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第一章정체불명(正體不明) (74/254)

第一章정체불명(正體不明)

스물하고도 두 명. 주서천 일행의 인원수였다.

사천당가는 당혜까지 합해서 열한 명이었고, 그들을 이끄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독봉 당혜였다.

당혜는 산분뿐만 아니라 여기의 사천당가 출신 무인들 중에서도 무공이 제일 강했다.

금의검문은 초련을 포함하여 열 명 겉으로 십인대장은 초련이었으나 사실상 대장은 주서천이었다.

“대장. 보여 줄 것이 있소.”

초련이 턱 끝으로 한쪽을 가리킨다.

방향을 따라가 보니 가로 삼 척 정도 길이의 상자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무엇인가 하고 상자를 열어 확인해 보니, 예상치 못한 물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칠검전쟁에 나간다고 하니 챙겨 주었소.”

초련이 가슴을 펴며 뿌듯하게 웃었다.

“뭔데 그렇게 속닥이고 있는 건지 궁금한걸.”

암기를 점검 중이던 당혜가 묻듯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너희가 쓸 것도 아니고, 육 일 뒤에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거니 걱정 마라.”

주서천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상자를 닫았다.

“훈련은?”

“훈련이라고 할 게 있겠소? 그래도 사용법은 그 아이에게 잘 배워 왔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좋아. 그럼 이걸로 무림을 깜짝 놀라게 할 준비나 해. 그 선봉대는 너희니, 이름을 떨치게 될 거야.”

“오라비와 동생들이 배 아파할 게 뻔히 보이는군.”

오라비와 동생들이란 건 질풍십객을 의미한다.

초련이 피를 나눈 형제자매는 일찍이 죽었다.

“그나저나, 대장은 어찌 됐소? 이 곳에 오자마자 저쪽 아가씨와 함께 사고를 쳤다고 들었소만.”

현재 무림맹 측은 독봉과 봉추의 등장으로 시끌벅적하다.

오룡삼봉의 명성이 있으니 주목받는 건 당연했지만, 다른 후기지수들과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였다.

“독봉이 소태산과 일지검, 그리고 검화에게 한 소리 했다면서?”

“말도 아니라니까. 내 근처에 있었는데 그 세 사람에게 바짓가랑이 젖지 않도록 정신 좀 차리라는군.”

“허, 괜히 독봉이 아니군그래 . 무공 뿐만 아니라 혀에도 독을 품고 있어.”

“원래 한 독설 하는 걸로도 유명하지 않은가. 한데 출신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 좀 예외였네. 난 또 우리같이 하수들에게나 그럴 줄 알았는데 말이야.”

“하하! 속 시원하군! 그놈들 온갖 잘난 체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말이야!”

“사파 놈들이나 마도 놈들이 우리보고 위선자, 위선자라고 하더니, 아니라는 걸 증명하지 않았나!”

대다수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모만 있는 건 아니었다.

비난도 있었다.

“확실히 옳은 행동이지만,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독봉은 말을 좀 더 곱게 사용했어야 했네. 아무리 상대가 잘못했다고 한들, 예법을 무시한 말을 한다면 사파와 다를 게 없지 않나?”

“암. 정파라면 자고로 언제나 행실과 발언에 주의해야 하지. 그걸 지키지 않으면 어찌 낯을 들겠는가.”

“쯧쯧, 역시 독 같은 것이나 쓰는 것들은!”

“당신. 조심하게. 사천당가가 원한을 품게 되면 어찌 되는지 잊었는가?”

정파는 전부터 예절과 도덕을 특히 중시했다.

그 시점에서 보면 독봉의 행동은 수긍할 수 없었다.

“후기지수끼리 친목 좀 도모하자는 게 뭐가 나쁜가. 설마하니 오대세가라고 오악검파를 무시한 건 아니겠지?”

정파 무림은 일찍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그 체계를 이어 왔다.

그러니 당연히 그 외의 문파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대문파 정도는 아니지만, 그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세가 강한 이들이었다.

태산파, 숭산파, 항산파 등 오악검파 등이 대표적이었다.

