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월오삼검(越吳三劍)
“어디 보자, 분명 여기에 있을 터인데……”
흉마는 신투에 비견될 만큼 욕심이 많았다.
영약이나 무공 비급에는 별로 관심 없었지만, 돈이나 보물 등을 상당히 밝혔다.
그중에는 신병이기도 존재했다.
다만 대부분의 보물들은 암천회가 회수해 가고 없었다.
이 흉마의 무덤은 이미 한차례 공략됐다.
여기에 남은 건 그럭저럭한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이 안에 있던 보물들 대부분은 암천회의 고수들에게 돌아가 전란의 시대에서 악명을 떨쳤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
찾았다.
눈앞에 검 한 자루가 지면에 꽂혀 있다.
검집은 보이지 않는다.
월오삼검(越吳三劍)!
암천회는 무림 세력들이 흉마의 무덤에서 나인성공을 비롯한 보물을 두고 앞다퉈 싸우기를 원했다.
그래서 간자를 심어 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욕심을 자극할 만한 보물을 남겨뒀다.
“태아(泰阿)!”
춘추 시대 말기에서부터 전국 시대 초기 월나라의 인물로 활동한 전설적인 장인(匠人) 구야자(歐治子), 그리고 마찬가지로 동시대에 활동했던 오나라의 명장(名匠)인 간장(干將)이 함께 초나라 왕의 명으로 만들었다는 세 자루의 검 중 하나로 보검(寶劍)의 반열이다.
예한도 예한이지만, 신검(神劍)과 비견될 정도의 태아에 비교해선 조족지혈이다.
애초에 전국 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검이 아직까지도 녹슬지 않고 멀쩡하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태아는 미래의 여러 무인들을 걸쳐 그 힘이 발현되었고, 진품이라 알려져 수많은 피를 불렀다.
“남은 건 비급인가.”
태아를 집어넣고 다시 중앙의 양탄자를 밟는다.
길을 따라 끝까지 전진하니 계단 위 제단이 나왔다.
아흔아홉여 개의 계단을 올라, 제단 앞에 서니 대리석으로 된 단상과 그 위에 낡은 서적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불길한 서적, 아니 비급이었다.
상당한 두께를 자랑하는 이 서적의 표지는 인피(人皮) 로 되어 있으며, 앞에 새겨진 얼룩은 꼭 비명을 지르는 사람의 얼굴과 같아 소름이 끼쳤다.
그 안에는 비록 알아볼 수는 없으나, 하 왕조 시대의 고문(古文)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주서천이 고문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건 따로 지식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나인성공의 정체 탓이다.
나인성공, 또는 나인성정본이라고도 불리는 육대금공의 역사는 아득하다 할 정도로 깊다.
중원의 최초 왕조였다는 하나라 때 만들어진 이 금서 (禁書)는 본래 무공보다는 주술의 집합체였다.
누가 집필한 것인지도 모르고 목적 또한 모르지만 선경(仙境)이나 마경(魔境)과 같이 속세가 아닌 다른 세상의 존재의 힘을 빌리거나 소환하는 주문이 서술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 나인성정본은 하 왕조가 사라지면서 자취를 감췄으나, 무수한 시간이 흐른 뒤에 재발견됐다.
마침 발견한 당사자는 고문에 관심이 많은 학자였고, 나인성정본에 심취하여 연구를 계속했다.
그 결과, 번역의 문제로 완독(玩讀)할 수는 없었으나 학자는 나인성정본의 힘 일부분을 얻게 된다.
그것이 마경의 주민에게 힘을 빌리는 방법이자 무공, 나인성공이다.
“습득할까?”
주서천은 비급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중도만공이라면…… 아니, 그만두자.”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인성공은 습득하면 곧바로 전 무림인이 알 수 있는 형체로 변한다.
나인성공의 힘은 간단하다.
이 무공을 수련하게 되면 신체 능력이 몇 배나 증가한다.
