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주목랑마(珠穆朗璃)
원은 명이 됐고, 대월은 망해 남만이 됐다.
지금은 다들 분열된 채 서로 어울리지 않고 싸우고 있다.
이렇다 할 왕조가 없다 보니 남만이라고 폄하하는 이름이 유지됐다.
“독마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 이러한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
독마는 백오십 년 전쯤에 활동했던 마인이다.
등장하자마자 독에 관련된 세력을 공격해 무공을 뺏었다.
그 활동기는 약 십 년이었으나, 압도적인 독공으로 이름을 날려 공적이 되는 데는 겨우 오 년이었다.
이후 오 년 뒤, 무림 고수들에게 추적당하다가 내상을 입고 행적이 묘연해졌다.
아마 내상 탓에 어디선가 죽었을 것이라 전해지나, 그곳이 독혈곡일 줄은 몰랐다.
“암천회는 이걸 왜 발견하지 못한거지?”
미래에 독안만독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천하의 무공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암천회에게도 없었다.
“아, 칠각사가 그 전에 우연찮게 발견해서 처먹고는 위액으로 녹여버린 건가. 그럴 수도 있겠군.”
암천회라면 농히 칠각사의 사체를 회수할 때 철함을 발견했어야 정상이지만, 없는 걸 발견할 수는 없다.
회수 작업 전까지는 멀리서 생존 여부나 위치의 확인만 했을 터이니 철함을 볼 수는 없다.
동굴 안에 들어가 바닥을 살펴봐야 찾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독마 장군은 죽고 원나라는 망했으니 소원을 들어줄 수는 없다. 그러니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라. 그래도 잊혀지지 않도록 내가 배워는 줄게.”
주서천이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런데 내가 정파인이라 네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할 수는 없겠다. 부디 이해해 줘.”
화산파의 제자가 독마의 후인?
농담으로도 질이 나쁘다.
“처음 이름을 봤을 때 수련할 생각도 없었는데, 비급을 자세히 보고 난 다음에 생각이 바뀌더라.”
녹안만독공은 독마라 불릴 때 즈음부터 대충 완성됐다.
나머지 부분은 도주하면서 보완하게 됐다.
그렇다 보니 녹안은 독마의 증거가 됐다.
아무리 절세신공에 이르는 독공이라도 그래선 골치 아프다.
하나, 다음 대목에서 결심을 바꿨다.
“대성을 해야 녹안이 된다면 상관없지. 어차피 난 깨달음을 얻는다해도 반절밖에 배우지 못하니까.”
중도만공의 대가가 이번에는 장점으로 적용됐다.
독마가 듣는다면 지옥에서 벌떡 일어날 이야기다.
“독초도 잔뜩 채집했고, 칠각사의 내단도 있으니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 준 기회로군. 크큭.”
주서천이 독마처럼(?) 음험하게 웃었다.
“일단은 독혈곡에서 벗어나도록 할까.”
지금쯤 점창파는 단하성의 보고로 소란일 터.
암천회의 귀에 들어가고도 남는다.
칠각사는 도감부에서 주시하고 있던 영물이니, 분명 확인하러 이곳에 올 것이 분명했다.
* * *
암천회의 정보력은 천하제일을 다툰다.
정파의 개방, 사파의 하오문과 견줄 정도였다.
양적인 면에선 개방과 하오문에 비
해선 부족하나 질적인 면으로는 이
기면 이겼지 지지는 않는다.
점창파 내부의 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암천회에 들어갔고, 도감부가 급히 파견됐다.
주서천이 예상한 대로였다.
독혈곡.
암천회의 도감부 무리가 독혈곡에 진입했다.
그들은 제집처럼 익숙해보였고, 발걸음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독물과 마주쳐도 어렵지 않게 무찔렀다.
미로같이 얽힌 밀림을 헤매지 않고 걷는다.
그 발걸음은 묘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한 시진 정도 지났을까. 도감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깊숙한 곳에 있는 칠각사의 영역에 들어왔다.
