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금적금왕(摘賊摘王)
적림십팔채는 원래 중경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육 년 전의 일로 변화가 생겼다.
삼안신투의 비고가 발견되면서 온 무림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문제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적림십팔채가 중경이 앞마당이라 할지라도 그 많은 무림인을 상대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결국 별수 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도적질을 잠시 멈추곤 산채나 수채에 틀어박혔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동안 도적질한 것이 남아 딱히 걱정할 건 없었다는 점이었다.
십팔채주들은 창고를 열어 개인 자산까지 털어야 한다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하들을 먹여 살리고 제어할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반년이나 일 년 정도만 참자……”
그러나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지 깨닫게 됐다.
비고 탐사는 무려 이 년까지 이어졌다.
상당한 재물과 식량이 소모됐다.
배를 굶어야 할 정도로 부족한 건 아니었다.
불만인 건 줄어든 재산이었다.
적림십팔채는 무림맹과 사도천이 철수하자마자 다시 도적질로 돌아갔다.
무려 이 년 동안 얌전히 산채나, 수채에 틀어박혀 있던 탓이었는지, 그 반동으로 도적질이 활발해졌다.
“캬하하핫!”
“얘들아, 죄다 쓸어버려라!”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범해라!
그동안 쌓인 불만과 폭력, 가학심을 풀기 위해 날뛰었다.
가끔은 통행세를 내도 그냥 죽여 버렸다.
“그동안 네놈들에게 들어간 밥값이 얼마인지 아느냐?”
“좀 더 무리해도 상관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좀 더 많은 재물을 약탈해 와!”
“너희 때문에 흥이 깨졌으니, 책임져!”
열여덟 명의 채주들은 눈에 띄게 줄어든 금은보화를 채워 넣기 위해 수하들을 채찍질했다.
드르륵.
마차의 바퀴가 굴러간다.
지평선 너머에서 먼지구름을 이끌고 오는 일련의 무리가 보였다.
금의상단의 수송 행렬이다.
“으하암.”
주서천은 마차 지붕 위에 누워 하품을 내뱉었다.
마차가 거칠게 흔들림에도 침상 위에 올라온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심지어 짧게나마 수면까지 취했다.
호위 무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신기한 듯이 힐끗힐끗 살펴봤다.
“고수라고 하더니 진짜로군.”
범인 중에서도 운동 신경이 좋으면 마차 위에 떨어지지 않고 누워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저렇게 미동도 하지 않고 편안히 누워서 한 시진, 두 시진 정도 있는 건 불가능했다.
“겉모습이 어떻건 간에 화산파의 제자가 아닌가.”
화산파의 제자라도 어리면 무시를 당한다.
하지만 청년이 돼서 강호무림에 나오면 좀 다르게 본다.
대부분의 대문파에서 제자들을 일정한 무위에 올랐을 때 강호에 내보내는 건 상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 수준이면 중소 문파, 삼류나 이류 무사들 입장에선 고수다.
“대인께서 성함이 뭐라고 하셨지?”
“이 우둔한 놈아. 주서천 대인이시다.”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한때 화산파와 제갈세가를 분노케했던 일의 주인공이지만, 그것도 어언 육 년이나 지났다.
직후 일어난 삼안신투의 비고가 워낙 화제였던 탓에 주서천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있어 봤자 직접적으로 연결된 관계자들 뿐이었다.
“구파일방의 제자가 대단한 건 알지만 상단주께서 극진하게 대하라는 것이 당최 이해가 안 가는군그래.”
최후위에서 따라오는 호위 무사가 중얼거렸다.
연신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산파가 원래 상단주께서 상단초 때부터 꾸준히 교류하던 곳이 아니던가. 아마 후견인이나, 혹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분의 제자가 아닐까 싶네.”
바로 옆 마부석에 앉은 상인이 의문에 답해 줬다.
“그래도 이유를 막론하고 어떠한 명령이건 따르라니……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원래 상단주님께서 뭐 얻어 낼 상대에겐 아부…… 크흐흠. 극진하게 대하시지 않나. 그뿐일세.”
상인이 중간에서 말을 황급히 바꿨다.
누가 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렸다.
“어차피 곧 있으면 사천으로 넘어가니……”
“멈추시오!”
