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제갈세가(諸葛世家)
“승계에게 손님이 찾아와?”
현(現)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운은 아들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 소식에 의문을 표했다.
“혹시 세가를 노린 사기꾼은 아닌가?”
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제갈승계는 부모로서, 한 사람의 무림인으로서 봐도 썩 믿음직하거나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그래도 제갈세가의 핏줄답게 머리가 안 좋은 건 아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세가 내에서는 누구나 알다시피 기관지술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다른 건 결코 배우지 않으려는 점이었다.
기문 진법은 물론이고 전술 같은 것에도 흥미를 도통 보이지 않고, 무공도 마찬가지였다.
그 태도는 육 년 전 수림구채에 의하여 행방불명되고 일 년 만에 생환했는데도 변하지 않았다.
제갈운도 그런 제갈승계를 일찍이 포기했다.
입 아프게 말하고 혼내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해 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형이나 누나와 다르게 잘난 점도 없고, 이상한 것에만 집중하는 아이에게 뭘 얻겠다고 접근하겠는가.
있어 봤자 제갈세가라는 오대세가의 이름 정도다.
다행히 항상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사람 만날 일도 적으니 그런 자들도 정말 없다시피 했다.
“화산파의 주서천이라고 합니다.”
“주서천?”
제갈운이 흠,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과연, 독봉과의 내기에 승리했다는 그 청년인가.”
최근에 들었던 일부터 떠올렸다.
“그리고 육 년 전에 승계와 함께 행방불명되었다가 생환했던 친분이 있었지. 호북에 온 겸 만나러 온 건가.”
제갈운의 신경은 금세 사그라졌다.
“혼자서 온 겐가?”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수선행 중인가 본데, 보통은 동문의 사형제와 행동하거늘…… 그 아이도 꽤나 괴팍한 부류인가 보구나.”
제갈운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말 을 삼켰다.
“한데, 가주님. 아무래도 주서천이 단순히 공자님을 만나러 온 것만은 또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갈운의 고개가 다시 옆으로 기울어졌다.
* * *
세가 내에 마련된 산책로를 걷고있던 도중이었다.
“육 년 만이군요, 공자.”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심장에 안 좋군.’
몸을 돌리자마자 하마터면 헉 소리를 낼 뻔했다.
잔잔한 호수를 연상시키는 차분한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색을 겸비한 숙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주서천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제갈승계의 누님이자 훗날 모사미봉이라 불릴 제갈수란이란 걸 알아봤다.
평소였다면 그 미모에 넋을 잃었을 지도 모르겠으나, 동생 앞에서 대놓고 누님의 미모에 침을 흘렸다는 평은 피하고 싶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모사미봉도 탐나는 인재인 것은 분명하나, 어차피 훗날 정파 무림을 위해서 일해 줄 것이니 상관없다.
자기편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정파의 편이니까.
“아, 제갈 소저가 아니십니까. 육 년 만에 뵙습니다.”
주서천이 반가워하면서 인사했다.
‘미모에 대한 칭찬은 질리도록 들었을테니 자제하도록 하자.’
괜히 안 좋은 인상을 새기는 곳보다 차라리 아예 기억을 못하도록 하는 게 좋았다.
어차피 나중에 제갈수란의 힘이 필요하다면 제갈승계를 통해서 어떻게든 하면 된다.
“……”
그리고 그 행동은 제갈수란의 흥미를 끌었다.
대문파건 중소 문파건 양갓집 자제건 간에 남자라면 나이를 불문하고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어리거나 동년배들은 넋을 잃거나 얼굴을 붉히곤 천천히 정신을 차리면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혼례를 올리지 않은 중년들도 불쾌한 시선으로 훑어보면서 은근한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주서천은 어떠한 경우도 아니었다.
넋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눈을 똑바로 마주 본 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충분히 신선한 반응이었다.
“네, 육 년 만이네요.”
육 년 전, 그때 봤을 때도 평범한 남아는 아니었다.
“소가주께서도 계십니까? 그렇다면 인사라도 드리고 싶군요.”
“오라비께서는 안휘의 무림맹에 가신 지 제법 오래되었어요. 세가에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돌아오신 답니다.”
“그렇군요. 듣자 하니 소가주께서 벌써 무림맹 군사로서 추천받고 있다는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소가주, 제갈상은 수림구채 사건 이후 세가의 보호를 받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강호로 출두했다.
