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화산휴게(華山休想)
섬서, 화산파.
칼날처럼 예리한 바람이 분다.
얼마 전까지 주록주룩 내리던 비가 눈이 됐다.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눈이 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그리운 땅을 밟자, 매화나무가 먼저 반겼다.
나뭇가지를 따라서 보니 설중매(雪中梅)가 피었다.
계절이 시작할 무렵에 나가, 끝날 무렵에 되돌아왔다.
“사형!”
머리를 들어 보니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서악의 화산의 경치조차도 화산제일미 앞에선 수그러들었다.
‘윽, 눈부실 정도로 예쁘다.’
당혜도 당혜지만 역시 낙소월이었다.
그동안 안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에 비하면 내 얼굴은 영 아니군.’
나름 준수한 편이지만 정작 장본인은 그리 생각 안 한다.
제갈 형제처럼 미남이 있어 비교된 탓이었다.
‘괜찮아. 나에겐 무공과 인맥이 있다.’
괜히 능력을 세우며 자위하는 주서천이었다.
“오랜만이다.”
“약속, 지키지 못했네요. 후후.”
낙소월이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웃었다.
“아.”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오면 낙소월도 수선행을 떠난다.
내년에 곧장 사형을 찾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 전에 주서천이 되돌아왔다.
‘사람 일 참 모르는 거지.’
원래의 역사에 따르면 낙소월은 칠검전쟁 이후 정사대전이 벌어져 수선행에 나가지 못한다.
떠날 당시에 낙소월에게 그런 일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면서 유감을 표했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
“미안해.”
“……? 뭐가요?”
“아니, 왠지 모르게 약속을 못 지킨 것 같아서?”
“후후. 뭐에요, 그게.”
주서천의 뜬구름 잡는 소리에 낙소월이 웃었다.
화산파에 눌러앉을까 진지하게 고민될 정도의 예쁨이다.
도대체 어떻게 저리 예쁠 수 있나 싶었다.
“혹시 사부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니?”
하나 그 미모도 스승의 안위보단 순위가 낮았다.
“네, 그럼요.”
낙소월은 예상했다는 듯이 웃었다.
문을 여니 언제나의 풍경이 들어왔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이 교차했다.
봄이건 여름이건 언제나 찬 공기였다.
사람 흔적 하나 없고, 침상을 빼곤 먼지가 눈처럼 쌓여 있었다.
화산 밖으로 강호 출두했다가 오면 반겨 주는 건 아무도 없었다.
그저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과거와는 확실히 달랐다.
눈처럼 쌓였던 먼지 대신 깔끔하게 정리된 물품들이 놓였고, 얼음장 같았던 지면은 따스하기만 했다.
“사부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주서천은 그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승에게 하나하나 진심을 담아서 구배지례를 올렸다.
“나야 잘 지냈단다. 그보다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그리 열심히 절을 할 필요는 없다.”
“아닙니다. 일 년 만에 뵙는 사부님의 존안 앞이거늘 어찌하여 대충하겠습니까. 아무리 이 제자가 불초하여도, 그렇게까지 썩지는 않았습니다.”
평소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본다면 두 눈을 의심할 정도의 광경이었다.
실제로 주서천은 유정목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까지 극진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상천십좌이자 무림맹주에게도 이렇게까지 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예의를 차리면 이 못난 스승이 더 불편해지니, 부디 봐주지 않겠느냐.”
유정목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제야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가 살짝 풀어졌다.
“네 활약은 나도 들었단다. 내 그게 자랑스러워 주변에 가슴 좀 펴고 다녔지.”
유정목이 제자를 자랑스럽게 쳐다보며 흡족한 웃음을 보였다.
그 웃음을 보자마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칠검전쟁에서 모습을 숨기지 않고 활약한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됐다.
“화산의 다른 제자들에게도 너의 활약상이 알려지긴 했으나, 그래도 조금 세세하게 듣고 싶구나. 방금 온 너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혹시 들려줄 수 있느냐?”
유정목이 미안한 듯이 조심스레 물었다.
제자에게 이렇게까지 대할 필요는 없을 텐데, 하나하나 신경 써주는 그 상냥함과 배려심이 좋았다.
괜히 울적해서 눈물이 나오려던 주서천은 유정목을 걱정시키고 싶지않아 속으로 삼켰다.
“예, 사부님!”
주서천은 유정목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쓸데없는 부분을 배제하고 요점만 꼽았다.
“천독지체였다고?”
“예, 그렇습니다.”
