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신행백변(神行百變) (81/254)

第八章신행백변(神行百變)

“사부님, 괜찮으시다면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서천이가 이 못난 스승을 부끄럽게 하는구나. 이미 네가 나보다 고수인데 무얼 가르치겠느냐.”

유정목이 쓴웃음을 흘렸다.

“무엇보다 화산 제일의 고수인 장문인께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장문인께서 화산제일고수라면 저에게 사부님은 천하제일고수입니다. 장문인의 가르침 탓에 사부님께 가르침을 못 받는 것이라면 당장 더이상 검을 배우지 않겠다고 말하고 오겠습니다.”

“녀석. 강호에 다녀온 이후로 아첨이라도 배워 온 건지…… 능숙하구나, 능숙해.”

말은 그렇게 해도 제자의 말에 웃는 스승이었다.

유정목이 밖으로 먼저 나갔고, 주서천이 그 뒤를 따랐다.

도착한 곳은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자, 이번에는 함께해 보자. 어떤 게 조건인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내공을 쓰지 않고 암벽을 오른다.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어릴 적 그렇게 고생했던 수련이었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오르는 속도 또한 몰라보도록 빨라졌다.

무엇보다 이제는 혼자 오르는 게 아니었다.

제자는 스승과 암벽을 등반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저 위에서 널 내려다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성장하다니…… 정말로 장하다.”

유정목이 감격에 겨운 듯 눈을 글썽였다.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 없었다.

마치 걷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암벽을 등반했다.

“이게 다 사부님 덕입니다.”

스승을 따르되, 거리를 두었다.

혹시 그림자라도 밟으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스스슥!

흡사 향랑자(香娘子 :바퀴벌레)를 연상시키는 움직임!

유정목 성격상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지만, 주서천 입장에선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강호 초출이나 다를 것 없을 텐데, 일 년도 되지 않아 천하백대고수에게서 승리하고, 독봉이라는 최고의 후기지수와 동행하다니, 이룬 것이 정말 많구나.”

“그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젊었을 적 …… 아니, 아마 그 누구도 네 나이에 그런 경험을 해본 사람은 없을 거야. 장담하마.”

“사부님 …… !”

그 누가 칭찬해 주는 것보다 감격스러웠다.

무심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손으로 가렸다.

한 손만으로도 오를 수 있는 암반 등반!

‘그래. 이런 행복을 위해서야.’

어릴 적에 수령신과를 구해 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암천회를 방해하려 전쟁에 나가 온갖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그 노력은 결코 무의미한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의 평화를 위해서 힘써 왔다.

비록 바보같이 느낄지 몰라도, 소중하고 존경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행복했다.

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시간과 행복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미웠다.

차갑게 식은 몸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쏟아 냈었다.

기억이 교차하면서 그때의 감정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감정과 기억도 지금 이 순간엔 의미가 없었다.

보다 더 큰 행복함과 따스함이 몸을 감싸 안고 나쁜 기억을 쓰다듬어 준다.

“이제 다 왔구나.”

“아, 벌써……”

“서천아. 괜찮다면 위에 먼저 올라가서 날 잡아 주지 않으련? 이 스승이 늙어서 좀 힘들어서 말이야.”

“예!”

대답하자마자 정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등반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지면을 달리는 듯했다.

유정목은 제자가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위를 오르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흘렸다.

“사부님.”

제자가 손을 내민다.

스승은 그 손을 붙잡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렇게 작았던 아이가……’

쓰다듬어 주려고 하면 겁먹은 듯 움츠리던 아이.

버려질까 봐 눈치 보며 열심히 하던 아이.

힘들고 괴로울 텐데도 군말하지 않던 아이.

상대가 걱정할까 봐 괜찮다면서 웃어 주던 아이.

손바닥만 했던 그 손도 이제는 어른이 됐다.

“그래.”

굳은살로 가득한 그 손을 붙잡으면서 위에 올랐다.

그러자 그곳에는 어느덧 홀찍 커버린 청년이 활짝 웃고 있었다.

“이곳은 여전하군요.”

등을 돌리니 봉우리 너머로 여명이 찾아왔다.

황혼이건 여명이건, 그 특유의 빛이 화산의 정기와 어울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을 만들어 낸다.

“그래.”

동문도 사형도 사제도 제자를 칭찬해 줬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안 본 사이에 바뀌었다고.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외모나 무공만 보자면 누가 봐도 바뀐 것이 많았다.

종종 딴 사람이 아니냐는 농도 있었다.

문파 내에선 워낙 행동이 없다 보니 협의가 넘칠 줄 몰랐다는 의견을 정말 많이 들었다.

