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三章 (88/254)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사굴의 암시장은 형편이 좀 나았지만, 지하 투기장은 아니었다.

완전히 쑥대밭이 됐다.

평소 연줄이 있던 관리에게서 이번에는 심했다며 쓴소리가 나왔고, 여러모로 안 좋은 소리가 나왔다.

영구히 잃은 것은 아니나 치안이 좋지 않으니 큰손인 손님들의 발걸음이 당분간 끊길 터.

그로 인한 손실도 위가 아프지만, 정보원으로 쓰던 비소돈의 인력도 전부 잃어 짜증이 치솟았다.

‘이 일이 해결되기 전까진 보고를 올릴 수 없어.’

그렇지 않아도 계속된 실패로 분위기가 좋지 않다.

‘어차피 대단한 일도 아니니 바로잡는 게 먼저다.’

문제 자체는 크지 않았다.

사람이야 다시 구하면 그만이고, 지하 투기장 자체도 괴멸한 게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복구된다.

신경 쓰이는 건 계속된 실패로 신경이 잔뜩 곤두 선 암천회주와 천기였다.

그 심기를 되도록 건들고 싶지 않아 선조치 후 보고할 생각이었다.

‘일단 인독종의 수완이 나쁘진 않으니 복구하도록 내버려 둬야겠구나. 빠르게 처리한다면 손가락으로 끝내 주마.’

* * *

요 일주일 동안 강능초는 동서를 완벽하게 흡수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룻밤 만에 역사를 이룬 압도적인 실적만큼 좋은 건 없었다.

하나같이 그를 두려워했다.

세간에선 혹시 인독종이 하오문주의 자리까지 넘보는 것이 아니나는 말이 조심스레 나왔다.

다만 오랫동안 군림했던 하오문주가 무서워 다들 속으로만 삼킬 뿐 입 바깥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인독종의 이름 앞으로 한 장의 서신이 도착한다.

발신은 삼인방 중 한 명인 음살녀였다.

“축하한다면서 연회에 초대하겠다고 하는데, 초대된 건 나 혼자가 아니다. 네 이름도 있더군.”

강능초가 서신을 받자마자 주서천에게 건냈다.

서신의 내용 중에는 무음사자의 이름도 껴 있었다.

“어디로?”

“남화루(南火樓).”

음살녀의 영역에 있는 남쪽은 환락가다.

청루와 홍루가 정주에서 제일가는 기루라 한다면, 그 외의 기루는 남쪽의 환락가에 밀집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청루와 홍루와 견줄 정도의 기루가 있는데, 그게 바로 남화루다.

“함정이 의심된다면 연회 장소를이쪽에서 정해도 상관없다고 하는데, 어찌하겠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우리 쪽에서 간다.”

강능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화루.

타오를 듯이 붉고 화려한 전각이 눈에 띄었다.

정주의 환락가 중에서도 유난히 밝다.

한 층당 일 장을 좀 넘는 높이가 십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멀리서도 잘 보이는 편이었다.

주서천과 강능초는 날이 어두워지자마자 남화루로 향했다.

미리 기별을 받은지라 오늘 남화루에는 손님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녀들이 둘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호위 분들은 어디계십니까?”

“한 사람뿐이다.”

강능초의 대답에 기녀들과 종업원들이 놀랐다.

‘정말로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자신감을 넘어서 미친 게 틀림없다.’

‘환락가는 루주님의 영역.그것도 음살녀가 기거하는 곳에 호위를 한 명밖에 데려오지 않다니……’

‘설마하니 인독종과의 동맹이 거진 체결된 걸까?’

사람들은 속으로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말로 꺼내지 않고 기색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만약 옆의 호위가 무음사자란 걸 알게 된다면 놀라 까무러쳤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기녀에게 안내를 받아 계단으로 향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장식도 화려해졌다.

손님들이 없었기에 최상층인 십 층에 금세 도착했다.

“루주님. 손님들을 데려왔습니다.”

“어머나. 호호호. 오셨군요?”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며 미닫이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이제 막 서른이 되어 농염한 미색을 풍기기 시작한 미인이 앉아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인독종과 무음사자를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무음사자라는 이름에 안내해 준 기녀가 몸을 흠칫 떨었으나 금세 원래대로 돌아와 평정을 되찾았다.

어떠한 사내도 오지 못했다는 남화루의 최상층에 도착한 주서천과 강능초는 적당한 곳에 앉았다.

“일단 대화를 나누기 전에 연회의 준비부터 해야지요. 금방 끝나니 걱정 마시길 바랍니다.”

음살녀가 오른손을 들자 옆의 문이 열리면서 기녀들이 쪼르르 들어왔다.

열 살 무렵의 소녀부터 시작해서 서른 살 무렵의 미부인까지 있었는데, 하나같이 미색이 뛰어났다.

그녀들은 진수성찬이 올라온 상을 들고 와 앞에 조심스레 두며 눈웃음을 보냈다.

“대인~”

“너무 멋있으셔요.”

