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章무심유심(無心有心) (83/254)

第十章무심유심(無心有心)

천(天)은 지식이요.

지(地)는 힘이니, 인(人)은 사람이리라.

천지를 갖추었다면 이안(二眼)을 얻은 것이니, 사람인 삼안(三眼)을 찾아서 천하(天下)를 훔쳐라.

……비석에 새겨진 유언

삼안신투는 천하제일의 도둑이었다.

천하에게 쫓기는 일은 당연했다.

관부와 무림인, 심지어 일반인까지 삼안신투의 보물을 탐냈다.

이렇다 보니 삼안신투는 은신처와 더불어서 그들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듣고 도망친다면 결코 잡힐 리가 없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유령곡이었다.

실체를 포착할 수 없는 유령들, 초절정의 고수들이 산하에 있다면 어떠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으리라.

삼안신투는 이 생각을 도둑질을 시작하기 전부터 했고, 곳곳에 은신처를 만들어서 유령들을 길러 냈다.

그게 지금 유령곡의 전신이다.

“비석에 새겨진 글귀의 삼안이란 건 이런 의미였나.”

지식이란 건 정보고, 힘이란 건 순수한 무력이다.

사람이란 건 곧 유령들을 의미했다.

“하아……”

낙소월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냐고 묻자, 낙소월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면서 따지듯이 외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묻는 건가요?

화산파의 제자가 유령곡주가 되었으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죠.”

“나도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야.”

유령곡의 유일무이한 신공이 설마하니 절대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효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만약 이게 무림에 알려진다면 어떠한 파장을 부를지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정파의 기둥인 구파일방 중 화산파의 제자가 유령곡주라니.

정말로 심하면 파문당할지도 모른다.

낙소월은 머리가 아파 오는 듯,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누르면서 중얼거렸다.

“이런 건 결코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이 정도 되는 비밀을 영원히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무겁네요.”

“걱정 마. 유령들의 힘을 빌리는 건 어디까지나 세상을 구할 때까지니까.”

“그 이야기 아직 전부 믿는 건 아니란 걸 알아주세요, 사형.”

“그거면 됐어.”

주서천이 흡족한 듯이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넌 이름이 뭐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유령에게 묻는다.

연령은 십이 세에서 십오 세 정도 됐다.

“저희는 유령일 뿐, 이름 따위는 없습니다.”

심옥련보다도 더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너나 야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소령(小靈)이라고 부르마.”

단순한 동맹원이 아니라 수하라는 걸 깨닫자 말이 곧바로 짧아졌다.

그러나 어떠한 유령들도 이의를 가지지 않았다.

아니,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 맞았다.

그들은 마치 혼이 없는 인형과도 같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여러 명이 말하니 헷갈리니까, 내 질문에는 소령만 대답하도록.”

소령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정확히 어디지?”

“하북곡(河北谷)입니다.”

“하북곡?”

“유령곡 하북 지부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말은, 유령곡이 이곳 한 곳이 아니라는 건가?”

주서천이 휘둥그레 떴다.

“네. 전부 스물두 곳입니다.”

“허어!”

유령곡이 은신처로도 쓰였다고 했을 때부터 한 곳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설마 이리 많을 줄이야.

거의 전국에 위치해 있는 모양이었다.

“이곳에는 몇 명이나 있지?”

“저를 포함한 열 명입니다.”

“겨우 열 명이라고?”

전생에 의하면 이렇게까지 적지 않아 궁금증이 생겼다.

“원래는 서른하고도 두 명이 있었지만 수련을 이겨 내지 못한 광인들에게 당했습니다.”

“광인? 아, 아까 그놈들인가. 그놈들은 뭐지?”

유령은 아닌 것 같았지만, 유령보를 사용했다.

“저희는 정기적으로 고아를 데려와 유령으로 양성합니다.

그 과정 중 무심을 위한 심살(心殺)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겨 내지 못하고 실패하면 저렇게 변해 버립니다.”

자객에게는 몇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무심(無心)이었다.

절세 미녀가 나신으로 유혹한다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가족이 살해당해도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서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표적의 목숨을 앗아가 임무를 완수한다.