거대한 바위를 손쉽게 드는 괴력도 얻는다.
그리고 검에 베여도 그 상처가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치유되는 재생능력을 손에 넣는다.
노인이라면 청년이 될 수 있다.
늙지도 않는다.
마경에 산다는 괴마(怪魔)의 능력이었다.
다만 그것도 잠시.
수련자의 신체는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완전히 변한다.
아니, 변한다는 수준이 아니다.
종(種) 자체가 바뀐다고 하는 게 옳다.
힘은 물론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외관도 전부 괴마를 닮아 간다.
최종적으로는 괴마 그 자체가 된다.
마공과 비슷하게 인성도 시간이 갈수록 차츰 사라져 간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수련자는 결국 인간이 아니게 된다.
법력이 높은 고승(高僧)도, 마를 지배하는 마도의 고수도 이기지 못한다.
이성을 길게 유지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것도 길어 봤자 오 년 정도로 그 이상은 힘들다.
참고로 신체의 경우 한 명도 빠짐없이 한 달 내외로 전부 흉악하게 변했다.
중도만공은 내기 운용의 충돌 없이 여러 가지 무공을 습득하게 해주는 무공이지, 자신에 맞게 알맞도록 개조해 주는 만능의 능력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암천회주조차 나인성공을 수련하지 않고 미끼로 사용한 게 그 증거였다.
“깨끗하게 포기하자.”
완전히 태워 버려 없애 버릴까 생각해 봤지만, 그래도 이용 가치가 있을지 몰라 일단 품 안에 집어넣었다.
주서천은 계단 아래로 내려와 가치있어 보이는 금은보화를 대충 부담되지 않게 챙기고 밖으로 향했다.
더 이상 볼일도 없고, 지나왔던 곳의 기관은 전부 작동한 이후였으니 빠져나오는 것도 빨랐다.
다만 아까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벽면을 일정 구간마다 두들기면서 전진했다.
일각 정도를 전진했을까, 발걸음이 멈췄다.
“근처 수맥(水脈)이 집결된 곳은 여기인가.”
칠검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최고의 방법은 계기가 된 흉마의 무덤의 파괴다.
하지만 아무리 주서천이 날고 기어도 이 정도의 무덤 전체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입구를 막는다고 해도 무림의 날고 기는 칠대 세력이 온다면 손쉽게 허물고 금방 조사할 수 있다.
벽력탄을 구해 볼까 생각해 봤지만, 아직 이 시기에는 금구(禁具)라서 취급하는 자가 없었다.
구하기도 힘들고, 설사 장인을 찾아 의뢰를 해도 만들어 줄 리가 없다.
그래서 포기하고 그냥 암천회를 골탕 먹일 생각으로 왔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합!”
짧은 기합을 내지르면서 검강을 실어 휘둘렀다.
검이 벽면을 부드럽게 베어 갈랐다.
다만 인공적으로 만든 미로처럼 벽이 얇은 게 아니었다.
눈앞의 벽은 아예 지면과 연결되어 있다.
검은 잠시 거두고 벽에 길게 난 검상을 손가락으로 찔러 보니 축축했다.
이에 주서천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가 검을 들어 비장의 일격을 날렸다.
자하검결 일초식!
‘자하개벽!’
우르릉!
지하 무덤 내에서 벽력이 쳤다.
통로를 통해 무덤 곳곳 내부로 벽력이 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위이이잉!
검강이 굉음을 내면서 고속으로 회전하더니만, 이윽고 전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찌르기에 모든 걸 담은 강기는 정말로 벽력처럼 빛줄기를 남기면서 전진해 벽을 꿰뚫고는 사라졌다.
잠시 멈춰진 호흡.
그리고 숨을 내뱉는 순간, 무덤 전체가 크게 진동한다.
콰드드드득!
머리 위 천장에서 돌무더기가 떨어졌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 전체, 아니 지하가 흔들렸다.
