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一章제이고향(第二故鄕) (84/254)

第十一章제이고향(第二故鄕)

이틀 뒤, 가무량은 잔뜩 인상을 지은 채로 서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곡주 말고 대협이라 불러.”

결과만 말하자면, 가무량을 비롯한 마흔다섯 명의 탈주령 모두 주서천의 밑으로 들어왔다.

하루 동안 시간을 줬고, 그 토론은 한 가지의 결론 밖에 낼 수 없었다.

반항하려 해도 그럴 수 없고, 곡주의 통제 능력이 있는 한 제안을 거부하면 이곳에서 평생 살아야 한다.

그들 모두 유령곡에 대한 원한이 넘쳤으나, 당장 닥친 현실에 그 한을 잠시 고이 접어 둬야만 했다.

복수심도 중요하지만 자유만큼은 아니었다.

“착각하지 마라. 우린 네 더러운 수작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지, 충의를 받친 게 아니니까.”

“나도 그런 거 기대 안 한다.”

그들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자마자 금제를 걸어 뒀다.

첫째로 주변 인물들에 대한 보호였다.

나중에 초상화까지 가져와서 인식시켜 줄 생각이었다.

둘째로는 비밀의 유지였다.

주로 유령곡에 대해서였다.

셋째로는 자신과 그 계획에 관련된 일이었다.

위해를 가하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해 뒀다.

세 번째에는 유령들이 포함됐다.

그의 계획에 유령이 필요하니 그들을 해칠 수 없었다.

탈주령들은 세 번째에 몹시 불만이었지만, 그걸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말해 봤자 변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우리를 이용하겠다면 최소한 저들과 엮지 마라. 원수를 돕느니 차라리 목숨을 스스로 끊겠어.”

“이용이 아니라 도움을 구하는 거…… 됐다. 어차피 안 믿으니 입만 아프지. 그리고 나도 눈치가 있으니 그건 걱정하지 마라.”

탈주령이 유령에게 품은 원한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기야, 평생 동안 노예처럼 부리고 수련이라는 명목하에 온갖 고통을 선사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의 마음은 누구도 꺾지 못할 것이고, 감정 역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설사 육체를 지배한다 할지라도 마음과 그 혼은 굴복하지 않는다.”

탈주령은 마음이라는 것에 심히 집착했는데, 그들 전원 심살의 과정에서 정신적 외상을 입은 듯했다.

“소령”

“네, 대협.”

“도대체 심살은 어떻게 진행되는 거지?”

호기심을 참지 못한 그는 소령을 따로 불러 물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령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심살이란 건 상상 이상으로 잔학무도하고 비인도적이며 악마적인 발상이었다.

“포로로 잡혀 정보를 발설하지 않으려면 고문을 버텨야 합니다. 그래서 고문에 대한 내성을 기를 겸 고문부터 가합니다.”

처음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고문을 이겨 내면 다음으로 어릴 적부터 함께한 수련생을 데려옵니다.”

“설마……”

자객들은 보통 어릴 적부터 정을 쌓지 않는 법을 배운다.

사사로운 정은 암살에 방해만 될 뿐이다.

그러나 유령곡은 조금 다르다.

일부러 친하게 지내는 이들을 내버려 둔다.

심지어 도중에 연인이 되는 이들도 존재하지만,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정을 쌓은 수련생들끼리 서로 죽이도록 명령을 내린 다음에 약물을 이용하여……”

“그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앞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대충 예상이 갔다.

말하는 것을 보면 과정이 더 이어지는 것 같았지만, 썩 궁금하지는 않았다.

기분만 나빠졌다.

평화를 얻기 위해 필수 불가결인 힘이라곤 해도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단체였다.

‘삼안신투 그 도둑놈 순 미친놈이었잖아?’

그렇게까지 증오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반대로 원한을 품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무엇보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소령이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마음이 아팠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 *

주서천과 낙소월은 태세의 정비를 위해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소령에게 쉴 만한 곳이 없냐고 묻자 안내해 줬다.

사람의 손길 하나 없을 것만 같았던 유령곡이었지만 깊숙한 곳에 자그마한 주거지가 숨어 있었다.

“정말로 너무하군.”

주거지라고 해도 도저히 사람이 살 곳이 아니었다.