“안 돼!”
멀리 보이는 무너진 동굴을 보니 비명이 나왔다.
“썅!”
도감부장이 욕설을 내뱉으면서 고개를 획 돌렸다
“내가 잘못 본 것이다. 피곤해서 환각을 본 게 분명해.”
도감부장이 악몽을 떨쳐 내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으악! 썅!”
비명과 욕이 함께 나왔다.
칠각사가 보였다.
그런데 그 우뚝 솟은 뿔도, 녹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던 비늘도 없었다.
몸의 반은 동굴의 잔해에 깔려 없고, 나머지 반은 살점만 남은 뼈 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분께 뭐라 보고해야 하느냐 말이다!”
도감부장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칠각사가 힘을 잃은 틈을 타, 독물들이 권좌에 도전해 승리한 모양입니다. 남은 건 전부 다 뜯어먹혔습니다.”
독물은 독기를 쌓을수록 강해진다.
그리고 독혈곡의 생물들은 전부 독기를 품고 있다.
이렇다 보니 독혈곡의 생태계는 전부 포식으로 되어 있다.
승자는 패자를 잡아먹어 독기를 흡수한다.
비늘이건 뭐건 간에 신체의 일부는 뼈 같은 것을 제외하고 전부 잡아먹는다.
이번 사태는 누군가를 의심할 것은 아니었다.
“점창칠공자, 단하성!”
만년화리를 도둑맞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도감부장의 몸에서 진득한 살의가 뿜어져 나왔다.
주변에 있던 수하들은 물론이고, 독혈곡의 날고 기는 맹수들조차 목을 움츠리고 두려움에 떨었다.
“칠각사가 죽은 지 얼마 됐지?”
“흐, 흔적을 보아하니 일주일 이내 입니다.”
“그렇다면 독혈곡을 뒤져서라도 남은 뿔들을 회수해야 한다. 강기가 아니라면 흠집도 낼 수 없는 것이니 독물들도 먹어 치우지 못했을 테지.
단하성이 가져온 뿔은 하나밖에 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어서라도 나머지를 확보해라!”
이후 도감부는 독혈곡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당연하게도 나머지 뿔이 발견되는 일은 없었다.
* * *
길면 길었던 칠각사 사냥이 끝났다.
애뇌산에서 벗어난 주서천은 최대한 인적이 드문 길을 이용했다.
등에 업은, 너무나도 눈에 띄는 여섯 개의 뿔 탓이었다.
괜히 누군가에게 목격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경공을 최대로 펼치고 사람이 없는 곳만을 골라 이동한 덕에 시선은 피할 수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서장의 대설산.
서북쪽을 향해서 쉬지 않고 곧장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 차 목적지에 도착했다.
운남, 덕굉(德宏).
서북부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사천이 나오고, 위로는 서장이다.
우선 들르기 전에 근처의 산에 다섯 개의 뿔을 숨겨 뒀다.
나머지 하나는 천으로 둘러 등에 멘 이후에야 덕굉에 들어섰다.
“음, 이쯤인가……”
덕굉은 중원에 속하기도 애매한 위치에 있다.
그만큼 촌락이다.
하지만 그래도 지도에 없을 정도로 작지는 않았다.
많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사람도 있고, 상권도 있었다.
그래도 운남 최북부 중에서는 나름 크다.
“거기, 형씨! 옷 좀 보고 가!”
“서장에 갈 생각이라면, 그 차림으로는 힘들다고!”
“북해만큼 미치도록 추운 건 아니지만, 서장은 강풍이 심하고 쌀쌀한 편이지. 싸게 해 줄게.”
저잣거리를 걸었다.
목적 없이 걸은 건 아니다.
갈 곳은 있었다.
“어서옵쇼.”
저잣거리의 여러 가게들 중, 포목점을 들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수준의 가게였다.
주서천은 포목점에 점원 외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 개미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금의상단. 주서천.”
“……!”