콰앙!
굉음이 길게 늘어지면서 벽이 폭발했다.
사전에 옆으로 빠져서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윽고 벽이 허물어지면서 그 안에서 굵직한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면서 반대편을 후려쳤다.
물의 세기가 보통이 아닌 듯, 수압에 이기지 못한 반대쪽 벽도 부서졌다.
쾅! 콰앙! 콰광!
수맥의 중심이 부서지자, 그걸 시작으로 여러 곳에서도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지반이 전부 무너지면서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수맥이 터지고 물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벽이란 벽은 물론이고 지면에서 천장까지 거미줄처럼 금이 가면서 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한곳이 무너지자, 균형을 잃으면서 물을 연달아 토해 냈다.
황하가 그 원류라서 그런지 물이 황토색이었다.
진흙도 상당히 포함되어 물이 아닌 것도 많았다.
“음, 좋아.”
흉마의 무덤이 조금씩 침수되는 걸 보며 흡족하게 웃을 수 있었다.
* * *
황하가 흐르는 중간 부근, 산서.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 세력이 각지에서 모였다.
무덤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중에서 최초로 소문의 무덤에 도착한 건 산서의 항산파였다.
같은 지역 내이니 빠를 수밖에 없다.
황하를 따라 토사물과 수면 아래가 보이지 않는 흙탕물을 넘어 헤맨 끝에 소문의 무덤을 보게 됐다.
“이게 도대체……”
항산파의 최고수, 여화수(呂華秀)는 무덤 앞에 서서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멍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햇빛을 가려 그림자가 드리우는 절벽들 아래, 반듯하게 세워져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적어도 입구는 멀쩡해야 할 무덤이 이리될 줄은 몰랐다.
입구는 돌벽이 무너져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고, 그 사이로 진흙이 흘러나오고 있다.
또한 무덤 바닥에서부터 황토색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
“여기가 정말로 맞느냐?”
여화수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안내자에게 물었다.
“네, 여기가 확실합니다. 어찌하여 제가 대인들을 속이겠습니까?”
안내자도 당혹스러운 듯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항산파의 무림인들에게 돈을 받고 안내하는데 거짓을 고할 정도로 목숨이 아깝지 않다.
여화수도 안내자의 얼굴과 눈빛을 보고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더더욱 복잡한 심경이었다.
이후, 며칠 뒤에 각지에서 출발했던 조사대가 속속히 도착해 항산파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곤륜파, 태산파, 숭산파, 남궁세가를 비롯한 정파 세력 모두 어이없다는 듯 허탈하게 한숨만 쉴 뿐이었다.
다만 사도천이 도착하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최초에 도착한 것이 항산파였고, 무덤이 무너졌다. 어린아이라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지 않나?”
“그게 무슨 뜻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사도천!”
여화수가 분노하면서 일갈했다.
“굳이 말이 필요하겠는가?”
사도천의 고수가 도발하듯이 비릿하게 웃었다.
“참게. 상대할 가치도 없네.”
태산파 제일 고수 손석숭(孫哲崇)이 여화수를 말렸다.
그 외의 정파인들도 나서서 여화수를 진정시켰다.
“네놈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마교도?”
사도천의 고수가 조용히 구경만 하고 있던 마교도들에게 물었다.
“내 수하들에게 말 걸지 마라. 볼 일이 있다면 나에게 물어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의 혀를 잘라 주마.”
마교도 중 딱 봐도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살의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무림맹, 사도천, 마교.
무림 삼대 세력이 한자리에 전부 모였으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벌써부터 살기로 들끓었다.
미래에 괜히 칠검전쟁이 일어난 게 아니다.
이렇게 불안한데 간자들로 손까지 썼으니 안 싸우면 그게 더 이상하다.
사전에 무림맹주와 사도천주, 그리고 마교의 교주 천마까지 나서서 주의를 내렸기에 싸우지 않았다.