“나야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으니 괜찮지.”

당혜가 워낙 논란인지라 관심이 전부 그쪽으로 몰렸다.

봉추의 이름은 잠깐 등장했다가 떨어지고 시선은 자연스레 당혜 쪽으로 향했다.

세가의 무사들은 조금 불쾌해 보였으나, 그뿐이었다.

딱히 소리 내서 화를 내지는 않았다.

칠검전쟁까지 육 일.

날이 저물고 모두가 하루를 정리하고 있을 무렵, 당혜가 신경 쓰여 찾아갔다.

“무슨 일?”

어슴푸레한 달빛을 올려다보던 당혜가 묻는다.

그 시선은 여전히 창공을 향하고 있다.

그녀 뒤에 선 주서천은 그 시선을 따라 달을 올려다보다,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입을 열었다.

“소문.”

부가적인 말은 덧붙이지 않는다.

“혹시라도 그게 신경 쓰여 전쟁 당일에 어수룩한 실수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판단이 과한 거야.”

당혜는 똑똑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추측하여, 알아서 이해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

익숙하니까 괜찮아,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그뿐.

* * *

세상을 뒤덮은 어두운 장막이 걷힌다.

동쪽 능선 너머로 해가 조금씩 모습을 보이며 세상을 비춘다.

칠검전쟁까지 닷새.

무인들의 아침은 이른 만큼 새벽부터 다들 무엇인가의 준비로 바쁘다.

주서천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바빴다.

‘일단 간자들부터 찾아 족쳐야 한다.’

이 자리에 모인 칠대 세력 모두 간자와 풍자가 침투해 있다.

그들은 닷새 후부터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전쟁의 양상을 장기화하는 장본인들이다.

그들의 척살을 영순위로 해야 했다.

대낮에 암살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당혜나 초련과 전쟁 당일에 어떻게 싸울지 전략을 짜니 시간을 금방 보낼 수 있었다.

중간중간 당혜의 미색이 궁금하여 구경하러 온 자들이 있었지만,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에 거리를 두고 지켜만 볼 뿐 접근해 오지는 않았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황혼이 지나고 심야가 됐다.

다만 완전히 암흑으로 물든 건 아니다.

전쟁 직전인 만큼 철저한 경비와 불빛이 있었다.

주서천은 도중에 잠자리에서 홀로 일어났다.

그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고수는 없었다.

‘내 살다 살다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

복면으로 눈을 제외하고 가리면서, 밤에 녹아드는 흑의 차림을 했다.

한눈에 봐도 수상했다.

최대한 소리까지 줄여 가면서 몰래 빠져나왔다.

상명진인이 경비를 서지 않는 이상 들킬 리가 없었다.

무림맹 진지에서부터 남으로 사 리 바깥.

아름드리나무 사이에 흑의인들이 모였다.

그들 모두가 무림맹에 침투한 암천회의 간자들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들은 인원이 딱 스무 명이 되자마자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장대한 체구의 흑의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가 만나는 건 이틀 뒤였을 텐데.”

또 다른 흑의인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누가 불렀나?”

밤이 되기 전, 암천회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가 곳곳에 새겨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의미 없는 생채기 같은 것이나, 암천회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였다.

“……”

그 누구도 답하지 않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흑의인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서 당혹스러워했다.

이 장소로 안내한 암호는 틀림없는 암천회의 것.

그것도 여태껏 특급으로 분류되어 있던 기밀이다.

외부나 풍자처럼 돈으로 고용된 협력자가 알리도 없으니,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었다.

누군가가 또다시 물으려는 순간, 수풀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불렀다.”

“누구나!”

스릉!

 흑의인들이 번개처럼 검을 뽑았다.

복면 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째서?”

“한 명 더 있을 리가 없다!”

무림맹에 침투한 간자는 이십 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그 숫자는 변동이 없어야 한다.

암천회의 두뇌, 천기는 그 누구보다 철저한 사람이다.

예외적인 상황을 결코 두지 않는다.

설사 있다 해도 대부분 그에 대비하여 지령을 내린다.