“정말로……”

하지만, 스승의 눈에 비친 제자는 여전하다.

성장했을지는 몰라도 바뀌지는 않았다.

겁먹고 눈치 보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상냥한 제자.

“여전하구나.”

그게 유정목의 제자 주서천이다.

* * *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러간다.

느긋하게 흐르던 물살은 점차 빨라지면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설중매가 지고 조매(早梅)가 피면서 매견월(梅見月)이 찾아온다.

그리고 봄이 지나면서 초여름이 됐다.

“괴물이 따로 없구나.”

우일문이 질린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가르쳐 주기 시작한 지 반년이 흘렀다.

그런데 몇 번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금세 능숙하게 사용했다.

천재를 넘어서 재앙을 보는 듯했다.

실은 원래 알고 있는 걸 못하는 척 뻔뻔하게 거짓을 연기했을 뿐이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그러니 이렇게 오해할 수밖에.

“후우……”

그간 반년 동안은 되도록 수련에 힘썼다.

상천십좌가 가르쳐 주는 만큼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검 외에도 화산의 무공을 배우는데 힘썼는데, 그중에는 이제 삼성을 달성한 신행백변(神行百變)도 있었다.

참고로 신행백변은 매화검장 위지결이 가르쳐 줬다.

장문인이란 자리가 여유가 없는 것도 있었지만, 검을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제자도 아닌데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려면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 자제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위지결이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은 아니다.

매화검장은 화산파 안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

강호 바깥에서는 천하백대고수에 들어간다.

괜히 매화검수들의 수장이 아니었다.

엄한 것과 더불어 말수가 없어 대화라는 게 성립하지 않는 것만 빼면 정말로 괜찮은 스승이었다.

‘후. 역시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건 차이가 심해.’

보법 겸 신법(身法)으로 화산파 무공 중에서도 상승에 속하는 신행백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다만 알고만 있을 뿐, 연공해 보지는 못했다.

어려움으로 보면 이십사수매화검법 수준이어서 쉽사리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혼자서 어떻게 해 보려고 도전해본 적이 있었지만 실패를 맛보면서 본인의 재능에 대해 깨닫게 됐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이야 축소판인 십사수매화검법이 존재했고, 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 비교적 쉬웠다.

그러나 신행백변은 이러한 것도 없는 데다가 전생에서도 몇 차례 도전 끝에 포기했던 무공이었다.

그 와중에 위지결의 가르침이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검은 몰라도 보법에 대한 재능은 평범하군.”

위지결이 가르치다가 한마디 했다.

주서천의 업적을 보고 비교하면 나올 만한 소감이었다.

“그렇지만 걱정할 건 없다. 앞으로 신법과 보법을 위주로 수련하면 그만이니까.”

“얼마 정도 걸립니까?”

“얼마나 열심히 하냐에 따라 다르겠지. 매화검수들에게도 말해 둘 테니 도움을 받아 수련하도록.”

‘내가 매화검수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매화검장, 위지결 장로는 수련이나 임무 외의 것에는 무관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도 타인에 완전히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 그 예외적인 경우가 바로 매화검수와 관련될 때였다.

매화검수거나 혹은 연화각 시절부터 재능을 보여 후보 검수로 지정될 경우 신경 써서 가르침을 줬다.

‘내가 실은 매화검수에 관심 없고, 이제 곧 강호에 나간다는 걸 알면 분명 반대하겠지?’

보통 후보 검수의 강호 출두는 일 년. 길어 봤자 이 년이다.

부족한 기간도 공을 세울 거리가 없을 경우라서 주서천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경우였다.

매화검장의 입김이 보통 약한 것이 아니니 이렇게 얌전하게 묻어가다가 강호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바깥도 슬슬 정리되지 않았습니까.”

“흠.”

반년 전 , 영진이 말한 대로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위험이라는 이유로 수선행이 일시 중단됐다.

그리고 칠검전쟁으로 혼란했던 상황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럭저럭 정리가 됐다.

“설마하니 무공이 부족하다 하는 건 아니겠지요?”

우일문이 그럴 리가 있겠냐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반년 전, 그가 돌아왔을 때 이미 그 걱정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천하백대고수에 능히 들어가고도 남는 화경의 고수가 강호가 위험하여 나가지 못한다면 화산파의 제자들은 모두 불러들여야 한다.

“정말로 매화검수에는 관심이 없는 게냐?”

“예.”

검을 가르치는 동안 몇 차례나 제안해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다.

예상한 대답에 한숨만 나왔다.

