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二章무음사자(無音使者)
하오문은 시정잡배의 연합체인데도 불구하고 구파일방이나 사도천의 역사보다 더 오래됐다.
그들의 생존력은 가히 불멸이라 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지닌 정보도 정보지만 점조직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그렇다.
추격을 하려고 해도 점조직이라 추격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작 중요한 수뇌를 몰라 추적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지부가 없어진다 할지라도 그 인원을 대체할 이들은 어디든지 많았다.
길거리에 널린 게 시정잡배가 아닌가.
애초에 전부 질이 낮고 믿지 않기에 적당히 데려오면 그만이다.
고문을 하려 해도 정말로 모르니 어쩔 수 없다.
그들이 불멸의 생존력을 지닌 연유다.
그러나 수뇌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정말로 극소수이기는 하나 그런 역할을 하는 지부가 존재한다.
주서천은 그 지부를 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있으니 이왕 기회가 된 것 새로운 무공부터 배워 볼까. 유령신공의 암기부터 익혀 봐야겠다.”
전에는 필요성이 없어서 심법과 보법만 배웠다.
“소령. 괜찮다면 암기를 가르쳐 주겠어?”
“네.”
유령신공과 유령공의 통제능력을 제외하곤 거의 차이가 없어서 소령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비수(七首) 위주로 부탁할게.”
기간은 이 주일로 잡았고, 적당한 장소도 있었다.
금의상단의 제남 지부 지하에는 특수한 시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는 비밀 연무장도 존재했다.
그동안 정말로 기초적인 것만 배웠다.
비수를 잡는 법부터 투척하는 법까지 가지각색이었다.
투척술이나 휘두르는 법까지 포함한 이 암기술의 이름은 유은비도(閩隱飛刀)였다.
일성은 기초적인 공격법이었고 이성부터는 투척이 가능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배웠다.
그리고 가르침 도중에 유령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깨닫게 됐다.
“뭐, 뭐야!”
배우던 도중 실수를 하자 소령이 날아와서 복부를 힘껏 걷어차려다가 맞기 직전에서 멈췄다.
유령곡주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어서 멈춘 듯했으나 어째서 공격을 한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실수하면 폭력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대협을 때릴 수 없으니 멈췄습니다.”
“……허어.”
일성은 워낙 기초이다 보니 능숙하게 성공했지만, 어디까지나 깨달음이 있거나 검의 고수여서 그렇다.
원래의 수련령이라면 막 시작했으니 실수도 많을 터인데 이런 무지막지한 폭력을 당한다니!
괜히 가무량이 지옥이라 몸서리친 게 아니었다.
그들의 수련 방식은 혹독하고 잔인했다.
그렇지만 그만큼 효율적인 것도 사실이었다.
사람이란 건 때로는 위기감에 더더욱 성장하기 마련이다.
비무와 달리 실전을 겪으면 경험이 빠르게 쌓이고 강해지는 것도 이와같은 연유다.
‘나쁘지 않아.’
고민하던 그는 효율을 높이기 위해 유령 몇을 더 불렀다.
산동곡의 열 명 중 두 명을 더 불렀다.
“너희 셋은 앞으로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걸 허가한다. 내 목숨은 신경 쓰지 말고 전력을 다하도록.”
그 말이 끝나자마자 소령을 포함한 유령 셋이 동시에 덤벼들었고, 얼마나 대단한지 몸소 느꼈다.
회귀 이전에는 이들과 마주한 적 자체가 없었고, 이후에는 유령곡주이기에 습격당하지 않았다.
그들이 금제를 풀고 전력을 다하니 상당히 섬뜩했다.
비수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없이 수평선을 긋는다.
공기의 미세한 진동조차 거의 없다.그야말로 유령.
감각에 모든 걸 집중해서 잡아내 비수로 받아쳤다.
채앵!
아무리 실체가 없어 보이는 공격이라고 해도 금속끼리 부딪쳤는데 소리가 안 날 수는 없다.
‘조심하자.’