상인의 말이 중간에 뚝 끊겼다.
히히히힝.
선두를 달리던 말이 투레질과 함께 멈춘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오던 세 대의 마차도 따라 멈췄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호위 무사가 고삐를 돌리려 했다.
“금의무사들은 화물에서 눈을 떼지 말고 제자리를 지키도록!”
일행에게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우선해서 들어야할 실권자였다.
어느새 마차 지붕에서 내려온 주서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슥 둘러봤다.
가지가 곧게 뻗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한 수풀을 이루고, 항상 성가시게 굴던 소동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금의무사들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자세를 바꿨다.
크하하하!
수풀 속에서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목소리 자체만으로는 나쁘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호랑했다.
“이제 곧 습격하려 했건만, 그 전에 눈치를 채다니 감이 제법 좋은 놈이로구나!”
수풀 사이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선두에 있던 상인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 뒤에 있던 상인들도 너무 놀라 숨을 멈췄다.
길가에 멈춰 선 마차 행렬들을 중심으로 수풀에서부터 험상궂은 남자들이 나와 둘러싸기 시작했다.
각자 검, 칼, 도끼 등 병장기를 꼬나 쥐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띈 건 녹의(綠衣)와 한구석에 새겨진 ‘녹림’이라는 글이었다.
“녹림도!”
스르릉!
금의무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돗 동시에 검을 뽑았다.
“이름을 댈 기회를 주마!”
“주서천.”
“어린데도 그 오만방자한 태도, 보아하니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로군! 소속이 어디냐!”
“화산.”
주서천이 팔을 들어 소매 안쪽의 매화를 보였다.
“화산의 검수인가! 호, 상대로서 부족하지 않군. 그리고 또 이름을 댈 자가 어디 있느냐?”
녹림도가 일행을 슥 둘러봤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이름을 댈 자가 너 혼자 뿐이냐?”
녹림도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너희를 상대하는데 나 혼자면 충분하다.”
주서천이 구파일방의 오만방자한 애송이처럼 말했다.
“으하하하!”
“하하하!”
일행을 에워싼 녹림도들이 웃기 시작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화산의 제자라면 확실히 일류 정도는 되겠지만, 너 혼자로 이 많은 인원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녹림도가 피식 웃으면서 왼손을 들었다.
그러자 수풀 사이를 헤치면서 녹림 무리들이 튀어나왔다.
대충 인원을 세어도 삼십에서 사십은 되는 듯했다.
딱 두 배다.
“뭐, 뭐 이렇게 많아?”
금의무사들이 당황한 듯 주춤거렸다.
“당황하지 마시오. 딱 봐도 숫자불리기요.
아마 대부분이 삼류고, 그 이상 되는 놈들은 적을 거요.”
주서천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주변을 진정시키려 했다.
“미친놈!”
녹림도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거기 살만 뒤룩뒤룩 찐 돼지들까지 지켜 가면서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그 손가락이 마부석에 앉은 상인들로 향했다.
히익!
상인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들이 죽을 거라는 생각에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말이 좀 많구나. 내 경험상 넌 이야기에 흐름에 필요하긴 하지만, 그다지 썩 강할 것 같지는 않은 산적 나부랭이가 틀림없다.”
주서천이 목을 빙그르르 돌렸다.
‘뚜두둑’ 하고 듣기만 해도 시원한 소리가 났다.
“아까부터 대체 뭔 터무니없는 헛소리……”
“간다.”
다리를 살짝 굽히면서 힘을 모았다.
배꼽 아래에서 내공이 용솟음치면서 다리 전체를 두른다.
“모두, 자리를 지키고……”
빠지직!
발이 빨려 들어가듯이 움푹 들어간다.
밟고 있는 지면에 균열이 가며 심상치 않은 기가 방출됐다.
몸을 잔뜩 웅크린 그는 이윽고 몸을 활짝 피며 순식간에 튕겨 나갔다.
“헉!”
방금 전까지 실컷 떠들던 녹림도가 기겁했다.
눈을 껌뻑 뜨니 주서천이 사라졌다가 코앞에 나타났다.
“이게 뭔……”
“뭐긴 뭐야, 고수지!”
주서천이 실없는 농을 던지면서 검을 휘두른다.