목조로 된 건물이 있으나 넓기만 하지 방이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이부자리만 깐 것에 불과했다.

그 대신 무기고나 서고 혹은 의원 등의 시설들은 훌륭했다.

반대로 너무 깔끔해 기분 나쁠 정도였다.

“몇 년, 아니 몇 십 년 동안 찾았던 곳인데 이런 곳이 있었다니.”

가무량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곡에 도착하여 수련만 받았다.

잠은 아무 곳에서 누워 처리했다.

탈주했을 때는 어디엔가 유령들의 본거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습격을 위해 찾아 헤맸다.

하지만 본거지는커녕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는데 이렇게 손쉽게 찾아 들어올 줄이야.

“진법 안에 숨어 있었으니 그렇게까지 허탈해하지는 마라. 그럼 다음에 부를 테니 쉬도록 하라고.”

탈주령들은 도착하고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항상 언제나 유령이나 광인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니었다.

누울 곳이 울퉁불퉁하지 않고 평면으로 된 바닥인 것도 어색해서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결국은 필요하지도 않은 불침번을 정하고 교대하면서 잠을 청했다.

“소령”

“네.”

소령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듯이 나타났다.

낙소월은 종종 유령들의 등장에 놀라곤 했다.

기척을 느끼지 못하니 정말 귀신을 보는 기분이었는지라 심장이 튀어나올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외부의 지부와는 어떻게 연락하지?”

“암호문으로 된 편지를 전서응을 통해 보냅니다.”

“이번에는 너에게 부탁할게.”

소령이 대답 대신 붓과 종이를 가져다줬다.

우선적으로 전할 건 유령곡주의 등장과 정체. 그리고 비밀의 유지와 주변 사람들의 보호였다.

혹시라도 사문이나 아군이 괜히 눈먼 유령에게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였다.

“나에 대해서 믿을 거라고 생각해?”

“믿되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눈앞에서 증명하지 않는 경우와, 그런 경우에 따른 행동 강령이 있습니다. 명령이 제한될 것입니다.”

“서신에는 통제 능력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나.”

주변 사람의 보호는 가능하되, 귀중한 정보의 열람이라거나 암살에 대한 것도 제한이 생긴다.

새로운 사실을 기억하면서 각 지부에 서신을 보낸 다음, 한동안은 서고에 박혀서 여러 가지 조사를 했다.

유령들은 어떠한 질문도 답해 주었으나, 기본적으로 묻지 않는다면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모르는 사실은 묻지 않으면 영영 모르기에 서고를 뒤져 가면서 유용한 정보를 찾아야만 했다.

유령곡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그리고 곡이 소유한 영약이나 무공 비급 외에 다른 정보에 대해서도 있었다.

그 양이 보통이 아니었는지라 전부 알아내는 건 무리가 있었고 중요한 것만 골라서 습득했다.

그것만 해도 제법 큰 성과였다.

시간이 흘러 보름이 지났다.

중요하게 여기는 정보를 전부 필독(畢讀)했다.

암호문도 기초적인 것을 배웠다.

“사형. 슬슬 시간 됐어요. 다들 기다려요.”

진시(辰時) 무렵 낙소월이 부르러 왔다.

“그래.”

서적을 덮고 책장에 집어넣었다.

이제 벽곡단도 슬슬 질려 간다.

이놈의 유령곡은 맛에 대한 개념이 없는지 벽곡단 외에 음식이 없었다.

“나가자.”

만약의 상황과 외부와의 연락을 위해 유령들 중 다섯 명을 하북곡에 남기고 왔다.

탈주령은 전원 따라왔다.

누구는 몇 년, 누구는 수십 년 만에 나간다는 사실에 어색해 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눈을 껌뻑이면서 수군거렸다.

참고로 안내받은 길은 원래 들어왔던 곳과는 달랐다.

궁금하여 물어보니 출입구가 여럿이라 한다.

그중에는 길이 복잡해 헤매긴 하지만 무수히 설치된 진법을 통과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바깥에 나오니 햇빛이 반갑게 일행을 맞이했다.

“하! 햇빛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주서천이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씩 웃었다.

그 뒤에 붙은 낙소월도 기분 좋은 듯이 미소 지었다.

유령곡은 빛이 나는 이끼를 제외하곤 암흑뿐이어서 햇빛이 특히나 반가웠다.