이후 여러 정파인과 임무를 수행하며 공을 세우고 이를 인정받아 무림맹 본부로 파견됐다.
“괜히 오룡삼봉 중 지룡(知龍)이라 불리는 게 아니지요.”
참고로 오룡삼봉이 된 건 일찍이 강호에 출두할 때 즈음이다.
약관에 곧바로 일룡이 되는 쾌거를 이뤘다.
제갈수란은 대답 대신에 머리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오라비에 대한 칭찬은 수백 번도 더 들었다.
주서천도 그걸 알기에 예의상 한두 번 했을 뿐,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제갈수란은 고개를 느릿하게 움직여 어깨를 움츠리고 자신감 없는 모습을 한 남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세가를 나가 강호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오는 길이란다.”
“……”
제갈승계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님은 그런 남동생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그건 누구의 의지니?”
“……”
제갈승계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누님과 대화한 지가 제법 오래되었던 탓이다.
제갈수란은 제갈상과 이복남매이긴 하지만, 첩의 자식은 아니다.
제갈운은 두 명의 아내와 한 명의 첩을 두었는데, 그중 첩의 자식은 제갈승계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갈수란이나 제갈상이 제갈승계를 첩의 아들이라면서 차별하지는 않았다.
뭘 모르는 어린아이 때도 마찬가지다.
어른들 몰래 괴롭힌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제갈승계의 성격이 내성적이다 보니 방 안에서 잘 나오질 않아 가족조차 어색하고 어려워했다.
어릴 적부터 천재인 형과 누님에게 비교당하니 더더욱 그랬다.
두 사람 앞에선 한없이 작아졌다.
“아니면…… 주 공자의 의지니?”
제갈수란이 다시 묻는다.
그 시선은 여전히 남동생에게 고정한 상태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갈승계는 누님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누님의 눈동자는 절벽 위의 만년거암을 보는 듯했다.
벼랑 끝에 있어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는 고고함과 더불어 위험천만한 곳에 있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지녔다.
흥미 어린 것도 아니었고, 모멸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텅빈 것도 아니다.
그저, 잔잔한 호수처럼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남동생을 비추면서 바라보기만 한다.
제갈수란은 제갈승계의 대답을 기다릴 뿐, 재촉하지도 그렇다고 되묻지도 않았다.
“……후우”
제갈승계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허리를 곧추세우거나 가슴을 활짝 펴지는 않았다.
어깨도 여전히 움츠려 있었고 당당함은 없었다.
그러나 그 눈만큼은 기관지술을 공부하는 것처럼 올곧게 빛나면서 그녀의 눈과 똑바로 마주했다.
“저의 의지입니다.”
제갈승계가 말했다.
“……”
제갈수란이 남동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느릿하게 위아래로 흔들어 살며시 웃었다.
“아버님께서 네 요청을 검토하시는 중이란다.
아마 대문파와의 연을 쌓을 좋은 기회라 생각하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어떠한 호위 무사를 붙여 줄지 고민 중이시니 곧 결과가 나올 거야.”
제갈승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 앞에서 제갈수란이 이렇게 길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대화 자체가 손꼽힐 정도로 적지만.
“그럼, 편히 쉬다 가세요. 주 공자.”
제갈수란은 볼일을 끝냈다는 듯 몸을 돌렸다.
제갈승계는 제갈수란의 떠나가는 뒷모습을 살펴보다가, 가슴을 쓸어넘기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하하.”
주서천이 웃으면서 제갈승계의 등을 토닥여 줬다.
“설마하니 정말로 형님 말대로 될 줄은 몰랐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제갈승계가 의아한 눈초리로 주서천을 쳐다봤다.
불과 하루 전, 제갈승계는 주서천이 제안한 강호 출두 제안을 고민하지 않고 승낙했다.
쓸모없는 자신을 필요로 하고, 또 기관지술에 대한 공부와 지원을 무한으로 약조해 줬다.
거절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기관지술에 대한 인식이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세가에서는 여전히 천시하는 편에 속했다.
기관지술을 공부하다 보면 기관을 만들어 이를 시험해 봐야 하는데, 이게 생각 이상으로 돈이 소모됐다.
한두 푼 수준이 아닌지라 용돈으로는 현저히 부족했고, 지원을 요청하면 그런 곳에 쓸 수 없다면서 거절당했다.
이 탓에 아쉬운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주서천이 그걸 대신 해결해 준다고하니 그의 입장에서는 거절하기는커녕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
다만 세가에서 허락할지가 걱정이었다.