주서천도 자신에게 금제를 가했다.
평소에 쓰던 태아는 내려 두고 그 대신 평범한 비수를 들었다.
이십사수매화검법도 당연히 없고, 그 대신 소령에게 배운 유은비도를 펼친다.
확실히 목숨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 움직임에도 처절함이 생겼다.
주의하고 또 주의하면서 싸웠다.
검강을 펼칠 수 있었으나 강기도 제한했다.
그건 수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명 더.”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유령이 참전했다.
그들은 절정에서 초절정 고수이지만, 암습 전이라면 천하의 유령이라도 전투력이 다소 떨어졌다.
세 명과는 가볍게 싸웠고, 한 명이 추가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일곱 명까지는 배운 지 얼마되지 않은 유은비도로 거뜬히 버텼지만 여덟 명은 천하의 주서천도 버거웠다.
일각 넘게 일곱 명과 바쁘게 움직였지만 신기하게 누구도 땀을 흘리지 않았다.
유령심법 덕이다.
비수로 허공에 어지러운 선을 그리고, 유령보로 소리나 기척 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공격을 받아친다.
상대하고 있는 유령을 다치게 하지않고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 수련을 더더욱 어렵게 했다.
하나 이것도 일주일이 지나자 익숙해졌고, 일곱 명에서 열한 명이 됐다.
투척이야 이제 완전히 능숙해졌고, 비수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 주일이 지나자 암기는 유령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정도의 수준이 됐다.
“좋아, 전부 수고했다.”
만족스러운 수준이 되자 다시 금제를 걸어 멈췄다.
그리고 그사이에 성장한 건 주서천 뿐만이 아니었다.
이 주일 동안 싸우기만 한 유령들도 성장했다.
다만 그 성장이란 게 정말로 단순하게 무기를 다루는 것에 불과했다.
유령에게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깨달음도 더 이상 얻을 수 없다.
심살의 과정은 마지막이다.
깨달음을 얻을 사고가 사라지니 경지도 높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대부분이 절정이나 초절정에서 심살이 시작되니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애초에 화경이라는 경지가 운까지 따라 주지 않으면 평생 오를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경지니까.
“역용술(易容術)도 알고 있나?”
“모릅니다.”
주서천이 조금 놀랐다.
비아냥거린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의문이었다.
자객은 대부분 복면을 쓰고 활동하긴 하지만, 가끔 복장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도 존재한다.
그래서 그럴 경우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얼굴, 심하면 골격까지 바꾸고는 했다.
“역용술을 눈치를 채는 고수가 존재하기에 쓰지 않습니다. 특정한 모습이 필요할 경우는 나머지 인원을 투입하면 그만입니다.”
“과연…”
어차피 유령을 눈치채기는 힘드니 만약 노인이 필요하면 노인으로 대체하거나 하면 그만이다.
* * *
이 주일 동안의 폐관 수련을 끝내고 나왔다.
‘반야신공의 전달은 조금만 뒤로 하자.’
소림사가 무림맹주를 닦달하겠지만, 보통의 비급이 아니니 느릴 수밖에 없다고 대충 잘 둘러댈 터.
남궁위무가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눈에 훤히 그려지자 합장을 해 그의 정신적 피로에 기도해 줬다.
어차피 지역은 동일하니 크게 문제는 없다.
하남(河南), 정주(鄭州).
과거 , 황하 문명의 발원지이기도 한 하남은 아직까지도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예로부터 고대의 주요 도시가 하남에 위치해 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도인 정주는 특이 사항은 없으나 발달된 대도시였다.
사람과 활기는 끊임없었고, 밤은 길었다.
또한 불학의 중심이자 북두라 불리는 소림사가 있어 각 지역에서 사람들의 방문이 잦았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안이 그렇게까지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이는 불교의 자비 탓이었다.
