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음사움생(飮死飮生)
옛말에 적의 송곳니를 뽑고 싸우라는 말이 있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먼저 적이 승리할 수 없도록 만들고, 적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적이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곧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적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우선 송곳니, 아니 오른팔부터 잘라 볼까.”
주서천은 산동을 떠났다.
그 목적지는 사천이었다.
손자가 말했던 것처럼, 그동안 암천회가 이길 수 없도록 전력을 줄이거나 없앴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그 연장선이었다.
“개양(開陽) , 검마!’
암천회주 산하에는 여덟 기관이 있다.
도감부와 칠성사다.
그리고 그들의 서열은 서로 엇비슷했다.
다만 이 여덟 명 중에서도 강호무림에서 특히 이름이 알려진 자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검마이다.
검마는 칠성사 중에서도 무공만으로 최고에 꼽혔다.
암천회주 다음으로 강한 자가 바로 검마다.
암천회가 모습을 드러낸 이후 상천십좌 중 일좌가 정면 승부로 당했고, 그 자리를 검마가 차지했다.
그 검마를 암천회주에게서 떨어뜨려야만 했다.
사천, 당가.
중천에 뜬 태양이 대지를 뜨겁게 달궜다.
선선하게 불던 바람조차 뜨겁다.
그 열기는 사람에게 옮겨졌다.
“주서천.”
눈앞에 가시, 아니 독을 품은 여인이 있었다.
“오랜만이오, 당 소저.”
주서천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손 안에 쥐어진 차를 내려다봤다.
차 치고는 색깔이 거무튀튀하다.
“이건…… .”
주서천이 킁킁, 하고 차 향을 맡아봤다.
“독 차.”
당혜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장단독(腸斷毒)을 넣어 둬서, 마시면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맛보게 될 거란다. 마셔 봐.”
살며시 웃는 얼굴이 또 무섭다.
성격이 그냥 더러운 게 아니다.
“성대하게 환영해 줘서 고맙다. 이건 전의 일에 대한 복수인가?”
“그럴 리가. 인사한 거야.”
“사천당가에서 인사로 독이 든 차를 내주는 건 난생 처음으로 듣는데?”
“당신이 아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건 굉장한 오만이야. 세상에는 당신이 모르는 것이 모래알처럼 많다는 걸 명심하도록 해.”
“응, 아니야.”
그 누구도, 어떠한 단체도 접객실에서 독 차를 내주고 어떠한 독이 포함되어 있는지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나저나, 산동에서 사천까지는 무슨 일?”
“……호오.”
주서천이 작게 감탄했다.
그 눈에는 자신이 어떻게 산동에서 온 것인지 묻는 눈초리가 담겨 있었다.
그러자 당혜는 긴 소매로 입가를 가리고는 눈을 초승달처럼 휘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반년 동안 당신의 모든 행적을 좇은 건 아니지만, 대강은 알고 있어. 제갈세가의 그 괴인을 데리고 산동까지 가서 금의상단에서 머무르고 있다지?”
지금까지의 행적을 딱히 숨긴 적은 없다.
눈치를 보아하니 서역의 일은 모르는 것 같은데, 아무리 사천당가의 정보력이라 하여도 중원 바깥의 일까지 조사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게 서역의 변방인 대설산이면 더더욱 그렇다.
“그동안 날……”
“설마하니 주서천,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동안 조사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당장 장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 게 좋을 거야. 그건 매우 불쾌한 착각이거든.”
“뭔 말을 못 하겠군. 성격 참 안 좋네.”
주서천이 당혜의 성격에 기가 막혀 했다.
도저히 정상으로 볼 수 없는 성질머리였다.
“……”
당혜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동자 안에서 살의가 용암처럼 들끓었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살초를 날릴 기세였다.
“노려보지는 마. 이래 봬도 설욕전을 할 기회를 주려 온 거니까.”
“누가 누구에게 기회를 준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설욕전?”
