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二章칠검전쟁(七劍戰爭)
“그래서, 기사분반은 어디에서 얻은 거야?”
“주웠어.”
“장난칠 마음 없으니 이실직고하도록 해.”
당혜의 눈이 독사처럼 무섭게 빛났다.
‘이러다가 칼침 맞는 거 아닐까?’
독기를 넘어선 살기까지 느껴졌다.
“그거 마음에 들었어?”
주서천이 히죽 웃었다.
당혜는 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하긴, 법보를 보고 눈이 안 뒤집히면 이상하지.”
폭섬도문이 이상한 것이었지, 보통 무림인이라면 기사분반을 보고 눈이 뒤집힌다.
단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동시에 두가지 무공을 쓸 수 있는 만큼 내공의 소모도 배로 든다.
거기에 사용하고 싶은 무공의 수련도 필요하니 노력이 필요 없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법보다.
“이보게, 당 소저. 괜찮다면 그거 가져도 좋네.”
주서천이 과장하며 웃었다.
“징그러우니 그 웃음 다시는 짓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것보다, 무슨 속셈?”
“뭐가?”
“알잖아.”
당혜가 손바닥을 펼쳤다.
왼손 중지에 착용한 기사분반이 보였다.
“강호행.”
“……?”
“네 힘이 더 필요하다.”
당혜가 말없이 주서천을 바라보기만 했다.
“전에 세가에 있을 때, 독왕께선 네 강호행에 반대하시지도 않았고 불만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지.”
“관심 없는 척하더니만 나나 아버님을 그리도 쳐다보고 있던 거야? 기분 좀 나쁘네. 변절자나 다름없는 시선을 거두어 줬으면 좋겠어.”
“내 곁에 있어 달라는 건 아니니까. 그저 필요할 때 일 좀 도와 달라는 거지. 어때?”
당혜가 입을 다물었다.
평소의 독설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하루만 시간을 줘.”
“좋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기사분반을 미끼로 삼아서 당혜를 유혹했다.
오룡삼봉이자 사천당가의 힘이 있다면 앞으로의 싸움에 든든하다.
주서천 자신이 사용해도 나쁘지는 않지만, 어차피 다른 법보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주서천.”
문이 열리고 무곡이 들어왔다.
“따님께서는 어떻습니까?”
방 안에서 차를 마시던 주서천이 묻는다.
“괜찮다. 지금은 잠들었다.”
무곡이 방문을 닫고 들어와 마주 앉았다.
“다행입니다.”
주서천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으면 검마와의 관계도 끝이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검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가 기사분반을 얻기 위해 떠났을 때, 주서천이라는 자가 대체 뭐하는 자인지 조사해 봤다.”
주서천의 등장은 누가 봐도 수상쩍었다.
아무리 독봉과 함께여도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생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무인이 갑자기 독봉을 은신처로 데려오더니, 딸을 치료하겠단다.
“화산파의 사대제자, 주서천. 소유검 유정목의 제자. 연화각 출신에 강호 초출 때 수림구채의 습격에 행방불명되었다가 생환함. 이후 최근에 강호에 다시 출두하여 독봉과의 내기에 두 번이나 승리했지.”
주서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듣자 하니 독봉은 나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하고, 내기 자체도 내 딸에 대한 치료를 위해서라 하더군.”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정말로 많이놀랐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온갖 의문과 추측만이 난무했다.
“사람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세상 좀 구하려고.”
미친놈 취급받기 딱 좋은 말이다.
하지만 무곡은 달랐다.
“어째서 나인가?”
“당신이 필요하니까.”
무곡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워낙 크다 보니 고개가 꺾일 정도로 높여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내, 스릉 하고 검이 부드럽게 뽑혀 나왔다.
주서천은 피하지 않고 무곡을 올려다 본다.
“그대가 나를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모르오.”
제자리에 천천히 앉아 검을 수평으로 눕힌다.
“하나 그딴 건 상관없소. 중요한 건 그대가 나를 필요로 했던 것이고, 내 딸을 구한 은인이라는 거요.”
주서천이 독봉을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기사분반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딸이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의원을 데려왔다.
그 누구도 웃어 주는 자가 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례 흔들었다.
손을 잡아 주며 의미하게 웃는 딸 아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다.
아내를 잃었을 때의 고통이 계속해 서 이어졌다.
오래전, 그녀에게 약속했다.
딸아이를 책임지겠다고.
하지만,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여태껏 수련해 온 무공이 전부 무의미했다.
딸을 구할 수 없는, 의술을 모르는 자신이 미웠다.
절망했고, 또 절망했고, 절망했다.
“나, 무곡이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소.”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대가 천하를 지배하려 한다면 그리 만들어 주겠소.”
분명 무슨 수가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대가 천하를 죽이라 한다면, 죽이겠소.”
아비가 자식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천하를 살리려 한다면, 살리겠소.”
그리고 희망은 곧 기적이 되어 돌아왔다.
“지옥에 가라 하면 능히 웃으며 지옥에 갈 것이고, 영혼을 달라 하면 내 기뻐하며 드리겠소.
설사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그대가 날 필요로 한다면 염라대왕 목에 검을 꽂고 돌아와 주서천을 돕도록 하지.”
무곡이 검 앞에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였다.
“내 딸아이를…… 선화를 구해 줘서 정말 감사하오!”
검마, 무곡.
그의 운명 이 바뀐 순간이었다.
* * *
여름이 지나간다.
무더위가 사라지고, 쌀쌀하게 느껴질 바람이 불었다.
푸른색 대신 알록달록한 단풍이 자리 잡았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폭섬도문 말이지? 결국 멸문했다더군.”
“예상한 바가 아닌가. 별로 놀랄 것도 없지.”
폭섬도문이 패배하자, 온갖 승냥이들이 달려들었다.
중심을 잃은 문파가 괴멸하는 데는 순식간이었다.
가신들 몇몇은 타 문파의 회유를 받아 배신했다.
남아 있는 재산을 훔쳐 달아나거나, 혹은 정보를 주변 문파에 팔아넘겼다.
참으로 씁쓸한 최후였다.
“사도팔문은 이제 사도칠문이겠군.”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할지 궁금한데?”
“어쩌면 그대로 사라질지도 모르지. 사파잖나.”
사파는 정파와 다르게 역사가 짧다.
무림맹이나 구파일방은 세월이 흘러도 굳건한 반면, 사도 연합체의 경우는 시대마다 모습을 바꿨다.
그 구성원들도 마찬가지.
약자는 도태되어 사라지고 강자는 남는 게 무림이 아닌가.