“곁에 있었는데도 그걸 이제까지 몰랐다니……”
“아무래도 여기에선 중독될 일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독혈곡을 다녀왔다는 대목에선 대단히 걱정했으나, 중독은커녕 상처 하나 없었다 하니 안도했다.
서장에 나가 라마승을 만난 건 말하지 않았는데, 새외까지 나갔다며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 양심이 조금 찔리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니 그래도 덜했다.
폭섬도문이나 묘가검문의 일도 말하지 않았다.
숨겨야 할 만한 것은 숨기고 그 외에는 전부 말했다.
“정말로 대단하고, 그런 네가 장하구나. 고생했다.”
유정목이 주서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닌데도 그 손길은 여전했다.
주서천은 아무런 불만 없이 손길을 받아들였다.
이 따스한 손길을 평생동안 그리워했었기에.
설사 중년의 나이가 된다 할지라도 이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언제나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고작 일 년 사이에 많이도 성장했구나.”
유정목이 환골탈태 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신기해했다.
“성장기입니다, 사부님.”
주서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 * *
강호에서는 주서천을 초절정 고수로 알고 있다.
그러나 몇몇은 그의 진정한 무위를 눈치했다.
무곡이 그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남궁위무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화산의 장문인, 검선이었다.
“허어……”
우일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슨 일이오, 장문인?”
화산오장로, 지검옹 학송이 의아한 듯 물었다.
“강호에서 들은 것과 이놈이 해 준 이야기에 뭔가 차이라도 있는 거요?”
단약사, 영 진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외에도 철혈매검 심옥련, 명수악 조무양, 매화검장 위지결 등 장로 모두 다 의아한 시선이었다.
칠검전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대 관심사였다.
당연히 화산파도 주시하고 있었다.
세간의 소문 외에도 따로 조사해 전황에 대해 실시간으로 들었다.
하지만 제일 신뢰할 수 있는 정보처가 있어 그 이상의 정보를 세세하게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수선행에 나가 있던 주서천을 불러들여 물었다.
화산파도 처음에는 그의 활약을 들었을 때 몹시 놀랐다.
“아니, 그 아이가 그리 강했던 말인가?”
천하백대고수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괜히 시선이 바뀌고, 별호가 새로 붙은 게 아니다.
특히나 산화일장은 사도천주가 신뢰하는 고수였다.
물론 지쳐 있었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충분히 대단하다.
“매화검수로 삼아야 합니다.”
수련이나 임무 외에 관심 없던 위지결조차 주서천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화산으로 부른 것에는 매화검수로 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주서천은 이미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강호에 나가 사고를 내지도 않았고, 반대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았는가.
무공, 성품 등 전부 문제없다.
“십사수매화검법을 대성했다더군.”
“어떻게 일 년 동안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나.”
“그렇게 성장하는 건 불가능해. 어쩌면 그동안 감췄거나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건가.”
이대제자나 삼대제자들이 입을 모아 극찬했다.
강호 특유의 과장되는 소문을 감안하더라도 그 재능이나 무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요한 건 아직 약관도 되지 않았다는 것.
중년이 되면 능히 상천십좌에 오를지도 모른다.
“아니오. 아직 어린데도 무공이 고강해 내 감탄했을 뿐이외다.”
“아아.”
그러자 장로들이 수긍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궁회의는 일단 주서천을 돌려보내고 계속됐다.
보고를 받았으니 전황에 대해서 논의를 할 차례였다.
며칠 뒤, 회의가 끝나고 다시 부름을 받았다.
이번에도 상궁으로 향했다.
다만 얼마 전에 보고했을 때와 달리 장로들은 없었고, 장문인만 홀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내 널 추궁하려고 부른 것은 아니니, 그렇게 굳어 있을 필요는 없단다.”
우일문은 주서천이 긴장하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아이였을 적부터 범상치는 않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살면서 무림 최고의 기재나 천재를 보았지만, 너 같은 아이는 처음이다.”
놀라움 반, 신기하다는 시선 반이었다.
“약관도 되지 않아 화경에 오르다니, 얼마 전에 널 보았을 때는 입이 떡 벌어져 닫히지가 않더구나.”
‘휴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경지를 눈치챌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말로 걱정했던 건 자하신공을 안 건 아닐까 해서다.
하지만 자하신공의 은신이라고 해야 할까, 각성 전 드러나지 않는 능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다.
자하신공을 연공한 장문인의 눈조차 가려 줬다.
“화경에는 언제 오른 게냐?”
“반년 전, 수선행을 하던 도중 운이 좋아 깨달음을 얻어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천운이로구나. 그런 운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한데……”
영약을 복용하고 대충 감을 재다가 올랐다.
