잖아!’
신권, 흥고!
홋날 신승을 이어 소림을 이끌 방장의 이름이다.
어릴 적부터 무공에 천부적인 자질을 보여 신승의 제자로 들어갔으며. 홍자 배분 중에서도 제일로 높다.
다만 정말로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전란에서 나한들을 이끌어 끝까지 버텼다가, 끝내 영웅들과 힘을 합하여 회주에게 치명상을 입힌 고수!’
신승은 나이가 많아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전란의 시대 도중 열반에 든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소림사의 방장으로 추대를 받은 승려가 바로 눈 앞의 홍고였다.
참고로 신권이란 건 훗날 눈썹이 새하얗게 될 때 즈음에 얻는 별호로 지금의 흥고는 아직 중년이었다.
“백보권승(百步拳僧)을 뵙습니다.”
주서천이 얼른 인사했다.
강호의 선배를 향한 인사이기도 하나,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미래이자 과거, 전란의 시대에서 활약하여 여러 사람들을 구원한 영웅에 대한 예의였다.
홍고도 반장을 하며 가볍게 인사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낭패로군!’
주서천이 속으로 혀를 찼다.
훗날 소림의 방장이자 상천십좌인 영웅을 만난 건 좋은데, 별로 좋지 않은 시기에 만났다.
사실상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필이면 소립의 명예를 목숨보다 아끼는 걸 넘어 집착하는 양반을 만나다니, 운도 지지리 없지.’
다음 대 방장이자 신승으로 불릴 홍고는 명예를 중시하는 전형적인 정파인이었다.
구파일방의 일원으로서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으나, 불학을 공부하는 승려치곤 자존심이 심히 높았다.
젊었을 적엔 특히 이 점이 유독 심하여 강호만 출두하면 이와 관련된 문제로 사고까지 쳤다고 한다.
다만 특이한 것이 이 명예에 대한 집착은 개인이 아닌 소림사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즉, 홍고라는 개인에 대한 욕설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거나 혹은 자신에 대해 고찰하며 반성 했다.
그러나 그 욕설이나 비난이 혹 사문으로 향한다면 화를 참지 못했는데, 이게 유독 심하였다.
‘신권 앞에서 그를 욕하되 소림은 욕하지 말라.’
훗날 강호에 떠돌 말이다.
‘그 집착이 소림을 전성기로 이끌었으니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홍고가 지닌 소림사에 대한 자부심은 몹시 대단했고, 이를 더럽히지 않으려 무공을 수련하였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그 집념이 있었기에 일찍이 무(武)에 대한 꽃을 피워 훗날의 신권이 됐다.
무엇보다 홍고가 대단했던 건 개인의 무위가 아니라 방장이 되기 전부터 한 후계 양성에 있었다.
소림의 권위나 명예를 실추시키고 싶지 않았던 그는 이를 유지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그 결과 후학들 중에서도 고수들을 여럿 배출했다.
당시에는 무에 대한 탐욕이 과하다면서 삼독(三毒)에 빠진 것이 아니냐며 소림 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뒤 전란의 시대가 찾아오면서 활약해 비난은커녕 찬사를 받아 만장일치로 방장에 올랐다.
‘지금의 나에겐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란 말이다!’
노년에는 그래도 성질이라도 죽였지, 지금은 한창인지라 현 방장과도 마찰이 있다 할 정도다.
“소승의 의문을 풀어 주시겠소?”
홍고가 눈을 부라리면서 은근슬쩍 압박을 줬다.
‘소림에 널린 것이 중이거늘, 하필이면……”
한숨이 입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골치가 아파오려는 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보란 듯이 나타나다니, 최악이었다.
‘아니, 잠깐.’
주서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가 이상하다.’
홍고의 신분이 낮은 건 아니다.
그러나 실전된 비급, 그것도 신공을 홀로 회수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소림 내에서 위치가 높다 할지라도 방장 본인이거나 혹은 소림의 여러 불경과 비급을 책임지는 장경각주(藏經閣主)가 아닌 한 힘들다.
“그 전에, 제가 신공을 전달하려는 사실을 방장께서도 아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홍고의 굵직한 눈썹이 구부러졌다.
‘역시나!’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반야신공의 회수다.
그걸 뒤로 한 것이 이상했다.