이에 주서천은 고민을 듣고 걱정할 필요 없다면서, 나가고 싶다는 의지만 잘 표현하라고 조언해 줬다.
또한 제갈수란이나 혹은 제갈운이 찾아올지도 모르니 마음을 단단히 잡는 편이 좋을 거라고 덧붙였다.
설마 했는데 그 예언은 곧 현실이 됐다.
그 덕분에 눈을 마주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설사 세가에서 너를 등한시한다 할지라도,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다. 최소한의 걱정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누군가는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지.”
정말로 망종이 아닌 이상 핏줄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크든 작든 걱정을 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망나니라고 해도 그놈의 핏줄 탓에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한다.
그게 혈육이었다.
‘가주인 제갈운은 잘 몰랐지만, 제갈상이나 제갈수란이 있다면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미래이자 과거.
전생의 미래에서 만각이천 제갈승계는 온갖 이용만 당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당시 제갈세가는 천재를 그냥 내버려 뒀다며 수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제갈상과 제갈수란은 예외였다.
그 둘은 각각 군사와 같은 요직에 앉기 전에는 세가에 머물면서 제갈승계를 종종 챙겨 줬다고 한다.
물론 그의 천재성과 기관지술의 중요성을 알아주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최소한의 보호는 해 주었다.
실제로 지금도 종종 세가의 어른들이 너무 오냐오냐하지 말라며 뭐라 할 정도였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제갈상도 제갈수란도 남동생의 천재성을 알아주지 못했다고 자책했다고 한다.
한 사람만이 아니라 세 사람 전부 희대의 천재이다 보니 그들에 대한 일화가 상당해 기억할 수 있었다.
“자, 그럼 확신도 받았으니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도록 짐이나 싸도록 하자고.”
제갈운이 가신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제갈승계의 강호 출두에 대해서였다.
가신들은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입을 모아 괜찮다는 반응만 보였다.
세가 내에서 제갈승계에 대한 취급이 어떤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호위 무사를 붙이는 것을 조건으로 강호 출두를 허가하는 걸로 만장일치가 나왔다.
그래도 제갈세가의 핏줄이라고 절정 중에서도 초절정을 코 앞에 둔 고수를 호위 무사로 붙여주기로 했다.
참고로 그동안 세가 내에서 지내면서 몇몇 사람들이 주서천에게 접근해 왔다.
딱히 볼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화산파의 도사와 인맥을 쌓기 위해서였다.
주서천은 제갈세가의 가신들을 비롯하여 세가에 머무는 식객들과 적당히 대화를 나누면서 지냈다.
그들은 대부분 독봉과의 대결에 흥미를 보이면서 여러 가지를 물었고, 주서천은 대충 답해 줬다.
“저자가 독봉과의 승부에서 승리했다는 소문의 주서천인가.”
“보아하니 무공도 대단해 보이지 않더군.”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는가. 혹은 어떠한 속임수를 쓴 것이겠지.”
“에이, 그래도 화산파의 도사가 아닌가. 설마 그리하겠는가?”
“그러면 무슨 수로 저런 자가 오룡삼봉 중 독봉 당혜에게 이기겠는가? 분명 무언가 착오가 있었겠지.”
“하기야, 그것도 그렇군.”
제갈세가는 오대세가이긴 하지만 무공만으로 보자면 최약이다.
세력 규모는 크지만 무력은 약하다.
그들의 장기는 어디까지나 두뇌다.
화경의 고수는커녕 초절정이나 절정도 몇 없었다.
그렇다 보니 주서천이 남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무공을 숨기자 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고수가 없었고, 그 탓에 다들 은연중에 무시하면서 곧 흥미를 잃었다.
애초에 세가 내에서 무시 받고 별종 취급받는 제갈승계와 함께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큰 요인이었다.
“왠지 모르게 형님이 제 탓에 무시를 받는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제갈승계도 중간에 눈치채고 찾아와 미안해했다.
“괜찮아. 내가 무시 받은 만큼 동생인 네가 노예처럼 일해서 보답하면 되니까.”
“예?”
“그리고 원래 이런 건 무시 받다가 나중에 출세해서 확 놀라게 하는 맛이 있는 법이란다.
복수는 보다 확실하고, 화끈하게 하는 편이 재미있지. 안 그래?”
“여전히 이상한 말만 골라서 하는 광인 같습니다.”