“허어……”

가무량이 신기한 듯 입을 뻐금거렸다.

그를 비롯한 탈주령들은 전원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

“끄흐윽……”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우는 사람도 나왔다.

지옥을 무사히 탈출한 것에 안심한 듯 울음을 터뜨렸다.

누구도 그 혹은 그녀를 비웃지 않았다.

주서천과 낙소월도 이때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심경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가무량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물었다.

“알아서 해라.”

“알아서?”

“그래. 너희가 필요하다면 유령이 찾아갈 거야. 시간이 걸리니 곁에 있어 준다면 나야 좋지만, 그건 이제 막 자유를 되찾은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니까.”

가무량이 살짝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가 눈을 감는다.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의 생각이 지나갔다.

그 고요함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도 그였다.

“솔직히 나는, 아니 우리는 너를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한다.”

그렇게 염원하던 바깥에 나왔지만, 아직 실감이 가지 않았다.

무슨 함정이 도사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

그동안의 생활이 그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꿈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확인해 보마.

진실과 마주해보고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여 도움을 주겠다.”

‘역시 이걸로는 유령에 대한 원한을 접지는 않는군. 그래도 이 정도면 성공한 거야.’

어차피 금제를 걸어 두었으니 놓아줘도 상관없다.

동맹을 약속해 줬으니 그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만 가 보겠다.”

“그래. 딱히 갈 곳이 없다면 어제 가르쳐 준 금의상단으로 가 봐라. 언질을 넣어 둘 것이니 도와줄 거다.”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마흔다섯의 기척이 사라졌다.

“가 버렸네요.”

“응, 그러게.”

“정말 놔줘도 괜찮겠어요?”

낙소월은 주서천이 걱정됐다.

유령에 대한 원한이 곡주에게 향한다면 걷잡을 수 없다.

사람의 한이란 건 생각보다 무섭다.

강호 무림은 더더욱 그렇다.

은원관계로 되어 있는 세상이니까.

과거를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금제에 대해서는 설명했잖아?”

“네, 그건 알고 있어요. 그래도……”

불안했다.

세상에 완벽이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낙소월은 나이에 맞지 않게 신중했다.

어릴 때도 그렇지만 또래보다 성숙하고 지혜로웠다.

“놔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래? 뇌옥에 가둘까?”

“그건……”

낙소월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사형을 걱정하는 마음과 사람으로서의 도덕심.

그 둘이 양립하여 어쩔 줄 몰라했다.

“확실히 사매의 말대로 실수를 해서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완벽이란 건 없으니까.”

그는 천재가 아니다.

통제 능력의 약점이나 구멍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유령에게는 마음도 감정도 존재하지 않아 배신당할 걱정은 없지만, 탈주령은 달랐다.

사람의 의지라는 건 보통이 아니니까.

그게 얼마나 대단하고 무서운지는 전란을 겪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돌려보냈냐고?”

“네.”

주서천은 등을 돌려 옅게 웃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그 웃음을 본, 낙소월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오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산동, 제남.

금의상단의 위세는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갔다.

안 본 사이에 장원이 몰라보도록 커졌다.

고작 반년 정도인데, 그새 부를 축적해 증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남에 도착한 일행은 곧장 상단으로 향했다.

일행이라곤 해도 낙소월과 다섯 명의 유령이었다.

“야, 저기 봐 봐.”

“저 사람 혹시……”

상단의 출입구로 향하던 도중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선 방문객들이 주서천을 보고 수군거렸다.

“하하. 유명해지면 이런 게 곤란하니까.”

그러고 보니 매화정검이란 별호를 채 즐기기도 전에 화산으로 돌아갔다.

화산파에서도 그를 알아봐 주었지만, 그래도 식구들인지라 그렇게까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한눈에 알아보고 칭찬(?)해 주니 기분이 새롭고 좋았다.

전생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반응이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요……?”

낙소월이 의문이 깃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가?”

“시선이요.”

“그건 네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그래. 평소에 주목되는 시선 사라졌다고 너무 그러지 마라.”

“그런 거 아니거든요……”

낙소월이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을 알아보는 게 꼭…… 사형?”

장원 내로 들어온 주서천이 발걸음을 멈췄다.

입구에서 명부에 적고 들어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잘 손질된 정원 정중앙에 기이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걸 보고 나서야 아까 정문에서 느껴졌던 시선의 정체를 이해했다.