인성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들 혹은 그녀들에게 필요한 건 냉정심과 인내심 정도였다.

팔다리가 잘려 아파서 주저하면 실패한다.

목숨의 위협을 느껴 주저하면 실패한다.

목표가 가족일 때도 주저하면 실패한다.

‘삼안신투도 정상인은 아니군.’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된다.

이러한 체계를 만든 건 유령곡주인 삼안신투 장본인일 터.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잔혹하다.

눈앞의 나이 어린 소녀를 살인 도구로 만들었으니까.

‘유령곡을 습격한 건 한참 뒤니까…… 숫자가 이렇게 적은 건 이상한 게 아니군. 아마 곡의 비밀을 안 암천회주가 유령을 수없이 양성했겠지.’

하북곡은 광인들에게 신경 쓰느라 근처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눈치채지 못해 곡을 노출시켰을지 모른다.

“그러면 일단 그 광인들부터 처리해야겠군. 몇 명이나 남았나?”

“정확한 추정은 불가능하나 아마 오십에서 칠십 명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가. 그러면 이들부터 처리해야겠군.”

광인들을 처리해야 이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좋아, 안내해라. 빠른 시일 내로 정리하자고.”

* * *

주서천은 명령을 내리기 쉽게 유령들에게 전부 이름을 붙여 줬다.

대부분 외관에 관련되게 지었다.

그 뒤 이 공동을 돌아다니면서 광인들을 찾아다녔다.

“이곳에서 주의할 것은?”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으며, 상당히 위험한 독물 또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과연, 그래서 광인들을 처리하는데 애먹은 건가.”

“그건……”

소령이 답하기 전에 머리 위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것 참, 대화 좀 하자!”

주서천이 눈부신 반응 속도로 머리 위로 검을 휘둘렀다.

검에 실린 기가 부채꼴처럼 퍼지며 바람을 만들어 낸다.

거센 풍압이 광인을 후려쳤다.

“크헤엑!”

검풍에 정면으로 부딪친 광인이 바닥을 굴렀다.

이대로 끝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행하게도 광인들은 단체로 다니는 것이 습성인 듯했다.

숨어 있던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주변의 암벽 사이에서 뛰쳐나오는 모습이 목격됐다.

수를 대충 세어 보니 스물하나에서 스물셋 정도.

“소령을 제외하고 세 명씩 짝을 짓는다.”

유령들이 합이라도 맞춘 듯 동시에 움직였다.

그걸 보면 정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어떤 명령을 내릴지 예상한 것처럼 반응 속도가 번개와 같았다.

“소령은 사매의 곁에서 싸우다가 위험해 보이면 도우도록. 그 외는 자율적으로 알아서 싸워라!”

“존명.”

파바밧!

각자 짝을 지은 유령들이 움직였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어떠한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습을 나타낼 때는 병장기를 부딪칠 때만이었다.

“죽어라아!”

“전부 죽여 주마!”

“싫어, 싫어, 싫어!”

“그만해에!”

광인들이 괴기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날아왔다.

“셋.”

적의 숫자를 세면서 검을 내지른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찌르기였다.

정면에서 멧돼지처럼 돌격해 오던 광인은 검을 세워서 찌르기를 검면으로 막아 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공 대결에 패배한 것인지 피를 울컥 토했다.

하지만 이내 광인은 한쪽 발을 축으로 삼아 내상을 입은 채로 반회전했다.

허리춤에 숨겨져 있던 검이 뽑히면서 섬뜩한 빛을 내뿜는다.

“역시나 귀찮단 말이지.”

전생에서 유령들은 아니나 노출된 자객과 싸워 본 적은 있었는데, 무척 힘이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눈에 띄지 않아서 그런지 암살의 표적이 된 적은 없었지만, 자객이 습격했다는 걸 듣고 도우러 간 적은 있었다.

그들은 정말 목숨을 던져가며 덤벼 왔었다.

애초에 자객이 습격에 실패해서 신분을 노출하면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도망치는 것이 아닐 경우에는 대부분 동귀어진할 생각이었기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눈앞의 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몸에 무리가 가는 내상을 입었는데도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주서천은 상체를 숙여 목덜미를 노려 오는 검을 가볍게 피해 낸 다음, 매화권으로 광인의 턱을 노렸다.