허공에 번쩍, 하고 수평선이 그어졌다.
“커헉!”
녹림도가 목을 붙잡고 눈을 부릅떴다.
욕설을 내뱉으려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려고 손짓을 하려는 순간,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면서 뒤로 고꾸라졌다.
“……”
주변이 침묵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들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리를 지키시오.”
주서천이 일행들에게 재차 말했다.
“보아하니 대부분이 삼류, 그 외에 이류 조금인가.”
손목과 함께 검을 빙그르르 돌려 다시 잡는다.
“대충 삼십하고도 오륙 정도……”
검에 내공을 불어 넣는다.
그 양이 상당해 눈에 언뜻 보일 정도였다.
푸르스름한 아지랑이가 일렁인다.
검기(劍氣)다.
“고, 고수?”
녹림도가 검기를 보고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고수라 불리려면 적어도 절정의 경지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검기는 절정부터 쓸 수 있는 기술이다.
“일각(一刻).”
주서천의 몸이 흐릿해졌다.
“끄악!”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한 녹림도가 가슴에 꿰뚫린 구멍을 부여잡으면서 비명을 흘렸다.
“제, 젠장!”
혼비백산하던 녹림도들이 그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혼자다!”
여전히 반쯤 넋을 잃은 얼굴로 손에 쥔 병장기를 들고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질렀다.
“쳐라!”
“죽여!”
“목을 베어 버리자!”
누군가 명령한 것도 아니다.
명령체계가 엉망이었다.
다들 전열도 가다듬지 않은 채 돌격했다.
근접해 있던 녹림도 다섯이 덤벼든다.
발걸음만 봐도 수준이 낮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죽엇!”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녹림도가 박도(朴刀)를 휘둘렀다.
‘부웅’ 하고 묵직한 파공음이 나면서 대각선을 그린다.
힘이 제법 실렸지만, 그뿐인 칼질이다.
주서천은 박도를 쥔 녹림도를 지나치면서 검을 휘둘렀다.
“커헉!”
검 끝에서부터 사람을 벤 감각이 손에 느껴진다.
살을 둘로 가르면서 단단한 뼈까지 절삭되는 것이 무심코 회귀 이전의 전장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네 이놈!”
나머지 네 명이 정면에서 몸을 날려 왔다.
기본적인 전법 하나조차 갖추지 않은 오합지졸이었다.
주서천은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정면에서 달려드는 녹림도 사이를 지나쳤다.
파바밧!
그냥 지나간 것만은 아니었다.
검을 재빠르게 휘둘렀다.
다만 너무 빨라 눈으로 좇을 수 없었다.
“컥!”
“아악!”
푸슈슈슛!
검이 지나간 곳에 상처가 남았다.
상처가 크게 벌어지면서 피가 뿜어져 나와 안개를 만들어 냈다.
네 명 전부 별 공격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쓰러졌다.
“조심하십시오, 대인!”
금의무사 중 누군가가 경고했다.
“늦었다!”
휘리릭!
녹림도의 손에서 도끼가 떠나갔다.
양날로 된 도끼는 공중에서 화려하게 회전하면서 주서천의 후두부를 노렸다.
“흐음!”
몸을 뒤로 획 돌린다.
동시에 왼손을 들어 날아오는 도끼를 손쉽게 낚아챘다.
“잔재주!”
어깨를 뒤로 젖힌다.
근육에 힘이 들어가 뻣뺏해졌다.
왼팔의 근육이 울긋불긋해졌다.
쐐액!
주서천이 왼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손에 쥐고 있던 도끼가 떠나는 속도는 빛과 같았다.
휘리릭!
도끼가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공기를 찢어 갈랐다.
사나운 기세로 날아간 도끼가 원주인에게 돌아가 머리를 노렸다.
퍼억!
도끼에 실린 내공이 보통이 아니었다.
머리에 닿자마자 수박처럼 터뜨리며 피와 뇌수가 튀었다.
주서천이 다시 몸을 날렸다.
당황하는 녹림도들 사이에 뛰어들었다.
“이 자식!”
덩치가 큰 녹림도가 창을 앞으로 쭉 뻗어 정면을 향해 찌른다.
나름대로 매서운 공격이었다.