“어떠한 도를 깨달았느냐?”
주서천이 흠칫 떨다가 고민했다.
‘영약 먹고 그냥 올랐는데.’
입이 찢어져도 솔직히 답할 수가 없으니,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대충 그럴싸하게 답했다.
“삶과 죽음에서 그리움을 느꼈고, 전부 놓칠 때 떨어지는 매화 사이에서 검을 보았습니다.”
“그래 화산에는 매화가 있고, 검이 있지. 어떤 상황에서든 검과 매화, 이 둘만큼은 잊지 말거라.”
우일문이 흡족하게 웃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주서천은 그 말을 머릿속에 담아뒀다.
상천십좌의 가르침은 천금을 주고도 얻지 못한다.
“합비에 다녀왔으니 무림맹주님께서도 눈치채셨겠군.”
“그렇습니다.”
“널 데려가겠다고 이상한 말은 안하셨고?”
“손녀를 소개해준다는 등 온갖 말을 들었습니다. 주서천 말고 남궁서천은 어떠냐고 물으시더군요.”
“허허허!”
우일문이 예상했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어림도 없는 소리. 화산의 장문인이 될 자가 어찌 혼례를 올릴 수 있겠는가?”
“예?”
주서천이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제 사부님은 한 분 뿐입니다.”
“장문인이란 자리가 꼭 장문인의 적전제자만 되는 건 아니다.”
주서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흔하지 않긴 하지만 선례가 있긴 했다.
“정말로 가끔씩 너처럼 천재성을 뒤늦게 발휘하는 아이가 있지. 만약 장문인 후보로 인정될 정도면 스승이 있음에도 예외로 자하신공을 전수받는 단다.”
이 후보로 인정될 경우, 차기 장문인으로 확정된다.
그러면 자하신공의 ‘장문인 혹은 차기 장문인’이라는 조건도 채우게 되니 문제 될 건 없었다.
‘장문인께서 절 그리 높이 평가해주시는 건 감사하오나,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조금 정도는 고민할 수 있지 않느냐?”
“솔직히 말하자면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제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장문인. 그것도 구파일방의 화산파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꿈꿔 본 자리다.
그러나 당연하다시피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건 극소수이고, 자신은 그곳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나 같은 건 장문인이 될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남들보다 우수해 보이는 건 두 번째 삶이라는 반칙이 있어서 그렇지, 그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전생에서 화산오장로에 오른 것도 인재가 없어 어부지리로 오른 것이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회귀한 이후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몇 번이나 되새겼다.
결코 잘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했다.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시작했다고 해도, 그곳에서 자만했다간 곧장 뒤쳐지고 쓰러진다.
이 사실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무엇보다 힘들다고!’
책임이라는 그 중압감.
그리고 자유가 한정되는 게 싫었다.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살고 싶었다.
“그리고 저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끙! 꿈이 없는 건지, 아니면 욕심이 적은 건지……”
우일문이 아쉬운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길에 미련이 남았으나 주서천이 워낙 확고해 포기했다.
“따라오거라. 그래도 화산의 흥복이 나왔으니 , 가만둘 수 있겠느냐. 기분이 좋으니 검을 알려 주마.”
“오기 전에 맹주님에게도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봐주십시오.”
“이십사수를 가르쳐 주는 것뿐이니 걱정 말거라. 십사수만으로 용케 화경까지 갔구나.”
실은 전부 대성했지만 비밀로 했다.
‘좋았어!’
이제 합법(?)적으로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펼칠 수 있다.
대충 연기하면서 배울 생각이었다.
* * *
이후 우일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가르쳐 줬다.
처음에 연기만 하려던 주서천도 우일문이 진지하게 가르쳐 주자, 하나하나 참조하며 받아들였다.
아무리 검법을 전부 대성했다고 해도, 상천십좌가 가르치는 검에는 차이가 있는 법이다.
참고로 가르침을 받는 건 비밀로 하지 않았다.
곧장 소문이 났지만, 공을 세워 사문의 이름을 높여 받는 것이라고 제대로 설명했다.
장문인이 마음에 드는 제자들에게 검을 가르쳐 주는 건 가끔 있었던 일이라 이상한 추측은 없었다.
그리고 약 보름 뒤.
“수선행의 중단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영진이 몸 이곳저곳을 누르면서 답했다.
화산파에 온 이후로 영진이 천독지체 좀 구경해 보자면서 억지로 끌고와 이렇게 진맥을 보곤 했다.
“혈근경을 소각한 네놈에게 원한을 가진 놈들이 한두 놈이 아닐 게다.”