소림사에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살생을 금하였고 좋아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 보니 주변에 되도록 살인이 아니라 제압하는 것으로 끝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강요가 아닌 권고이지만, 괜히 문제를 일으켜 소림사의 앞마당에서 밉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이라 도망자들 혹은 죽을 리가 없다는 걸 믿는 바보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해시(亥時) 무렵의 정주.
정주의 밤은 길다.
평소의 번화가는 전부 가게 문을 닫아 객잔을 제외하곤 빛 한 줌 없었다.
구름 사이에 뜬 보름달만이 길을 밝혀 주는 번화가를 지나 사이사이의 골목들을 통과했다.
그리고 좁은 길이 트이자 지나온 번화가와 달리 사람이 북적거리고 시끌벅적한 번화가가 나타났다.
건물의 벽이나 기둥에는 붉은 등불이 달려 있고, 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에는 새하얀 어깨를 드러낸 여인들이 길거리의 남자들을 보며 고혹적이게 웃는다.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남자들은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주변을 훑어보다 마음을 정한 듯 안으로 들어갔다.
정주의 밤거리는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환락가다.
‘하오문.’
그리고 또 다른 이름은 하오문의 정주 지부다.
저 난간 위에 기댄 기녀도 하오문도고, 남자들에게 호객 행위를 하는 종업원도 하오문도다.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 전부가 하오문도.
이제 여기서 암천회의 끄나풀을 찾아야만 한다.
‘일단 날뛰기 전에 정보 수집이나 해야겠다.’
머릿속에 있는 지부를 박살내기 전에, 이곳에 침투하여 쓸 만한 정보를 캐내야 한다.
하오문은 냄새를 조금만 맡아도 도망치고 숨거나 하여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겁이 워낙 많다 보니 주의해야 했다.
그래서 값나가는 인피면구를 구해서 얼굴을 가렸다.
워낙 뒤가 구린 동네라 돈만 주면 쉽게 구했다.
물론 그 순간도 조심하려고 남령(男靈)에게 시켰다.
소령에게는 당분간 나오지 말라고 했다.
어린 소녀에게 이곳은 너무나도 눈에 띈다.
납치나 강간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동네에서 노려지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물론 덤벼 봤자 소령에게 일 합도 되지 않아 목숨을 빼앗기겠지만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제법 값비싼 인피면구를 쓰고 난 뒤에야 안심하고 정주의 거리를 누빌수 있었다.
참고로 유령들에게는 정보를 수집해 오라고 정주 곳곳을 누비게 만들었다.
곁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하오문도가 되고 싶소.”
허름한 객점을 방문해 점주에게 말했다.
인상이 험악한 점주는 주서천을 힐끗 보곤 손을 내밀었다.
“한 냥 은으로.”
“여기 있소.”
“이름.”
“비령(七靈).”
하오문도가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기녀라면 기루가 알아서 처리해 주고, 소매치기나 떠도는 낭인 등은 은자만 내면 이름을 올릴 수 있다.
누구나 될 수 있는 게 하오문도.
물론 약간의 검증이나 추천 같은 것이 필요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보통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못 하는 애새끼는 받지 못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수가 뒤편의 장식에 꽂혔다.
중요한 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비수만 던졌다.
주변에서 휘파람이 들린다.
“환영한다.”
점주가 가 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일이 필요하오.”
“성미도 급하군. 자랑거리를 말해 봐라.”
“비수 좀 다루고, 대체적으로 싸우는 일을 잘하오.”
“마침 알맞은 일이 있지. 목숨 한둘로는 부족할 텐데 그런데도 받겠는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줬다.
“몇 달 전 , 기대의 신인을 데려오려고 기루(岐樓)끼리 가벼이 다뤘다가 그 사소한 것이 점차 커져 결국 사활까지 걸게 됐지. 뒤에 있는 큰손까지 움직였어.”
“과연 그 다툼에 참전하라는 거요?”
“그레 괜히 애먼 곳 쑤시다가 당하지 말고. 정주는 그 다툼 때문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으니까.”
“어디에 붙으면 돼요?”
“아무데나.”
참으로 적당했다.