이런 상황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너무 적대하지 마라. 난 사도천에 침투한 간자다. 사정이 있어 너희와 대화를 하러 찾아왔다.”

스물한 번째 흑의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도천에서 왔다고?”

“그래.”

 흑의인들이 서로를 마주 보면서 눈치를 보다가, 주변에 기척이 없다는 걸 느끼고 경계를 약간 풀었다.

그들은 한참을 눈빛만 교환하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사도천에 침투한 간자들은 몇 명이지?”

“……스무 명”

파바밧!

스물한 번째 흑의인이 순식간에 포위당했다.

“뭐하는 짓이지?”

“사도천이나 마교에 침투한 인원은 몇몇 분들을 빼고는 우리도 모른다. 네놈은 대답이 아니라 왜 그러한 질문을 했냐고 물어봤어야 해 ”

“과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정보가 누출되지 않도록 간자들끼리도 소속이 다르면 서로를 모르도록 한 건가.”

흑의인, 주서천이 당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네놈 도대체 정체가 뭐냐.”

“어떻게 본 회의 암호를 알고 있지?”

암천회의 암호는 한둘이 아니다.

간자들끼리 사용하는 암호는 또 따로 구분되어 있다.

괜히 수십 년 동안 정체를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 은밀하게 기밀을 철저히 유지했다.

“야, 너희라면 순순히 답하겠냐?”

주서천이 비웃으면서 검을 뽑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생포해야 한다.”

“팔다리 한두 개는 잘라도 상관없다.”

흑의인들이 거리를 좁혀 가면서 대화했다.

“하여간 암천회 이 새끼들은 틈이 없어요, 틈이. 너희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하냐?”

주변을 슥 둘러보면서 묻자, 여기저기서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전부 경악한 눈초리였다.

“본 회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고?”

“교란 임무는 잊는다. 간자의 일이 아닌, 놈의 생포를 우선으로 해라!”

타앗!

스무 명이 동시에 주서천에게 달려들었다.

전부 처음부터 전력을 쏟아 냈다.

눈앞에 상대가 혼자라고, 그 경지가 어떻건 간에 상관하지 않았다.

자만이나 오만 따위는 없었다.

‘독한 새끼들!’

방심하지 않는다.

자만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섬뜩했고, 얕볼 수 없었다.

괜히 여태껏 조심하던 게 아니었다.

쐐액!

사방팔방으로 검이 바람을 가르면서 날아왔다.

각기 검기가 맺혀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전력이 맞았다.

다만 생포하기 위해서인지 살초는 아니었다.

목이나 심장, 폐 등 치명상으로는 향하고 있지 않다.

주서천은 왼발을 축으로 삼아 힘껏 회전했다.

손에 쥔 검도 원을 그린다.

채채챙!

검이 닿기도 전에 검풍에 휘말려 위로 튕겨 나갔다.

검을 쥐고 있던 주인들도 검과 함께 뒤로 밀려났다.

‘전부 절정?’

주서천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방금 전 반격에 상당한 공력을 실었다.

최소 절정이 아니라면 밀려나는 게 아니라 나가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주서천보다 놀란 건 암천회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앞에 일어난 상황을 도저히 믿지 못했다.

‘이럴 수가!’

온갖 상황에 평정하도록 훈련받았으나, 지금은 그들조차도 눈을 부릅뜬 채 대경했다.

절정에 이른 고수 열둘이 동시에 공격했다.

아무리 살초가 아니더라도 전력을 가했다.

설사 초절정의 고수라도 이와 같은 공격을 전부 막지는 못하는데, 주서천은 방금 전에 가볍게 쳐 냈다.

눈으로 보고도 이성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물러나라!”

누군가가 외치자, 이십 명이 전부 뒤로 물러났다.

“어딜!”

주서천이 어림없다는 듯,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남서 방향에 있던 흑의인이 그걸 보고 황급히 자세를 고치려 했으나, 이미 그의 검이 바람과 함께 이마를 꿰뚫으면서 커다란 구멍을 낸 이후였다.

“뭔……”

갈!

당황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정신차리라는 듯 크게 외쳤다.