무엇보다 소림의 숙원을 풀 수 있었던 기회를 없앤 것을 반야신공으로 눈감아 주기로 하지 않았나.
눈앞의 험상궂은 인상의 승려가 가짜일 리는 없을 것이고, 아마 독단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컸다.
‘신권이 젊었을 적에 혈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해서 많아 봤자 삼십 대라고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중년이 돼서도 이리 막무가내로 행동할 줄은 몰랐다.’
연령을 보자면 대충 마흔 살 정도 된 것 같다.
아직 완전한 중년은 아니지만 그래도 혈기가 넘칠 때는 아니거늘, 명예만 관련되면 공사를 구분하지 못했다.
이 집착은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다.
최종적으로는 소림을 강하게 만들었으나, 눈앞을 흐리게 했다.
그가 정말로 소림을 제대로 이끌어 전란의 시대에 활약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들었다.
“저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백보권승께서도 알다시피 제가 임무를 수행 중인지라 한시라도 빨리 이것을 전하고 싶은 걸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주서천이 허리를 숙여 공손한 어조로 답했다.
홍고와는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소승이 뭘 추궁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벼이 던진 질문에 답해주셨으면 하는 바요.”
그러나 홍고는 쉬이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독단인 것을 알고 있다며 돌려 말했음에도 홍고는 모르는 척하며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어찌하여 혈근경을 불태운 거요?”
‘아, 미치겠네!’
남만에는 사람 말을 따라하여 반복한다는 앵무(鵬鷄)라는 새가 있다던데, 홍고가 딱 그랬다.
승려는 눈을 부릅뜬 채로 불경 대신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던졌다.
말하지 않으면 당장이 라도 저 큼지막한 손으로 위협할 것 같은 기세다.
‘임무를 들먹이면서 강하게 나갈 수도 있지만……’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 관계를 틀고 싶진 않았다.
“아실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 쟁탈전이 매우 격렬하였습니다. 혈승이라는 과거의 마두를 두고 눈을 벌겋게 뜬 채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점잖은 어조로 그럴싸한 거짓말을 했다.
따지고 보면 전부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매화정검께선 그 낯이 질긴 모양이오.”
부처의 자비는커녕 수라의 분노만 보였다.
“방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건 매화정검도, 화산파도, 무림맹도 아닌 소림이오.
무엇보다 혈근경은 소림사에게 전달된다는 사항이 알려지지 않았소? 혹시 말하지만 몰랐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그대가 만약 정말로 모르고 저질렀다면 이렇게 의아해하지도 않았을 거요.”
‘이렇게까지 골치 아플 줄이야.’
어떤 대답을 듣든 간에 끝을 볼 생각이었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만!”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불호령이 떨어졌다.
“……!”
홍고가 몸을 움찔 떨었고, 주서천은 몸을 돌렸다.
‘저 사람은 혹시……!’
그다지 크지 않은 체구,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느껴지는 분위기는 압도적이다.
새하얀 눈썹이 유난히 길고, 잘 다듬어진 수염 역시 눈부실 정도로 새하얗다.
주서천은 눈앞의 노승(老僧)을 보고 직감적으로 그가 현 방장이자 상천십좌인 신승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부님……”
아니나 다를까 홍고의 중얼거림이 추측을 뒷받침한다.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느냐?”
신승, 혜만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으나 흥고는 말없이 허리만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신공의 전달 사실은 누가 들었든 간에 알렸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그걸 숨겼느냐. 네가 입막음하려던 아이가 의아함을 느껴 고하지 않았더라면 필시 큰일이 일어났겠지.”
소수만 알아챌 수 있던 암호문으로 둔갑한 방문록은 문 앞을 지키던 승려가 최초로 건네받았다.
그러나 보고되던 중 하필이면 홍고를 거치게 됐다.
만약 신공의 전달자가 타인이었다면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겠으나, 주서천이란 걸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말거라.”
주서천은 방장실로 되돌아와 혜만과 독대했다.
“나무아미타불, 주 시주께 못난 제자가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신승께서는 말을 편히 해 주십시오.”
화산의 장문인과 동일한 배분, 심지어 소림의 현 방장이자 상천십좌가 극존칭을 쓰자 주서천이 기겁했다.
혜만은 언제 노기를 드러냈었나는 듯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최근에 확인한 사실에 의하면 전달자가 신공을 발견하고, 또 안전하게 운반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오면 주 시주께서는 소림의 은인일진대 어찌하여 말을 편히 하겠습니까?”