“그래. ‘내기’다.”
당혜의 눈썹이 움찔하고 떨었다.
‘주서천!’
당혜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가슴 깊숙한 곳에 새겨진 치욕이 벌어지면서 복수심을 불러들였다.
그때의 일을 어떻게 잊겠는가!
요 반년 동안 결코 잊은 적이 없다.
가끔 생각이 나면 그 날은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독봉의 이름이 떨어졌다.
한 번의 패배는 수많은 벌레들을 불러들였다.
그로 인해 귀찮아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전에 봤던 명검.”
주서천이 탁자 위에 예한을 올려 뒀다.
“그리고……”
곧장 전표(錢票)가 올라왔다.
“금으로 천 냥……”
당혜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오대세가인 당가라도 금자 천 냥은 결코 적지 않다.
무엇보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명검까지 있다.
“……뭘 원해?”
“독봉……”
파바밧!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혜의 소맷자락이 부풀어 오르면서 비수가 튀어나왔다.
칼날의 색이 검다.
주서천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비수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며 등 뒤의 벽에 꽂혔다.
“……의 독공이다.”
“지식?”
“그래. 그것도 해독(解毒).”
“제대로 찾아왔네.”
당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언뜻 볼 수 있었다.
“어떤 것으로 승부할지는 마음대로 고르도록 해.”
“도발에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면 크나큰 착각이야.
설마하니 욱해서 당신에게 먼저 결정하라고 말하리라 예상하는 머저리는 아닐 거라고 믿을게.”
“아무렇지 않게 심한 소리를 하는군!”
* * *
“대낮부터 소란이더구나.”
당가의 가주, 당유기(唐有奇)가 굽힌 허리를 약간 폈다.
그래도 작은 편이라 커 보이지는 않았다.
그 얼굴은 몇 날 며칠을 자지 못한 듯 초췌했고, 눈 밑에는 검은 기미가 꼈다.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다.
체구가 전체적으로 왜소한 편이었다.
노인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중년이다.
무림인치곤 드문 현상이다.
보통 무인은 늘어나는 내공 덕에 노화가 느리다.
고수들은 더더욱 그렇다.
“주서천이 와 있습니다, 가주.”
과연 당유기가 수긍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안 드신다면 쫓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됐다. 어차피 곧 있으면 못 누릴 여흥이지 않느냐.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주도록 해라.”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주, 또 말씀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무엇인가?”
“혜 아가씨께서 주점(酒店)의 개점(開店)을 요청했습니다.”
가신이 당유기의 눈치를 봤다.
“송장이라도 치울 생각인가……”
당유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주서천은 어떠한 내기에도 응한다고 했는가?”
“예.”
“그렇다면 절차에 맞게 서약서를 받아 내고, 증인들을 확보한 뒤에 진행하게나.”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당가에서 주서천은 나름대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패의 신화를 알리던 독봉에게 패배를 안겨 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더더욱 놀라운 건 이기고도 혼인을 요구하지 않은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소협, 소협의 시중을 들 청청(淸淸)이라고 하옵니다.”
방문을 열자 과년(瓜年 : 16세)의 하녀가 인사했다.
“잘 부탁한다.”
“일단 차 한 잔 드시지요.”
청청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따라 건네줬다.
주서천이 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그래. 넌 차에 어떤 독을 탄 거니?”
“도, 독이라니요! 제, 계가 어찌 감히……!”
청청의 낯빛이 이름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사천당가의 손님, 그것도 화산파 출신에게 하녀가 독 차를 내주었다간 단순한 문책으로 안 끝난다.
“그렇지?”
대체 누가 손님에게 독 차를 건네는가.
“그나저나, 벌써 나흘이 지났는데……”
“아, 네에. 그렇지 않아도 오늘 손님께 안내해 드리려고 온 참이었습니다. 당가의 주점이 열리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인지라 준비에 시일이 걸렸습니다.”
“당가의 주점?”