한편, 칠대 세력이 모인 흉마의 무덤에선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
돌무더기를 치우던 무사가 손을 움찔 떨었다.
그 눈에 비치고 있는 건 누렇게 물든 고서였다.
무사는 잠시 주변을 슥 둘러보니,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고서를 품 안에 숨기려 했다.
“그만.”
서슬 어린 목소리가 들리면서 차가운 검신이 목에 닿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목이 날아갈 상황이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내놔라.”
머리 뒤에서 악의가 뒤섞인 살의가 느껴졌다.
“너야말로 죽고 싶지 않으면 그 검 치우는 게 좋을 것이다.”
사도천의 고수, 산화일장(散花一掌)이 말했다.
“네놈,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보군.”
“화상 자국에 대머리면 염화살마(炎火殺魔)인가. 사람을 태워 죽이는 걸 기뻐하는 이상성욕자라지?”
“얼마 전에 네놈과 같은 말을 했다가 타 죽던 놈이 생각나는군. 그 비명이 어찌나 계집애 같던지!”
염화살마가 음산하게 웃어 댔다.
“갈! 둘 다 진정하게!”
상명진인이 소란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 늙은이.”
“이상성욕자 말대로요. 설마하니 장문인이라고 대우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일은 없을 거외다.”
산화일장이 코웃음 치면서 적의를 보였다.
“건방진 놈들!”
곤륜파의 무인이 그걸 듣고 격분했다.
“그만!”
상명진인이 소리쳐서 분란을 막았다.
“다들 조사가 장기화되어 지쳐 있을 뿐일세. 이렇게 싸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는 일시적이나 무림 공적을 앞에 둔 아군이 아닌가.
종료되기 전까지는 싸우지 말게. 마교교주와 사도천주 역시 그리 말하지 않았나?”
“칫.”
“흥!”
산화일장이 혀를 차고, 염화살마가 콧방귀를 꼈다.
“이보게, 자네.”
상명진인이 고서를 품에 안은 무사를 불렀다.
“괜찮다면 그게 무엇인지 보여 주지 않겠나? 사람이란 응당 욕심을 부리기 마련이니, 한순간의 실수는 내 이름을 걸고 용서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허튼짓을 하지 않도록 사전에 선수를 쳤다.
불가 무학만큼은 아니어도 도가 무학은 남의 불안한 정신을 안정시키고, 맑게 해 주는 신묘한 힘이 있다.
다만 마교도나 혈교도는 성질이 반대되기에 힘이 나기는커녕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 알겠습니다.”
신원 불명의 무사가 품 안에서 천천히 고서를 꺼냈다.
주변의 시선 모두가 그가 쥔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표지가 바깥으로 나온 순간
서걱!
무사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막앗!”
산화일장의 손바닥이 정면을 향해 날아간다.
별호에 어울리듯, 장풍이 흩어지며 사방으로 뿜어졌다.
“평화는 끝이다!”
무사의 목을 벤 염화살마가 검을 휘두르자, 열풍이 뿜어져 나와 날아온 장풍과 부딪쳐 폭발했다.
“하필이면 …… !”
상명진인이 한탄했다.
“혈근경이다!”
산화일장이 주변에 똑똑히 들으라는 듯 외쳤다.
“혈승의 비급이다!”
칠검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다.
연못 위, 잉어가 힘차게 튀어 올랐다가 떨어진다.
그 앞에 서 있던 독봉은 마치 한 폭의 명화와 같아서, 남자들은 전부 넋을 잃은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독봉이 등을 보인 채로 왼손을 하늘을 향해 뻗는다.
그 손은 햇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미리 말하지만 말이야.”
당혜가 무덤덤한 어조로 말한다.
“난 남자를 빛나게 할 장식물 따위가 될 생각은 없어.
만약 혹시 모를 달콤한 상황을 기대하고 있다면, 그 생각은 접도록 해. 그딴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주서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그래.”
“뭘 할 생각이야?”
당혜가 손을 내리곤 등을 돌려 주서천과 마주 본다.
“음……”
주서천은 고민에 빠진 듯 눈을 감았다가.
“일단 나부터 구해 보고.”
다시 눈을 뜨며 웃었다.
“경사겸사 무림도 구해 보려고.”
“흥”
당혜가 코웃음을 쳤다.
뒷짐을 쥔 그 손에는… 확실히, 기사분반이 있었다.
강호 무림에 걷잡을 수 없는 폭풍우가 몰아쳤다.
“혈근경?”
흉마의 무덤을 조사하다 혈승이 나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혼란을 불러들였다.
“그건 본교가 가져가겠다.”
혈근경은 육대금공이 아니다.
즉, 나인성공처럼 누가 소유한들 공적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소림사에게는 역적 취급받아 영원히 쫓기겠지만, 정파 외의 세력에겐 상관없는 문제였다.
“헛소리!”
사파도 혈근경에 욕심을 냈지만, 마교와는 다르게 연공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익을 내기 위함이었다.
혈근경은 마공.
그걸 수련한다면 사파인이 아니라 마도인이다.
그들도 마공을 배우지는 않는다.
다만 혈근경을 손에 넣는다면 타 문파에게 팔아넘기거나 원하는 것과 교환하는 등의 방법이 있었다.
예를 들어 치욕으로 치부되어 어떻게든 없애려 들 것이 뻔한 소림사에게 조건을 제시한다면 이득을 벌 수 있었다.
정파의 경우는 소림사와 같다.
마공을 누구도 수련하지 못하도록 봉인하거나, 없애 버리기를 원했다.
삼대 세력 전부가 손에 넣을 수 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흉마의 무덤 조사는 진작 끊겼다.
“이대로 있다가는 전쟁이 벌어질거요.”
남궁위무가 각 세력의 수장에게 서신을 보냈다.
아직 서로 전쟁을 바라지 않으니, 중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사도천주가 제일 먼저 수긍했다.
폭섬도문을 잃고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입장에선 환영할 일이었다.
“하면, 혈근경은 어찌할 생각인가?”
서신을 보내기 전, 남궁위무가 제갈상에게 물었다.
“확실히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다면, 소유주를 가리기 위한 지역 전쟁은 어떻습니까?”
“지역 전쟁?”
“예. 마침 흉마의 무덤 탓에 무림맹과 사도천, 그리고 마교가 산서에 집결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지요. 각 세력에서 고민한 끝에 보낸 사람들이니, 그 인원대로 싸워도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추가 지원은 금할 생각이군그래.”
“예. 병력이 추가될수록 규모가 커지고, 그러다 결국 전쟁으로 번질 것입니다. 만약 불만이 제기되면 인원을 제한해서 받으면 그만입니다. 조금 거친 방법이긴 하나, 전쟁보다는 낫지요.”