흉마의 무덤 건은 전 무림이 힘을 합해 공동 전선을 펼치기로 하였으니 서로 싸우지 않도록 주의를 줬다.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칠대 세력 사이, 숨어 있는 간자들을 이끄는 자, 그리고 칠성사의 일곱 수장 중 하나인 요광이 의문을 품었다.
요광은 천기의 의문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무덤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다만 좀 더 일찍 오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흉마의 무덤이 수몰된 이후였다.
중원 무림이 다소 소란스럽다.
무덤에 대한 소문 자체는 진실이었다.
황하 유역을 따라 깊숙한 곳에서 무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무덤이 정말로 흉마의 것일지는 의문이었다.
“조사대가 도착했을 때는 전부 수몰되었으니 말이네.”
“그래서 어떻게 됐나?”
“글쎄, 아직 철수하진 않은 모양일세. 무덤의 주인이 정말 흉마라면 사안이 보통이 아니지 않나.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만약을 위해 확인할 수밖에 없다 하군.”
허어, 그럼 그 수몰된 무덤을 다시 파헤친다는 건가?”
“가망이 없지만 시도는 해 볼 모양일세. 소문에 의하면 건축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을 찾는 것 같네.”
“그럼 그 주변에 칠대 세력의 조사대가 잔존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상상만 해도 위가 아프군그래.”
서로 앙숙을 넘어 원수인 삼대 세력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걸 상상해보니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새삼 흉마의 이름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군.”
흉마, 정확히는 육대금공의 나인성정본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나인성공의 수련자가 나타나면 무림은 피바람이 불고 수많은 희생이 나왔다.
그 위력과 공포를 알기에 더더욱 저지하기 위해서 힘썼다.
한편, 흉마의 무덤을 비롯한 모든 일을 계획했던 암천회의 분위기는 그다지 썩 좋지 못했다.
특히 흉마의 무덤은 하루 이틀 준비한 게 아니다.
여기에 들어간 돈과 시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죄송하옵니다!”
쿠웅!
천기가 머리를 지면에 몇 번이나 부딪쳤다.
어찌나 강했는지 부딪칠 때마다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부터 피가 흥건히 흘러 지면에 고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암천회주가 내려다보면서 위엄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그만.”
그 말이 나오자마자 천기가 행동을 멈췄다.
“보고.”
“무덤에 칠성사병을 배치하였으나, 조사대가 도착하기 이틀 전부터 정기 연락이 끊겼사옵니다.
이후 급히 요광을 보냈습니다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몰로 인해 무너졌으며 배치한 칠성사병은 보이지 않았다고……”
천기가 말을 이으며 상황을 보고했다.
요광이 확인하고 얼마 뒤에 항산파가 도착했다.
“요약하자면 그동안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 실패하였으며, 또 그 이유조차 알 수 없다는 겐가. 천기.”
주르륵
천기의 이마에서 핏방울과 식은땀이 뒤섞여 흘렀다.
그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렸다.
“하하.”
암천회주가 웃었다.
“하하하하!”
암천회주가 몹시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천기는 그 웃음에 의아해하며 동조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세상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했거늘, 격언에 틀린 말 하나 없도다.
설마하니 일이 이렇게까지 틀어질 줄은 나 역시도 예상하지 못했도다. 무엇보다 이렇게 철저히 농락당한 것도 처음이다.”
암천회주가 웃음을 뚝 그쳤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맺혀 있었다.
다만 그 미소는 얼음처럼 싸늘했다.
“내 사병들 중 어수룩한 자나 배신자가 있을 리 만무하니, 분명 누군가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겠지. 그놈이 분명 무덤을 붕괴한 장본인일 것이다.”
암천회주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천기.”
“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찾아내라.
그리고 살려서 내 앞에 대령해라. 그게 네 목숨줄을 연명할 유일한 방법이니라.”
“존명!”
* * *
호북(湖北).