그러나 주서천의 눈에는 그 공격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게 보였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인식됐다.
좌로 일 보 내디뎌 피한다.
창이 허리 옆을 지나갔다.
“이런 젠……”
서걱!
말을 잇기 전에 주서천의 검이 녹림도의 목을 베었다.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바닥을 구른다.
“일, 이, 삼, 사…… 구, 십.”
눈에 들어오는 녹림도의 숫자를 세어 본다.
그리고 공간을 접듯이 이동해 검무(劍舞)를 보였다.
“히, 히이익!”
녹림도의 사기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눈앞에서 보인 압도적인 무력에 다들 새하얗게 질렸다.
주서천이 목표로 삼은 녹림도 사이에서 폭풍우처럼 몰아친다.
“일(一).”
검을 휘둘러 수직선을 그었다.
정면에서 수세식(守勢式)을 취하려던 녹림도가 장작처럼 쪼개졌다.
그다음 행동이 곧장 이어진다.
물흐르듯이 검의 연계를 똑똑히 보여줬다.
두 번째, 세 번째…… 여섯 번째
녹림도가 눈 깜짝할 사이에 피를 흩뿌리면서 쓰러졌다.
마치 추풍낙엽과도 같았다.
“저게 정말로 절정이라고?”
누군가가 믿기지 않는 듯 소리쳤다.
“음 눈썰미가 좋군.”
주서천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녹림도가 맞췄다.
그는 절정의 경지가 아닌, 초절정의 경지였다.
“그런데 내가 강하게 느껴지는 건 너희가 약해서 그래.”
녹림도, 나아가 적림도의 영향은 사실상 중경밖에 없다. 세력이 또
그렇게까지 강한 건 아니다.
숫자가 많고, 힘의 균형 등이 있어 대놓고 토벌하지 못할 뿐이었다.
고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채주나 그 주변의 측근 일부이지 그외에는 형편없다.
숫자가 좀 많은 것 정도다.
“칠, 팔, 구, 십!”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파앙!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에서 공기가 터져 나갔다.
둥근 원형으로 기파(氣波)가 남았다.
“오, 오지 마!”
녹림도 칠(七)이 몸을 돌렸다.
어리석은 짓이다.
뒤에서부터 허리를 베어 상체와 하체를 분리시켰다.
팔(八)이 눈을 질끈 감으며 검을 세워 막으려 했다.
그대로 검과 함께 목을 뎅겅 잘랐다.
구(九)와 십(十)이 자포자기한 듯이 절망이 깔린 낯짝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눈을 껌뻑 뜨니 피를 흩뿌리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일각…… 덜 되나.”
주서천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면서 중얼거렸다.
“으, 으아악!”
“도망쳐!”
아직 이십이 조금 넘는 녹림도들이 전의를 잃었다.
전부 혼비백산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허.”
금의무사들이 넋을 잃었다.
겁에 잔뜩 질렸던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보자……”
녹림도들이 급하게 도망치면서 몇몇은 무기까지 내던졌다.
그중에는 활과 화살통도 섞여 있었다.
주서천은 활과 화살통을 들었다.
“길을 따라 사천 방향으로 먼저 가도록 하시오. 녹림도가 또 따라오지 않도록 손 좀 쓰고 오겠소.”
“대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하려면 기니 군말 없이 따라주시오.”
주서천이 녹림도가 도망친 방향으로 뛰었다.
* * *
방금 전 길목 인근에는 산이 있다.
녹림도가 어디에 있을지는 뻔했다.
원래 이 인근에는 산채 같은 건 없었다.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나타날 때마다 화산파에게 토벌됐다.
그러나 이번에 영역을 확장하게 되면서 새로이 건설됐다.
이 길목을 중경에서부터 왕복하기에는 너무 먼거리였다.
재물의 보관을 위해서라도 진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도망치는 녹림도를 놓아 줬다.
확실히 생각대로였다.
흔적을 따라가니 산채가 보였다.
“인기척이 생각보다 많은데……?”
지금 당장 눈에 들어오는 건 사십 정도였다.
산채 중앙에 모여 떠드는 것이 보였다.
그중 반절이 방금 전에 놓아주었던 녹림도들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아.”