퍼어억!

주먹이 턱뼈에 시원스레 명중했다.

치아가 부러지는 동시에 뼈가 완전히 아작 났다.

파앗!

그사이에 나머지 세 명이 접근했다.

좌우와 후위였다.

정말로 유령들이었다면 섬뜩했을지도 모른다.

‘호흡.’

눈을 뜬 채로 청각에 집중한다.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대신 시끄러울 정도로 요란한 호흡이 들렸다.

평소였다면 시끄럽다고 느낄 정도의 호흡 소리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한 상태라 그렇게 느껴졌다.

일순간, 주서천의 세상이 바뀐다.

마치 옆이나 뒤에도 눈이 달린 듯 주변 광경이 전부 보였다.

보인다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애매하기도 했다.

호흡이나 병장기를 휘두르는 소리.

움직임에 따른 공기의 미세한 진동을 느껴 추정하는 것에 가깝다.

쐐액!

광인의 검이 뒤에서부터 옆구리를 노리며 찔러 왔고, 옆으로 두 걸음 이동해 가볍게 피했다.

그러곤 거의 동시에 검을 역수로 쥐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광인의 심장부에 꽂는다.

그리고 그다음 행동이 바로 이어진다.

뒤의 광인을 처리한 사이 양옆의 광인이 각각 일격을 날렸다.

심장에 꽂은 검을 뽑아 반격하기에는 늦다.

그래서 검을 쥔 손을 주저없이 놓고 유령보를 밟아 피했다.

단순히 피한 것뿐만 아니라, 오른쪽 광인의 뒤로 이동해서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소검을 빼앗았다.

평소에 쓰던 검과는 길이가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광인 정도 되는 이들의 목숨을 빼앗기에는 충분하다.

그는 자객이 된 것처럼 광인의 뒷목에 검을 꽂아 신속히 처리한 다음 반대편의 광인에게 곧장 날아갔다.

세 번째 광인이 급히 몸을 틀었으나 그 전에 흉부에 소검이 꽂혀 생을 마감했다.

물 흐르듯이 연결되는 움직임도 대단하지만, 전체적으로 무공이 뛰어나서 무심코 감탄하게 된다.

“누가 화산파의 제자라고 보겠어요?”

낙소월은 주서천의 무공에 순수하게 감탄하면서도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씩 신행백변을 보이나 유령보로 신출귀몰하는 탓에 화산의 움직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 방금 전에는 검까지 버리면서 적의 검을 빼앗아 목숨을 취했다.

검수라 부르기도 힘들다.

정파인이라면 그리고 검수라면 결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니 어이가 없었다.

만약 화산파의 삼대제자나 이대제자 등 주요 사람들이 본다면 뒷목을 잡으면서 소리 지를지도 모른다.

“잘 싸우네.”

낙소월은 주서천과 달리 화산파의 모범이었다.

차기 매화검수답게 신행백변이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펼치면서 광인들을 유린했다.

변검의 특징을 잘 살려 공수의 전환을 자유롭게 하고 곁에 붙은 소령과도 손발이 잘 맞았다.

반대로 유령들이 걱정이었다.

“무리하지 마! 굳이 손발을 희생할 것 없다! 적의 목숨을 취하는 것보다 자기 몸을 지켜라!”

유령들은 광인들만큼은 아니었지만 자기희생적인 움직임이 많았다.

실력이 좋아 멀쩡했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진작 손발이 잘렸을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주서천은 혼자서 싸우면서도 주변을 신경 쓰고 적절한 명령을 내렸다.

회귀 전의 전란에선 대부분 말단이었고 지휘층은 아니었는지라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의외로 지휘에 재능이 있나 하고 부푼 마음을 가졌을 때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몸이 먼저 반응했다.

검이 회전력을 담아서 좌측으로 포물선을 그리자,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비수들이 맞고 떨어졌다.

“웬 놈들이냐!”

영웅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반응하는 소악당 같았다.

 …… 

북서방향 일 리 바깥, 파도를 연상시키는 바위 위로 사십여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적지 않은 숫자에 낙소월이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광인들인가?’

