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궁귀검수(弓鬼劍手)
검과 도가 부딪치면서 불꽃이 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장에는 삶과 죽음이 뒤섞였다.
한편, 주서천은 스스로 자신 있게 말했으나 내심 긴장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주서처언!”
구종이 원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도를 휘둘렀다.
그냥 도가 아니다. 강기가 실린 절대적인 도였다.
저걸 그대로 막는다면 월오삼검이라 불리는 태아조차 얼마 버티지 못한다.
괜히 강기가 아니다.
“와라! 거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강기에는 강기!’
세상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그의 검에도 기가 맺혔다.
형체 없이 넘실거리기만 하던 투명한 실 자락은, 이윽고 겹겹 이 쌓여 파도처럼 출렁이다 견고해졌다.
검강을 형성하는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그리고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쪼갤 기세의 도와 맞부딪쳤다.
콰콰콰광!
구릉 전체에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주변의 공기가 용암처럼 부글부글 들끓었다.
서 있던 무사들은 땅이 뒤흔들리며 균형을 잃었다.
강기끼리 부딪치면서 그 여파가 고스란히 주변으로 전달됐다.
기의 파도가 주변을 집어삼켰다.
‘무식한 놈!’
주서천이 속으로 입을 떡 벌리면서 놀라워했다.
검에 전해져 오는 힘이 보통이 아니다.
손잡이를 쥔 손가락이 일순간 떨렸다.
“크아아앗!”
구종이 계속해서 괴성을 지르면서 도를 휘둘렀다.
그 위력이나 속력은 그야말로 폭발적
고요하다 싶더니만 갑자기 폭발하는 것처럼 단숨에 쏟아진다.
칼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큰 칼이 몇 번이나 휘둘러진다.
머리 위로 도격이 정신없이 이어졌다.
“흡.”
당황하지 않고 구종의 공세를 침착하게 받아친다.
검강과 도강이 부딪칠 때마다 공기가 펑펑 터졌다.
‘과연, 화경!’
주화입마에 빠져 이성이 반쯤 날아간 건 확실한데, 그렇다고 도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건 아니다.
도강을 유지하면서 도법에 따라 확실히 움직인다.
몇십 년 동안 축적된 움직임이니 무의식적으로 나올 만했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싸우면서도 연신 감탄이 튀어나왔다.
화경의 고수와 싸운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일대일은 처음이다.
전생에선 합격진으로 겨우겨우 상대했다.
‘강기와 강기의 대결이 이런 것이었나!’
전에 화경에 올랐을 때는 생명을 다했을 때였다.
싸우기는커녕 검법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했었다.
“흐흐!”
무심코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즐거움과 무학에 대한 탐구심을 비롯한 호승심!
“이것이!”
자신도 모르게 흥분된 목소리를 냈다.
쿵광쿵광.
심장이 성난 황소처럼 날뛴다.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천하백대고수!”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하수.
매화검수를 동경하던 검수.
어부지리로 얻었던 장로.
“이것이!”
가슴이 벅차오른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심장의 박동은 머릿속까지 이어졌다.
주변이 보이지도 않았고, 들리지도 않았다.
그 두 눈에 비치는 오직 동수를 이루는 고수였다.
“화경!”
배꼽 아래에 잠든 하단전을 깨웠다.
휴화산처럼 잠들어 있던 내공의 덩어리가 일순간 폭발했다.
환골탈태로 인해 쾌적해진 기맥을 지난다.
탁기가 없으니 거침이 없고, 그 속도는 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기 줄기는 쭉쭉 뻗어져 나가 팔을 지나 손에 쥔 검으로 향한다.
근육이 이완되었다가 수축을 반복하다가 이윽고 미약하게나마 부풀어 올랐다.
원래라면 과한 내기가 한꺼번에 주입되면 부서져야 했으나, 새로이 태어난 육신에 한계는 없다.
“우오오오옷!”
“크아아아앗!”
채채채채챙!
철과 철이, 강기와 강기가 몇 번이나 격돌했다.