하나같이 사내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기녀였다.

뽀얀 피부만큼 목소리도 고왔다.

그중에는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의 기녀도 있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개성으로 가득했다.

“자아, 일단 한 잔 받고 시작하지요.”

음살녀가 눈웃음 지으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얼른 받으세요.”

남화루에서 자랑하는 명주랍니다.”

곁에 바싹 붙어 앉은 기녀들이 술잔을 건냈으나 주서천도 강능초도 목석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옆에서 옷을 보란 듯이 흘러내리며 유혹했지만, 둘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음살녀.”

주서천이 움살녀를 노려보듯이 쳐다봤다.

“괜한 시간 소비하고 싶지 않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대가 최근 이름을 알리신 무음사자시군요.”

음살녀가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차갑게 웃었다.

“괜한 시간이라뇨. 사신께선 이곳이 왜 남화루라 불리는지 아시나요?”

“관심 없다.”

“몸도 마음도, 모조리 태워 버리기 때문이지요.

사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밤을 보낼 수 있답니다? 원하는 취향이 있다면 말씀해 보세요. 전부 맞춰 드리죠.”

“하오문주가 내 취향이야.”

음살녀의 입가에서 능글맞았던 웃음이 사라졌다.

“그분을 모욕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러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자. 나 바쁘다.”

“마찬가지다. 음살녀.”

강능초가 동조했다.

‘이 건방진 것들이……’

음살녀가 입술을 질끈 물어뜯었다.

특히나 얼마 전까지 별거 아니었던 인독종이라는 애송이에게까지 무시받는 게 참을 수 없었다.

‘가슴만 조금 보이면 발정 난 개새끼처럼 꼬리를 흔들 주제에…… 문주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진작 내 밑에 깔고 그 건방진 혀부터 뽑았을 게다.’

살의 어린 충동을 겨우겨우 참아 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방금 전까지 애교를 부리던 기녀들이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나가지는 않고 벽 앞에 붙어 앉았다.

“사실 여러분을 부른 것은 연회가 아니라 하오문주께서 전하실 말씀이있어서랍니다. 아실지 모르나, 그대들이 죽인 돼지와 독사는 본래 저까지 합하여 하오문주님의 수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오해할 것 같아 말씀드리지만, 그들을 죽인 것을 탓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에요. 하오문, 아니 흑도에서 약자는 죽기 마련이지요. 두 사람을 부른 건, 그 자리를 비소돈과 독사검 대신에 이어받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흠.”

강능초가 턱을 긁적였다.

“선배로서 충고하건대, 괜히 어리석은 자만에 빠지지 말고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랍니다.”

과거의 삼인방 모두 권좌에 오르자제안을 받았다.

당연히 뭔 헛소리냐면서 코웃음 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얼마나 주제넘었는지 깨닫게 됐다.

“하오문주께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지만 ……”

“관심 없다.”

두 사내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답했다.

“너희 사귀니?”

그걸로 음살녀의 인내심도 끊겼다.

얼굴이 걸레짝처럼 일그러졌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긴 뭘 안 드러내.”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몸이 흥분으로 잔뜩 힘이 들어갔다.

입가엔 비틀린 미소가 번졌다.

음살녀가 뭔 소리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 눈에는 ‘어떻게?’ 라는 의문이 묻어났다.

주서천은 제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 시선 끝에는 앉아 있는 기녀가 있었다.

“……풋.”

묘령의 미녀가 입가를 가린 채 웃음소리를 흘렸다.

피부가 눈처럼 새하얗고 소매가 유난히 길었다.

외관만 보자면 방년의 처녀이나 신기하게도 미부인만큼 농염한 색기가 흘러나왔다.

“푸후후…… 깔깔깔!”

‘찾았다.’

암천회의 천선성, 하오문주.

그녀에 대해 알려진 건 그다지 없다.

정보를 관할하는 만큼 자신에 대해서 숨기는 것도 능숙했다.

알려진 것이라곤 하오문주이며 대단한 미녀라는 것.

그리고 무공 정도였다.

“아가야, 잘도 눈치했네.”

하오문주 천선이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놀란 건 주변에 있던 기녀들이었다.

“무음사자라고 해 봤자 어차피 흑도의 수준이라 생각해서 우습게 봤는데, 생각보다 제법이야.”

천선이 제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자, 음살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비켜서서 부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녀들은 멍하니 있다,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원래라면 지하 투기장을 엉망으로만든 대가로 사지를 찢으려 했는데……”

천선은 장죽(長竹)을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후아아……”

두툼한 입술 사이에서 탁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생각이 좀 바뀌었어.”

“어떻게?”

“초절정인 줄 알았지만, 화경을 앞에 둔 정도일 줄은 몰랐지.

아무리 대충 숨긴 것이라지만 나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는 건 보통이 아니니까. 칭찬할게.”

“화, 화경……”

음살녀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거의 평생을 매달려 절정에 겨우 오른 그녀 입장에서 화경이란 경지는 까마득했다.