“과연, 지룡!”
혈근경의 소유주도 가릴 수 있고, 전쟁도 막는다.
마교는 조금 달갑지 않은 눈초리였으나, 무림맹과 사도천의 의견이 너무 잘 맞아 따르기로 하였다.
참고로 분쟁 전에 혈근경의 진위 여부는 소림사와 마교가 확인했다.
혈근경 자체가 원래 역근경에서 파생된 것이니, 소림사의 감정이 필요했다.
“감정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소림사 역시 참전하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혈근경은 소림사의 치부 자체다.
누구보다 혈근경을 손에 넣어 봉인하고 싶은 건 소림사였다.
“불허합니다.”
후계 양성에 힘을 쓰던 무림맹 군사까지 나섰다.
괜히 북두소림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정파 무림 최고 전력이 나서게 된다면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소림사의 은원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었고, 이를 진정시키려고 조건을 제시했다.
“대신, 무림맹이 승리할 경우 혈근경을 소림사에 양도하겠습니다.”
곤륜파, 태산파, 승산파, 항상파, 남궁세가도 군말하지 않고 승낙했다.
애초에 곤륜파는 흉마의 무덤에 관심이 있는 거였고, 그 외에는 공과 명성이었다.
최후에 혈근경을 손에 넣는다 해도 어차피 봉인하거나 없앨 예정이었으니 소림사에 양도해도 별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 산서의 흉마의 무덤에서 일어나는 분쟁은 전부 중지하도록 하시오.”
역사라는 이름의 굴레.
“소림사에서 감정사가 보내지기 전까지 무림맹, 사도천, 마교의 경비가 혈근경을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함께 경비합니다. 감정 이후, 정확히 보름 뒤 혈근경을 둔 전쟁을 시작하겠습니다.”
미래에 있을 그 굴레는 사뭇 달랐으나, 결국 동일한 이름을 지닌 굴레가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 * *
주서천은 무곡에게 산동으로 이사를 제안했다.
“그리하겠소.”
그동안은 돈벌이 수단으로 강서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도 없어졌으니 미련도 없었다.
게다가 주서천이 보다 안전한 곳을 소개시켜 준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딸을 목숨보다 아끼는 아버지 입장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장소는 산동. 금의상단이 있는 곳이다.
“며칠 뒤에 상단주가 사람을 보내올 거요. 실력 좋은 의원과 시중을 들 하녀들과 호위 무사도 보내 준다 하였으니, 편안하게 이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소. 산동에서 딸아이의 안전이 확인되면 내 언제든지 주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겠소.”
“너무 과한 호칭입니다. 주 공자면 됐습니다.”
“그리하겠소.”
주서천은 여장을 챙겨 출발할 준비를 맞췄다.
“저 ……”
떠날 때 즈음, 무선화가 주서천을 찾았다.
“이런, 무슨 일로 나오셨습니까? 아직 몸이 좋지 않으신데 나오시면 안 됩니다.”
주서천이 무선화를 보고 걱정했다.
“아니옵니다. 소녀의 목숨을 구해주신 은공께서 떠나신다 하는데, 어찌하여 가만히 있겠습니까. 비록 몸이 약하다 할지라도 배웅을 나가야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옵니다.”
무선화는 양갓집 규수처럼 정중하고 예의 바랐다.
몸짓 하나하나가 단아하여 보는 사람이 감탄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좋지 않았고 거동도 힘들었던 사람이 저러기는 불가능한데, 아무래도 타고난 듯했다.
어투야 밖을 나가지 못해 서적만 읽었다고 하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언제나…… 아버님이 걱정이었습니다.”
전광귀검이라는 별호를 듣고 마음이 아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 전장을 돌아다니고, 돈에 미쳤다면서 손가락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자고 있을 때 자신의 손을 쓰다듬어 주며 흐느껴 울던 게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은공. 다시 한번 인사드리옵니다. 아버님을 고통 속에서 해방시켜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무선화가 치마 끝을 올려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 무뚝뚝하고 살벌하던 무곡조차 지금은 부드럽게 웃었다.
눈이 글썽이는 듯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부정하기도 어렵군요. 바람이 찬데 배웅을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 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주서천도 공손한 인사로 답했다.
일행은 남창을 떠나 산서로 향했다.
“나와의 대화 때도 말 좀 곱게 쓰지 그래.”
“이불인(我不仁), 아불의(我不又).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하지 않았나.”
“네 이놈! 아가씨에게 말대꾸를 하다니!”
원대식이 기다렸다는 듯이 화를 버럭 냈다.
“그리고 얼렁뚱땅 넘어간 것 같지만 전광검귀와의 관계는 또 무엇이고 기사분반 정도나 되는 법보의 출처는 어디야?”
당혜가 집요하게 묻는다.
다 끝난 일인데 그걸 또 물어야 하나, 라고 중얼거리자 당혜가 눈썹을 치켜떴다.
“자고로 일에는 인과( 因果)라는 것이 있고, 그것에 얽혀 있는 장본인이라 하면 응당 호기심을 갖는 법.
나는 거기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무곡에 대한 사정은 별거 아닌데.”
“뭔데?”
“금의상단주와 그럭저럭 연이 있다는 건 이야기했나?”
“그래.”
“상단주는 인재를 찾아내서 포섭하는 데 귀신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 혜안을 빌려 상단주 대신에 내가 무곡을 포섭한 것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대문파의 제자가 강호행에 나서 훗날을 위해 연을 쌓아 두는 건 흔한 일이다. 이상할 건 없다.
“사파인을?”
다만 보통은 정파인들끼리만 교류한다.
무곡처럼 돈에 환장했다는 자는 보통 멸시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사람과 친해진다면 손가락질을 받는다.
무림인은 사람을 사귀는 것에도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은 법이다.
“마도인만 아니라면 그럭저럭 대화가 통하니까. 살아가는 데 있어 사파인 벗도 나쁘지 않지 않나?”
마도이세의 경우는 조금 예외다.
그들은 마공을 연공한 탓이었다.
마공이란 건 기본적으로 정사의 무공보다 수련의 속도도 빠르고 그만큼 강맹하지만, 그만큼 단점이 따른다.
마성(魔性) 자체가 무공과 함께 성장해 버린다.
천륜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며, 마공에는 수련 방식 자체가 악랄한 것이 워낙 많았다.
“…… 기사분반은?”
당혜가 무곡을 찾은 부분은 넘어갔다.
사천당가 자체가 원래 정파와 사파 사이에 있다.
비록 정파에 속해 있으나, 그 수법은 사파와 닮았다.
“보는 눈이 많으니까 나중으로 미루자고.”