점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재빠르게 주서천의 얼굴과 소매 안쪽의 매화를 살펴봤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자님.”
점원이 문과 창문을 닫았다.
“이곳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칠각사의 내단이 우선이지만, 뿔도 신경 썼다.
화산파에서 나오기 전부터 상정해 두었다.
문제는 이 뿔의 처리였다.
이렇게 무식하게 크기만 한 걸 대설산까지 가져갈 수는 없었다.
다른 곳에 맡기기에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한배를 탄 금의상단의 힘이 필요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금의상단은 성하장 탓에 운남에 진출할 수 없었다.
그건 변방인 덕굉조차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대신 이 마을의 가게 중 매물로 나온 걸 구매해 눈속임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워낙 변방이라서 그런지 무림인조차 잘 안 보입니다. 그래도 성하전장은 있습니다.”
점원이 쓴웃음을 흘렸다.
“수고 많으십니다. 일단 이걸 받으십시오.”
천으로 두른 칠각사의 뿔을 건냈다.
“이 근처에 이것과 같은 걸 다섯 개 숨겨 두고 왔습니다.
내일 그것들을 회수하여 이 서신과 함께 상단주께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이건 숨긴 장소를 표시한 지도입니다.”
“알겠습니다.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안의 내용물은 제가 확인해야 합니까?”
“사천에 질풍십객 중 몇몇이 대기 중이라 들었습니다.
그들에게만 보여 주고, 운송을 맡겨 주십시오. 중요한 물건이니 신경 써주셔야 합니다.”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 정도 되는 실력자가 덕굉같은 촌락에 모여 있으면 의심을 받으니 조금 떨어진 사천에 있었다.
무엇보다 소속이라도 밝혀진다 하면, 성하장이 금의상단이 상권을 빼앗으려 하는 줄 알고 적대할지도 모른다.
그들을 적으로 삼으면 많은 게 귀찮아진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곳에서 하루 묵고 갈 생각인데,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 * *
이 층에 잘 곳이 준비되어 있었다.
포목점의 다소 낡은 외관과 다르게 방 안은 깨끗하고 편안했다.
주서천은 점원에게 자신이 나오기 전까지는 들어오지 않도록 말해 두었다.
내단의 흡수를 위함이었다.
혹시나 하루가 지나도 내려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방에 들어오지 말고 주변의 경계만 부탁한다고 전해 뒀다.
“일단은 녹안만독공의 확인을……”
독마의 무공 비급은 불태우고 없다.
그 대신 내용 전부를 외워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주서천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다음 비급 대신에 철함에 넣어 두었던 내단을 꺼냈다.
꿀꺽.
내단이 목 너머로 넘어간다.
‘칠각사의 내단과 더불어 녹안만독공을 얻은 건 천운이었어.’
칠각사가 용이 되기 위해 도를 닦는 이무기 였다면 그 내단이 신성하고 정순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뱀이었기에 그 성질은 거의 독기에 가까웠다.
백독불침이 아니었다면 내단을 취하는 건 자살 행위.
그리고 독공이 없다면 완벽한 흡수도 불가능하다.
원래 그는 백독불침을 천독불침으로 키우고 약간의 내공만 얻을 용도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독공을 얻었으니 상황이 달라졌다.
주서천은 위에 도착하자마자 녹아내린 칠각사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녹안만독공을 운기했다.
‘일성에서 이성으로 오른다.’
녹안만독공의 일성은 간단하다.
독기를 몸에 담고, 중독되지 않은 채 운기할 수 있으면 끝이다.
보통 전 단계인 중독 상태에서 대부분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기에 이 조건만 달성하면 쉬웠다.
단숨에 이성을 달성하자, 녹안만독공이 효능을 발휘했다.
칠각사의 내기, 곧 독기가 혈맥과 기맥을 타고 홀렀다.
독기 특유의 기분 나쁜 끈적거림은 없었다.
혈 자리를 두들기고, 기와 피의 통로를 부드럽게 훑고 지나가 덮는다.