실제로 화산 바깥에서 자기 것을 멋대로 소각했다는 정신 나간 마두들이 제법 있었다.
“그리고 비록 하루 만에 끝나긴 했지만 평화를 깨뜨린 전쟁이 있지 않았느냐. 그게 시발점이 되어 그동안 통제된 것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고 하더구나.”
뭐든지 한 번은 어렵지만, 두 번은 쉬운 법이다.
정도와 사도와 마도, 셋이 유지하던 균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그래. 암천회가 이걸 그대로 내버려 둘 리 없지.’
암천회는 실패했다고 절망하지 않고 바로 그다음의 차선책을 준비한다.
아마 지금쯤 정보원들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서로 싸우도록 불을 붙이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네놈뿐만 아니라 강호에 나가 있는 제자들도 돌아오고 있을 게다. 바깥이 보통 시끄러운 게 아니니까.”
“그럼 향후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직 회의가 전부 끝난 건 아니지만, 아마 반년에서 약 일 년 정도 수련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올 게다. 영원히 안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
“과연.”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답답한 건 둘째 치고 암천회를 상대하려면 아직 할 게 남았다.
반년에서 일 년 정도의 시간이라면 참을 수 있다.
그 이상이 되면 어떻게든 나가겠지만, 그 전까진 화산에 있어도 준비할 수 있는 게 있었다.
그리고 장문인, 검선의 가르침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까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영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강호에 나간 사이에 또 영약을 처먹었지?”
“들켰습니까?”
“내가 네 사부보다 진맥을 더 많이 잡아 봤다. 내공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맥에도 변화가 있는 걸 보니 영약으로 내공만 늘린 게 아니로군.”
“예리하십니다.”
“내 별호가 단약사다. 치사하게 혼자만 먹냐? 이 늙은이 것도 좀 남기고 그래라 좀!”
“운이 좀 좋아서 몇 개 주워 먹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영약이 어디 쉽게 구할 수 있는 겁니까?”
“끙 정론이로군.”
“아, 나도 영약 좀 쉽게 구하고 싶네!”
주서천은 뻔뻔했다.
* * *
매화나무 아래에 대자로 뻗어 눈을 감았다.
지금 만큼은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과거로부터의 기억의 정리도 없었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는 한기가 가득하지만, 한서불침인 덕에 어떠한 추위도 느끼지 않았다.
중천에 뜬 태양 빛이 내리쬐며 포근한 감각을 떠올리게 해 주고 졸음을 끌어와 몸을 감싸 안았다.
끊임없이 들려오던 검을 휘두르는 소리는 물론이고 사람들의 속삭임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순간과 주변의 고요를 느끼면서 휴식을 취했다.
“사형.”
이제 막 낮잠이 들려는 사이에 방해꾼이 나타났다.
오른쪽 눈만 살짝 뜨니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낙소월이 손에 쥔 서신을 머리 위로 떨어뜨린다.
서신이 낙엽처럼 춤을 추며 내려와 시야를 가렸다.
“이 사형에게 불만이라도 있는 거니?”
“요즘 따라 게을러지신 건 아닌가요?”
“내 여태껏 누구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했다고 자부할 수 있단다. 가끔씩 이렇게 쉴 때도 있는 거야.”
하체는 내버려 두고 상체만 일으켜서 손에 아무렇게나 잡히는 서신을 확인해 봤다.
반이 금의상단이었고 반은 무림맹이었다.
‘검마 부녀는 무사히 정착했나.’
무곡이 보낸 서신에 의하면 산동에 도착하자마자 이의채가 성대하게 반겨 준 모양이었다.
성대한 장원은 물론이고 호위 무사, 그 외에도 무선화의 건강을 위해서 소문난 의원도 붙여 줬다.
여러 가지로 전부 최고의 대우를 받았기에 이렇게 신경 써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가 적혀 있었다.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만 해 달라는 말도 덧붙여 있었다.
‘그리고…… 생각대로 관부에서 접근했군.’
병부에서 다발화전에 관심을 보여, 사람까지 보내 완성품 하나를 가져간 모양.
대충 예상은 했다.
북방에서 정기적으로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몽고와의 싸움에서 사용할 모양이었다.
관부가 다발화전으로 무림맹을 공격할 것도 아니니 굳이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제작자인 제갈승계야 반대로 자신이 만든 걸 남이 인정해 주고 필요하다는 것에 환영하는 바였다.
이름만 남겨 준다면 상관없다면서 넘겼다 한다.