“위 장로가 눈을 번뜩이면서 왜 그랬냐면서 따질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위가 아파 오는구나.”

“어릴 적부터 관심 없다는 걸 나름 피력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까맣게 잊으신 것 같더군요.”

“끄응.”

“그러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 강호에 나간다.

하산은 되도록 조용히 하는 걸로 정했다.

괜히 눈에 띄어 위지결의 눈에라도 밟히면 성가시다.

아직 여명이 찾아오기도 전 인시(寅時 : 오전 3시 ~ 5시) 초 무렵.

주서천은 유정목에게 구배지례를 올렸다.

“이런 야심한 시각에 인사드리는 불초 제자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다. 내 아직 노년의 나이는 되지 않았으나,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잠이 줄어든단다.”

유정목이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조언이라도 해 주고 싶지만, 초행도 아니고 네가 워낙 나보다 잘하니 뭐라 할 말이 없구나.”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어찌 제자가 스승보다 잘하겠습니까. 그저 운이 따라 주었을 뿐입니다.”

“제자란 원래 스승을 넘으라고 있는 게다. 내 스승께서도 항상 말씀하셨지.”

“사조님…… 말입니까?”

주서천이 의아한 듯 묻는다.

사조에 대해선 금시초문인지라 호기심이 동했다.

유정목이 그리움이 묻어나는 눈으로 웃었다.

“널 거두기도 전에 무림의 불화에 휩쓸려 세상을 떠나셨단다.”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주서천이 조부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네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느긋하게 들려주마.”

따스한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있지 않느냐.”

“예?”

주서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유정목이 그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제자의 시선도 스승을 따랐다.

“으흠……”

사제 간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낙소월은 시선이 모이자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사매……?”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사형.”

“배웅하러 와 준 거구나. 고마워.”

전에도 인사해 주었으니, 이번에도 그런 것이리라.

사매의 배려에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틀려요. 약속을 이행하러 왔어요.”

낙소월이 눈을 똑바로 마주치면서 생긋 웃었다.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아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고 할 때, 유정목이 등을 토닥여 주면서 재촉했다.

“자, 나도 슬슬 누우러 갈 데니 얼른 가 보거라. 그래도 혼자 나가지 않으니 참으로 좋구나.”

“혼자 나가지 않는다니 설마……”

“허가가 나왔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낙소월이 날아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주서천을 끌어내곤,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헉, 이게 그 소문으로만 듣던 소수마공(素手魔攻)인가? 팔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혼까지……”

“부탁이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주실래요?”

뾰족하게 세워진 목소리가 점차 멀어져 간다.

유정목은 그 뒷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이 중얼거렸다.

“인사는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까?”

“……됐다.”

근처의 매화나무 뒤편에서 심옥련이 답했다.

고개는 여전하지만 그 시선은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괜찮다면 ……”

“어제 했으니 됐다.”

그 말을 끝으로 기척이 사라졌다.

유정목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윽고 평소처럼 따스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 할 일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반야신공의 전달.

이의채에게서 회수하여 소림사로 전달하면 된다.

무림맹주가 신뢰하는 사람을 따로 보내는 방법도 있지만, 암천회 첩자라는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차라리 직접 맡는 편이 좋았다.

전에 무림맹주가 맞선 보라는 서신 중에 덧붙여 있던 내용이었다.

“사형.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유령곡(幽靈谷).”

그러나 우선 순위는 다른 쪽이었다.

“유령곡? 자객방인 그 유령곡이요?”

낙소월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되물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도 입을 닫는다는 유령곡!

오직 자객들로만 이루어진 단체로서 한번 맡은 의뢰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걸로도 유명하다.

다만 그 실체를 본 목격자가 전무했으며 괜한 호기심을 갖고 조사한 이들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단체임에도 유령곡은 이백여 년 동안 뒤가 구린 자들에게 오랫동안 애용됐다.

의뢰 금액이 터무니없이 비쌌지만 그만큼 확실한 의뢰 달성을 보여 줬다.

무엇보다 의뢰에 대한 내용을 단 한 번도 발설하지 않은 보안성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래.”

“도대체 무슨 일로요? 아니, 그보다 사형은 유령곡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신 건가요?”

“응.”

주서천은 사매의 물음에 답해 주면서 다른 생각을 했다.

‘유령신공……’

그 유령곡의 독문 신공이 바로 칠 년 전 강호 초출 때 비고를 탐사해서 얻은 유령신공이었다.

‘중도만공도 중요했지만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

삼안신투의 비고에서 다른 것을 제쳐 두고 하나를 꼽으라고 묻는다면 당연 유령신공이라 할 수 있다.