푸르스름한 빛줄기와 불그스름한 빛줄기가 몇 번이나 부딪치면서 폭발을 토해 내고 뒤섞여서 날뛴다.
마치 유성의 폭풍우를 보듯, 빛줄기들이 어지럽게 얽혀 궤적을 남기면서 쏟아져 내렸다.
“주서처언!”
구종이 뒤로 물러났다가 도를 크게 휘두른다.
주서천이 검을 세로로 세워 막으려 했다.
“큿!”
도에 실린 공력이 보통이 아니다.
대해와 같은 내공을 지닌 자신이었으나, 폭섬기공으로 몇 배 이상 상승한 신체 능력에 밀렸다.
결국 주서천이 도를 완전히 막아내지 못하고 뒤로 멀리 나가떨어져 부서진 문의 밖으로 날아갔다.
전장도 막바지다.
구릉 정상에 양측의 전력이 집결했다.
묘진각도 멀리서 확인하고 재빨리 이동했다.
여기에서 패배하면 그 피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위험하기는 해도 앞으로 가서 지휘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다.
구릉이 시작되는 부분에 도착했을 무렵, 개미떼처럼 모여 있던 무사들이 비켜섰다.
아니, 비켜 서 있었다는 것이 맞았다.
지면을 밟은 순간에 누군가가 진지에서 튕겨져 나와 포물선을 그렸다.
“도대체 저기에서 무슨 일…… 거, 거도?”
구종이 누군가를 뒤따랐다.
누구나 그를 한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한다.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봤다.
원수를 보았음에도 분노는커녕 의아함만 나왔다.
“주서처어어어언!”
구종이 이름 한 자 한 자 늘어뜨려 외친다.
그 목소리에는 세상을 삼킬 듯한 증오와 분노로 가득했다.
“주서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은 아니다.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음호사궁? 죽은 게 아니었나?”
“아닙니다. 죽지 않았습니다.”
앞의 무사가 뒤돌아보면서 답했다.
“도대체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게냐?”
“폭섬사견이 음호사궁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뭐라고?”
“그리고 저기에 있는 자가……”
“……”
구종의 도가 공간을 가르며 날아온다.
주서천은 복근에 힘을 주고 검을 수직으로 추켜올렸다.
채앵!
“아으아아아악!”
구종이 목청껏 소리친다.
원수에게 제대로 된 공격 하나 하질 못했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 도합 열 번의 참격이 날아왔다.
주서천도 포효하면서 전부 막아 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 구종의 공세는 줄어들지 않는다.
후웁!
주서천이 숨을 멈추고 순간 눈을 빛낸다.
그동안 막기만 했던 검이 빈틈을 발견하고 어깨를 노렸다.
부욱!
강기가 맺힌 검이 어깨의 옷을 찢어 갈기면서 아슬아슬하게 지나간다.
피부가 갈라지면서 피가 튀었다.
휙!
구종이 몸을 빙글 돌렸다.
원심력이 담긴 도가 반원을 그렸다가 아래를 향해 방향이 직각으로 꺾었다.
도법만 놓고 보자면 형편없었다.
도법이라 할지라도 검법이나 다른 도법에 비해선 정말로 단순했다.
하지만 그만큼 그 빠르기나 위력에 전력을 쏟았고, 결국 그 도에게 공격을 일 회 허용해야만 했다.
푸화악!
좌측 어깻죽지부터 옆구리까지 일 척 길이로 선명한 칼자국이 났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장기는 피했다.
핏물이 튀면서 구종의 상체 근육을 붉게 적셨다.
“크읏!”
주서천이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냈다.
회귀 이후로 처음으로 얻은 치명상이었다.
이대로 반격하기에는 자세가 애매하다.
검으로 반격하려 해도 제대로된 공격은 하지 못할 듯했다.
그래서 다른 수단을 택했다.
주서천은 검 대신 손바닥으로 구종을 후려친 다음에 뒷걸음질 쳤다.
“쿨럭!”