“아가씨와 단둘이 있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원대식뿐만 아니라 다른 호위 무사들이 으르릉거렸다.
“대식아, 너 완전 미친 거 야니냐! 내 목숨은 하나지, 둘이 아니다!”
“감히 아가씨를 모욕하다니 ! 죽여주마!”
“어쩌라는 건지!”
“그만.”
당혜가 손을 들자 무사들이 멈췄다.
살의를 거두고, 공력에 펄럭거리던 소맷자락이 잠잠해졌다.
일행과 여행하면서 이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당혜에게서는 장군과 같은 위엄이 흘렀다.
여기에 있는 누구도 당혜를 귀한 집 아가씨 취급하지 않았다.
존경으로부터 나오는 태도였다.
“목적지는?”
“산서. 흉마의 무덤.”
“칠검전쟁?”
“그래.”
얼마 전, 혈근경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과연 혈근경인가.’
칠검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것은 예상했다.
다만 어떠한 것이 계기가 되는지 그것이 관건이었다.
정확하진 않아도 기억을 나열해 몇 가지를 꼽아 봤고, 그중에는 혈근경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마도이세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암천회는 온 무림의 적.
마도이세도 마찬가지였다.
칠검전쟁 이후, 정사대전이 십 년 동안 이어진다.
하면 그 십 년 동안 마도이세는 무엇을 했을까?
‘마도전쟁!’
마공을 수련하는 건 마교뿐만이 아니다.
혈교도 마찬가지다.
양측 다 눈을 붉히며 욕심을 부렸다.
암천회는 이에 혈근경을 미끼로 삼아 마도이세 간에 전쟁을 일으켰다.
그게 마도전쟁이다.
참고로 그때도 소림사가 나섰는데, 정사대전 탓에 다수를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수의 고수로 구성된 정예만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당시 소림사가 파견했던 정예 고수들은 혈근경을 얻지 못한 채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만다.
‘지옥의 시작이었지.’
무림은 물론이고 중원 전체가 암흑기였다.
‘십 년 후, 그 지긋지긋한 전쟁들이 멈췄지만 중원 무림 세력이 눈에 띄게 약화된 탓에 결과적으로 새외세력이 중원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지.’
몇십 년 동안 전란이 끊이지 않는 시대.
‘암천회이니 분명 다음에는 혈근경 대신에 다른 걸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전쟁은 멈추지 않을 거야.’
하나만 나와도 무림이 발칵 뒤집히는 무공을 아무렇지 않게 내놓는 이들이다.
그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증오와 탐욕의 연쇄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부족해.’
그동안 선수를 쳐서 암천회를 방해했다.
중도만공으로 회주의 힘을 깎았고, 후일 오른팔이자 암천의 검이라고도 불릴 검마를 회유했다.
그 외에도 영약을 빼앗거나 흉마의 무덤을 무너뜨리는 등의 온갖 방해를 했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무려 몇십 년 동안 모습을 감추고 철저한 준비 끝에 야욕을 드러내 무림을 멸망 직전까지 내몰았다.
역대 최고라 칭송받는 영웅들과 천재가 있었고, 은거한 고수나 신비 문파까지 합세했다.
그들의 희생과 천운이 있었기에 겨우 암천회에게서 승리할 수 있었다.
‘기필코 막아 주마!’
궁귀검수의 명성은 암천회의 귀에도 들어갔다.
“주서천……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군.”
칠성사의 천기는 무림맹으로 따지자면 군사다.
무공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지략으로는 으뜸이다.
암천회주조차 천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고, 수뇌부 역시 천기의 말이라면 별 말 없이 따랐다.
“흠.”
사도팔문 중 일문이 멸문지화를 맞이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을 준 인물이다.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천선(天族).”
“무슨 일?”
“주서천에 대해서는 아직인가?”
“무림인 중 주서천이 어디 한둘인 줄 아니? 게다가 장본인은 분쟁이 끝나자마자 모습을 감췄어. 그 탓에 사칭하는 어중이떠중이까지 나타나 골치야.”
“주서천이라는 이름에 주목하지 마라. 가명일 수도 있으니, 그걸 감안해서 찾아야 한다.”
주서천이 괜히 어릴 적에 몸을 숨긴 게 아니었다.
천기, 나아가 암천회는 집요하다.
자만하지 않는다.
대계에 방해가 될 인물이라면 새싹부터 자르려 했다.
“일단 화산파의 봉추는 아니니까 놈은 제외해라.
천독불침이라는 걸 이용해 독봉을 꾀어 어떻게 해 보려는 놈이니까. 여자를 밝히고 내공이 좀 많다는 것 빼곤 별로 대단할 것 없는 놈이다.”
그 대단한 천기조차도 설마 구종과 정면 승부하고 승리를 거둔 자가 열여덟 살밖에 안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그게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는 있어?”
“안다. 시간은 상관없으니 찾으라는 의미다.”
“확실히 화경이 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정도 고수에게 그렇게까지 신경을 쓸 이유가 있는 거니?”
“아직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그놈이 흉마의 무덤을 수몰시킨 장본인일지도 모르니까.”
“……”
천선이 깜짝 놀랐다.
“……확실해?”
천기는 그 누구보다 철저하며 지혜롭다.
그렇기에 암천회주는 그에게 천기라는 이름을 맡겼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정보에 의하면 명검을 지니고 있다 했는데 그것이 태아일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네가 힘들어할 정도이니까.”
천선은 암천회의 정보를 관할한다.
천기에게 올라가는 보고의 정보는 전부 천선에게서 나왔다.
“사문 불명의 신비 고수.
설사 동일 인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알아내는 데 충분히 가치가 있지. 분명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고 정체를 숨기고 있을 것이다.”
암천회가 궁귀검수를 쫓기 시작했다.
당혜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묻는다.
“당신이 궁귀검수지?”
“그래.”
주서천이 시원스레 답했다.
“안 숨기네?”
“짚이는 점이 너무 많잖아.”
기사분반을 구하러 가겠다고 사라지더니, 얼마 후에 동명이인의 고수가 나타나 이름을 떨쳤다.
이후 곧바로 도망치는 것처럼 사라졌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당혜입장에선 알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당혜는 주서천과의 첫 만남 때 그의 무공이 범상치 않다는 걸 확인했었다.
따라온 호위 무사들은 주서천을 그저 출신만 좋은 애송이라 우습게 여겼으나, 당혜는 아니었다.
보는 눈이 있어서 말해 주지 않았을 뿐, 당혜와 둘이 있을 기회가 오자 솔직하게 답했다.
“이렇게 솔직하게 나오니 허탈할 정도네.”