발단이 된 기루는 홍루(紅樓)와 청루(靑樓)였다.
밤에는 여전히 장사를 했지만, 그 뒤로는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이어졌다.
하오문도 중 싸울 수 있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습격하거나 혹은 대놓고 찾아가 공격했다.
낮이라면 모를까 정주의 밤은 위험하다.
관병도 순찰하지 않는 곳이다.
아니, 순찰하기는커녕 치안 유지라는 명목하에 기루에 들어가 돈을 내지 않고 대접받곤 했다.
관부가 뒤를 봐주는 곳이 정주의 밤거리이기도 했다.
“으하하!”
홍루의 무인, 부두벽(斧頭勞)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아잉, 대인~”
“제 술을 받아 주시옵소서.”
하얀 목과 어깨를 드러낸 기녀 둘이 양옆에서 가슴을 붙이면서 유혹하듯이 웃자 바짓가랑이가 부풀어 올랐다.
술과 여자를 가지니 입이 귀에 걸렸다.
부두벽은 별호에 걸맞게 도끼로 적의 머리를 쪼개는 무인이었다.
그의 경지는 이류밖에 되지 않지만 이곳 하오문에서는 상당히 괜찮은 편에 속했다.
‘하오문으로 도망치기 잘했어!’
원래는 사도천 소속의 무인이었지만, 온갖 패악질을 저지르고 다니다가 그만 원한을 샀다.
그래서 꽁지 빠지게 도망쳐 이곳 정주의 밤거리로 녹아들어 홍루에 고용됐다.
그리고 얼마 전에 홍루를 노린 청루에서 보낸 적의 머리를 전부 쪼겠다.
그 덕에 한 달은 약탈해야 얻어낼 돈과 잘 수 있는 기녀 둘을 포상으로 내려줬다.
“흐흐, 자. 계곡에 맺힌 술을 마시고 싶구나.”
부두벽이 움흉한 눈으로 기녀의 가슴을 훑어 봤다.
“네 가슴으로도 가능한데 스스로 하는 건 어떻느냐?”
“웬 놈이냐!”
제삼자의 목소리에 취기가 확 가셨다.
부두벽은 바닥에 둔 도끼를 쥐곤 벌떡 일어났다.
“꺅!”
붙어 있던 기녀가 떨어지면서 구석으로 도망쳤다.
“저승사자다.”
인피면구에 복면까지 쓴 주서천이 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데다가 복면까지 쓴 걸 보면 날 몰래 죽이러 온 게 틀림없구나. 이놈, 내가 누군지는 알고 찾아온 게냐?”
“부두교인가 뭔가 하는 놈인 건 알고 있다. 청루가 네 목에 의뢰를 걸어서 대신 목을 치러 왔다.”
“네 입에서 곧 대인이라 불려질 분의 이름을 잘못 말하다니.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부두벽이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곤 획 던졌다.
주서천은 손만 들어 비수로 술병을 베었다.
병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그 안에 있던 술이 쏟아졌고, 그 뒤로 살의가 담긴 도끼가 따라왔다.
사파 출신답게 싸움법이 재법 좋다.
속으로 조금 칭찬하면서 손을 번개같이 뻗었다.
“허?”
깽!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간 비수가 도끼날을 후려쳤다.
그 힘이 보통이 아닌지 손목까지 떨려 왔다.
‘언제?’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느끼지도 못했다.
인식했을 때는 이미 비수가 도끼와 부딪쳤다.
‘고수다.’
무엇보다 비수에 실린 내기가 적지 않았다.
도끼가 전진하지 못한 건 당연하고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부두벽은 생각보다 머리 회전이 빠르다.
특히나 눈치가 귀신같아서 도망도 잘 쳤다.
“뉘신지는 몰라도 잠시……”
푹!
그게 생전 최후의 말이었다.
뇌에서 다음 언어를 구사하기도 전에 목이 뒤로 꺾이듯이 젖혀졌다.
눈은 공포로 얼룩졌고, 이마에는 비수가 박혔다.