“ …… 사형.”

“묻지 마.”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외면했다.

눈앞에 나타난 건 팔 척가량의 조각상이었다.

얼굴이 오밀조밀하여 조각사의 실력이 제법 대단했다.

무엇보다 돌이나 철이 아닌 황금으로 되어 있어 눈에 띄었다.

아니, 그 전에 이 황금상이 누구를 닮았다.

“아이고! 대협이 아니십니까!”

쿵쿵쿵!

반년 사이에 살이 찐 이의채가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꽤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두 겹이 된 턱 살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예전에는 상인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상당히 풍족해졌는지 뒤룩뒤룩 살이 쪘다.

“이 상단주 이의채. 전쟁으로 남편을 보낸 아낙네처럼 대협을 기다렸습니다요! 헤헤헤!”

외관은 변했지만 성격과 태도는 여전했다.

비릿하게 웃으면서 손바닥을 비비는 모습은 그야말로 간신배.

호감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제가 얼마나 대협을 그리워했냐면, 이렇게 정원에다가 대협의 형상을 한 조각상을 만들어 두고 아침마다 절을 올렸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이의채가 활짝 웃으면서 황금상의 밑단을 매만졌다.

그 손놀림이 음흉해서 기분 나빴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수군거린 게 어째서인지 알 수 있었다.

주서천은 천천히 걸어가 황금상 앞에 섰다.

그러자 이의채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 말을 시작했다.

“예, 대협. 이 황금상을 설명하자면……”

그리고 말은 곧 비명으로 바뀌었다.

“으아악! 대협! 그게 얼마짜리인데! 대협! 대협!”

“집어치워!”

* * *

그리운 얼굴들과 마주 본다.

“여러분 모두 오랜만입니다.”

제남은 이제 제이의 고향이나 다름 없었다.

금의상단에서 지내는 하루는 무척이나 편안했다.

무엇보다 그리운 얼굴을 보는 게 반가웠다.

“흐흐흑… 정말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협! 끅!”

이의채가 조각조각 나누어진 황금을 쥐고 울면서 인사했다.

하필이면 머리 부분을 들고 있어 묘하다.

“그만 울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보고나 해 주십시오.”

“예……”

보고라도 해도 대단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것들은 서신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들었다.

금의상단은 영역을 점차 넓혀 가면서 장사했다.

곡식 외에도 무기부터 시작해 객잔이나 전장도 몇 군데 설치했다.

부업인지라 대규모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군량과 군기(軍器)에 집중하고 있다.

금의검문은 일군부터 삼군까지 문제없이 성장하고 있다.

상왕이 인재를 꼽아 오는 눈은 확실하지 않은가.

문제가 있으면 곧장 퇴출하고 보충 인원을 채워 최상을 유지했다.

냉정하지만 효율적이었다.

“참고로 석 달 전부터는 무곡님께서 참여하여 종종 가르침을 내려 주십니다.”

“그래요?”

나쁘지 않았다. 반대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상천십좌에 가까운 남자, 그 검마가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필시 좋은 성과를 부를 거라 생각됐다.

“네. 초기에는 웬 식객이 가르치려 들자 화냈으나 호되게 당한 이후로는 입 다물고 잘 따르더군요.”

“그 양반에게 덤볐답니까? 크게 되겠군.”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다.

“승계는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

“주무시고 계십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얼마 전부터 뭘 개발한다더 니 며칠 동안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아마 슬슬 일어날 때가 됐습니다만, 시종을 불러 깨우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니 느긋이 보면 됩니다. 그보다 소개해줄 사람이 있습니다.”

이의채의 시선이 자연스레 옆으로 향했다.

“강호의 여걸이시자 화산오장로이신 철혈매검의 사손이신 낙소월 소저시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문난 대로 천하제일의 미녀이시군요. 이 소상, 그 미모를 처음 보고 눈이 튀어나올 뻔했습니다요.”

아부가 물 흐르듯이 흘러나온 것도 감탄했지만, 소개하지 않았음에도 알아보자 낙소월이 놀랐다.

“절 알고 계시나요?”

“그럼요, 알다마다요. 화산에 방문한 사람들이라면 소저의 미모에 홀리지 않고 나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대협의 곁에 얼마 없으신 소중한 분인데 제가 몰라보겠습니까? 이 소상, 대협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습니다.”