구종이 곧장 따라오려다가 검은 피를 토했다.
‘됐다!’
주화입마 상태인 구종의 몸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기의 순환은 빠른 걸 넘어 폭주하듯이 맥을 헤집었다.
몇 군데는 아예 역류하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진원진기까지 끄집어내고 있으니 근원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기가 침범하게 되면 어찌 될지는 뻔하다.
해독은커녕 악화되어 망가지기 마련이다.
주서천은 혈도를 짚어 출혈을 막았다.
“간다.”
파앙!
아래에서 위를 향해 언덕을 오른다.
아니, 정확히는 도약했다는 표현이 맞다.
구종이 무언가를 느끼고 움직였다.
아직 시커먼 피가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고통 따위 옛적에 잊었다.
주화입마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화경의 고수는 원수를 죽이기 위해 집중했다.
주서천은 구종과 마주 보면서 전력을 쏟아 냈다.
‘자하개벽!’
우르릉!
벽력과 같은 고함이 터졌다.
이에 언덕 주변에서 싸우고 있던 무사들이 깜짝 놀라 비산했다.
위이이잉!
검을 앞으로 쭉 뻗는다.
직선만 그리는 게 아니다.
회오리를 보듯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쏘아졌다.
구종이 도신을 보여 검초를 막아내려 한다.
이윽고 검 끝이 도신을 후려친 순간, 강기의 폭발이 일어나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으아악!”
기의 파도가 주변을 슥 훑는다.
차 밭이 뿌리까지 뜯어지면서 날아갔다.
무사들도 바닥을 굴렀다.
‘화우선형!’
정면으로 쏠리는 힘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제이식을 날린다.
회전하던 검이 부챗살처럼 펴져 쏘아졌다.
파스스슥!
구종이 원형으로 된 막을 재빠르게 펼쳤다.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는 아니었으나, 근접한 자신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강기를 막을 수 있는 막은 하나뿐!
‘호신강기!’
그것도 몇 배나 증폭된 호신강기다.
주서천은 온 힘을 다해 내공을 끌어냈다.
정말로 오랜만에 바닥이 보일 정도로 힘을 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막을 깨뜨릴 수 없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그러자 부채꼴로 펼쳐진 강기 다발이 한데 모였다.
‘적하매장(赤霞梅藏)!’
자하검결 , 제삼식!
푸르스름했던 것이 구종의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얇은 선이 다발처럼 뻗었던 강기는 이윽고 한곳으로 모이면서 폭포처럼 적을 향해 쏟아져 내린다.
콰콰콰콰!
만년한철과 같은 절대적인 단단함을 자랑했던 호신강기에도 거북이 등껍질처럼 금이 생긴다.
쿠웅!
두 고수가 밟고 있던 지반이 움푹 주저앉았다.
자갈이 뒤섞인 모래가 폭풍우처럼 몰아쳤다.
주변에 있던 무사들 그 누구도 다가가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사를 다투던 이들은 싸우는 것도 잊은 채 초인의 싸움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하.”
철끼리 부딪치는 소리조차 묻히는 폭풍 속.
누군가의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구종이 물었다.
“화산의 검수다.”
주서천이 답했다.
“내 결국 검에 당하는구나. 원통하도다.”
구종이 눈을 감으면서 한탄했다.
“독도 있었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원수에게 눈이 멀어 그만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군. 네놈과 제대로 싸우지 못한 게 아쉽구나.”
“나도 그래.”
“내 지옥에서 아들들과 네놈을 저주하겠다.”
푸욱!
검 끝에서 살을 꿰뚫는 감각이 전해져 온다.
호신강기는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고, 그 검은 흉부 정중앙을 지나쳐 등 뒤를 뚫고 나왔다.
구종은 힘겹게 뜬 눈으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괴……물이 있으니…… 사도천은…… 망했군!”
그 말을 끝으로 구종의 눈에 있던 빛이 꺼졌다.
“……”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주서천은 구종에게서 기사분반을 회수했다.
혹시나 만약이라는 상황은 없었다.