방 안은 서재에 비견될 만큼 서적으로 가득했다.
탁자 위는 서적들로 탑이 쌓아져 있었고, 방 내부 구석구석에도 잘 정리된 서적 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무언가의 도면(圖面)이 방 곳곳을 굴러다닌다.
종이와 더불어 먹 향이 물씬 풍기는 방 안에 막 잠에서 깬 것처럼 머리가 부스스한 남자가 보였다.
“후우우.”
남자가 붓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자 ‘우드득’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바깥에서 방해가 되지 않도록 대기하고 있던 하녀는 인기척을 듣자마자 문을 벌컥 열며 그를 불렀다.
“도련님!”
“깜짝이야!”
하녀의 부름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흐아암.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남자가 입을 쩍 벌리면서 길게 하품했다.
하녀는 뺨을 붉힌 채로 그를 힐끗 쳐다봤다가, 이내 부스스한 머리를 보고 못 살겠다는 듯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을 찾아오신 손님이 계세요. 그리고 제발 부탁이니 머리 좀 정돈하고 사세요. 그게 뭐예요?”
“손님?”
남자가 기괴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죠? 도련님은 친구 한 명 없는 외톨이인 데다가 유능하지도 않아서 도움을 청하러 올 사람도 없는데 말이에요……”
“누, 누가 친구가 없어? 친구 있거든!”
남자가 씩씩거리면서 분개했다.
“친구 누구요? 다섯 명, 아니 세 명만 대 보세요. 참고로 저 포함한 세가 식구들은 예외요”
“……”
사실적인 폭력에 남자가 답하지 못했다.
“도련님을 어릴 적부터 보필해 왔던 절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
어쨌거나, 빨리 만나러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잘 모르겠지만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것 같던데요?”
“누구지……”
“화산파에서 오신 도사님이래요.”
“……!”
화산파라는 말에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화산파? 화산파라고?”
“네에.”
“설마!”
남자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달려나갔다.
“꺄악!”
하녀가 깜짝 놀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곤 황급히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의아해했다.
“도련님이 저렇게 놀란 모습을 보이는 건 본 적 없는데…… 도대체 누가 찾아온 걸까?”
콰앙!
응접실 문이 거칠게 열린다.
“깜짝이야.”
주서천이 하마터면 차를 흘릴 뻔했다.
“형님!”
남자가 주서천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승계…… 으응?”
주서천이 살짝 당황했다.
그 시선 끝에는 과거 조금 건방져 보이는 소년 대신 미남자가 서 있었다.
자다 깬 것처럼 부스스한 머리였으나, 외모를 저하시키는 요인은 되지 않았다.
머리는 작고, 턱선은 여성의 것처럼 유려하다.
이목구비는 뚜렷하며 잡티 없는 피부는 하얗다.
눈썹도 두꺼운 편보다는 가늘고, 속눈썹도 남자치곤 길었다.
잘만 꾸미면 여자로 보일 것만 같았다.
연령을 보면 수염이 이제 막 나기 시작한 듯했다.
청년이라고 하기엔 아직 어리고, 소년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많았다.
“누, 누구신지……”
“하하, 형님. 장난도 심하십니다. 저입니다, 제갈승계. 형님의 유일한 동생인 천재 제갈승계요.”
제갈승계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마주 보고 앉았다.
“아, 네 형님과 누님을 생각하면 이상한 건 아니지만 역시나 네놈도 미남자로 자라 주었구나.”
주서천이 암담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의형제로 삼은 동생이 이리도 잘생겼고, 앞으로 동행할 생각을 하니 앞일이 보여 화가 났다.
“그 얼굴로 아직까지도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친구도 사귀지 못한 걸 보니 네 괴팍한 성격은 여전하겠지?
재능과 외모 전부 손에 넣었는데 사교 관계까지 뛰어나다면 배가 너무 아파 참지 못할 것 같다.”