기껏 대단해 봤자 초절정을 앞두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화경을 앞두었다면 이름만 알려져 있지 않지 천하백대고수 안에 능히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나는 의외로 관대한 사람이야. 너희가 최근에 사업장을 망친 건 괘씸하지만, 능력을 봐서……”

“하하.”

무심코 웃음이 튀어나왔다.

“왜 웃니?”

천선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

그러나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웃음이 납득할 만한 이유라면 넘어가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

“아니, 생각보다 할 만할 것 같아서.”

“설마하니 천장에 숨겨 둔 것들을 믿는 건 아니지?”

가늘게 떠진 눈 사이로 섬뜩한 빛이 흘러나왔다.

주서천은 대답 없이 천선과 눈을 마주봤다.

천선도 말없이 주서천은 가만히 노려봤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

맥박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뚝, 하고 떨어진 순간 천선의 눈이 감겼다.

파앙!

주서천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소매에서 흘러내린 비수를 기다렸다는 듯이 쏘았다.

비수의 날이 대기에 구멍을 뚫으며 긴 궤적을 남겼다.

그리고 표적의 목에 닿으려는 순간.

멈춘 것이나 다름없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천선이 손에 쥔 장죽으로 비수를 후려쳐 튕겨 냈다.

휘리릭!

튕겨져 나간 비수가 허공에서 회전했다.

그 아래로 주서천이 지면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강능초!”

그 이름을 불렀을 때, 강능초는 이미 일어나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음살녀는 맡긴다!”

쿠웅!

천선에게 향하는 길목 위에 있던 천장이 갑작스레 꺼졌다.

칼로 벤 것처럼 깔끔하게 잘린 구멍에서 나온 건 한동안 쓰지 않았던 월오삼검, 태아를 든 소령이었다.

앞으로 쏘아져 나간 주서천은 소령에게서 태아를 건네받으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전력을 쏟아 냈다.

우르릉!

벽력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온다.

그다음으로 단전에서 쏟아져 나온 기가 응집해 강기를 만들어 냈다.

그야말로 찰나.

동시에 강기가 격렬하게 회전하며 진동하는 것처럼 웅웅 소리를 토해 내며 날뛰었다.

‘천선!’

유령들 가라사대, 암살에서 중요한 건 적을 방심시키고 속이는 것이라 하였다.

의도를 들킨 순간 암살이 실패한 것이니 적의 시선을 돌리거나 혹은 완벽히 숨기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일부러 처음 만난 순간부터 속이고 속였다.

정보를 관할하고 중요시하는 천선이라면 반드시 무음사자에 대해 조사할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기다리고 있는 건 무음사자가 ‘자객’이라는 정보.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천선이 상천십좌, 아니 검마 정도만 됐어도 경지가 알려져 통하지 않았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화경에 가까운 초절정의 자객.

그 정보를 주입시키고 확신시켰다.

그리고 천장에 유령들을 숨겨서 비장의 수를 준비한 것처럼 허초로 만들었다.

‘할 만한 것 같다고?’

헛소리!

암천회가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칠성사 수뇌의 치밀함과 강함 또한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들을 얕보는 순간 패배한다.

그걸 명심하고 있었기에 몇 번이나 생각하고 생각해서 계획을 세웠다.

‘자하!’

모든 걸 속여서, 일격에 끝낸다.

‘개벽!’

회전하는 강기를 머금은 검이 쏘아진다.

그 경로에 있는 공기가 터지고 찢어지면서 성난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 검극을 코앞에 둔 천선은 놀랍게도,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몸이 반응했다.

‘뭔……’

천선의 섬섬옥수가 재빠르게 올라온다.

손끝에서부터 손목이 창백할 정도로 흰 게 특징이었다.

위험을 감지하고 반응한 신체는 코 앞까지 다가온 강기를 받아칠 수 있도록 강한 힘을 뿜어냈다.

콰―앙!

머리가 울릴 만큼의 굉음이 터졌다.

동시에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면서 충격파를 만들었다.

그 힘의 여파는 파도가 되어 주변을 슥 훑었다.

“꺄아앗!”

벽에 서 있던 기녀들이 충격파를 이겨 내지 못하고 날아가 바닥을 불썽사납게 구른다.

불행하게도 그 여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희미하게 자색을 띠는 검강과 눈부실 정도로 흰 백색의 장강이 마주한 채로 주변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간다.

“……?”

천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화산파의 신공보다는 검극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무식한 공력에 대경했다.

입으론 신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머릿속에선 의문과 불신이 동시에 떠올랐다.

‘말도 안 돼!’

천선은 묘령으로 보이지만 실제 연령은 훨씬 많다.

화경에 오르면서 노화가 늦춰진 것도 있지만, 음살녀처럼 주안술과 색공을 수련했기 때문이다.

정기를 빨아들여 목숨을 빼앗은 남자들의 숫자만 해도 네 자릿수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실제로는 상천십좌와 동시대에 살았던 노파이며, 그만큼 쌓은 내공량도 보통이 아니다.