“신공을 찾은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았을 뿐이고, 소림에 전달하는 것은 무림인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신승께서는 말을 편히 놓아주십시오.”
주서천이 빌 듯이 애원했다.
실제로 위가 저릿저릿 아파 와서 버티기 힘들었다.
“내 그럼 그리하겠네.”
결국 몇 차례 애원한 끝에 편해질 수 있었다.
“그나저나……”
혜만은 실눈을 뜨곤 주서천을 놀랍다는 듯이 쳐다봤다.
“강호의 소문은 으레 과장된 법이네만, 주 시주를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구먼. 과소평가되었어.”
처음에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제자의 경솔한 행동을 탓하느라 그다지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방장실로 데려와 직접 달인 차를 대접하고 있을 때, 숨겨진 무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직 약관 정도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 절정이나 초절정이 아닌 화경에 올랐을 때는 눈을 의심했었다.
‘허어! 화산에 이러한 인재가 있을 줄이야!’
천하제일이라 일컬어지는 소림에서조차 서른도 전에 화경에 오른 경우는 고금에서도 손에 꼽는다.
소림의 치부이며 동시에 전무후무했던 재능의 소유자였던 혈승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무아미타불. 맹주가 그리 자신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구나.’
누구인지는 밝힐 수 없으나 안전성만큼은 걱정할 것 없을 것이라며 호언장담했다.
혜만은 그 말을 듣고 천하백대고수로 구성된 특무대라도 보낸 것은 아닌가 등의 온갖 추측을 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특무대는커녕 고작 한 명에게 맡겼으나, 그 한 명이 화경의 고수였다.
눈앞에 있지 않았다면 혜만조차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른은커녕 고작 약관밖에 되지 않았거늘 화경에 올랐다니.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렇게 어린데 화경에 오르다니. 재능이 보통 뛰어난 게 아니다. 게다가 무골(武骨)까지 타고났으니 정말 무공을 위한 아이로구나.’
주서천의 무골은 그저 그랬지만, 환골탈태한 이후로 무공에 적합한 육체와 골격을 얻었다.
그러니 신승이 오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 정도 되는 재능이라 하면 자만하기 마련이거늘, 그러기는커녕 겸손하기만 하고……’
혈기 어린 나이라면 보통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마련이다.
명문 대파 출신이면 더더욱 그렇다.
하나 매화정검에 대해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 아닌가.
물론 그 전에도 별호는 있었지만 알다시피 봉추였다.
‘눈 또한 이리 맑거늘, 비록 잠시라도 주 시주에게 어떠한 의도가 있었다고 의심한 것이 부끄럽도다.’
혜만은 속으로 불호를 외며 반성했다.
“혈근경을 불태워 소림의 숙원을 풀 기회를 없앤 것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후학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주서천이 극진한 예우를 담아 인사했다.
“아닐세. 주 시주는 마공서로 인해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원치 않은 순수한 의도로 그러지 않았는가. 게다가 이렇게 직접 찾아와 사과까지 했을 뿐더러 무엇보다 실전된 신공을 되찾아 주었네.”
‘휴우!’
대화가 부드럽게 진행되자 주서천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공이 아니었더라면 척을 졌을지도 모르겠군.’
이러한 분위기도 반야신공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미리 손에 넣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임무도 무사히 완수했으니,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벌써 갈 생각인가?”
혜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무리 절이라 할지라도 은인을 푸대접할 정도로 힘들지는 않네. 무엇보다 이 낭보를 한시라도 빨리 알려 여럿에게 성대한 환영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소림이 어디 보통 절인가.
속가제자들이 보내오는 공양만 해도 재정적으로 충분히 풍족하다.
혜만의 말에 주서천은 그저 쓰게 웃기만 하였다.
실전된 무공, 그것도 반야신공을 전달해 준 것은 확실히 문파의 은인이다.
그러나 그 은인이 동시에 소림의 숙원을 풀 수 있던 기 회를 없애 버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혜만처럼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있으나, 홍고처럼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아무리 승려라 할지라도 열반에 오르지 않은 이상 분노나 적의가 없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괜히 성가신 일에 엮일까 싶어 걱정됐다.