나머지 반절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무언가가 떠올랐다.
시위에 건 화살에 주입한 양기를 되돌렸다.
일월신궁은 사성.
삼성과 사성에서 각각 양기와 음기를 주입해서 약간이나마 쓸 수 있다.
그래서 삼성의 양기로 산채에 불을 내 손쉽게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됐다.
“그런가.”
주서천이 시위를 놓았다.
쐐애액!
화살이 유성처럼 긴 궤적을 남겼다.
깨끗한 일직선을 그려 내며 앞으로 뻗었다.
일 리나 되는 거리 밖.
망루 위에 서 있던 자가 목에 박힌 화살을 붙잡고 절명했다.
주서천이 다시 시위에 화살을 건다.
아직도 녹림도들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휙! 휙!
“컥!”
망루 위에 서 있던 녹림도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화살은 전부 목이나 심장에 박혔다.
백발백중의 활솜씨였다.
화살통을 더듬어 보니 여섯 개가 잡혔다.
이제 슬슬 움직이기로 했다.
일 리 바깥에서 숨죽인 채 저격만 하던 건 끝났다.
수풀 사이에 튀어나와 산채로 달렸다.
암향표를 펼친 덕에 그 속도는 번개같이 빨랐다.
‘일단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
삼십육계(三十六計) 공전계(攻戰計) 십팔계(十八計)에는 금적금왕(摘賊摘王)이라는 계책이 있다.
적을 칠 때는 대장부터 잡으라는 뜻이다.
병법에서 볼 때 적장을 잡으면 지휘관을 잃어 대개는 우왕좌왕하면서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었다.
불과 반 시진 정도 전, 금의상단을 보호하면서 싸울 때도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부터 처리했다.
그 효과는 확실했다.
지휘 체계가 엉망이 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사실, 자신의 실력과 적군을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습격해도 이긴다.
‘분명 안에 사람들이 갇혀 있을 거야.’
여자를 납치해 범하거나, 혹은 어린아이나 노인을 인신매매의 목적으로 가둬 두는 일은 흔하다.
그래서 화공(火攻)도 관두고, 인질들을 생각할 수 없도록 경계병을 처리한 다음 우두머리를 노렸다.
쐐액!
첫 번째 화살이 떠났다.
여전히 아름다울 정도로 깨끗한 선을 그리면서 쏘아져 나갔다.
“컥!”
도망쳐 온 녹림도들에게 보고를 받던 녹림도가 눈을 부릅떴다.
심장이 있는 위치에 화살이 꽂혔다.
“습격이다!”
그제야 녹림도들이 반응을 보였다.
“일단 활 쏘는 녀석부터 찾……”
“꽥!”
명령을 내리던 자의 목이 꺾이듯이 뒤로 젖혀졌다.
이마 정중앙에 화살이 박혔다.
“아니, 도대체 어디서……!”
다른 녹림도가 주변을 황급히 둘러봤다.
퍽!
“악!”
말을 꺼내면 죽는다.
아니, 정확히 말해선 이성적인 사고방식으로 멀쩡한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죽었다.
세 번째 화살까지 제 역할을 끝냈다.
“저기다!”
녹림도 중 하나가 망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주서천이 서서 시위에 화살을 걸고 있었다.
“저, 저 녀석은!”
녹림도의 반절 정도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자신에게서 도망친 자들이었다.
“궁술에 좋은 경험이 되겠구나.”
움직이는 표적은 동물 외에는 맞춰본 적이 없다.
좋은 연습 상대였다.
“뭐하고 있어! 활잡이부터 쳐라…… 켁!”
네 번째 화살이 명치를 꿰뚫었다.
휙!
주서천이 망루에서 뛰어내렸다.
동시에 시위를 당겼다.
이번엔 화살 두 개가 동시에 쏘아져 나갔다.
“컥” “윽!”
이번엔 무작위였다.
그냥 눈에 보이는 녹림도 둘의 목숨을 끊었다.
“놈의 화살이 떨어졌다! 죽여라!”
방금 전까지 당황하고 있던 녹림도들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 그만둬!”
주서천의 무력에 대해 알고 있는 녹림도가 뒤늦게 경고했다.
하지만 말을 꺼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타앗!
또 하나의 화살이 쏘아졌다.