무엇보다 암천회에 입회한 뒤로는 영약이나 정기 등을 끊임없이 지원받아 일반적인 수준을 넘겼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아무리 급하게 끌어 올렸다고 한들 상천십좌가 아니라면 대응할 수 없는 내공량을 받아쳤다.

아니 , 받아치는 걸 넘어서 밀어내고 있다.

그 사실에 경악했으나, 놀라고만 있지 않았다.

“이익!”

오른손을 위로 쳐올렸다.

장강에 맞닿던 검강도 그 힘에 이끌려 방향을 꺾었다.

미간을 노리던 검극은 최초로 전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색의 벽을 전부 뚫지 못하였다.

힘을 급격하게 끌어 올린 천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과하게 힘을 써 내장이 저릿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격렬하게 부딪치던 강기가 방향을 틀면서 멈췄고, 그에 따른 충격파도 사라졌다.

그러나 안심하기도 잠시.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충격에 의하여 신체가 뒤로 넘어가려는 순간.

“후웁!”

주서천의 오른팔 근육이 부풀어 오르면서 퍼런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인다.

천장을 향해서 위로 튕겨져 나간 검은 거짓말같이 멈추며, 이윽고 아래를 향해서 무섭게 떨어졌다.

머리를 쪼갤 기세로 내려오는 검을 본 천선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쌍장(雙掌)으로 받아치려 했다.

‘이걸 노렸구나!’

급히 끌어올린 내공으로는 한계가 있다.

막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다음에 틈이 생긴다.

게다가 방금 전 일격 탓에 몸이 밀려나 비스듬하게 세워졌다.

정상적이라면 제대로 된 힘을 낼 수 없다.

모든 걸 쪼개 버릴 것 같은 기세를 뿜어내던 일검(一劍).

그 순간, 천선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

방금 전의 그 기세는 어디 갔는지, 검이 구름처럼 둥실 떠오르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그 대신 보인 건, 왼팔을 뒤로 힘껏 내빼면서 주먹을 쥐는 모습이었다.

‘허초의 허초의 허초!’

비수와 자하개벽과 내려 베기 전부 눈속임.

찰나 동안 무리했던 하단전을 쥐어짜 낸다.

독혈곡과 당가에서 얻어낸 독기를 끌어 올렸다.

배꼽 아래에서부터 용솟음친 기운은 가슴 부근의 천지혈(天池穴)을 지나쳐 천천(天泉)으로 향한다.

이윽고 곡택(曲澤), 극문(邸門), 간사(間使), 내관(內關), 대릉(大陵), 노궁(勞宮), 손가락 끝자락의 중충(中衝)까지의 수궐음심포경(手闕陰心包經)을 지났다.

전력을 걸었던 것처럼 보였던 오른손엔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다.

전 감각을 왼손에 집중한다.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수축과 이완이 반복되면서 열기를 뿜었다.

녹안만독공의 일성은 독에 물들여 내성이 생기고, 이성은 독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삼성부터는 근접에 한해서 타격에 실을 수 있어 접촉만 한다면 중독된다.

어떠한 초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능히 목숨을 위협하는 주먹이 완성됐다.

슈슈슛!

허리와 어깨를 비틀면서 회전력을 가하고, 속력이 붙으면서 그 위력을 높인다.

시원스러울 정도로 터지는 파공성과 함께 떨어지는 그 주먹은 마치 철퇴를 연상시켰다.

어찌어찌 막아 보려고 하지만 아무리 초인적인 반사 신경과 무위가 있더라도 불가능하다.

손은 머리 위를 막으려 하고 있고, 신체는 비스듬하게 세워진 채로 서지도 눕지도 못한 채 허공에 떠 있다.

그리고 환영한다는 듯이 열린 복부 위로 주먹이 내리꽂혔다.

쿠-앙!

철퇴가 떨어졌다.

그 충격파가 고스란히 온몸으로 전해졌다.

정기로 매끈해진 피부가 꿀렁이고, 그 아래로 충격이 고스란히 퍼진다.

“캬하악 …… !”

천선의 등이 활등처럼 굽어진다.

벌려진 입 사이론 피가 뿜어져 나와 안개처럼 흩어졌다.

손을 휘감았던 백색의 강기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비산했다.

콰아앙-!

굽어졌던 등이 다시 퍼진 순간, 굉음이 터지면서 최상충을 지탱하던 바닥이 ‘쩌적’ 하고 금이 갔다.

거미줄처럼 그어진 금은 얼마 가지 않아 전체로 퍼졌고, 천선이 있던 지면이 원형으로 꺼졌다.

꺄악!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녀들은 천장이 갑자기 꺼지자 비명을 내지르며 물러났다.

구 층에 떨어진 천선은 부러진 척추뼈의 감각에 절망감을 맛보며 피를 울컥 토해 냈다.

화경에 오른 이후로는 한 번도 다쳐 본 적이 없다.

잊힌 고통을 재차 맛보자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개새……!”