“가 보면 알게 될 터이니 따라만 오시오.”
뒤편에 서 있던 당가의 무사가 대신 답했다.
다만 쳐다보는 눈초리가 결코 좋지만은 않았다.
‘네놈이 아가씨께 무슨 수로 이긴 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처럼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미(美)라는 건 가끔 어떠한 성질을 갖고 있건 간에 무시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당혜만 봐도 알아볼 수 있듯이, 입이 좀 험한 편임에도 그녀를 따르고 찬양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세가, 아니 사천을 넘어 중원 전역을 아우르는 그 미색에 함락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 탓인지 주서천은 당혜의 관심을 독차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질투를 받아야만 했다.
“날 쳐다보는 눈초리가 따갑군. 이것이 영웅을 향한 선망 어린 시선이라는 건가……”
아니다.
“좋아, 가자. 청청아. 안내해 줘라.”
“저 무사에게 안내를 받으면 독침 맞을 것 같아서 싫구나.”
“네 이놈! 당가의 무사를 어찌 취급하고!”
무사가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사나운 기세가 폭풍우처럼 몰아쳤다.
주서천은 벌벌 떠는 청청의 어깨를 가벼이 두들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 떨림이 멈추었다.
“어라……?”
“자, 얼른 안내해 주거라. 늦는다면 네 성질 나쁜 주인이 네가 밥 먹는 사이에 독을 탈지도 모르니.”
“네 이놈! 어디까지 아가씨를 모욕할 셈이냐!”
탓!
무사가 화를 참지 못하고 몸을 날리려 했다.
“그만.”
하나 그 순간, 소름 끼칠 정도로 섬뜩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어 몸 전체를 마비시켰다.
‘허억!’
용암처럼 들끓던 분노는 차갑게 가라앉은 것을 넘어서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 대신 마른 사막처럼 삭막한 공기가 자리 잡았고, 육신의 신경 전부를 빼앗은 공포가 감돌았다.
“네 충성심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가주님께서도 기다리신다.”
“자, 장로님! 죄, 죄송합니다!”
당가의 무사가 부복하여 사죄했다.
“……”
장로라 불린 노인은 주서천을 아래 위로 훑어봤다.
‘방금 전 무사가 방출한 기세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냈을 뿐만 아니라 하녀에게 쏠린 것 역시 차단했다.’
주름 가득한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세심한 조절은 쉽지 않아. 과연, 아가씨를 이긴 것이 단순히 요령만은 아니라는 것인가.’
실제로 보니 세간의 평이 과소 평가된 듯했다.
장로는 시선을 다시 돌려 청청을 바라봤다.
“난 먼저 갈 데니 그를 안내하여라.”
“네, 네. 알겠습니다!”
청청이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장로는 볼일 다 봤다는 듯, 획 하고 등을 돌리고 뒷짐을 쥔 채 앞으로 걸었다.
“소협, 함께 가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방금 전 당가의 무사가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무시하고 청청과 함께 걸었다.
전에 방문했을 때도 느꼈지만, 무림 명가의 하녀라서 그런지 소녀임에도 발걸음이 범상치 않았다.
무인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절도 있게 딱딱 맞춘 느낌이다.
“당가의 주점이라…… 그게 뭐였더라……”
떠올릴 듯 말 듯해 괜히 신경 쓰였다.
뇌를 간질간질거리는 감각이 거슬렸다.
“아, 소협께서만 괜찮다면 소녀가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함께 걷던 청청이 중얼거림을 듣고 반응했다.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미리 들어서 나쁠 건 없지. 부탁하마.”
“세가 내부에 있는 주점입니다만, 평시에는 폐점되어 있습니다. 이 주점이 개점하는 경우는 오로지 두 가지 경우밖에 없는데, 하나가 귀빈을 맞이할 때이고……”
“그리고?”
“복수할 때입니다.”
“그게 무슨 소……”
주서천의 그다음 말은 묻혔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음사(飮死)!” 마시고 죽거나!