사람의 몸을 집어삼킬 흉포함은 없었다.
독안만독공이 나서서 그 기를 통제하고, 어르고 달랬다.
백독불침에 이르렀던 내성이 한 단계 껑충 뛰어올랐다.
칠각사의 기를 흡수해 천독불침에 올랐다.
“후우!”
단조롭게 이어지던 호흡에도 변화가 생겼다.
‘체질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라서 그런지 내단의 기 대부분을 사용했군. 역시 소모가 크다.’
천 가지 이상의 독이 침입할 수 없는 체질.
자연적인 경우도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인공적이다.
또한 이러한 체질을 만들기 위해선 독인이 수십여 년을 연구해도 되기가 힘들었다.
내공을 소모하지 않아도 독을 중화하기는커녕 듣지를 않는다니.
그런 체질을 쉽게 만들 수 있겠는가!
‘음, 그래도 내단의 기가 그럭저럭 남았구나. 자아, 이제 이걸로 무엇을 할까?’
호흡을 유지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내공 증진만으로 화경에 진입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환골탈태(換骨奪胎)를 노려볼 수도 있겠지.’
두 가지를 동시에 하기엔 내공이 부족했다.
둘 다 칠각사의 내단의 힘을 빌려야 할 수 있었다.
‘화경부터냐, 환골탈태냐.’
어차피 대설산에 천년설삼이 있다.
그걸 복용해서 흡수한다면 나머지 하나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다만 무엇을 먼저 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긴 했다.
우선, 환골탈태를 할 경우 정말 많은 변화가 온다.
뭐니 뭐니 해도 역시 건강하고 뛰어난 육체가 최대한의 장점과 의의였다.
몸은 단단해지고, 노화된 건 다시 젊어지고, 병약했던 몸체는 건강해지며, 근육도 높아진다.
그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무공을 수련하고 펼치기에 적합하고 균형적인 완벽한 육체를 갖게 된다.
앞에 자질구레한 것은 그렇다 쳐도, 무공에 적합한 게 제일 중요했다.
연공의 속도가 높아져서 그렇다.
‘어차피 대설산에서 볼일을 보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길어 봤자 두 달에서 세 달이야.’
설사 천년설삼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해도 흉마의 무덤 탓에 포기하고 강제로 중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 기간 동안 무공 연공 속도가 빨라지지 않아도 문제는 없었다.
늦춰지는 것도 아니고, 현행 유지가 아닌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 길어진다면 지금 잔류하는 내단의 기가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환골탈태에 대한 것을 치운 뒤, 화경의 진입에 집중했다.
‘음, 그때의 느낌을 되살려 볼까.’
그리운 감각이었다.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모든 걸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일시적이나 전부 내버려 둔 순간, 그토록 소원하던 걸 얻었다.
그 기억과 감각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깨달음은 있으니 어려울 것은 없었다.
내공과 심법의 경지만이 요구됐고, 지금 모든 게 갖춰졌다.
‘대충 이런 느낌이었지.’
화경으로 향하는 진입의 벽은 높다.
그리고 그 구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괜히 수많은 무인들이 화경에 오르지 못하는 게 아니다.
무공에 대한 이해도, 운,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걸 가르치는 건 대단히 어렵다.
정확히는 말로 설명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저 느끼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움직여 본다.
그때의 기억과 감각을 떠올리고, 몸과 마음을 맡겼다.
“……”
얼마만큼의 시간이 홀렀는지는 모른다.
어느 순간, 자신이 잠시 잠들었다는 걸 깨달으면서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가 고요히 빛났다.
“음.”
몸 내부를 재확인했다.
칠각사의 내단에서 얻은 진기는 더 이상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공은 미약한 정도로 크게 증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가 변했다.
그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주서천은 침상 위에서 내려와 바닥에 내버려 둔 검을 들어 세웠다.
검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춰졌다.
“후우.”
숨을 크게 내쉬곤, 기를 주입해 봤다.