정말로 화살은 아니고 주서천의 몸이었다.
외날 도끼를 든 녹림도가 공격했지만 도끼째로 가슴을 베어 갈랐다.
“어?”
그게 시작이었다.
녹림도 입장에서 지옥이 펼쳐졌다.
주서천은 보법을 펼쳐 녹림도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펼쳤다.
십초식을 채 펼칠 필요도 없었다.
팔초식인 매화혈우가 나왔을 때 쯤 이십 명째가 죽었다.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고, 비명이 난무했다.
매화를 담은 검이 번쩍일 때마다 누군가 죽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살려 주십시오, 대협!”
결국 살아남은 자들이 백기를 들었다.
손에 쥔 병장기를 떨어뜨리면서 지면에 이마를 박았다.
그들은 일찍이 주서천의 무위를 봤다가, 전의를 상실하고 덤벼들지 않았다.
그 숫자가 열다섯이다.
“살려달라고?”
“뭐든지 하겠습니다!”
눈곱 정도 고민해 봤다.
“안 돼!”
강호에서 적을 살려 둘 경우 좋은 경우는 많이 못 봤다.
특히 녹림도, .산적들은 더더욱 그렇다.
“개과천선 하겠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산적이 된 농민들이라면 또 모른다.
그들은 도적질은 해도 사람을 잘 죽이려 하지 않는다.
또 살 만해지면 다시 농업에 힘썼다.
그러나 녹림도, 나아가 적림도는 그 경우와 다르다.
그들 대부분은 원해서 산적이나 수적이 됐다.
누군가를 억지로 범하고, 약탈하고, 살인해도 문제없는 것을 즐겼다.
놓아줘 봤자 뭘 할지 뻔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앞의 놈들은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정말로 개과천선할 건가?”
“예, 그렇습니다! 천지신명에 맹세코!”
“그래, 다음 생에 내가 확인해 주마!”
“크아악!”
* * *
녹림도 중 다섯 명만 제외하고 전부 죽였다.
네 명은 포박했고, 한 명은 양팔을 부러뜨리고 길 안내를 시켰다.
사람들을 감금하고 있지 않냐고 물어봤는데, 예상대로였다.
녹림도가 울먹이면서 감옥으로 안내해 줬다.
“히, 히이익!”
감옥에 가니 사람들이 오십여 명 정도 있었다.
대부분이 여성이나 어린아이, 노인뿐이었다.
다들 겁먹은 채 구석에 틀어박혀 벌벌 떨었다.
“괜찮습니다. 나오십시오.”
주서천이 감옥문을 열어 주면서 안심시켰다.
“구하러 왔습니다. 화산파의 제자입니다.”
“으허엉!”
화산파의 제자라는 걸 알려 주자마자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쌓인 공포와 슬픔이 느껴졌다.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자 참상이 보였다.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눈을 대신 가려 줬다.
그러나 그 누구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하나같이 증오로 가득한 눈길이었다.
“구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대협.”
감금된 사람들 중 대표로 보이는 노인이 나와 인사했다.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로 눈물이 뚝뚝 홀렀다.
“별거 아닙니다. 저놈들은 알아서 하십시오. 사지를 전부 부러뜨렸으니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이 사람들이 감금된 동안 어떤 수모와 괴롭힘을 당했을지는 대충 상상이 간다.
그래서 그 증오와 분노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다.
“히, 히이익!”
살아남은 녹림도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들은 사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아까 보니 감옥 근처에 창고가 있더군요. 거기에 돈 좀 있을 터이니 마을로 돌아가는 데 쓰십시오.”
“아니, 대협. 은인에게 어떻게 그런 염치없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저희는 이미 너무 많은 빚을……”
보통 산적들을 토벌하면 거기에서 나온 재물들은 무림인들이 전부 가져간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어차피 주인을 찾아 줄 수도 없을 뿐더러, 무림인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목숨도 건지지 못했을 테니까.
“괜찮습니다. 도사라서 재욕을 가지면 벌 받습니다.”
사실 돈이 많아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뿐이다.
“흐으윽, 정말로 감사합니다 부디 이름이라도 알려 주시겠습니까?”
“주서천. 화산파의 제자, 주서천입니다.”