“너에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긴 했지만, 이건 비밀로 해 주지 않겠어?”
“그 정도의 눈치는 있어. 애초에 비밀로 하려 하지 않았더라면 세가의 무사들을 신경 쓸 이유는 없잖아.”
“고맙군.”
쓸데없이 설명해 가며 알려 줄 필요가 없으니 편해서 좋았다.
유능한 사람이 곁에 있으면 이래서 좋다.
“나 말고 누가 알고 있어?”
“아직 너밖에 없지만, 금의상단주와 제갈승계. 그리고 얼마 전에 헤어진 무곡이 알게 될 거다.”
“당신에 대해서 점점 더 궁금해지네.”
처음에 봤을 때는 패배와 치욕을 알려 준 원수였다.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고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 사건으로 인해 그인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아무리 대문파의 제자라 할지라도, 하물며 도사가 상단과 친하다는 것 자체가 이상해. 무엇보다 무림도 잘 모르는 기사분반 같은 법보의 위치를 알고 있고, 폭섬도문주와 싸워 승리한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
“그래, 그동안 숨겨 왔지만 내 무공은……”
“이야기하고 있는데 헛소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차피 나 때처럼.무언가 비열한 수단으로 이긴 것이겠지.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화경이라는 자만심을 찔렀다거나. 그렇잖아?”
……
사전에 말을 잘라버리는 악랄한 성격!
당혜와 헤어질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주서천이었다.
* * *
산서, 흉마의 무덤.
현 무림이 소란스러운 근간이 되는 혈근경.
누렇게 변질된 그 서적은 노승(老僧)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소림사 방장과 같은 항렬의 승려, 혜법(慧法)이 혈근경을 읽다 말고 덮었다.
자비로 가득해야 할 그 얼굴은 불쾌함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오?”
상명진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짜라고 말한들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소.”
산화일장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혜법을 노려봤다.
“아니, 그 반대입니다. 혈근경이 틀림없습니다.”
혜법이 염주 알을 돌리면서 확언했다.
“하오면 어째서 도중에 덮은 것이오?”
“혈근경은 소림의 승려가 읽을 경우, 자연스레 빠져들게 만들어 구결대로 운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제야 좌중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혈근경은 진본이 틀림 없군!”
감정 결과가 진본으로 밝혀진 날.
족히 수십 마리 이상이 되는 전서구들이 날았다.
그 날은 유독 하늘에 비둘기나 매가 많았다.
이 소식이 천하에 알려지자, 당연히 반응도 격렬했다.
온 관심이 흉마의 무덤으로 향했다.
“허, 그렇다면 전쟁이라는 겐가!”
“전쟁이긴 한데, 산서. 그것도 흉마의 무덤이 위치한 남부 지방에 한해서인 것 같네.”
“이런! 친척이 산서에 산다 했는데……”
지역이 제한되어 있긴 해도, 전쟁은 전쟁이다.
수뇌부에선 소규모라고 지정하긴 했지만, 그 구성원을 보면 결코 아니었다.
무림맹과 사도천, 마교의 전력이 모였다.
죽이지 못해 안달인 이들을 한곳에 두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여하튼, 삼대 세력은 보름 동안 전쟁의 준비를 서둘렀다.
각 지역에서 몇몇의 고수가 산서로 향했다.
또한 칠검전쟁에 몇 가지 안내 사항이 붙었다.
一. 각 세력의 인원을 일천으로 제한한다.
二. 칠대 세력 외에도 참전을 허가하나, 한 세력당 열 명 이상을 받지 않도록 한다.
三. 혈근경은 보름이 되기 전날 밤 각 세력 대표가 사방에서 잘 보이는 고원의 정상에 두고 떠난다.
四. 이 모든 걸 어길 시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음.
“아니, 사파 놈들이랑 마교도가 이런 걸 지키겠어?”
세간에 네 가지 사항이 공개되자 토론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답답한 듯이 불만을 털어놓았다.
“쯧쯧, 자네는 뭘 모르는구먼.”
“그게 뭔 소리인가?”
“아마 무림맹도 사도천도, 마교도 이걸 확실하게 지킬 생각은 없을 걸세.”
“아니 , 그럼 이런 건 왜 만든 겐가?”
“아예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렇지. 최소한의 억제라 할 수 있지.”
“자세히 말해 주겠나?”
“숫자를 제한하지 않으면 오천이나, 만으로 늘어나 규모가 커져 걷잡을 수 없을 것이고, 참전하는 세력을 제한하지 않았다간 위와 동일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며 각 세력의 수장들이 골치 아파하겠지.”
“하면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무엇인가?”
“잘 생각해 보게. 쉬우니까.”
“아이고, 이 사람아! 졌네, 졌어! 내 오늘 비싼 술과 음식을 제공할테니, 어디 한번 말해 보게나!”
“흠흠. 보름 동안 혈근경은 필시 누군가에게 도난당하지 않도록 철저한 감시하에 보관될 걸세. 당연히 감시자들은 정사마에서 뽑은 이들일 거고.”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감시가 심하고, 교대도 수없이 이루어지고 눈치 보여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지.
그리고 사고를 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으니까. 다만 문제는 전쟁이 벌어지기 전날일세.”
“어째서인가?”
“공동으로 감시하는 자들을 쳐 죽인 다음, 혈근경을 손에 넣어 근처에 대기 중인 아군에게로 달려갈 수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일세. 그게 성공한다면 수뇌부에게 처벌은커녕 찬사를 받을 걸세.”
“호오!”
“그런 일이 없도록 아예 전날에 모두가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접근을 제한. 그리고 그 이튿날에 승부를 보면 그만일세.
그리고 네 번째는 이 모든 걸 어길 시 두 세력이 동맹하여 한 세력을 끝낼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주네.”
일 항과 이 항은 지켜지기가 어렵다.
혈근경이 눈앞에 있는 데다가,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는 기본적으로 서로를 결코 믿지 않는다.
그런 무신뢰 속에서 급조된 것을 믿을 리 없다.
분명 적이 고수를 초빙하거나 전력의 숫자를 넘게 준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대응할 것이다.
물론 대놓고 위반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눈에 띄지 않는 한에서다.
“과연! 최소한 이런 것이 있어야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그렇지.”
“누가 생각한 건지는 몰라도 참으로 탁월하구만!”
“무림맹 부군사, 제갈상일세.”
“과연, 지룡!”
미래대로 제갈상은 정사대전 이전부터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오룡삼봉 중에서도 명성이 제일이었다.
자연에 압도되는 가파른 계곡을 지나면 수심이 십 척 정도 되는 황하가 나온다.