“유령신공을 얻는 자, 유령곡을 지배하리라.”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 아니다.

미래에 암천회주가 남긴 말이었다.

정사도 아니고 마도이세도 아니며 심지어 관부의 편도 아닌 유령곡은 오랫동안 의뢰로만 움직였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가 시작되고 후에 암천회주의 수족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일반 자객이 그림자처럼 움직인다면 , 유령곡의 자객들은 그림자조차 없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에도 없지. 암살로는 천하제일인 자들을 수하로 두고 있으니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다.’

중도만공이 안 그래도 괴물이었던 암천회주를 자연재해로 만들어 줬다면, 유령곡은 암천회 자체를 재해로 만들어 주는 데 한몫했다.

유령곡에게 당한 무림 주요 인사만해도 세 자릿수를 간단히 넘으며, 그중에는 천군사도 있었다.

또한 그들의 정보력 또한 개방이나 하오문에 결코 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유령곡 전체가 암천회의 수하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참고로 위치는 미래에 있을 전란 탓에 노출됐다.

“잠깐, 사형. 제 말 듣고 계신 건가요?”

낙소월이 살짝 삐친 듯 볼을 부풀렸다.

‘자주 삐치게 해야겠군.’

볼을 부풀린 사매가 귀여워서 헛생각을 했다.

“알았어. 천천히 이야기해 줄 테니까 조금 진정해 봐.”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동행인이 괜한 의심하지 않고 납득하기 위한 변명을 준비했다.

누군가 듣지 못하도록 주로 노숙할 때나 산속을 거닐 때 각색해서 이야기해 줬다.

“작년에 내가 사천당가에 방문한 건 알고 있지?”

“네 똘추라는 별호를 얻었잖아요.”

“봉추다…… 그보다 조금 화난 것 같지 않아?”

“어쨌거나, 그래서요?”

“그 이후에 독혈곡을 찾아갔어.”

“독혈곡이라니 미쳤…… 아, 천독지체.”

낙소월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금세 되돌아왔다.

“그곳에서 어쩌다가 유령곡의 절기를 얻었는데 그걸 전달해서 조력을 얻어 볼 생각이란다.”

“잠깐, 유령곡의 절기를 얻었다고요?”

“잘 들어, 사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좀 진지하니까.”

이제부터 진실로 보이는 거짓말을 해야했다.

이걸 하려고 연습도 했고, 머릿속으로 되뇌기도 했다.

여태껏 이런 종류의 거짓말을 제법 하다 보니 상당히 내공이 쌓였다.

혀에 기름칠이라도 했는지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어쩌다 보니 강호를 위협하는 비밀스럽고 위험한 단체를 만났는데, 그들이 실은 강호 정복을 꾀하고 있었고 그걸 듣게 되어 저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시라고요?”

“그래. 그 계획 중 하나가 유령곡의 절기로 유령들을 지배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선수를 치려는 거고.”

“……사형.”

“응.”

“솔직히, 믿기 힘드네요.”

낙소월의 얼굴은 진지했다.

주서천의 이야기에 조소를 흘리지도 않았고, 황당하다는 얼굴도 아니었다.

과연 그 사조와 사손이랄까.

낙소월의 얼굴에서 어렴풋이 심옥련의 진지함이 묻어났다.

“갑자기 그런 음모론 같은 걸 말하셔도 제가 ‘사형의 말이니까 믿을게요.’ 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알고 있어.”

“문파의 어르신들도 이걸 알고 계신가요?”

“아니, 말한 건 네가 처음이야.”

“속는 셈치고 묻는 거지만, 그게 진실이라면 왜 상담하시지 않은 건가요? 이건 사대제자가 어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화산파는 물론이고 정파와 사파, 심지어 마도이세에도 그들의 끄나풀이 상당히 깊숙하게 숨어져 있으니까.

상담한다고 해도 다들 날 바보 취급을 할 게 뻔하고, 그게 조금이라도 흘러 나간다면 내 목숨이 위험해.”

주서천 역시 낙소월처럼 진지하게 답변했다.

장난이라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면서 이야기했다.

“……”

대화가 끝나자 낙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상한 이야기를 한 사형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 말은 물론이고 어떠한 감정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어색할 정도의 침묵은 일각 정도 이어졌고, 최초로 그 침묵을 깬 것은 낙소월이었다.

“그렇다면, 저도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겠네요?”

“그렇지.”

“……하아.”

낙소월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곧장 눈을 치켜뜨면서 수상한 사형을 쳐다봤다.