“흡!”
기녀들은 비명 대신 숨을 삼켰다.
입을 손으로 가리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 앞에서 싸움을 목격한 기녀들은 대부분 놀라서 소리를 지르다가 죽임을 당한다.
기녀들이 소란을 일으키면 적들이 눈치채고 금방 달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무서워도 비명을 참았다.
주서천은 기녀들을 무시하고 부두벽에게 다가가 비수를 회수하고, 손목을 잘라 주머니 안에 넣었다.
“여기에 누가 있지?”
여기는 홍루가 아니다.
부두벽이 워낙 방탕하게 노는지라 손님들에게 방해될 것 같아 장소를 따로 마련해 주고 술과 기녀를 보내 줬다.
“그, 그게……”
기녀는 울면서도 살기 위해서인지 더듬으면서도 잘 대답해 줬다.
청루가 건 홍루의 무인이 둘 더 있었다.
그들 또한 부두벽처럼 성질이 고약한 이들이었다.
그다지 대단치 않았지만, 그래도 온 김에 그들의 목숨 또한 취해서 청루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튿날.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홍루 출신 무인들이 시체가 되어 발견됐다.
그에 반면 청루는 얼마 전 당한 공격에 복수했다면서 좋아했다.
주서천은 각기 다른 손을 건네줬다.
“이름이 뭐라고 했나?”
청루의 포주가 손목을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비령.”
“원하는 게 뭐지? 돈? 술? 기녀? 말만 하게.”
“청루주와 자 보고 싶소.”
“호, 꽤나 큰 걸 원하는군.”
청루주는 한때 정주 제일의 기녀였다.
그러나 지금은 은퇴하고 루주가 되어 기루의 관리만 맡고 있다.
밤 자리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를 안으려면 웬만한 명성이나 돈으로는 부족했다.
서른을 넘어 마흔이지만, 주안술덕에 그 미모는 현역 때와 다를 것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홍루의 참락가(斬樂歌)를 처리하고 오게. 그러면 만남 정도는 내 주선해 주지.”
“참락가?”
포주의 뒤에 있던 종업원들이 이름을 듣고 놀랐다.
“알겠소.”
의뢰를 받아들인 뒤 청루를 나갔다.
“그 고수를 죽이겠다고?”
“아무리 루주의 밤 자리가 정주 제일이라 해도 미쳤군.”
“쾌락에 눈이 먼 자는 쉽게 죽기 마련이지.”
참락가는 일개 무사나 잡배들과는 달랐다.
그는 홍루, 아니 정주 전체에서도 이름난 고수였다.
정주에 오기 전에는 온갖 사람들을 베면서 즐거워했고, 심지어 시체를 앞에 두고 노래까지 읊었다.
시간이 갈수록 악명이 높아져 마두로 지정되기 직전에 도망치듯이 모습을 감췄다가 정주에 나타났다.
지금은 홍루에 소속되어 청루나 혹은 방해되는 이들을 직접 처단하면서 미친놈처럼 웃고 다녔다.
“아니, 왜 참락가를 노리게 했나?”
“보아하니 조금 더 이용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주서천, 비령을 딱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좀 더 이용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뭐, 어떤가. 어차피 저런 놈들 수두룩해.”
정주의 밤거리로 피신해 뭐라도 된 듯 자신감 있게 일을 받아 내면서 이름을 알리려는 놈들은 많다.
포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참락가의 팔 하나라도 빼앗기를 기대했다.
청루의 종업원들은 그걸 듣고 소소한 내기를 걸었다.
“접근하지도 못하고 근처에서 죽는다는 것에 걸지.”
“에이, 그래도 부두벽이 잡배는 아니지 않나? 손가락 하나쯤은 자르지 않을까?”
하오문도들은 대부분 비령이 죽는다는 쪽에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참락가가 죽었다!”
“목이 잘린 채로 방에서 발견됐다 하더군!”
고수에 속하는 참락가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더더욱 무서운 건 홍루의 방 안이었다는 점이었다.