“좀 기분 나쁠 정도군요.”

“허허. 대협.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의채가 뻔뻔하게 맞받아쳤다.

“사매에 대해서는 내가 말한 적도 있고, 상단주께서는 상당히 유능한 분이셔. 상계뿐만 아니라 무림에 대해서도 일가견 있으시지. 우리보다 잘 알 거야.”

“아는 것이 곧 돈이지요.”

“아는 것이 힘 아닙니까?”

“상인에게는 힘이 곧 돈이잖습니까!”

과연, 일리 있는 말이었다.

“저에 대해서 소개할 기회가 없는 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알고 계시니 편하네요. 잘 부탁드릴게요.”

낙소월이 허리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이고, 여협. 저 따위 상인에게 이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이의채가 곤란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면서도 기분 좋은 듯 미미하게 웃었다.

‘역시 대협의 사매시로군. 금의의 이름이 올라가면서 여러 후기지수를 봤지만 멸시하지 않고 이렇게 대해주는 사람은 몇 없었는데 말이야.’

무인이 상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좋지 않고, 금의상단은 특히 더더욱 그렇다.

좋은 취급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고, 실제로 만나 본 사람들은 대부분 적의와 멸시를 보냈다.

특히나 정파의 후기지수란 이들 중에선 오만과 자만으로 똘똘 뭉친 안하무인이 많았다.

주서천과 제갈승계는 그중에서도 그렇지 않은, 특이한 부류에 들어갔고 오늘로 낙소월도 추가됐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걸 좋은 의미로 떠올리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아, 그리고 소개할 사람은 더 있습니다.”

“이런! 혹시 동행인이 계셨습니까?

제가 그만 대협의 잘생긴 얼굴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분들이 어디에 계신지만 말씀해 준다면 당장 마중을 나가지요.”

“괜찮습니다. 여기에 있으니까요.”

주서천이 지면을 검지와 중지로 툭툭 두들겼다.

그러자 원래 있었던 것처럼 양옆에 남녀가 나타났다.

“헉!” 

이의채가 비명을 지르면서 넘어졌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이 둘은 앞으로 상단주님의 손발이 되어 줄 겁니다.”

“손발이라니 …… ?”

이의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자와 여자.

둘 다 노출이 심한 옷차림에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을 가린 검은 천.

유령곡에서 따라온 다섯 명의 유령 중 두 명이었다.

“두 명이 힘을 합하면 절정 고수는 간단하고 초절정 고수도 무리해서 죽일 수 있을 겁니다. 이 둘은 주로 암살과 정보 수집에 능하니 수족으로 부리십시오.”

이의채도 이제는 스스로 말하는 거처럼 소상이라 부를 수 없는 몸이 됐다.

받는 주목이 상당하기에 주변에 호위를 두긴 했지만 부족하다.

검마가 계속 곁에 있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말을 해 두었으니 상단주의 명령에는 어떠한 것이라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부디 그들을 도구가 아닌 사람으로 대해 주십시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설사 마음을 잃었다고 한들, 사람은 도구가 아니다.

그들 또한 어찌 보면 피해자였다.

지금까지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게 전부 그들의 탓이라고 말하기에는 힘들었다.

과거에 피해자였다는 게 면죄부로 쓰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용만 당하는 삶은 너무 불쌍하다.

설사 마음을 잃어 의미가 없을지라도, 조금이라도 보답을 받았으면 했다.

“그와 그녀는 앞으로 평생을 상단주 곁에서 보낼 겁니다. 이름은 없으니 대신 지어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주서천의 곁에서 이의채의 곁으로 이동해 멈춰 셨다.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여행에 지쳐 조금 피로하군요. 내일 또 찾아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부디 푹 쉬십시오.”

인사를 나누고 문을 열고 나가자 하인과 하녀가 맞이해 줬고, 두 사람을 각각의 방으로 안내해 줬다.

그리고 약 일각 뒤 주서천이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이의채가 놀라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주서천은 주변에 듣는 이가 없는지 확인한 다음 숨겨 두었던 용건을 꺼냈다.

“맡겨 두었던 비급을 가지러 왔습니다.”

“과연. 어쩐지 소림사가 너무 조용하다 싶었습니다.”