또한 그 외에도 일군에서부터 삼군 등 금의검문이 전력을 증강하는 데도 꾸준히 신경 쓰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무림맹에선……’
금의상단 것은 대충 예상이 갔으나 무림맹은 아니었다.
어떤 내용이 있을지 궁금했다.
“내 손녀라서 그런 게 아니고 진짜 괜찮은 아이……”
“이 영감님 진짜 주책이야.”
무림맹이 아니라 무림맹주에게서 왔다.
“뭔데 그렇게 질린 표정이신가요?”
“별건 아니고 맞선. 남궁세가의 친척이란 친척은 전부 소개시켜 줄 생각인가 봐.”
주서천이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
맞선이라는 말에 낙소월이 몸을 움찔 떨었다.
방금 전까지 밝던 얼굴도 조금은 어두워졌다.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렸던 주서천이 낙소월의 반응을 보고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하니 날 빼앗길까 봐 불안한 건가?”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정적.
‘아차!’
겉과 속을 반대로 말했다.
잠시 정적이 이어지다, 낙소월이 뒤늦게 반응했다.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낙소월이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와 귀까지 벌게지면서 말도 더듬었다.
열기가 확 오른 것을 느꼈는지 소맷자락을 이용해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리려는 모습이 귀여웠다.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그런 모습 보이지 마라.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까지 그거 보면 골로 간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 주세요.”
낙소월이 더운지 손부채질을 했다.
얼굴은 여전히 붉었는데, 보여 주고 싶지 않은지 옆으로 돌렸다.
두근두근.
고수와 부딪치기 전엔 잘 움직이지 않던 심장이 흥분한 듯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싫지 않은 감각이다.
격분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도가심법이 반응해 평정심을 유지하려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게 어떤 것인지는 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아 뭐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전에 느꼈을 때의 기억은 너무나 오래됐다.
머릿속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옇다.
몇십 년도 더 된 기억.
그때는 어떻게 끝났을까.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따스함 대신 쓸쓸함만 남았었다.
만약 좋은 방향으로 끝났다면 전생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얼굴을 떠올렸을 테니까.
그것은 정말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라 착각되는 호의였을까.
정확한 답은 잘 모른다.
“사, 사형…… 그렇게 쳐다보시면…… 저는……”
“비무를 하고 싶어지지.”
“그래요. 비무를…… 응?”
주서천과 낙소월이 눈을 껌뻑이다 옆을 돌아봤다.
“꺄아아아악!”
그곳에는 심옥련이 서 있었다.
“난 귀신이 아니다. 주서천.”
심옥련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주서천을 노려봤다.
“사형, 진정하세요. 저희 사조님이에요.”
낙소월이 진정하라는 듯이 등을 쓰다듬어 줬다.
“헉, 죄송합니다. 장로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주서천이 정신 차리면서 얼른 사죄를 올렸다.
“상궁에서는 얼굴만 잠깐 보았으니,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는 건 오랜만인가.”
‘사적인 자리니 널 죽여 버리겠다는 뜻인가?’
주서천이 나름대로 속뜻을 풀이해봤다.
“내 널 잡아먹을 일은 없으니 그리 눈치 볼 것 없다.”
심옥련이 표정 변화 없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오면 무슨 일로……?”
“너도 알다시피 아가가 보통 재능이 아닌 것은 알고 있지 않느냐.”
심옥련이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자랑을 시작했다.
“사, 사조님!”
낙소월이 부끄러운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방금 전에 겨우 가라앉았던 안색이 다시 붉어졌다.
뺨 위로 홍조가 떠오른 게 돋보였다.
“매화검수 후보들과 검을 맞대도 대부분이 백 초를 넘지 못하고 나가 떨어지더구나.”
“사매가 좀 많이 강합니다.”
낙소월은 자신처럼 가짜가 아닌 진짜배기 천재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노력까지 하는 괴물이었다.
“동년배 중에선 아가를 이기기는커녕, 검조차 제대로 맞댈 상대가 없다.”
“하오면 ……”
“네가 화산에 있는 동안 아가를 상대해 주었으면 하는구나.”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저로 괜찮겠습니까?”
“……”
심옥련이 입을 다물었다.
곁에 있던 낙소월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눈은 옹이구멍이 아니야.”
‘화경인 거 못 알아보면 옹이구멍 아닌가?’
반박하려다가 참았다.
“그럼 받아들여 준 것으로 알고 있으마.”
“저만 믿어 주십시오.”
좋으면 좋았지 싫지는 않았다.
‘음, 이렇게 된 거 상대도 좀 하면서 검 좀 가르쳐 줘야겠네.’
화산파에 있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