참락가는 무공이 워낙 높기도 하고, 그의 기분을 거슬렀다가 죽은 이가 한둘이 아니라 내쫓을 수 없었다.
“홍루에선 누가 침입한지도 몰랐다며?”
“내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방 안에서 싸운 흔적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더군.”
“허, 그럼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무공이지?”
“대체 그자가 누군가?”
“무음사자(無音使者)!”
주서천이란 이름은 아니지만 그래도 별호가 붙었다.
소리 없이 목숨을 앗아 간다 하여 무음사자였다.
다음에 청루를 찾아갔을 때는 대접이 달랐다.
아니, 대접이라기보다는 경계도가 올라갔다.
전에 봤던 포주가 겁 먹은 얼굴로 서 있었고 그 뒤로 청루 소속 무인들이 서서 잔뜩 긴장해 있었다.
“어, 어서 오게나.”
“청루주는?”
“크흐흠. 일단 그전에 술 한 잔이라도 하지 않겠…… 힉!”
포주의 머리 옆으로 비수가 지나갔다.
귓불에 혈선이 그어지면서 피가 튀었다.
이에 호위들이 곧장 반응하며 검을 힘겹게 뽑았으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참락가를 소란 없이 죽인 자라면 보통이 아니다.
하오문의 수준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가끔씩 이런 자가 있다.
하오문 거리에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닌데 여자나 정보를 얻으려고 오는 부류.
“그만.”
위층 난간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보였다.
몸의 굴곡이 확연히 보이는 차림 인지라 청루 출신 하오문도들조차 넋을 잃고 몸매를 구경했다.
“죄송합니다, 대인. 저와 밤 자리를 한다는 약조는 포주가 제멋대로 한 판단입니다. 설마하니 대인이 그런 고수일 줄은 몰랐다고 하더군요. 제가 대신하여 사과하는 바입니다.”
분위기와 차림새를 보아하니 청루주가 틀림없었다.
포주의 눈을 보아하니 그 말이 맞는 듯했다.
“수하의 탓은 자고로 주군의 책임으로 알고 있소. 어차피 적이 되는 참락가를 죽였으니 보상을 주시오.”
“어머나. 그렇게 절 열렬히 원하시니 소첩은 기쁘기 짝이 없사옵니다. 제가 모시지요.”
청루주는 포주를 째려본 뒤, 주서천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부럽군.’
‘청루주에게 안기다니.’
‘허, 죽기 전에 청루주에게 안기는 게 꿈이었는데!’
청루주는 나이가 많음에도 정주에서 인기였다.
그 잠자리 실력이 남자를 몇 번이나 죽인다고 전해진다.
청루의 위층은 올라갈수록 가격이 배로 높아진다.
그중 최상층은 돈만 있다고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루주의 집무실과 붙어 있는 방 안에 청루주가 기녀들을 불러 진수성찬을 차려 줬다.
“괜찮으시다면 먼저 기대주를 맛보지 않겠사옵니까?”
“관심 없으니 전부 나가라 해 주시오. 나는 독대를 원하오.”
“저를 사랑해 주시는 것은 십분 이해하나, 원래 정말 맛있는 걸 맛보기 전에……”
“피 맛을 맛보고 싶다면 그리해도 좋소.”
낮은 목소리지만 중압감을 가지고 경고했다.
그러자 청루주의 낯빛도 바뀌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그녀는 기녀들을 물리게 했다.
그 외에도 근처의 호위들 역시 내보냈다.
무음사자는 딱 봐도 보통이 아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숨어 봤자 기분만 상하게 할 뿐이었다.
‘보아하니 부드럽게 해 줄 양반은 아니로구나. 아마 발정이 난 개처럼 날 범하려 들겠지 . 걱정이다.’
청루주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자를 상대하는 건 익숙하지만 가끔 이런 피곤한 자들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얼굴로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 위해 쾌락을 자극해 주는 향을 피우려 했다.