‘여전히 무서울 정도로의 통찰력과 두뇌 능력이다.’

자세한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전부 눈치챘다.

혈승의 비급, 무림맹과 소림사, 보관된 반야신공.

정세를 파악하는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괜히 전란의 시대에서 상왕으로 군림한 게 아니다.

‘아군으로 삼아서 정말 다행이다.’

그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 곧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었다.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어찌나 무겁던지!”

이의채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바닥을 더듬었다.

한참을 더듬던 그의 손이 보이지 않을 넓이의 틈을 잡았다.

살로 두툼한 손가락인데도 잘도 잡혔다.

그다음은 품 안에서 나무 꼬챙이를 꺼내 틈에 집어넣어 바닥을 뒤집어 열었다.

“최소 이틀에 한 번은 장소를 변경했고, 아는 자는 저밖에 없습니다. 덕분에 자택도 제법 개조했지요.”

살로 퉁퉁한 손가락 사이에 잡힌 비급이 조심스레 운반되어 원주인 도굴자에게 돌아갔다.

“그동안 보관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내용을 살펴 진본인지 확인한 다음 품에 갈무리했다.

딱히 의심하는 건 아니고 혹시나 제삼자에 의해서 몰래 뒤바뀔 위험성에 대비해서다.

“소림사에 ‘가지고 가겠습니다.’ 라고 서신 한 장 보내 주십시오. 무림맹주께서 언질을 해 두었으니 알아들을 겁니다. 그럼 정말 쉬러 가겠습니다.” 

이튿날, 상단주의 과할 정도의 대접 덕에 한동안 쌓였던 피로를 전부 풀었다.

특히나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진수성찬이 나와서 입이 찢어질 정도로 행복했다.

아무리 벽곡단이 영양 면으로 좋다곤 하지만 맛은 정말 없다.

숙수가 해준 요리와는 차이가 컸다.

약주까지 곁들여서 배를 전부 채운 다음, 식구라 부를 만한 사람들에게 낙소월을 소개했다.

참고로 무곡을 만날 때는 그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됐다.

“호오. 없는데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구려. 혹시 이들이 계곡의 유령들이요?”

무곡은 주서천을 보자마자 유령 들을 알아챘다.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은공을 뵙습니다.”

무선화가 고사리 같은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은공으로 불리는 것도 참으로 어색하군요. 은공은 제가 아닌 당 소저입니다.”

확실히 절 치료해 주신 분은 독봉이시오나, 주서천 대협 또한 저의 은공이시옵니다. 소녀가 아버님께 들은 바에 의하면 독봉께 부탁하여 치료를 요청하시고, 또 치료에 필요한 도구를 목숨을 걸고 가져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선화는 몸이 좋지 않아 집 바깥에서 놀기보다는 집 안에서 앉거나 누워 있을 때가 많았다.

또 무곡이 외부인의 접근을 경계한 탓에 동년배의 벗도 사귀지 못하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무료함을 달래려고 서적을 읽었다.

예법이나 어투 역시 좋은 책을 읽고 배웠다.

조금 건강할 때는 학사 등을 초빙하여 공부도 열심히 했기에 몸에 밴 예법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소. 은공에게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내가 왜 맹세까지 했겠소?”

무곡이 딸을 보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맞아요, 사형. 공손한 건 좋지만 과하면 실례가 될 수도 있는 걸요.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예요.”

사형의 칭찬에 사매가 생긋 웃었다.

그의 진가를 오롯이 혼자 알고 있던 시절에 비해선 조금 쓸쓸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적어도 전처럼 저평가되어 속이 썩을 일은 없으니까.

“졌다.”

주서천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최근 금의검문에게 가르침을 준다고 들었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오. 그저 눈에 걸리는 것이 보이면 지적해 주는 것 정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지 않습니까. 혹 괜찮다면 문주직을 맡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무리요.”

무곡이 미안한 얼굴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리 그대의 부탁이라도 사문 탓에 그럴 수가 없소.”

“호오, 사문 말입니까?”

훗날 천하제일 이인자로도 불렸던 검마의 사문!

무인으로서 관심이 안 갈 수 없다.

그에 관련된 정보는 여러 가지 있지만, 사문에 대해서는 없었다.