저들을 합하면 소령이 말한 대로 남은 숫자가 맞는다.

다만 그들에게서 이상함을 느꼈다.

가슴이 무언가라도 막힌 듯 답답할 때쯤, 바위 위에 서 있던 인영(人影)이 전장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그 누구도 우리의 마음을 죽이지 못한다! 유령곡!”

“……!”

주서천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죠?”

낙소월도 놀라 묻듯이 중얼거렸다.

저들에게서 느낀 이상함의 정체는 마음이었다.

그들은 유령처럼 마음이 없지도 않았고, 광인처럼 미치지도 않았다.

흔들림 하나 없는 목소리로, 그리고 분노와 원한이 깃든 사람다운 감정을 내보였다.

“소령! 저들은 누구지?”

혹시나 제삼자의 개입인 것일까.

예상외의 일에 당황하면서 물었다.

“광인입니다.”

“하?”

소령의 대답에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게 됐다.

저들의 무엇을 보고 광인이라 하는가?

혹시 몰라 다시 봤지만 광인치곤 눈빛이 깨끗했다.

초점이 사라져 있지도 않고, 맛이 간 느낌도 아니다.

어딘가 모르게 복수심에 불타는 듯 했는데, 반대로 그게 더더욱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살에 성공하지 못하고, 그 과정을 이겨 내지 못했으니 광인이 맞습니다.”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겠네요.”

그사이에 광인 둘을 처리한 낙소월이 다가왔다.

“유령이 될 자들은 마음을 죽이는 과정에서 셋으로 나뉘었을 거예요. 성공적으로 마음을 죽여 감정이 없어지거나, 실패하여 완전히 미쳐 버리거나.”

“그리고 나머지는……”

“마음이 죽기도, 미치기도 전에 도망쳐 버린 거죠. 유령들 입장에선 그들도 이겨내지 못한 거니 광인이나 마찬가지겠네요.”

낙소월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야……”

꼭 자신들이 나쁜 놈이 된 것 같잖아.

“너희는 누구지?”

그사이에 사십여 명이 일행을 둘러쌌다.

유령들이 문답무용으로 달려들려 했으나, 주서천이 이를 제지하곤 대신 중심으로 모이게 했다.

“유령치곤 감정이 풍부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부류는 아니로군.”

검처럼 예리하게 잘 벼린 분위기의 남자가 유령들을 보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너희가 유령곡의 수뇌인가?”

‘아무래도 유령곡에 대해서 모르는 모양이군.’

유령은 곡주를 제외하고 평등하다.

수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알고 있었다면 수뇌가 아니라 곡주라는 표현을 했어야 했다.

즉, 기초적인 것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소령. 저들이 유령곡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이곳이 유령곡이란 것과 유령이 되기 위한 무공, 그리고 과정 뿐입니다.”

과연 생각대로였다.

“무슨……”

“저 유령들이 대화를 했다고?”

“그것도 여러 명이 아니라니……”

한편, 그 대화를 들은 이들이 경악했다.

그 반응을 본 주서천이 소령에게 다시 물었다.

“너희 대체 이들에게 평소 어떻게 대한 거야?”

“수련 과정만 가르쳤습니다.”

대충 어떨지 상상이 갔다.

아마 무공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겠지.

식사 또한 먹으라는 말 없이 벽곡단만 던져 줬을 게 뻔했다.

“이봐 지금 너희 심정이 어떤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서로 검을 내려 두고 대화부터 하자.”

“이해 못 하는 게 아니라고?”

남자의 눈이 증오로 불타올랐다.

“헛소리!”

그 외의 인물들도 깊은 증오심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 린아이를 납치해 와서 이 지옥에 던져 놓고 온갖 고통을 겪게 하고, 최후에는 마음을 죽이라면서 잔학무도한 짓을 했으면서 감히 그따위 말이 나오더냐!”

아무래도 그 증오가 보통이 아니었다.

뼛속까지 사무친 살의와 원한의 깊이를 보고 걱정부터 앞섰다.