“뭐?”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이튿날.
준비할 것은 없었다.
챙길 짐도 별로 없었고, 세가 내에서도 허가가 나왔다.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배응을 나온 사람은 몇 없었다.
얼마 없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얼굴만 비치고 사라졌다.
끝까지 남은 사람은 겨우 둘이었다.
“설마하니 공자님께서 강호에 나가실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말해서 영원히 방 안에만 계실 줄 알았는데……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놀랐지 뭐예요?”
제갈승계를 어릴 적부터 보필했던 하녀였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모로 걱정이랍니다.”
하녀가 걱정 어린 눈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갈승계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괴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심성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아랫사람을 막 대하지 않고 친절히 대해 주는 편이었고, 자신에게는 특히 더더욱 그랬다.
실은 대화할 상대라고 해 봤자 하녀 정도뿐이라서 잘 대해 줄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 중 하녀만 한 사람도 또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걱정이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너도 따라올래……?”
제갈승계도 조금 걱정되는지 주서천 외에 유일하게 힘이 되어 주었던 하녀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요. 도련님도 알다시피 제 가족이 세가 근처의 마을에 사시고, 제가 검이나 피 같은 거 무서워하시는 거 알잖아요.”
하녀가 정색했다.
“그래……”
제갈승계의 얼굴이 한층 더 우울해졌다가, 다른 한 사람을 보곤 얼른 표정을 풀었다.
“누님, 저를 믿어 주시고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회가 있다면 강호에서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어렵기만 했던 누님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생각을 조금 바꾸게 됐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아도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기뺐다.
가족의 따스한 걱정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만큼 그녀의 마음에 똑바로 보답하고 싶었다.
참고로 제갈수란은 약 삼 년 전에 강호에 출두했다가 일 년 전에 세가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혼례에 대한 이야기도 없고, 가주나 본인 역시 그에 대한 생각이 없으니 곧 강호로 다시 나올 것이다.
“강호에서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세가의 도움을 받도록 하렴. 무림맹으로 서신을 보낸다면 오라버니께서 얼마든지 도와줄 거란다.
그 외에 강호에 나가면 주의할 것과 도움이 될 것을 여기에 적어 두었으니 시간 날 때마다 읽어 보도록 하렴.”
제갈수란이 서적을 건네줬다.
제갈승계는 제갈수란이 말이 적은 편이고 무감정하다 생각했었지만, 그동안 그게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됐다.
여태 대화를 자주 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뿐이다.
‘아……’
주서천은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미소 지었다.
‘바뀌었구나.’
이용만 당하고, 가족의 사랑조차 모른 채 쓸쓸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만각이천 제갈승계.
지금 눈앞의 광경을 보고, 주서천은 확신했다.
적어도 그런 불행은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고.
분명 제갈수란 만큼은 곁에 있을 거라 확신했다.
‘동생아.’
비록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제갈승계는 확실히 자신의 동생이다.
그리고 그와 의형제의 연을 맺은 순간, 하늘에 맹세했다.
과거와 미래를 걸고 맹세했다.
다신 전과 같은 인생을 살게 하지 않겠다고!
“남동생을 잘 부탁드릴게요, 주 공자.”
제갈수란이 절도 있게 인사했다.
몸에 묻어나는 기품이 적지 않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물론입니다. 맡겨 주십시오.”
주서천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자신감 있게 웃었다.
제갈수란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곤, 그제야 안심한 듯 등을 보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제갈 소저.”
“……?”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주서천이 제갈수란을 불러 세웠다.
“기문진이란 건, 자연물이나 인공물을 사전에 배치해서 발동하지 않습니까?”
“네?”
“전장의 경우, 변수와 유동이 심하다 보니 기문진이 발동 전에 망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유도하지 않으면 배치한 지역에 오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원하는 곳에 무언가를 던지는 것만으로 기문진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떠한 변수에도 대항하여 원하는 곳에 신속히 기문진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갈수란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주서천은 그런 제갈수란을 뒤로한 채, 손을 흔들어주곤 모습을 감췄다.
* * *
“형님. 이제 저희는 어디로 갑니까?”
“산동(山東).”
산동이라면…… 황보세가(皇甫世家)나 태산파에 볼 일이라도 있습니까?”
제갈승계가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쳐다봤다.
“반가운 얼굴 보러. 너도 아는 사람이야.”
“그게 누구입니까?”