“그리고 화산파의 제자가 자객방의 절기를 얻다니요. 그거 중죄인 거 몰라요?”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있으니까. 무림을 구하기 위한 일이니 이해해 줄 거야.”

낙소월이 말없이 눈썹만 구부렸다.

“믿어?”

“반만요.”

“생각보다 많은데?”

“사형이니까 반이나 믿어주는 거예요.”

여전히 머리로는 헛소리로 치부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애초에 유령곡의 절기가 독혈곡에 있는 것부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사매.”

“네?”

“독혈곡에 가봤어?”

“아뇨, 가 보지는 못했지만……”

“안 가봤으면 말을 말아!”

이쯤 되면 만능이다.

* * *

첩첩이 둘러싸인 산과 가파른 암벽들은 장엄한 경관을 만들어 내면서도 험난하여 출입을 저지했다.

거세게 움직이면서 우렁차게 울음을 토해 내는 물줄기는 계곡 곳곳에 흐르면서 바위를 깎았다.

또한 안개는 어찌나 많이 끼었는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발길은커녕 동물조차 찾아갈 수 없는 곳.

“유령곡……”

화산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눈 앞의 경치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사형, 이건……”

낙소월은 장관에 감탄하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진법이군.”

주서천이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전생에 열람한 정보나 서적에 유령곡의 위치 등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 그 기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진법의 유무였다.

진법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왜 그런 것인지는 대충이나마 유추할 수 있었다.

‘기록할 때 즈음이라면, 유령곡의 진법을 없애 버리고 습격한 이후일 터. 그래서 빠뜨린 건가.’

무엇보다 기문진법에 관심 가질 만한 이들은 제갈세가.

그리고 기록해서 열람할 이들도 제갈세가다.

편의상 진법의 기록은 제갈세가에게만 맡겼으리라.

‘이런, 승계를 데려올 걸 그랬나.’

기문진법에 대해서 아예 모르는 건 아니지만 기본 정도다.

눈 앞에 있는 건 한눈에 봐도 복잡했다.

“사형, 여기 봐요.”

낙소월의 목소리가 주서천의 고민을 깨뜨렸다.

다가가서 확인해 보니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산 자가 이 앞을 건너려 한다면 화를 피하지 못하리라.

“산 자가 아니라면…… 유령을 말하는 거죠?”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냥 출입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앞이 유령곡인 것을 아는 두 사람 입장에선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승계를 데려오기에는 너무 늦어.’

산동의 금의상단까지는 거리가 제법 있는 데다가 온갖 고생까지 하면서 왔다.

여기서 발걸음을 되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어쩌면……’

눈을 느릿하게 감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유령이 된다면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는 유령신공의 구결이 있다.

중도만공도 있으니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합천회주가 유령신공을 사용했다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게 크나큰 문제야.’

타 문파의 무공, 그것도 신공을 허가 없이 멋대로 배운다면 문제가 된다.

유령곡이 일반적인 문파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무림의 상식이 통용될 확률이 높았다.

괜히 유령신공을 수련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화산파의 보법이 유령보를 대신할 수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척을 지게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정말로 원하는 건 신공이 아닌 유령곡이니까.

그래서 일부러 배우지 않고 기억만 해뒀다.

‘역시 돌아갈까?’

사안이 사안인지라 손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아니,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야. 이 근처까지 왔으니 유령들이 눈치챘을지도 몰라. 승계를 데리고 온다 해도 여기에 그들이 있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만약 그러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또 다른 유령곡을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할 수 없고, 유령들에게 척살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최악을 꼽자면 단연 후자의 경우였다.

“좋아.”

고민은 끝났다.

“일단 돌아가자. 할 일이 생각났어.”

‘유령선공.’

여명이 찾아올 무렵, 수련을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구결을 외면서 운기했다.

‘역시나 귀식대법이 포함된 심법부터군.’

자객이란 무릇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귀식대법은 이에 대한 기초 중의 기초이며, 거의 하루 동안 숨을 멈추어도 생존할 수 있게 해 줬다.

특히나 유령신공의 귀식대법은 맥박까지 거의 뛰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유령의 비밀 중 하나였다.

숨도 쉬지 않고 맥박도 뛰지 않는다면 그건 산 자가 아니니까.

‘시간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니 몇 가지는 제외한다. 출입만 하는 거라면 심법과 보법만 익히자.’

유령신공을 구성하는 건 여러 가지다.

근간이 되는 심법부터 시작해 보법이나 암기술 등이 있었다.

어차피 출입만 할 생각이니 이 두 가지면 충분했다.

‘그중에서도 보법을 제일 중요시해야 한다. 유령만이 밟을 수 있는 활로가 있을 게 분명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