‘왠만하면 적을 만들고 싶지는 않은데……’

이들이 바깥으로 나간다면 유령곡의 복수를 위해서 알리고 다닐 게 뻔하다.

무엇보다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 아니기에 억울한 점도 있어 오해를 풀고 싶었다.

“진정해. 일단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사매도 아니고. 나는 외부인이다.”

주서천이 소매 안의 매화를 보여줬다.

“화산파?”

“다행히도 상식 정도는 가르쳐 준 모양이내. 일단 서로 통성명부터 하자. 화산파의 주서천이라 한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말이냐?”

외부에서 화산파를 감히 사칭할 자는 몇 없다.

사파인이든 마도인이든 괜히 화산파를 사칭했다간 성가셔진다.

그러나 이곳은 유령곡.

설사 무림맹주나 천마를 지칭해도 별문제 없다.

아니, 그 전에 이들은 주서천이 광인들과 싸우던 모습을 목격했다.

화산파의 제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네놈들이 가르친 그 저주스러운 무공을 우리가 모를 줄 아느냐?”

“그렇지? 너희도 믿기 좀 힘들지?”

주서천이 멋찍게 웃으면서 뒤통수를 긁직였다.

“사형 …… !”

낙소월이 힐난의 눈초리로 째려봤다.

무슨 생각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대화는 끝났다.”

고요해졌던 살기가 다시 폭풍처럼 몰아친다.

“잠깐!”

“또 뭐냐!”

남자의 얼굴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살기가 잠잠해진다.

“이름 좀 알려 줘라.”

“가무량이다.”

짜증을 내면서도 성실히 답해 주는 가무량이었다.

“……?”

가무량의 옆에 서 있던 묘령의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외의 사람들도 의아해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전부 ‘뭐하는 거야?’ 라고 묻는 것처럼 가무량을 쳐다봤다.

“흐.”

주서천에게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렇군.”

“사형, 혹시……”

“그래, 광인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이 탈주령(脫走露)들에게는 적용되는 모양이야.”

신공의 통제 능력은 어디까지나 유령에 한해서다.

즉, 힘의 근간이자 기초인 유령심법을 익힌 자였다.

이 이론에 의하면 심살 과정에 버티지 못하고 미친 광인에게도 통용되어야 했다.

그래서 혹시 하는 마음으로 명령을 내려 봤으나, 애석하게도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명령을 들어도 그걸 시행하려면 언어를 머리로 이해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다 보니 주화입마에 빠져 이지를 상실한 광인들에게는 명령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들리지도 않았다.

“뭔 헛소리를 하는 거지?”

“전부 내 앞에 집결해라.”

“대체 뭔…… 무, 무슨!”

가무량을 포함해 탈주령들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 탓이었다.

“미리 말하지만 나 외에 사매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말도록.”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금제를 걸어 두었다.

그러나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가무량의 동공은 지진이 라도 일어난 듯 거세게 흔들렸다.

방금 일어난 현상을 이해해 보려고 머리를 굴려 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가무량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외의 탈주령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들 모두 제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못했다.

몸은 미동도 없는데 표정은 죄다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너희가 워낙 흥분한 탓에 강수를 둬야 하는 걸 이해해 다오. 앞으로 할 이야기는 조금 기니까.”

“도대체 무슨 사술을 쓴 것이냐……!”

“사술이 아니니까 가만히 좀 들어라. 지금부터 어찌 된 것인지 자세한 걸 설명해 주마. 그 전에 다시 소개를 한다면, 나는 화산파의 제자이자 유령곡주이기도 한 주서천이라고 한다.”

통제 능력에 대한 정보가 하나 더 추가됐다.

유령들은 마음을 죽인 탓에 군말하지 않고 따랐다.

그러나 탈주령은 달랐다.

그들은 아직 감정이 풍부하여 명령에 따르되 불만을 제기할 수는 있었다.

생각은 그러고 싶지 않은데, 몸이 저절로 따른다.

그 증거로 가무량은 방금 전까지 짜증을 부리면서도 주서천이 말하는 대로 따랐다.

“아직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았지만 말이야.”

주서천은 그들에게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다.

대부분은 낙소월에게 설명한 것과 비슷했다.