검을 둘러싼 기가 물처럼 일렁인다.
검기다.
검을 이리저리 느릿하게 움직여 봤다.
검기도 마찬가지로 움직였다.
형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주서천은 검기가 주입된 예한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재차 진기를 주입해 조정했다.
단전에서 그동안 축적해 둔 내공이 용솟음쳤다.
배꼽 아래에서 시작된 진기는 기맥을 타고 이동했다.
어깨, 팔, 손을 거쳐 최종적으로 검으로 들어갔다.
진기의 주입은 계속됐고, 맺힌 기의 농도가 순차적으로 짙어지면서 그 형태가 뚜렷해진다.
파츠츠츳!
“됐다.”
주서천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 눈동자가 비추고 있는 건 화경의 증거, 강기(理氣)를 머금은 검이었다.
아직 자색이 아니라 푸르스름한 걸 보면 다행히 화경에 오르면서 자하신공 등의 무공들이 강제적으로 높아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수련 속도가 극악인 자하신공이지만, 그렇다고 순식간에 대성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특징 탓이다.
무림인이 꿈꾼다는 경지, 화경!
보통이라면 머리가 부서질 정도로의 충격과 깨달음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겠지만, 자신은 예외다.
이미 경험해 본 것인지라 정말로 조용하게 올랐다.
얼마 정도 지났지?
잠을 잔 건 분명한데, 시간을 측정할 수가 없었다.
방문을 열고 일 층으로 내려가 확인하려 했다.
“공자님!”
아래로 내려가자,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자신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는 점원을 볼 수 있었다.
주서천은 그의 얼굴을 보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제가 방에 들어가고 얼마나 지났습니까?”
“삼 일입니다. 혹시나 무슨 일이있나 싶어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내일이 되면 상단주님께 급히 연락하려 했습니다요.”
하루가 지나도 방에서 나오지 않으면 들어오지 말라고 한 건 천만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도중에 방해를 받아 무슨 문제가 생겼을 것이리라.
“저 때문에 마음고생 많으셨습니다. 뿔은 어떻게 됐습니까?”
“공자님이 오신 이튿날 점심, 바로 회수했습니다. 질풍십객은 내일이나 모레 도착한다고 들은 차입니다만……”
“잘하셨습니다. 내 상단주께 잘 말해 두겠소.”
삼 일이면 적절한 시간이었다.
만약 일주일이나, 이 주일 이상 지났다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을 것이다.
“난 이대로 서장으로 갈 거요.
다시 돌아올 때 이곳을 들를 예정이니, 그때까지만 수고해 주십시오.”
주서천이 계산대 위에 올라온 당과를 집어서 베어 물었다.
어깨에는 필수품과 식량이 들어간 배낭이 있었다.
점원이 배낭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바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아마 질풍십객이 오는데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가 좀 그렇기도 하고, 볼일도 없거든요. 덕분에 편히 쉬다 갑니다.”
삼 일 동안 거의 잠만 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피로가 싹 풀리고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등에 업은 뿔을 빼앗기거나 누가 볼 것 같아 그동안 심적으로 알게 모르게 부담된 모양이었다.
그렇게 신경쓰던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화경에 오른 겸, 깊은 잠도 자서 기분이 좋았다.
* * *
중원에서 대설산(大雪山)이란 건, 곧 서장 남부의 주목랑마(珠穆朗馮 : 에베레스트 산)를 의미하기도 한다.
운남 최북단의 덕굉에서 서쪽으로 곧장 가면 나오는 이 산은 세계의 지붕이라 부를 정도로 높다.
서장은 고원(高原)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고원 주변은 습곡 산맥으로 뻗어 있다.
이 천 장(丈 : 6660미터)을 가뿐히 넘고 그 위에 만년설이 내려앉은 봉우리들은 하늘을 찔렀다.
이가 시릴 정도로의 추위와 더불어 눈발이 홑날리는 설풍은 사람의 접근을 불허하였다.