도가 무학 특유의 정순한 목소리다.

암천회의 간자들은 그제야 놀라움을 뒤로 미루고 지금 이 상황에 집중했다.

생포하는 데 힘써야 했다.

파바밧!

 흑의인들이 평정을 찾자, 검세가 폭풍처럼 쏟아진다.

어디 한 곳 빈 곳이 없이 거의 죽일 기세다.

채채챙!

이런 폭풍우 같은 검세라면 초절정 고수라도 몇 초 버티지 못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는 화경이다.

주서천은 폭풍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상했다는 듯이 검으로 전부 받아쳤다.

금속끼리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고, 마찰음을 토해 냈다.

구름에 달빛이 가려진 어둠 속에서 검광이 미약하게나마 번쩍번찍 빛나면서 주변을 밝혔다.

암천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을 다했다.

생포라는 목적에 맞춰 사혈만 빼고 공격에 임했다.

하지만 원래 죽이는 것보다 제압하는 것이 더 어려운 법.

하물며 상대가 더 고수임에도 이렇게까지 하니 힘이나 체력의 소비가 상당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몇몇의 호흡이 흐트러졌고, 그 흐트러짐은 곧 틈이 됐다.

비록 그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으나 주서천은 틈을 놓치지 않고 귀신같이 잡아채 파고들었다.

“커헉!”

검이 폐를 찌른다.

숨과 함께 몸이 경직됐다.

휘익!

검이 몸에 박히자, 옆에서 누군가가 이때다, 하고 어깻죽지를 노려 검을 수직으로 힘껏 휘두른다.

주서천은 그걸 보고 검을 빼내지 않고 그대로 우측 상단 방향을 향해 대각선을 그렸다.

이에 검이 뼈를 살과 함께 두부처럼 베면서 흑의인의 검을 쳐 냈다.

“무슨…”

팔을 어깨 째로 베려던 흑의인이 경악했다.

살과 뼈를 베는 건 보다 강한 힘을 줘야 하고, 또 그만큼 마찰이 생기니 속도도 느릿해지기 마련.

그러니 바깥에서 휘두르는 검만큼 빠르지 못해야 한다.

한데 그걸 무시하고 절정의 고수가 전력을 다해 벤 검을 손쉽게 쳐 냈으니 입을 떡 벌릴 만한 일이었다.

주서천은 그대로 왼손을 뻗어 놀란 흑의인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컥!

우드득.

목뼈가 손아귀 힘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공포로 얼룩지려던 눈동자의 빛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손에 쥔 흑의인의 몸이 연체동물처럼 축 늘어졌다.

팟!

그사이에 공격이 들어온다.

검 줄기가 유성의 꼬리처럼 기다란 궤적을 남기면서 주서천의 등을 노렸다.

주서천은 그대로 몸을 획 돌려 손에 쥔 흑의인을 방패 삼아 막았다.

남은 숫자는 열일곱.

아직 많지만 부담은 아니다.

전부 방금 전까지 전력을 냈기에 소진한 내공이 많았다.

복면으로 가려 표정이 보이지 않았으나, 지쳐 있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다.

주서천의 검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방패로 삼고 있던 흑의인을 찌른 흑의인의 목이 뎅겅 잘렸다.

“이제 열여섯.”

순식간에 넷이 당했다.

열여섯 명이 주서천에게 다가가지 않고 포위를 유지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네놈…… 도대체 누구나.”

암천회가 신음을 흘렸다.

“네놈들은 도대체 누구나.”

주서천이 흉내내듯이 중얼거렸다.

그러곤 검을 들어 앞을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네놈들이 수십, 수백 번은 들었을 말이겠지.”

십 년 후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철저히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암천회.

그 전까지 그들과 마주한 이들 모두가 물었다.

이 정도 되는 힘을 숨기고 있던 세력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 물음에, 암천회는 이렇게 답했다.

“알 필요 없다.”

주서천의 몸이 사라졌다.

정말로 사라진 게 아니다.

그 움직임이 워낙 빨라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크아악!”