“이의채”
“아! 금의상단주!”
제갈승계가 떠올린 듯 무릎을 탁쳤다.
“금의상단에 대한 명성은 세가에 있을 적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그 돈 중 일부분이 제 것이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금의상단주의 품성은 의심하고도 남을 만하지만 그런 사소한 건 좀 어떻습니까.”
기관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게 해주는 만능의 힘 황금!
그 이름 앞에 입이 귀 밑까지 찢어졌다.
“이제부터 산동이 두 번째 고향이 될 거다.”
주서천이 씩 웃었다.
“……”
참고로 일행은 두 사람만이 아니라 세 사람이었다.
제갈세가에서 호위로 붙여 준 절정의 호위 무사다.
양문(梁門)은 별종 둘을 보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양문은 원래 호북 정파 중소 문파의 문주였다.
하나 세력도 약소하고 돈도 부족해 이십 년 전 즈음에 귀주의 분쟁 지역에 참전했다.
그때 모든 문도를 잃고 겨우 살아남았고, 그 상실이 커 문파를 재건할 의지를 잃었다.
마침 당시 인재를 찾고 있던 제갈운의 눈에 띄어 가신으로 제안을 받게 됐고, 그대로 의탁하게 됐다.
‘아무리 내가 요새 농땡이를 부렸다고 제갈승계의 호위 무사로 삼아? 가주! 처사가 심하오!’
양문은 무위는 출중했으나, 버릇이 나빴다.
초절정으로 향하는 벽을 거의 이십 년 동안 넘지 못해 모든 걸 포기하고 지금 수준에 안주해 살아갔다.
귀주 분쟁 이후로는 임무 같은 것에 귀찮아하고, 적당히 술을 마시고 기루를 들락거렸다.
제갈세가에서는 그런 양문을 고깝게 여겼으나, 한번 임무에 투입하면 상당한 실력을 발휘해 뭐라 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적당한 기회가 생겼다.
‘이렇게 성가신 일을 맡기다니!’
세가에서도 제갈승계를 등한시했지만, 그렇다고 가신 입장에서 막 대할 수는 없었다.
“양 소협 표정이 영 밝지 않군요.”
주서천이 양문의 얼굴을 보고 말을 걸었다.
“걱정해 줘서 고맙소. 걱정할 필요는 없소.”
양문이 대놓고 신경 끄라는 기색을 보였다.
주서천은 그런 양문을 보고 ‘흐흐’ 웃었다.
“지금은 후회할지 몰라도 줄을 잘 선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나중에 나에게 고맙다고 할 겁니다.”
그의 말에 양문이 어이없어했다.
‘미친놈!’
속으로 욕 밖에 안 나왔다.
자고로 미친놈과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좋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유유상종이라고 하더니만 틀린 말 하나 없었다.
세가의 괴인과 친하다면 비슷한 부류가 아니겠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농땡이는 작작 부릴걸!’
물은 엎질러졌다.
후회는 언제나 늦은 법이다.
앞으로의 일이 험난할 것이 뻔히 보였다.
양문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쉬어댔다.
주서천은 그런 양문을 보고 피식 웃었다.
‘자, 정말로 이제부터다.’
그동안은 혼자만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산동에 가면 이제 그럴 일도 별로 없다.
산동, 제남(齊南)은 주 연고지가 된다.
이곳을 중점으로 해서 세력을 모아 암천회에 대항할 생각이었다.
화산파의 힘을 빌리면 보다 쉽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자유가 제한되어 성가시다.
무엇보다 전쟁이란 건 한 세력이 하는 게 아니다.
사문을 도와주고 전력을 보강하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우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떠올리고 그것들을 만년화리나 천년설삼처럼 선수를 쳐야 했다.
지리적으로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철광산 등의 지하자원뿐만 아니라 밀이나 연초(煙草) 같은 농산물도 많다.
바다도 지척이라 해산물도 풍부하고, 항구도 있어 교역에도 유리하다.
황하의 하류도 이어져 있었다.
북쪽으로는 하북과 북경이 있고 서쪽으로 하남, 남쪽으로 안휘와 강소까지 있다.
정파 무림의 세력권인 데다가 북경까지 가깝고, 무엇보다 치안이 좋아 안전했다.
땅값이나 세금이 적지는 않지만, 금의상단에게는 그렇게까지 무리가 가는 건 아니었다.
“아, 저 멀리 제남이 보이는군. 곧 있으면 도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