비교적 얕은 수심을 지닌 황하는 한곳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데, 산서 남부 지방에 보기 드문 드넓은 고원이었다.
무림맹, 사도천, 마교는 이 고원 주변 황하 너머의 들판에서 진지를 구축해 전쟁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칠검전쟁까지 일주일 남짓, 무림맹은 인원 점검을 하던 도중 생각지도 못한 방문객을 맞이하게 된다.
“독봉? 독왕의 손녀 말인가?”
상명진인이 흰 눈썹을 매만지면서 의아해했다.
“예, 그렇습니다.”
옆에 있던 중년인이 답했다.
남궁위무의 아들이자 현 남궁세가의 가주의 동생인 남궁재영(南宮才英) 이었다.
“사천당가가 참전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
독봉이라는 고수는 문제가 아니었다.
상명진인이 신경 쓰는 것은 독봉, 그녀의 신분이었다.
무림에서 명가의 적통이란 건 곧 그 가문의 대표로도 볼 수 있었다.
보통 무공이 강하더라도 혼자 움직이지 않고, 그 근처에는 십수 명의 고수가 자연스레 붙지 않는가.
이렇다 보니 개개인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게…… 확인해 보니 저희가 생각하는 건 아닌 듯싶습니 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방금 전 들은 보고에 의하면, 독봉이 사천당가의 대표 입장으로 온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가의 무사들도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화산파의 제자와 동행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금의상단 소속의 무사들과도 있다 합니다.”
“으흠?”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금의상단을 모르는 건 아니다.
최근 상계뿐만 아니라 무림에도 이름을 날리는 유명 상단이었다.
한데 그들이이곳 칠검전쟁에 왜 나타났는지, 그리고 사천당가와 함께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것이 의문이었다.
칠검전쟁에 사망자가 다량으로 발생하는 건 막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전란의 시대의 시작점인 정사대전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았다.
정사대전의 계기는 정말로 간단했다.
칠검전쟁에 참전했던 무림맹과 사도천이 서로 죽고 죽이면서 무수히 많은 은원 관계를 형성한 탓이었다.
‘구성원들이 별반 차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전생의 칠검전쟁과는 다르다.’
애초에 이전에는 장소 자체가 흉마의 무덤이었다.
반면 이곳에는 무덤 내부의 기관이나 함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상 전처럼 일 년 동안 이어질 일은 없었다.
원래의 칠검전쟁은 흉마의 무덤이라는 지형 특성상 기관이나 미로가 많았고, 자연스레 싸움이 길어지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런 것이 없으니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대량의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암천회도 신경 써야 했다.
그들은 첩자와 풍자를 통해서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했다.
이로써 목적은 둘, 혈근경과 암천회의 첩자였다.
우선 혈근경을 손에 넣으려면 칠검전쟁에 참전해야 하는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화산파와 봉추라는 이름을 걸고 찾아가 봤자 칠대 세력이 아니라면서 내쫓길 게 뻔했기에 독봉의 명성을 빌렸다.
예상대로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을 되돌아가 일행이 흉마의 무덤 인근에 도착했을 무렵, 마중을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여! 주 대장!”
주서천에게는 반가운 얼굴이었다.
“초련.”
주서천이 웃으면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삼안신투의 비고 때, 열 명의 무사가 함께했다.
초련은 그중 홍일점으로 지금은 질풍십객 중 일인이다.
그 누구도 초련을 보고 여자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그 손에 목이 베인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외관만 해도 웬만한 남성 못지않게 완벽한 근육을 지니고 있고, 흉터도 상당해 위압이 느껴질 정도였다.
“오랜만이오.”
강서를 떠날 당시, 무곡과 무선화에 대한 것 외에도 금의검문의 지원병력이 필요하다는 걸 덧붙였다.
그러자 초련이 일군 소속의 무사 아홉을 데리고 왔다.
“주 대장, 너무 예의 바른 거 아니오? 왕 오라비에게 말 편히 한다는 걸 전에 들었소. 편히 놔 주시오.”
“그렇습니다, 주 대장.”
초련 뒤의 질풍검객들도 동의했다.
“그러지.”
주서천이 흔쾌히 승낙했다.
“질풍이객.”
당혜가 초련의 이름을 듣자마자 알아봤다.
“그대는……?”
당혜가 대답 대신에 면사포를 거뒀다.
“헉!” “흡!”
여기저기서 숨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금의상단 소속 무사들은 입을 떡 벌린 채 넋을 잃었다.
같은 여자인 초련조차 당혜의 미색을 보고 감탄한 듯, 눈을 껌뻑였다.
“허어, 봉황을 보는 건 난생처음인데 정말 예쁘긴 더럽게 예쁘군.”
“과찬이십니다. 질풍이객, 그대 역시 아름다워요.”
“이런 근육질 아줌마가 뭐가 아름답다는 겁니까.”
초련이 쓰게 웃었다.
“자고로 미(美)의 기준이란 건 주관적인 것이지요.
무인으로서 잘 단련된 근육과 경험을 증명하는 흉터. 그리고 당당한 그 태도가 아름답지 않으면 무엇이 아름답다고 하겠어요?”
당혜가 평소답지 않게 부드러운 어조로 찬사를 전했다.
초련이 부끄러운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주서천은 대충 인사를 나눈 다음 본론을 꺼냈다.
“이곳에 온 걸로 대충 예상했겠지만, 그대들을 부른 것은 칠검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다. 만약 되돌아가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상관없으니 돌아가도 좋아. 이 점에 대해선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거라 맹세하지.”
“대장이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상단주께서 사전에 몇 번이나 물어봐 주었소. 걱정하지 마쇼.”
“알았다. 그럼 일행을 서로 소개하도록 하지. 이쪽은 사천당가에서 오신 독봉 당 소저다.”
“곁에 있는 분들은 세가의 호위 무사입니까?”
“그래. 그리고 이쪽은 질풍십객의 초련과 금의상단 소속의 무사들이다. 아, 이제는 금의검문인가.”
“반갑소.”
열 명이 포권으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당가의 무사들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대놓고 불만을 제기하지는 않고 인사에 답해 줬다.
그들 입장에서 금의검문에 속한 무사들은 돈에 무와 명예를 팔아 버린 자들이었다.
무인들은 그러한 부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당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작 금의검문은 그 시선이 익숙해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신경 쓰지도 않는 눈치였다.
“자, 우리가 이렇게 손을 잡게 된 건 혈근경이 사도천이나 마교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
초련이 뭔 개소리나는 표정을 지었다.
“……?”
독봉도 미간을 찌푸렸다.