오른쪽 어깨를 뒤로 젖히면서 주먹을 쥐는 주서천이 보였다.

“아직 한 발 남았다.”

힘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여유 따위는 없다.

하나하나에 전력을 쏟아 부으며 주먹을 휘두른다.

그 눈동자에는 죽이겠다는 일념이 가득했다.

‘왜?’

그 눈과 마주친 천선이 의아해했다.

저건 살의를 넘어선 무언가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원수를,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로 보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서 살아왔다고 말하는 것처럼 원념이 보였다.

혹시 모르는 사이 원한을 진 것일까?

그 의문은 풀기도 전에 철퇴가 재차 떨어진다.

훌륭할 정도로 깔끔한 선.

그 목적지는 더 이상 막을 게 없는 얼굴이었다.

주먹이 콧대를 살짝 누른 순간, 다시 한번 벼락을 연상시키는 굉음이 터지면서 구 층 바닥이 꺼졌다.

“꺄아아아악!”

십 층 바닥은 중앙만 꺼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구 층이 전부 부서져 버렸다.

그 위에 있던 기녀들이 팔 층으로 떨어졌다.

팔 층에 있던 기녀들도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똑같이 비명을 질렀다.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껴 앞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그 먼지구름 속에서 기녀들이 기침을 토해 냈다.

연속된 주먹으로 인해 충격파를 받자 남화루의 기둥도 불안하게 끽끽 소리를 냈다.

“……”

최상층 끝자락에 서 있는 음살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 낯빛은 좋지 않게 창백해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머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무음사자가 이리 강했나 하고 생각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먼지구름을 내려다보던 음살녀는 순간 섬뜩한 느낌에 뒤로 재빨리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검줄기가 지나갔다.

음살녀는 머리를 들어 검의 주인을 확인했다.

“인독종……!”

“감이 좋군.”

낯빛이 좋지 않은 움살녀와 다르게 강능초는 딱히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무뚝뚝했다.

“순순히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흥, 미쳤다고 널 믿겠니?”

음살녀가 어림없다는 듯이 손바닥을 쫙 펼치자 장풍이 쏘아졌다.

강능초는 예견이라도 한 듯, 검을 크게 휘둘러서 마찬가지로 바람을 만들어내 장풍을 상쇄시켰다.

경지만 보자면 서로 엇비슷한 편이다.

초식 등의 무공 자체는 강능초가 우세했지만 내공 면은 음살녀다.

“하오문주는 죽었다.”

강능초가 구멍이 난 바닥을 힐끗 쳐다봤다.

“하오문은 이제 내가 이끈다.”

“호호홋!”

음살녀가 허리를 크게 젖히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하오문주가 겨우 이런 일로 죽을 것 같아?”

낯빛과는 다르게 태도가 당당하자 강능초는 의외인 듯 눈을 껌뻑였다.

“하오문주가 얼마나 괴물인지 너는 모를 거야. 천하가 문주에게 속고 있었어. 그녀는 사람이 아니야.”

자신감과는 다르게 무언가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 두려움의 종착지는 하오문주.

천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능초가 눈살을찌푸렸다.

음살녀가 말했던 대로 시야를 가렸던 먼지구름이 걷히면서 모습을 드러낸 건 하오문주였다.

“제발 저 아랫것들로 만족해야 할 텐데……”

그녀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떨렸다.

* * *

천선이 백옥처럼 흰 섬섬옥수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사나운 눈매가 눈에 띄었다.

“감히, 감히, 감히! 다른 곳도 아니고 얼굴을!”

듣는 것만으로 멈칫하게 만드는 분노였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가 보인다.

그 주변으로는 탄력을 잃은 피부가 보였다.

얼굴에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백색으로 물든 호신강기가 뿜어져 나와 막혀 버렸다.

아무리 대해와 같은 공력을 지녔다 할지라도 강기로 형성된 막을 부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천선이 막을 확장하면서 밀어내는 탓에 잠시 물러나야 했다.

“지독한 년!”

주서천이 혀를 내두르며 욕했다.

척추뼈를 부러뜨리고, 내상을 입혔는데도 용케 호신강기로 대응해 마무리 일격을 피했다.

“너!”

천선이 주서천에게서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고 팔을 옆으로 쭉 뻗어 근처에 있던 기녀를 잡아했다.

“꺄아아아……”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이제 막 높아지려던 비명이 멈추고, 목소리의 주인이었던 기녀가 순식간에 미라처럼 변했다.

새까맣던 머리카락도 노인처럼 새하얗게 변하고, 마치 오랫동안 굶은 것처럼 살은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동시에 천선의 얼굴도 변했다.

탄력을 잃고 주름졌던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걸 본 주서천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소수마공(素手魔功)……”

극음(極陰)이자 극마(極魔)의 마공!

마도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이름 높은 무공으로, 육대금공과 비견될 정도로의 악랄함을 지니고 있다.

수련하면 손이 새하얗게 변한다거나, 북해의 빙백신장(氷白神掌)과 견줄 정도의 음기는 중요치 않다.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특징에 불과했다.