“음생(飮生)!” 마시고 살거나!
그곳은 주점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기이한 곳이었다.
오히려 비무장이라고 하는 게 올바르다.
사천당가의 이름 넉 자가 새겨진 육중한 문이 열리면 그 안으로는 비무대처럼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 보였다.
사방위로는 사천당가의 무사로 보이는 자가 서 있었고 그 뒤로는 술병이 전시된 탁자가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더더욱 기이한 건, 의자들이 마치 관중석처럼 삼 장 바깥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뭔……”
천하의 주서천도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가, 이윽고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탕가의 주점! 이제야 생각났다!’
사천당가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말 중, 강호에도 알려진 것이 있다.
원수포말추(怨辯通末追).
원수가 도망친다면, 끝까지 쫓아라.
혹실척수이(或失威囚個).
혹 놓친다면 그 친척을 인질로 미끼 삼고.
수무생제유(囚無生阮誘).
인질이 마땅치 않다면, 살 기회로 꾀어내라.
당가지수 불구대천(唐家之區 不偵戴天).
당가의 원수와는 하늘을 같이 이고 있을 수 없다.
“내기는 간단해.”
주점의 정중앙, 당혜가 말했다.
“마시고 죽거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술병이 들려 있었다.
“아니면 살거나.”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주점 안을 가득 채운다.
“와아아아아!”
“독봉! 독봉! 독봉!”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당가의 주점은 수무생제유를 통해 만들어졌다.
술을 마셔서 산다면 원한을 청산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죽는다.
실로 간단하고 탁월한 복수 방법이었다.
참고로 원수가 아니라 귀빈일 경우에는 좀 더 안쪽에 준비된 주점으로 안내받는다.
이런 요란한 소란도 없다.
“승낙한다면 그곳에 서명하도록 해.”
당혜가 문 바로 앞 탁자를 가리켰다.
그 위에 종이와 먹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확인해 보니 술을 마신 뒤로는 내상을 입건 심지어 사망하건 간에 사천당가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사항이 있었다.
“……허어”
서약서에 표기된 항목을 읽어 내리던 도중 어떠한 항목이 눈을 사로잡았다.
사실상 이게 제일 중요하다.
“독주(毒酒)라고?”
무림인은 술을 마셔도 내공으로 취기를 없앨 수 있다.
원수를 그리 쉽게 용서할 리는 없으니, 처음에는 내공으로 주독(酒毒)을 해독하지 않고 마시는 것이 조건인 줄 알았는데 추측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마셔서 죽거나, 살거나인가……”
“그래.”
당혜가 주서천의 중얼거림을 듣고 곧장답했다.
“그러나 당신은 세가의 원수는 아니니 죽을 일은 없을 거야.”
당혜는 몹시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주량전이 즉시 정지되며, 독공의 대가이신 가주님이나 장로님이 나서서 해독해 주셔. 서약서에도 표기했으니 확인해 봐.”
“과연.”
“그렇다고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스스로 해독하지 않으려 하면 해독하려고 나서기도 전에 죽을 테니까.”
“알았다. 받아들이지.”
주서천이 고민하지 않고 서명했다.
“멍청한 놈!”
“아가씨께서 제조한 술을 뭘로 보고!”
“쯧쯧쯧!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구먼!”
관중들은 주서천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서명하는 걸 보고 혀를 차며 불쌍히 여기거나 비웃었다.
독봉이란 별호는 결코 아름다움으로 따낸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이십 대 최강의 무인에게만 주어진다.
“배짱이 큰 건지, 아니면 어리석은건지…… 홀홀.”
장로, 당염(唐廉)이 의미 모를 웃음소리를 흘렸다.
“누가 봐도 첫 잔에 고꾸라질 것 같은데 내가 굳이 여기에 있을 필요가 있소?”
그 옆자리, 당유기가 탐탁지 않은듯 물었다.
세가 제일의 고수는 가주, 당유기다.