그의 무공이자 검이 얼마나 대단한 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었지만 정작 무공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무곡이 딱히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가 워낙 무서워서 그 누구도 묻지 않은 탓이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그다지 어려울 것 없소. 일인전승으로만 내려오고 강호에도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았으니 아마 모를 거요.

용재문(龍帝門) 이라는 이름인데, 들어 봤소?”

“확실히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요.”

원래라면 제자를 들였어야 했지만, 딸을 치료하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없었다.

미래에는 암천회주의 오른팔로서 무림 공적이 되어 싸우다가 결국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문파 자체도 은거 성향이 강하니 알려지지 않았고 최후의 문주도 이렇다 보니 모를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아, 그리고 괜찮다면 소저께 호위를 붙여드리려고 합니다만, 어떠십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소. 혹시 저들 중 하나요?”

“예. 동성이기도 하니 불편할 리 없을 겁니다.”

유령 중에서 약관 정도의 여인을 둘 붙여 줬다.

무곡이 그 둘을 보고 흡족하게 웃으면서 감사해했다.

성별까지 신경 써 주니 참으로 고마웠다.

안 그래도 호위나 시녀를 새로이 고용하려고 이의채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었다.

주서천은 부녀에게 유령에 대한 몇 가지 안내 사항을 알려 준 뒤, 주인을 무곡과 무선화로 지정했다.

그 뒤로는 차를 마시면서 적당히 대화를 나눴다.

낙소월과 무선화는 여성이기도 하고 연령대도 비슷해서 금세 친해졌다.

둘 다 성격도 잘 맞았다.

무곡은 딸의 웃음을 보고 방해하지 않겠다면서 나갔고, 주서천도 그 뒤를 따라 마당에서 대화했다.

* * *

하북곡에서 데려온 유령도 소령만 남았다.

그래서 인원을 충당할 겸 산동곡을 찾았다.

어차피 지배 영역을 늘리려면 찾아가야 할 곳이었다.

이번에는 낙소월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 갔다.

소령이 안내자로 나섰으니 굳이 따지자면 혼자는 아니다.

여하튼, 산동곡은 하북곡처럼 광인이 덮쳐 오거나 하는 상황은 없었다.

애초에 하북곡이 특이했다.

유령은 마흔 명이었고 수련령(修練靈)은 백이었다.

이걸로 산동곡을 손에 넣었지만 고민도 생겼다.

‘수련령은 어떻게 해야 하지?’

유령을 양성하는 건 결코 인도적이지 않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하북곡의 경우에는 가무량이 워낙변칙적인 인물이었는지라 반항하여 탈주하는 데 성공했지만, 산동곡의 수련령은 그러한 이가 없었다.

그들은 모든 걸 체념하고 살아남는 데만 집중하여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눈을 감고 이대로 지나갈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전부 놓아줄 수는 없는 노릇.

결국 고민하던 끝에 차선책을 내놓기로 했다.

“더 이상 심살을 하지 않는다.”

암살로서 유령들을 따라올 자는 없다.

괜히 자객방 중에서 전설로서 군림한 게 아니다.

심살은 이겨 내기만 한다면 최고의 능력을 얻는 것이었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위험이 너무 컸다.

무엇보다 사람의 감정이자 마음을 앗아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후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것은 남겨 주고 싶었다.

하북곡에도 서신을 보내 전했다.

원래라면 타 지부에도 보내고 싶었지만, 심살의 과정 같은 경우는 워낙 중요하다 보니 증명이 필요했다.

“응?”

산동곡의 의뢰 목록을 보던 도중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상단주의 이름이 왜 여기에 있지? 설마하니 암살을 준비하던 건 아니지?”

“얼마 전 온 서신의 암살 불가 목록을 열람하기 전에 받은 의뢰입니다. 전부 거절하고 위약금을 지불할 예정입니다.”

암살에 실패하면 의뢰금의 네 배에서 여섯 배를 지불했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두 배를 지불했다.

금의상단주의 목에 걸린 금액이 적지는 않았지만 유령곡의 자금도 보통이 아닌지라 지불이 가능했다.

“의뢰자는 강소의 상단인가. 산동에서 영역을 확장하다 보니 밥그릇 빼앗긴다고 의뢰한 모양이군.”

시간이 지날수록 상왕의 면모와 닮아 가고 있다.

무려 몇십 년을 단축했다.

하늘이내린 상재에 자금이 주어지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됐다.