“그럼 이제 좀 본격적으로 얘기하겠소.”
‘더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하겠다는 건가? 난 글렀다.’
청루주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실은 나는 루주를 안을 생각이 없소.”
‘설마하니 폭력으로 느끼는 변태 성욕자? 큰일이다!’
청루주가 이름 그대로 새파랗게 질렸다.
차라리 여기서 도망친 뒤 청루의 무인들을 동원해 이자를 죽일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가끔씩 기녀를 죽기 직전까지 패면서 쾌락을 느끼는 미친놈이 있었다.
그런 부류라면 최악이다.
“내가 원하는 건 하오문의 정보요.”
“여기 누구 없…… 네? 뭐라고 하셨죠?”
청루주가 의아해하면서 되물었다.
“하오문의 정보라 하면……?”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찾고 있소. 하오문주라면 더더욱 좋지.”
“흐음.”
청루주의 얼굴에 고민이 떠올랐다.
잠시 간의 침묵이 이어지다가 청루주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직접적인 연결은 힘드나,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알고 있사옵니다.”
“잘됐군. 그렇다면 연결해 주시오.”
“하나 무작정 만나게 해 드릴 수는 없사옵니다. 적어도 만나는 데 수긍할 만한 용건이 아니라면……”
청루주의 말에 주서천이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좋소.”
주서천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거짓말을 꺼냈다.
“실은 나는 유령곡 출신의 자객이었소.”
“흡!”
청루주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며 숨을 들이쉬었다.
무림에서 가장 비밀에 싸인 단체의 일원이라니!
놀라움도 놀라움이지만, 그들을 목격한 사람들은 전부 이승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문부터 떠올랐다.
청루주의 낯빛은 유례없을 정도로 창백하게 질렸고, 눈에는 공포감으로 얼룩졌다.
“그리 겁낼 것 없소. 어디까지나 ‘출신’이었으니까.”
주서천에게서 거짓말이 물 흐르듯이 흘러나왔다.
“나는 본래 유령이었으나, 실수로 곡의 교관을 살해하고 나왔소. 혹독한 수련으로 인해 쌓인 감정 탓이지. 그들로부터 숨기 위해 하오문주의 힘이 필요하오.”
“으음!”
청루주가 두뇌를 회전하면서 주서천의 눈치를 봤다.
표정을 읽기 힘들지만,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그 실적이 거짓말에 힘을 실어 줬다.
‘무음사자!’
세간에 알려진 유령과 무음사자의 행적을 비교해 보니 소름 끼칠 정도로 잘 맞았다.
무음사자는 유령처럼 어떠한 소리, 아니 기척도 남기지 않은 채 사람을 죽인다고 하지 않았는가.
청루주는 무음사자를 두려운 눈길로 쳐다보다가, 말을 전해 주겠다면서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반나절을 기다리자 청루주가 한 남자를 데려왔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매서운 눈매와 그 안에 흐르는 독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무음사자인가. 만나서 영광이군. 강능초다.”
“인독종(勒毒種).”
주서천이 인사 대신 별호를 읊었다.
“나를 아나?”
“청루에서 일하는데 모를 리가 있겠나.”
청루와 홍루 모두 각각 뒤를 봐주는 자가 있고, 그중 한 명이 강능초다. 모를 리가 없다.
강호 전체에서 보면 미묘하지만, 정주 내에서만큼은 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져 있다.
“청루주에게 그대의 사정을 들었다.”
눈에는 경계가 가득하나 무서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하오문주는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주서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강능초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하오문주는 널 보호해 주기는커녕 유령곡에 연락을 취해 네 신변을 넘겨 이득을 취할 인간이다.”
“……”
“물론 생면부지의 사람, 그것도 흑도의 사람이 하는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없는지는 안다.”
“그걸 나에게 말해 주는 이유가 뭐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강능초가 검지와 중지만 펴서 보여 줬다.
“하나, 유령의 힘이 필요하다.”
강능초뿐만 아니라 유령의 힘을 손에 얻는다는 건 무척 매력적인 일이었다.