정말로 악명이 자자한 건 그 수련법에 있었다.

양(陽)이 남자라면, 음은 여자이다.

소수마공의 근원은 음기이기에, 이 음기를 채우기 위해선 여성에게서 가져와야만 했다.

말이 좋아 가져오는 것이지, 실상은 흡성대법( 吸星大法)처럼 빼앗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칠순이 넘는 나이에도 영원에 가까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

또한 먹이가 될 자가 연령이 낮으면 낮을수록 좋고, 그중에서도 순결을 잃지 않으면 더욱 좋았다.

“순순히 죽을 것이라곤 생각하지마라.”

주서천은 천선을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한 번 훑어본 뒤,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소리쳤다.

“주변에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무언가 수상찍어 보이면 처리해!”

모여 있던 기척들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니?”

천선이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일 것 같아?”

주서천이 예리하게 떠진 눈으로 다시 천선을 훑어봤다.

흘러내린 옷자락 탓에 보이는 살결 따위를 보는 게 아니라, 굽어진 등이나 음기를 내뿜는 손을 봤다.

‘검선에게 후인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 없을 뿐더러, 수준 급의 독공까지 연공했다고?”

‘과연, 천선성.’

괜히 암천회의 정보를 총괄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정보량만 따지면 천기보다 위였다.

급습이 이뤄진 절체절명의 순간에 딱 한 번 본 것뿐인데 검초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누구긴 누구야. 무음사자지.”

말과 함께 천근추의 수법으로 체중을 실어 발을 굴렀다.

바닥에 꽂혀 있던 태아가 충격에 튀어 오르며 화려하게 회전해 주서천의 손에 잡혔다.

“아까 전에 주름이 생겼던 걸 보니 음기를 상당히 소모한 모양인데, 괜찮겠어?”

“방심해서 약간 다쳤을 뿐, 아무렇지도 않……”

“그으래?”

말을 끊어 내면서 몸을 날렸다.

방금 전까지 내공을 상당 부분 소모했는데도 그 몸놀림은 번개와 같았다.

“어림없어!”

천선이 콧방귀를 끼면서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손날로 후려쳐서 튕겨 냈다.

“하!”

손날에서 새하얗게 물든 아지랑이가 흘러나오며 검을 감싸 안았다.

그 월오삼검조차 소수마공의 극음의 기에는 버티지 못하고 한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파바밧!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앞부분 초식을 날렸다.

천선은 전대와 현 매화검수의 인적사항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검초를 막아 냈다.

하나도 회피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초식을 막아 내는 그 손놀림은 입이 절로 떡 벌어진다.

거기에 모자라 손에서 방출되던 극음의 기가 점차 많아지면서 태아를 꽁꽁 얼리려 했다.

서서히 얼어붙는 검을 확인한 주서천은 뒤로 재빨리 물러나 천선과의 거리를 벌렸다.

“호호호.”

천선이 어떠나는 듯이 소리 높여 웃었다.

“하오문주.”

주서천이 검을 가볍게 휘둘러 서리를 털어 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에는 경의를 표하마.”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방금 전의 공수 교환으로 확실해졌다.

천선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하기야 아무리 주먹질이라 할지라도 무방비한 상태로 전력을 다한 일격을 맞지 않았나.

그 정도의 내상을 입었는데 음기를 흡수한 걸로 치유된다면 소수마공은 천하제일의 신공이다.

“아까부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건 알고 있나?”

“……”

천선이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척추가 부러져 허리를 펴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내력으로 그 주변의 근육을 조정하지 않는다면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정면으로 꽂혔던 복부 안의 내장도 엉망이 되어 버렸고, 신체 곳곳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보통이 아니었다.

“대단해. 정말로 대단해.”

비꼬는 것이 아닌 순수한 감탄이었다.

“그래서 난 너희 암천회가 싫어.”

“뭣……!”

푸욱!

천선이 눈을 부릅떴다.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름.

그 일순간의 동요가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던 판단력을 마비시켰다.

눈을 떴을 때는 극렬한 고통과 함께 등 뒤에서부터 파고들어 명치에 구멍을 내고 튀어나온 비수가 보였다.

“쿨럭!”

피를 울컥 토해 낸 천선은 머리를 뒤편으로 천천히 돌렸다.

그곳에는 무심한 표정의 소령이 서 있었다.

‘위층에 숨어 있던…… 아니, 일단 계집이라면……!’

“어림없다, 천선.”

뇌리에 번개가 쳤다.

두 번째로 충격적인 발언과 동시에 이번에는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

서리가 서렸던 검이 앞에서부터 꿰뚫어 와 등 뒤의 살을 벌리며 나왔다.

소령을 잡으려던 손은 이윽고 힘없이 떨어졌다.

“도…… 대체…… 어떻게……?”

정보를 관할하는 만큼, 천선의 충격은 더 컸다.

암천회에 대한 통제는 철저하게 했다.