그리고 그 대설산에, 중원인이 찾아왔다.
“뭐야, 별로 안 춥네. 괜히 입고 왔잖아.”
주서천이 허연 김을 내뱉었다.
평소에 입고 다니던 도복 위에는 곰의 외피로 제작한 방한의를 덮었다.
서장에 들어가기 전, 포목점에서 대설산의 추위를 경고해 주면서 방한의를 건네줬다.
친절을 무시할 수 없었고 혹시 몰라서 걸치긴 했다.
하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전혀 춥지 않았다.
“바람이 조금 불긴 하지만, 산책하기 딱 좋은데.”
미친 소리다.
확실히 바람은 대설산의 기후치곤 잔잔했다.
그러나 바람에 실린 한기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북해처럼 사계절 내내 겨울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균 기온은 낮은 편이었다.
대설산은 고도가 워낙 높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
높은 곳으로 등반할수록 북해와 다를 것 없었다.
이제 막 대설산에 진입하는지라 덜 추운 것은 확실하다.
물론 계절도 겨울이 아니니 얼어 죽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방한의에 대한 고마움을 저버릴 정도로의 기온은 결코 아니었다.
인근이 따스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서천의 감각이 마비된 것도 아니다.
한서불침이라 그렇다.
“이게 대자연인가. 나라는 것이 얼마나 자그마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는구나.”
주서천이 뒷짐을 쥐고 대설산을 지켜봤다.
두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밖에 되지 않는다.
좋아. 올라 볼까.
강풍이 불어 머리를 매만지고 지나갔다.
“천년설삼은 대설산 정상 근처에서 발견되는 시체들 주변에 묻어 있었다고 했었지. 갈 길이 멀군.”
등반은 이제 막 시작됐다.
눈 위로 발을 내디디니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봉우리 중 제일 높은 곳을 향해서 걸었다.
바람이 불기는 했으나 강하지는 않았다.
“응?”
한 시진 정도를 걸었을까, 눈 속에 파묻힌 시체 몇 구가 보였다.
뼈만 남거나, 혹은 추운 날씨 탓에 반쯤만 부패하거나 완전히 얼어붙은 시체 등 가지각색이었다.
공통된 것이 있다면 다들 이 광활하기만 한 눈더미 위에서 목숨을.잃었다는 점이다.
‘저들은 무슨 연유로 이곳에 온 것일까?’
대설산에서 살고 있는 생명체는 몇 없다.
이곳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설산 초입이나 그 아래 고원에 동물이나 식물이 있으니 사냥을 위함이라면 여기에 올 이유가 없었다.
호기심에 그 의외의 이유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 상념이 어떠한 신음소리에 의하여 깨졌다.
“끄으으으으!”
똥 누려고 힘을 주는 소리인가? 아니다.
“현실 부정하지 말자. 나 외에 누군가가 대설산을 등반하는 것 같은데, 그리 썩 좋은 소식은 아니지.”
주서천이 체중을 줄여 가면서 조용히 걸었다.
기척을 최대한 숨기고, 호흡도 느리게 했다.
소리가 들려올 정도라면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뜻이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레 이동했다.
위로 오르기를 잠깐.
얼마 가지 않아 중턱에 엎드려 있는 사람 한 명이 눈에 밟혔다.
청각에 집중하니 숨소리와 심장 박동도 들렸다.
그 소리가 미세하긴 했으나,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엮이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대설산, 그것도 초입도 아닌 중간에서 발견됐다.
여기에 올 수 있는 것 자체가 보통이 아니라는 증거다.
저런 자를 구하게 된다면 대체로 무언가 일에 휘말리게 된다.
강호 무림이 보통 그런 동네다.
“차라리 안 봤으면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투덜거리면서도 이미 정신을 잃은 것 같은 행인에게 다가가서 발로 툭툭 건드려 봤다.
반응이 없다.
무기를 숨기고 기습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행인을 들어 등에 업었다.
“젠장.”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욕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