마도팔문 폭섬도문주 거도 구종 그는 원래의 역사보다 십 년 일찍 목숨을 잃었다.
주서천은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폭섬도문주는 나, 주서천의 손에 죽었다!”
와아아!
목숨이 아깝다면 항복해라!
폭섬도문은 사도팔문인 만큼 규모가 작지 않다.
구종은 처집만 해도 열이 넘었다.
폭섬사견을 특히 아낄 뿐이지, 그들 외에 자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폭섬사견만큼 무공 등이 걸출한 인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이 사도팔문이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온갖 패악을 저지르는 철부지뿐이었다.
병남, 폭섬도문.
“뭐? 문주님이 돌아가셨다고?”
“말도 안 돼!”
폭섬도문은 어제까지만 해도 승리를 의심치 않고 구종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를 준비 중이었다.
한데 이게 대체 무슨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인가.
혹시 헛소문은 아닌지 조사해 봤으나 문주를 비롯한 아들 네 명의 사망을 목격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주녕에 세웠던 진지가 함락당하면서 패잔병들이 이곳 병남까지 퇴각.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리고 그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호 무림 곳곳에 퍼졌다.
광동, 사도천.
“허.”
사도천주가 기가 막힌 듯 코웃음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 나온 건 분노였다.
“이 미친놈들!”
묘가검문과 폭섬도문에 대한 욕이 튀어나왔다.
사도천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적이 올라온 탁자의 다리를 힘껏 후려치면서 괴성을 질러 댔다.
“누구는 흉마의 무덤 탓에 눈치 보면서 어찌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아군끼리 목에 칼을 꽂아?”
흉마의 무덤의 조사는 사실상 끝났다.
수몰이 너무 심해 어떻게 건질 것도 없었다.
하지만 다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흉마의 무덤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그 탓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으아아악!”
오늘 일로 사도천만 빼고 전부 득을 봤다.
그렇지 않아도 사파는 고수가 별로 없는 게 흠이다.
한데 훗날 전쟁이 일어나면 활약할 고수가 죽었다.
아니, 고수 외에도 양측의 피해가 워낙 컸다.
그만큼 두 문파 간의 분쟁이 상당히 길었다.
“폭섬도문은 끝이다.”
폭섬도문의 가계는 대부분이 꼴통 뿐이다.
멀쩡한 사람이라곤 문주와 무공이 뛰어난 아들 넷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름을 날린 가신들도 묘가검문에 붙잡혔다.
이제 폭섬도문을 제대로 이끌 자는 없었다.
중심을 잃었으니 무너지는 건 당연하고, 무엇보다 낭인들을 대거 고용하느라 돈도 상당히 소모했다.
원래라면 묘가검문을 쓰러뜨려 부족한 자금을 채울 생각이었지만, 완패했으니 헛된 희망으로 변했다.
“정파에서는 문파가 힘이 없으면 도태되어 천천히 몰락의 길을 걷지만, 사파에서 힘이 없으면 잡아먹히지. 폭섬도문은 주변 사파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빼앗길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 누가 폭섬도문을 대체하느냐.
대체할 곳이 없다면 앞으로의 싸움이 힘들어진다. 안 그래도 적지 않은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애초에 별 하찮은 연유로 분쟁까지 간 것이 정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자고로 사도라 하면 결국 힘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자인것을……”
사도천주가 혀를 차면서 두 문파를 욕했다.
“한데, 구종이 화경의 고수였다면 누가 그를 죽였지? 내 아까는 흥분해 보고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주서천이라는 자입니다.”
“주서천? 처음 듣는 이름이군.”
“폭섬도문이 패한 건 그자 때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원래는 묘가검문에 낭인으로 고용된 자인데, 특이하게도 활을 사용해 참전했습니다.”
“활?”
사도천주가 해괴한 걸 들었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안휘(安徽) 합비(合肥) 무림맹(武林盟).
“활?”
노인치곤 장대한 몸집을 지닌 무인이 되물었다.
“예, 맹주님.”