칠성사의 구조나 수장들의 이름은 호칭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뭐하는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적다.

천선이 하오문주라는 것은 소수만 안다.

그런데 그걸 내부인도 아니고 외부인이 알았다.

자하검결이고 뭐고 문제가 아니다.

방금 전의 발언은 암천회 최대의 기밀 중 하나였다.

“저승에서 심심하지 않도록 곧 보내 주마. 그리고 후에 올 도감부에게 영약 잘 먹었다고 전해 주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 얼굴은 점차 경악으로 번졌다.

“그리고 흉마의 무덤 수장시킨 놈 찾고 있었지? 그거 나야.”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눈앞의 남자는 후일 최대의 위협이 될 자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입에 담지 못했다.

화르륵.

남화루에 불이 붙었다.

당장이라도 타오를 것처럼 붉었던 전각은 실제로 불에 휩싸여 활활 타올랐다.

“불이야!”

시뻘건 화염이 악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주변을 집어삼켰다.

달빛 대신 불빛이 주변을 밝혔다.

어떻게 진화해 보려 했지만, 불이 삽시간에 번진 탓에 사람들은 어찌할 줄 모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주변의 건물들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 불이 다른 건물에 붙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오늘 누가 전세 냈다고 들었는데……”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이고! 저기에서 자 보는 게 내 꿈이었는데!”

구경꾼들 중 사내들 몇몇이 심히 안타까워했다.

“이봐, 이거 그거 아니야?”

“인독종 말이지?”

“남화루가 음살녀가 기거하는 곳이란 건 누구나 다 알려져 있지 않나. 마침 전세를 냈으니 분명……”

꿀꺽.

비소돈, 독사검, 음살녀.

과거 정주를 주름잡던 삼인방이 더이상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밤의 역사 뒤편 속으로 사라졌다.

과거, 정주에서도 권좌를 두고 일어난 싸움은 많았으나 이번처럼 소란스러웠던 적은 몇 없었다.

인독종, 강능초.

사람들은 삼인방 대신 그 이름을 떠올렸다.

돼지도 독사도 색녀도 없다.

그 위에 선 자는 독종이었다.

결국, 밤 내내 달빛 대신에 정주를 밝혔던 그 불은 전각이 전소한 뒤에야 멈췄다.

이튿날 날이 밝자 보인 것은 잿더미가 된 남화루와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 버린 시체였다.

주서천과 강능초는 청루로 무사히 귀환했다.

천선의 목숨은 완벽하게 끊었다.

심장을 꿰뚫었을 뿐만 아니라 확인사살로 목까지 베었다.

후에 암천회가 조사하러 올 것을 대비해 시신을 가져와 따로 소각했고 그 과정에서 전리품도 몇 개 얻을 수 있었다.

최상층에서 대적하고 있던 음살녀는 하오문주가 사망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항복했다.

괴물이었던 하오문주의 사망 소식에 믿기지 않아 했으나 직접 시신을 보고 체념했다.

참고로 살려 둘 생각은 없었다.

음살녀는 유일한 목격자였는지라 비밀을 위해서라도 처리해야만 했다.

강능초는 음살녀를 독사검이 수감된 옆방에 처넣었다.

그리고 고문한 뒤에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이틀 뒤, 음살녀는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다행히도 그 외의 목격자는 없었다.

그날 밤에 있던 기녀들은 난리가 일어나자마자 도망쳤다.

정보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유령들이 처리했다.

남화루가 전소되고 음살녀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남쪽을 넘보려던 몇몇 세력들이 눈치를 봤다.

하지만 다들 눈치만 볼 뿐 나서진 않았다.

음살녀를 비롯해 남화루를 전소시킨 범인이 무서워서였다.

인독종, 강능초!

이제 정주, 아니 흑도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리 밑에서 연명해 가는 아이들도 알았다.

무력만으로 전부를 손에 넣은 패자(霜者).

며칠 만에 세운 그 기록에 하나같이 몸서리쳤다.

흑도의 중심, 정주에서 힘 좀 쓴다는 세력들조차 감히 덤빌 생각을 못하고 얌전히 지냈다.

안 그래도 삼인방과의 대결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민감할 것 같아 건들고 싶지 않았다.

이에 강능초는 기다렸다는 듯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세력의 재정비에 힘썼다.

집무실 내부는 종이 다발로 가득했다.

“안 본 사이에 초췌해졌군.”

눈 밑이 검은 것이 그동안의 고생을 증명했다.

“어서 와라.”

강능초가 들고 있던 붓을 잠시 내려 두었다.

“원하던 자리를 손에 넣었으니 조금 쉬어도 될 텐데, 끝나자마자 축배는커녕 업무에 시달리다니.”

주서천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그야말로 독종 그 자체. 별호에 걸맞은 사내다.

“하오문주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있나?”

며칠 전, 음살녀를 고문해서 정보를 얻어 냈다.

숨기고 있는 재화 따위는 관심 없었다.

원하는 것은 전대의 하오문주에 대한 정보였다.