물음을 던졌던 자가 피를 흩뿌리면서 쓰러졌다.

열다섯 명이 남았다.

‘과연.’

주서천은 이로써 간자들 중에서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아까 전부터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말하거나 대표로 의심되는 자들을 우선적으로 죽였으나 동요가 없었다.

“방식을 바꾼다.”

목소리가 경계심으로 인해 잔뜩 날이 섰다.

“이제부터 살초라도 상관없으니 전력을 다해 공격해라.”

“이대로 두었다간 이겨 내지 못할 테니, 일단 죽이고 난 다음 시체를 조사한다.”

“이해.”

아무래도 서로 간에 서열은 평등한 듯하고, 따로 내려오는 명령을 받아 행동하는 것 같았다.

추측이 끝나기 무섭게 열다섯 명이 일제히 덤벼든다.

전과는 달리 솜털이 쭈뻣 설 정도의 살기였다.

“와라!”

주서천이 이십사수매화검법으로 대응에 나섰다.

일초식인 매화노방부터 시작해 팔초식인 매화혈우까지 물 흐르듯이 이으면서 화려한 검초를 보였다.

그 검에 휘말려 전방에 있던 적 셋이 피를 흩뿌리면서 비명도 없이 절명했다.

“악! 화산의 검! 그것도 이십사수매화검법이구나!”

열다섯에서 열둘이 되자마자 여기저기서 주서천의 검을 알아채는 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전부 정파 소속, 그것도 절정에 이르는 간자들이니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알아보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매화검수!”

유일하게 노출된 눈 부위에 주름이 없으니, 연령대가 젊다는 건 분명하다.

그에 따르면 화산의 이대제자는 아니고 삼대제자.

현역의 매화검수라는 것까지 알아낼 수 였었다.

“그러는 너희야말로 정말 다양하게 있구나?”

주서천의 입가가 깊게 파였다.

복면 안에서 히죽 웃고 있는 것이 간자들의 눈에도 보였을 것이다.

“곤륜의 운룡십삼검(雲龍十三劍).”

몇몇 흑의인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태산의 낙하구구검 (落霞九九劍), 숭산의 구곡검법(九谷劍法), 항산의 일송검법(一松劍法)!”

주서천은 화산의 무공뿐만 아니라 정파와 사파, 심지어 마도이세의 마공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사문과 운으로 살아남았다 할 지라도, 그만큼의 여러 전장을 돌아다녔기에 실제로 본 무공이 상당했다.

“어떻게 매화검수가 혼자서 나올 수 있지?”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을 끌려는 수단 같은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의문이었다.

이십사 명으로 구성된 매화검수는 결코 혼자 행동하지 않는다.

언제나 반드시 이 인 이상으로 행동했다.

“아니, 그것보다 정말로 매화검수인가?”

매화검수는 화산의 정예인 만큼,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당한다.

화산파의 다른 제자라면 모를까, 매화검수가 화산을 나왔다면 암천회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매화검수라……”

주서천이 손에 쥔 검에 힘을 주었다.

“그게 너희가 도달한 결론인가?”

내기가 기맥을 타고 흘러 검으로 향한다.

그 내기는 평소와 같이 푸르스름하지 않았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그들의 얼굴이 모두 긴장으로 굳어졌다.

“정말로?”

쐐애액!

소리가 길게 늘어진 순간, 휘두른 검에서 뿜어져 나온 바람이 파도가 되어 주변을 덮쳤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흑의인들은 회피하지도 못하고 얼른 검을 휘둘러서 막기에만 급급했다.

“허어.”

제일 앞에 선 흑의인이 탄식했다.

복면 탓에 비록 눈 주변만 노출되었으나, 피부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쿨럭!”

흑의인들 중 무려 네 명이나 피를 토하면서 제자리에서 무릎 꿇었다.

그들 안색은 거무튀튀하게 변했고, 그중 한 명은 눈에서부터 검붉은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열다섯 명이 이십사수매화검법으로 열둘이 됐고, 방금 전의 검풍으로 네 명이 줄어 여덟이 됐다.

“독이라고……?”