“무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칠검전쟁에 참전하고 싶었지만, 나 혼자서는 불가능해 이렇게 여러분의 손을 빌렸……”
주서천이 말하는 도중 두 여성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주 대장. 농담 말고 그냥 말해 주시오. 뭔가 손에 넣기 위해서 아닙니까?”
“주서천. 뭘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실을 말하도록 해.”
“……?”
주서천이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런 거 없는데?”
“하하하! 주 대장! 재미있는 농담이었습니다!”
금의검문 무사가 소리 높여 웃었다.
“평화라니. 왜 그런 뻔히 들킬 말을 하는 거요?”
“아. 혹시 이번엔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요?”
주변의 반응에 주서천이 어이없어 했다.
“아니, 진짜라니까?”
무림의 평화라는 건 진심이다.
혈근경을 없애고, 각 세력에 숨어든 암천회의 첩자를 처리한다.
평화와 직결된 문제가 아닌가.
다만 후자의 경우에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과연, 이번 임무는 기밀인가.”
초련은 주서천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질풍십객에게 있어 주서천은 삼안신투의 비고에 대해 먼저 알고 일찍 혼자 독차지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문에도 알리지 않고, 돈에 환장한 이의채와 손잡고 행동하지 않았나.
그들 입장에서 주서천은 정파에서 엇나간 양반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 입을 비틀어 주고싶지만, 사정이 있어 보이니 참도록 하겠어. 대신 다음에 답변해 줘.”
당혜의 눈으로 본 주서천은 초련이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무선화를 도와주는 것도 결국 무곡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였지 병자를 도와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협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던 모습만 보여 줬기에 평화라는 말을 믿기는커녕 코웃음만 쳤다.
“아니, 진짜라니까. 무림 평화. 무림 평화.”
주서천이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무림 평화? 혹시 여기에 어떤 암호가 있는 건가?”
초련이 상단주의 말을 떠올리며 고민에 잠겼다.
주서천은 입을 꾹 다물고 울상을지었다.
“아이고, 믿을 사람 불렀더니 아무도 안 믿는 내 신세야!”
* * *
산서에서 사천은 그렇게까지 멀지 않다.
전서응으로 대화를 하는 데 이틀에서 사흘이면 충분했다.
상명진인은 독봉의 참전 소식을 독왕에게 보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설명을 요청했다.
혹시라도 괜히 참전시켰다가 눈먼 화살에 비명횡사라도 하면 곤란했다.
오룡삼봉 중 독봉이니 무공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칠검전쟁에 참전하는 무인들 모두 쟁쟁한 실력을 지녔으니 그렇게까지 안전한 건 아니었다.
“독왕에게 답변이 왔습니다.”
“뭐라는가?”
“세가의 의지가 아닌 독봉의 독단이라 합니다. 지원 병력을 보내지 않을 생각이며, 참전을 요청했다면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편성하라 하더군요.”
“허, 독왕이 자식들에게 매정하다고 하더니만……”
상명진인도 남궁영재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오대세가라 하면 혈육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한데 무능해서 내놓은 자식도 아니고, 설마하니 오룡삼봉 중 독봉을 이런 취급할 줄은 몰랐다.
“흔히들 사자는 자기 자식을 절벽에서 떨군다는 속설이 있지요.”
당혜가 옅게 미소 지었다.
괜히 사천제일미가 아니라는 듯, 막사 안의 무사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상명진인이나 남궁영재야 나이도 있는 데다 지닌 무공이 대단해 심법으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상명진인은 한숨을 푹 내쉬곤, 배꼽 부근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을 매만지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로 괜찮겠느냐.”
아직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를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몇 번 설득해 봤지만 본인의 의사가 확고했다.
“네. 저 혼자만 있는 건 아닌걸요. 화산파의 주 공자도 있고, 금의검문의 무사들도 있습니다.”
당혜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절도 있는 자세로 서 있는 주서천이 있었다.
일행은 참전과 편성을 위해 보고를 올리고, 상명진인의 부름을 받자마자 찾아가 인사했다.
‘태허검자(太虛劍子).’
주서천은 상명진인을 힐끗 쳐다봤다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마인들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마교는 상명진인의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았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지도자로서의 면모도 보통이 아니었다.
암천회에서도 눈엣가시로 여기는 인물이었다.
신강에서 종종 내려오는 마교도를 저지한 일등 공신이었고, 은거해도 될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아 자신을 희생해 암천회와 싸웠다.
“으음?”
상명진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느냐?”
“이란 죄송합니다. 명성이 자자한 곤륜의 장문인을 뵙게 되어 저도 모르게 그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후배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주서천이 깍듯한 태도로 사과했다.
절도 있는 몸짓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난 존경심이 보였다.
실제로 거짓이 아니었다.
상명진인은 주서천이 한때 동경했던 영웅이기도 하였다.
많은 노력 끝에 곤륜파를 대표하는 고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문인에 오른 뒤에는 후학을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흠……’
상명진인은 그런 주서천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독봉이 화산파의 제자에게 두 번이나 패배했다고 하던데, 그 제자가 이 아이인가.’
상명진인은 주서천을 살펴봤지만, 그 경지를 완벽히 가늠을 수 없었다.
경지가 엇비슷한 탓이었다.
원래 동수끼리는 경지를 알아볼 수 있지만, 자하신공의 드러나지 않는 특성 덕에 숨겨졌다.
경지를 아예 알 수 없다면 의심을 받았겠지만, 기세를 적당히 조절해서 하수로 속여 피할 수 있었다.
“좋아, 알겠네. 내 잘하는 행동인지 아직도 고민되는 바이나, 본인들이 무림맹을 위해서 싸우고 싶다 하니 막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도록 하게.”
“금의검문도 말입니까?”
남궁영재가 마음에 안 드는 듯이 물었다.
“금의검문은 어떠한 보상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 역시 필시 혈풍이 걱정되는 것이겠지요.”
주서천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칠검전쟁에 참전하면 상단에서 보상이 나온다.
“강호의 협의가 예전과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 그동안 착각을 한 것 같군. 흔쾌히 받아들이겠네.”
무림맹 진영 측이 시끌벅적해졌다.
“독봉!”
“허! 정말로 아름답군!”
당혜가 지나갈 때마다 사내들이 숨을 멈췄다.
주변의 이목을 단숨에 주목시킬 아름다움이었다.
“그럼 저놈이 봉추겠군!”
화산의 봉추!
부럽구나, 봉추!
주서천은 봉추라 불릴 때마다 몸을 움찔 떨었다.
“왜 그러신지요, 봉추 공자.”
당혜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기분 참 오묘하군.’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시선.
저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치 동경(銅鏡)에 비치는 자신을 보듯,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 올랐다.