그만큼 어떠한 독이건 간에 누구보다 빠르고 효과 있게 해독할 수 있어 만약을 위해 참석했다.
하나 그가 나설 정도면 석 잔부터다.
한 잔에서 두 잔 정도면 장로들 수준에서도 해독할 수 있다.
“사람 일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긴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니 지켜보시지요. 어쩌면 예상외의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뭐, 장로께서 그리 말하신다면……”
당유기가 별수 없다는 듯이 뒷말을 삼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과.달리 여전히 불만으로 가득하다.
시끄럽게 떠들던 관중석은 가주가 일어나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요해졌다.
“이 시간부로 장본인들과 몇몇 허락된 인원을 제외하고 이동을 금한다.”
당유기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규칙은 화산파의 주서천이 독봉, 당혜가 제조한 술을 총 석 잔 마셔, 한 잔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제창해야 한다.
만약 말을 하지 못하거나, 얼굴색이 변했다가 일정 시간 내에 돌아오지 않을 경우 해독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패배로 간주한다.”
‘저 노인이 독왕(靑王), 당유기인가.’
천하백대고수, 독왕 당유기!
백대고수 내에서도 중상위권에 속한다는 것 말고는 잘 모른다.
전생에서도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전란의 시대에서도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고 세가 내에서 바깥을 지휘하며 지내다가 자연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저렇게 늙었던가?’
다만 의아한 것이 연령대였다.
‘장남도 삼십이 안 되는 걸로 알고있는데 ……’
분명 오십 대 중반에서 육십 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무림인이 노화가 늦는 걸 감안하면 이상했다.
정보가 잘못되었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을 석 잔 마실 경우 협조하에 서로 간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한다. 증인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될 것이고, 서약서가 증거로 남을 것이다. 중거는 향후 조작을 방지하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각자 원하는 장소로 보낸다.”
사천당가의 주점은 상당히 체계화 되어 있다.
원수를 안심하게 만들고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주서천의 서약서는 산동의 금의상단으로 전서응을 통해 보내졌다.
당혜의 서약서는 세가에 남는다.
“그럼, 독봉 당혜는 준비된 술을 내라.”
“알겠습니다.”
당혜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치 이 복수를 위해 삼십 년 동안 준비했다는 듯한 기세였다.
그녀는 등을 돌려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골랐다.
오늘을 위해 미리 제조해 두었기에 주저함은 없었다.
첫 잔부터 막 잔까지 무엇을 할지 결정해 뒀다.
그 외의 술잔이나 나무통들은 혹시 모를 변심을 위해 준비한 것일 뿐이었다.
당혜는 며칠 전부터 준비한 술병을 집고 원래 자리로 되돌아와 앉았다.
“주서천, 술은 좋아해?”
당혜가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웃는다.
그 모습 자체가 워낙 매혹적이었는지라 관중들이 침을 삼켰다.
가시, 아니 독을 품었으나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미색이다.
벼랑 위에 있는 꽃일수록 눈에 띈다고 하였는가.
여태껏 누구도 넘보지 못하고, 중독될 것이 두려워 다가가지 못한 꽃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매 사이로 보이는 그 눈동자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 것만 같다.
“지금 도사보고 술을 좋아하냐고 묻는 건가?”
주서천이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화산파에서 금주(禁酒)는 없다.
하지만 과주(過酒)는 금하고 있다.
사고만 치지 않으면 된다는 의미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참을 수 있으니까.”
당혜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위험해 보였다.
“당신이 최대한 버틸 수 있도록, 나름대로 이름나고 좋은 술을 준비했어. 술을 좋아한다면 아까워서 뱉거나 토하지 않을 거야. 그러면 좋겠네.”
확실히 애주가라면 독이 섞여 있을 지라도 마실지 모른다.
당혜는 그런 일을 상정했다.
“허, 참.”