그저 검풍을 막아내려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검풍이라 생각했던 바람이 알고 보니 독풍(毒風)이었다.

방심과는 다르다.

자만은 더더욱 아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덟을 처리한 검의 고수였다.

독을 쓸 거란 생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순수한 검풍이라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독공의 고수였다면 미리 대비했을 것이다.

이들 중 누구도 독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그야말로 상식에서 완벽히 벗어난, 예상 외의 일이 벌어졌다.

“도대체……”

그들은 몇 번이나 질릴 만한 물음을 던진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독공도 검처럼 단계가 있다.

원래 보통은 누군가에게 몰래 먹이거나, 가루의 형태로 뿌리거나, 무기에 발라서 사용하는 법이다.

더 나아가면 독기를 하나의 내공으로 취급하고, 자유자재로 다뤄 독장(毒掌) 등 무공으로 응용한다.

그리고 일정한 경지. 일류의 최상 정도 오른다면 장풍처럼 외부로 발현해 중독시킬 수 있었다.

또한 그런 경지가 결코 흔한 게 아니거늘, 그걸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연공한 검의 고수가 펼쳤다.

화산파에 그런 인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화산파 역사상 그런 인물은 없다.

어불성설(語不成說).

존재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머리가 안따라갔다.

“그 기분, 누구보다 잘 알지.”

암천회주가 중도만공으로 그 신위를 보였을 때.

그때 무림이 어떤 반응이었는지 잘 기억한다.

아마 눈앞의 흑의인들과 별반 다를 것 없었겠지.

주서천은 피식 웃으면서 검에 기를 주입한다.

전과 다르게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청아한 색이었다.

파츠츳.

실타래처럼 얽힌 기가 한곳에 모인다.

물처럼 일렁이던 것이 점차 견고해지고 형체를 갖췄다.

“내가 누구나고?”

딱딱딱!

턱이 부딪치면서 소리를 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전의(戰意)가 나락으로 떨어진다.

“생포 및 척살을 포기한다.”

쿵쿵쿵.

심장이 성난 황소처럼 날뛰었다.

그걸 제대로 되돌리려고 해도 어째선지 돌아오지 않는다.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배웠던 평정심도 소용없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상식을 달리하는, 절망 그 자체였다.

“당장 여기서 도망쳐서 회에 보고를 올려야 한다.”

꿀꺽.

“누군지 모를, 괴물이 있다고.”

탓!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덟 명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그 속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전력.

“누구나고?”

발에 불이 나도록, 과한 내기의 주입에 용천혈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몸을 날린다.

“나는.”

주서천이 무릎을 굽힌다.

단전에서부터 용솟음친 내공이 기맥을 한 바퀴 돌아 신체에 힘을 줬다.

“화산파의……”

대퇴 근육이 한 차례 수축됐다가 이완됐고, 다시 수축된 순간, 밟고 있던 곳이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주서천이다.”

화경의 고수, 그것도 괴물 같은 내공의 소유자가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는데 그걸 떨쳐 낼 리 없었다.

서걱!

뒤에서 무언가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면 시야가 빙글 돌아가며 목이 베여 쓰러지는 육신을 목격했다.

나머지 일곱 명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방향으로 도망친 것 자체가 한 명을 쫓게 만들어, 그사이에 거리와 시간을 벌리기 위해서다.

“아악!”

한데 눈 깜작할 사이에 따라잡히고, 반격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당하니 의미가 없었다.

“컥!”

반대로 전부 도주에만 집중한 것이 실수였다.

조금이라도 반항했으면 또 모른다.

하지만 뒤도 보지 않고 도망치는 탓에 검강을 어찌 피하지도 못하고 일격에 목숨을 잃었다.

결국 여섯 명은 무림맹 진지로 반도 가지 못한 채 싸늘한 주검이 되어야 했다.

“크허억……”

사신의 검이 드디어 내려갔다.

그 대신 손에는 최후에 말을 한 간자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최후로 남은 간자는 고통으로 얼룩진 눈동자로 주서천을 내려다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나를…… 고문해도…… 나오는 건…… 없……”

우득!

“나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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