“아닙니다. 저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좀 더 신세를 질 생각이었으나, 아무래도 수행하고 있는 임무가 있어 그렇게 오래 있지는 못합니다.”
“그런가.”
혜만이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주서천이 그런 혜만을 보고 물었다.
“혹 무언가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소림의 부탁이라면 웬만하면 들어주는 편이 좋았다.
미래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그게 정말인가?”
혜만의 안색이 금세 환해졌다.
주서천은 속으로 괜히 말을 꺼냈나 싶어 후회하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혜만의 부탁은 다행히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나, 주서천 입장에선 조금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홍고와 비무를 해 줬으면 하네.”
소림의 방장인 혜만에게는 언제나 고민이 여럿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제법 오래된 고민이 하나 있었다.
백보권승, 홍고.
하나뿐인 제자의 일이었다.
홍고는 타고난 무재였다.
소림 역사상 손꼽힐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최고수의 재목이었다.
어릴 적부터 누구보다 부지런하여 일생에 나태라는 말을 모르고 살아오며 무공도 불학도 열심히 했다.
성실함도 성실함이지만 남을 배려하는 마음 등의 성품도 나쁘지 않았다.
또한 항상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어 소림 내의 동자승에게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온갖 예쁨을 받으며 자라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만에 빠지지 않아 위 배분의 승려들이 그를 보고 깨우침을 얻을 정도로 흠잡을 것 하나 없었다.
굳이 특이 사항을 꼽자면 평소의 가르침이나 소림에 대한 자부심이 조금 과한 정도였으나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사문이나 스승의 가르침에 자부심을 갖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그러나 홍고가 강호에 출두할 무렵, 혜만은 이 이상함을 진작 느꼈어야 했다고 통탄했다.
“홍고 그 아이는 소림 외에 다른 곳들을 경시하고 있다네.”
홍고는 누가 자신을 욕보여도 뭐라 하지 않았다.
화내기는커녕 옅게 웃을 정도라 한때는 활불이라 불렸을 정도였다.
심지어 철천지원수인 마도인에게 뭐라 들었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다음 사문을 욕하는 말을 들었을 때, 홍고는 눈을 까뒤집으면서 승려가 아닌 수라가 됐다.
무림인에게 있어 사문을 욕보이는 것은 곧 부모나 집안 전체를 욕먹이는 것이니 화내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으나 홍고는 그 정도가 심했다.
심지어 언제는 정파인과의 대화 중에서 약간의 비아냥을 듣고 그 상대를 죽기 직전까지 만들었다.
도인도 아니고 분노를 삼독 중 일독으로 지정하고 살생을 금해야 하는 승려가 그리 행동하니 문제였다.
혜만은 그제야 제자의 심각함을 느껴 몇 번이나 혼내고 가르침을 줬으나, 이미 때는 늦은 이후였다.
“사문이 제일이라는 자부심 자체는 나쁘지 않네만, 정도가 과한 것이 문제야. 그 외의 공부를 경원시하고 있다간 오만이라는 어리석음에 빠질 걸세.”
보통 그러한 자만은 강호에서 겪는 쓰디쓴 패배에 해소되곤 했지만, 홍고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홍고는 천하제일이라 생각되는 소림의 무공을 수련했음에도 패배라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비상한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도 더한 수련을 겪으며 강해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한데 그 노력을 순전히 소림의 가르침과 무공 덕이라 여기니 그건 그거대로 대단한 사고방식이었다.
‘끄응.’
주서천이 앓는 소리를 내려다 참았다.
홍고를 상대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초절정이라면 살의를 내지 않고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경험이 적으면 또 모를까, 비록 그가 전생에서 하수나 중수와의 전란만 겪었어도 그 횟수는 많았다.
‘내가 이렇게 멋대로 개입해도 되나?’
제갈승계야 개입하지 않으면 비참한 삶을 살다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 외의 영웅들은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성장했다.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홍고가 비록 전란 전에 여러모로 사고를 쳤어도 결과적으로 보면 소림의 영웅으로 성장했다.
결과가 바뀔 것이 두려웠고, 무엇보다 그렇지 않아도 인상이 좋지 않은데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았다.
“못난 제자를 둔 이 노승을 도와주게나.”
“시, 신승!”
신승이 염주 알을 굴리며 허리를 숙이려 하자 주서천이 재차 기겁하면서 말렸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러지 말아 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고맙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