오룡삼봉.
이십 대 최고의 영웅을 칭하는 이름.
그 뒷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하며 바라보았는가.
다만 독봉의 곁에 있다는 걸로 부러움을 받으니 좋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어홈!”
일행에게 돌아가는 도중, 어떤 무리가 막아섰다.
“안녕하시오, 독봉 소저!”
남녀로 구성된 열댓 명의 무리였다.
공통점이라면 비슷해 보이면서도 엄연히 다른 도복 차림이었다.
“오룡삼봉 중 독봉을 만나 뵈어 영광이오. 내 고찬정이라 하외다.”
‘누구더라.’
익숙한 이름은 아니었다.
“소태산(小泰山) 대협이로군요. 반가워요.”
당혜가 대신 의문을 풀어 줬다.
오악검파 중 태산파의 소문주였다.
고찬정은 당혜가 자신의 별호를 알아봐 주자, 으쓱이면서 자랑하듯이 주서천을 쳐다봤다.
‘어쩌라고?’
정말로 의미를 모르겠다.
“무슨 일로 절 불러 세우신 건가요?”
당혜가 미소를 유지한 채로 물었다.
주서천이 그 미소를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독을 처먹이겠다는 뜻이군. 부디 제대로 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주서천이 고찬정을 걱정해 줬다.
“아, 설명을 드리기 전에 일단 일행분들을 소개하겠소.”
고찬정이 말하자 양옆에 있던 두 남녀가 나왔다.
“숭산파의 일지검(一枝劍) 대협이오.”
“반갑소. 곽채라 하외다. 정말 아름답구려.”
곽채가 공손하게 인사하면서 그녀의 미모를 극찬했다.
그의 눈동자는 당혜를 살피느라 바빴다.
“그리고 항산파의 검화(劍花) 대협이오.”
“안아연이라고 해요.”
안아연은 특이하게도 당혜가 아니라 주서천을 쳐다봤다.
아니, 쳐다보는 게 아니라 노려보고 있었다.
관심이 아닌 멸시나 혐오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과연 , 항산파의 비구니인가.’
오악검파 중 항산파는 비구니로 구성된 문파다.
화산파와 사이가 특히 좋지 않은데, 이는 항산파의 절기인 절매산엽검식(絶梅散葉劍式)을 창안한 조사가 화산파의 파문제자 출신이라서 그렇다.
그때부터 화산파에 대한 악감정은 풀리지 않고 여전히 지금까지 내려와 이어지고 있었다.
강호에서 오악검파끼리 친분 교류를 할 일이 생겨도 화산파와 항산파만큼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 따지고 보면 동문인데 암천회에 화산파에 대한 정보를 판 건 너무하잖냐. ’
그 악감정은 전란의 시대 때 좋아지긴커녕 악화됐다.
결국 첩자의 침입까지 허용한 데다가 최후에는 눈이 돌아가서 화산파에 대한 정보까지 넘기는 막장 짓을 일삼는다.
“그래서 , 무슨 일이죠?”
당혜가 재차 물었다.
“다름 아니라, 정파의 후기지수가 모인 자리가 아니오?
아직 시간도 육 일이나 남았으니, 괜찮다면 친목을 도모하는 건 어떤지 제안하러 왔습니다.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합니까? 하하하!”
고찬정이 목소리를 높여 자랑스레 웃었다.
‘미친놈이네.’
피식.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뭐가 그리 웃기지?”
고찬정이 마음에 안 드는 어조로 물었다.
“육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가하게 친목이나 도모하자고 하니 웃길 수밖에.”
“호호호. 이래서 하수란 어쩔 수 없다니까.”
고찬정 대신예 안아연이 답했다.
“사람이 너무 굳거나 긴장하면 실수하는 법. 원래는 몸을 풀어 주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해 줘야 한단다.
이런 것도 모르는 녀석이 화산파의 제자라니, 화산의 이름도 떨어질 대로 떨어졌나 봐?”
안아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주서천을 깎아내렸다.
“하하하!”
“맞는 소리를 하는군!”
고찬정과 곽채가 맞장구치면서 웃었다.
그 뒤에 있던 젊은 무인들도 수긍했다.
허어!
주서천이 감탄했다.
“정말로 그린 듯이 나오는 안하무인이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있을 줄이야!”
전란의 시대 때 , 대문파의 제자 중 뭣 모르는 철부지가 이런 적이 있어서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다.
당시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던 자신이 뭐라 하지는 못하고 욕만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났다.
“뭐, 뭐라고? 안하무인?”
세 사람의 얼굴이 약속이라도 한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이 아니라 분노 탓이었다.
곽채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면서 언성을 높였다.
“입 닥쳐라, 봉추! 독봉 소저에게 비겁한 수를 써서 승리하고, 약점을 잡아 그녀를 데리고 다니는 주제에 어딜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느냐!”
“입 닥쳐라, 일지검! 독봉이라고 해서 눈이 벌게져선 전쟁 상황이란 것도 잊은 채 당혜와 잘 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어딜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느냐!”
“이이익!”
“네 이놈이라고 외치면서 나에게 검을 휘두른다는 것에 내 손가락을 걸지!”
주서천이 확언했다.
“네 이노오옴!”
곽채가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휘둘렀다.
주서천이 몇 걸음 퇴보해 가볍게 회피했다.
“무슨 일이지?”
“싸움이다!”
“어르신을 불러야 하나?”
주목을 받고 있다 보니 금세 소란이 일어났다.
웅성거림이 커지자 고찬정이 곽채를 말렸다.
“진정하게, 일지검 대협. 일을 크게 벌여서는 아니 되오. 저자의 간계에 걸려들지 말고 진정합시다.”
“큭!”
곽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검을 갈무리했다.
“바보들 놀리는 게 재미있어?”
고찬정이 순간 두 귀를 의심했다.
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 목소리는 독봉의 것이었다.
당혜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말고 가자. 어차피 저들 중 하나는 결국 잘난 척만 하다가 무공도 제대로 펼치지 못해 전장에서 수하들을 방패로 삼고 젖은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면서 떨 테니까 넘어가 주면 안 돼?”
“……”
주서천이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당혜는 주변의 시선에 미안한 듯 옅게 웃었다.
“실례해요. 혹시나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착각한 것이라면 비수를 머리에 꽂고 돌려서 다시 생각해 보는 걸 추천해 드릴게요. 그리고 부탁이니 최대한 접근하지 말고 전쟁에 대비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무림의 미래를 짊어진 여러분이 죽지 않기를 원하는걸요.”
뒤에 있던 주서천이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나도 볼일만 끝내고 이 여자랑 얼른 헤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