설사 무음사자가 유령이 아니어도 좋다.
중요한 건 그가 지닌 힘이었다.
“둘, 하오문주의 자리는 이제 곧바뀔 데니까!”
강능초의 목소리와 눈에는 힘이 있었다.
자신감을 넘어 확신에 가까운 감정이 느껴졌다.
그 눈과 마주 보면 심연을 엿볼 수가 있었다.
아니, 심연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하다.
독기가 흐르는 눈빛 속에는 당당히 욕망이 자리 잡고 있어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더러우면서도 아이처럼 순진하게 비치기도 했다.
‘이 정도면 됐다!’
주서천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웃었다.
하오문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에 자주 나타나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수하들에 대해서도 대강 알았다.
다만 하오문주가 정주에 자주 방문한다는 것만 알뿐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괜히 암천회의 천선성의 힘을 약화시키겠다며 지부를 습격했다간 도망치거나 숨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렇게 되면 찾기가 정말 힘들어진다.
그렇지 않기 위해선 도망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앞에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해야 한다.
‘내부의 분란. 하오문주라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니, 평소 그 힘을 노린 이들을 이용한다.’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섬똑하게 번들거렸다.
‘천선성이 지닌 정보력은 곧 하오문이니, 그 근간이 흔들린다면 하오문 역시 가만히 숨거나 도망칠 수는 없지.
무엇보다 외부의 인물이 아니라, 내부의 인물이 일으킨 소란이라하면 나에 대한 의심도 안 할 터.’
그래서 일부러 얼굴을 바꿔 하오문도가 됐고, 무음사자를 칭하면서 청루를 도왔다.
“과연, 날 이용할 생각인가.”
주서천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강능초의 뒤편에서 기척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아무래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준비한 모양이었지만, 하오문 수준답게 그다지 대단하진 않았다.
“무림이란 그런 게 아니겠나. 서로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지. 협의를 지킨다니 뭐니 하는 건 입에 발린 헛소리에 불과할 뿐!”
‘이 정도나 되는 인물이 왜 알려지지 않은 거지?’
인독종, 강능초.
그 이름은 현생에서 처음 알았다.
만나 보니 생각보다 그릇이 큰 자였다.
당당하면서도 기개가 높은 데다가 강자 앞에서도 숙이지 않는다.
흑도의 인물치곤 보기 드물었다.
‘아니, 그렇기에 알려지지 않은 건가. 천선인 하오문주에게 적의를 지녔다면 살아남았을 리 없지.’
아마 원래의 역사 역시 문주의 자리를 노리고 도전했을 터.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지 뻔하다.
꿀꺽!
뒤편에 멀찍이 대기하고 있던 청루주가 침을 삼켰다.
얼굴은 긴장감과 더불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만약 여기서 무음사자가 거절하게 된다면 강능초와 운명을 함께할 청루도 최대의 적을 만들게 된다.
그의 적이 된다고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청루주의 걱정은 다행히 우려로 끝났다.
“받아들이지.”
“휴우!”
청루주가 안도하는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반면 강능초는 반대로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미간을 좁힌 채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간단히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스스로 설득한 주제에 의심하는 건가?”
“무림, 아니 세상이란 그다지 녹록하지 않은 법이니까.”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굳이 이유를 붙여야 한다면 얼굴도 모르는 놈보다는 믿음이 간다는 정도일까.”
“그것만으로 믿는 건가? 어쩌면 내가 거짓을 고해 하오문주를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믿다니,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하오문도로서 생활한 지는 별로 되지 않았지만 이 밤거리의 법칙을 나름 잘 알고 있지. 누구도 믿을 만한 사람은 없다는 걸 말이야.”
점소이라면서 객잔 앞까지 안내하려는 아이는 실은 길만 아는 거지일 뿐이고, 어두운 골목에서 도와 달라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대부분이 미끼 역이다.
그 누구도 믿지 말라!
흑도에서는 예부터 내려오는 격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