산동곡에 유령 삼십을 남기고 열 명을 데려왔다.

상단에 도착해 이의채에게 암살을 의뢰한 곳의 이름을 가르쳐 주자 고맙다면서 눈을 빛냈다.

여전히 아부를 하면서도 그 이름을 볼 때의 눈은 얼음처럼 차갑게 빛났다.

“아무래도 상단이 커지다 보니 절 노리는 자들이 좀 늘었습니다. 그리고 이자들 중 몇몇은 머리가 빈 바보들인데, 참으로 괜찮은 먹이이죠.”

가끔씩 이렇게 섬뜩한 미소를 지울때가 있다.

돈, 이득에 관련된 일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잔인했다.

“유명해지면 정말로 피곤해지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중원의 상권을 전부 손에 넣게 해 주겠다는 등의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자도 있었습니다.”

차를 마시던 주서천의 손이 움찔 떨렸다.

“어떤 자였습니까?”

“이름은 말하지 않고 만남용으로 금 열 냥을 내놓고 가더군요. 그래서 냉큼 받긴 했지만, 대충 흘려들은 다음 보냈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더군요.”

“상단주. 당분간 내부와 외부의 보안을 철저히 하십시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고용된 자들을 주의하시오.”

“역시 대협이십니다. 그놈이 수상한 자인 걸 이야기만 듣고도 알아보셨군요!”

경박한 태도로 아부만 해 대는 것 같았지만, 그 속은 전혀 아니다.

살에 파묻힌 눈이 날카롭게 떠졌다.

“어떻게 할지는 저에게 딱히 묻지 않으셔도 되지만, 그저 앞으로 조심해 주시면 됩니다.”

미래, 전란 동안 이의채는 별 피해없이 알아서 대처하여 상단을 키우고 크게 성공했다.

가만히 놔두어도 최상의 결과를 내는 사람에게 굳이 뭐라 조언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두루뭉술하게 적당한 경고만 한 뒤, 따로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천권성이 접근했나.’

칠성사의 천권은 천기나 회주에게 명령을 받아 미래가 돋보이는 세력에 간자를 심는다.

그리고 간자를 심기 전에 아군으로 회유하려고 사람을 보내 확인하는데, 이번에 온 듯했다.

아직 확신을 할 수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금의상단의 성장.’

금의상단은 요 몇 년간 몰라보도록.성장했고, 한 지역이 아닌 중원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

상왕이 전생에서 암천회의 회유를 어떻게 거절하고 자산을 지킨지는 잘 모르지만 제지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공격당할 테니까.

‘너희 맘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눈을 감으면 비명이 들려온다.

전란에서 죽은 이들의 절규와 비명이 세상을 붉게 만들었다.

그 위에는 암천회가 있었고,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칠성사와 도감부, 그리고 암천회.

‘천선성.’

반격, 아니 습격의 시기가 왔다.

그 첫 번째 목표는 암천회 정보의 중심이기도 한 천선성이다.

천권이 첩자를 심어 얻어 내는 정보도 보통이 아니지만, 천선에 비교하자면 그 양은 압도적으로 적다.

그야 그들의 정체가 천하에서 손꼽히는 정보 단체이기 때문이다.

‘하오문(下五門)’

무림에는 정도가 있고 상도가 있으며 마도가 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흑도(黑道)라는 것이 존재한다.

실온 말만 흑도이지 하오문은 무림에서 제대로 된 강호 문파로 취급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문파지 그들을 구성하는 건 순 시정잡배들 뿐이었던 탓이다.

저잣거리의 소매치기부터 시작해서 기녀나 점소이, 장원의 하인이나 마부나 혹은 표국의 말단 무사.

구성원만 봐도 어떤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무림의 밑바닥층이 모인 곳으로 그 숫자는 문파 중에서도 제일이지만 결속력은 좋지 못하다.

시정잡배이다 보니 인의라거나 충성이라는 건 농담거리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다만 온갖 직업을 지닌 이들이 모이다 보니 이들의 정보 수집 능력만큼은 무척 탁월했다.

‘일곱 수장 중 일인인 하오문주!’

그리고 그 하오문주가 천선의 정체였다.

문주라고 하지만 흑도 방파이기에 온갖 무시를 당하는데 그 정체는 암천회의 수뇌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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