“남화루의 기녀도 당연히 거짓 신분이었고, 별달리 남겨진 흔적도 없었다. 과연 존재했는지가 의문이군.”

비밀 집무실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그것도 없었다.

음살녀는 평소에 서신으로 명령을 하달받거나, 만나길 원한다면 천선이 알아서 찾아왔다고 한다.

“역시 그런가.”

주서천도 그렇게까지 기대하지 않았다.

천선처럼 치밀한 여인이 정주처럼 큰 곳에 뭘 숨겨 둘 리 없다.

아마 천선성의 정보원들 역시 타지에 나가 다른 임무를 수행 중일 것이고.

“환락가는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인가?”

“그래. 혼자 힘으로는 지하 투기장이나 암시장만으로도 버거우니까. 여기에만 집중할 생각이다.”

한 곳이 아니라 무려 두 곳이다.

최대 수입원을 무려 두 곳이나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보통이 아니었다.

청루와 홍루야 루주와 포주가 있으니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다.

동쪽의 지하 투기장은 특히나 사람이 부족해서 재배치하고 관리하는 등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것이다.

“원한다면 환락가는 주마. 어차피 누군가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으면 전의 하오문주처럼 굴복시킬 생각이었다.”

“아니, 됐어. 가져라.”

상왕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위험성이 크다.

그가 관련되면 주서천의 원래 신분이 나온다.

무엇보다 금의상단 자체가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암천회.’

칠성사병도 아니고 수뇌인 천선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암천회의 정보를 총괄하던 수뇌였다.

암천회는 눈과 귀를 잃었다.

이보다 만족스러운 결과가 없다.

이것만으로도 움직임이 자유로워진다.

‘천기가 슬슬 이상함을 느끼고 움직일 때다.’

천선은 선조치를 하기 위해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권좌에 도전해 소란을 일으키는 내부의 일을 이상히 여기지 않아서다. 무엇보다 괜한 핀잔을 받고 싶지 않았다.

주서천은 천선이 경계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인독종이라는 대리인을 내세웠다.

무음사자로서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 일부러 결정을 내려 달라는 듯 선택권을 넘겼다.

지금 당장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그 눈치 빠른 천기라면 아마 늦어도 오늘 밤에는 움직일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동안 우려될 흔적들을 전부 지우고 왔다.

‘상왕에게 환락가를 전해 주면 좋아하겠지만, 그럴 순 없지. 얻는 것에 비해 위험성이 너무 크다.’

환락가의 수익은 무시하지 못하지만 그것보단 금의상단이 암천회의 표적이 되는 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주시받고 있지 않은가.

“떠날 건가?”

“호오.”

주서천이 어떻게 알았나는 표정을 지었다.

“감이 좋지 못하면 흑도에서 살아남지 못하지. 무엇보다 유령들에게 숨고 싶다면서 그 난리를 피운 게 이해가 안 간다더군. 아니, 그것도 거짓말인가.”

대결을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최상층에서의 강기는 보았다.

화경에 오른 자객이라니. 들어 본 적 없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 이제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되는지 말해줬으면 하는군. 그래도 자그마한 소망이 있다면 이번 주는 바쁘니 봐줬으면 한다.”

“하하.”

주서천이 무심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가 그리 웃기지?”

“아무것도 아니다.”

강능초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 제일 고민했던 게 강능초와의 관계였다.

신분이야 어차피 철저히 숨겼으니 상관없다.

자하개벽도 워낙 빨라 못 본 것 같았다.

완벽한 자색도 아니고 희미한 빛을 보고 눈치챈 천선이 대단한 거지 보통 다른 무인이라면 못 알아본다.

어쨌거나, 원래는 떠나면서 연을 끊고 가려 했다.

그러나 허수아비로 세우려고 했던 야심가가 생각 이상으로 인재여서 어떻게 할지 고심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하오문주에게 빚을 만들어 두고 후일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천선이 괜히 오랫동안 하오문주로서 눌러앉은 게 아니다.

정보력에 한해선 개방과 견줄 정도다.

“당장은 없다. 언젠가 내가 연락했을 때 그때 도와줬으면 한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딱!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소리를 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유령 둘이 나타나 강능초 곁에 섰다.

“널 주변에서 호위해 줄 거니 마음껏 써라. 나에게 피해가 되는 것을 제외하면 뭐든지 들어줄 거야.”

얼마 전, 고민을 끝낼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강능초는 재정비를 하는 동시에 길거리에 나앉아 삶을 겨우 연명하던 어린아이들을 데려갔다.

하나같이 부모가 없는 고아였으며 오랫동안 이어진 굶주린 탓에 일할 힘조차 없는 아이들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추적해 본 결과,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맡게 된 아이들도 한두 명이 아니니 몸도 조심해야 하지 않겠나, 대부 양반.”

“…… 대부라고까지 불릴 정도는 아니다.”

강능초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그리고, 내 의지가 아니다. 그녀의 의지지.”

집무실 의자에 앉은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그리워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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