주서천이 괜히 울적하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치, 친구 많이 생겼거든요!”
제갈승계가 말을 더듬었다.
“후우.”
주서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여전히 혼자구나.”
“아니, 있다니까요!”
“그래? 그러면 벗 다섯 명의 이름을 대 봐라. 참고로 하녀나 하인 등의 세가 식구는 제외다.”
“……”
재갈승계가 침묵했다.
“오 년만이구나.”
주서천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 년 만에 뵙습니다, 형님.”
제갈승계에게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은 특별하다.
그리고 그게 유일한 한 명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어릴 적부터 함께해 온 형제자매나 하녀, 하인들조차도 제갈승계의 기관지술을 곱게 보지 않는다.
생판 남, 아니 이제는 의형제가 된 사람이 언제나 천재라고 불러 주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너 왜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경어냐?”
전에는 분명 말을 편히 놓았었다.
“형님, 저도 이제 그때의 아이가 아니라 성인이지 않습니까. 기본적인 예라는 건 압니다.”
제갈승계가 쓰게 웃었다.
주서천이 그런 제갈승계를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저야 똑같죠. 방 안에서 공부만 했습니다.”
“기관지술?”
제갈승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님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주워들은 게 몇 가지 있긴 하지만 그래도 형님에게 듣고 싶군요.”
“주워들은 거라면 대충 예상이 가는데…… 당가?”
“예.”
자신의 행적 중 최근 알려진 게 있다면 독봉과의 내기 대결 정도다.
그 외에는 산적 소탕 정도였다.
제갈승계가 해 주는 이야기는 주서천의 예상대로였다.
강호에 그렇게까지 소문이 나지는 않았다.
“그건 맞아. 그 뒤로는 그냥 돌아다녔지.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할게.”
제갈세가는 개방만큼 정보를 중요시 여긴다.
그러다 보니 염탐하는 일도 종종 있다.
지금도 이 응접실을 몰래 보거나 듣는 자가 여럿 있었다.
조금만 집중하니 감각에 잡혔다.
“그러고 보니 승계야, 네 나이가 올해로 열여섯이지?”
“네. 반년만 지나면 열일곱입니다.”
“세가에서는 자유롭고?”
“흉마의 무덤 탓에 끌려갈지도 모르는 운명이었습니다만, 어찌어찌해서 피하게 됐습니다. 아쉽더군요.”
제갈승계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기관에 관련만 되면 눈을 별처럼 빛내는 건 여전하다.
“형님도 알다시피 제가 천재이기는 하지만, 그 재능을 보일 기회가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세가에서 공부만 하고 있죠. 제가 대기만성형이라서 그렇지 분명…… 분명히……”
제갈승계가 스스로 말하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 성격은 여전하구만.’
주서천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기관지술 만큼은 흥미와 자부심이 가득하기는 한데, 그 외의 성격은 영 그렇다.
“진법이나 무공을 모르는 제가 어디에 쓸모가 있겠습니까…… 저도 잘 압니다……”
이 부정적인 성격은 성장해도 그대로다.
제갈승계는 이후 투덜거리면서 그동안의 일을 넋두리하듯이 풀었다.
여전히 세가에서 무시를 받는 것이나, 혹은 중부에게 쓴소리를 듣는 것을 투덜거리기만 했다.
그래도 삼안신투의 비고 일 덕에 어딘가 쓸모가 있을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며 기관지술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을 제지당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평소에는 공부와 연구를 하며, 기관지술에 대한 서적을 집필하는 일을 번갈아가며 했다.
“승계야.”
주서천은 제갈승계의 어깨를 두들기며 씩 웃었다.
“공부도 좋지만 방 안에만 있으면 병 든다. 그리고 너도 성인이 되었으니, 슬슬 강호에 나갈 때가 되지 않았느냐?”
제갈승계가 강호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님, 혹시 절 찾아온 것이……”
“그래. 네 힘이 필요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갈승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