추가적인 것이 있다면 입곡 이후의 일이었다.

“잘도 꾸며 대는군!”

가무량의 적의는 사라지기는커녕 커졌다.

“마음만 먹으면 말만으로 죽일 수 있는데 굳이 입 아프게 거짓말을 왜 하겠어? 그래도 이런 수고를 하는 건 너희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야.”

확실히 자결해라, 라는 명령만 내리면 끝이다.

유령들을 빼고 지정해서 죽일 수 있으니 쉽다.

아직 해보지 못한 명령이지만 소령이 뭐든지 가능하다고 말해 주었으니 아마 진실이리라.

“이봐, 가무량. 너희에게 벌어진 일은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유령곡에 증오를 지니는 것도 당연해.”

그러나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이 악인이라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다.

반대로 악한 측을 꼽자면 유령곡이었다.

소령의 말에 의하면 부모가 없거나 노비로 팔려 나가는 아이들을 데려와 키운다고 한다.

유령곡은 죽어 가기 전의 아이들을 먹이고 재워 주었지만 그렇다고 지은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을 도구로 취급하고, 비인도적인 수련을 가했다.

“그 증오를 조금이라도 풀려면 복수를 해야 할 것이고, 아마 그 끝은 유령곡의 전멸일 거다. 하나 미안하게도 나는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무림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힘이 필요하니까.”

유령곡의 존재만으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그들이 지닌 힘과 정보력은 보통이 아니다.

소령에게서 곡에 대한 사정을 들었을 때 확신했다.

“원한다면 너희를 전부 죽게 만들거나, 아니면 뇌옥 안에 가두어 평생을 썩게 할 수 있지.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제안을 하마.”

“제안?”

“그래. 내 수하가 되어라.”

“결국은 전처럼 우리를 도구로 쓰겠다는 거군!”

가무량이 곧장 반발하자 주서천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잘 들어 봐. 그 대신 자유를 줄 거니까.”

“자유?”

탈주령들이 그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

그들은 평생을 유령곡 내에서 지냈다.

바깥에 나갔던 기억이라곤 예닐곱 살 때가 전부였다.

“유령처럼 마음을 죽일 필요도 없고, 몇 가지 비밀만 지켜 준다면 중원이건 새외건 어디든 가도 좋다.

종종 필요할 때 임무를 내리겠지만, 거부할 수도 있고 승낙한다면 그에 알맞은 보상도 주지. 어때?”

상왕 덕에 돈은 마를 틈이 없는 데다가 유령곡주가 되었으니 그 재산도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

이번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대신 새로운 주인이 될 자를 똑바로 마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정말인가?’

가무량이 주서천을 믿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어릴 적부터 유령곡에서 길러졌지만 모든 걸 빼앗겼고, 지옥에 떨어져 온갖 고생을 했다.

겨우겨우 도망친 뒤로도 같았다.

정말로 유령인지 귀신같이 눈치채고 추격해 오는 그들과 싸워 왔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화산파의 제자 겸 유령곡주를 자칭하는 작자가 나타나 자유를 대가로 제안해 왔다.

보통 일도 아니고 그들의 인생을 전부 뒤바꿀 만한 일이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서 순식간에 벌어졌다.

‘하지만 저자에게 우리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확실하다.’

혼자도 아니고 동료들 전부가 그 말에 따랐다 .

‘……’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역시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가무량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못했고, 무슨 사술인가 싶어서 운기도 해 봤지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나 의견을 교환할 필요가 있다면 눈치 보지 않고 하도록 해. 원한다면 자리를 비워 줄게.”

“……만약, 제안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나?”

“죽이지는 않겠지만 방해하면 곤란하니 금제를 가한 채로 이곳에 내버려 두겠지. 유령들에게도 역시 위해를 가할 수 없다. 그들의 힘이 나에게 필요하니까.”

말이 제안이지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제안이고 뭐고 간에 정말로 명령에만 복종하는 도구로 쓸 수도 있었다.

입이야 다물게 하면 그만이고 불온한 움직임 역시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

아니, 시도는 하지 않았으나 어쩌면 사고방식조차 세뇌하는 것처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유령도 있기에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잘 생각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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