상천십좌(上天十座) 검성(劍成).
남궁위무(南宮威武).
대여섯 살 먹은 어린아이부터 속세와 연을 끊은 은거 기인까지.
무림에서 검성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오대세가 중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였으며 지금의 무림맹주(武林盟主)이기에.
“설마 궁술로 구종을 죽였다는 겐가?”
“그건 아닙니다.”
부군사, 지룡 제갈상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전장에 처음 나타났을 때는 귀신같은 활 솜씨로 싸워 음호사궁이라는 별호를 얻었으나, 폭섬사견과 싸울 때부터는 검으로 대응했다 합니다.”
“호오.”
“거종 역시 결국 그자의 검에 당했고, 지금은 음호사궁이 아니라 궁귀검수(弓鬼劍手)라고 불립니다.”
“자세히 말해 보게.”
남궁위무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제갈상은 개방도가 수집해 온 정보와 보고를 간추려서 설명했다.
흘려도 되는 이야기가 없어서 좋았다.
소문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별호가 바뀌었다.
“약관으로밖에 안 보였다고?”
남궁위무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그렇습니다.”
“부군사(副軍事) 생각은 어떠한가?”
“밝혀진 바에 의하면 폭섬도문주는 화경의 고수.
다수도 아니고 홀로 싸웠다 하니 궁귀검수 또한 화경일 것입니다.
아마 상승의 경지에 들어서면서 젊어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하하, 과연 군사가 추천할 만한 후계로군. 괜히 후기지수 중 지룡으로 불리는 게 아니야.”
“아직 부족합니다만, 맹주님께서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갈상이 칭찬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화경 정도 되면 확실히 젊어지긴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어린 편이니 확실히 대단하군. 아마 삼십에서 사십 사이일 걸세. 사도천주가 폭섬도문을 잃었으나, 그래도 인재를 얻었군그래.”
남궁위무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 했다.
서른에서 마흔 정도에 화경에 오를만한 무재는 정파, 아니 전 무림에서도 몇 없다.
“그에 대한 정보는 또 없는가?”
“화려하고 다채로운 변검(變劍)을 구사한다는 것밖에는 아직까지 정보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외에 사문 등에 대해서는 근거 없는 소문만 돌고 있어 파악이 어 렵습니다.”
“설마하니 이름도 파악하지 못했나?”
“다행히도 이름은 건졌습니다. 주서천이라 합니다.”
“주서천?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남궁위무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화산파에 주서천이 있습니다.”
제갈상이 수림구채를 덧붙였다.
그도 처음 궁귀검수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금세 동명이인이라 생각하면서 넘겼다.
주서천이라는 이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 데다, 비록 그가 과거에 인재였다곤 해도 폭섬도문주와 맞대결을 할 정도로의 고수는 아니었다.
의심조차도 안 갔다.
“과연, 신기한 우연이로군.”
궁귀검수 주서천은 사파의 무사로서 고용됐다.
그리고 서기관이 그 이름을 누락시켰다.
그 탓에 출신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주변에는 화산파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알아볼 고수도 없었다.
거기에 화산파의 제자가 활을 쏜다는 건 들어 본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사파의 고수, 궁귀검수의 탄생 비화였다.
* * *
묘가검문은 전투 이후 승리의 일등공신인 궁귀검수부터 찾았다.
그만한 고수가 낭인으로 고용됐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포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서천을 찾아 나섰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가 기사분반을 얻자마자 남창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뒤늦게 그가 속해 있던 백인대에 물어보고, 사람을 풀어 조사해 봤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한편, 남창으로 향하는 주서천은 손에 쥔 기사분반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어이없어하는 중이었다.
“폭섬도문도 참 알다가도 모를 놈들이군. 사문의 무공을 최고라고 믿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이런 법보를 그저 장식으로밖에 쓰지 않다니 말이야.”
도가 제일이라고 떠들어 댄 건 구종뿐만이 아니다.
폭섬도문 역대 문주 외에도 문도들 전부 그랬다.