주서천이 혀를 찼다.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도저히 잊을 수 없어 한동안 술을 달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이후로도 전란의 시대를 살아가며 술을 자주 입에 달고 산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싸구려거나 거기에서 조금 벗어난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명주라 불릴 만큼의 술은 마셔 본 적이 없다.
“뭐, 그래 봤자……”
당혜가 말꼬리를 흐리면서 술병의 입구를 연다.
“호오!”
열자마자 관중 중 몇몇이 탄성을 내지른다.
다들 냄새만 맡았는데도.어떤 술인지 알아챈 눈치였다.
쪼르륵.
독을 품은 봉황이 술병을 기울이자, 투명한 술이 떨어져 내리며 빈잔을 딱 알맞게 채웠다.
살짝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데도 짙은 향이 맡아졌다.
바람이 없는데도 관중들에게까지 퍼졌다.
“십오 년 정도 묵혀 둔 오량주(五槿酒)를 맛보는 건 흔치 않은 기회이니 감사하도록 해.”
오량주라 하면 사천성의 명주로 알려진 백주(白酒)다.
주서천도 주워들은 적 있었다.
거기에 십오 년이라 하였으니 , 일단 쉽게 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가격으로 환산하면 꽤 된다.
“다만, 이 오량주는 금선사(金線蛇)의 독을 혼합해 두어서 그 맛이 조금은 화끈할지도 모르겠네.”
“금선사!”
술에 집중하고 있던 관중들이 대경했다.
“과연, 독봉!”
“금선사의 독을 아무렇지 않게 다루다니……”
“괜히 오룡삼봉이 아니로군.”
“혜 아가씨의 독공이 소가주와 견주어도 전혀 지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그게 진짜였구나.”
“아가씨께서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태어났다면 ……”
금선사는 이름 그대로 몸통에 금선이 그어진 독사로, 중원이 아닌 남만의 밀림에서 서식한다.
그 맹독이 중원의 독사들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대단하여 사천당가의 독인들도 다루기 힘들어한다.
“아가씨께서 봐주실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야.”
“석 잔? 한 잔에 끝나겠군.”
“실로 오랜만에 열린 당가의 주점이거늘, 이리도 허무하게 끝난다니!”
관중 모두 끝났다는 분위기였다.
몇몇은 실망하거나 아쉬워했다.
주변의 이목을 독차지하면서 당혜에게 술잔을 건네받았다.
내려다보니 금색이 옅게 감도는 백주였다.
숨을 들이쉬지 않아도 진한 향이 코를 찌른다.
술에 대하여 문외한일지라도 귀한 술이라 알 정도였다.
“시간에 제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중에 마신다고 독이 약해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이런 좋은 술을 내주다니, 그렇게까지 성질이 뒤틀려 있지는 않군. 다행이야.”
주서천이 당혜의 말을 도중에 끊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술이 목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꿀꺽!
“좀 맵네!”
주서천이 술잔을 비웠다는 걸 증명하듯, 빈 잔을 머리에 턴다.
술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
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했던 관중은 없었다.
소란 대신에 침묵으로 가득했다.
하나같이 제 눈을 의심했다.
장로 당염에게 나가 보라고 명하려던 당유기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시자마자 입을 열어?’
술과 섞었다고 독이 순화하는 건 아니다.
금선사 독을 스스로 마신 것과 같다.
왠만한 독인도 해독하려면 입을 다물고 최소 반 각은 되어야 한다.
그 만큼의 극독인데 그걸 마시고는 곧장 말했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극독을 해독하려면 고도의 집중과 내공의 운용이 필요하거늘, 자칫 잘못했다간 주화입마뿐만 아니라 독의 해독에 영구히 실패하여 최악으로 치닫는다.
“두 잔째는 아직인가?”
좌중의 모든 사람이 충격에 빠져 말을 잇지 못할 때, 그 침묵과 고요를 먼저 깬 건 주서천이었다.
“주서처어어언 ……!”
쨍그랑!
당혜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술병이 산산조각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