동시에 타 무공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법보가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도법 외에는 관심도 없었다.
관심이 점차 줄어들자, 세월이 흐르면서 어이없게도 기사분반조차 점차 잊혀졌다.
“전생에서도 이 법보 탓에 목숨을 잃었었지.”
폭섬도문은 정사대전이 끝날 무렵 멸문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기사분반을 노린 암천회 탓이었다.
암천회는 법보에도 관심을 보였고, 조사 도중에 기사분반의 정보를 얻어 구종을 찾아가 살해한다.
현생에서도 그랬지만, 전생에서도 폭섬도문은 기사분반을 끝까지 사용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도법이 최고라는 자부심은 지고의 보물보다도 중요했던 것일까?’
도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마치 정파와도 같았다.
원래 사파란 게 수단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검이건 도건 살아남는 걸 우선으로 삼았다.
괜히 정파와 마찰을 빛는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파치고는 정말로 보기 드문 문파였다.
“그들과 함께하기에는 성향이 너무 과해.”
폭섬도문은 전생에서도 문제였다.
도에 대한 자부심이나 고집이 워낙강했던 탓에, 사파는 당연하고 정파의 문파 모두 싸잡아 욕했다.
심지어 같은 도법을 쓰는 하북팽가에게 정파의 도법은 형편없다고 욕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이런, 독봉과 검마가 기다리느라 목 빠지겠군. 하루라도 빨리 가야겠어.”
남창.
맥을 짚자마자 새로운 감각이 느껴진다.
정말로 사고가 둘로 나뉜 듯, 한 몸에 두 사람분의 영혼이 들어간 것처럼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 기분에 빠져들 듯했으나, 본래의 목적을 상기하곤 거기에 집중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깊숙하게 파고드니 독기가 겨우 느껴졌다.
십사 년이란 시간 동안 숨어 있던 독이다.
해독도 하지 않은 채 기맥에 완전히 달라붙었으니 몸이 이상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당혜는 기사분반의 힘을 빌려, 독기를 얇게 떠서 겨우겨우 분리시켰다.
이 간단한 행동조차 한나절 이상이 걸렸다.
당혜 정도 되는 독공의 고수가 아니라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 후우.”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각.
당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었다.
“따, 딸은 어떻게 됐는가?”
끝나기 무섭게 뒤에 서 있던 무곡이 물었다.
해독을 시작한 뒤로 당혜의 수발을 들어 주면서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
“무사히 성공했어요.”
“그게 정말인가……!”
“네. 그녀에게 숨어 었던 독기를 전부 빼내서 제가 받아들였어요.”
“넌 괜찮은 거야?”
주서천이 물었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지 벌써 잊어버린 모양인데, 구멍 뚫린 뇌를 가까운 시일 내에 치료하는 게 좋을걸. 독이란 건 곧 나에게 힘이고 내공이란다.”
순도도 제법 괜찮아 얻은 내공이 기대 이상이었다.
당혜의 시선이 다시 검마로 향했다.
“독은 전부 제거했지만, 그만큼 몸이 약해져 있으니 당분간 조심하는게 좋아요. 영약을 복용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그렇다고 갑자기 무식하게 정말 좋은 걸 주지는 말고, 약한 것부터 복용시키세요. 그리고.전 의학을 전부 아는 건 아니니까, 가까운 시일 내로 의원을 불러 꼭 진찰해 보도록 하세요.”
검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당혜의 말을 명심했다.
그 눈에는 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아버……님……?”
“선화야!”
쥐어짜 내듯이 흘러나온 목소리에, 검마가 벌떡 일어나서 누워 있는 딸에게 다가갔다.
혹시라도 딸이 잘못되진 않을까 만져 보지는 못하고 그저 내려다보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과하지 않으면 포옹해도 괜찮아요.”
“끄흐흑……!”
훗날, 전 무림을 공포에 빠뜨렸던 검의 마귀.
그저 아비일 뿐인 그는 딸을 안은 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 울음소리에 무선화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등을 토닥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